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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자료

교육철학: 교육과 가치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3,992 목록 댓글 0

이돈희·조화태(1995). 『교육철학』. 서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pp. 12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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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교육과 가치


개 관


교육은 모종의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며, 교육의 과정은 끊임없는 가치판단과 선택의 과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을 흔히 가치기업이라 한다. 교육에 있어서 가치의 문제는 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장에서는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 교육의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교육에 있어서 제기되는 가치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연구문제


1.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의 특성을 이해한다.

2. 교육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의 의미와 한계를 이해한다.

3. 가치의 본질에 대한 여러 윤리학설의 관점을 이해한다.

4. 가치문제에 대한 합리적 논의와 합의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근거를 이해한다.

5. 교육목적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한다.

6. 교육의 개념과 교육목적과의 관련을 이해한다.

7. 개인적 측면에서의 교육목적을 이해한다.

8. 사회적 측면에서의 교육목적을 이해한다.

9. 교육의 가치와 그 정당화의 근거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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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


   4.1.1.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의 특징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교육의 개념 속에는 의도성과 가치지향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교육은 그 개념상 어떤 의도나 목적의 실현을 추구하는 활동인 것이다. 교육을 계획하거나 실천하려고 할 때 어떤 의도 하에서 교육을 할 것이냐의 문제, 즉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의 하나이다. 가치의 판단과 선택의 문제는 교육의 목적을 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교육의 전 과정 속에서 제기된다. 교육의 목적이나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기 위하여 교육내용을 선정 조직하고, 교육적이고 효율적인 교육방법을 선택하고, 그리고 교육의 결과를 모종의 기준 하에서 평가하고 해석해 나가는 과정은 모두가 가치 판단과 선택의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교육의 과정은 끊임없는 가치 판단과 선택의 과정인 것이며, 가치 판단과 선택을 배제하고서는 교육활동이 존재할 수 없다. 가치의 선택과 판단의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특징을 한마디로 일컬어 ‘가치기업(價値企業)’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물론 교육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의도적 행위는 가치 선택과 판단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가치기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의 특성을 가치기업으로서 부각시키는 것은 교육에 있어서 가치 판단과 선택의 문제가 갖게 되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 때문이다.

   첫째, 교육은 가치 판단과 선택의 주체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이 대상으로 하는 피교육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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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미성숙자로서 교육을 통해 제공되는 경험에 의해 중대한 영향을 받는다. 교육은 미성숙자인 피교육자를 대상으로 하여 그를 어떤 가치로운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활동인 것이며, 그 결과는 피교육자 개인의 사람됨과 그의 삶에 광범위하고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둘째, 교육적 가치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가치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교육을 포함하여 인간의 각 영역의 활동은 대부분 이러한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추구한다. 가치의 종류를 지적인 가치, 심미적 가치, 종교적 가치, 경험적 가치, 도덕적 가치, 생리적 가치 등으로 구분할 때, 예컨대 과학은 지적인 가치에, 예술은 심미적 가치에, 종교는 종교적 가치에, 경제활동은 경제적 가치에 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은 이러한 모든 종류의 가치들에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교육은 그러한 다양한 가치들의 ‘가치’에 대해 가르치며, 교육의 목적이나 내용, 방법 자체는 그러한 다양한 가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된다.

   셋째, 모종의 가치의 실현을 위해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과정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자체적인 윤리가 있다. 그러한 윤리를 일컬어 ‘교육적인 윤리’라 할 수 있다. 교육은 그 과정이 ‘교육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적’인 방법과 과정을 통하여 교육은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의 과정과 방식을 ‘교육적’이게끔 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교육을 바라보는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

   넷째,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에게 도덕적 책임이 부과된다. 인간 형성과 변화를 이루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교육 행위를 실천하는 교육자에게 책임이 따른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적 행위는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며, 그 영향 역시 단기간 내에 관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교육적 행위의 영향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교육 행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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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반하여 교육자에게 즉각적으로 책임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까닭에 교육자들은 자신의 교육 행위에 대해 책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피교육자를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자의 모든 행위는 크건 작건 피교육자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러한 영향, 즉 교육의 결과에 대해서 교육자에게는 도덕적 책임 의식이 요구된다.


   4.1.2. 교육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의 추구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은 모종의 가치판단과 선택 위에서만 성립한다. 어떤 교육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특정한 가치를 선택하거나 배척하게 되는 가치 판단과 선택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 교육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활동이다. 교육을 통해 가치롭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추구해 나갈 수는 없으며, 따라서 어떤 준거에 의하여 교육적 가치의 대상 중 보다 가치로운 것을 선택하고 덜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게 된다. 예컨대 교육내용을 선정하고자 할 때, 수많은 교과목 중 어떤 교과목을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서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선택된 교과목 내에서도 어떤 이론이나 지식내용을 선정하여 가르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 때 어떤 내용의 교과목을 가르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그 교과목을 보다 가치로운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며, 그 외의 내용이나 교과목들은 덜 가치로운 것으로 또는 가치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여 배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교육의 과정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가치의 판단과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누구에 의해서,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으로서 충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간단히 원론적인 답변만을 제시하기로 하자. 교육적 가치 판단과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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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 사이의 합리적 논의와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에 관련된 구성원 간의 논의와 합의에 입각하여 가치 판단과 선택이 이루어져야만 그러한 가치 판단과 선택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적 가치 판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의 이해(利害)가 관련된 상황에 있어서 가치 판단은 보편타당성을 지녀야 하며, 이것은 가치 판단에 있어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원리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오늘날의 교육은 사회적, 국가적 사업으로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육적 가치 판단의 결과는 다수의 개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점에서 교육에 있어서의 가치 판단과 선택은 그 보편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적 가치 판단과 선택에 있어서 보편타당성을 유지하는 것은 교육이 그 사회의 공동선을 부각시키고 사회적 통합성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관건이 된다.

   교육에 있어서 이와 같은 보편타당성을 확보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치중립성이 요구되어진다. 교육적 가치 판단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의 원리는 곧 교육적 가치 판단이나 선택이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거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 기준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한 기준이 없을 경우 ‘중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중립적’이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똑같이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육적 가치 판단에 있어서 구성원들 간에 보편적인 판단기준이 없으며 합의가 어려운 경우,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옹호하는 가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나 집단이 옹호하는 각각의 가치를 중립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배제할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교에 관한 것을 교육내용으로 다룰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려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과연 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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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은가, 그리고 종교에 대해 가르친다고 할 때도 어떤 특정 종교만을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종교에 대해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인 입장에 따라 크게 의견을 달리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방향으로의 합의를 도출해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만약 합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만 가치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일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배척함이 없이 또한 종교적인 태도나 비종교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이를 옹호하거나 매도함이 없이, 종교의 의미나 성격, 종류, 그 한계나 문제점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합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만약 어떤 교사가 특정 종교만을 신봉하도록 가르치거나 또는 비종교적인 사람들은 비종교적이라 해서 매도한다면 그는 중립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예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이 요구되는 것은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이나 ‘신앙의 자유’와 같은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은 그 자체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 즉 ‘신앙의 부자유’나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각각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이라 할 수 없는 원칙들이다. 이러한 까닭에 앞의 경우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의 원칙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가치중립적일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의 경우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에서든지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는 이미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가치중립성에 대한 주장 자체가 모종의 다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제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치비중립적인 태도를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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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3. 가치중립성의 문제


   가치중립성의 원칙 자체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실, 즉 가치중립성의 패러독스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모순되거나 갈등하는 가치들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가치중립성은 성립할 수 있지만, 가치 판단과 선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의 가치중립성은 성립할 수 없다. 가치 판단과 선택을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교육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상황에서 가치 판단의 문제를 배제한다거나 그것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일 수는 없다. 가치중립성의 원칙은 가치 판단에 있어서 구성원 간에 합의가 어려울 때 서로 상반되는 가치 주장을 중립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에 대한 요구는 때때로 가치 판단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어지기도 한다. 가령 분석적 교육철학자들은 가치문제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논의나 합의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가치 판단과 선택의 문제를 교육철학에서 배제시키고 언어와 논리의 문제만을 분석함으로써 가치중립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입장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가치문제와 교육철학에 대해 특정한 가치 입장을 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육적 가치 판단과 선택의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체계와 사고를 승인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성의 표방 하에 교육에서 제기되는 가치 판단과 선택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 — ‘가치로부터의 도피’ 현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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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컬을 수 있는 — 은 매우 넓게 퍼져 있다. 비단 교육학의 영역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가치로부터의 도피 현상은 교육철학을 포함한 교육학의 모든 하위 연구 분야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가치와 의미부여는 우리의 삶에서 직면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우리가 바로 그러한 가치와 의미부여의 주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와 의미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국 우리의 삶의 형식과 질이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에 있어서 제기되는 가치 판단의 문제는 회피될 수 없으며, 이러한 가치 판단의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와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교육의 모습과 그 질이 결정된다.

