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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성년식 개념: 피터즈
앞 장 마지막 부분에서의 논의는 공학적 관점 또는 공학적 사고방식에서 ‘목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여, 공학적 사고방식에서 목적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범모 교수의 용어로 ‘이념이나 방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적이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고 해서 목적이 공학적 논의 또는 교육학적 논의에서 하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목적이 공학적 논의 속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그 ‘이미 주어진 목적’을 활동의 실제적 요건에 맞게 상세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을 공학적 관점에 의하여 파악하는 것, 또는 교육의 공학적 개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만큼, 교육에서의 목적의 위치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앞 장 마지막 부분에서의 논의는 목적이 활동에 들어오는 방식에 있어서 교육과 여타의 공학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다른 공학에서와는 달리, 교육에서는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을 ‘정립’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활동과 목적은 개념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파악되는 교육의 개념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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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할 교육의 둘째 개념은 피터즈(R. S. Peters)의 『윤리학과 교육』[각주 1: R. S. Peters, Ethics and Education, George Allen & Unwin, 166, 이홍우(역), 『윤리학과 교육』, 교육과학사, 1980.] 이라는 책에 제시된 것이다. 이 둘째 개념에 붙인 ‘성년식 개념’이라는 이름은 피터즈 자신의 ‘성년식으로서의 교육’ [각주 2: 피터즈가 교육의 개념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한 initiation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한 활동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 또는 ‘입문’을 뜻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또한 ‘성년식’(initiation ceremony 또는 rîte de passage)이라는 의식(儀式)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education as initiation’이라는 표현은 또한 ‘입문으로서의 교육’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터즈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번역판, p. 55, p. 285), 교육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initiation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입문’ 이상으로 ‘의식(儀式)’의 의미를 강하게 풍긴다. 독일 사람들은 피터즈의 이 아이디어를 나타내는 말로 Mündigkei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양인데, 이 독일어 단어는 initiation이라는 영어 단어보다는 피터즈의 의미를 훨씬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initiation은 단순히 ‘활동을 처음 시작하여 일정한 경지에 다다른 것’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아이가 법적, 사회적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는 것’(Mündigkeit)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라는 표현에서 딴 것이다.
위의 말에서 명백히 알 수 있듯이, 성년식 개념과 공학적 개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교육에서의 목적의 의미 또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차이가 공학적 개념의 문제의식과 구별되는 성년식 개념의 문제의식을 결정한다. 물론, 피터즈가 그의 교육의 개념을 제시할 때, 그는 이 책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공학적 개념’과의 대비를 염두에 두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말하자면, 피터즈는 정범모 교수의 『교육과 교육학』을 읽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이 책의 논리에 관한 한, 성년식 개념은 공학적 개념에 대하여 대안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그것은 공학적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실지 순서야 어떻든지 간에, 이론상으로 보아 성년식 개념은 공학적 개념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교육의 양상, 또는 공학적 개념이 나타내고 있는 문제의식을 인정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그것과는 다른 교육의 양상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피터즈의 교육의 양상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먼저 성년식 개념의 입장에서 볼 때 공학적 개념에서 도외시되는 측면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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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학적 개념의 근본적 애매성
가령 정범모 교수의 정의,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를 교육의 정의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상상해 보자. 물론, 이 요구는 당장 무리한 요구로 들릴 것이다. 우선,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막연하다. 그 질문이 사람의 체격이나 복장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일단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특징을 기술하는 관점은 그야말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그 중의 어느 것을 문제 삼아야 할지가 막연한 것이다. 또한,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표현에서 ‘잘’이라는 말도 어느 수준을 겨냥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막연한 점이 있기는 해도, 우리는 때로 교육과 관련하여 ‘교육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고, 또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도 그것이 전적으로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질문은 공연한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질문에 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교육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비록 우리가 정확하고 명확한 용어로, 또 만인이 완전히 합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을 기술해 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대체적인, 그리고 묵언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교육을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로 정의할 때 이 정의에 의하여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었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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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실지로 그 모습을 이리저리 상상해 본다면 거의 틀림없이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상,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그 질문이 막연하기 때문이거나 우리의 상상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질문이 공학적 개념의 논의 속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 아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는 것이다. ‘교육은 뜻하는 바가 무엇이건, 게릴라건, 성자건, 창의적 성격이건, 민주적 자질이건, 유효하고 강력성이 있어야 한다’는 정범모 교수의 말은 이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용한 표현으로 고쳐 말하면, 공학적 개념에서는 교육이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교육이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이라는 이 사실이 공학적 개념이 아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다. 가령 교육에서 가르치고 있는 온갖 다양한 내용 ─ 이른바 ‘교육내용’ ─ 을 어떤 기준에서든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교육을 한 결과, 학생들의 행동이 각각의 내용에 맞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고 하자.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에 의해서는 두 경우 중의 어느 것이 교육이고 어느 것이 교육이 아니라는 식의 말을 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육에서 사용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방법 ─ 이른바 ‘교육방법’ ─ 을 어떤 기준에서든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두 가지 방법이 학생의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실지로 효과를 발휘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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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이 경우에도 위의 정의에 의해서는 교육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서 양자에 차별을 둘 근거가 없으며, 양자를 동일하게 교육의 사례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그 두 가지 유형 사이에는 참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 각각의 내용과 방법(또는 양자의 결합)으로 교육을 할 때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에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차이가 생길 것이 예상된다고 하자. 그리고 이 차이는, 그렇게 근본적으로 상이한 모습의 인간을 기르는 일을 동일하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근본적인 것이라고 하자. 다시,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에 의해서는, 그 내용과 방법이 인간행동의 변화를 초래하는 데에 효과를 가지는 한, 위의 두 경우를 차별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 두 경우를 차별할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오직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두 경우를 과연 동일하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가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정의에 구애를 받지 않을 때이다. 그리하여 교육이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이라는 사실은, 공학적 개념에 구애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학적 개념에 근본적인 애매성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애매성’이라는 말은 명백하게 상이한 두 경우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논리상의 문제점을 가리킨다.)
