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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본위론의 비판에 대한 반박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06.02|조회수1,144 목록 댓글 0

교육본위론의 교육열 재개념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

                                오재길, 한효관 (강원대학교 대학원)



1. 머리말


‘교육열’은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을 대변할 때 자주 쓰이는 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교육열이라는 말은 그 개념이 추상적이어서 각각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만큼이나 개념들이 다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교육열이라는 말만 있고 그것을 개념화하려는 노력들은 없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교육열에 관심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한국의 교육열에 대한 개념정의가 시도되었고 지금도 후속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종각 교수는 교육열을 인간의 기본욕구로 보면서 교육열을 교육열에 따른 현상이나 행동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며 이를 구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교육열은 인지체제인 교육관과 행동체제인 교육행동과는 달리 교육에 관한 동기체제이며, 교육열의 본질적 속성으로 자녀애와 성취욕구의 결합체로 보면서 교육열의 주체를 학부모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열은 비난하고 억제하기보다는 자원화 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교육열 개념방식은 단순히 교육열을 개념화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열의 후속 논의가 가능하게 하고 교육열에 관한 가시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교육열의 속성이나 법칙까지 논의하고 있다. 

이 밖에도 교육열 연구를 ‘교육열’을 파악하는 맥락에 따라 크게 첫째, 사회 · 문화적 맥락에서의 교육열 연구, 둘째, 경제적 맥락에서의 교육열 연구, 셋째, 정치 · 행정적 맥락에서의 교육열 연구, 넷째, 심리적 맥락에서의 교육열 연구, 다섯째, 역사 · 문화적 맥락에서의 교육열 연구 여섯째, 비교 · 문화적 맥락에서의 교육열 연구 마지막으로 앞에서 열거한 교육열과는 차별되는 방식과 개념으로 교육열을 재개념화하는 교육열 연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교육열의 재개념화 연구가 앞의 연구들과 차별성이 있다는 말은 그들 스스로 교육열을 구분하는 방식인 수단적인 교육열과 본질적인 교육열 중에서 앞의 연구맥락들은 모두가 수단적인 교육열에 해당하고, 교육열의 재개념화 연구는 본질적인 교육열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교육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은 교육열의 여러 측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기는 하나 교육열에 대한 각각의 개념들은 그 타당성이 이론과 실제 양쪽 모두의 측면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양한 교육열 개념화에 대한 타당성 검토 내지는 비판을 가한 연구들은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교육열에 관한 검토보다는 앞에서 밝힌 기존 연구맥락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열을 재개념화하고 있는 주장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즉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의 주요 주장들이 무엇이며, 교육열을 어떻게 재개념화하고 있으며, 개념화 방식의 문제점들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이인숙(2001)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숙명여대 석사논문)를 주요 검토대상으로 삼았다.


2. 교육본위론에 대한 이해


교육본위론이라는 말 자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생소하다. 그래서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 개념화에 대한 분석에 앞서 교육본위론자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교육본위론자들의 주장을 토대로 핵심적인 사항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교육본위론이란 장상호 교수가 교육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하여 교육의 ‘재개념화’를 시도하고 그런 연유로 ‘교육 재개념화 이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럼 교육의 개념을 왜 다시 개념화해야만 하는가? 교육본위론자들은 기존의 교육학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즉, ‘교육=학교태’로 보는 것과 학교현상을 이해하거나 처방하기 위해 타학문을 응용하는 것이 교육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장상호 교수에 의하면 교육을 ‘학교’라는 공간에 국한시킴으로 말미암아 학교에서 일어나는 비교육적 현상도 교육으로 착각하며, 정작 생활전반의 수많은 교육현상은 간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오크쇼트가 말한 ‘논점이탈의 오류’와 ‘범주착오’라는 말을 사용하여 교육학이 철학, 사회학, 심리학, 행정학 등과 같은 다른 학문적 개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교육의 논점과 범주가 교육에서 다른 곳으로 이탈하거나 착오를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는 기존의 개념들과 차별화된 의미를 제시하고자 ‘품위’, ‘상구’, ‘하화’ 와 같은 불교용어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의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교육본위론의 기본 관점들 중에 교육의 구조, 소재, 가치, 그리고 교육의 주체와 관련된 논의들을 살펴보겠다. 