   올바른 교육을 이루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치 판단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교육적 가치 판단의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올바른 검토가 배제되고서는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올바른 교육적 판단과 선택을 위해서 가치로부터의 도피 현상은 극복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가치의 일차성(一次性)을 포함하여 가치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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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형성하기 위하여, 다음에서 가치의 본질을 둘러싸고 제시되는 주요 윤리학설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4.2. 가치의 본질에 대한 윤리학설


   가치란 무엇인가, 그 본질은 무엇인가,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가, 가치판단의 보편적 기준은 무엇인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던지게 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인간을 ‘의미추구의 존재’로 규정한 바가 있지만, 우리 인간은 주어진 본능적인 욕구와 충동에만 의존하여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물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의미 있는 삶이 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이성적 존재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질문은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찾기 위하여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며,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치롭고 옳은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옳고 가치로운 것이며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의 문제를 탐구해 나가는 철학의 하위 분야가 곧 윤리학(倫理學) 또는 윤리설(倫理說)이다. 철학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철학자들은 가치의 본질을 밝히고 가치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가치의 본질과 그 판단 기준을 설명하는 윤리학설에는 수많은 유형이 있다. 윤리학설을 크게 고전적 윤리설과 현대적 윤리설의 두 가지로 나누고 그 대표적인 학설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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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1. 고전적 윤리설


   고전적 윤리설은 가치와 윤리의 문제를 전통철학의 관점에서 탐구해 들어간다. 전통철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신념은, 세계나 사물의 의미나 가치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 신 또는 자연에 의해 — 주어져 있으며, 인간은 단지 그를 발견해 나갈 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나 사물에 대해 그 의미나 가치를 생각하게 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이나 기준은 이미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절대적인 규칙이나 기준을 따름으로써 세계나 사물이 갖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하에 윤리학자들은 선악(善惡)이나 미추(美醜)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 기준이나 법칙을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고전적 윤리설을 대표하는 것으로 형이상학적 윤리설(形而上學的 倫理說)과 자연주의적 윤리설(自然主義的 倫理說), 그리고 직각론적 윤리설(直覺論的 倫理說)이 있다. 각 학설의 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형이상학적 윤리설(metaphysical ethics)

   형이상학적 윤리설은 초자연적·초경험적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근거로 삼아 윤리학이 탐구하는 인생의 목적 또는 행위의 법칙을 추리해 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형이상학적 윤리설에도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으나,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윤리학적 기본 원리가 논리적으로 추리된다고 믿으며, 선(善, good)을 형이상학적 언어로 기술하는 점에서 공통적인 입장을 취한다.

   형이상학적 윤리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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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이데아’(idea)만이 영원불멸한 실재(實在)라는 그의 형이상학설을 근거로 하여, ‘이데아’에로 접근하거나 그를 모방하는 것이 선(善)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전체를 무수한 실재(實在)들이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실재(實在)는 각자에게 잠재한 가능성(可能性)을 현실태(現實態)에로 발전시켜 나가는 생성체라고 보는 형이상학설을 바탕으로,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supreme good)은 인간에게 잠재한 이성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을 영양과 생식의 기능, 감각과 욕구의 기능, 이성(理性)과 사유(思惟)의 기능으로 나눈다. 그에 의하면, 이 세 가지 기능 중 오직 이성과 사유의 기능만이 인간을 다른 동식물과 구분하게 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기능을 훌륭히 발휘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좋은 삶이요, 행복된 삶이라는 것이다.


   2) 자연주의적 윤리설(naturalistic ethics)

   자연주의적 윤리설은 자연적 사실, 즉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보편적인 인생의 목적 또는 절대적인 행위의 법칙을 추론해 내려고 한다. ‘있는’ 현재의 사실(事實)이 ‘있어야 할’ 가치(價値)를 밝혀 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연주의 윤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가치의 근거를 인간에 관한 심리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사실(事實)에서 구한다.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쾌락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심리설에 입각하여 “옳은 행위란 쾌락을 최대량으로 늘이고 고통을 최소량으로 줄이도록 행위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는 쾌락주의는 이러한 자연주의 윤리설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주의적 윤리설에는 비단 인간에 관한 사실뿐만 아니라, 자연계 전반에 관한 사실 등에 입각해 가치의 근거를 찾으려는 입장도 있으며, 자연 현상의 어떤 측면을 가치의 근거로 보느냐에 따라 쾌락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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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진화론적 자연주의, 감정론적 자연주의, 실용주의적 자연주의 등의 분파가 있다.

   자연주의 윤리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흄, 벤담, 밀과 같은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흄(D. Hume)은 이성(理性)이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합리론을 비판한다. 그는 선악의 구별은 이성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감(道德感, moral sense)이라는 일종의 감정에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흄에 의하면, 도덕감은 자기에게 유리한 사물에 대해서는 기쁨을 느끼며 불리한 사물에 대해서는 괴로움을 느끼는 원초적 감정을 기초로 하여 경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도덕적 행위는 자신과 타인에게 유리한 행위를 함으로서 도덕감을 충족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벤담(J. Bentham)이나 밀(J. S. Mill)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고, 이러한 본성에 따라 최대 다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선(善)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리주의적 원리가 도출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람직한 것 또는 선(善)한 것이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둘째, 모든 사람은 쾌락 또는 행복을 바란다.

   셋째, 그러므로 쾌락 또는 행복은 선(善)이다.

   넷째, 다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더 큰 선(善)이다.


   3) 직각론적 윤리설(intuitional ethics)

   직각론적 윤리설(直覺論的 倫理說)에 의하면, 도덕의 원리는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간접적으로 추리해 낼 것이 아니라, 모종의 선천적 능력을 동원하여 직접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또 그렇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직각론에도 여러 가지 분파가 있지만 그들에 있어서 공통된 점은 시비와 선악의 가치는 대상 자체에 깃들어 있는 객관적 실재이며, 정상적으로 정신이 발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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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개인은 시비 또는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직각론자들은 행위 하나하나의 옳고 그름을 직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어떤 꽃의 빛깔이 무슨 색인지는 한번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정한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도 별로 생각하거나 따져 볼 필요 없이 직각적으로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직각론자들은 도덕적 직각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개별적 행위 하나하나의 시비 내지 선악이 아니라, 도덕문제에 관한 몇 가지 기본원리뿐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정직해야 한다”거나 “내가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등의 몇 가지 기본원리만을 직각적으로 알 수 있으며, 이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행위 하나하나의 옳고 그름은 추리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또 다른 입장으로서 도덕에 관한 몇 가지의 기본원리가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최고의 원리만을 직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직각론적 윤리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프라이스와 칸트를 들 수 있다. 프라이스(R. Price)는 우리에게는 오성(悟性)의 능력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옳음과 그름의 구분을 직각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I. Kant)는 인간에게는 실천이성(實踐理性)이 선천적으로 주어져 있어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를 규정해 주는 실천법칙(實踐法則)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와 같이 파악된 실천법칙을 순수한 동기와 의무감, 즉 선의지(善意志)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선(善)이다. 칸트는 선의지가 따라야 할 실천법칙으로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네 의지의 준칙(準則)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立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

   둘째, “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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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셋째,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그 준칙에 의하여 항상 보편적 목적(目的)의 왕국(王國)의 입법적 성원인 것 같이 행위하라.”


