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우(1991). 『교육의 개념』. 서울: 문음사.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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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문제의 성격
‘교육의 개념’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일상적인 질문으로 바꾸어서 표현한다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된다. 이 책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대표적인 대답을 제시하고 각각에 관하여 필요한 만큼의 고찰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떤 성격의 질문인가, 그리고 그 대답에 관하여 고찰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일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다.
1. 교육의 개념이 논의되는 맥락
키에르케고르의 저작 중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적혀 있다 ─ 한 정신병 환자가 입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정신이 온전하다고 생각하여 그 억울한 감금상태로부터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자유를 위한 기도에 성공하여 그는 마을로 향한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 ‘내가 마을에 갔다가 붙잡히면 다시 이 지긋지긋한 병원에 갇히게 되겠지. 그러나 만약 내가 확실한 객관적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정신이 온전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걷는 동안에 그는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공 하나를 주워서 뒷호주머니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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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그 공은 뒷호주머니에서 퍽퍽 소리를 내고 부딪혔다. 공이 부딪힐 때마다 그는 ‘지구는 둥글다’를 되뇌었다. 마을에 들어서는 길로 곧 그는 친구 집에 가서 자신이 온전하다는 증거로서,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둥글다’를 연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 정신병자임을 증명한 것이다. [각주 1: Thomas C. Oden(ed.), Parables of Kierkegaar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8, p. 50. 이 우화는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에서 발췌한 것이다.]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별로 낯선 질문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질문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대두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상생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세부적인 교육문제가 상당히 전문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동안에도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적어도 이와 같이 명시적인 형태로 제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부적인 교육문제를 논의할 때,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오직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묵시적으로 가정하고 그 가정 위에서 목하 논의되는 교육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뿐, 그 질문을 명시적으로 제기하지도 않고 그 대답을 언어화하여 진술하지도 않는다.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명시적으로 거론되는 전형적인 경우는 교육학 개론 강의 시간이나 교육학의 개론서를 집필할 때이다. 이 경우에는 목하 논의의 관심사인 교육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연히 다루어질 것이며, 다분히 일반적인 용어로 된 교육의 정의가 내려질 것이라고 기대된다. 아마 이 책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문제는, 그런 경우에 다루어지는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떤 성격의 것이며, 그런 경우에 내려지는 교육의 정의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는 교육학에 관한 개론적 강의를 하거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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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 책을 쓰는 사태를 분석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서는 오히려 교육학 개론 이외의 사태에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거론될 만한 경우를 찾아서 그 경우를 분석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학 개론의 사태를 예외로 치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무데서나 느닷없이 불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종의 맥락에서 제기된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교육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질문은 흡사 앞의 키에르케고르의 우화에 나오는 ‘지구는 둥글다’라는 말과 같이, ‘미친 사람’의 질문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그 정신병자의 ‘지구는 둥글다’라는 말이 거의 절대적인 객관적 진리를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친 사람의 말인 것처럼, 아무 맥락 없이 불거져 나온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그것이 비록 일상적으로 친근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질문을 제기하는 맥락과 관련하여 의미를 가지며, 우리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그 맥락에 비추어서가 아니면 안 된다.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것은 어떤 사태에서인가?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지적 호기심’이라는 식으로 대답할지 모른다. 말하자면, 교육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실지로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설사 교육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경우가 실지로 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대답은 근본적인 대답이 될 수 없다. 물론,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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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에 관해서나 생길 수 있는 만큼, 그것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하여 생겼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어째서 하필 그 문제에 관해서 지적 호기심이 생겼는가에 대해서는 응분의 설명이 주어져야 한다. 어느 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생기는 데는 반드시 모종의 맥락이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어떤 맥락에서 생기는가 하는, 원래의 문제로 되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이하에서 밝혀질 바와 같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순전히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질문의 엄청난 의의를 어이없이 과소평가하는 셈이 된다.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또는 의미있게 제기되는 경우를 이리저리 모색해 보면, 거의 예외없이 그 질문은 교육에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때 제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 어떤 사람이 보기에 오늘날의 교육은 그것이 참으로 교육인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꼴로 되어 있다고 하자. 또한 그 사람은 오늘날 교육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비교적 정확하게 규정하려고 한다고 하자. 이때 그 사람에게는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그리고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 대답 ─ 한 마디로 ‘교육의 개념’ ─ 은 그 사람이 오늘날 교육의 문제점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 사람이 하는 생각은 그 형식으로 보면, 1) 교육은 이런이런 것이다, 2) 오늘날 교육은 이것과는 다르다, 3)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육은 그릇되다 ─ 고 하는 식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교육의 개념에 관한 논의는 당시의 교육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규정하는 기준으로서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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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다. 이하에서 드러날 바와 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육의 개념에 관한 논의의 의미를 약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기는 해도 그 의미를 순전히 지적 호기심과 결부시키는 것이 그릇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에는 충분하다.
