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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에게 배우는 영어 학습법

작성자Statesman|작성시간08.04.04|조회수1,946 목록 댓글 1

 

김현종에게 배우는 영어 학습법
 조회 : 46
What's up?! > My poor lecture | 2008-02-27 (Wed) 00:29 http://blog.dreamwiz.com/miya23/6493831
 

 

 

성명 김현종 金鉉宗 , KIM, HYUN-CHONG
생년월일 1959/09/27 (음력)
출생지 서울

학력
- 197   미국 윌브램 맨스고등학교
- 1981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정치학과 (학사)
- 1982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과 ( 석사 )
- 1985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 통상법학박사 )

경력
- 1985  미국 뉴욕주 변호사자격 획득 

- 1985  미국 밀뱅크트위드법률사무소 변호사, 스톡홀름 상공회의소 중재인

- 1986  미국 스카텐아르프스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9 프랑스 지적재산권보호협회 회원
- 1989 김신&유 변호사사무실 변호사
- 1993 홍익대학교 무역학과 겸임교수 무역학과
- 1995 외무부 통상자문변호사
- 1998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통상전문관(비상임) , 제일국제법률사무소 변호사
- 1999 세계무역기구(WTO) 사무국 분쟁해결상소기구 법률자문관
- 2003 세계무역기구(WTO) 법률국 수석고문변호사
- 2003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통상교섭조정관(1급)
- 2004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본부장(장관급,45세)

- 2005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합동각료회의 공동의장

- 2005 제6차 세계무역기구(WTO) 한국측 수석대표
- 2007 제21대 유엔(UN) 주재대사

- 2007 유엔(UN) 아주그룹 의장

- 2008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ECOSOC) 부의장

 

 

 

+유학을 준비중이신 분들이 읽어보면 좋을 글

 

 

자립을 향한 노정 (2000, 김현종 김병연 전 노르웨이대사 장남 )

 

 나 자신의 학업과 직업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외교관 자녀들이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지난 경험에 비추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미국 Massachusetts주의 Wilbraham & Monson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Columbia 대학교의 학부와 법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후 15년간에 걸친 법률가로서의 나의 길은 기업인수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Wall Street 법률회사의 변호사, 홍익대학교 교수, 외교통상부의 통상전문 변호사를 거쳐 현재 일하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법률국 변호사로 이어졌다.

 

 내가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숱한 시도에서 나는 많은 좌절감을 겪었고 어떠한 일도 쉽게 이룬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학업과 직업문제에 대해 후배들에게 충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대부분의 한국학생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수학이나 과학에 뛰어나지만, 영어와 역사에는 약한 것 같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고전을 많이 읽고 비평을 쓰는 훈련을 통해 글쓰는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나는 고등학교에서는 글쓰기를 배우고 대학에서는 이 기술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콜롬비아 대학에 다닐 때 훌륭한 필력을 지닌 학생들은 대개 영어와 역사를 혹독하게 공부시키는 Connecticut주의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었다. 영어를 잘 쓰고 잘 구사할 수 있는 communication기술은 일상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기를 원하는 커리어나 관심분야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조건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영어에 능통해지는 것은 후에 어떤 직업을 택하든 주류에 속하도록 하는데 필수적이다.

 

 외교관의 자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울 기회를 가지므로 영어에 능통할 수 있는 비교우위에 서있다.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마치고 바로 Wall Street의 법률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뉴욕의 법률회사나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은 결코 일하기 수월한 곳은 아니다. 좋은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곳이다. Fortune 500에 속하는 거대한 기업체 고객의 일을 맡으려면 영어의 verbal 과 written skill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미국의 기업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법률회사의 파트너라고 불리는 고위층들은 해당 변호사가 훌륭한 의사전달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절대로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아시아출신은 본토박이 보다 영어를 더 잘하고 자질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코 주류에 끼어들 수 없다.

 영어가 능통하지 못한 변호사들은 영어 의사소통기술이나 고객과의 접촉을 요구하지 않는 세법분야를 주로 담당하는데, 이런 경우 법률회사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WTO에서도 중요하고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분쟁을 맡아 주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영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있다.

