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육과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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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교육과 교육학
‘교육학이 어떤 성격의 학문이며, 그 소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질문에 답하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의견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만큼 상충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모순될 수도 있다. 한 학문의 성격에 대해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해당 학문이 학문 발전 단계로 보면 아직 미성숙한 수준에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다양한 견해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갈 여지가 풍부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활기가 넘치는 젊은 학문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여기서 교육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교육학은 무엇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여 교육의 고유한 면모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교육학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론적인 질문보다 우리 앞에 닥친 여러 가지 급박한 교육 관련 현안들을 해결하거나 다루는 일을 그 소임으로 한다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학이 이러한 일들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보다 교육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하다. 교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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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교육의 개선에 참여하거나 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교육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현재의 교육을 이끌고 나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알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대체 무엇이 교육의 문제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저자가 교육학자로서 무엇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 동안 교육학이 교육의 실체를 해명하는 데에 충실했다고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교육학은 다른 학문의 개념들과 이론들을 동원하여 학교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집중해 왔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학교와 관련된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만 된다면, 다른 학문들의 개념과 이론을 별다른 반성 없이 응용해 왔으며, 이것이 바로 교육학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의할 것처럼 이는 교육학의 고유한 지식이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불행하게는 교육과 교육 아닌 것들을 체계적으로 혼동하는 오류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현존하는 교육학으로부터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저자의 이러한 발언이 공연히 교육학의 학문적인 위상(位相)을 훼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고 있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면밀히 검토해 나가도록 하자.
1. 교육 현상과 교육의 개념
우리 모두는 하나의 세계 속에 몸을 담고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외형상 나와 타자는 동일한 세계 속의 거주자(居住者)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지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 눈에 분명히 보이며 내가 선명히 느끼고 체험하는 세계를 다른 사람들도 그들이 나와 동일한 것을 접하고 있는 이상에는 똑같이 보고 느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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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순진한 가정은 분명 나와 동일한 것을 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타자가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말하고 행동하는 순간, 조금씩 또는 일거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몇 년 전 나는 ‘세계의 미녀들’이라는 제목으로 각국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시청한 적이 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들이기에 TV에서까지 소개한다고 하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에서 본 것은 나의 기대를 일시에 깨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부족을 소개하면서 그 부족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여주는 장면을 시청하다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 부족은 어린 여자 아이들의 귀를 뚫어 두꺼운 귀걸이를 해주는 관습이 있는데, 그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귀에 걸리는 귀걸이도 하나 둘 늘어나게 된다. 종국에는 그 여성의 귀가 마치 부처님 귀처럼 축 늘어지게 되고, 가운데가 뻥 뚫린 귀에는 수십 개의 귀걸이가 주렁주렁 매달리게 된다. 이어서 소개한 또 다른 부족은 어린 여자 아이의 목에 두꺼운 목걸이를 해주는데, 그 아이가 성인 여성이 되었을 때는 수십 개의 목걸이를 걸 수 있을 만큼 굉장히 기다란 목을 지니게 된다.
귀가 뻥 뚫리거나 기린처럼 긴 목을 지닌 여인들의 외양은 추녀(醜女) 정도가 아니라 어김없는 괴물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만약 그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면,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치거나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그 부족 청년들이 그 여인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는커녕 여인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온갖 구애(求愛)의 행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나 그 부족의 청년들은 각기 다른 여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여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눈에는 영락없는 괴물로 보이는 여인을 왜 그 청년들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어떠한 현상을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동일한 것으로 접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앞의 예에서 나와 동남아시아 부족 청년들은 물론 동일한 인간이고 성인 남성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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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상이한 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다. 