앞에서 말한, 교육의 세부적인 문제가 전문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자.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논의에서도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특정한 교육 문제에 관하여 두 사람이 상반된 의견을 표방한다고 하자. 얼마간 논의가 진행된 뒤에 두 사람은 그들의 의견이 상당히 근본적인 데서 갈라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들의 의견 차이는 어쩌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서로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의 개념을 명료화할 필요를 느낀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교육이 개념이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건 상이한 것으로 확인되건 간에, 그것이 확인된 뒤에 그들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하는 것은 당장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점만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즉, 가령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상이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하자. 또한, 목하 논의되는 특정한 교육문제에 관한 그들의 의견 차이가 그 대답의 차이에 연유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하자. 만약 그들이 자신의 논의에 대하여 참으로 성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다시 말하여, 만약 그들이 목하의 문제에 관한 올바른 의견을 찾아내는 데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교육의 개념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논의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 교육에 관하여 논의하는 동안에 어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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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것은 교육의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이 목하의 논의를 낙착시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곧 정의의 문제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 다시 말하면, ‘당신은 교육을 이러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정의와는 다르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하에서 곧 말하겠지만, 정의의 문제는 성격상 그런 것이 아니다. 앞의 경우에 비추어서 말하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는가, 또는 교육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것은 목하 논의 중인 교육 문제에 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만약 그 의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올바른 의견인가가 논의의 대상이 된다면, 교육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논의의 대상이 된다. 만약 그 두 사람이 ‘우리는 피차 교육의 정의를 달리하니까 그 이상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하면서 헤어진다면, 그들은, 결과적으로 말하여, 좀더 올바른 의견을 찾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논의는 애당초 시작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우리는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두 개의 사태를 고찰하였다. 하나는 교육에 모종의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될 때 그 문제점을 좀더 명백하게 규정하는 기준으로서 교육의 개념이 거론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특정한 교육문제에 관한 의견 차이가 있을 때 그러한 의견 차이를 파생시킨 보다 근본적인 원천으로서 교육의 개념이 거론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경우는 교육의 개념이 논의되는 맥락을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맥락 사이에 모종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는가? 또한, 이 두 경우 이외에, 심지어 교육학 개론 강의까지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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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개념이 거론되는 모든 경우를 통틀어서, 교육의 개념에 관한 논의가 그 맥락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보다 일반적으로 규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다시 말하면 교육을 정의하는 행위가 앞의 우화에 나오는 ‘지구는 둥글다’라는 정신병자의 말과 똑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도저히 회피하거나 얼버무릴 수 없는 그런 문제이다.
2. 강령적 정의
셰플러(Scheffler)가 ‘교육에 있어서의 정의’라는, 널리 인용되고 있는 글에서 말한 ‘강령적 정의’(programmatic definition)라는 용어는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단서가 된다. [각주 2: Israel Scheffler, ‘Definitions in Education’, The Language of Education, Charles C. Thomas, 1960, pp. 11-35.] 이 글에서 셰플러는 과학에서의 정의와 과학 이외의 사태에서의 정의를 구분하여, 후자를 ‘일반적 정의’라고 부른다. (이 일반적 정의에 대하여, 과학에서의 정의는 ‘조작적 정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조작적 정의’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셰플러는 이 ‘일반적 정의’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각각이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먼저, 셰플러의 설명을 따라 세 가지 정의와 그 역할을 제시하고, 그 중에서 특히 ‘강령적 정의’가 목하 우리의 문제에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 설명해 보겠다.