 

 내가 대학시절에 겪은 어려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특히 career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옆에서 효과적이고 vision있는 충고를 해 줄만한 선배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7-10세 정도 연상의 선배로부터 충고를 받을 수 있었다면, 나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7-10세 정도의 연상으로서 경험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요즘의 경향에 비추어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선배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계무대에서 뛰어난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가장 전망이 밝은 분야에서 성공을 할 수 있도록 가장 최신의 직업정보에 관해 선배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법대를 졸업하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 평가해 주는 것은 어떤 명문법대를 나왔느냐 하는 것과, 특히 법대 졸업후 취직한 법률회사가 어떠한 명성을 갖고 있느냐와 함께 처음 3년 동안 어떤 경험을 획득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법대의 많은 동료들은 법조계 배경을 가진 가정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법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고, 인맥을 통해 가장 좋은 법률회사에 쉽게 취직될 수 있었다.

 요즘은 한국 학생이 법대에 많이 다니고 있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때에 따라 나에게 조언을 해줄 좋은 선배가 나의 주위에 있었다면, 아마도 학교공부가 더 수월했을 것이고 Wall Street의 법률회사에 취직하는데 덜 힘들었을 것이다. 요즘은 학부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MBA학위를 취득(techno-MBA)한 후 Silicon Valley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길이 미국에서는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길로 보인다. 정보기술산업은 역동적이고 여러모로 독립적인 장래를 약속하기 때문에 이 길이 매력적인 선택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경력에 있어 처음 3년 동안 어떤 경험을 쌓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 3년은 향후 전문적 경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기초가 되고,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게 되는 요소가 된다. 변호사가 처음 3년 동안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이러한 단점은 나중에 보완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이 원칙이 민간부문이건 공공부문이건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3년 동안 확고한 경험을 얻은 후라야 다음 단계로 약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3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피라미드에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기회라는 것은 꼬리가 없으므로 뒤에서 잡을 수는 없다. 기회의 앞쪽에 버티어 서서 자기가 있는 쪽으로 기회가 굴러오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1999년 WTO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5년을 준비해야 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은 통상법률분야를 주도하는 소수의 핵심인사들과 사귀고, 시사적인 문제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50 여개에 달하는 통상법률분야의 국제학술지를 구독하면서, WTO 분쟁해결절차에 직접 관여하여 자신의 지식을 실제로 활용해 보는 과정들을 포함한다.

 

 법대 진학¹을 계획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의 장단점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JD 학위는 어떤 직업을 택하든 훌륭한 기반을 제공해 준다. 법률분야는 수요가 계속 있게 마련이므로 직업상 기복이 별로 없다. JD 학위는 직업적인 안정과 일정한 수준의 소득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법률분야는 다소 정적이고 직업간의 이동성이 적다. 일반적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수년간의 경험을 쌓은 후에는 아래와 같은 여러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첫 번째 길은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선택의 길은 일하던 법률회사의 고객회사로부터 스카웃되어 그 회사의 경영진으로 참여하거나 법률고문이 되는 길이다. 세 번째 선택은 법대의 법학교수가 되는 길이다. 네 번째 길은 일반회사의 고문 변호사가 되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나 국제기구에서 법률가로 일하는 길이 있다.

 나는 한국과 같이 개발도상국에는 승자와 패자가 분명한 통상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외교통상부에서 변호사로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더욱이 내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moral obligation도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확실한 영어 구사능력에 추가하여 외교관의 자녀로서 성공하려면 철저한 국가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내가 외국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에 관계없이 외국사람들이 나의 자질을 평가할 때, 나 자신이 한국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이야기할 때 외교관 자녀로서 가장 큰 약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해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결과로 한국에는 동창이나 인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서울에서 수년간 일하고 생활하면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냈다고 해서 많은 지식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해외에서 오랜 생활을 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도전적인 과정을 오랫동안 거치면서 좌절하는 경우도 수차례 생길 것이다.좌절했을 경우 당황하지 말라. 이 때에는 일을 억지로 원하는 대로 끌고나가려 하지말고 일이 진행되는 대로 하늘의 뜻에 맡겨 두었다가, 신중하게 생각한 후 결정을 단호히 내려라. 그리고 그 결정을 확고하게 밀고 나가라. 자기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마음과 느낌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절대로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지 말라. 그것은 결국 자신의 결정을 뒤로 미룰 뿐이다. 가장 나쁜 결정은 결정을 해야할 때 결정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14세에 나 홀로 유학 ‘독종’소리 들으며 공부했다-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부모가 들려주는 그의 성장 스토리