이때까지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두 가지 유형, 그리고 그것에 함의된 두 가지 인간상을 가상적인 것으로 취급하였지만, 그것에 대하여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각주 3: 이하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두 가지 유형에 관해서는 이미 몇 차례 발표한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책의 논의에 필요한 정도로 개략적인 것만 제시하겠다. 『지식의 구조와 교과』, 교육과학사, 1980, pp. 120ff; 『교육의 목적과 난점』(제5판), 교육과학사, 1987, 6장과 8장; 『교육과정 탐구』, 박영사, 1977, 9장. 그러나 이 아이디어가 가장 종합적으로 정리된 것은 Hong-Woo Lee, Living, Knowing and Education, SNU Press, 195, chs. 3 and 4.] 교육에서 취급될 수 있고 또 실지로 취급되고 있는 내용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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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상, 예컨대 ‘빛은 직진한다’는 것에 해당하는 것도 있고 ‘퓨즈를 갈아끼울 줄 아는 것’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빛은 직진한다’는 것을 모르던 학생이 교육을 받은 결과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학생의 행동은 그만큼 변화된 것이며, 퓨즈를 갈아끼울 줄 모르던 학생이 교육을 받은 결과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학생의 행동은 그만큼 변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예에 의하여 대표되는 두 가지 유형의 ‘교육내용’의 성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두 가지 사이의 공통점은 오직 양자가 교육을 통하여 가르쳐지는 내용이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양자는 거의 모든 점에서 정면으로 대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퓨즈’의 경우에는 그것과 관련된 ‘문제사태’(즉, 퓨즈를 갈아끼울 줄 몰라서 불편한 경우)를 일상생활에서 저절로 당면할 수 있는 반면에, ‘빛의 직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퓨즈’의 경우에는 그 지식의 유용성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고 그 혜택이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미칠 수 있는 반면에, ‘빛의 직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이런 여러 가지 차이는 결국 한 가지, 그 양자의 포인트, 또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차이로 귀착되며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다. ‘퓨즈’의 경우에 그 포인트 또는 목적은 외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즉, 나갔던 전기가 다시 들어와서 방안이 밝게 되는 것)에 있다. ‘퓨즈를 갈아끼울 줄 아는 것’이라는 교육내용이 겨냥하는 문제사태는 바로 그러한 외적 변화가 요구되는 사태(즉, 퓨즈가 나가서 방안이 캄캄한 사태)이다. 그러나 ‘빛의 직진’의 경우에는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의 ‘문제사태’라는 것이 없다. 그 포인트 또는 목적은 외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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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을 과학적 개념에 의하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하면 내적 안목을 가지도록 하는 데에 있다. (‘안목’이라는 말에서 명백히 시사되는 바와 같이, ‘빛의 직진’에 관한 안목은 오직 당사자 자신을 통해서만 실현되며, 그 혜택은 ─ 만약 그것도 혜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당사자 자신에게 국한된다.) ‘퓨즈’의 포인트는 무슨 일인가를 ‘하는’ 데에 있으며, ‘빛의 직진’의 포인트는 관련 현상을 ‘보는’ 데에 있다. 이런 뜻에서 전자를 ‘하는 지식’(또는 ‘하는 교과’), 그리고 후자를 ‘보는 지식’(또는 ‘보는 교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다’든가 ‘본다’는 뜻의 희랍어 어원(실제: practice, praxis, doing / 이론: theory, theoria, seeing)을 존중하여, 양자를 각각 ‘실제적 지식’, ‘이론적 지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각주 4: 앞의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실제’는 ‘의도’와 ‘변화’를 핵심 개념으로 한다고 말한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위의 설명에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유용하다’든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지식’의 유용성이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보는 지식’에는 유용성이나 필요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연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어김없는 사실은,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지식’뿐만 아니라 ‘보는 지식’도 추구하고 소유하며 전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마도 더욱 중요한 사실로서, 우리는, 만약 그렇게 하기로 작정만 했다면, 외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하는 일’을 하는 동안에 내적 안목으로 현상을 ‘보는 일’도 동시에 할 수 있다. 전기의 원리를 알고 퓨즈를 갈아끼우는가 모르고 갈아끼우는가는 결과적으로 전깃불이 들어오는가 들어오지 않는가에는 아무 차이를 가져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퓨즈를 갈아끼우는 동안에 전기의 원리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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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방법에 관해서도 교육내용에 관해서와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교육방법이라는 것은 학생에게 모종의 내용을 전달하여 학생이 그것과 일관된 신념(또는 능력)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두 가지 상이한 점에 강조가 주어질 수 있다. 하나는 학생이 그 내용을 믿거나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 강조를 두는 경우이며, 여기에서의 관심은 결과적으로 학생이 그 내용을 믿거나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아닌가에 있다. 여기에 비하여 또 하나는 학생이 그 내용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믿거나 믿지 않게 되었는가에 관심이 있는 경우이다. 앞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학생이 자기 자신의 사고나 이해에 의하여 교육내용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 강조를 둔다. 전자에서는 단순한 ‘설득’에 강조가 있다면, 후자에서는 ‘이해’에 강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교육방법은 위의 두 가지 중의 어느 쪽에 강조를 두는가에 따라 각각 ‘설득을 위한 교육’과 ‘이해를 위한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설득을 위한 교육’과 ‘이해를 위한 교육’의 구분이 심각하다는 것은 그 중의 어느 것을 교육방법으로 보는가에 따라 ‘잘 가르치는 것’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 비추어 명백하다. 예컨대 교사로부터 지구 자전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은 결과로 학생이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것은 지구가 하루에 한 번씩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에 교사가 잘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와는 달리, 교사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자. 교사는 잘못 가르친 것인가? 아마, 그렇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직 ‘설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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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교육’에 입각할 때에만 그러하다. ‘이해를 위한 교육’에 입각할 때, 이 후자의 경우는 그 자체로서는 잘못 가르쳤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더구나 학생이,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교사의 가르침에 힘입어서 천동설과 지동설의 이론적 쟁점이 무엇이며 천동설에 대한 지동설의 우위가 어떤 고려에 의한 것이었던가를 알고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그것은 가르침의 실패를 의미하기는커녕, 가장 찬란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가 된다.
‘설득을 위한 교육’과 ‘이해를 위한 교육’의 차이는 근래 ‘가르치는 일’의 의미분석에서 부각되는 ‘교화’(indoctrination: 아마 ‘주입’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관례상 ‘교화’로 번역되고 있다)와 수업(instruction: 때로 이 단어는 여기서 사용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교사에 의한 일방적, 언어적인 설명’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우리말의 ‘수업’은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 일반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러나 이하 이 글에서 ‘수업’은 indoctrination에 대비되는 instruction의 번역어로 사용된다)의 차이와 대체로 상응한다. 교화와 수업의 차이는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하여 분석되고 있지만, [각주 5: 그 여러 가지 기준이라는 것은 ‘내용’, ‘결과’, ‘증거’, ‘의도’ 등을 가리킨다. 이때까지 교화와 수업에 관한 논의는 이들 여러 가지 기준 중에서 어느 것이 ‘결정적인’ 기준인가 하는 문제에 상당히 치중되어 있었다. Snook는 그러한 논의들을 섭렵한 뒤에 의도를 교화의 결정적인 기준으로 보고 있다. I. A. Snook, Indoctrination and Education, RKP, 1972, 윤팔중(역), 『교화와 교육』, 배영사, 1977.] 그것들은 결국 교육을 할 때 교사의 의도 또는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할 때 교사는 학생에게 모종의 외적 결과가 나타나도록 하거나 학생을 통하여 모종의 외적 결과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가질 수도 있고 학생의 내적 변화 ─ 안목의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 ─ 를 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질 수도 있다.