내가 몸담고 있는 문화권과 그 청년들이 몸담고 있는 문화권은 각기 미(美)에 대한 상이한 관점과 기준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나와 그 청년들은 미에 대한 개념 체계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의 눈에는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추녀로 보이는 여성이 그들의 눈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의 화신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 청년들은 내 눈에는 분명 아름답게 보이는 한국의 여성을 보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간에 존재하는 그 ‘사이’(between)는 일체의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무(無)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개념 체계가 마치 하나의 안경(眼鏡)처럼 존재하고 있는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지니고 있는 개념 체계를 통하여 그 개념 체계가 보여주는 현상만을 지각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설사 동일한 무엇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개념 체계가 상이할 경우 우리는 각기 다른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각주 1: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면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념 체계에 의하여 해석되고 포착된 것을 관찰한다는 점은 이미 학자들에 의하여 ‘이론 부하적 관찰’(理論 負荷的 觀察, theory-laden observation), 또는 ‘이론 의존적 관찰’이라는 유명한 용어로 지적되어 왔다(Hanson, 1961, 1971). 우리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엄연한 현상을 순수하게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념이 보여주는 것만을 본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눈(眼)에 몇 가지로 밖에는 구분되지 않는 겨울철의 눈(雪)을 보고도 에스키모인들은 수백 가지의 상이한 눈을 지각한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와 에스키모인들은 눈(雪)과 관련하여 질적으로 다른 개념 체계를 갖고, 각기 다른 눈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 가운데는 현상과 개념 간에 이러한 관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상이한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발견될 뿐, 동질적인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일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동질적인 개념 체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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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지적인 발달 경로와 그 발달을 가져오는 메커니즘을 해명하여 유명해진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에 따르면 인간은 감각동작기(感覺動作期), 전조작기(前操作期), 구체적 조작기(具體的 操作期), 형식적 조작기 (形式的 操作期) [각주 2: 각각의 단계를 영문으로 표기하면, sensorimotor stage, preoperational stage, concrete operational stage, formal operational stage이다.] 라는 이질적인 단계들을 거치며 성장한다(Piaget, 1947, 1970, 1971). 그리고 각 단계들은 각기 상이한 사고의 체계, 또는 개념 체계를 특징으로 지니고 있어서 발달 단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현상을 대면하면서도 이를 이질적인 현상으로 지각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조작기에 있는 동생과 구체적 조작기에 있는 형에게 어머니가 기다란 형태의 똑같은 컵에 동일한 양의 주스를 따라 주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두 아동은 모두 이를 공평한 분배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전조작기 동생의 컵이 약간 깨져 있어서 입술을 다칠 것을 염려한 어머니가 두 아동이 보는 앞에서 동생의 주스를 높이는 낮으나 폭은 넓은 컵으로 옮겨 담았다. 바로 이 순간 형은 컵의 형태는 변했을지 몰라도 주스 양은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생은 컵의 높이가 낮아짐에 따라 자기 몫의 주스 양도 줄어들었다고 생각해 반발한다. 당황한 어머니가 주스를 원래의 기다란 컵에 옮겨 담아서 보여주면, 전조작기 아동은 이번에는 주스 양이 같아졌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주스의 양이 같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뒤에 다시 주스를 높이가 낮은 컵에 옮겨 담는다. 그러면 놀랍게도 전조작기 아동은 다시 자신의 주스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며 울먹이게 된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은 동생의 터무니없는 트집에 화가 나서 동생을 한 대 쥐어박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생은 형의 그러한 행동을 자기가 좀 더 많이 먹으려는 욕심 때문으로 여기고 더욱 거세게 울어댄다.
위의 사례는 전조작기와 구체적 조작기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피아제가 행한 유명한 실험이며, 그 실험은 보존 개념(保存 槪念)의 유무가 전조작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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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조작기의 결정적인 차이임을 보여주고 있다. 전조작기 동생과 구체적 조작기 형은 거의 완전히 동일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동일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르다 못해 완전히 상충되는 현상을 지각하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이 상이한 개념 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조작기의 형은 보존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컵의 형태 변화와는 무관하게 주스 양이 보존되고 있는 현상을 경험한다. 그러나 보존 개념이 없는 전조작기 동생은 컵의 형태 변화와 함께 주스 양이 변화되는 현상을 진실된 것으로 지각한다. 보존 개념이 없는 그 아이는 보존 현상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현상을 누구나 대면할 수 있으며, 또 동일한 현상으로 접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앞의 사례들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떤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개념 체계가 없을 경우 우리는 그 현상을 대면할 수가 없다. 설사 어떠한 개념 체계들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가 소유한 개념 체계가 다른 것일 경우 동일한 것을 보고도 이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교육과 교육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왜 갑자기 현상과 개념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느냐고 의아해 할 독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이야기는 옆길로 빠지면서 논점(論点)을 이탈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상과 개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교육과 교육학의 관계를 논의할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를 담고 있다.