   4.2.2. 현대적 윤리설


   고전적 윤리설은 도덕과 가치의 절대보편적인 기준이 주어져 있다는 가정 하에 이를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2000여년 이상의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윤리설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자들은 도덕과 가치의 절대보편적인 기준에 대해 일치된 결론을 이루어 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고전적 윤리설의 기본가정과 그 접근 방법에 대한 회의가 20세기에 이르러 강력히 제기되었다. 윤리적 회의론은 비단 현대에 와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겪은 인류사적 혼란,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동,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과 그 차이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와 발견, 인간을 전통적 시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정신분석학과 행동주의 심리학의 대두, 전통적 사회질서와 규범의 붕괴 등 20세기에 들어 이루어진 급격한 사회변화의 영향 속에서 도덕의 절대보편성의 근거를 밝히고자 하는 고전 윤리학에 대한 회의가 강력하게 대두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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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윤리설의 가장 큰 특징은, 고전 윤리설의 기본적인 가정을 부정하고 윤리학의 과제를 절대 보편적인 가치기준을 밝히려는 데 두는 것이 아니라, 가치 진술의 의미와 성격을 분석하고 가치의 문제가 학문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데에 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윤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밝히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현대의 윤리학을 메타 윤리학(meta-ethics), 즉 ‘윤리학에 대한 학(學)’이라고 한다. 메타 윤리학으로서 현대적 윤리설을 대표하는 주정주의 윤리설(主情主義 倫理說)에 대해 살펴보고, 현대적 자연주의 윤리설을 제시한 듀이의 윤리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주정주의 윤리설(emotivism) 

   주정주의 윤리설이란 논리적 실증주의의 기본적 관점을 윤리학에 적용한 것으로서, 곧 논리적 실증주의의 가치론이라 할 수 있다. 논리적 실증주의에 의하면, 가치 판단의 진술은 경험계의 현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가치 판단의 진술은 경험적으로 그 진위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검증의 원칙에 의하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술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진술이다. 예컨대 “약속은 지켜야 한다”,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와 같은 진술은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발언자의 감정을 표명하거나 듣는 이의 감정을 유발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마치 “아아 슬프도다!”, “아이쿠!” 따위의 외마디 부르짖음이 그러하듯이, 가치 판단이나 진술은 감정을 표명하거나 환기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주정주의 윤리설에 의하면, 가치 판단이나 진술이 갖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윤리학은 하나의 학(學)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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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적 실증주의자로서 주정주의 윤리설을 주창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카르납(R. Carnap)과 아이어(A. J. Ayer)를 들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가치 판단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의견이 상충할 때 어떤 것이 더 좋고 옳은 것인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비록 상대편의 판단이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발언의 진위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들에 의하면, 예컨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쁘다”라는 진술과 “사람을 죽이지 말라”라는 진술은 근본에 있어서 그 뜻이 같다. 다만 전자는 그 문법적 형태가 “인간은 포유동물이다”와 같은 서술적 명제와 같은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을 서술적 명제로 오인하고 그것의 진위를 밝힐 수 있는 것처럼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즉, 가치 진술은 명령문에 불과하며, 명령문에 진위가 있을 수 없듯이 가치 진술에도 진위가 있을 수 없다. 명령하는 말이 그렇듯이, 모든 가치 진술은 오직 그 발언자의 감정이나 소망을 표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사실도 서술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판단’이라 할 수 없으며,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한갓 ‘발언’에 불과하기 때문에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카르납과 아이어와는 달리 스티븐슨(C. L. Stevenson)은 절충적 주정주의 윤리설을 제시하였다. 절충적 주정주의 윤리설은 주정주의 윤리설과 자연주의 윤리설을 결합한 것이다. 스티븐슨은 가치 판단이나 진술은 참될 것도 거짓될 것도 없는 한낱 감정상의 발언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가치 판단에는 정의적 의미(情意的 意味)와 함께 서술적 의미(敍述的 意味)가 담겨져 있다. 예컨대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은 “약속을 어기면 신용을 잃는다”,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다”, “우리의 양심은 약속을 지키라고 명령한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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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실(事實)에 관한 소견(所見)을 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미워한다”와 같은 발언자의 심리적 태도(心理的 態度)를 표명하고 있으며 듣는 이에게 같은 감정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가치 판단에 있어서 두 사람의 의견이 대립된다는 것은 같은 도덕적 진술에 대해 한 사람은 긍정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가치 진술에 대한 심리적 태도(心理的 態度)의 불일치(不一致)가 반드시 있으며, 그 판단에 관련된 객관적 사실에 관한 소견(所見)의 불일치(不一致)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진술에 대해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의 대립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도덕적 진술이 함축하고 있는 사실에 관한 소견에 있어서 불일치가 있거나 혹은 태도에 있어서의 불일치가 있는 것이다. 스티븐슨에 의하면,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결을 위해서는 ‘소견의 불일치’와 ‘태도의 불일치’라는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에 의하면, ‘태도의 불일치’는 사실에 대한 상대적인 무지에서 연유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실에 대한 정보가 내면화됨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가치 판단의 진위가 궁극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사실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를 해소함으로써 가치 판단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소견의 불일치’를 해소한 후에도 풀어지지 않는 ‘태도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 바, 이 경우에도 추리와 논리에 의존하는 지성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와 설득을 통하여 태도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 듀이의 윤리설

   듀이는 가치란 인간의 주관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에 대한 인간의 경험 속에서 발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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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가치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특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경험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마음 속에 발생하는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만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진행된다면 가치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둘러 싼 환경은 인간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곤란이 발생한다.

   인간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곤란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곤란을 해소하고자 원하게 되는 까닭은 인간은 욕구와 감정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나 감정의 균형을 깨뜨리는 새로운 곤란에 부딪히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욕구나 감정의 균형과 충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를 판단해야 하는 문제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행동의 적합성을 미리 짐작하고 비교해 봄으로써 하나의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동의 결과를 예견하고 비교하는 것이 곧 평가(平價, valuing)이며, 이 평가의 결과로서 생기게 되는 것이 ‘가치(價値, value)’이다. 듀이에 의하면, 가치란 결국 욕구를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의 욕구를 제한하거나 충족시키게 되는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로써 만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욕구나,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작용, 즉 인간의 경험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가치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구와 경험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지식이나 진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들 역시 인간의 욕구와 필요, 그리고 경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듀이는 가치의 절대성이나 실재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가치 판단이 단순히 발언자의 감정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판단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주정주의 윤리설에 반대한다. 그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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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진술이 일종의 부르짖음이나 명령과 같은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판단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즉, 부르짖음이나 몸짓 따위도 고의의 것일 경우에는 무엇인가 어떤 사실을 통지하는 것일 수 있듯이 가치 진술도 어떤 사실을 통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판단으로서의 성질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가치 진술이나 판단은 실천판단이다. 실천판단이란 행동이 요구되는 사태에 관한 판단, 즉 어떠한 행동을 요구하는 판단을 일컫는다.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지시해 주는 까닭에 실천판단이다. 이와 같은 실천판단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생각할 때, 그 진위를 경험적으로 밝힐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구체적 상황에서 내려진 실천판단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는 동시에 장차 일어날 사태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는 바, 객관적 사실의 파악과 일어날 사태에 대한 예언이 모두 적중하면, 그 실천판단은 참된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거짓된 것으로 판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의사에게 보이는 것이 좋겠다”라는 실천판단은 “몸이 정상적이 아니다”라는 사실 파악과 아울러, “의사에게 보이면 몸이 고쳐질 것이다”라는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 파악과 예언이 모두 들어맞으면, 그 실천판단은 참된 것으로서 판명될 수 있다.


   4.2.3. 윤리적 상대주의의 문제점과 그 극복


   지금까지 고전적 윤리설과 현대적 윤리설의 대표적 학설을 살펴보았는데 고전적 윤리설과 현대적 윤리설은 각각 윤리적 상대주의(倫理的 絶對主義, ethical absolutism)와 윤리적 상대주의(倫理的 相對主義, ethical relativism)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고전적 윤리설은 도덕적 판단의 절대적 근거가 주어져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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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하고 그러한 절대적 근거를 밝히고자 하였으나, 현대적 윤리설은 그러한 절대적 근거를 부정하고 가치 판단은 기본적으로 감정과 관련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윤리적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두 입장 중에서 어느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굳이 검토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러나 윤리적 회의론이나 상대론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윤리적 상대주의의 입장이 설득력을 갖는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절대적 기준을 밝히고자 하는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준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각양각색의 수많은 윤리학설들이 제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의 상대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 가치 기준의 다양성과 가변성, 역사성과 상대성에 대한 주장은 비단 윤리학설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은 그 자신의 욕구와 취향, 입장과 관점, 신념과 사회문화적 배경 등에 따라 다른 가치 판단 기준을 가지며, 그 각각의 기준의 옳고 그름을 판명해 줄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윤리적 상대주의 식의 사고는 현대인의 일상적인 의식에 이미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상대주의의 문제점에는 무엇이 있는가? 