전자에서와는 달리 후자의 경우에 교사는 학생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학생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는 무엇보다도 학생의 그러한 변화가 학생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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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또는 ‘안목’의 표현이기를 바란다. 또한 교사는 학생이 해야 할 생각, 가져야 할 마음에 대하여 바라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학생 자신’의 안목이나 마음이기를 바란다. 한 마디로 말하여 교사는 학생의 ‘인간됨’ 또는 인격적 성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수업’에서의 교사의 의도요 관심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상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가르칠 때 그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수업’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수업’을 할 때 교사가 ‘왜 그런가’(이른바 ‘증거’)에 관한 의문을 일으키고 학생들에게 그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단순히 ‘무엇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면, 학생들은 그만큼 그 지식을 자기 자신의 생각에 의하여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으며, 또 그만큼 그 지식은 그의 내면적 변화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 ‘수업’과 ‘이해를 위한 교육’, 그리고 또 한편으로 ‘교화’와 ‘설득을 위한 교육’은 가르치는 행위를 할 때 교사가 가지고 있는 의도 또는 관심의 종류에 있어서 구분된다. ‘수업’ 또는 ‘이해를 위한 교육’에서 교사의 의도와 관심은 학생의 내적 변화 또는 인격적 성숙에 있으며, 여기에 비하여 ‘교화’ 또는 ‘설득을 위한 교육’에서 교사의 의도와 관심은 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있다. 이 외적 결과라는 것에는 예컨대 캄캄한 방에 전깃불이 다시 들어오는 것과 같은, 명백히 학생 바깥의 문제사태의 해결뿐만 아니라, 학생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이른바 ‘암기’된 지식도 포함된다. 암기된 지식은 학생 자신의 진정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지식이며, 이 점에서 그것은 앞의 문제사태의 해결과 다름없는 외적 결과이다. ‘교화’ 또는 ‘설득을 위한 교육’에서의 관심이 이런 외적 결과에 있다는 것은 곧 그 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학생이 ‘수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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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 학생은 외적 결과에 대하여 부수적 또는 우연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이며, 그 외적 결과가 실현되는 한, 학생이 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수업’ 또는 ‘이해를 위한 교육’에서는 사정이 정반대이다. 여기서는 외적 결과가 아니라 학생의 정신상태 그 자체가 ‘목적’으로 취급된다. 그리하여 교화와 수업의 차이는 결국 학생을 수단으로 보는가 목적으로 보는가의 차이로 연결된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때, 그가 가르치는 학생을 수단으로 보는가 목적으로 보는가 하는 것은 교육에 관련된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문제이다. 이때까지 교화와 수업의 의미분석에서 교화가 주로 도덕적 관점에서 문제시되어 왔다는 것은 곧 이 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교화와 수업의 구분은 교육에 도덕적 문제가 개입될 소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각주 6: 본문의 맥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이 문제에 관한 Dewey의 입장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좀더 자세하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대체로 말하자면, Dewey는 이 글에서 말한 ‘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학생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그 자체에 대하여 특별히 도덕적으로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Dewey가 ‘학생의 내적 변화 또는 인격적 성숙’ 그 자체에 대하여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그는 또한 그러한 내적 변화는 반드시 외적 결과를 얻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외적 결과를 얻으려는 노력은 반드시 내적 변화를 수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John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 1916, 이홍우(역), 『민주주의와 교육』, 교육과학사, 1987. 이 면에서의 Dewey의 이론은 이 책의 마지막(5장 3절)에서 약간 자세하게 고찰된다.]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두 유형에 관한 이상의 논의는 교육의 공학적 개념에 내포된 ‘근본적 애매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위의 구분에서 보면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에 있어서의 두 유형들이 거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 주고 있다. 교육내용의 두 유형으로서 ‘하는 지식’과 ‘보는 지식’은 그 포인트 또는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외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내적 안목을 주는 데에 있는가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교육방법에 있어서도, 그 두 유형으로서의 ‘설득을 위한 교육’과 ‘이해를 위한 교육’은 그 관심이나 의도가 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학생의 내적 변화 또는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는 데에 있는가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이와 같이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두 유형이 결국 외적 결과와 내적 안목이라는 두 가지 목적에 의하여 구분된다면, 교육내용의 구분과 교육방법의 구분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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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함의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 두 가지는 결국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구분이 교육내용이나 교육방법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위의 구분에 의하면 ‘보는 지식’이라는 교육내용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방법으로서 ‘이해를 위한 교육’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하는 지식’은 ‘설득을 위한 교육’이라는 방법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하는 지식’과 ‘보는 지식’은 각각 ‘설득을 위한 교육’과 ‘이해를 위한 교육’이라는 방법에 의하여 그 포인트가 올바르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이라는 범주 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보는 지식’과 ‘하는 지식’은 어디까지나 교육내용의 두 유형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이해를 위한 교육’과 ‘설득을 위한 교육’은 교육방법의 두 유형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내용의 두 유형과 교육방법의 두 유형이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이라는 범주에 관계없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교육의 공학적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 근본적 애매성을 드러내려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 두 범주는 통틀어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모습은 한편으로 ‘보는 지식’과 ‘이해를 위한 교육’, 그리고 또 한편으로 ‘하는 지식’과 ‘설득을 위한 교육’에 의하여 규정된다. 전자에 의하여 규정되는 삶은 ‘보는 지식’에 내재해 있는 안목을 통하여 내적, 인격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삶이요, 후자에 의하여 규정되는 삶은, ‘하는 지식’을 통하여 유용한 외적 결과를 얻는 데에 강조를 두는 삶이다. [각주 7: 이 두 삶을 각각 ‘이론적 삶’과 ‘실제적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양자의 구분은 개념상의 구분이며 사실상의 구분이 아니다. 이론적 삶과 실제적 삶은 각각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두 측면을 나타낸다. 이 두 삶은 우리에게 모두 중요하며, 우리는 그 중의 어느 것도 완전히 도외시할 수 없고 또 도외시하며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한 개인의 삶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두 측면의 어느 한 가지를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위의 개념상의 구분은 ‘삶의 지향성’ 또는 ‘삶의 자세’라는 사실적 수준에서 대조적으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각각의 삶의 지향성에서 ‘성공’한 경우 ─ 이 ‘성공’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실제적 삶에 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를 생각해 보면 그 대조를 실감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가령 ‘보람’(‘삶의 보람’)이라는 말은 그것을 어느 쪽에 적용하는가에 따라 거의 정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제5판), 교육과학사, 1987, 6장, 7장, 13장, 14장, 18장 참조.] 