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적 행하는 은사들(고전 12:8-10)
1)지혜의 말씀의 은사(wisdom)
성령께서 성도의 감추어진 것들을 은사자에게 계시하심으로써 문제의 근원을 알게 하여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이다
(고전 128; 2;1-13; 행 6:3, 10; 벧후 3;15; 약 1:5-6).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한 것들이기 때문에
계시를 받는 당사자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도 놀라게 된다.
2)지식의 말씀의 은사(knowledge)
그리스도의 몸의 안정과 성장에 필요한 지식, 생각들을 알아내고 그것들을 모으고, 정확하게 분석하는 능력을 말한다
(고전 12:8, 2:14, 행 5:1-11, 골 2:2-3, 고후 11:6).
3)믿음의 은사(faith)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의 계획을 특별한 능력으로 분별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고전 12:9, 행 27:21-24,
롬 4:18-21, 히 11장).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에 대한 조언을 줌으로써
믿음이 담대해지게 하는 은사이다.
4)신유의 은사(healing)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병을 고쳐, 건강을 회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고전 12:9, 28, 행 3:1-10,
5:12-16, 9:32-35, 28:7-10).
5)기적의 은사(miracles)- 능력 행함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자연의 법칙이나 질서를 초월해서 능력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
팔 다리가 길어지거나 치아가 금니 또는 은니로 바뀌는 등의 역사가 일어난다(고전 12;10, 행 19:11, 롬 15:18-19, 고후 12;12).
6)귀신 쫓는 은사(exorcism)
귀신과 악령을 쫓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행 16:16-18, 막 16:17).
7)예언의 은사(prophecy)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를 받아서 거룩한 언어로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능력을 말한다(고전 12:10, 28, 롬 12;16,
엡 4;11-14, 행 15:32, 21:9-11, 눅 7:26).
8)영 분별의 은사(discerning of spirits)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적인 것인지를 분별해 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2:10, 행 5:1-11, 16:16-18, 요일 4:1-6, 마 16:21-23).
9)방언의 은사(tongues)
배우지 않은 생소한 언어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며, 배우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2:10, 28, 14:13-19, 행 2:1-13, 19:1-7, 10:44-46, 막 16:17).
10)방언 통역의 은사(interpretation)
방언으로 이야기 한 사람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은사를 말한다(고전 12:10, 30, 14:13, 26-28).
2.생활의 은사들(롬 12:3-8; 벧전 4:9-11)
일반적은 은사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지만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해 남들보다 더 즐거워하고 더 적극적임을 알 수 있다. 은사가 없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지만 지속적이지 못하다. 그런 반면에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일을 평생 하면서도 싫어하지 않게 된다.
1)손님 대접하는 은사(hospitality).
특별히 집을 제공하고 음식과 쉴 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영접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롬 12:9-13, 16:23,
히 13;1-2, 행 16:15, 벧전 4:9).
2)섬기는 은사(service)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필요한 일을 찾아내어 봉사하고,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채워주며 물질적으로나
자신을 바쳐서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롬 12:7, 행 6:1-7, 딤후 1:16-18, 딛 3:14, 갈 6:2, 10).
3)권면하는 은사(exhortation), 권위의 은사(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에게 위로하고, 권면하고, 격려해 주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도움을 받고 안위를 받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롬 12:8, 딤전 4;13, 히 10:25, 행 14;22).
4)구제하는 은사(giving)
자신의 물질이 나 자원을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기뻐하며 기꺼이 드리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롬 12:8, 고후 8:1-7, 9:2,
막 12;41-44).
5)지도력의 은사(leadership). 다스리는 은사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목표를 세우고 다른 사람과 이 목표에 대해서 잘 토론하고 대화하며 이 목표를 자발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함께 성취하도록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롬 12:8, 행 15:7-11, 딤전 5:17,
히 13:17, 눅 9:51).
6)자비 또는 긍휼의 은사(mercy)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도나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동정과 연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드러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동을 기쁘게 나타내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롬 12:8, 행 11:28-30, 16:33-34, 눅 10:33-35, 막 9:41, 마 20:29-34, 29:34-40).
7)도와주는 은사(helps)
전도 사업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투자해서, 다른 사람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그들의 영적인 은사를 사용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2:28, 롬 16:1-2, 행 9:36, 눅 8:2-3, 막 15:40-41).
8)다스리는 은사(administration)
교회의 특정 기관에서 세운 단기, 장기의 목표를 잘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한 효율적인 계획을
잘 구상하고 실행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2:29, 행 27:11, 6:1-7, 눅 14:28-30).
3.독특한 은사들
1)선교의 은사(missionary)
특별히 자기의 문화권이 아닌 타 문화권(외국)에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9:19-23, 행 22;21,
13:2-3, 8:4, 롬 10:15).
2)독신 생활의 은사(celibacy)
독신으로 머물면서 그 생활을 즐기고 결혼하지 않아도 성적으로 유혹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말한다(고전 7:7-8, 마 19:1-12).
3)중보기도의 은사(intercession)
정기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기도하며 보통 그리스도인보다도 기도에 응답을 많이 받고 특별한 응답을 자주 받는 은사를
말한다(약 5:14-16, 딤전 2;1-2, 골 1:9-12, 4:12-13, 행 12:12, 눅 22:41-44).
4)순교의 은사(martyr)
믿음으로 인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고 그로 인해 고난을 받지만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며 승리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4:3, 행 7:54-60, 12:1-5, 5:27-41, 고후 11:21-30, 12:9-10).
5)자발적 가난의 은사(voluntary poverty)
물질적 안락과 사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특정한 사회의 가난한 사람의 수준으로 생활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3:3).
6)찬양의 은사(praise)
특별히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사를 말한다(신 31:32, 삼상 16:16, 대상 16:41-42, 대하 5:12-13, 시 150).
7)재능의 은사(craftmanship)
예술, 창조 및 여러 가지 건설적인 활동을 통해 몸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출 30:22-25, 31:3-11,
대하 34:9-13, 행 18:2-3).
4.오중 사역 은사/리더쉽 은사들(엡 4:11-13)
1)사도 직분의 은사(apostle)
교회에서 인식하고 있는 영적 문제에 대해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교회 일반 일에 지도력을 발휘하며 교회와 성도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고 감사해야 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고전 12:28, 엡 4:11-14, 3:1-9, 고후 12:12, 행 15:22-35,
갈 2:7-10). 이 은사는 교회를 세우거나 지도자를 양육하는 독특한 은사를 말한다(데이빗 캐니스트러시, ‘사도의 은사’
도서출판 서로사랑을 참조하기 바란다).
2)선지자 직분의 은사(prophet)
사도를 도와서 교회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며, 예언의 은사와 기타 능력 은사(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 및 통역의 은사 등)를 잘 사용하여 성도들의 어려운 문제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일깨우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행 11:27, 13:1, 15:32, 21:10, 고전 12:29, 엡 2:20; 4:11). 이 은사의 부르심도 역시 사도직으로
부르심을 받는 경우와 동일하다.
3)전도자의 은사(evangelist)
특별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교회의 책임 있는 한 사람이 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엡 4:11-14, 행 8:5-6, 26-40, 21:8, 14:21, 딤후 4:5).
4)목회자의 은사(pastor).