첫째로, 성적 등급을 표시하는 ‘수, 우, 미, 양, 가’를 각각 정의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글자들이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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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 그리고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수’라는 것은 ‘뛰어나다’는 뜻이라든지 ‘가’라는 것은 ‘무엇무엇을 해도 좋다’는 뜻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각각의 글자를 풀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섯 글자를 정의하자면, ‘수는 91점에서 100점까지, 우는 81점에서 90점까지 … 가는 60점 미만을 뜻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 정의에서 ‘정의되는 말’(수, 우…)은 ‘정의하는 말’(91점에서 100점, 81점에서 90점…)을 요약하여 붙인 임의적인 이름에 불과하다. 수우미양가가 반드시 이 순서대로 되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사실상 반드시 수우미양가가 아닌, 전혀 무의미한 부호를 써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91점에서 100점, 81점에서 90점, 등등을 부르는 이름을 만들어서 쓰기로 약속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 약속에 비추어 정의된다. 이런 종류의 정의를 ‘약정적 정의’(stipulative definition)라고 부를 수 있다.
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약정적 정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일상적인 어의와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물을 수가 없다. 이것을 묻는 것은 곧 ‘수’가 과연 일상적으로 91점에서 100점 사이의 성적을 나타내는가를 묻는 것이다. ‘수’가 이때까지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 정의의 타당성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약정적 정의의 포인트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정적 정의는 종래의 일상적 어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정의에 의하여 규정되는 용어가 일상적 어의에서 ‘이탈’된다는 것을 보이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는 91점에서 100점 사이의 성적을 나타낸다’는 정의는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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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어의 ─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 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 정의는 ‘약정적 정의’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한 용어의 정의를 물을 때,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정의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그 용어가 어떻게 일상적인 어의에서 이탈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적인 어의 그 자체를 알고 싶어한다. 이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정의를 가리켜 그 용어의 ‘기술적 정의’(descriptive definitio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 정의가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알려면 국어사전을 보면 된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낱말 풀이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낱말이 일상적으로 ─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정의가 내려지기 이전에 ─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설명해 놓은 것이며, 이 점에서 그것은 기술적 정의에 해당한다.
예컨대 ‘교육’이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찾아보자. 한 국어사전에는 ‘교육’이라는 단어가 ‘1) 가르쳐 기름, 2) 전체적 인간 형성의 사회적 과정’으로 풀이되어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기술적 정의는 그 형식에 있어서 약정적 정의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은 가르쳐 기르는 일을 뜻한다’와 ‘수는 91점에서 100점 사이를 뜻한다’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일한 형식의 이면에는 두 정의에서의 관심의 차이가 숨겨져 있다. 약정적 정의에서의 관심은 위의 정의에서 보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왼쪽의 항인 ‘수’는 오른쪽의 ‘91점에서 100점 사이’를 요약하는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에 반하여, 기술적 정의는 그 관심의 방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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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작용한다. 기술적 정의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교육’이라는 용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뜻을 알려줌으로써 그 용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약정적 정의의 관심이 ‘속기’에 있다고 한다면, 기술적 정의의 관심은 ‘설명’에 있다. 속기는 오로지 편의에 의거할 수 있지만 설명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기술적 정의에 대해서는 약정적 정의에 대해서와는 달리 그 정의가 ‘올바른’ 정의인가를 물을 수 있다. 이때 이 물음은 과연 그 정의가 해당 용어의 일상적 어의와 부합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약정적 정의에 대해서는 이 물음이 해당되지 않는다. 약정적 정의가 일상적 어의에서의 이탈을 그 포인트로 한다면, 기술적 정의는 그것과의 합치를 그 포인트로 한다.