교육의 공학적 개념이 근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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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위의 두 가지 삶의 모습 중에서 어느 것이 교육에 일관되고 어느 것이 교육에 일관되지 않은지를 판단할 근거가 그 개념에 의해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교육을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로 정의하는 한, 그것은 앞에서 구분한 두 가지 교육내용 중의 어느 것을 통해서 실현되든지, 그리고 앞에서 구분한 두 가지 교육방법 중의 어느 것에 의거하여 실현되든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해서 ‘교육받은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보는 지식’과 ‘이해를 위한 교육’에 의하여 규정되는 내적 안목과 또 한편으로 ‘하는 지식’과 ‘설득을 위한 교육’에 의하여 규정되는 외적 문제사태의 해결은 두 가지가 모두 우리 삶에서 각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보면, 교육의 공학적 개념에서 그 중의 어느 하나를 특히 교육과 일관된 것으로 지적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교육받은 삶’의 모습을 그 중의 어느 하나에 특이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고 교육의 의미를 주로 그러한 삶과 관련하여 규정하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은 이런 관점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2. 교육의 개념적 기준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개념이 제시된 『윤리학과 교육』이라는 책 그 자체에 관하여 약간의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의 피터즈의 의도는 윤리학적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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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 교육의 어떤 측면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가, 거기서 논의되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며 그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데에 있다. 윤리학적 논의는 ‘마땅하다, 옳다, 바람직하다, 가치있다, 좋다’ 등을 특유의 개념으로 하는 실제적 논의(practical discourse: 실제적 논의에는 윤리학적 논의 이외의 다른 것 — 예를 들어, 기술적 논의 — 도 포함될 수 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양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제적 논의의 윤리학적 의미이며, 이 점에서 피터즈가 말하는 실제적 논의는 윤리학적 논의와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의 일종이며(p. 8: 이하 괄호 안의 페이지는 이홍우 번역판의 것이다), 여기에는 예컨대 과학적 논의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특유의 논의방식 또는 절차가 있다. 또한 피터즈 자신의 말로, 교육에 윤리학적 논의가 끼어드는 측면은 크게 보아서 내용과 방법의 두 가지이다(p. 70). 교육에서 무슨 내용을 가르쳐야 하며 또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말한 ‘바람직하다, 가치있다, 마땅하다, 옳다’ 등의 특유한 윤리학적 관점으로 논의되어야 하며, 이 점에서 그 두 가지 측면에 윤리학적 논의가 끼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곧 교육의 내용과 방법의 ‘가치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기본전제가 되어 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관련된 가치문제를 논의하는 데에 있어서 피터즈는 한 가지 특이한 논의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논의형식은 그 후 ‘선험적 논의’ 또는 ‘논리적 가정에 의한 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터즈는 이것을 칸트의 논의형식에서 빌어 왔다고 말한다. p. 99.) 이 논의형식에 관해서는 나중에 특히 교육내용과 관련하여 필요한 만큼 설명을 하겠지만, 어쨌든 피터즈는 이 논의형식을 사용하여, 교육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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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화(justification: ‘교육내용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라는 질문은 보다 평이하게 ‘교육내용의 가치는 어떻게 설명되는가’라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화’는, ‘설명’과는 달리, ‘바람직하다, 가치있다, 마땅하다’ 등의 실제적 판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 점에서 특이하게 실제적 논의의 핵심을 이룬다)되는가, 교육의 ‘방법’과 관련된 윤리학적 원리들, 즉 자유, 평등, 인간존중, 그리고 권위, 벌 등은 교육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교육의 개념이 제시되어 있는 것은 이들 문제에 관한 윤리학적 논의가 시작되기 전의, 그 책의 첫머리이다. 첫머리에 제시된 교육의 개념과 그 이후의 윤리학적 논의는 책의 체제로서는 구획이 지어져 있지만, 첫머리의 교육의 개념은 나중의 윤리학적 논의에 의하여 한층 더 뜻이 명확해지고 풍부해지는 식으로 양자는 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교육의 측면이 크게 보아서 내용과 방법으로 대별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이 두 가지 중에서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은 교육내용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는 교육방법상의 원리들, 즉, 자유, 평등, 인간존중 등은 교육과 관련하여 특수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말하여 그것들은 교육 이외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관련해서도 논의될 수 있고 또 논의되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교육내용의 문제, 즉 무엇이 가르칠 만한 내용인가 하는 문제는 유독 교육에만 관련되는 문제이다. 이것은 곧 교육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교육내용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때까지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이 『윤리학과 교육』의 내용 중에서 교육내용 문제를 다룬 5장(‘가치 있는 활동’)과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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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것은 이 점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윤리학과 교육』에서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을 집약해서 표현하는 ‘교육의 정의’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문명된 삶의 형식에로의 성년식’이 될 것이다. ‘성년식’(initiation, 앞의 주 2 참조)이라는 말은, 보다 일상적인 의미인 ‘입문’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교육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그 성년식의 내용인 ‘문명된 삶의 형식’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밝혀지지 않는 한, 위의 정의는 교육의 의미에 관하여 별로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 책에서 성년식의 내용을 나타내는 말로서는 ‘문명된 삶의 형식’(p. 63) 이외에도 ‘가치 있는 삶의 형식’(p. 258), ‘공적 유산’(p. 53),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p. 55), ‘분화된 사고의 형식’(p. 58),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활동의 틀’(p. 57) 등의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들 표현은 ‘문명된 삶의 형식’의 동의어이거나 그것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문명된 삶의 형식’은 위의 여러 가지 표현이 의미하는 내용을 포괄적으로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피터즈는, 정범모 교수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교육의 개념을 한 가지 정의로 요약하여 진술하고 시종 그 정의를 해설해 나가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윤리학과 교육』에서 교육의 정의에 관한 비교적 체계적인 진술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교육은 그 개념 안에 붙박혀 있는 세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으로 사람들을 입문시키는 성년식이라고 할 수 있다’(p. 55)는 말일 것이다. 말하자면, 교육은 가치 있는 활동들 또는 사고와 행동의 양식(activities or modes of thought and conduct)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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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입문시키되, 그것이 교육의 개념에 논리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기준’이라는 것은 ‘1) 교육은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규범적 기준), 2) 교육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모종의 지적 안목을 길러주는 일이며 이런 것들은 “무기력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인지적 기준), 3) 교육은 교육받은 사람의 의식과 자발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전달과정은 교육의 과정(過程)으로 용납될 수 없다(과정적 기준)’(p. 42)는 것이다.
