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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공감

오행의 기원과 사주에 대한 내 멋대로의 생각 (10)

작성자oneof0|작성시간21.07.25|조회수390 목록 댓글 1

  선운은 사주 해석을 오행과 육신(六神)으로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육친(六親)이라는 것이 있다고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다. 육신 이전의 구 모델이 육친인가?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해석하는 영역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육친은 나를 중심으로 인척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모델이다. “외할머니가 미인이셨네!”, “고조할아버지가 인품이 좋으셨네!” 등. 다만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선운닷컴에서도 개설 후 수강자가 딱 1명이라고 한다. 이런 걸 왜 만들었지?

 

  세상에 그냥 만들어진 것은 없다. 반드시 시작에는 절박한 이유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육친이 만들어진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즈음은 자녀가 1~2명이 대세이다. 촌수가 잘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삼촌이나 이모도 없어진다. 촌수는 대가족 체제에서 필요하다. 그러나 대가족 체제라고해서 육친이라는 해석도구가 반드시 필요했을까? 그렇지도 않은 거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다다른 곳은... ‘남존여비’, ‘가문’, ‘중매’, ‘열녀’ 등등. 일단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육친이 필요했던 시기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남녀가 유별하지는 않았다. ‘남녀상열지사’라는 말까지 써가며, 고려시대를 차별화 했던 조선시대가 그 주 무대였을 것이다. 유교적 안목이 사회를 지배하고, 가문이 중요하고, 대를 잇는 것이 절대적이었으며, 남녀가 어울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시대였다. 대를 잇기 위해서 며느리를 들여야 하고, 사위를 봐야 한다. 뭘로 봐야 하지? 이 때 가려웠던 구석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던 것이 육친이었을 것이다. 신랑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해야 하고, 사주단자 교환만으로 상대를 맞아들여야 하며, 중매쟁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만으로 상대를 상상 해야 했을 터이니. 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집안의 멸문지화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모로 몰리게 되면 3족이 멸문당하는 화를 입게 된다. 연좌제로 얽히게 되는 것도 문제다. 김삿갓이 괜히 나왔겠는가. 연좌제나 연대보증과 같은 제도가 없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비대면 접촉. 육친은 직접적인 만남이나 사귐이 없더라도 사주팔자로써 상대의 패를 짐작하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그 시절에는 얼마나 요긴했을까.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친이 활발히 사용되었던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조선의 개국공신들이 고려 왕실을 한양에서 뒤엎었다고 해서 바로 고려 사회가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은 풍습의 막강한 관성에 의해 한 동안은 고려 백성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종식되고 나서야 비로소 여자에게는 상속분을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하고 200년이 지난 시점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조선이 일제에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에도 조선시대의 관혼상제가 한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일종의 성년식인 관례는 가장 먼저 사라졌지만, 혼례/상례/제례는 지금도 반쯤은 살아있다. 아마도 한 세대쯤은 더 지나야 사라질 듯하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도 100년이 지난 시점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 300년 동안은 활발히 육친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 100년, 일제 30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50년 동안은 어느 정도 이상은 사용되었을 것으로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의 세대에서는 육친이 절실히 사용될 당위성은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만남과 세대 간의 개별화가 뚜렷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육친은 사라질 것이다. 그냥 ‘심심풀이 땅콩’ 이상의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 (11)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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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절물사려니 | 작성시간 21.11.06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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