(1) 교육의 구조


교육본위론에서는 교육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속계(世俗界)와 세속계의 제약없이 내면의 자유와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수도계(修道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의 세계인 교육계(敎育界)로 나눈다. 교육계는 사람들 각자가 수도계에서 차지하는 현재의 품위수준에서 더 높은 품위를 계발하는 과정을 ‘상구(上求, ascending education)'로 그리고 그러한 품위를 타인에게 전파하는 과정을 ’하화(下化, descending education)'라고 한다. 이러한 각각의 활동에 대한 총체적인 세계를 대변하는 말로 ‘상구계’와 ‘하화계’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결국 상구계와 하화계라는 말은 각기 배움과 가르침의 세계라고 이해해도 무난할 듯하다.


(2) 교육의 소재


교육본위론에 있어서 교육의 소재는 수도계 또는 수도계의 품위 전체를 지칭한다. 품위(品位)란 말은 수도계의 수준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표현한 말이다. 무수한 수도계는 무수한 품위를 갖는 것으로 가정된다. 품위는 체험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수준에 따라 수도계를 감별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다르다.

교육 소재라는 말은 교육 내용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뜻이라고 여겨진다. 흔히 학교에서는 좁은 의미로서의 교육내용은 교과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의 소재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재로 삼는다. 즉, 바둑, 검도, 선가, 예술, 도덕 등 학교교육내용을 포함함을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교육적 소재가 될 만한 문화유산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교육의 소재는 항구적이고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주체가 자신의 현실의 제약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동적이고 적응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계는 결국 수도계의 품위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서 차이(이를 품차라고 함)가 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품위를 높이는 과정이 교육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 교육의 가치 및 주체


교육본위론에서는 교육의 가치를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로 구분한다. 교육본위론에서는 외재적 가치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닌 교육활동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는 내재적 가치를 추구한다. 교육본위론입장에서의 교육의 주체는 “인간은 교육하는 동물이다”라는 전제를 토대로 스승인 하화자와 제자인 상구자가 된다. 스승과 제자라는 교육적 관계는 품위의 차이를 근거로 선진과 후진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해서다. 이들의 관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로 제자가 스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서로가 공조관계를 성립시키게 되며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고정된 역할과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상으로 교육본위론의 기본 관점들을 살펴보았는데, 다음 장에서는 교육본위론 관점에서는 교육열을 어떤 식으로 보는 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3.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


교육본위론에서는 교육열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본성으로 본다. 그래서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교육열 즉 사회, 경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교육열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며, 고무되고 장려될 가치가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본위론에서 교육열 재개념화는 교육본위론에서 교육을 재개념화할 때의 맥락과 같다. 교육열의 개념적 구성요소로는 첫째, 자신의 현재 품위를 높이고자 하는 발견의 열정인 상구열과, 둘째, 타인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여 자기보다 품위 면에서 뒤떨어진 후진을 그보다 나은 품위로 이끌어 주는 설득의 열정인 하화열, 셋째, 상황에 따라 교육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교육적 관계열, 마지막으로 특정 수도계 및 품위에 대한 소재열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교육열의 주체는 모든 인간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은 본연적으로 상구하고자 하는 열정과, 하화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교육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열정과 특정 소재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한 소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교육열들이 얼마나 발현되고 지속되는 가는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교육본위론의 교육열에 대한 주요 관심은 이런 교육열을 발현시키고 촉진시키며 강화하는 것일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본위론자들의 교육열 개념화에 대해 정리를 해 보았는데, 다음 장에서는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에 따른 문제점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4.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에 대한 비판