우선, 이 세 가지 기준이 ‘교육의 개념에 붙박혀 있다’든가 그것이 교육의 ‘개념적 기준’ 또는 교육이라는 ‘용어의 사용기준’이 된다든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하여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피터즈가 주로 따르고 있는 철학사조에 의하면, 교육이라는 용어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그 나름의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pp. 13-4). 교육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활동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모종의 활동을 하면서 그것을 ‘교육’이라는 용어로 규정해 왔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육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해 오던 그 활동의 의미, 또는 그 활동을 하는 동안에 사람들이 틀림없이 했을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역사’는 곧 교육을 하면서 살아온 인간의 삶의 역사이다. 교육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면에서의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개념을 규정하는 일은 교육이라는 측면에서의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명백히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각자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임의적인’ 생각을 교육의 정의로 제시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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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즈의 교육의 개념, 그리고 특히 그의 세 가지 개념적 기준은 위와 같은 관점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개념적 기준을 제시할 때 피터즈는 교육이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의 삶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최소한의 윤곽을 그려내려고 한 것이다. 물론, 교육의 세부적인 모습, 또는 교육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세부적인 모습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양각색일 것이다. 만약 교육을 한 마리의 동물에 비유한다면, 교육의 이 세부적인 모습은 살과 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여기에 비하여 피터즈의 그 세 가지 기준은 그 동물의 골격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골격은 동물의 모습을 결정하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그 모습을 결정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된다. 이와 같이 최소한의 요구조건과 가장 핵심적인 요구조건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 ‘형식’이라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피터즈의 세 가지 기준은 교육의 ‘형식적 기준’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형식적 기준은 교육의 세부적인 모습을 배제한 ‘골격’에 해당한다. 그것은 교육의 형식, 즉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된 인간의 ‘삶의 형식’을 보여 준다. ‘삶의 형식’에 관해서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당장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은 ‘삶의 형식’의 한 특수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 피터즈가 제시한 교육의 개념은 피터즈 개인 또는 피터즈가 속하고 있는 특정한 사회의 편견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 교육의 개념은 피터즈 자신의 ‘임의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피터즈 개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피터즈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임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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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이러한 근거에서 그것을 임의적인 견해라고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교육의 개념은 어떤 것이든지 임의적인 견해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스스로 하는 셈이 된다. 그 사람이 보기에 교육의 개념에 관한 논의는 결국 한 임의적인 생각과 또 하나의 임의적인 생각 사이의 입씨름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논의가 교육의 의미에 관하여 모종의 공통된 이해로 이끌 가능성은 처음부터 막혀 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교육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한 특정한 상황에서 한 개인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며, 그 개인이 현재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교육의 의미에 관하여 따로 알아볼 것이 없다. 교육은 인간의 삶의 형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든가 그 삶의 형식을 장차의 세대에 전수해 준다는 식의 말, 또는 곧 설명하게 되겠지만, 교과가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피터즈 자신의 개인적인 편견을 마치 객관적인 사실처럼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수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교육의 개념에 관한 피터즈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교육의 개념 그 자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피터즈의 견해가 교육의 개념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정확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피터즈의 견해에도 잘못된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피터즈의 견해가 ‘임의적인’ 것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며, 피터즈의 견해 중에서 어떤 부분이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교육의 형식’에 관한 그릇된 이해를 나타내는가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의 세 가지 기준 중에서 맨 처음 규범적 기준은 교육과 가치 사이의 개념적 관련, 즉 교육이라는 말에는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한다는 뜻이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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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하는 것이다. 교육에는 규범적 의미가 붙박혀 있다는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하등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하나마나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대한 찬반양론이 근본적으로 이 말의 해석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우선, 그것이 어째서 하나마나한 말로 들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교육을 통하여 전달되는 ‘가치 있는 것’은 여러 가지이며, 그것이 어째서 가치 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른바 교육의 ‘규범적 기준’이라는 것은 단순히 교육이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한다는 것을 말할 뿐, 그 가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째서 가치 있는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가치 있는 것 사이의 개념적 관련이 이런 수준의 것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실질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 않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찬반양론 또한 무의미하다. 그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직 교육의 가치와 그 근거가 구체적으로 명시될 때이다. 대강 이런 식이다.
그러나 규범적 기준에 대한 피터즈 자신의 해석은 위의 반론에 시사된 것과는 다르다. 피터즈 자신의 해석에 의하면 규범적 기준은 교육을 통하여 전달되는 가치의 내용과 그 정당화 방식을 거의 정확하게 지시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피터즈가 지적한 바, ‘교육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또 통상 가지고 있는 활동’과 ‘교육 그 자체’의 관련과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p. 21). 피터즈 자신의 예로 과학과 목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것들은 ‘활동’이다. 우리가 ‘교육 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교육도 하나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상 ‘교육 활동’을 할 때 우리가 하는 활동(또는, 관심을 가지는 활동)은 과학이나 목공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활동 바로 그것이며 그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교육은 이런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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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여 이루어지며, ‘교육 활동’은 바로 이런 활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육 활동’은 이런 활동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별개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과학이나 목공과 같은 활동을 하되, 그것을 ‘교육 활동’으로서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각주 8: 이 대목(p. 21)에서의 피터즈의 설명에는 과학과 목공의 경우가 동일하게 취급되어 있지만, 목공의 경우와는 달리, 과학의 경우에는 ‘교육활동’으로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과학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필경 과학이 아닌 다른 활동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 점은 곧 설명하게 될, 과학의 ‘내재적 가치’와 관계가 있다.] 이런 뜻에서 과학이나 목공은 ‘교육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또 통상 가지고 있는 활동’에 속한다. 과학이나 목공 등 ‘활동’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그것이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 때문에 수행, 전승될 수도 있고 또 생산성, 주택, 건강 등 외재적 목표에 기여하기 때문에 수행, 전승될 수도 있다’(p. 21)는 식의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을 ‘교육 활동’으로서 할 때에는, 다시 말하여, ‘교육을 위하여’ 그런 활동을 할 때에는 사정이 동일하지 않다. 이제 ‘생산성, 주택, 건강 등 외재적 목표’는 해당되지 않는다. 과학, 목공 등의 활동을 ‘교육 활동’으로 삼을 때, 그것은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된다. 이제 그 활동의 가치는 ‘사람을 교육한다’고 하는 말에 함축되어 있는 바로 그 가치에 의하여 규정된다. 활동의 종류는 여전히 과학이나 목공 그것이지만, 그것을 교육의 일환으로 할 때에는 그 활동의 성격에 변화가 온다. 이와 같이, 교육의 규범적 기준은 한 활동이 교육의 일환으로 수행될 때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 점을 피터즈는, ‘교육은 … 특정한 활동이나 과정을 꼬집어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이나 과정이 갖추어야 하는 기준을 명시하는 것이다’(pp. 15-6)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는 가치는, 특히 교육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교육의 ‘목적’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목적’이라는 말은 과학이나 목공 등의 활동과 교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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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해당된다. 