국어사전의 낱말 풀이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술적 정의는 특정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내려진 정의가 아니라, 누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가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도록 내려진 정의이다. 그것은 예컨대 ‘교육’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 ─ 즉, 맥락무관의 의미 ─ 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점에서 기술적 정의는 앞에서 말한, 교육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거론되는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다. 교육에 관한 모종의 심각한 문제점이 느껴져서, 또는 특정한 교육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를 명료화할 필요가 있어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될 때,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찾는 것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낱말 풀이가 아니다. 그들은 교육이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몰라서 그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면서도 그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육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 다시, 그 단어의 정의가 문제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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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 어떤 뜻으로 사용되어 왔는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정확하게 (또는, 올바르게) 어떤 뜻으로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기술적 정의와는 다른 종류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때 요구되는 정의가 ‘강령적 정의’이다.
약정적 정의와 기술적 정의가 그 형식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강령적 정의 또한 그 형식에 있어서 기술적 정의와 다르지 않다. 교육의 개념을 명료화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누군가가 교육의 정의를 내린다면 그 정의는, 형식으로 보면, 국어사전의 낱말 풀이 ─ 예컨대, ‘교육은 가르쳐 기르는 것을 뜻한다’ ─ 와 다를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강령적 정의와 기술적 정의의 차이는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이는 목적, 또는 그것이 논의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있다.
셰플러가 보기로 든 ‘전문직’의 정의를 생각해 보자. 논의에서 전문직의 정의 문제가 대두되는 대표적인 사태는 어떤 특정한 직업을 전문직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아닌가가 문제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때 전문직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이때까지 전문직으로 취급되어 오던 직업이 전문적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이때까지 전문직으로 취급되지 않던 직업이 전문직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목하 논의의 대상이 되는 그 직업이 이때까지 전문직으로서 누려오던 특별한 대우를 그 이상 누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이때까지 다른 전문직들이 누려오던 특별한 대우를 목하 논의의 대상이 되는 그 직업에도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물론, 때로는 이때까지 전문직으로 분류되던 직업을 전문직으로, 또는 전문직으로 분류되지 않던 직업을 전문직이 아닌 것으로 재확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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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에도 위와 마찬가지의 해석이 적용된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문제는 목하 논의의 대상이 되는 직업에 대하여 전문직에 해당하는 특별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에 있다. 이 문제가 표면상으로 ‘전문직은 무엇인가’라는 정의의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즉, 위와 같은 맥락에서의 전문직의 정의 문제는 표면상으로 보면 말의 뜻에 관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어떤 특정한 직업에 대하여 전문직에 해당하는 특별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행동 강령’(또는 프로그램 program: 셰플러의 용어 programmatic definition은 ‘프로그램적 정의’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의 문제가 들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용되는 정의가 ‘강령적 정의’이다. 그것을 ‘강령적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이 경우에는 ‘해당 직업을 전문직으로 대우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행동 강령의 문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문직의 정의가 논의되는 경우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제 어떤 직업 하나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전문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가 문제로 되어 ‘전문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가령 전문직의 정의를 A로 내리면 그 직업은 전문직에 속하게 되고 B로 내리면 그 직업은 전문직에 속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 직업은 정의 A에 명시된 요건은 갖추고 있지만 B에 명시된 요건에는 미달된다.) 정의 A와 B 중에서 어느 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전문직의 정의가 논의되는 구체적인 사태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정의 A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서, 정의 A가 이때까지 일반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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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여 온 관례적 어의에 더 가깝다는 것을 내세운다고 하자. 