   오늘날 계속 확산되어 가고 있는 윤리적 상대주의의 문제는 여러 가지로 지적될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점은 가치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고와 논의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치문제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 합리적 논의나 검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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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으로 쉽게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요한 가치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하는 마당에서 가치중립성이 표방되고, 가치중립성의 이름하에 가치 판단의 문제가 논의에서 제외되어 버리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객관성을 표방하는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가치문제에 대한 심각한 사고와 진지한 논의가 생략되고 있으며, 가치문제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이성과 합리적 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 감정과 힘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비이성주의와 권력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 아래 이루어지는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한마디로, 가치와 의미가 상실된 삶 그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의 질문이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올바른 삶의 방향에 대한 뚜렷한 가치 의식이 결여된 채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삶이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사회병리 현상의 하나로서 지적되고 있는 도덕적 무감각과 냉소주의는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윤리적 상대주의의 문제점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가치 판단에 있어서 객관적인 논의와 합의의 가능성의 근거에 대해 듀이나 스티븐슨이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그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전통철학에 있어서 지배적인 사고방식은 세계나 사물의 의미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 신 또는 자연에 의해 — 주어져 있으며, 인간은 단지 그것들을 발견해 나갈 따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의 관점에 의하면, 세계나 사물의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부여해 나가는 것이며 의미부여 행위 그 자체는 가치 판단과 선택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가치 판단과 선택을 요구하며, 의미 있는 삶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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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는 모종의 선택된 가치를 토대로 하였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가치 판단과 선택의 문제는 우리의 삶과 생존에 있어서 1차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이러한 가치 판단과 선택에 있어 인간 개개인은 그 주체이며, 따라서 가치 판단과 선택은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관심과 욕구, 신념과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치의 본질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개인이나 집단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임의의 욕구나 신념에 따라 멋대로 가치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치 판단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접근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통하여 합리적인 합의를 이루어 나갈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가치 판단의 상황 그 자체를 피하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치 판단 또는 의미부여 행위의 본질이 비록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은 객관적 타당성을 지닐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란 혼자의 고립된 삶이 아닌 사회적인 조건과 제약 하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삶이기 때문이다. 세계나 사물에 대한 의미부여는 개인의 임의대로가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정해진 합리성과 객관성의 원리에 따라 검토되고 만들어 져야 하는 것이다.

   가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기에 그에 대한 합리적인 논의나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식의 견해는 사실과 가치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나 근거가 없으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결국 각자가 생각하고 마음먹기 나름의 문제가 되고 만다는 믿음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과 가치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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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사실적 진술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신념과 가치관, 지식과 경험, 언어와 개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점에서 사실적 진술은 가치 요소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치 진술과 사실적 진술은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러한 본질적 차이 때문에 사실적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은 증명될 수 있음에 비하여 가치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은 입증될 수 없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적 진술의 타당성이 증명될 수 있음에 비해 가치 진술의 타당성은 증명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그 둘 간의 ‘본질적’인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차이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실적 진술의 경우, 그 진술에 포함된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합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반면, 가치 진술은 그에 포함된 단어의 의미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그 진술의 의미 자체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이 입증될 수 없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X의 길이는 10cm이다”라는 사실적 진술이 있을 때, 우리는 이 진술에 포함된 단어들에 대하여 공통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진술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 대하여 일치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길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합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X는 좋다”라고 했을 때, ‘좋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좋다’라는 말의 의미는 개인에 따라, 또는 구체적으로 X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리고 그러한 발언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좋다’라는 말의 합의된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X는 좋다”라는 진술 자체의 의미에 대해 일치된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그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치 진술과 사실적 진술의 차이를 이와 같이 그 진술 속에 포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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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들의 ‘의미상’의 차이로 파악할 때, 그러한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로 설명될 수는 없다. 어떤 단어의 의미에 대해 합의된 개념을 갖느냐 않느냐는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합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가치 진술에서 사용되는 가치평가적 용어들 — 즉,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추하다’, ‘~해야만 한다’ 등 — 은 합의된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합의된 의미를 갖게 되면 가치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은 사실적 진술과 마찬가지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X는 길다”라는 진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길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진술의 의미에 대해 일치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의 진위 여부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진술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길다’라는 형용사를 어떤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일치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길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어떤 사물의 길이가 긴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그것은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상황에 따라 정하게 되는 기준에 따라 그 여부를 판가름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 1mm의 길이도 ‘긴’ 것이 되며, 어떤 경우 1000km의 길이도 결코 ‘길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길이가 긴가 아닌가는 우리가 어떤 기준 — 즉, 길이를 재는 척도로 어떤 것을 사용할 것인가, 또는 어떤 것과의 길이를 비교할 것인가 등 — 을 채택하고 그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X는 길다”라는 진술의 경우, ‘길다’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는 기준에 합의하게 될 때라야, 그 진술의 객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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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길다’라는 형용사를 적용하게 되는 기준에 대해 합의한다고 해서 물론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의 경우도 근본적으로 이와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그 의미가 규정이 되고, 그 단어를 적용할 수 있는 상대적인 기준이 결정이 되면, 가치 진술의 객관적 타당성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기준의 합의는 가능한 것일까? 물론 가능하다. 어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러한 단어를 적용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합의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합의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 가치 판단을 해야 하는 많은 경우, 객관적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가치 판단이 요구되어지기 때문이다. 가치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상대적이라 하여 그에 대한 합리적 논의와 합의를 추구해 나가지 않는 것은 곧 그러한 필요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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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교육적 가치판단의 기준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에 있어서 가치 판단과 선택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보다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그리고 보다 충실한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있어서 제기되는 가치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올바른 접근이 요구된다. 가치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검토를 생략한 채 교육을 한다는 것은 결국 우연적이고 충동적으로 교육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에 있어서 가치를 선택하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예컨대, 무엇을 위해서 교육을 할 것인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교육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교육의 투자우선 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교육제도와 행정조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교육의 기회를 누구에게 제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을 교육자로 삼아 교육을 담당하게 할 것인가 등등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각각의 경우가 모두 교육에 관련된 중요한 가치 판단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 각각에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가치 판단의 문제는 수없이 많은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다양한 교육적 가치 판단과 선택의 상황에서 그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교육적 선택과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과 근거에서 “~하는 것이 좋다”라거나 “~해야 한다”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교육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가치 판단과 선택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러한 모든 상황에 있어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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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치 판단의 상황이 무엇이냐에 따라 가치 판단의 기준은 각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는 경우와, 국민학교 학급당 학생 수를 몇 명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경우, 그리고 국민학교 아동들에 대한 체벌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는 경우, 그 각각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가치 판단의 기준은 다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들에 있어서 교육적 바람직성을 공통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각각의 가치 판단을 해 나갈 수 있다. ‘교육적 바람직성’은 비단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다른 교육적 판단과 선택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는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음직 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면 ‘교육적 바람직성’을 판단해 줄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교육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교육의 개념 속에서 일차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교육의 개념 그 자체는 무엇이 교육적인 것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의 개념을 서술적 또는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정의했을 경우 그 개념에는 교육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교육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암시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교육을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과정’으로 정의했을 때, 이러한 정의에는 교육적 가치 판단의 일차적 기준이 주어진 교육적 가치를 여하히 효율적으로 달성하느냐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인간행동의 방향이나 그 가치보다는 행동변화를 이루어 나가는 일의 효율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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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 판단의 일차적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 장에서 제시한 ‘교육다운 교육’의 개념을 받아들인다고 할 시, 바로 그러한 개념 속에 포함된 개념적 요소들은 곧 교육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성립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의도성, 전인적 인간변화에 대한 관심, 가치지향성, 피교육자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인격적 상호작용, 의미충족과 자아형성감의 함양, 교육자의 도덕적 책임 등의 요소들은 교육적 가치 판단의 기본적인 기준이 되게 된다. 이들 하나하나의 요소들은 그 자체가 규범적인 요소들로서 교육적 가치 판단과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개념적 요소에 있어서 교육적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서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가치지향성의 요소이다. 가치지향성이라는 개념적 요소는 교육이 바람직한 모종의 가치를 추구한다거나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교육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규정하게 될 때, 즉 가치지향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게 될 때, 그것은 모든 교육적 가치 판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교육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가? 가치지향성의 요소는, 어떤 구체적인 방향의 가치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이 점에서 가치지향성의 요소는 실질적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교육에서 가치지향성의 요소에 따라 교육이 추구해야 할 구체적인 방향을 정하는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교육의 개념정의가 결국 교육을 정의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갖는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듯이,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 역시 교육을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구체적인 교육의 상황을 떠나서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을 논의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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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이 교육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바람직한 방향’인가를 정할 수는 없다. 교육의 개념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개념 정의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치지향성의 요소에 따라 교육이 추구해야 할 구체적 방향을 무엇으로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교육목적의 문제로서 논의되어 왔다. “교육을 통하여 무엇을 실현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해야 하는가”의 질문이 곧 교육목적의 문제이다. 교육목적은 글자 그대로 교육 행위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 주고, 교육의 과정에 있어서 가치 판단과 선택의 기본적인 준거를 제공해 주게 된다. 때문에 교육의 개념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과 더불어 교육의 목적을 밝히고 규정하려는 노력도 교육철학의 핵심적인 과제의 하나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가치문제에 관한 제 논의는 결국 교육목적의 문제와 깊게 관련되는 것이다. 다음에서 교육목적과 교육개념과의 관련에 대해 살펴보고, 교육목적의 기능과 종류, 성격 등에 대해 살펴보자.  