흔히 말하는 목사라는 직분과는 다른 은사로써 이를 받은 사람이 믿는 자들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 장기간 개인적인 책임감을 갖고
돌보게 하기 위하여 주는 은사이다(엡 4:11, 딤전 3:1-7, 요 10:1-18, 벧전 5:1-3). 가정교회의 목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5)교사, 가르치는 은사(teaching)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의 사역과 건강에 관련된 지식을 가르침을 통해서 전해주는 능력을 말한다(고전 12:28,
행 18:24-28, 20:20-21, 롬 12:7, 엡 4:10-14).
5.기적 행하는 은사의 분류
기적 행하는 은사를 분류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1)종류에 따른 구분
a)계시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b)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c)능력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2)문맥에 따른 구분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은
“어떤이”(8절),
“다른이”(9절),
“다른이”(10절하)에 의해,
2개ㆍ5개ㆍ2개의 은사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 일부 주석가들은 사도 바울이 ‘다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은사를 구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2개),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의 은사(5개) 및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2개)으로
구분한다. 실제로 보면 2ㆍ5ㆍ2의 은사 모임이 현실의 체험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은사-지혜의말씀
지혜의 말씀(logos sophias)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먼저 개별적으로 살펴본 후 연관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본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란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같은 계시의 은사를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특정한 문제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어떻게 내릴 것인가에 대한 슬기나 지혜를 말한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렵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잘 대처할 수 있는 기지나 슬기를 제공한다. 몇 가지 정의를 보자.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어진 계시(지식의 말씀, 예언)가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어떻게 가장 잘 적용될 것인가, 또한 어떤 주어진 상황이나 필요가 어떻게 해결되거나 도움을 받거나 치유될 것인가에 대한
즉각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해 일부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이다(David Pytches).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인데, 그들은 이를 통해
성령의 마음을 잘 알아서 주어진 지식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필요들을 위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통찰력을 얻는다( C. Peter Wagner).
한편 일부에서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지혜의 말씀은 설교하는 은사,
지식의 말씀은 가르치는 은사로 이해한다. 고린도전서 문맥으로 볼 때, 복음은 세상 지식이나 지혜와 비교하여 훨씬 더 뛰어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기 때문에(고전 2:1-2, 4-5), 이 은사는 지식의 은사와 더불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과
관계된 은사라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이 은사들은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은사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즉 기적행하는 9가지 은사들은 모두 즉흥성, 일시성, 상황성이 강한 은사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력이나 준비를 하여 행하는 설교나 가르침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바비 클린톤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으로 불리는 이 은사들은 은사들이 기록되어 있는 다른 구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 은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이나 이런 은사들을 예증하는 직접적인 구절들도 없다. 몇몇 가능성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 은사는 ‘. . . 의 말씀’이라는 공통적인 구(句)로 인해 기능이
유사하므로 같이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지혜와 지식이란 단어 앞에(원문에는 앞에 있음) 로고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은사들은 성령이 그 순간에 주시는
상황적인 교신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상황을 위해 지식이나 지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말씀’(rehma)을 말한다.”
따라서 클린턴은 지혜의 말씀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혜의 말씀은 주어진 상황에서 성령의 마음을 알고, 그 상황, 사실, 진리 및 상황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실과
진리의 적용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어떤 능력을 말한다.
1.지혜의 원천과 종류
지혜란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웹스터 영어사전』은 지혜를 이렇게 설명한다.
a. 축적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식 :지식
b. 내적 특성과 관계를 분별하는 능력 : 통찰력
c. 훌륭한 분별력: 판단
d. 현명한 태도나 행동
e. 고대 현인들의 가르침.
이응백 『국어대사전』은 지혜가 곧 슬기라고 하는데 슬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①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아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정확하게 가려내는 능력. 지. 지혜
②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재능.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지혜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만은 아니다.
지혜의 종류를 살펴보면,
1)사람의 지혜, 곧 세상 지혜가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지혜, 세상 만사를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세상 지혜 역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지혜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나 세상 일 처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롭지 못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2)마귀의 지혜가 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하는 것처럼 비쳐진다(고전 11:14).
마귀의 지혜도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지만 그 긍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한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을 자신이 잘나서 지혜롭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3)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사모하고 구해야 한다(약 1:5).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마귀가 주는 지혜를 구분하는 방법은 야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약 3:13-18). 마귀가 주는 지혜는
독한 시기, 다툼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도 구분이 필요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며(골 2:3),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이자 지식이며(고전 2:7), 잠언이나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이미 밝혔듯이 다른 기적행하는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즉흥적, 일시적, 상황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의
여러 가지 올무를 지혜롭게 넘기신 예수님처럼,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지혜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위기나 필요한 순간에 사용하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성경의 예를 살펴보면,
a)요셉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의 관리들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기화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 대비책을 제시함으로써
죄인인 노예의 신분에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입었다. 요셉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신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작동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창 41:38-41).
b)솔로몬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허락하셨으며 솔로몬의 지혜는 아들의 친 엄마를 찾아주는 재판에서
절정을 이룬다(왕상 3:16-28).
c)예수님
바리새인과 제사장의 무리들은 걸핏하면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지혜를 발휘하여
슬기롭게 대처해갔음을 알 수 있다. 대적자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 도전하셨을 때(마 21:23-27),
세금 문제로 궁지에 빠뜨리려고 했을 때(마 22:15-22), 예수님은 지혜롭게 대답하심으로써 위기를 모면하셨다.
d)제자들에 대한 당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하셨지만 또한 임박한 핍박을 경고하시면서 그때 대답할 말을 줄 것이니
염려 말라고 하셨다(눅 21:15).
지혜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어떤 유익들을 주는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다.
특히 부정적인 예언, 부정적인 지식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제공해 준다.
둘째로, 치유 사역에 임할 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상황에 따른 올바른 대응 방법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치유 사역의 효과를 높게 한다. 즉 치유될 것인지 치유되지 못할 것인지를 알게 하며, 그 병으로 임종을 맞을 것인지
회개해야 할 것인지 등을 알게 한다.
셋째로,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예언의 말이나 지식의 말씀을 잘 전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같은 말이라도 표현에 따라서 상대방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오해를 일으켜 물의를 빗기도 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방법을 선택하도록 통찰력을 주신다. 넷째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줄 방법을
제공해 준다.
2.임하는 방법
1)말이나 생각으로 오는 경우.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통해 받은 말씀을 제대로 잘 전하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생각이나 말(성경의 구절 포함)로 오는 경우가 많다. 은사자가 사전에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문득 마음 속에
구체적인 내용이 떠오른다(spontaneity 또는 river of flow라고 표현한다). 경험이 부족한 초보 은사자의 경우 이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겨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경험이 쌓일수록 겸손한 마음 가짐을 유지하고 성령께 더욱 의지하여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2)기분이나 느낌으로 오는 경우.
구체적인 말씀(성경의 장 절이 구체적으로 떠오른다)이나 지식(환자에게 안수할 자리를 정하여 주는 경우
또는 그 병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이 전해지지 않고 다만 느낌으로 이러면 되겠구나 하는 보다 막연한 생각이 드는 경우이다.
성령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이 단순한 느낌이라 할지라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 방법은 은사자의 믿음과 주께 대한
헌신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자주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은사를 통해 받은 정보나 예언을 전하려고 할 때 (성령이) 금지하는 것 같은 기분이나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아직 내담자에게 전할 때가 되지 않았거나 직접 전하지 말고 중보기도해야 하는 경우이다.
은사 –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logos gnosis)은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관한 사실들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계시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학문적이거나 어떤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지식
즉 내담자의 문제에 관련된 정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투시의 은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니므로 가급적 사용해서는 안된다.