(1) 교육본위론의 주장에 대한 검토


  1)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

교육본위론에서는 기존 교육이라는 것이 내재적 가치를 도외시하고 외재적 가치의 수단으로만 삼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마찬가지 논리로 교육본위론 및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교육의 도구적인 가치는 무시하고 내재적 가치만을 목적으로 삼으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우리가 교육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구적인 가치와 내재적 가치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개념상으로만 가능한 것이지 결코 실제 사태에서 이런 식의 구분이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육본위론자들은 이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인숙(2001)의 논문에서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그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에베레스트 산에 왜 올라가냐’는 질문에 ‘산이 좋아서’ ‘산에 오르는 것 그 자체가 좋아서’라고 대답한다면 이때는 이 사람은 등산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때 이 사람은 등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가치, 즉 산에 오르는 보람이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등산이 가지는 외재적 가치, 특히 물질적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등산이 좋아서 산에 오르는데 그것이 생계에도 도움이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산에 오르는 일은 등산의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가 동시에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은 드물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는 한계 때문에 한 가치에 우리 자신을 집중하게 되면 그것만 부각되고, 다른 가치들은 우리와 단절되거나 배경으로 후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이 좋다’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애매모호한 말이다. 본위론에서는 ‘좋다’라는 말은 ‘그냥 좋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산이 좋다라는 말을 따지고 보면 땀흘린 뒤의 상쾌감 및 성취감, 맑은 공기가 주는 활력과 쾌적함, 자연감상 등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총체적인 말로서 ‘산이 좋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산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산이 주는 여러 가지 좋은 점들 때문에 산에 매료되는 것이고 이런 것을 언어로 낱낱이 표현하기 힘들기에 ‘산 자체가 좋다’라고 말할 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의 경계선은 그리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육본위론에서도 이런 경계선들을 구체적으로 그어 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본위론에서는 오히려 삶의 세계에 있어서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가 동시에 추구되는 상황은 드물다는 표현을 하면서 오히려 삶의 세계에서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현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교육은 개념상으로만 파악해야 할 일은 분명 아니다. 교육은 내재적, 외재적 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극단으로 치우쳐 현실성 없고 마치 교육에 무슨 순수하고 고상한 가치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미화함으로써 이상적인 신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극단을 떠나서 자연스런 상황에서 보면 교육에서 이 두 가지의 가치는 따로 떼어 내기 힘들 정도로 뒤엉켜있다. 두 가지의 가치들을 명확하게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세계, 논리의 세계, 개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세계들이 실제의 세계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생기는 첫출발은 실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점점 가지를 뻗어 사변적인 논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학문 따로 삶 따로, 이론 따로 실제 따로, 이렇게 따로 국밥식의 교육학이 되어버린 것도 이런 식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과연 아무런 현실적인 고려 없이 교육본위만을 쫓아 가르치고 공부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이런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면 과연 몇 명이나 추종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본위론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면 교육의 가치인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가 현실에서는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단지 명분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너무 심한 말일까? 만약 순수한 교육본위론자라면 불가에서 ‘도’를 닦는 사람처럼 인정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특히 교육의 핵심이자 본위를 이런 식으로 설정하고 재개념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생명이나 선(善)도 개념상으로만 가치가 있지 그 가치가 실현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과연 스스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무엇이 가치가 있다는 말에서는 항상 그 스스로 존재하는 가치보다는 다른 것과의 관련성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교육에서도 아무리 뜯어보아도 교육 스스로 가치 있다고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 아직까지 속시원한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교육본위론자들이 내재적 가치 추구에 대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이인숙(2001)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의 위대한 지적 발견과 이론의 생성은 물질적 보상이나 다른 사회적 보상 등에 집착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과 배움 자체에 대한 열정에 불탔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역으로 생각해서 인류들에게 물질적 보상이나 다른 사회적 보상을 줄 수 없는 지적 발견이나 이론의 생성이 과연 인류 역사상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앎과 배움 자체에 대한 열정이 그야말로 본위가 될 수 있으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발견과 이론의 생성 역시 모든 인류들에게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맛보게 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위대한 지적 발견과 이론의 생성은 항상 열정을 포함해서 인류들에게 내적 · 외적 보상을 모두 포함시키는 것들이지 결코 내적 보상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며,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붙을 수가 없을 것이다.