4.4. 교육의 개념과 교육목적의 관련


   교육의 개념과 교육목적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특히 교육의 개념을 규범적으로 정의하는 경우에 있어서, 교육의 개념은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교육철학자들 중에는 교육의 목적은 교육의 개념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으며, 따라서 교육의 목적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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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예컨대, 피터즈는 교육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교육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각주 1: R. S. Peters, “Education as Initiation”. In R. D. Archambault(ed.), Philosophical Analysis and Educa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2), pp.87-111.]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은 교육의 개념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교육은 성취시켜야 할 목적이 따로 있는 어떤 활동과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과정이 지켜야 하는 어떤 준거와 기준 그 자체로서 구성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어떤 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그가 제시하는 규범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 과정적 요소를 충족시키기만 하면 교육인 것이며, 그 활동이 실현해야 할 별도의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목적의 개념을 적용하여 피터즈의 주장을 설명하자면, 규범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 그리고 과정적 요소를 충족시키는 것 자체가 교육의 목적인 것이며, 그러한 요소를 충족시키면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결과를 굳이 목적이라는 말로서 사전에 거론하거나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서 추구되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을 사전에 목적으로 내세우지 않아도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피터즈의 이러한 주장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활쏘기의 경우를 비유하여 생각해 보건대, 표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 다만 활을 쏘아야 할 방향과 각도 그리고 힘의 세기 등의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킬 때 표적을 맞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활쏘기를 계속하며 표적을 명중시킨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진정 ‘활쏘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활을 쏜다고 할 때, 우리는 활을 쏘는 사람이 표적의 위치를 스스로 확인한 후, 그러한 표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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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추기 위해 방향과 각도, 힘의 세기를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하여 활을 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할 때 그것을 ‘활쏘기’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을 계획하거나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이 교육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과 수단들을 적절히 동원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따라서 어떤 활동을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실행하고 있으나, 그러한 활동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설명하지는 못하고 단지 그러한 활동들이 지키고 있는 원칙만을 제시할 경우,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활쏘기의 경우 설혹 표적의 크기나 위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어떤 방향과 각도, 힘으로 화살을 쏘기만 하면 표적을 적중시킬 수 있다고 할 때, 이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적중시킬 수 있는 표적의 위치와 크기가 어떤 것인지를 사전에 물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육의 개념적 조건들을 파악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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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개념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활동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수 있을 것인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교육의 개념적 요소들을 충족시키는 활동은 어떠한 결과에 다다르게 될 것인가? 그러한 결과를 미리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5. 교육목적


   4.5.1. 교육목적의 기능


   어떤 사람이 활을 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행위가 맹목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한 표적이 존재하며, 바로 그 표적을 향하여 활을 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활을 쏘는 행위는 그러한 표적이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며, 또 그 표적에 화살이 적중했는가 아닌가를 관찰해 봄으로써 그 행위가 성공적인 의미를 지니는가를 평가하게 된다. 교육 행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목적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행위이며, 추후 행위의 결과를 통해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의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

   활쏘기의 경우 우리는 표적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면서 활을 쏘는 경우를 생각하기 어렵다. 표적은 구체적인 사물로서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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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히 드러내고 있으며, 일단 그 표적의 위치와 모습을 인식하게 되면 표적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가늠하여 활을 겨누고, 그리고 쏜 화살이 실제로 표적에 명중했는가를 확인하는 일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교육의 경우, 표적에 해당하는 목적은 구체적인 사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로 표현된다. 때문에 그러한 목적들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 자체를 정확히 가늠하기도 어렵거니와, 목적을 향해 정확히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목적에 도달하기까지에는 활쏘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리고 목적에 도달한 경우에도 그것이 실제로 성취하고자 했던 목적에 도달했는지를 평가하는 일은 활쏘기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긴 과정에서 목적에 대한 인식이 흐려질 수도 있게 되며, 목적에 도달했는지 여부 자체를 평가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써 교육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갖도록 하고, 그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촉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교육목적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다.

   첫째, 교육의 과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교육내용을 선정하고 교육방법을 정하고 그리고 평가의 방법을 결정하고, 교사를 선발하고 양성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교육목적은 판단의 준거와 기능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것들을 결정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떤 것이 설정된 목적을 성취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함으로써,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교육목적은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나 피교육자에게 자신들이 참여하게 되는 교육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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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교육행위에 참여하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하고 그러한 목적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쏟도록 유도한다.

   셋째, 교육목적은 교육의 결과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교육행위를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였던 목적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교육행위의 성공 여부뿐만 아니라, 교육행위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것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교육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교육이 완전히 종료된 이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교육의 시작과 중간에서 교육목적의 성취 가능성과 성취 정도를 진단하기 위해서도 이루어진다. 교육목적은 그러한 평가의 내용과 기준을 정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준거가 되는 것이다.


   4.5.2. 교육의 동기와 목적의 여러 차원


   ‘동기’나 ‘목적’의 개념은 서로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서 많은 경우 서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동기란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 심리적 요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필요로 하는 무엇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의식적·무의식적 욕구를 말한다. 이에 비해 목적은 동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즉 ‘필요로 하는 무엇’이다. 교육의 목적을 논하는 데 있어서 교육의 동기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관련 때문이다.

   교육의 동기는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검토될 수 있다. 즉, 교육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동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교육을 하고자 하는 입장에 있어서도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그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지역사회나 집단의 차원, 또는 학교급별의 차원이나 학교의 차원, 그리고 교육행정가나 교사 개인의 차원에서도 교육의 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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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을 받고자 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도, 교육의 동기는 매우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겠다는 것에서부터, 교육을 통해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겠다는 동기, 그리고 자기 성장과 실현을 이루겠다는 동기 등 갖가지 수준의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육을 하고자 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아동들을 학교라는 장소에서 보호·관리함으로써 성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동기에서부터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후세대에게 습득시킴으로써 기존의 사회체제를 유지해 나가겠다는 동기, 그리고 사회를 변화 개선시켜 나가겠다는 동기 등 수많은 종류의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육이라는 활동은 이와 같이 수많은 종류의 동기에 의해 추구되는 현실적인 활동이다. 교육의 목적 역시 이와 같이 다양한 측면의 동기들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동기들 중에서 어떤 것이 보다 중요한가의 논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교육의 목적은 이와 같이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의 동기들을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에 따라 여러 단계의 하위 목적이나 목표로 나눌 수 있다. ‘목적’과 ‘목표’라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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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 의미가 서로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며 사용된다. ‘교육목적’과 ‘교육목표’라는 말 역시 일상생활 속에서 같은 의미로서 사용된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인간의 전인적 행동특성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으로서의 교육의 목적은 구체적이기보다는 매우 추상적이며, 포괄적으로 진술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으로 진술된 교육목적은 구체적인 교육의 장면에서 방향감을 제공해 주기 어려우며, 구체적인 단위 학습의 장에서 방향감을 제공해 줄 수 있기 위해서 교육목적은 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단계적인 하위목적들로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실현될 수 있는 질적인 개념으로서의 교육목적을 보다 구체적이고, 단계적이며, 단기간에 걸쳐 달성될 수 있는 양적인 개념으로 진술한 것을 교육목표라 한다. 예컨대, ‘인격의 완성’이나 ‘자아실현’, ‘건전한 사회의 건설’ 등은 교육목적이라 할 수 있는 반면에, ‘진화론의 이해’, ‘인수분해 공식의 이해’, ‘미적분 공식의 이해’ 등은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서 교육목표라 할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을 어떤 측면이나 차원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을 개인적 측면에서 파악하느냐 아니면 사회적 측면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른 구분이 있으며, 교육의 목적을 교육활동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가치로서 설명하느냐 아니면 교육 외의 어떤 것으로 설명하느냐에 따른 구분이 있다. 또한 교육의 목적을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진술하느냐 아니면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진술하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으며, 시간적으로 보아 장기적으로 실현해 나갈 것이냐 아니면 단기적으로 성취해 나갈 것이냐에 따른 구분이 있을 수 있다. 다음에서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의 구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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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3.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