또한 이미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서 밝혔듯이 이것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환경에 대한 사실을
드러내는 초자연적인 계시인데, 노력을 통해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개별적인 지식으로서 성령이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진리를 드러낸다(David Pytches).
지식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서 이는 몸의 성장과 복지와 관련된
정보와 아이디어들을 찾고, 축적하고, 분석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C. Peter Wagner)
지식의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계시된 지식을 초자연적으로 받는 능력을 말한다
(Bobby Clinton).
1.지식의 원천
3가지 원천 즉 사람, 마귀, 하나님이 있다.
1)인간의 지식(고전 2:14).
학문, 직관, 과학을 통해 얻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도록 한 것이지 성령이 즉시적으로
거저 주도록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기록한다(고전 2:14). 이러한 학문적 지식들은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식의 말씀은 그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특수한 것들이며, 상황이 종료되면 잊혀져야 할 단회적인 정보인 것이다. 일반적인 지식과 지식의 말씀을 구분해야 한다.
2)타락한 세상에 속한 초자연적인 지식. 마귀의 지식
단회적인 정보라 할지라도 그 근원이 마귀에게서 온 것들이 있다. 무당점, 운세, 토정비결, 점성술 등을 말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연약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지식을 사모한다. 마귀는 인간의 이런 욕구를
이용하여 사람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물론 이런 것은 성경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물질문명, 과학화, 산업화, 기계화로 인해 비인간화된 사람들은
더욱 이런 것들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이런 욕구를 채우시기 위해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더욱 초자연적인 은사를 사모하고 권장해야 할 것이다.
3)하나님이 주시는 지식.
진정한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더 가지기 위해 성경 말씀 공부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구체적인 예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a)숨은 사울을 찾아낸 사무엘(삼상 10:22).
사무엘은 사울이 행구 사이에 숨은 사실을 알았다.
b)주의 종에게 미리 기름부은 엘리야(왕상 19:14-18).
하사엘, 예후 및 엘리사에게 미리 기름을 부어 사역자가 되게 했다.
c)아람 왕의 전략을 알아낸 엘리사(왕하 6:9-12).
엘리사는 아람 왕의 모든 전략을 알아내었다. 그러자 엘리사를 치기 위해 아람 왕이 많은 병거와 군사를 보냈으나
엘리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환인 게하시가 두려워하자 그는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 수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방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했다.
d)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아낸 경우.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한 사무엘(삼상 9:19),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아신 예수님(요 2:24).
나다나엘이 간사함이 없고 무화과나무 아래 쉬고 있는 모습까지 보신 예수님(요 1:47-50).).
사마리아 여인의 남성 편력을 알아맞히신 예수님(요 4: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을 알아낸 베드로(행 5:3, 9).
고기의 입에 돈 한 세겔이 있음을 아신 예수님(마 17:27).
시몬의 검은 속마음을 안 베드로(행 8:23).
바울(사울)이 직가에 거주하며 자신이 올 것까지 알고, 주의 사자가 되어 고난을 받을 것까지 알게 된 아나니아(행 9:11-16).
두 사람의 이방인이 찾아올 것을 안 베드로(행 10:17-23).
귀신의 종류를 알아맞힌 예수님(막 9:25).
그러나 때로는 말씀을 주시지 않을 때도 있다.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엘리사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왕하 4:27). 요셉이 팔려간 후에 닥칠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다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니다.
2.임하는 방법
지식의 말씀이 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환상, 꿈이나 말을 통해.
어떤 사람의 신체의 부분을 보거나 어떤 단어나 문장을 보거나 듣기도 한다. 단어나 문장을 보는 것을 영서라고 표현하지만
이것 역시 성경적 표현이 아니다. 이는 환상이나 꿈의 내용일 뿐이므로 환상을 본다는 표현이 맞다.
2)내적 음성이나 세미한 음성을 통해.
마음 속에 어떤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때로는 아주 강하게 받아 마치 실제로 음성을 들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에서부터 아주 희미한 느낌만이 들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경우까지 다양하다.
3)신체에 어떤 감각을 느끼거나 통증을 통해.
환자의 병증이 자신의 몸에 그대로 전달되는 경우이다. 일시적으로 느껴지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여러 날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담자의 심리적 고통을 그대로 느껴 마음이 불안하거나 고민으로 인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의 큰 부담을 계속 느끼는 경우도 있다.
4)갑자기 어떤 능력이 임하는 경우.
손이나 신체의 어떤 부분에 열, 전류 등을 느끼는 경우이다. 온 몸이 화끈거리거나 부분적으로 팔과 다리에 저리고
따끔거리는 느낌이 지속된다.
5)어떤 생각을 통해 그냥 알게 되는 경우.
6)자기도 모르게 어떤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경우.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내용의 말이 절제할 수도 없이 입에서 불쑥 나와 말을 해 놓고는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선포된 말을 주어 담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러한 경우 마음 속에 갑자기 강한 힘이 들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담대해져서 서슴없이 말을 선포하게 된다. 명령의 말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7)기타.
은사자만이 아는 독특한 방법을 통해
지식의 말씀은 사역에서 실제적으로 몇 가지 유익을 준다.
첫째, 상대방의 죄악을 지적하여 회개시킨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통해 그들을 전도하신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회개 촉구와 전도에 유익한 은사이다.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죄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게 된다.
둘째, 상담과 치유 사역에 유익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부끄러워서 본인 스스로 드러내 놓기를 꺼리는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본인도 잘 모르는 유아시절의 사건, 태중의 사건, 조상들의 죄를 알게 해주신다.
이렇게 하는 상담과 치유를 어떤 사람들은 <예언적 기도 & 상담>(prophetic prayer & counseling)이라고 한다.
셋째, 중보기도에 유익하다. 지역의 주된 죄악과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영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다. 오늘날 중보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미리 기도 제목을 주셔서
기도하게 하실 수도 있다(겔 36:37; 행 1:5, 8, 11). 하나님이 기도 제목을 미리 주셔서 구하게 하는 것은 <예언적 기도 또는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prayer or prophetic intercession)라고 한다.
은사-믿음의은사
이 은사는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처했을 때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확신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그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말씀이나 역사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신다는 이성을 초월하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David Pytches).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특별한 확신으로 분별하는 특별한 능력이다(C. Peter Wagner).
믿음의 은사는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것이며 또한 실제로 성취하실 때까지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은사는, 비록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라는 비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기도 즉 믿음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다(Bobby Clinton)
1.믿음의 여러 가지 종류
성경이 말하는 ‘믿는다’는 무슨 뜻인가.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헬라어 피스튜오(πιστεύω, 동사), 피스토스(πιστός, 형용사). 피스티스(πίστις, 명사)인 믿음, 믿는, 믿는다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에 대해 확신을 가지다’ ‘. . .을 신뢰하다’라는 뜻이다.
1)지식적인 동의로서의 믿음
어떤 사실이 진실임을 믿지만 그것에 대한 신뢰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귀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 그 자체는 믿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지는 않는다(약 2:19-20).
2)구원을 얻는 믿음(saving faith)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뿐만 아니라 그분을 나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다(요 20:31, 히 10:39, 마 24:13). 이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것이며 한 순간 가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한다. 중간에 믿음을 저버리면 파선한 믿음이 되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딤전 1:19-20).
3)신자가 가지는 일반적인 믿음
구원 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믿음을 말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신앙의 성숙 여부에 따라 강한 믿음과 연약한 믿음이 있다(롬 14장).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는 의심이 많고 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기 쉬우므로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이 믿음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라가야 하고 성숙되어야 한다(살후 1:3).