도대체 교육이란 무엇인가? 흔히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면 ‘교육에 대한 사변적인 논의는 이제 그만하고 실제 교육을 바라보면서 고민하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주 3: 동료 교수가 자신이 쓴 책을 선물하기에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맨 앞의 머리말에서 놀랄 만한 발언을 접한 적이 있다. ‘책상에 앉아서 교육에 대하여 사변철학을 전개하기보다는 교육 현장에 참여하여 일상사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성찰하고 비평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론보다는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교육 이론과 교육 실천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말에서 이른바 책상에 앉아서 교육에 대하여 사유하는 것을 왜 교육학이라 부르지 않고 사변철학이라 부르고 있는지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무엇보다도 그 동료 교수가 교육 현장이라고 할 때, 무엇을 교육 현장이라고 이론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한 이론적인 상정이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야말로 책상에 앉아서 사유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떠한 경로를 통해 가능한 것인지 등이 당장 의문으로 떠올랐다. 그 역시도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사유를 통하여 무엇이 교육 현장이 될 수 있는지를 간파했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교육 실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경우에 교육에 대한 그의 이론적인 사유가 견실하고 올바르게 이루어졌을 때, 여기서부터 그것이 교육 실천에 주는 함의(含意)를 도출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론보다 실천에 관심을 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실상 그는 이론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며, 그것도 실천의 개선이라는 어마어마한 소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상, 아마도 남다른 이론적 사유에 진력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교육 현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들인 뒤, 그 현장에서 일상사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비평하는 것이라면, 그는 학자로서 그가 수행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임을 생략한 채, 교육에 대한 상식(常識)의 바다로 빠져든 것이 되고 만다. 일반인들이 교육 현장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이 어떻게 교육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될 수 있는가? 나의 동료 교수가 수용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교육학자들이 수도 없이 반복해 온 그릇된 연구 관행이다. 그리고 이는 이 글을 통하여 내가 극복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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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크게 공감하는 듯하다. 그러나 설사 교육이라는 현상이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교육의 개념을 지니고 있지 못한 이상 우리는 결코 그것을 교육 현상으로 구분하여 인식할 방도가 없다. 이는 보존 개념이 없는 아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보존의 현상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존 개념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의 개념 역시도 우리가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우리 내부에서 형성하지 않는다면 결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학은 무엇보다 교육 현상을 바라보는 데에 적절한 교육의 개념을 제공한다는 학문적 소임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교육의 세계에 참여해 이를 실천하거나 개선하는 일도 올바로 수행할 수가 있다. 이 점에서 교육학의 일차적인 과제는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을 구분하고, 후자(後者)가 아닌 전자(前者)를 교육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분별적 인식을 제공하는 일이다. 물론 이런 교육학의 소임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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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상식을 넘어서는 학문적 인식을 추구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육학은 교육 현상을 교육 현상으로 의미 있게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의 개념, 즉 교육 현상을 포착하여 드러낼 수 있는 교육에 대한 개념 체계를 형성해 왔는가?
2. 교육의 개념 부재: 학문적 공백
교육학의 학문적인 성격과 관련해 저자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로 교육 현상을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교육의 개념이 현존하는 교육학 속에는 부재 상태라는 점이다. 둘째로 교육을 설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개념들을 동원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교육학 밖에서 차용(借用)한 다른 학문들의 것으로 이것을 갖고는 교육을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착각하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교육학은 무엇보다도 다른 학문의 개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해명하는 과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점이 논의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교육학을 재구성하여 교육의 정체를 새롭게 해명하는 일은 이 글 전체에서 저자가 시도하고자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1) 고유한 개념의 부재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의견이 제시되어 왔지만, 교육의 정체를 보여주는 만족할 만한 해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짐작하기로는 이러한 사정이 조만간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그만큼 교육은 우리의 좁은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그렇기는 하지만 교육에 대하여 적어도 이러한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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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정체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교육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과 비교하더라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소망스럽고 아름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인생 행로(行路) 가운데서도 교육이라는 길을 택하여 그것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려는 교사 지망생들과 교육학도들의 대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육이라고 하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망스러운 인간적인 삶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인 탐구를 진행하고, 이를 통하여 교육의 아름다운 면모를 좀 더 여실하게 체험하고 실천하는 일, 그것은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것이 교육이라는 삶의 세계를 선택하는 교사 지망생들이나 교육학이라는 학문 세계에 입문하는 교육학도들, 그리고 그들보다 앞선 수많은 선배 교사들과 교육학도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믿음이고 확신일 것이다.