   교육의 동기나 목적을 논하는 데 있어서 내재적 동기나 목적, 그리고 외재적 동기나 목적을 구분할 수 있다. 교육에 있어서 내재적 동기(內在的 動機)란 교육 그 자체의 가치 때문에 교육을 추구하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내적인 기쁨과 지적 경험, 성장 그 자체의 가치 때문에 교육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내적인 동기의 충족이 교육의 목적으로 추구될 때, 이를 내재적 목적(內在的 目的)이라 한다. 그에 비해 외재적 동기(外在的 動機)란, 교육활동의 동기를 교육 외적 활동의 가치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그러한 외부적 가치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교육의 외재적 목적(外在的 目的)이란 교육활동을 수단으로 하여 성취코자 하는 교육 외적 영역의 가치를 말한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교육을 하고자 할 때, 이러한 가치들이 곧 외재적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을 대비시킬 때, 어느 것이 교육에 있어서 본질적이며 보다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교육철학자들 가운데에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와 목적을 강조하여, 교육은 그 자체로서 가치로운 것이며 결코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예컨대, 듀이는 “교육의 과정은 그 자체를 초월한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으며 교육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고 하였다. 듀이에 의하면, 교육은 곧 성장의 과정이며 삶의 과정이다. 교육은 미래생활의 준비라거나 교육 외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활의 과정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피터즈 역시 교육의 내재적 가치와 목적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바로 ‘도덕’이나 ‘행복’의 목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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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이 어색한 질문이다.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껏해야 ‘지성’ 혹은 ‘인격의 도야’와 같이 교육에 내재하는 어떤 가치로운 것을 지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교육은 인간의 어떤 활동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 과정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준거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교육은 이러한 준거들을 충족시키는 활동으로서 설명되는 것이며, 활동 과정이나 혹은 그것의 목적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는 달리 교육의 외재적 가치와 목적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그린(T. Green)은 교육은 하나의 도구와 같아서 인간이 택하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교육은 야만인을 기르는 데나 문명인을 기르는 데나, 그리고 인간의 영웅적 가능성을 발휘하게 하는 데나 비겁자로 만드는 데나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주 2: Thomas Green, “A Topology of the Teaching Concept”, In C. J. B. Macmillan & T. W. Nelson(eds.), Concept of Teaching, (Chicago: Rand Mcnally, 1968), p.62.]

   교육의 내재적 가치와 목적은 교육에 있어서 보다 일차적인 것으로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육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형성과 성장을 꾀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떠한 가치의 실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교육은 목적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전개되는 활동임을 생각할 때, 또한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신의 올바른 성장을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 교육은 응당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는 활동이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올바른 성장과 실현이라는 목적은 교육 활동 그 자체를 통하여 추구될 수 있는 목적, 즉 내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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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다. 교육이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목적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의 실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를 통해 이와 같은 내재적 목적을 실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움과 앎, 자아의 지각과 실현, 인격적 성장과 발전은 교육의 내재적 가치이며, 이러한 가치가 실현된 인간을 배양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의 구분과 관련해 강조해야 할 점은,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가의 문제보다는,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을 어떻게 균형 있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교육은 여러 가지 동기와 목적에 의해 추구될 수 있는 실제적인 활동이다. 교육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동기와 목적 중에서 어느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을 왜곡되게 만들 것이다. 만약 교육의 내재적 목적만을 강조한다면, 그에 따른 교육은 개인주의적 교육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될 것이며, 교육의 자율성이 강조되는 반면, 사회의 현실과는 유리된 교육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비해, 외재적 목적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하나의 수단으로써의 교육은 외재적 목적에 종속되고 그 자율성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은 개인의 내적 성장보다는 외적 기능의 형성에 관심을 두게 될 것이며, 교육의 대상인 인간마저도 수단시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4.6. 교육목적으로서의 인간과 사회


   교육의 목적은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 중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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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의 목적이 더 중요하거나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어 왔지만, 개인을 떠난 사회가 존재할 수 없고 사회를 떠난 개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분리하여 교육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교육의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의 구분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흔히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측면은 내재적 목적으로 설명되어 왔으며, 사회의 유지와 발전이라는 측면은 외재적 목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유지와 발전은 개인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 교육의 내재적 목적이라 한다면 사회의 유지와 발전 역시 교육의 내재적 목적으로서 추구될 수 있다고 하겠다.

   교육의 목적은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균형 있게 설명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만 교육의 목적이 설명되어서도 안 되며,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교육의 목적이 제시되어져도 안 된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은 교육을 받는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개인적 측면에서의 교육목적을 일차적으로 강조할 수는 있다. 교육은 결국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인간의 변화와 형성을 추구하여 이루어지는 활동이며, 교육의 성패도 결국 교육받은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만이 평가될 수 있다. 물론 사회적인 측면에서 교육목적이 제시될 수 있지만, 그러한 목적들은 결국 교육받은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만이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측면의 목적을 이차적 목적이라거나 외재적 목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측면의 목적을 개인적 측면의 목적에 비추어 비본질적 목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다.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라고 하는 개인적 측면의 목적은 오직 사회 속에서 의미를 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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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교육목적이 설명되는 방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4.6.1. 개인적 측면에서의 교육목적


   개인적 측면에서 교육의 목적은 한마디로 ‘바람직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과 관점이 있다. 예컨대 ‘균형적이고 조화로운 인간’, ‘전인적 인간’, ‘자아실현인’, ‘인격자’, ‘도덕적인 인간’ 또는 ‘양심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이나 ‘합리적인 인간’, ‘자유인’, ‘건강한 성격의 인간’, ‘행복한 인간’ 등 다양한 개념들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이들 각각의 개념들이 의미 있고 타당한 교육목적으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각각이 명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특성이 명확히 무엇인지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대표적인 개념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전인적 인간

   교육은 인간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이지만, 그것은 개개인의 부분적인 특성의 변화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 즉 전인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갖는 여러 특성의 전체적인 발달과 그 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인간의 형성은 교육의 이상으로서 동서양의 교육에서 매우 일찍부터 형성되어 왔다.

   전인적 인간상을 교육의 이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인들의 교육관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아테네인들은 국가는 개인의 자아완성을 위한 수단이며, 자아완성에 의하여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국가의 유능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조화, 균형, 중용 등의 원리에 의해 신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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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지적, 심미적 능력을 균형 있게 발달시킨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교육사상에서 보면, 그의 관심은 통치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데 있었으나, 그의 통치자적 인간상은 지혜와 용기, 절제의 덕목을 조화롭게 발달시킨 인간으로 설명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식물성과 동물성, 영혼성의 세 가지 특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하고, 교육은 이들 세 가지 특성을 균형있게 발달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영양의 섭취와 양육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의 식물성을 훈련시키기 위한 신체적 교육, 욕망과 감정의 존재로서의 특성을 의미하는 동물성을 훈련시키기 위한 감성적 교육, 그리고 이성의 소유자임을 의미하는 영혼성을 발달시키기 위한 지적교육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균형적·조화적 인간상을 지향하는 교육을 ‘전인교육’이라는 말로 설명해 왔다. 전인교육의 사상이 체계적인 교육원리로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루소 이후에 전개된 신교육운동과 더불어 있었던 일이다.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사상의 영향을 받아, 교육은 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 개체의 전체적 잠재 가능성을 계발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심신의 조화 혹은 지, 덕, 체의 균형으로 이해되는 전인교육의 이념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구한말에 고종황제가 새로운 국민교육제도를 전개할 의지를 표명한 1885년의 ‘교육조서(敎育詔書)’에서도 반영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속에도 깃들어 있다.