4)열매로서의 믿음(갈 5:22-23).
한글 성경에는 충성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pistis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단어는 믿음으로 번역되었지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문맥으로 보아 이웃에 대한 신실성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5)은사로서의 믿음
은사로서의 믿음은 신자라고 해서 모두 다 가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나 필요에 처했을 때 초자연적인
담대한 확신으로 상황이나 필요를 보지 않고 주님이 확실하게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a)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히 11:7).
25년 만에 약속의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
b)초자연적인 보호에 대한 믿음
사자굴 속에서 살아남은 다니엘(단 6:16-17, 19-23).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공급받은 엘리야(왕상 17:2-6).
엘리사의 말을 듣고 기름 담을 그릇을 많이 준비한 선지자 생도의 아내(왕하 4:3, 4).
c)핍박과 고통을 이겨내는 믿음(히 11:36-40)
d)신앙적으로 빗나간 교인들을 담대하게 꾸짖는 믿음
고린도 교인들의 무절제와 부도덕을 담대하게 꾸짖은 바울(고전 4;4, 5).
e)병 낫고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
병이 나은 중풍환자(마 9:2).
혈루병이 나은 여인(마 9:20-22)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친 여인(마 15:22-28)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한 백부장(마 8:5-10)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보면,
1)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
현재 괄목할만한 사역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 중에서는 초창기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본인도 회의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 비전이라는 확신 아래 상황과 사람에게 구해 받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피터 와그너 교수는 믿음의 은사야 말로 지도력의 은사와 함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은사라고 강조한다.
이런 믿음을 가진 지도자들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비전을 갖고 목적지향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확실하다면, 비록 환경이나 상황은 정반대일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낸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이자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홀로 로마교황청을 대적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내게 전 스코틀란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존 낙스 등은
진정 믿음의 은사를 가진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은사는 반드시 이름난 주의 사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미국에 부흥이 오기를 바라면서 수십 년 동안 이름도 없이 기도한 평신도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많다고 한다.
2)초자연적인 보호에 대한 믿음
하나님은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삶에 필요한 물질을 위해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물질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시고 초자연적으로 공급해 주신다.
3)핍박과 고통을 이겨내는 믿음
순교자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장기간 투옥되고 핍박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불신자 배우자를 둔 신자들에게도 어쩌면 믿음의 은사가 필요할 것이다.
4)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
이것은 믿음의 은사 다음에 나오는 신유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은사이기도 하다.
이런 은사군을 구비한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한 것처럼, 집회 중 “어떤 사람의 ____병이 나았습니다”라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선포한다. 그러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많은 경우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케네스 해긴 목사는 소년 때에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을 본 이후부터
이 말씀이 계속 생각났다. 결국 그는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져서 병이 완치되었고, 이후 이 말씀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 받는 믿음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80세가 넘은 지금까지 장수하면서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2.말씀과 성령
그렇다고 병든 모든 사람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간다고 해서 병이 나을까?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일단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러면 해긴 목사는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한 결과 병이 나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치유되지 않는가? (물론 일부 나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해긴 목사가 나은 것은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개별적, 구체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아무리 붙잡고 믿어도 낫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말씀이 해긴 목사에게는 개별화, 구체화되었지만 치유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뮐러는 고아를 돌보라는 야고보서 1:27의 말씀에 감동되어 평생 고아를 돌보는 사역에 종사했다.
조지 뮐러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을 읽었을텐대 왜 굳이 그 사람만 고아 사역에 종사했을까?
물론 감동이 와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 구절을 읽을 때 아, 고아를 돌보아야 되겠구나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을 평생 사역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또한 조지 뮐러는 왜 과부는 놓아두고 고아에만 관심을(이) 가졌을까? 같은 구절에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고아’라는 말씀이 조지 뮐러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 보수 신학에서는 정확 무오한 성경 말씀을 기록한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감동(inspiration)(딤후 3:16; 벧후 1:21)
이라 하고,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비침 또는 조명(illumination)(고전 2:10, 14)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성령의 감동(전문적인 의미)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말씀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항상 감동
―이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을 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때에 따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을 일깨워주고 깨닫게
해주신다.
또한 감동을 받고 깨달은 말씀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어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이나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행 2:4, 41). 그러나 논리적으로 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은 고작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행 17:22-34).
이것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증명이 된다.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이미 알던 내용도 새삼 새로워지고 은혜가 되고
믿음이 팍팍 생기는 것 같은데 또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도대체 감동이 오지 않고 냉랭할 때가 있다.
설교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어떤 말씀이 갑자기 감동을 불러일으켜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첫째 설교자의 경우, 그 사람이 말씀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 많이 하고,
바른 삶을 살면서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설교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른 성경 해석과 명쾌한 논리 위에 성령의 불이 타오를 때 능력 있는 설교, 감동 주는 설교가 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불타는 논리’(logic in fire)라고 불렀다. 조지 휫필드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할 때 특별히 감동을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사람 개인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제공하시는 것이다. 감동된 그 말씀을 통해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권면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소망을 주시고, 때로는 능력을 주시고, 때로는 앞 길을 인도해 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설교,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당사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롬 10:17).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은혜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들어쓰실 때에만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어(히 4:12),
듣는 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3.임하는 방법
1)이런 믿음은 주어진 상황에만 적용된다
어떤 특정한 상황, 필요, 위기를 위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중병이 나았다고 해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동일한 믿음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황에는 항상 새로운 믿음이 필요하다.
2)갑작스럽게 임한다
어떤 일에 대해 의심하던 중 기도 중에 갑자기 큰 확신이 임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불쑥 들어오는 생각,
지식의 말씀과 같이 어떤 단어나 문장, 세미한 음성이나 내적 감동 또는 느낌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3)오랜 세월에 걸쳐 주시기도 한다
또한 현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오랜 세월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행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하나님이 주신 큰 비전이나 사역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우 주변의 사람들은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를 어리석다고 비난하기도 하며 잘못 믿고 있다고
설득시키려 하기도 한다. 욥의 친구들이 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판단으로 단정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그러한 판단에도 굴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당사자에게 끊임없는 갈등을 만들어낸다.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믿음의 은사와 성령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것이며,
둘째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셋째 겸손해야 한다.
믿음의 은사를 개발하기를 원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더 큰 것을 주신다(마 25:21).
또한 문제가 금방 해결 받는 믿음만이 아니라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믿음도 필요하다.
믿음의 은사가 역사할 때 성숙한 신자라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과 순종하는 마음이 생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므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마음이 생긴다
은사-기적의 은사
기적행하는 능력의 은사는 자연 세계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어떤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난다(David Pytches).
기적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인데, 이 은사를 통해 은사자는
매개자가 되어 목격자들이 볼 때 통상적인 자연 법칙을 바꾸었다고 인식하는 능력 있는 행위를 한다(C. Peter Wagner).
기적들 행함은 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을 불러와서 그 결과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셨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Bobby Clinton).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능력 행함은 마술쟁이와 같이 센세이셔널한
묘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킨다.