대학에서 교육학의 이러저러한 강좌들을 수강하다가 교육학도들 가운데 상당수가 곧바로 직면하는 어려움은 교육학이 가장 전형적인 응용학문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당혹스러운 것일 수가 있다. 첫째는 교육학이 응용해야 할 학문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육철학, 교육사,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교육행정학, 교육인류학, 교육통계학, 교육경제학, 교육정치학, 교육공학 등등이 교육학과에서 접할 수 있는 교육학 과목들이다. 이들 교과목 명칭에서 ‘교육’이라는 수식어를 제외했을 때, 남게 되는 학문들이 바로 교육학이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응용해야 할 학문들이다. 이는 거의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철학,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등과 같은 학문들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려울 만큼 이질적인 학문들이다. 그런데 교육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들 학문들을 모두 총동원해야 한다면, 이는 사실상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들 학문들 모두에 해박하지 않은 이상에는 이 세상 어느 교육학자도 교육을 이해할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들이 교육학에 갓 입문한 교육학도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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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이상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째는 교육학의 모든 분과학문들을 남김없이 공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 가운데 몇 개, 예를 들어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다가 보면 순수한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들을 제외할 경우, 이들 분과학문들에는 교육학만의 지식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응용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철학이나 심리학을 교육에 적용하는 가운데 철학이나 심리학의 그것과는 구분할 수 있는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의 지식이 조금은 생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짤막짤막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그다지 신기할 것이 없는 이야기들이 교육적인 시사나 함의(含意)라는 식으로 실려 있을 뿐이며, 그것마저도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육학도들의 의문을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이러한 형편은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만이 아니라 교육학의 모든 분과학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느끼게 될 것이지만, 종합대학 내에서 교육학의 학문적인 위상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교육학이 응용하고자 하는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과 같은 학문들, 즉 교육에 응용되어야 하는 다른 학문들을 가리켜 흔히 ‘모학문’(母學問, mother discipline)이라 부른다. 교육학이 이들 모학문들을 응용하는 학문인 이상, 교육학의 학문적인 위상은 모학문들의 그것에 비하면 언제나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학이 제시하는 교육적인 시사나 함의라는 것도 사실은 모학문들 속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이미 들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교육학과 학생들은 3학년이나 4학년이 되면, 직접 모학문들을 공부하기 위해 철학과나 심리학과 또는 사회학과의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철학과나 심리학과 또는 사회학과 등에서 개설하는 강좌들을 직접 수강하는 가운데 새삼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란 다양한 모학문들의 지식을 응용함으로써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다른 모학문들의 지식을 요청하는 것인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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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교육학도들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입학해 2년이나 3년 이상 교육학을 공부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교육학과 학생들의 머릿속에 교육에 대한 희미한 생각일망정, 나름대로 정립되어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교육학과 학생들의 형편이 이러하다고 하면, 교육학을 교직과목으로 공부하는 교과교육 전공의 학생들이나 이러저러한 교사 지망생들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강좌에 참석한 교육학과 학생들을 발견하면 철학 교수나 심리학 교수가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이 교육학에 응용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를 말해 보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 자신도 궁금하다는 것이다. 교육학과 학생들에게 이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요구이지만, 나름대로 책임감도 있고 해서 교육학의 이러저러한 논의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생각한 점도 곁들여 발표를 한다. 물론 그 내용은 대부분 구체적인 교실 수업에서 사용되는 교수방법에 대한 것이거나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방식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를 듣고 ‘잘 알았다. 수고했다’라고 말하는 교수는 별반 없다. 철학과나 심리학과의 교수들은 추가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한다. ‘나는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너만큼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지금 네가 말하는 교육적인 시사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그러니 교육적인 시사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이 유익한 시사를 준다고 하는 그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달라. 그렇게 하면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을 찾아서 내가 너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교육학도들이 이러한 요구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학도들은 솔직히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없다. 교육학을 공부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리저리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육에 대해서 문외한(門外漢)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교육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내용일 뿐이다. 교육학도의 발표를 듣는 철학이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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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만이 아니라, 교육학을 공부해 본 적도 없는 철학과 학생들이나 심리학과 학생들도 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 이외에 교육에 대한 매력적인 발언을 내놓을 수 있는 교육학도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모학문들을 직접 배우기 위하여 철학이나 심리학 등의 강좌를 수강하다가 이러한 봉변을 몇 번 당하고 나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다음 학기에도 철학과나 심리학과에 가서 계속 강좌를 들으려는 교육학도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는 교육학도들은 있을 수 있다. ‘나는 교육이란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교육학과에 들어왔다. 그런데 교육을 알려면, 철학이나 심리학 등의 지식을 배워야 하다. 그런 지식들을 통하여 교육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이나 심리학을 배우러 간 나에게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하는 것은 선후(先後)가 뒤바뀐 요구가 아닌가?’ 모르긴 해도 이러한 질문은 모학문을 직접 수강하다가 이러저러한 봉변을 당한 교육학도들의 머릿속에 어떤 형태로든 생겨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나 심리학의 교수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먼저 네가 생각하는 교육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보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다가 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을 개선하기 위하여 다른 학문들로부터 지식을 응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해하거나 개선하려는 현상이 어떠한 종류의 현상이며, 어떠한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다소나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응용이라는 말은 무엇(甲)에다가 다른 무엇(a)을 도입해 본다는 뜻이다. 이러한 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적어도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즉, ‘갑은 어떠어떠한 사태 또는 현상이며, a는 이러이러한 원리 또는 법칙이다. 