   2) 자아실현인

   자아의 지각과 실현을 교육의 기본 목적이라고 내세운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는 것 특히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을 모든 앎의 출발점이라고 보았으며,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지혜라고 여겼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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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갖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양지는 배우지 않고 아는 것, 즉 생득적인 지혜를 뜻하고, 양능은 배우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양지와 양능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흐려지게 되고 잃어버리게 된다. 수양이나 교육은 바로 이와 같이 흐려진 양지와 양능을 회복시킴으로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 역시 자연적으로 타고 난 인간의 순수성과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교육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인간 자신을 지각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잠재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는 견해는 현대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현대의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 심리학자들 중에서 매슬로우(A. Maslow) 같은 사람은 자아의 지각과 자아실현을 교육의 기본 목적으로 제시한다. [각주 3: A. H. Maslow, “Some Basic Propositions of a Growth and Self-actualization Psychology.” In A. W. Combs(ed.), Perceiving, Behaving, Becoming: A New Focus for Education, (Washington, D. C.: Association for Supervision and Curriculum Development, 1962), pp.34-49.] 그에 의하면, 인간은 단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전개하는 생동적인 의지와 결단의 주체이다. 그에 의하면, 생동적인 의지와 결단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고, 또한 그러한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지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자아실현인이다.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을 성장동기의 충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동기를, 결핍된 것을 충족시킴으로써 끝나는 결핍동기와 계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성장동기로 구분하고, 자아실현을 성장동기의 계속적 충족을 기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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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인격의 완성과 인격자

   인격의 개념은 교육목적으로서의 인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인격’이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사용되지만, 교육받은 인간의 특성으로서의 인격은 일반적으로 신념의 통합성, 실천적 행동의 일관성, 신조에의 충실성, 신념의 도덕성 등을 함축하게 된다. 인격이라는 말과 유사한 개념으로 ‘양심(良心)’이나 ‘도덕성(道德性)’과 같은 개념이 있다. 그러나 인격은 한 개인이 살아 온 삶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양심은 보다 생득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격’을 말할 때 그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기능을 갖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인격의 입법적 기능(立法的 機能)으로서, 이는 마치 입법기관인 국회가 국가의 법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격의 소유자는 자신의 생활을 위하여 규범을 정한다. 그는 사회의 인습적 규범을 선택하여 내면화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행위를 통제할 입법을 스스로 한다.

   둘째, 집행적 기능(執行的 機能)으로서, 이는 마치 행정부가 법에 따라서 국가의 행정과 사업을 집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 또는 규범에 따라서 행동해 나가는 기능을 뜻한다.

   셋째, 심판적 기능(審判的 機能)으로서, 이는 마치 사법부가 사회적으로 정해진 규범을 지키지 못하는 개인을 심판하고 벌하는 것과 같이, 집행적 기능이 실패했을 때 번민, 고통, 죄의식 등으로 자기징벌을 가하는 기능을 뜻한다.

   인격의 형성과 완성을 위한 교육이란 곧 입법적 기능과 집행적 기능 그리고 심판적 기능을 통합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행동과 생활의 규칙을 스스로 세우고 그 규칙에 따라서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가치롭게 만들고 나아가 자신의 사람됨의 격을 높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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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과 태도를 길러주는 교육인 것이다.


   4) 합리적 인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인 존재로서 규정하고 이성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 있어서 선(善)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이성의 계발이나 합리적 인간의 육성은 개인적 차원에서 교육목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에 해당한다.

   그런데 교육받은 인간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으로서 이성(理性)이나 합리성(合理性)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성은 사유의 능력을 일컫는 것으로써, 사유에 의해 사물의 이치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한편, 이치에 맞는 논리적 사유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감정이나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의지적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합리성 역시 그 개념이 매우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특성을 나타내는 합리성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보편타당한 지식이나 신념체계를 추구하고 획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휘되거나 내포되는 능력과 태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신념이나 진술의 보편타당성을 검토해 나가는 합리적 논의의 과정에서 발휘되는 인간특성을 합리성이라 한다.

   합리적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특성으로서의 합리성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태도나 능력을 포함한다.

   첫째, 진술의 진위나 타당성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과 보편율 생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정, 즉 진가치(眞價値)의 인정

   둘째, 진술의 타당성 또는 진위 여부를 논의하거나 검증하는 데 있어서 증거나 이유의 필요성에 대한 인정

   셋째, 보편율 또는 진리 획득을 위한 어떤 정상적인 조건으로서의 객관성(客觀性)의 중요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공적(公的)인 검증(檢證)의 필요성에 대한 인정과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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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 진술의 보편성에 대해 논의하는 모든 과정은 이성적(理性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의 인정과 이성적으로 이루어질 때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다섯째, 어떤 종류의 진술 및 그 증거가 갖는 자명한 타당성을 인정하고 그에 입각하여 사고하려는 태도와 능력

   여섯째, 자유 평등에 입각한 상호존중의 정신 및 타인의 관점과 이해에 대한 고려의 능력과 태도 등이 그것이다.

   합리적 인간은 이러한 능력과 태도를 갖춘 인간으로서 합리적 사고와 논의의 과정을 통해 보편타당한 신념체계 또는 의미체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이다.


   5) 자유인

   자유인, 즉 무지나 편견 그리고 불필요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결정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형성은 개인적 측면에서 교육목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자유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타인에 의한 구속이나 제재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어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목표나 생활방향을 선정할 수 있고, 자신에게 허용된 많은 선택요인들 중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어떤 개인의 의지나 권위에 의해서 강요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에서의 자유’를 뜻하며, 흔히 ‘소극적 자유(消極的 自由)’라고 일컫는다. 이와 같이 타인의 구속이나 제재가 없는 것이 바로 자유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자유의 의미를 보다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는 단순히 어떤 외적 노력에 의해 주어지는 구속 또는 제재가 없음을 나타내는 소극적 의미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에의 자유’ 혹은 ‘~을 위한 자유’라고 하는 ‘적극적 자유(積極的 自由)’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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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극적 자유는 단순히 외적 구속이나 제재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나, 적극적 자유는 자신에게 의미있는 목적이나 목표를 세우고 그를 추구해 나갈 수 있는 자유이다. 그리고 적극적 자유는 이와 같이 의미 있는 목적이나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내적인 형태의 통제가 작용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자유, 적어도 적극적 의미의 자유는 통제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통제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통제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원리에 의해 자신의 충동이나 욕구를 통제하는 내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자가 자유로우냐 않느냐는 통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제가 행위자의 내적 원리이냐 혹은 외적 원리이냐로 결정될 성질의 것이다.

   내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원망과는 상관없는 어떤 외적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나의 충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통제원리를 스스로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입법한 자기통제의 원리에 따라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행위를 결정해 나가는 것을 참다운 의미의 자유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의 자유는 곧 ‘자율성’(autonomy)과 동일한 개념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자유인의 육성이라는 교육목적은 자율적 인간의 육성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4.6.2. 사회적 측면에서의 교육목적


   사회적 측면에서 교육의 목적은 사회의 존속과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사회의 기존 제도와 체제가 원활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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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유지에서 나아가 기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제 요소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교육은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사회 문화 제도와 가치관을 이해하고 그를 수용·보존토록 하며, 사회구성원들 간에 공동체 의식과 동일한 가치관을 심어 사회적 통합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해 낼 수 있는 인간들을 길러내며, 현상 유지만이 아니라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교육의 목적을 교육의 사회적 기능의 개념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사회문화의 보존적 기능이다. 교육은 그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체계와 생활양식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겨주는 기능을 한다. 개인에게 사회의 지식체계와 경험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 사회의 가치체계와 생활양식에 적응하도록 하고, 그를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한 사회의 정치체제, 경제체제, 문화체제의 유지와 보존을 꾀하는 것이다. 성장하는 세대가 기존의 세대 또는 그 이전의 세대에 의해서 형성된 문화를 학습하는 것은 그 사회의 성원이 되는 자질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한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또한 사회적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졌다고도 할 수 있으므로, 그 문화를 학습하는 것은 우선 삶의 기본적 조건을 학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사회적 생활의 기본적 조건을 획득하는 일이며,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한 문화집단의 삶의 형식을 지속시킴으로써 그 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개인을 사회에 종속시키는 일이 아니며, 한 사회의 삶의 방식을 고착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의 기본적 바탕을 성립시켜 주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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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교육의 사회문화의 개조기능이다. 사회의 기존 가치들과 신념체제, 그리고 생활양식들은 언제나 합리적인 것일 수는 없으며, 또한 합리성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므로 사회의 가치체계와 생활양식은 변화에 대한 요구에 응하고 나아가 보다 능동적으로 그러한 변화를 일으켜 나가는 변화자로서의 역할이 요구된다. 교육은 내일의 사회에서 주역을 담당할 성장하는 세대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기에, 현재의 생활양식, 즉 문화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그것을 개조해 나가고 새로운 문화를 발전적으로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문화개조의 기능을 갖는다.