성경에서는 능력, 기적, 표적이란 말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a)권능, 능력 또는 기적(뒤나미스, δύναμις, miracle 또는 power)
뒤나미스는 기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국제역본(NIV)과 신미국표준역본(NASV)은 듀나미스를 기적(miracles)으로
번역했다.
b)표적(세메이온, ςημειον, signs)
표적은 기적이나 기사와 함께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나타나는 징후, 표지임을 나타낸다(마12:38, 39). 성경에서 때로는
기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c)기사(테라스, τέρας, wonders)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어떤 이상한 일들을 말한다. 복수로 사용되며 주로 표적(signs)이란 단어 다음에 사용되는데
순서가 바뀌어진 경우는 행 2:22, 43 행 2:19 등이다.
d)일(에르곤, έργον, works)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일(들)’(요 5:36, 7:3, 21, 10:25, 32, 33, 38, 14:11, 12, 15:24)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기적, 표적 또는 능력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예수님 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e)영광(독사, δόξα, glory)
표적이나 기적은 또한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시는 한 가지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곧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다(대하 5:13-14).
특히 오늘날 하나님은 그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를 원하시는데 이로 인해 기적, 능력, 기사와 표적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많이 일어난다.
지금 다루고 있는 은사들 자체가 기적 행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지금 다루는 이 은사의 구체적인 명칭이 ‘능력들 행함’의 은사,
‘기적들 행함’의 은사이다. 그러므로 일단 9가지 중 나머지 8가지 은사로 인한 역사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어떤 사람은 능력들 행함의 은사에 귀신 쫓는 은사를 포함시킨다(마 12:28).
또 어떤 사람은 치유하다를 의미하는 이아오마이가 귀신을 쫓는데도 사용되었으므로 신유의 은사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마 15:28, 행 8:6-8).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은사를 세분화하여 귀신 쫓는 은사를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오늘날 신유의 은사나
능력들 햄함의 은사가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축사의 은사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만큼 이 셋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유와 귀신 쫓기를 제외한 기적적인 능력들은 어떤 것들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밖에 없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 표적 및 능력이 행해진 예는 너무나 많다.
여기서는 몇 가지 예만 간단하게 들어보자.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한 엘리야(왕상 17: 8-16).
이스라엘에 삼년 반 동안 비가 멈추게 했다가 오게 한 엘리야(왕상 17:11; 18:41).
엘리야의 간구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젖은 제사 음식을 다 태우고 주변의 도랑물을 다 마르게 한 일(왕상 18:37-38).
뛰어서 아합왕의 마차를 앞지른 엘리야(왕상 18:46).
겉옷으로 쳐서 물을 가른 엘리사(왕하 2:14).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마 14:25).
엘리사의 저주로 암 곰 둘이 아이 42명을 죽임(왕하 2:24).
베드로의 선언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행 5:1-11).
게하시로 하여금 영안을 뜨게하여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하고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한 엘리사 (왕상 6:15-20).
박수 엘루마의 눈을 멀게한 바울(행 13:11).
선지자 에스겔이 성령의 인도로 다른 장소로 옮겨짐(겔 37:1). 성령이 빌립을 홀연히 다른 장소로 인도하심(행 8:39)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넘어지거나 쓰러짐(삼상 19:24; 대하 5:14; 단 10:9; 행 9:34; 계 1:17).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요 2:7-10).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을 먹이시고(마 14:14-21),
칠병이어로 남자만 사천을 먹이신 예수님(마 15:32-38).
풍랑을 꾸짖어서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마 8:16)
안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은사를 받는다(행 8:17; 19:6).
성경에 보면 사단도 능력과 표적을 행할 수 있다. 사단의 하수인들도 모세와 같이 지팡이가 뱀이 되게 했다(출 7:12).
사단은 또한 하나님의 허용 하에 사람들을 책동하여 욥의 종들을 죽이고, 불이 내려오게 하여 가축과 종들을 죽이고,
큰 바람이 일게 하여 집을 무너뜨려 아들들이 죽게 하고, 욥의 몸에 악창이 나게 하여 욥을 괴롭혔다(욥 1장).
물론 우리는 표적과 기사가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영 분별을 해야 한다. 기적행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영 분별의 은사를 받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굳이 영 분별의 은사가 없더라도 성경의 가르침만 제대로 알아도 표적과 기사의 원천이 하나님인지 사단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예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지는가?
그것을 체험한 사람의 심령에 기쁨과 평강이 임하는가?
이 두 가지만 간단하게 점검해도 표적과 기사의 원천이 하나님인지 사단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은사-영분별
은사로서의 영 분별은 일반적인 영 분별의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영 분별은 다른 기적 행하는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이 특정한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영의 정체를 알게 해주시는 은사이다. 몇 가지 정의를 살펴보자
이것은 교회에서 개인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의 배후에서 동기를 부여하는 영들을 분변하도록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인들에게 주신 초자연적인 인식의 은사이다(David Pytches).
영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이 교회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인데, 이 은사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행동이 실제로 하나님, 사람 또는 사단의 역사인지의 여부를 확신 있게 알게 한다
(C. Peter Wagner).
영 분별의 은사는 계시된 진리와 그 진리로부터 도출된 원칙들에 비추어서 진리와 비진리를 분석하는 능력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본 이 은사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다(Bobby Clinton).
성경에는 영을 시험하다(요일 4:1), 영을 분별하다(고전 12:10)는 말을 사용한다. 시험하다는 말은 δοκιμαξω(dokimazo)인데
‘나누어 분리시키다, 식별하다, 구분하다’라는 뜻이다. 분별하다는 말은 διακρισις(diakrisis,명사), διακρινω(diakrino,
동사)인데 ‘나누다, 분리하다, 판단하다, 차별하여 배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을 시험하고, 분별한다는 말은
영의 종류를 판단하여 구분한다는 말이다.
영 분별의 은사가 있든 없든 신자들은 영을 분별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말이나 행동의 배후에는 사람,
사단 및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1)사람의 영
사람은 상황과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때로는 정직하고 때로는 거짓된다. 사람의 영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에 의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람의 생각이 지배하는 것들이 많다(렘 23:16).
2)하나님의 영
3)마귀의 영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하려고 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만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 사단이 베드로를 충동하여 한 말이다.
1.일반적인 영 분별의 방법
어떤 말이나 행동의 배후에는 사람, 사단 및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으므로 영 분별의 은사가 없더라도 신자들은
영 분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사람의 생각, 마귀의 충돌질에 빠져
자신의 형편을 어렵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보통의 신자들도 영 분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한 후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다. 처음에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다(마 4:3-4).
그러므로 신자들은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말씀이 신자들의 인도자요 영 분별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아무리 그럴 듯 하더라도 사람의 영이 아니면 마귀의 영이 역사하는 증거이다.
2)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육신의 생각 즉 사람의 죄악된 생각, 이를 통해 마귀가 역사하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불안, 초조, 두려움을 야기시킨다(롬 8:15).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생각은 자유, 평안, 기쁨을 가지게 한다(롬 14:17).
성령이 우리에게 사역이나 소명에 대한 어떤 부담을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고 의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기도를 통해 강한 확신, 기쁨 또는 평안이 넘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늘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인 경우 내 영과 내 심령이 그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3)열매로 분별하라.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은 어떤 생소한 영적 현상이나 체험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생소하고
이상하면 성급하게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면서 기도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언제, 어떤 것을 기도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 또는 성령의 개인적,
구체적 인도에 따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일어날 수 있는 영적 현상과 체험을 모두 다 기록한 것은 아니다.
성경의 예는 ‘예증적인 것이지 철저한 것이 아니다’(illustrative, not exhaustive).