 

 빠듯한 공무원 월급에 3남매를 유학공부 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 전 회장은 아이들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김 본부장의 대학 진학을 앞두고 달랑 한 채뿐이던 집을 팔았다. 당시 외교부의 한 후배가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하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느냐”며 그를 말렸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때 참 잘하셨다”며 부러워한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집 한 채 판 것으로도 모자라 은행 빚까지 지게 돼, 외교부 퇴직 얼마 전까지 빚을 갚았다”며 “검소하게 살면서 학비 대주는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이 쉽게 엇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대학 시절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한번은 페인트 칠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지금도 다리에 상처가 남아 있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항상 아들에게 “얼른 공부 마치고 27, 28세에는 군대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1977년 컬럼비아대학에 입학, 국제정치학으로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통상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로펌에서 일하다 잠시 귀국해 6개월 단기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김 전 회장은 “현종이 국적이 미국이고 군대도 안 갔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학생활 내내 유학비자를 연장해가며 미국에 머물렀고 강원 인제 원통리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것. 최전방에서 북한 방송을 많이 듣게 된 김 본부장은 제대 후 집에 와서 북한 말씨, 특히 북한 욕설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해 가족들을 웃겼다고 한다.

 

 제대 후 다시 미국 로펌으로 돌아간 그는 87년 당시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부인 강금진(43) 씨와 맞선을 본 뒤 이듬해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큰아들 민상(17) 군과 작은아들 지상(9) 군을 슬하에 두고 있다.

 

 김 본부장은 한미 FTA를 체결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은 적이 없다. 박사 학위와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땄 을 때도, 세계에서 모여든 140명의 변호사를 물리치고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WTO 법률자문관으로 최종 선발됐을 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오죽하면 큰며느리가 “아범이 잘한 일은 잘했다고 칭찬 좀 해달라”며 애교 섞인 부탁을 했을까.

 

 김 전 회장은 한미 FTA를 타결짓고 오랜만에 귀가한 아들에게 “네가 애국을 했고 큰 효도를 했다. 참 장하다”며 처음으로 칭찬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남들 몰래 아들에게 신경 쓰는 자상한 아버지”라며 그의 부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한미 FTA 협상 기간 내내 밤늦게 귀가해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아들이 걱정돼 매일 밤 아파트 앞마당에 나가 아들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했다는 것이다(김 전 회장과 김 본부장은 같은 아파트단지, 같은 동, 다른 층에 산다).

 

 ‘하얏트 전투’ 내내 카메라에 비춰진 김 본부장의 인상은 날카로우면서도 무뚝뚝해 보였다. 평소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를 듣는 그다웠다. 그게 좀 신경 쓰였는지 김 전 회장은 아들에게 “좀 웃지 그러느냐”고 했다가 “국가 이익이 촌각에 걸렸는데 인상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역시나 알려진 대로 ‘국익 제일주의자’다운 면모다.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에다 자신감 넘치는 김 본부장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보통 사람인 듯하다. 원래 종교가 없던 그도 의지 할 곳이 필요했던지 한미 FTA 협상 기간 내내 교회를 열심히 찾았다고 한다. 해외출장을 갔다가 일요일에 귀국하는 날이면 집에 들르지 않고 공항에서 곧장 교회로 향하기도 했다. 김 본부장과 함께 몇 번 교회에 갔다는 김 전 회장은 “아들이 ‘하나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듯했다”며 측은한 마음을 표현했다.

 

 자녀를 조기유학 보내는 부모들에게 조언 한마디를 청했다. 김 전 회장은 “이미 세상이 많이 바뀌어 내가 나서서 뭐라 말하긴 어렵다”면서도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자기 정체성과 의지, 올바른 목표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부모가 잘 이끌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했다.

