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끝자락은 나무가 봄부터 붙잡았던 나뭇잎과 인연이 엇갈리는 계절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엇갈리다’는 “마주 오는 사람이나 차량 따위가 어떤 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만나 서로 지나치다”라는 뜻이다.
‘엇-’은 명사나 용언 앞에 붙어 ‘비뚜로’, ‘잘못’, ‘어긋나게’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엇대다, 엇나가다, 엇물다, 엇바꾸다, 엇박자, 엇섞다 등에 ‘엇-’과 같은 뜻이 담겨있다. ‘갈-’은 ‘가르다’의 어간이다. 따라서 ‘엇갈리다’는 ‘서로 어긋나서 맞물리지 못하다’라고 바꿔 쓸 수 있다.
●알게 모르게 피고 지는 짝사랑, 산수유
얼마 전 나는 한 여인과 마음이 엇갈렸다. 남녀가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면 꽃처럼 감정의 싹을 틔운다. 봄이 오면 꽃과 잎으로 변신하는 겨울눈처럼 처녀, 총각의 마음도 사랑의 겨울눈을 키운다.
따스한 봄날, 겨울눈은 꼬깃꼬깃 접혀진 꽃잎을 펼친다. 다양한 빛깔의 꽃잎이 세상에 드러나면 삭막했던 숲은 일순간 화사해 진다. 그러나 꽃잎도 시간이 흐르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자유낙하 운동을 시작한다. 사랑이 데워지면 식게 마련이듯 꽃은 피면 반드시 진다. 그런데 이성을 떠나보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듯, 나무와 꽃이 엇갈리는 방식도 다양하다.
‘짝사랑’을 연상시키는 꽃은 산수유(Japanese Cornelian Cherry)다. 연노란 빛깔이라 그 마음이 열정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꽃송이의 크기도 안개꽃처럼 작게 꽃봉오리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산수유는 두루뭉술하게 피었다가 언제 지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춘다. 다만 그 마음은 순수했다. 그래서 가을에는 새빨간 열매가 열린다.
●어설픈 사랑의 종말, 목련
짝사랑 다음에는 ‘첫사랑’의 꽃, 목련(Magnolia)이다. 목련(木蓮)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연꽃처럼 커다랗게 피는 꽃이다. 목련은 꽃봉오리가 펼쳐지지 않았을 때가 가장 절정이다. 꽃봉오리가 벌어지면 첫사랑의 결말처럼 처참한 이별을 맞이한다.
목련의 꽃잎은 일교차에 예민한데, 일교차가 심할수록 꽃잎은 어둡게 멍이 든다. 그리고 꽃잎 한장 한장 바람에 저항하다 느리고 무겁게 떨어진다. 나무에 달렸던 꽃잎은 아름다웠지만 떨어진 꽃잎은 멍들어 있고 으깨져 있다. 어설픈 사랑의 종말이다.
옛 문헌에 따르면 “목련의 꽃은 향기가 강하므로 침실에 한 송이의 꽃이라도 두면, 그 방의 사람은 그날 밤으로 죽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목련 꽃이 필 때는 그 나무 그늘에서 자는 법이 없다. 잘못된 첫사랑은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일례로 할아버지가 친구의 손녀와 결혼시키는 바람에 첫사랑과 엇갈렸던 시인 김소월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서른 세살의 나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풋풋한 설렘과 유쾌한 헤어짐, 벚나무
‘풋풋한 사랑’의 꽃은 벚나무(Cherry Blossoms)다. 서울 여의도 윤중로와 경남 진해에 벚꽃이 활짝 피면 젊은 남녀들이 몰려든다. 그들도 사랑의 꽃을 활짝 피운다. 나무 한 그루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벚나무는 떼 지어 꽃을 피운다. 드러내놓고 하는 사랑이자 남들도 다 하는 사랑이다.
벚나무의 수명은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와 비교하면 매우 짧다. 어떤 이는 “이것이 하늘과 땅의 이치에 매우 합당하다”며 “꽃을 많이 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했다.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만큼 화끈하게 산다는 말이다.
벚꽃은 산수유처럼 알게 모르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목련처럼 한장 한장 쉬엄쉬엄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꽃잎 하나하나가 바람에 날려 우수수 떨어진다. 그 모습 또한 눈부시다. 짝사랑도 해보고 풋사랑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풋풋한 설렘과 유쾌한 헤어짐이다.
●원숙한 남녀의 마지막 사투, 동백꽃
끝으로 ‘완숙한 사랑’의 꽃은 동백꽃(Common Camellia)이다. 붉다 못해 토해 버린 피의 농도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을 쏟은 색상을 지닌 꽃이다. 그만큼 불꽃같은 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마지막 사투다.
동백꽃은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는 겨울, 인고(忍苦)의 기다림 끝에 붉게 피어나는 원숙함의 결정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헤어짐은 순간이다. 마음이 엇갈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떠한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동백꽃이 새빨간 꽃송이를 통째로 떨어뜨리는 이유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때문에 어떤 이들은 동백꽃이 알싸한 향기를 지닌 노란 빛깔의 꽃으로 아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백꽃은 향기가 없으며 빨간 꽃이다.
동백꽃은 남부 해안가에 자라는 난대성 식물로 강원도에선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없다. 남부지역 주민들은 동백나무 열매를 짜서 머릿기름으로 사용하는데, 강원도 주민들은 생강나무의 열매를 짜서 머릿기름으로 사용한다. 이 때문에 생강나무를 강원도에선 동백나무라 부른다. 소설에서 말하는 ‘알싸한 향기’란 바로 생강냄새다. 생강나무에서 생강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생강냄새가 강하게 날 뿐이다.
김유정의 소설 제목은 《생강나무꽃》으로 바뀌어야 맞다. 소설 속 주인공인 10대들이 모든 것을 내건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강나무는 산수유와 매우 닮아서, 일반인은 구별하기 어렵다. 소설에서 점순이가 주인공 ‘나’를 짝사랑하는데, 함께 포개져 쓰러질 때 알싸한 향기로 생강나무는 출연한다. 역시 생강나무는 산수유와 함께 ‘짝사랑’을 연상시키는 꽃이다.
●“나날이 생명력을 더해가고, 또 생명력을 더해 갈 것”
모든 꽃은 태어날 때부터 나무와 엇갈리는 운명을 지녔다. 그것은 생장호르몬인 옥신의 분비가 끝나고 노화호르몬인 에틸렌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에틸렌이 분비될 때 나무와 꽃, 나무와 잎은 서로 엇갈림을 준비한다. 에틸렌이 분비되면 떨켜층이 만들어지고, 떨켜층은 가수분해되면서 녹아내린다. 그리고 꽃과 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이처럼 모든 식물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겨울눈을 만든다. 나도 이제까지 만들던 겨울눈을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야 겠다. 그대여 나이 듦을 걱정마지 마오. 우리는 “日日生, 又日生。(일일생, 우일생) : 나날이 생명력을 더해가고, 또 생명력을 더해 갈 것”이니, 우리의 엇갈림은 이제 더는 없을 것입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