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은 자신의 권리는 내려놓고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의 이익을 대변하려 든다는 의미이다. 겁재의 생을 받고 정관을 극했으니 내 권리 반납이다. 내게 닥친 불평 부당한 사안들을 용인하며 살아가는 형상이다. 오히려 가족이나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더 채워 주려 한다. 타인을 위한 대행자이다.
상관이 정재를 생하는 상관생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경제 활동’이다. 집안의 가장됨을 의미한다. 내가 속한 집안도 힘든 집안이다. 집안의 지원, 배우자의 지원에 대한 생각은 접어야 한다. 부모가 챙겨주지 못해도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 가족보다 직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유대관계에 더 끌린다. 정작 내편이 누구인지를 모르니 이용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외부 환경에 내가 휘둘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상관이 정재를 생하면 정재는 다시 정인으로부터 상관을 보호해 준다. 재극인을 해서 상관이 정인으로부터 극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상관은 정인으로 제압할 수 있다. 상관생재하지 못하고 정인이 왕하면 상관패인으로 해석한다. 상관과 정인이 둘 다 왕해도 상관패인으로 해석하고, 정인이 지나치게 왕해서 상관을 완전히 극해버리면 상관상진으로 해석한다.
‘상관패인’이란 암행어사가 마패를 허리에 차고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제대로 인정된 공권력으로서의 암행어사 모습은 기존 정관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활력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암행어사가 되기가 그리 쉬운가. 십중팔구는 실업자다. 영조의 신임아래 어사를 제수 받았으니, 확실한 정인의 눈도장이 작용했고, 박문수의 상관기질은 잘못된 정관을 제대로 견관하게 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박문수 개인적인 입장은 관직생활이 순탄하지 못했고 끝내는 유배까지 당하는 상관상진의 모습으로 마무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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