 

 

 

 

+“아들은 애국을 입에 달고 다니던 아이”“오빠의 불같은 성격 이면엔 순수함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아버지를 닮았다. 부친인 김병연(77) 전 노르웨이 대사 겸 전 헤럴드미디어 회장은 지금까지 김 본부장을 키우면서 한번도 칭찬한 적이 없을 만큼 엄하고 무뚝뚝했다. 지금도 장남인 김 본부장을 만날 때면 항상 “너는 부족한 사람이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라”고 얘기할 정도다. 오죽하면 며느리가 “아버님, 칭찬도 좀 해주세요”라고 애교를 떨 정도였을까. 김 본부장을 짧게 접한 이들이 그에게서 찬바람이 분다고 말할 만큼 냉정하고 야박한 면도 없지 않다.

 

 “걔(김 본부장)가 속은 깊은 애야. 본부장이 되고 나서, 한번은 날 찾아와 대뜸 적지 않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더라고. 그냥 달라는 만큼 줬지, 어련히 알아서 쓸까 하고. 나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돈으로 우연히 알게 된 불우 어린이들을 도와줬다고 하더군.”

 

 김 본부장은 14살 때부터 미국 보스턴의 한 시골마을 학교에서 홀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던 탓에 유

학생활도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한번은 페인팅 아르바이트를 해서 막내 여동생까지 도와주기도 했다.

 

 김 전 대사는 학생 ‘김현종’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단어를 ‘국익’ ‘애국’이라고 전했다. 한국과 관련된 부정적인 뉴스가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 “가슴 아프네요”라는 말을 건네곤, 풀이 죽어서 쓸쓸히 방으로 돌아가던 아들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그리고 공부만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어렸을 적부터 외국에서 생활했으니 차별을 좀 많이 받았겠어? 외국애들보다 뒤처지는 걸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로 받아들였지. 본부장으로서의 지금 모습이 바로 예전 그 모습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국익을 위해 옳다고 판단하면 그냥 그 방향대로 쭉 가는 애야.”

 

 김 전 대사는 장남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부인의 공이 컸다고 했다. 교사 출신인 부인은 김 본부장이 고 3까지 방학 때마다 한국 학년에 맞는 한국 역사, 국어, 수학 교과서로 직접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매주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보냈다.

 

 김 본부장의 여동생인 김미형(43) 금호아시아나 법무담당 부사장도 큰 오빠인 김 본부장에 대한 기억을 ‘고집’ ‘애국심’으로 표현했다. “큰오빠는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내는 집요함과 고집이 있었어요. 성격도 불 같고(웃음). 제가 공부를 잠시라도 게을리하면 ‘애국’을 얘기하면서 ‘정신 차리라’며 혼을 냈죠. 마치 ‘바른생활, 도덕 교과서’ 같은 사람이었어요.”

 한번은 김 부사장이 작은오빠와 함께, 큰오빠가 아끼는 물건을 장난삼아 숨겼다가 단단히 혼났다고 했다. 아버지인지 오빠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매사에 진지하기만 한 큰오빠라서 더 장난기가 돌았었다.

 “큰오빠가 스쿼시, 테니스 같은 라켓 스포츠를 아주 좋아하는 ‘액티브’한 면도 있긴 했는데 마음의 여유는 항상 없었던 것 같아요. 좀 ‘릴렉스(relax)’하라고 큰오빠에게 충고하기도 했으니까요.”

 

 고집 세고 불 같은 성격의 김 본부장이지만 김 부사장의 기억엔 큰오빠는 순수하고 순진한 면이 많았었다. 김 부사장이 중학생일 때의 일이다.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김 부사장이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데 당황한 큰오빠는 위스키가 감기에 좋다는 얘기를 어디서 듣고 와서는 여동생에게 홍차를 넣은 코냑 한 컵을 먹였단다. 그녀의 감기가 낫기는커녕, 중학생인 김 부사장이 술에 만취해 온 집안이 난리만 났었다. 김 부사장은 그때 술에 취해 고생을 하긴 했지만 동생을 직접 낫게 해주겠다는 큰오빠의 마음만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맙다.