만약 그 사람이 그것으로 논의가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문직의 정의가 논의되는 그 맥락을 전적으로 그릇되게 파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태에서의 문제는 한 정의가 일상적 어의에 부합하는가 않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관계없이, 한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옳은가(따라서, 목하 논의의 대상이 되는 그 직업을 전문직에 포함시키거나 거기서 제외하는 것이 옳은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정의 A가 관례적 어의에 더 부합한다고 하여 그것이 옳은 정의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목하 논의되는 직업을 전문직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기될 수 있고, 그 사람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가 관례적 어의에 부합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강령적 정의는 기술적 정의보다는 약정적 정의와 더 비슷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 정의가 기술적 정의로 간주될 때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그것이 일상적 어의에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의하여 판단되는 반면에, 약정적 정의는 처음부터 일상적 어의에서 이탈하려는 의도에서 내려진다. 강령적 정의도 이 점에서 약정적 정의와 동일하다. 예컨대 위와 같은 사태에서 문제는 ‘전문직을 어떻게 정의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어의에 부합할 것인가’가 아니라 ‘전문직을 어떻게 정의하면 이 특정한 직업이 전문직에 포함되거나 거기서 제외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리하여 만약 그 직업이 전문직에 포함되거나 거기서 제외되는 것이 어떤 점에서든지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면, 그 판단에 맞게 정의가 내려지며, 이 점에서 그 정의는 관례적 어의에 부합하는 것보다는 그것에서 이탈하는 것을 포인트로 삼는다고 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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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러나 강령적 정의에 대해서는 약정적 정의의 경우와는 달리 그 타당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이 점에서 그것은 약정적 정의보다는 기술적 정의와 비슷하다. 약정적 정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편리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이상으로, 그것이 과연 올바른 정의인가, 또는 어째서 그 정의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없다. 그러나 기술적 정의와 강령적 정의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다만, 두 경우에 제기되는 질문의 종류 또는 의미가 다를 뿐이다. 기술적 정의에 대해서 그것의 타당성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면, 그 질문은 그 정의가 종래의 관례적 어의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며, 이런 뜻에서 그것은 ‘언어적’ 질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강령적 정의의 타당성에 관한 질문은 이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그것은 그 정의에 함의되어 있는 행동 강령이 올바른가(예컨대 특정한 직업을 전문직에 포함시키거나 거기서 제외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는 것이 올바른가)를 묻는 것이다. 셰플러는 이런 종류의 질문을 앞의 언어적 질문과 구분하여, ‘도덕적’ 질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여기서 도덕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도덕과는 다른, 훨씬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도덕적 판단’에 관계되는 것이며, 그 판단에는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고려사항이 개입할 것이다.
위의 설명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인간과 사회에 관한 논의에서 문제되는 정의는 대부분 강령적 성격을 띤다. ‘교육’이라는 단어의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에 관한 논의에서 교육의 정의가 문제될 때, 그것이 마치 국민학교 학생들의 짧은 글짓기 문제와 같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논의에 참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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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미 ‘교육’이라는 단어를 어떤 경우에 써야 하는지 알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교육의 기술적 정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논의에서 교육의 정의가 문제된다면, 그것은 곧 교육에 관한 강령 또는 프로그램 ─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인가 ─ 에 관한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의 강령 또는 프로그램은 크게는 교육의 근본적인 성격에서 시작하여 작게는 입시문제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에 걸쳐서, 또 다양한 부면에 관하여 논의될 수 있으며, 이 문제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는 맥락에서 교육의 개념이 문제된다는 것은 곧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는가가 그 논의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시, 교육의 개념에 관한 논의는 사소한 것도 아니요 쉽게 낙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3. 교육의 개념에 대한 지적 자세
이상의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즉,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질문이나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 말이 의미를 가지는 정도는 이것이 이해되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등 마음의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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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한다든지, 그 말이 어떤 마음의 동요를 나타내는가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은 이 장의 첫머리에 나와 있는 ‘지구는 둥글다’라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제, 이때까지 말한 바에 비추어 이 점을 설명해 보겠다.