과학이나 목공에 관해서도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고 교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 의하여, 양자에 있어서 ‘목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활동에 관해서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그 활동이 이러이러한 외적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교육에 관해서는 이런 뜻에서의 질문이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교육에 관하여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질문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육의 목적은 ‘내재적 목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때로 교육의 목적을 ‘교육을 통하여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외적 결과’, 즉 ‘외재적 목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학이나 목공 등의 ‘활동’과 ‘교육 활동’이 사실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피터즈 자신의 말을 빌면, ‘흔히 교육의 목적[내재적 목적]과 교육의 의도[외재적 목적] 사이의 혼란은, 교육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또 통상 가지고 있는 활동에 관하여 말해야 할 내용을 교육 그 자체에 관하여 말하기 때문에 빚어진다’(p. 21).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의 개념적 기준 중에서 규범적 기준은 단순히 교육이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 가치가 ‘내재적 가치’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가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서 쓴 용어로 표현하면, 이 질문은, 과학이나 목공 등의 활동이 ‘교육의 일환으로’ 수행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를 가진 것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는가 하는 질문으로 된다. 교육의 개념적 기준 중에서 둘째의 ‘인지적 기준’이 여기에 대한 대답이다. 말하자면 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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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 등의 활동이 교육 활동으로 될 때에는 그것이 ‘지식과 이해 또는 지적 안목’을 심어주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활동은 ‘지식과 이해 또는 지적 안목’을 심어주는 데에 기여하는 한에서 ‘교육 활동’으로 된다는 뜻이 된다. 규범적 기준과 관련해서 보면, 이 인지적 기준은 규범적 기준이 ‘내용’ 면에서 상세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규범적 기준에서 지적된 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내용’ 면에서 상세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윤리학과 교육』에서의 피터즈의 관심에 비추어 보면, 인지적 기준은 교육의 ‘내용’ 면에서의 윤리학적 논의를 예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절의 첫 부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윤리학적 논의는 교육의 ‘내용’ 면에만 아니라 ‘방법’ 면에도 적용되며, 이를 위해서도 하나의 개념적 기준이 요청된다. 교육의 셋째 기준인 ‘과정적 기준’이 여기에 해당된다. 앞의 인지적 기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적 기준도 규범적 기준, 또는 그것에 의하여 지적된 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방법’ 면에서 상세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규범적 기준은 내용과 방법이라는 두 측면에서 교육의 의미를 한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이 점을 고려하여 피터즈의 교육의 정의를 진술하자면, 교육은 ‘내재적으로 가치 있는 내용을 도덕적으로 온당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과정 또는 전달받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 정의는 교육의 개념을 제시하는 첫머리(p. 16)에서 피터즈 자신이 한 말, ‘교육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이 도덕적으로 온당한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전달되고 있거나 전달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는 말에 약간의 용어를 바꾼 것이다.) 이와 같이,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이 내용과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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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게 한정하고 있다는 바로 이 점이 그의 성년식 개념을 앞 장의 공학적 개념으로부터 구분해 준다.
3. 교육의 내재적 정당화
앞 절의 첫 부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피터즈의 『윤리학과 교육』은 가치의 정당화를 위한 한 가지 특수한 논의형식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적용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그 논의형식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그의 교육의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피터즈가 제시한 교육의 개념적 기준을 고찰하고 난 지금, 우리는 이 점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육의 규범적 기준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내재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내재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곧 규범적 기준 이외의 나머지 두 기준인 인지적 기준과 과정적 기준을 설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피터즈가 발전시킨 윤리학적 논의형식은 특별히 ‘내재적 정당화’를 위하여 고안된 논의형식이라는 것이다.
내재적 가치 또는 그것에 의한 정당화 방식으로서의 내재적 정당화는 외재적 가치 또는 외재적 정당화와 대조되는 개념이며, 따라서 이것과의 관련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것 [각주 9: 가치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즉, 정당화의 대상)은 사물일 수도 있고 행위일 수도 있으나, 윤리학의 특이한 관심은 행위에 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의 가치를 설명하는 경우에도 사물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사물과 관계되는 행위(즉, 그 사물을 사용하는 행위 또는 그 사물을 추구하는 행위)에 관심이 있으며, 이 점에서 사물은 궁극적으로 행위에 귀착된다고 말해도 좋다.] 의 가치를 설명하는 한 가지, 아마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것이 어떤 다른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방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하여 다시, 그 ‘어떤 다른 가치’가 어째서 가치를 가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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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관심이 처음의 그 어떤 것에 있는 한, 이 ‘어떤 다른 것’의 가치는, 적어도 그 맥락에서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간주된다. 앞 장에서 우리는 공학적 관심에서 가치가 이런 식으로 설명된다는 것을 보았다. 이 설명 방식, 즉 ‘어떤 것의 가치는 어떤 다른 것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 있다’는 식의 설명방식에서 문제는 오히려 그 어떤 것이 과연 그 어떤 다른 것을 실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가에 있다. 이 문제는 사실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이 사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원래의 질문과 대답을 하는 쌍방에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이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것은 어떤 다른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가치를 가진다는 식의 대답이 주어지면 이 대답은 일단 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때 그 어떤 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수단적 가치’ 또는 ‘외재적 가치’라고 하며, 이런 식으로 가치를 설명하는 방식을 ‘수단적 정당화’ 또는 ‘외재적 정당화’라고 한다.
외재적 가치가 ‘수단으로서의 가치’로 풀이되는 데 반하여, 내재적 가치는 흔히 ‘그 자체로서 가지는 가치’로 풀이되고 있다. 이 풀이를 따른다면, 내재적 정당화라는 것은 어떤 것이 어째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대답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세상에는, 예컨대 건강이나 행복과 같이, 그것이 어째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야말로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고밖에 달리 대답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위와 같은 풀이가 의미 있게 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내재적 가치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명이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가치’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혹시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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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 위에서 말한 건강이나 행복 등, 극히 제한된 몇몇 경우에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육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아주 피상적인 수준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교육이 이 점에서 건강이나 행복과 동일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 부터가 의심스럽다. [각주 10: ‘교육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라는 말에 대한 한 가지 흔한 해석은 교육의 가치를 ‘교과 공부에서 오는 즐거움, 만족 등’과 관련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아마 쾌락이나 만족이 내재적 가치와 ‘모종의’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피터즈의 지적(pp. 141ff)에서 시사된 것인지 모르지만, 이 부분에서의 피터즈의 논의를 세밀히 읽어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른바 ‘교과 공부의 재미’는 누구나 느끼는 것도 아니요, 그것이 내재적 가치의 내용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피터즈가 특히 교육의 경우에 외재적 정당화가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하여 약간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외재적 정당화는 적어도 그것이 적용되는 맥락에서는 만족스러운 정당화로 받아들여진다. 교육내용을 정당화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내용을 무엇으로 보든지 간에 그것과 수단-목적의 관계로 연결된, 또 그 가치가 대체로 합의된 목적을 찾기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며, 이 수단-목적의 관계에 의한 정당화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피터즈는 교육내용을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하려고 하는가? 아니, 그 이상으로, 어째서 그는 위와 같은 외재적 정당화가 교육내용의 정당화로서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른 활동의 경우와는 달리 유독 교육에서 정당화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각주 11: 2장 3절(p. 58) 참조.] 교육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을 때,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그 가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알려고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고 하는 데에 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에 관하여 명확한 인식을 가지게 하고 그것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p. 20.) 외재적 정당화는 이 면에서 부적절하다. 예컨대 교육의 외재적 가치로 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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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되는 ‘경제성장’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교육과 경제성장 사이의 사실적 관련은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알려 주는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실적 관련에 입각해서 교육의 가치를 설명할 때의 의도 그 자체가 교육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에 있지도 않다. 그런데 교육의 가치를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그런 뜻에서의 ‘그 자체의 가치’로 설명하는 것은 이 점에서 외재적 정당화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 자체로서 가치있다’는 말은 그 자체에 아무런 설명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며, 아무런 설명이 없는 한, 그것에 의하여 밝혀져야 할 교육의 의미 또한 밝혀지는 바가 없다.