따라서 갑은 a를 요구한다.’ 우리의 이러한 추론이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a란 무엇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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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야 한다. 갑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그 갑에 a를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원리들 a, b, c, d, … z 가운데 어떠한 원리를 도입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또한 a를 모르면 그것이 갑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사태 갑(甲), 을(乙), 병(丙), 정(丁), … 가운데 어떠한 사태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특정한 법칙이나 원리를 응용한다는 것은 그 법칙이나 원리의 도입을 요청하는 사태나 현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필요한 만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태나 현상에 도입하려는 원리나 법칙이 어떠한 것인지를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성공적인 응용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나 현상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과 ‘우리가 도입하고자 하는 원리나 법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교육학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의 지식을 교육에 응용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직면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상에 해당하는 ‘교육’에 대한 이해며, 둘째는 그러한 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 또는 법칙에 해당하는 ‘철학적 지식의 종류와 그 내용’에 대한 이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할 때 우리가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그러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거나 교육의 실제를 개선하는 데에 필요한 철학적 지식을 찾아 이를 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모든 지식들을 교육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는 철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인류학 등의 지식을 교육에 응용하는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이 바로 철학과나 심리학과 교수가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을 응용하겠다고 나서는 교육학과 학생들에게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부터 말해 보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백보를 양보하여 교육학이 응용학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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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라도 그러한 응용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려면, 먼저 우리는 교육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에 근거해 모학문의 지식들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교육학이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는 응용학문일 수 없다는 자각이 숨어 있다. 모학문의 지식들을 응용하려면 응용 이전에 교육학은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선이해(先理解)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며, 이것을 체(screen)로 삼아 모학문의 지식을 수용하는 가운데 그 선이해 자체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이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과 같은 모학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교육학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궁리하고 이를 개념화하여 체계화하는 가운데 교육에 대한 선이해가 하나의 교육이론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교육학은 응용학문일 수 없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순수학문이며 자율적인 학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교육학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다른 학문의 지식을 차용(借用)하여 들여오기 이전에 교육학이 먼저 정립하고 있어야 하는 교육의 개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교육학에 기대를 걸고 교육학에 입문한 학도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충격으로 다가선다. 교육을 교육 아닌 것들과 구분해 그것의 고유한 면모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으려면, 교육 현상을 교육 현상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학문적인 안경으로서 교육의 개념이 존재해야만 한다. 교육의 개념이 없는 이상 아무리 교육이 우리 주위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교육으로 인식할 방도가 없다. 보존 개념이 없는 전조작기 아동이 아무리 어머니나 구체적 조작기의 형이 보존이라는 현상을 눈앞에서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보존 현상을 볼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사정이 교육학도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교육학의 가장 깊숙한 안방을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 교육에 대한 고유한 개념 체계가 여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현존하는 교육학은 마치 속이 텅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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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과도 같이 내실(內實)이 없는 처지에 있다.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에서 교육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했을 졸업반 학생들에게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거나, 일반인들도 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되뇌고 만다. 이는 도대체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문학이나 법학을 공부한 대학 졸업반 학생들이라면, 문학이란 무엇이며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당연히 일반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또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 학생들은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상식을 넘어서는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사범대학과 교육대학 학생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문제는 그들의 게으름이나 지적인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교육이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지 못하는 교육학, 달리 말하여 교육의 개념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교육학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현존하는 교육학에도 수많은 학문적 개념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 개념들이 교육 현상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말은 도대체 믿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교육학에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개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개념들은 교육을 의미 있게 드러내기 위해 교육학자들이 각별한 노력을 경주해서 구성한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들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학의 바깥에서 유입된 다른 학문들의 개념이며 외래적(外來的)인 개념들이다. 물론 이러한 외래적인 개념들도 각각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 때 드러나는 것이 교육 현상은 아니다.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과 같은 학문들은 각기 그들이 포착하려는 철학적 현상이나 사회 현상, 또는 심리 현상을 드러내는 데에 적합한 개념들을 구안하기 마련이다. 이들 학문들이 교육 현상을 염두에 두고 자체의 학문적 개념들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래적인 개념들이 보여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간주할 때, 교육 현상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어야 할 안방마저 교육이 아닌 것들에 내어주고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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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경우에는 우리 시야에서 아예 사라지고 만다. 바로 여기에 현존하는 교육학의 또 다른 학문적 오류가 놓여 있다.