  2)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

본위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본질이고 본위라고 한다. 이는 외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비본질이고 비본위라는 말인데, 그럴 만한 기준이 있는가? 그리고 본질은 뭔가?  아마도 이것만큼 밝히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물’의 본질은 뭔가? H₂O  로 시작하는 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순수하게 정제된 100%의 물이 물의 본질인가? 이는 순수한 물이 필요한 실험실에서나 본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목이 몹시 타는 운동선수에게는 시원한 물이 미지근한 100% 순수한 물보다는 더 본질이다. 그러나 물은 분명 모래하고는 다르다. 이렇듯 물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은 실험실에서 물에 대해 화학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의 본질은 물과는 다른 모래라는 것과 비교할 때 더 명확히 드러나며, 물의 본질은 상황에 따라 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강조점과 기준들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교육본위론에서는 교육의 개념을 마치 물의 본질을 수소분자 2개와 산소분자 1개가 결합한 형태로만 이해하려고 하고 그 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물에 관한 본질 문제는 그나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교육의 본위라고 내 놓은 것들은 왜 그것이 교육의 본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 듯하다. 즉 가르치는 보람과 배우는 기쁨으로 요약되는 교육본위론에서는 교육본위로서 가르쳐야 할 소재(교육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도 없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뚜렷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소재에 대한 부분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육의 소재로서 수도계의 품위를 말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품위라는 말처럼 구체성이 떨어지는 말도 없을 것이다. 교육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근거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전에는 이런 비판은 항상 따르게 마련일 것이다.

정당화 문제는 교육본위론에서 품위를 높이는 과정들을 피터즈의 선험적 정당화(내재적 정당화)방식으로 설명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정당화 방식은 이홍우 교수의 해석처럼 순전히 논리적 정당화 방식이다. 선험적 정당화는 정당화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본 연구자처럼 정당화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품위를 높이자는 데 왜 품위를 높이는 일이 좋은 것인지 근거나 이유를 대라는 것은 어쩌면 웃기는 질문일수는 있다. 그러나 품위를 높이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교육의 본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정당화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즉 그것이 좋다고 왜 교육의 본위라는 지위까지 차지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유발한다. 그런데 교육본위론에서는 그들의 주장에 관한 정당화는커녕 교육의 본위가 될 수 있는 근거나 이유는 생략한 채 오로지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며, 교육의 본위라는 말을 선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2) 교육열 재개념화에 대한 검토


  1) ‘동음이의(同音異義)식 교육열’에 대한 비판

교육열이라는 말은 이미 사회적으로 함의를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용어이다. 교육열이 사회적으로 이미 함의를 지닌 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교육열을 재개념화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재개념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교육열은 개념화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교육열이라는 말은 보통명사가 아닌 시대적 의미와 시대정신을 담지 하고 있는 고유명사에 가깝다. 교육본위론에서는 확실히 교육열을 고유명사로 보기보다는 보통명사로서 접근하여 결국은 기존의 교육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고유명사를 탄생시켰다. 즉, 교육열이라는 말을 두고 지칭하는 바가 다른 또 하나의 교육열인 동음이의(同音異義)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교육열의 개념을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개념상의 혼란을 주고 교육열의 용례가 달라지게 하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정순우(1998)는 이와 관련해서 교육열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다가는 교육열에 관한 논의가 자칫 호사가적인 차원이나 미분화된 학문적 논의의 수준으로 전락하여 ‘헛열’만 일으킬 위험성이 높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이 기존 교육열과는 다른 동음이의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교육열에 관한 연구의 관심사 및 목적이 다르다는 점이다. 교육열이라는 말은 교육실제사태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건져 올린 용어로서 많은 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종각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교육열의 논의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 사회의 교육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적절히 담아 낼 수 있어야 하며, 시대를 뛰어 넘어 논의가 가능한 논리적 구성력을 가져야 하며, 해외(공간)의 행동과 현상과도 같은 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는 논리적 일반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논의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축적가능한 지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 라고 한다. 즉 교육열 논의는 실제를 위한 이론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은 교육본위론 자체가 교육의 개념을 재개념화하는 이론이며, 새로운 교육개념 하에 교육열도 그 개념 안에서 해석해내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즉 이론을 위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존 교육열의 관심사는 분명 교육열이 발산되고 있는 사회에 무게중심이 있는 반면에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은 교육본위론이라는 개념의 하위요소로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은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교육열이라는 말과는 분명 차별성이 있으므로 교육본위론에서 주장하는 교육열이라는 말은 다른 적절한 말로 바꿔야 한다.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하화열은 결국 학습자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열의이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봉영(2000)교수는 하화열과 같은 열정은 기존 교육열과는 구분해서 학습열, 학구열, 향학열 등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2) '이상주의적 교육열'에 대한 비판