2.조나단 웨드워즈가 제시하는 영 분별의 방법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임을 증거하는 독특한 성경적 증거 5 가지를 제시했다 The Distinguishing Marks of the
Works of God,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Ⅱ (Edingburgh: Banner of Truth,1992)
1)첫째 그 사역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예루살렘 성문 밖의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구원자라고 복음이 선포하는 진리를 확인하고 그 마음이 이 진리에 더욱 충실하도록 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확실한 표식이다.
2)둘째 운행하고 있는 영이, 죄를 장려하거나 짓게 하고 인간의 세상적인 욕심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단의 왕국의 이익에
반대되게 역사한다면, 그것은 가짜 영이 아닌 진리의 영임을 증거하는 확실한 표식이다.
3)셋째 역사하고 있는 영이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게 만들고 진리와 하나님의 일에 뿌리박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심이 분명하다.
4)넷째 영을 시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6절 마지막에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에 대한 호칭을 통한 것이다.
이 말은 진리의 영과 그것을 모방하는 미혹의 영의 두 가지 상반된 인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영이
진리로 이끌면 그것은 진리의 영의 사역이고 어두움과 잘못으로 인도한다면 미혹의 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5)다섯째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이라면, 그것은 성령이심을 증거하는 확실한
표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집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외적인 현상이나 분위기가 내 마음이나 내가 속한 단체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과연 그런 집회에서 에드워즈가 말한 이 5가지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생소한 영적 현상이나 체험을 외양만을 보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영 분별이라기 보다는 ‘의심’과 ‘불신’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시기심이 발동할 경우에도 그렇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사도들을 핍박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럴듯한
이유를 대었지만 이면에는 시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마 27:18; 행 5:17).
오늘날 기적행하는 은사들, 생소한 영적 현상이나 체험에 대한 인정 여부는 잘못된 신학으로 인한 편견과 무지,
의심과 시기, 기득권 유지라는 집단이기주의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영 분별이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단의 책동으로 헌금을 속인 사실을 안 베드로(행 5:1-11).
성령을 돈 주고 사겠다는 마술사 시몬의 마음 상태를 안 베드로(행 8:23).
비록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말했지만 점치는 여종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귀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바울(행 16:16-18) 등은
성경이 기록한 영 분별의 예이다.
이러한 영분별의 능력은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 우선 일반적으로 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a)불쑥 생각으로 들어오거나(spontaneity) 그냥 알게 되는 경우
어떤 사람과 대화하거나 대화하는 말을 듣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며,
거짓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이 난다. 상담하는 가운데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어떤 사실이 자신의 머리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거나 어떤 음성이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b)마음의 부담이나 느낌을 통해
대화 중이나 기도할 때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달되고
기뻐하면 기뻐하는 마음이 전달된다.
c)꿈이나 환상을 통해
이 부분은 별도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꿈과 환상에서)
이상과 같은 일반적인 방법을 떠나 은사에 의한 방법이 있다.
축사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어떤 사람의 외부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통하여 악령의 존재를 분별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가서 흰자위가 보이는 경우, 또 어떤 사람은 갑자기 앞으로 비틀거리며
보통의 기침이 아닌 발작적인 기침을 해대기도 한다. 그러면서 입으로 거품을 내뿜으면서 어떤 것을 기침으로 토해 내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의 경우 손이 뻣뻣해지며 허리가 활 모양같이 휘어지기도 한다.
또한 이상한 소리를 통하여 분별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서 짐승 같은 괴성을 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너를 미워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너를 미워한다”, “너는 우리를 결코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지른다. 어떤 목소리가 “이 사람은 내꺼야”라고 소리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위와 같이
극적이고 분별하기 쉬운 현상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 환자의 경우와 같이
귀신의 장난인지 정신병적인 현상인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외적인 현상 만으로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경우에는 영분별의 은사를 통하여 분별할 수 있게 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수준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수준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귀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한다. 많은 경우 은사를 가진 사람은
내담자에게 귀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꿈, 환상, 느낌으로 강하게 확신하며 이것은 대부분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내담자에게 귀신이 있는 경우 본인의 몸에 어떤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단순히 귀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뿐만 아니라 귀신의 종류까지 아는 경우이다.
두 번째 단계의 은사를 가지면 유익한 점이 상당히 많다. 귀신의 종류를 알면 귀신의 이름을 불러 축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귀신이 어떤 죄악을 발판으로 해서 들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축사자가 귀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축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귀신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환자에게 머물 수 없다. 귀신의 이름은 대부분의 경우
그 환자가 행동하는 모습을 대표하는 형용사로 규정되어진다. 예를 들면 더러운 모습을 하는 사람의 경우 그에게 있는
귀신의 이름은 ‘더러운 귀신’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고 명하면 된다.
영 분별의 은사는 전쟁을 치르는 군사에게 적의 규모나 작전을 알려 주는 고급 정보처럼, 사단의 왕국을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유익한 은사이다. 그러나 영적 전쟁의 경우 완강하게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들이 광명의 천사로도 가장하므로(고후 11:14), 정확한 분별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적의 역 정보에 타격을 입듯, 말썽을 부리고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신유의 은사를 발견하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은사가 임한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 은사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 더 그렇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나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무관심하게 지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한 것 이상
더 큰 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은사는 문자 그대로 은혜로 받는 것 즉 거저 받는 것이지요. 아무런 자격이나 공로가 없다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이는 나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는 사람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성도들이 모조건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지요.
여기에는 주님의 절대적인 선택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구원 받는 사람은 소수이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입니다. 이는 장로교 교리로 보면
“예정을 입은 사람” 즉 예정론이 있는 것이지요.
이 예정은 우리의 어떤 공로나 대가에 있지 않듯이 은사 역시 예정된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정은 또한 선택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자유 의지”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은사 역시 이런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지내게 된다든가 주어진 은사를 거부한다든가 하면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은사는 주시는 분의 일방적 선택이며 이 선택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이 말은 받은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이거나
거부하는 경우 이 은사의 기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실을 모르고 일정 기간 지나게 되면 은사는 정지됩니다. 그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은사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능이 정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은사의 기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에게서 거두어 가셨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처음 은사를 받은 사람은 무지로 인해서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지요.
신유의 은사를 받게 되는 사람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큰 병을 앓다가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경우에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극심한 병에 걸렸다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됨에 따라 신유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행하는데
거부감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깊은 병에 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에 앞서서 이런 마음의 바탕을 먼저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병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병든 사람의 고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유의 은사를 받고 난 다음이거나 받기 전에
병든 사람 못지 않은 고통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 은사를 받는 자리에 나가게 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신유사역자로서가 아니라 교사로서 세우기 위해서 신유의 은사를 경험하게 하시지요.
이런 경우는 부분적으로 또는 일시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병을 앓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의 경우 그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병든 사람에게 기도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기도하면 병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주려고 시도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환자가 치유함을 받게 되고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임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신유의 은사가 임한 사람에게는 신체적으로 남다른 증상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이 화끈거리거나 온 몸이 감기에 걸린 것처럼 나른하고 쑤시는 느낌을 받습니다.
손이 저리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으며 화끈거리고 열감이 느껴집니다.
꿈에 자주 환자에게 안수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신체적으로 이런 변화를 경험하는 기간은 상당기간 동안 계속되다가 본인이 은사가 임했음을 깨닫게 되면 사라집니다.
그 후에 사역을 행할 때 간헐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데 이는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였을 경우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이런 현상이 느껴지지 않는데 치유를 받는 환자에게 이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병든 부위에 손을 대면 환자가 매우 뜨거워하거나 강한 전기에 감전되듯이 온 몸을 떨기도 합니다. 손을 댄 부위에 강한 열감을 느껴
땀을 흠뻑 흘리기도 하지요.