2) 외래 개념들의 범람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어떠한 것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의존하는 일종의 안경과도 같다. 붉은색 렌즈로 된 안경을 통해 보면 세상은 온통 붉게 보인다. 파란색 렌즈의 안경을 통해서는 파란 세상만을 볼 수 있다. 렌즈의 색과는 다른 색채를 지닌 세상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떠한 개념들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그 때 보이는 세상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일 수밖에 없다.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일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동설의 개념 체계를 지닌 자는 그것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으로 지각한다. 반면 지동설의 개념 체계를 가진 자는 이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 운동을 하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상이한 개념을 지니고 있으면 설사 동일한 현상을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인간에게 고유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학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역시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질문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일상적인 인식 이상의 새로운 지적 통찰을 제공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적 삶의 세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문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지칭되기는 하지만 이 속에는 다시 상호 질적으로 구분되는 수많은 분과학문들이 존재한다. 이들 분과학문들은 외양적으로는 그것이 탐구하는 대상을 달리한다는 차이를 지닐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특정한 대상을 다른 학문이 보는 것과는 달리 보도록 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눈앞에 두고도 생물학이라는 분야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과 물리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완전히 상이하다. 이는 다시 심리학이나 철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과도 다른 것이다. 이처럼 분과학문들은 특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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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에 대해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접할 수 없는 고유하고도 특이한 조망을 제공하고 있다. 만약 하나의 분과학문이 보여주는 바가 다른 분과학문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별도의 분과학문으로 존재할 이유는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처럼 분과학문들이 각각 상이한 조망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상을 바라보는 자체의 고유한 관점을 확보한 가운데 그것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정한 현상을 드러내주는 독자적인 개념 체계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특정한 현상은 그것을 드러내주는 개념 체계가 존재할 경우에만 우리에게 지각되고 인식되기 마련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각 분과학문의 선구자들은 이제까지 다른 학문에서는 포착하지 못했던 특정한 현상을 조망하는 데에 필요한 별도의 고유한 개념 체계들을 구성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이 성공했을 때 각 분과학문들은 다른 학문들의 그것과는 구분되는 자체의 고유한 개념 체계들을 지니게 되며, 이는 다른 학문들의 개념 체계로 대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 사회학은 사회 현상을 드러내는 데에 필요한 사회학의 개념 체계를 구성해 왔으며, 이는 심리 현상을 조망하는 데에 동원되는 심리학의 개념 체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심리학의 개념 체계로는 사회 현상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별도로 사회학의 개념 체계를 만든 것이다. 이는 어떠한 분과학문들의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사항이다.