 

 82년 겨울엔 뉴욕에서 공부하던 김 본부장이 대학생이 된 여동생을 보기 위해 보스턴으로 놀러왔다. 미국에서 뿔뿔이 흩어져 기숙사 생활만 하던 삼 남매가 각자의 치열한 경쟁 사회로 뛰어들기 전 오랜만에 모여 즐겁게 놀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놀 줄 모르는 삼 남매는 학교 식당에서 쟁반을 빌려와 눈 덮인 학교 언덕에서 눈썰매만 하루종일 신나게 탔다. 어른 셋이서 말이다.

 

 

 

 

<H4 class=tit_article>노 대통령 사로잡은 김현종 본부장 </H4>
중앙일보|기사입력 2007-04-06 06:48 |최종수정2007-04-06 06:48 기사원문보기
 노무현 대통령이 2일 오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에 앞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악수하며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노무현 대통령이 2일 오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에 앞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악수하며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중앙일보 이정민.안성식 기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이던 2003년 2월.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별관의 인수위 사무실에서 미팅이 있었다.

김현종 세계무역기구(WTO) 법률자문관과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대표, 어린 시절을 순천에서 보낸 순천 토박이 미국인 인요한(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씨 등 40~50대 초반의 '젊은 지도자' 그룹 6~7명이 노 당선자와 만났다. 대부분 해외 유학파인 이들은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국가 원수 등 정.재계 지도자들 모임인 다보스 포럼의 '영(young)리더 회의' 멤버들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이끌어낸 노 대통령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첫 만남에서 노 대통령은 김 본부장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게 참모들의 얘기다. 당시 대통령 의전을 담당했던 서갑원 열린우리당 의원은 "마치 세계 지도를 머릿속에 꿰차고 있으면서 그 위에서 자유자재로 장기 말을 놓듯 세계를 보는 식견과 전문지식이 탁월했고, 특히 전략적 사고가 번뜩였다"고 기억했다.

이날의 기억은 노 대통령의 뇌리에도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해 5월 그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차관보)에 오른다. 노 대통령의 파격 인사다.

김 본부장은 당시 노 대통령에게 한.미 FTA 협상의 필요성과 수순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시장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경쟁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협상에선 이니셔티브(주도권)가 중요하다. 우리가 미국에 FTA를 하자고 먼저 제안하면 주도권이 그쪽으로 넘어간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미국 시장의 문을 열게 할 방법이 뭘까. 캐나다를 먼저 치는 것이다. 우리가 캐나다와 FTA를 한다는 얘기를 흘리면 미국이 달려들 것이다. 협상은 자신있다."

그리고 2005년 9월. 해외 순방을 위해 멕시코로 날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결심한다.

동석했던 고위 인사는 "몇 수를 미리 읽는 (김 본부장의) 전략적 마인드가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과 김 본부장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은 번뜩이는 아이디어, 판을 읽을 줄 아는 분석력, 전략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데 김 본부장은 세 가지를 모두 갖췄다"고 평했다.

두 사람은 일하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한번 잡은 것은 놓지 않는 집요함과 승부사적 기질이 닮았다.

외교부 대변인 출신인 열린우리당 정의용 의원은 "김 본부장은 정책 결정권자를 설득해 의제설정을 한 뒤 굉장히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소신이 뚜렷해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국회 답변 때도 할 말을 다 하는 형이다. 발언 기회를 주지 않으면 "잠깐만요. 이건 꼭 이야기해야 하는데요"라고 해 발언 기회를 얻는다. "노 대통령과 닮은꼴"이란 얘기를 듣는 이유다. 이런 스타일 탓에 때론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관료사회에서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노 대통령과 김 본부장은 2003년까지 일면식도 없었다. 두 사람이 걸어온 길도 너무 다르다. 김 본부장은 외교관(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의 아들이다. 중.고교, 대학을 해외에서 다녔고 석.박사도 미국(컬럼비아대)에서 마쳤다.

국내엔 학맥이나 인맥이 없다.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건너온 김 본부장은 1998년 홍익대 교수에서 외교부 통상전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의 일하는 모습을 본 외교부 동료들은 '일벌레'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호그룹 수석 법률고문인 김미형 부사장이 친동생이다. 김 부사장 역시 항공기 협상 일을 맡고 있다.




=== 노무현이 신임했던 김현종.. 읽다보며 깨달은바가 커서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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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oasis | 작성시간 08.04.21 '애국'의 순수함을 높이 사지만, '방향'이 중요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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