   셋째, 사회문화의 통합적 기능이다. 오늘날 사회적,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교육의 중요한 목적은 사회적 통합성을 기하는 데 있다. 하나의 사회는 여러 가지 계층이나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은 각각의 배경과 환경에 따라 이질적인 신념체계나 하위문화를 가질 수 있다. 학교교육은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생활양식을 초월한, 다소 보편적인 생활양식과 중립적인 가치를 후세대에게 가르침으로써 사회구성원 간의 통합을 도모한다. 만약에 이러한 교육적 기능이 없으면, 사회계층별로, 지역사회별로, 종교집단별로, 혹은 직업집단별로 각기의 교육을 계획하고 실시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사회는 각 집단과 계층 간에 형성된 이질적 가치관과 문화로 인해 이질적 집단의 집합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사회가 존속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구성원 간의 응집력과 연대의식을 형성해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공유하는 신념체제, 가치관, 사고방식, 감정, 습관 등이 없으므로 사회적인 연대감이 형성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질적인 집단들 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해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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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교육의 가치, 그 정당화


   어떤 행위에 대해 우리는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결국 그 행위의 의미나 가치를 묻는 것이며, 왜 그 행위를 가치로운 것으로 생각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그 행위가 의도하는 목적이나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도 교육은 왜 하는가, 왜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교육의 가치를 묻고 그에 대한 정당화를 요구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개념과 목적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교육이 가치있는 활동이라는 것을 계속 암시해 왔다. 따라서 지금 “교육을 왜 하는가”, “왜 교육은 가치로운 것으로서 인정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이상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교육의 개념적 요소에서 규범적 요소를 포함시킬 때, 교육은 그 개념상 가치로운 것을 지향하는 활동이 되며, 따라서 교육은 그 자체로서 가치롭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의 개념적 요소로서 규범적 요소를 강조한 피터즈는 “교육은 왜 가치로운가?”라고 묻는 것은 “지식은 왜 가치로운가”라고 묻는 것과 같이 이상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각주 4: R. S. Peters, “The Justification of Education.” In R. S. Peters(ed.), The Philosophy of Educ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239-267.]

   그에 의하면, “지식은 왜 가치로운가?”의 질문은 지식의 가치를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질문이며, 만약 지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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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으며 따라서 질문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터즈에 의하면, 교육의 가치를 묻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교육의 개념에는 이미 ‘가치로운 것의 추구’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곧 “가치로운 것은 왜 가치로운 것으로서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가치에 대한 피터즈 식의 선험적 정당화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교육의 가치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는 교육에는 가치가 이미 개념적, 논리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전제 — 즉, 하나의 개념적 가정(假定) — 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리하여 교육은 가치로운 것일 수도 있으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 교육의 가치를 묻는 질문은 의미 있게 제기될 수 있다. 특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형태의 교육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을 때, 또는 그러한 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거나, 설혹 인정한다고 해도 실제 이루어지는 교육 행위가 그러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교육을 왜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회의를 심각하게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교육은 그 개념상 ‘가치로운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회의나 질문은 잘못된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개념과 현실의 세계에 대한 혼동에 기인하고 있는 잘못된 답이라 할 것이다. 교육의 개념에 ‘가치로운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다만 개념적인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적인 가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사실에 있어서 실제로 ‘가치로운 것’이 교육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육이 이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느냐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개념상 포함되어 있으니까, 사실적으로도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교육의 가치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은 개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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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구분하지 못한 오류의 결과이다.

   둘째, 지식의 가치를 묻는 것 자체는 지식의 가치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정당화 논리의 문제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나는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진술로서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술 자체는 이미 ‘지식’의 한 형태이거나 지식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살아 있기 때문에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이 이미 인생의 가치를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까닭에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누군가가 단언하면서 자살하고자 할 때, “그 발언은 이미 인생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그 발언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진술로서 성립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자살기도를 막을 수 있을까? “인생은 가치가 없다”라고 말할 때 ‘인생’은 자기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가치를 알 수 없는 ‘인생’을 의미한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고 할 때, 이러한 법칙 자체는 예외가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이 진술에서 언급하고 있는 ‘법칙’은 이 언급 자체를 제외시킨 ‘법칙’이다.

   교육의 가치를 선험적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결국 교육의 개념이 ‘교육’이라는 말에 붙박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명해 왔듯이 ‘교육’의 개념은 교육에 붙박혀 있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우리들의 가치관과 신념에 의해서 그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교육의 개념을 갖고 있으며, 또한 교육을 가치로운 것으로 보지 않는 어떤 사람에게, 선험적 정당화를 통해서 교육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판단은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정당화시키려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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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교육이 존재하는 한 교육의 가치는 끝없이 회의되어져야 하며, 정당화되어져야 한다. 그 가치가 더 이상 논의되지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 활동은 가치 있는 활동이라기보다는 가치 있는 활동이 아니기 쉽다.

   “우리는 과연 가치로운 교육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가치로운 교육을 받고 있는가?”하는 질문과 반성, 회의와 비판은 교육이 존재하는 한 항상 새롭게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을 통해서만이 교육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으며, 가치로운 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교육의 모습이 지켜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육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결국 구체적인 교육의 상황을 보고, 그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와 실제적인 교육 행위가 우리의 가치관에 비추어 만족스러울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교육이 추구하는 목적 그 자체의 타당성과 정당성이 평가되어야 하며, 정당성이 인정되는 교육목적이 있다고 할 때 그러한 교육목적을 실제로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 내고 있는가, 교육이 이러한 바람직한 목적의 성취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교육다운 교육’인가가 평가되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때 교육의 가치는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당화의 방식과 달리, 교육은 선험적으로 가치로운 것이라거나, 선험적으로 가치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가치롭다는 식의 정당화는 곤란하다. 가치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경우에도 어떤 지식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의도 하에서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것은 ‘바람직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요 약


1. 교육의 과정은 끊임없는 가치 판단과 선택의 과정이다. 교육을 ‘가치기업’이라고 일컫는 것은, 교육의 이러한 특징을 특히 강조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가치기업으로서의 교육은 가치 판단과 선택의 주체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사람됨과 삶에 광범위하고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사회의 공동선을 부각시키고 통합성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사회적 사업으로서의 교육에 있어서 가치 판단과 선택은 보편타당성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치중립성이 요구된다. 가치중립성의 원칙은 곧, 교육적 가치 판단이나 선택이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거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 기준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한 기준이 없을 경우 ‘중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가치중립성에 대한 요구는 때때로 가치 판단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에 있어서 가치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올바른 논의가 배제되고서는 올바른 교육이 성립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가치중립성의 표방 하에 가치 판단과 선택을 회피하려는 경향은 시정되어야 한다.


4. 가치문제를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가치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윤리학은 가치의 본질과 가치 판단의 기준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고전적 윤리설은 선악이나 미추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는 반면, 현대적 윤리설은 절대주의적인 고전적 윤리설의 입장을 부정하고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5. 오늘날 윤리적 상대주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생활 속에 깊이 확산되고 있으며, 도덕적 무감각과 허무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덕적 무감각과 허무주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비이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와 윤리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논의와 합의의 가능성이 올바르게 인식되어져야 한다.


6. 교육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교육의 개념 속에서 일차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교육의 개념을 규범적으로 파악했을 때, 바람직한 것의 실현을 추구한다고 하는 ‘가치지향성’의 요소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교육적 선택이 ‘가치지향성’의 요소를 충족시키느냐의 판단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7.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가치 추구를 통해 ‘가치지향성’의 조건을 충족시켜 나가느냐의 문제가 곧, 교육목적의 문제이다. 교육목적은 글자 그대로 교육 행위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 주고, 교육의 과정에 있어서 가치 판단과 선택의 기본적인 준거를 제공해 주게 된다.


8. 교육에 대한 동기가 다양한 측면과 차원에서 성립하고 있듯이, 교육목적도 다양한 차원과 수준에서 파악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목적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 차원에서의 목적이 규정될 수 있으며,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 포괄적 목적과 지엽적 목적, 장기적 목적과 단기적 목적이 각각 다른 차원과 수준에서 규정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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