그렇다면 교육학이라는 분과학문의 경우에는 사정이 어떠한가? 교육은 분명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고 있는 현상들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출현한 이래로 인간의 곁에서 함께 생성되고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의 눈에 동일한 것으로 지각되는 자명하고도 단일한 현상은 아니다. 다른 모든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그것을 조망할 수 있는 개념 체계를 요청하며, 이를 통해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그것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상식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다면적(多面的)인 실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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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일반인들이 그들의 상식적인 개념을 통해서 교육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교육의 좀 더 여실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우리는 학문적인 개념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학문은 상식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의 진실을 보여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교육학은 바로 상식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 교육에 대한 학문적인 인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교육학이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교육을 교육답게 드러낼 수 있는 수준 높은 고유한 개념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교육학도 하나의 학문인 이상에는 당연히 요청되는 학문적 소명과도 같은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교육학은 전형적인 응용학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응용이라는 것이 자신의 관심사를 조망하는 관점이나 이론적인 안목은 정립하지 못한 채, 다른 학문의 인식적 관심이나 개념 체계를 그대로 차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비록 응용학문이라는 명칭으로라도 그것을 ‘학문’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교육학을 응용학문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현재 교육학은 다른 학문들로부터 개념들과 이론들을 수용할 경우에 그것을 걸러낼 수 있는 체로 사용하는 데에 충분할 만큼 교육의 개념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이로 인하여 빚어지는 현상은 모학문들에서 최신의 이론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들을 거의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교육학의 발전은 관련 모학문들의 지식을 얼마나 빨리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모학문의 최신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을수록 일류 교육학자로 대접을 받는 풍토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학의 관행은 그것이 교육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인지조차 검증되지 않은 외래 개념들의 만연을 불러왔다. 교육학자들은 모학문들의 관점을 통하여 다양한 학문적 개념들을 구사해가며 교육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외양적으로 보면 분명 교육에 대한 연구와 논의에 헌신하고 있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헌신이 교육에 대한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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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학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떠한 모학문의 관점을 택하고 있느냐에 따라 교육학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논쟁이 벌어진다(이규호, 1974; 이돈희, 1974; 이종각, 1994; 이홍우, 1983; 정범모, 1974; 조무남, 2004; Hirst, 1983; O’ Conner, 1975). 교육철학자들이 보기에 교육심리학자들이나 교육공학자들의 논의는 교육이 추구해야 될 가치의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교육의 성격을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그릇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교육공학자들이나 교육행정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교육철학자들이나 교육사회학자들의 이야기는 교육의 효율성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변적이고 공허한 담론(談論)일 뿐이다.
학문 내에서 논쟁이 전개된다는 것은 해당 학문의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고, 따라서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교육학의 속사정은 이러한 기대와는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 사이의 논쟁이 교육의 정체를 해명하는 데에 생산적으로 기여한 적은 별로 없다. 서로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다가 외면해 버릴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택하고 있는 모학문의 학자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보는 일종의 강화(强化, reinforcement)를 받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교육철학자들이 교육을 보는 관점과 교육을 설명하는 개념 등은 철학자들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며, 교육심리학자들의 그것은 다시 심리학자들의 그것과 너무도 동일하고, 교육행정학자들의 생각은 행정학자들의 그것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이 택하고 있는 모학문의 학자들과 동일한 관점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탐구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안도한다. 교육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견해의 차이는 그들과 모학문의 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비하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이러한 형편에서는 교육학 내의 논쟁이 교육학 자체의 발전으로 이어지지가 어렵다.
사실 교육에 대한 교육학자들의 관점과 개념은 철학자나 심리학자, 또는 행정학자들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교육에 대한 것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교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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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교육학자들의 논의라는 것도 해당 모학문의 학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애를 쓰면, 그들의 지식으로부터 곧장 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점은 교육학자들이 보는 교육이라는 것이 실상은 철학이나 심리학, 또는 행정학이나 사회학 등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교육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철학자나 심리학자, 사회학자나 행정학자들은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현상이거나 심리적 현상, 사회 현상이나 행정 현상으로 본다. 교육학이 아닌 자신들 학문의 관점과 개념으로 포착한 것을 교육 현상으로 간주할 모학문의 학자들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육학자들이 보여주는 것은 교육학의 관점에서 드러날 수 있는 교육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학자들이 볼 수 있는 것으로 교육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교육 현상이 아니라 사회 현상, 심리 현상, 행정 현상, 경제 현상, 문화 현상 등인 것이다. [각주 4: 물론 철학이나 심리학, 또는 사회학 등의 관점에서도 학교나 교육을 조망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학교나 교육은 교육학이 해명해야 할 대상 세계라는 점에서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시각에서 가능한 학교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교육학의 지식이라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것도 학교나 교육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학문들이 학교나 교육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을 교육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동일한 대상을 조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개념 체계와 관점이 상이할 경우, 전혀 다른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생물학이나 물리학, 또는 심리학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동일한 대상을 조망하는 경우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생물적 차원이나 물리적 차원, 또는 심리적 차원의 인간이며, 이것들은 질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각기 그들의 관심사인 생물 현상, 물리 현상, 심리 현상을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철학,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등은 학교나 교육을 대상으로 교육 현상이 아닌, 철학적 현상, 심리적 현상, 사회적 현상을 조망하고 있을 뿐이다.] 교육학은 교육 아닌 다른 현상들을 모두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들이 보여주어야 할 교육 현상은 충분히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장상호, 1986, 1990, 2005; Egan, 1983; Walton, 1974). 그러면서도 이들 현상들을 한꺼번에 교육 현상으로 총칭(總稱)함으로써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보도록 만드는 체계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독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저자의 비판이 교육학계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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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현존하는 교육학의 문제를 지적한 어느 교육학자의 고백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차차 드러나겠지만, 이러한 종류의 고백은 여러 교육학자들에 의하여 지금도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개진되고 있다.