이와는 달리, 피터즈가 말하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는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몇 번이나 말한 그의 논의형식은 바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 논의형식을 ‘선험적 논의’(transcendental argument) 또는 ‘논리적 가정에 의한 논의’(argument by presupposition)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다소 격식을 갖추어서 정의하자면 그것은 ‘실제적 논의를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그 논의의 논리적 가정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믿음을 명백히 드러내려는 논의형식’(pp. 100-2, pp. 109-14, p. 149)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까다롭고 현학적인 정의를 이해하는 것은 ─ 만약 그 타당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별도로 친다면 ─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실제적 논의’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마땅하다, 옳다, 바람직하다, 가치 있다, 좋다’ 등을 핵심개념으로 하는 논의를 말한다.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여 무엇이 옳은가, 왜 그것이 옳은가에 관한 논의이며, 피터즈 자신의 말로, ‘왜 이렇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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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 대답으로 이루어지는 논의이다. 실제적 논의를 합리적으로 사용한다고 할 때의 ‘합리적으로’라는 말은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실제적 논의의 성격에 비추어 거의 군더더기이다. ‘합리적으로’ 하지 않는 실제적 논의는 용어의 모순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합리적으로’라는 말은 실제적 논의가 갖추어야 할 형식적 요건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가령 농담으로 한다든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명백히 ‘합리적으로’ 실제적 논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으로’라는 말에는 비단 이러한 소극적인 의미 이외에도,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한다든가 말에 일관성을 기한다든가 논리정연하게 말한다든가 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들어 있다.
그 다음, 이와 같이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여’, 모종의 믿음을 전제로 받아들인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믿음이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다. 이 논리적 가정은 그 사람이 지금 하고 있는 실제적 논의가 의미를 가지기 위한 필수적 요구조건이며,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실제적 논의를 (합리적으로) 하면서 그것이 의미를 가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논리적 가정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논의를 무효화하는 셈이 된다. 이것이 ‘선험적 논의’ 또는 ‘논리적 가정에 의한 논의’라고 불리는 논의형식이다.
이것이 정당화를 위한 한 가지 논의형식이 된다는 것은 피터즈가 취급하는 ‘정의’의 경우에 비추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된다. 이제 어떤 사람이 왜 ‘정의’를 따라야 하는가(즉, ‘정의’가 어째서 옳은가, 가치 있는가, 등등)를 알고 싶어 한다고 하자. 물론, 그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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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합당한 답을 얻는 것이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심각한 관심을 가지는 순간, 그는 무엇이 옳은가, 왜 그것이 옳은가에 관한 실제적 논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만약 정의가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 된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다면, 정의는 그 사람이 실제적 논의에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에 의하여 정당화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정의는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의는 요컨대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리이며, 이 원리를 옳은 것으로 (또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제적 논의는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의의 가치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 논리적 가정인 정의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피터즈의 말과 같이, ‘실제적 논의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 실제적 논의를 사용하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p. 113).
피터즈는 위의 논의형식이 교육의 내용에도 의미 있게 적용된다고 본다. 이 면에서의 피터즈의 설명을 이해하는 데에는 이상의 설명에 이미 시사되어 있는 두 가지 점을 다시 드러내어 특별히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로, 위의 논의형식을 교육내용에 적용할 때 피터즈의 관심은 교육내용을 처방하거나 제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교육의 내용이 되어 온 것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터즈는 교육의 내용 중에서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부분을 정당화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누구에게나 쉽게 납득되는 외재적 정당화로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따로 정당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교육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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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서 따로 정당화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학교의 교육과정으로 등장하는 문학, 역사, 수학, 과학 등, 이른바 ‘이론적 교과’ 또는, 피터즈의 용어로, ‘사고와 이해의 여러 형식들’이다. [각주 12: 『윤리학과 교육』에는 ‘사고의 형식’ 또는 ‘이해의 형식’과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P. H. Hirst의 유명한 논문, ‘Liberal Education and the Nature of Knowledge’, R. D. Archambault(ed.) Philosophical Analysis and Education, RKP, 1965, pp. 113-38에서는 ‘지식의 형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그와 피터즈의 공저인 The Logic of Education, RKP, 1970에서는 ‘지식과 경험의 양식(樣式)’ 또는 ‘지식의 형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후 교육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지식의 형식’이다. 피터즈는 명백히 그의 공저자인 Hirst의 논문에서 영향을 받은 탓이겠지만, The Logic of Education에서 ‘지식의 형식’을 다소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것은 교육내용의 처방이나 제안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상 그것은 현행 학교 교육과정을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교육의 내용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피터즈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런 이론적 교과에 개인의 동기나 의도와는 상관없는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고 볼 근거는 없는가, 그리고 ‘그 자체의 가치’라는 것은 설명이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볼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교육내용을 제안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피터즈의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배경에 깔려 있는 듯하다. 즉, 현재의 교육내용과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교육내용을 제안하는 것은 철학자로서의 그의 할 일이 아니요, 나아가서는 그 누구의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새로운 교육내용을 제안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현재의 교육내용을 배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제 그 사람이 현재의 교육내용을 깡그리 무시하고 완전히 ‘진공상태에서’ 교육내용을 제안한다고 하자. 누구든지 자기가 배운 것 이외의 다른 종류의 내용을 알 까닭이 없으므로, 그가 제안하는 교육내용 또한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가 실지로 ‘새로운 종류의’ 교육내용을 제안한다면, 그는 그 제안에 대하여 어떤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무슨 근거를 제시하든지 간에, 그는 새로운 교육내용이 현재의 교육내용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류의 누적적인 경험보다 한 개인 또는 몇몇 개인들의 판단이 더 옳을 수 있다는,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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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즈의 설명을 들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한 가지는 그의 설명이 ‘논리적’ 수준에서의 설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적’ 수준이라는 것은 ‘사실적’ 수준 또는 ‘심리적’ 수준과 대비된다. 위에서 피터즈의 논의형식을 설명할 때,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여’ 이러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받아들인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거니와, 여기서 ‘논리적으로 말하여’라든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말은, 한 특정한 개인이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고려할 때 그 개인이 실지로 그런 믿음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논리적 가정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심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심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이 한 명도 없다면 그것을 논리적 가정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인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내용을 다루는 5장의 첫머리에서 피터즈는 그의 논의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무관심한 대중’들을 설득시키는 데는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p. 138-9). 그들은 논리라든가 논의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피터즈의 논의형식을 교육내용에 적용하면,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 또는 ‘왜 당구나 바둑과는 달리, 역사나 문학은 학교의 교과로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역사나 문학 등, 이론적 교과(즉, ‘지식의 형식’)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된다. 물론, 그 근거는, 그런 이론적 교과의 가치는 실제적 논의의 논리적 가정이라는 데에 있다. 만약 이 설명을 ‘논리적’ 수준이 아닌, ‘사실적’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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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수준에서 해석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된다. 