이때까지의 고찰을 돌이켜 보면, 교육의 정의가 강령적 정의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것은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맥락을 조사해 본 결과로 얻어진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상적인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무렇게나 불쑥 튀어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답 여하가 교육의 전반적인 문제를 규정하는 데에나 특정한 교육 문제에 관한 의견을 사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될 때 제기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교육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어의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육의 정의, 즉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발언이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인 한, 교육의 정의도 그 질문의 성격에 비추어 그것과 동일한 뜻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발언은 교육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어떤 경우에 사용되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어떤 교육이 올바른 교육인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발언이 교육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어의를 묻는 질문의 대답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한 뒤에, 자신은 오직 교육이라는 단어가 일상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말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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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당연히, ‘그런 종류의 발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셰플러가 말한 ‘강령적 정의’는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발언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조건을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은 때로, 예컨대 교육학 개론 강의나 교육학 개론서에서와 같이, 자연적인 맥락을 떠나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령적 정의라는 말에 나타난 의미 조건은 이 경우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강령적 정의라는 말은 교육학 개론서나 강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이 어떤 정신상태의 표현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연적 맥락 안에서건 밖에서건 간에,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이 완전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어서, 그 말이 미친 사람의 헛소리도 아니요, 또한 교육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어의를 가르쳐 주려는 말도 아님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말 속에 현재의 교육에 대한 그 사람의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보기에 현재의 교육은, 실제적인 면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론적인 면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 사람은 이 사태에 대하여 지적 분개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런 느낌을 가진다.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그의 발언은 현재의 교육이 실제적인 면에서나 이론적인 면에서 그릇된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며, 그 발언을 할 때 그 사람은 그 지적에 수반되는 일종의 지적 분개도 함께 느낀다. 요컨대 그 사람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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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는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을 듣기도 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가 들은 말을 되받아서 말하기도 한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이미 한 말을 듣고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강령적 정의라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의미 조건이 도외시될 가능성과 위험이 가장 큰 경우는 바로 이와 같이 남이 내려놓은 정의를 되받아서 말하는 경우이다. 가령 남이 내려놓은 정의를 되받아서 말하는 사람이 그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을 단어의 사용에 관한 약속(‘약정적 정의’)이나 단어의 관례적 어의(‘기술적 정의’)를 나타내는 것 정도로밖에 생각을 못한다면, 그 사람은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만다. 그 사람은 원래 그 말을 한 사람이 교육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원래 그 말을 한 사람이 그 말을 했을 당시에 느꼈던 지적 분개를 함께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등 마음의 동요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말을 되받아서 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게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그야말로 ‘정의상’의 문제에 불과하며, 교육의 정의에 관한 문제는 교육에 관한 논의에서 하등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심하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들은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이 정신병자의 헛소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 헛소리를 그가 들은 그 상태대로 되받아 함으로써 그 자신도 정신병자의 헛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상의 고찰은 결국 이하 이 책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교육의 세 가지 정의(또는, 세 가지 교육의 개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어떤 지적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그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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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것은 정범모 교수의 정의, 피터즈(R. S. Peters)의 정의, 그리고 뒤르껭(Emile Durkheim)의 정의이다. 물론, 이들 세 가지 정의는 이 책에서 처음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 널리 인용되어 왔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정범모 교수의 정의는 교육학에 초보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도 알려져 있다. 이들 세 가지 정의는 모두 그 세 저자들이 쓴 책 [각주 3: 이들 세 개의 정의가 제시된 대표적인 저서는, 정범모, 『교육과 교육학』, 배영사, 1976; R. S. Peters, Ethics and Education, George Allen & Unwin, 166, 이홍우(역), 『윤리학과 교육』, 교육과학사, 1980; Emile Durkheim, Education and Sociology(trans. S. D. Fox), Free Press, 1956, 이종각(역), 『교육과 사회학』, 배영사, 1978.] 의 첫 부분에 제시되어 있으며, 이것만으로 보면 그것은 모두 앞에서 말한 ‘논의의 정상적인 맥락’ 바깥에서 제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육의 특정한 세부적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말하는 동안에 적절한 맥락에서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 관한 책을 쓰면서 첫머리에 교육의 정의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여, 그 저자들은 그 정의를 통하여 우리에게 모종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그들의 발언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우리는 그들이 그 말을 할 때 틀림없이 가졌을 문제의식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교육의 어떤 점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그런 느낌을 다소간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그들의 정의를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지적 부담이다. 이 부담을 감당할 자세나 능력이 없이 그들의 정의를 그냥 되받아 말하기만 하는 것은 그 정의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의미를 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이다.
이 장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는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대표적인 대답을 고찰하겠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대표적인’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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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하고자 하는 교육의 정의가 정범모 교수, 피터즈, 뒤르껭의 정의인 것으로 밝혀진 지금, 이들의 정의가 어떤 점에서 ‘대표적인’ 것인가에 대하여 궁금히 여기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문제에 관하여 잠깐 언급하겠다.