이런 현상들은 자신이 경험한 대로 환자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환자가 지금 고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매번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에 따라서 그리고 주변의 영적 분위기에 따라서 성령님은
항상 다양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유의 은사를 못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종들을 보냅니다. 은사가 임했음을 간접적으로 당사자에게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믿음이 없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사는 유보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주신 은사를 거두는 일은 거의 하시지 않습니다.
은사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되어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알고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개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헌신하는 자리에 기꺼이 나오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은 끝이 없지요. 그런데 젊은 시절에 건강할 때
헌신하는 것이 좋지요. 인생의 황혼에 가서 그 사실을 깨닫고 나오는 사람들은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도 묻어두고 일생을 마치는 경우보다는 다행이지요.
은사는 공로없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은사로 인해서 어떤 명예를 구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되지요. 값없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대가 없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거나 자신을 높이려는 태도는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은사를 모르고 또는 거부하여 묻어두면 그 기능은 보류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늦게 사역에 나서게 되면
은사는 다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 회복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자신에게 은사가 주어졌고 그 은사가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뒤 늦게 깨달았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이 그 은사를 묻어두었던 이유를 찾아서 철저히 회개해야 하는 것이지요.
회개는 대충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입은 회개, 즉 모든 회개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만
은사를 묻어두었던 회개 역시 철저히 해야 하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위축되고 지연되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을 통해서 고침 받아야 할 고통 당한 환자들을 생각하고 눈물로 회개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회복되면 역시 처음과 같은 현상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치유가 이루어지고 주님은 고침 받을 환자들을 자신에게 부쳐 주십니다.
감사함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은사와 훈련(1)
은사라는 말이 우리 교회 안에서 상당한 부분이 잘 못 이해되고 있다고 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그 뜻이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뜻인 줄은 누구나 다 압니다. 이 말은 신유, 축사, 방언, 구제, 섬김, 가르침 등의
여러 가지 기능들이 우리의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이 이런 여러 가지 능력들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를 받아서 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은사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은 은사를 행하는 사람을 은사자라고
부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호칭합니다.
능력을 받은 사람은 ‘능력 행하는 자’로 예언을 하는 사람은 ‘예언을 말하는 자’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말하는 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은사들을 전문적으로 행하는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각 기능에 따라서 호칭을 달리해야 할 것입니다.
예언을 말하는 자는 예언자 또는 예언 사역자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호칭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 교회는 아주 무관심합니다.
단순히 은사자라는 모호한 호칭으로 얼버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은사를 행하는 사람을 교회 안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각이 잘못된 것임을 거론합니다. 은사는 결코 사소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행정적 조직보다도 월등히 우월한 것입니다. 은사의 궁극적인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 6:23). 이것이 소중한 것처럼 모든 은사들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호칭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올바른 결론을 내어 막연하게 은사자라고 부르는 잘못을 이제는 더 이상 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못 이해하는 또 다른 부분은 은사라는 말에 연관되어 많은 능력과 기능을 단순히 아무런 행위도 없이 얻었으므로
그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 일체는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따라서 훈련도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은사들을 경험해 보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과연 병든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고, 방언을 통역하는 등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런 능력들을 한 두 번 경험하였다거나, 과거에 행하였던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전혀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방언을 받았는데 방언으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단순한 습관처럼 하고 있다면
그 사람 역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질이나 신앙성숙이나 인격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따라서 글자 그대로 완전히 공로 없이 얻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모하고
구했다고 해서 바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모하고 구해서 얻었다고 해도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누군가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으며, 전도의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결코 안되듯이 은사 역시 우리가 소망하고 구해서 얻었다고 해서 행위와 연관 지어서는
안됩니다. 은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그 은사를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는 반드시 훈련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다이야몬드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보석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원석을 가공하는 기술에 따라서 그 값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세공기술에 따라서 보석이 비로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게 되고 보석다워집니다.
그러므로 보석을 보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세공기술입니다. 이와 같이 은사를 은사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은사를 다듬어서 아름답고 유익하고 그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그 은사를 다루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훈련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교회는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서 은사를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수많은 실수의 배경에는 훈련 받지 못한 미숙함이 있습니다. 은사는 세련된 기술을 요구하는
예술 행위와 흡사합니다. 그 은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며,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런 행위는 시대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성향에 따라서 예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양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은 많은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실수하게 되고 물의를 만들어내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훈련 받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초행길은 낯설고 어설픈 것처럼 아무런 지식도 없이
단순히 능력을 받은 것 만으로 사역을 시작하면 그 속에는 엄청난 시행착오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것은 사역을 행하는
사람에게 많은 부담과 좌절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런 갈등에 휘말리면 능력이 약화되고 마침내는 소멸되고 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받지만 머지 않아 그 받은 것을 다 소멸시키고 마는 까닭이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실 때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준 것이지 문제를 일으키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면 그 능력은 소멸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사를
주심에는 후회함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반론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은사로 받은 구원을 중도에 잃어버리고
딴 길로 가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져 소중한 구원을 잃고 있지 않습니까?
은사와 훈련(2)
하나님의 일은 훈련을 통해서 비로서 온전한 것이 됩니다. 먼저 훈련을 받고 소임을 얻는 경우와 소임을 받고
이후에 훈련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후 관계야 어떠하든지 훈련은 반드시 거처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능력을 감당하기에 여러 모로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병사가 병기를 지급 받으면 반드시 그 병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군사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병기의 특성을 알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가 은사를 받으면 그 은사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배움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기능들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
훈련의 목적을 먼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은사의 성격을 발견하기 위해서
2)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3)은사를 통해서 얻게 될 유익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4)주된 은사와 연관된 다른 은사를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5)은사를 통해서 구원될 주의 백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6)죄의 문제를 바로 알게 하기 위해서
7)세부적인 기능들을 소홀히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8)은사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9)은사를 행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10)교회에 덕을 세우는 요령을 터득하게 하기 위해서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우선 중요한 열 가지만 다루기로 합니다.
1)은사의 성격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신유의 은사라고 해서 다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의도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다릅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서 병든 사람의 고통스런 문제를 해결하는 의도로 주어진 가장 낮은 차원의 병 고치는 능력은
그 기술이 단순합니다. 환부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써 병을 낫게 합니다. 그러나 보다 광범위하게 역사케 하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병 고치는 능력은 다양하고 복잡한 기술을 함께 주십니다. 이 기술은 한 순간에 전부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손을 얹어야 할 때가 있고, 명령해야 할 경우가 있으며, 중보기도 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한 순간에 나을 것인지,
여러 날이 걸려야 할 것인지, 독특한 수단을 필요로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판단하는 기술을
다시 더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지식들을 얻는 방법에 대한 이해를 더해야 하는 과정이 별도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부대적인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런 기술들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현장에서 적용하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실수가 생기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확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2)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문제를 당한 사람이 능력을 행하는 현장에서 나타내는 다양한 증후들이 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증후들을 나타내는데
이런 것들이 문제의 어떤 부분을 드러내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실수하게 되고 성공률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환자에게서 또는 주변인에게서 그리고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증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대응을 요구하는지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없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지도 않습니다.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증상으로 인해서 초보 사역자는 당황하게 되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한번의 경험으로 그런 증상들의 의미를 단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따라서 많은 경험을 가진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배워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통해서 배우면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과정을 피하게 됩니다.
이것이 훈련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그 폭이 넓습니다. 사역자가 이런 다양한
방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그 사역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방법이 많을수록 그 성공률도 높아집니다.