교육본위론에서 주장하는 교육열은 분명 고무되고 장려되어야 할 열이다. 즉 가르치는 보람(설득의 열정)과 배우는 열정(발견의 열정)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열정이다. 그러나 이런 열정이 외재적 가치가 배제된 채 오로지 내재적 가치 추구를 할 때 생성되는 것이거나 발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순수하거나 순진한 생각이다.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열을 ‘희열’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목욕탕 속에서 부력의 원리를 깨닫자 하도 기뻐서 벌거벗은 채  ‘유레카’(난 알았다!)라고 외치며 거리로 뛰어 나왔다는 아르키메데스의 희열의 세계를 지(知)적 보람의 세계로 보며, 이런 세계는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교육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유는 아전인수격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벌거벗은 지도 모르고 좋아했던 이유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편적인 생각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를 좀 더 연장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헤론 왕이 아르키메데스를 불렀다.

헤론 왕 : "어떻게 생각하오? 이 왕관은 정말 순금으로만 되어 있소?"

아르키메데스 : "무슨 말씀입니까?"

헤론 왕 : "순금을 주고 왕관을 만들라고 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세공이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라던데...."

아르키메데스 : "알았습니다. 이 문제는 조금 어려우니 며칠 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왕은 혹시 세공이 금 일부를 빼돌리고 금과 빛깔이 유사한 다른 금속을 같은 무게만큼 넣어 합금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이를 밝혀 보라고 아르키메데스에게 명령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그는 며칠 밤낮을 생각을 계속하였으나 왕관의 부피를 알아낼 재주가 없었다. 그렇다고 왕의 왕관을 녹여 부피를 알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 왕의 왕관이 순금으로만 된 진짜였다면 왕에게 심하게 혼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Yahoo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발췌.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그 자체로 기뻐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그렇게 희열을 느끼게끔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오히려 아르키메데스의 그 때 상황에서는 무슨 원리를 발견한 것 그 자체보다는 왕이 엄명한 문제에 대해 해결점을 찾았다는 생각이 그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이러한 상황맥락이 없이 그냥 목욕탕에 있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알몸으로 뛰쳐나왔을 리는 없다.

희열이라는 것은 일 자체에서 획득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 희열의 강도는 분명히 달라진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선수와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7:0, 8:0으로 이기고 있는 가운데 추가 골을 넣은 선수의 희열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비추어 보면 교육본위론에서는 교육열에 대한 본질의 규정을 너무 이상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비현실적인 교육열 본질규정이 설정됨에 따라 그에 따른 후속 논의들이 모두가 현실과는 동떨어졌으며, 결국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교육본위론에서 주장하는 교육열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스스로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할 때는 사회적인 진공상태에서나 지극히 개념적인 수준에서나 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교육이론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힘이 없다. 현실을 떠나 공중을 떠다니는 이론들은 지속적으로 공중에서만 이론들이 오가고 있을 뿐이다. 교육은 분명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붕붕 떠다니는 이론들은 현실과는 관계없는 오로지 그런 이론을 쫓아다니거나 그에 대한 반론을 위한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은 실제 상황에서 그들의 말대로 교육이 수단시(?)되는 현상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보다는 교육이 도구적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는 ‘말이나 글’에서만 유독 강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론은 결국 실제의 이해를 위한 이론이 되어야 하고, 실제는 이론의 공급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이론체계를 세운다고 실제를 도외시하고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는 너무나 이론적으로만 지당한 규범적인 주장만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참  고  문  헌


이수연(1988).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 관한 반증적 사례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인숙(2001). “교육본위론 관점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종각(1988). “교육열, 어떻게 개념화 할 것인가?” 제 124차 학술대회발표자료집. 한국교육사회학회. 61-87.