학교의 교과로서 바둑과 역사, 당구와 문학을 비교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전통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역사와 문학보다는 바둑과 당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그 선택은 개인의 심리적 취향으로서는 하등 나무랄 바가 없다. 그러나 피터즈가 문제 삼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심리적 취향이 아니며, 그의 설명 또한 개인의 심리상태에 관한 기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피터즈의 설명을 이해하는 한 가지 편리한 방법은 그 설명을 시간상 반대방향으로 읽으면서 ‘마치 … 처럼’이라는 형태에 맞추어 읽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오늘날 학교의 교과로 가르쳐지고 있는 분화된 지식의 형식을 발전시켜 왔다. 이 지식의 형식을 발전시켜 오는 동안 인간은 ‘마치’ 후세의 인간이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준 ‘것과 같다’ (물론, 역사상 인간이 ‘실지로’ 그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지식의 형식을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니요, 또한 후세의 인간이 ‘실지로’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형식에 그 어떤 것이 들어 있든지 간에, 거기에는 또한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의미 있게 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답하고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지식의 형식을 떠나서는 무의미하다. 지식의 형식은 그 질문과 대답을 하는 사람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지식의 형식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을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p. 162). 다시 말하여,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한다는 믿음은 ‘왜 지식의 형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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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성립하는 데에 필요한 논리적 가정이며, 바로 그 점에서 정당화된다. 피터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위에서 ’마치 … 처럼‘의 형태로 풀어 쓴 것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든지 일상적인 생활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자신의 의식 속에 진리에 대한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실제적 질문을 심각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사태에 관하여, 또 그 대답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사실에 관하여 스스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학교의 교육과정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이론적 탐구는 그와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경험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한다는 것은 아무리 초보적인 수준에서라고 하더라도, 그 질문을 하게 하는 실재 세계의 다양한 측면에 관한 심각한 관심, 즉 이론적 탐구에의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p. 163).
위의 피터즈의 말에서 ‘실제적 질문이 제기되는 사태’라는 것은, 물론, 우리의 삶의 사태이다. 그리고 ‘지식의 형식’은 그 삶의 사태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이요 그 결과이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의 삶의 사태는, 적어도 지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는, 또는 ‘문명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사태는 ‘지식의 형식’을 사용하고 전수하는 그러한 사태이다. 다시 말하면 지식의 형식을 사용하고 전수하는 것은 ‘문명된 삶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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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각주 13: 피터즈 자신은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 ‘삶의 형식’(form of life)이라는 용어는 Wittgenstein에서 빌어 온 것임에 틀림없다.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lackwell, 1953 참조. 그러나 피터즈의 설명에서 ‘형식’이라는 단어가 약간 남용되었다는 느낌이 있다. ‘지식의 형식’과 ‘삶의 형식’에서 ‘형식’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만약 양쪽에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이 되려면, ‘지식의 형식’은 ‘활동의 형식’으로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든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별도로 자세하게 연구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피터즈가 ‘지식의 형식’에의 입문과 ‘삶의 형식’에의 입문을 서로 섞바꾸어 쓰는 것은 이 점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은 이 ‘지식의 형식’ 또는 ‘문명된 삶의 형식’에 사람들을 입문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문명사회의 성숙한 정식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상이 교육의 내재적 정당화 또는 그것을 중심으로 한 피터즈의 교육의 개념에 관한 설명이다. 짐작컨대 교육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이상의 설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다소간은 분명히 저자의 능력 부족 때문이요, 심지어 피터즈 자신의 설명 방식이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교육의 가치’라는 말의 의미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교육의 가치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말을 할 때, 보통의 경우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실지로 교육이 가치 있다는 느낌이 와 닿을 것을 기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육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대부분의 경우에 자신의 생각에 교육이 가치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그런 대답이 아니면 만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피터즈의 설명은, 어느 편인가 하면, 교육 또는 그것을 통하여 전수되는 ‘지식의 형식’의 가치는 ‘교육은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의미 있는 것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설명이며, 이것은 결국 ‘교육의 가치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터즈의 설명을 만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 점에서 매우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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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피터즈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교육의 가치를 말하는 것, 또는 교육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교육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만족을 주는’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강제력이 있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교육의 가치에 관한 설명을 듣고 난 뒤에 자신에게 교육이 그야말로 ‘가치 있는 것’, 또는 ‘좋은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를 기대하는 것,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는 목적으로 교육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은 말하자면 심리적 위안을 요청하고 제공하는 것이다. ‘지식의 형식’을 학습하는 것, 또는 그것을 통하여 문명된 삶의 형식에 입문하는 것은, 원시부족에서의 성년식이 그렇듯이, 해당 개인에게 대단한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는 만큼, 그것에 대하여 심리적 위안이 주어지는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심리적 위안에 불과하다는 명백한 인식이 있는 한, 특별히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설명이 참으로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제시해 준다고 믿고 그것을 실지로 교육 문제에 관한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재앙 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경 ‘교육’의 의미와 가치가 아닌 다른 것을 교육의 의미와 가치로 착각하도록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물을 때 우리가 진정으로 알려고 하는 것, 또는 알려고 해야 하는 것은, 비록 ‘가치 있는 것’, ‘좋은 것’, ‘바람직한 것’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는 어긋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교육’의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교육은 그대에게 고생 이외에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난 뒤에 거기서 교육의 가치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교육의 가치를 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피터즈 자신도 자신의 설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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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한 대중들’ ─ 주로 의식주와 관련된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이거나 자신의 소비욕구를 충족시켜 줄 도구가 되는 것 이외에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대중들 ─ 을 설득시키는 데는 전혀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터즈의 목적은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의 목적은 그런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가치’를 교육의 가치로 바꿔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의 가치를 밝히는 데에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피터즈가 말하는 ‘대중’이 교육에 늘 ‘무관심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때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따라 교육이 예컨대 퓨즈 갈아끼우는 것과 같은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직접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방향으로 교육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에 따라 생활의 문제와는 무관한 ‘쓸데없는 것’을 배우는 데에 바친 땀과 노력을 아까워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점점 호응을 얻고 있다. 피터즈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이때까지 자신을 인간으로 형성해 준 삶의 기반, 그리고 현재 자신의 삶을 받쳐주고 있는 삶의 기반을 부정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잠식하는 가장 위험한 지적 오류이다. 전 인류를 위하여 다행하게도, 아직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주장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주장이 그 수준을 넘어서서 전폭적으로 시행된다면, 머잖아 전 인류는 완전한 야만상태로 되돌아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