3)유익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문제를 만난 사람이 얻게 될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본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독특한 성향이 있습니다. 그 주제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만나는 배경에는 그 사람이 깨달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맞는 사람을 자신이 다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인내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자신에게 부쳐주시는 문제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에게 인내할 것을 구해야 하고 인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한 가지 속성에만 국한 하는 사역자가 있는가 하면 다양한 속성을 드러내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역자의 집회에
가보면 오로지 믿음만 강조합니다. 어떤 사역자는 오직 회개만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은 그 사역자를 통해서 구원을 받지만 다른 문제로 인한 사람은
해결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문제에 맞는 속성을 가진 사역자를 만나야 하는 것인데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곳도 기웃거리고 저곳도 기웃거리게 됩니다.
4)주된 능력과 연관된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은사는 한 가지만으로는 그 기능을 제대로 해 낼 수 없습니다. 연관된 다른 은사와 연합해야 합니다. 신유의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가 있을 때 더 빛이 납니다.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이 필수입니다. 단순하게 손을 얹어 병만 나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요소들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혼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더 나은 상황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주어지는 예언과 영분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예언에 치중해서 함부로 예언을 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지요.
주된 은사와 그 은사를 위해서 보완적으로 주어지는 것과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은
보조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 기능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신유와 예언은 분명히
다른 성격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몇 곱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역자에게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하나는 주가 되고 어떤 하나는 보조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다 능숙하게
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5)주의 백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이유 가운데 이 부분은 성도의 유익과 연관된 것이며, 은사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사역자는 성도들의 문제 만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그 문제의 배경에는 그들이 범한 심각한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 죄만을 본다면 도무지 불쌍히 여길 여지가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이 범한 문제를 보지 않고 단순히 고통 당하고 있는 당사자만 본다면 그 문제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제 삼자의 입장을 도외시 하는 것이 되고 그 문제를 통해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편에서 볼 때 가해자를 돕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문제의 중심에 서서 그들 모두를 감싸고 서로에게 화해케 하는 자리에 서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용서하고
그 죄를 서로 고백하게 하는 중재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시에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입장에 서서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가지
예이지만 사역자가 알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은사와 훈련(3)
훈련은 미숙한 사람에게 온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훈련을 얼마나 잘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 효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 글에 이어서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6)죄의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사역자에게 있어서 죄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의 근원에는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바르게 처리하는 것은 곧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죄를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되며, 그 근원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로부터 여러 가지 기능들을 배워야 합니다.
죄는 여러 가지이고 그 결과 나타나는 증상들이 다양합니다. 죄에 얽힌 문제의 특성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지 못하면 죄의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아예 다루지도 않게 됩니다.
단순히 문제만 해결 되기를 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처리되지 않은 죄는 이후에 계속 그 사람을 괴롭히는 구실이 됩니다.
사역자는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다루면서 그 과정을 살펴야 합니다. 죄의 처리 과정을 배우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죄의
처리를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7)세부적인 기능들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앞의 글에서 세밀함이 능력을 좌우한다는 제목으로 다루었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은사는 세밀한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다양한 문제에 접근했을 때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기술들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어렵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 가운데 어떤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리고 어떠한 절차를 따라서 진행해야 할지를 올바르게 안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세부적이고 자세한 절차와
적용에 따라서 문제를 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숙하거나 거친 사역자들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대충 다루게 됩니다. 적당히 다루다 보니까
실수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도 주게 됩니다. 사역의 신뢰를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훈련은 세부적인 것들을 바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성급하지 않고 면밀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습관을
몸에 베이게 하는 것이지요. 미숙한 사역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지요. 세부적인 기능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쌓여진
경륜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문제를 다루면서 얻어지는 깊은 통찰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제대로 된 지도자를 통해서
배움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칫 소홀히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일정한 수준 이상은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적당히 하고 사역도 적당히 합니다.
수박 겉핥기 식이어서 사역의 진정한 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이런 사역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게 되고
명예를 추구하게 되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만족하기 때문에
이제 관심이 자신에게로 쏠리게 됩니다. 원론적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만족한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육적인 사람으로
얽매는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2~3년 정도면 기본적인 것은 대부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멈추면 영적인 사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밀한 것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지루하고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으며, 더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8)은사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훈련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 보다 엘리사가 더 많은 사역을 행하였습니다.
제자는 스승 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시행착오를 줄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에 지식을 더함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 보다 예수께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듯이 말입니다.
은사의 지경은 스승을 통해서 넓혀집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스승을 만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속적으로도 좋은 학교에 가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좋은 학교에는 탁월한 스승이 많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받은 은사 이외에 부수적인 은사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지경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사역을 행하고 있는
지도자를 통해서 실제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기회를 통해서
경험을 쌓음으로써 실수를 줄이게 되고 실패에 대한 부담을 적게 받게 됩니다.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실패를 하게 되면
영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게 됩니다. 거듭되는 실패는 사역 자체를 위축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사역을 포기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너무 성공만 계속하면 교만에 빠지기 쉽고, 실패를 계속하면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통해서
이런 부분이 제대로 다루어짐으로써 교만이나 침체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온전한 사역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지 않습니다. 교만과 침체라는 두 가지 영적 장애를 극복해야만
온전한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9)사역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역의 현장에는 사역자를 넘어지게 하는 수많은 함정들이 있습니다. 미숙한 사역자는 그 함정을 알지 못합니다.
함정에 빠진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미숙한 사역자들로 인해서
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나쁜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의 실수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 손해는 우리가 입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까지 능력 사역에 있어서 너무도 무관심했고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거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그 책임을 미숙한 사역자들에게만 넘겼습니다.
교육 받지 않은 사역자가 실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이제는 실수하는 사역자를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사역자는 보호되지 못한 채로 사역의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수한 함정에 널려 있는 험난한 길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미숙한 사역자들이 마치 성숙한 사역자인 것처럼 서로 착각하고 마구잡이 식으로
사역에 임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요. 훈련은 사역자를 그런 미숙함에서 보호하며 많은 함정들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돕습니다. 훈련은 미숙한 채로 사역에 나서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도록 사역자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능력 사역자는 전혀 보호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흠을 잡으려는 곱지 않은 눈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사역에서 위치를 확보한 탁월한 지도자를 통해서 자신의 사역이 보호될 필요가 있습니다.
훈련은 미숙한 사역자가 겪어야 할 불필요한 위험과 비난을 제거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힘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습니다. 약한 자는 무시 당하고 강한 자는 대접을 받습니다.
약한 개인은 설 자리가 없지만 강한 집단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훈련은 이런 모순으로부터 입게 되는 불이익을 제거합니다.
10)교회의 덕을 세우는 요령을 얻기 위해서
미숙한 사역자는 자신의 본 뜻은 그렇지 않지만 미숙함으로 인해서 교회에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황하거나 방법을 몰라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역자를 미숙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두 전문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수는 곧바로 사역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많은 요령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다루는 요령을 익히지 않고서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역은 엄격히 말해서
사람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제대로 다루려면 경험이 절대입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부족한 초보 사역자는
그런 경험의 노하우를 배워야 합니다. 앞선 사역자들의 경험담을 듣고 배워서 자신의 사역에 적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선한 뜻과는 달리 엉뚱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대하지 않던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능숙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경험 이상의 요령은 없습니다.
이상으로 10가지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었습니다. 이 하나 하나의 주제들은 여러 시간을 두고 강의해야 할 정도로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