이종각(1995). 교육인류학의 탐색, 제10장. 서울: 하우.

이종각(1996). 교육사회학 총론, 제11장. 서울: 동문사.

이홍우(1988). 교육의 목적과 난점, 서울: 교육과학사.

이홍우(1992). 교육과정탐구, 서울: 배영사.

정순우(1998). “한국사회 교육열에 관한 역사 · 문화적 접근.” 제 124차 학술대회발표자료집. 한국교육사회학회. 1-13.

조성인(2001). “교육열의 내재적 · 외재적 동기와 학부모의 교육에 대한 태도.”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최봉영(2000). “교육열의 역사적 전개와 성격.” 교육열의 사회문화적 구조, 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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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교육열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교육본위론의 교육열 재개념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대한 반박


첫째, 교육을 내재적 가치 추구활동으로만 이해하고 그 밖의 외재적 가치는 도외시함으로써, 교육을 실제와는 동떨어진 개념 안에서만 파악하려는데 문제점이 있다.


-> 교육본위론은 교육을 다른 여타 세계와 구분짓는 교육만의 독특한 특징에 주목하지만 그렇다고 여타 세계를 배척한 순수한 교육의 세계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모든 세계에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가 공존하듯이 교육 역시 그러하며 어느 한 쪽만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육학도로서 세계의 일부인 교육에 편향적 관심을 가지며 교육을 교육답게 하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탐색하는 것과 교육의 외재적 가치를 배척하며 공허한 교육의 이론을 만드는 것은 동일시 될 수 없다.

 


둘째, 교육본위로서 가르쳐야 할 소재(교육내용)에 대한 근거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뚜렷한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오로지 주장만 하고 있다.


->교육소재, 수도계는 너무나 방대한 세계로 그것을 엄밀히 규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교육의 관심은 교육의 원칙하에 교육소재인 수도계를 유효적절히 재구성하는 것에 있지 특정 수도계의 원리를 소상히 밝히거나 특정 수도계를 정당화하는 것에 있지 않다. 특정 수도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그 해당 수도계 종사자의 몫으로 교육학의 고유영역을 벗어난다.

 


셋째, 교육열이라는 말을 두고 지칭하는 바가 다른 또 하나의 교육열인 동음이의(同音異義)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교육열의 개념을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개념상의 혼란을 주고 교육열의 용례가 달라지게 하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상식의 교육과 교육본위론의 교육은 용어만 같지 완전히 다른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경우는 언어의 세계에서 비일비재한 것이다. 개념상의 혼란은 올바른 개념 정립을 위해 불가피하다 할 수 있다. 오히려 개념상의 혼란을 피하기위해 낡은 개념을 제도적 권위와 타성하에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하겠다.



넷째,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 재개념화는 지나치게 규범적이고 당위적이며, 교육열 발현도 내재적 가치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 현실 세계의 교육 사태는 여타의 삶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여러 가치가 혼재된 상황이지만 그것을 이론화하는 교육본위론은 교육을 다른 세계와 구분짓는 내재적 가치를 변별하고 교육의 자율적인 영역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런면에서 교육본위론이 비현실적, 사변적, 규범적, 당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와 이론, 교육과 교육학의 범주차이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론은 언제나 실제를 충실히 담아내야하지만 그렇다고 실제와 동일해야 될 필요는 없다.



다섯째, 교육본위론에서의 교육열 범주 논의는 교육열의 주된 발현 장소인 학교 교육열 현상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는데도 적절치 않으며, 학교 밖의 교육열 현상을 포착하기에도 편협하고 시대에도 뒤떨어진다.


->학교 현상을 심층적,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에는 많은 분과학문이 필요하며 따라서 교육본위론만으로는 당연히 심층적, 포괄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다만 교육본위론은 학교의 교육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적절한 개념틀이 될 수 있다. 또한 교육본위론은 학교 이외의 가정, 학원, 직장, 사이버공간 등의 교육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도 적절한 개념틀이 될 수 있다. 교육본위론은 특정 공간에 귀속되는 현상이 아닌 삶의 보편적인 양태로서의 교육에 주목하며 이러한 이론은 여러 교육공간에 공히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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