여기서 먼저 지적해야 할 점은, 이들의 정의는 모두 교육을 ‘총체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각주 4: 이하 설명되는 내용은 마지막 5장에서 다시, 약간 더 자세하게 취급된다.] 가령,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범모 교수의 정의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를 들을 때, 우리는 이 정의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체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규정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여,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가 아닌 교육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인 교육이 따로 있고 그것이 아닌 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이다. 그 정의를 내린 정범모 교수의 관점이 그러하고, 우리도 그것을 그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인 교육이 있고 그렇지 않은 교육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정의가 교육의 ‘총체’가 아닌, 한 ‘부분’을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그 정의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 나머지 부분(이것도 역시 교육이라고 보아야 한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하는 해결 불가능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 난관은 오직 우리가 그 정의를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빚어진 불필요한 난관이다.
이상 정범모 교수의 정의를 보기로 하여 말한 내용은 피터즈나 뒤르껭의 정의, 그리고 그 밖에 누구의 정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피터즈나 뒤르껭의 정의도 교육의 한 부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체의 활동을 규정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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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러므로 이하 이 책에서 고찰될 세 개의 정의를 이해할 때, 마치 그 세 개의 정의가 교육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각각 한 조각씩 규정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세 개의 정의는 각각 교육의 전체를 규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 개의 상이한 ‘교육’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상이한 ‘정의’를 가지게 된다. 비유해서 말하면, 그 세 개의 정의는 교육이라는 덩어리 전체를 각각 상이한 방향 또는 시각에서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물체를 상이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비록 그 물체 자체는 동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교육의 정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세 개의 정의는 교육이라는 하나의 총체를 보는 상이한 시각을 나타낸다. 앞의 ‘부분’이라는 용어와 정확하게 대비되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그 세 개의 정의는 교육의 세 가지 ‘양상’(modes)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각주 5: 정의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Oakeshott의 생각에서 시사받은 것이다. 그는, 과학이나 역사와 같은 지식은 각각 세계의 상이한 ‘구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총체로서의 세계를 상이한 ‘양상’(modes)에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M. Oakeshott, Experience and Its Mod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3.]
교육의 상이한 양상은 각각 상이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교육이라는 활동을 상이한 시각으로 볼 때 교육은 상이한 문제를 가진 것으로 비친다. 이렇게 비친 교육의 모습이 곧 교육의 양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특정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교육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발언은 그 문제의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정범모 교수의 정의가 교육의 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에도,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가 ‘모든 교육’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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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의가 ‘모든’ 교육을 설명하는가 하는 의문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를 제외한 나머지 교육이 있지 않은가 하는 뜻이 아니라,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에 나타난 문제의식 이외에, 그것과는 다른 문제의식이 없는가, 그 정의에 의하여 파악되는 교육의 양상이 과연 교육의 ‘유일한’ 양상인가 하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상의 고찰은 이 책에서 논의될 세 가지 정의가 어떤 뜻에서 ‘대표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여기서 ‘대표적’이라는 말은 그 세 가지 정의의 시각이 교육을 보는 대표적인 시각이라는 뜻이며 그 세 가지 정의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교육의 양상이 대표적인 양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 세 가지 정의는 이때까지 교육학에서 논의된 교육의 양상으로서 대표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다룬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문제이다. 나아가서 저자는 그 세 가지 정의에 의하여 파악되는 교육의 양상은 각각 특이한 것이어서 서로 통합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곧 그 세 가지 정의를 종합하면 보다 완전한 정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모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종합적인’ 정의가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도 불분명하지만, 설사 그런 정의가 내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교육을 보는 데에 특별한 유용성을 가질 것인가도 의심스럽다. 그 세 가지 정의가 서로 통합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정의에 의하여 설명되는 교육 현상이 어떤 종류의 것들이며 그 현상에 대하여 각각의 정의가 어떤 방식의 설명을 제시하는가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다소간이나마 자세하게 보이는 것은 이 책이 아닌 다른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