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은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끌어들여 내 곁에 두려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기대기보다 내 의도대로 따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잘난 자식 더 챙겨주려는 마음이다.
정인은 일간을 생하니 자신을 사랑할 줄 알며, 물질적 행복을 추구한다. 타인에 무관심하다. 자신의 자질을 열심히 닦고 진정한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다. 독자 생존에 능하다. 정인이 일간이나 비견을 생하는 것은 육신 고유의 특징이다. 그러나 상생상극의 논리에서 보면 정인은 겁재를 생하여야 맞다. 여기서 꼬이는 것이다. 다른 육신의 상생상극과는 다르게 인성과 비겁의 상생상극과 육신의 특성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틀린 것은 없다. 단지 여기서의 육신의 모습이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을 뿐이다.
정인이 생하는 일간이란 자기 자신일수도 있고 자신이 생하는 자식의 일간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이라면 자신의 정신적 만족을 확장하는 것이고, 자식의 일간이라면 자식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기부자로 해석되는 것이다. 자식의 일간이니 정인의 입장에서는 겁재로 읽혀지는 형상인 것이다. 그래서 정인과 겁재의 연결은 연결된 듯 단절된 듯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입맛에 맞게 관계를 하나로 정해 둘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정인이 겁재를 생한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이가 나의 영역에 침범코자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내 소유를 겁재가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단자는 아니니 내 것을 양보해 줘야 할 애인의 형상을 띠고 있는 형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멍청히 앉아서 당하는 것이다.
반대로 겁재가 정인을 본다는 것은 주변의 상황을 무시하고 나의 실속을 차리고자 하는 형상이 된다. 정인이 겁재를 생할 때와는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형상이다. 오히려 더 못 받아서 안달인 것이다. 겁재가 정인을 설하는 상황이라면 내 정보까지도 유출되는 형상이다. 정인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예쁜 자식에게 젖을 물렸더니 너무 심하게 빨아서 내 젖에서 피가 나는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정인이 겁재를 생하면 겁재는 다시 정재로부터 정인을 보호해 준다. 정인도 겁재를 생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생상극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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