지금까지 (교육철학, 교육사,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등과 같은 교육학의) 기초 학문들은 교육의 실제가 아니라, 모학문에 의지해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학문인 철학, 심리학, 사회학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교육 실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 따라서 교육이론의 기초 학문들이 모학문에 의존하는 일은 교육이론을 교육 실제와 논리적으로 괴리시킬 수밖에 없었다. … 교육학에는 지금까지 철학자, 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는 많았으나, 교육이론가는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조무남, 2004; 301). … 지금까지 교육이론 연구와 강의가 교육의 실제를 그려냈다기보다는 모학문에 의존함으로써 교육 밖의 논리를 교육 안으로 들여오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302). … 교육이론의 잘못된 ‘연결 고리’는 교육이론의 발달에서 겪은 학문적 변고다. 근대 서양 교육사에서 교사교육이 시작되었을 때, 교육이론을 가르친 사람들은 교육학자가 아니라,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었다. 제도가 그랬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전문 교육이론가를 찾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하여튼 당시에 교육이론을 가르친 사람들은 그들의 출신 배경이 그렇듯이 그 근거가 어찌되었든 이미 나름대로 틀을 갖춘 철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의 눈으로 교육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이 만든 학문이 ‘철학적 교육학’, ‘역사적 교육학’, ‘사회학적 교육학’, ‘심리학적 교육학’이 아닌, 철학과 사회학과 심리학으로서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교육을 보는 그들의 안목은 모학문에 의해 제한을 받기 마련이었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사들의 안목도 교육 실제로부터 먼 거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자명하다. 이는 틀림없이 교육이론의 탄생에서 발생된 역사적 변고다. … 우리는 이제 교육이론과 모학문 사이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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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이 응용하고 있는 모학문들은 철학,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인류학, 공학 등 너무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들 학문들은 서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관심사와 개념의 체계를 지닌 별개의 분과학문들이다. 철학,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인류학, 공학 등은 설사 동일한 대상을 조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각기 상이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도 상충되어 조화될 수도 없는 무엇으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바로 이 점에 이들 학문들의 고유성이 존재하는 것이며, 각기 별도의 분과학문으로 성립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질적인 학문들을 하나로 묶어 교육학이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통칭할 수 있는 것인가? 학문 세계에서는 통합할 수 없는 별개의 학문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교육학이라는 용광로(鎔鑛爐) 속에서 과연 이들을 하나의 단일한 학문으로 융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교육학자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들이 어떠한 학문을 응용하고 있느냐에 따라 교육에 대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교육학은 서로 구분되는 이질적인 학문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가능하지도 않은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며, 그 와중에 다른 학문의 개념 체계들이 보여주는 교육 아닌 현상들을 교육 현상이라고 착각하는 심각한 오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교육이 교육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는 문제도 심각한 것이지만, 이것 못지않게 큰 문제도 초래된다. 외래 학문들의 개념을 통하여 교육을 바라봄으로써 ‘교육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교육학도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마저도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교육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제라든지, 종사하는 직업 수준 이상으로 교육받는 것은 과잉교육(過剩敎育)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주장들 속에서 교육은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인간적인 삶의 형식이기는커녕, 부조리하고 병리적인 사회 현상으로 매도되고 만다. 더 나아가 이전에 못하던 행동을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공격적인 행동이든, 침을 흘리는 행동이든, 소매치기 기술이든 간에 모두 학습의 결과라는 주장들 속에서 교육은 무엇인지도 모를 추하고 악한 활동으로 전락되어 버린다(엄태동,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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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교육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교육의 소망스럽고 가치 있는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기는커녕 교육은 혐오스럽고 필요악(必要惡)과도 같은 어떤 것이라는 인상이 교육학도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문제 즉, 교육이 교육 아닌 것으로 뒤바뀌고, 교육이 가치 지향적인 세계라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마저도 흔들리는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로 인하여 교육이 교육 아닌 것에 의하여 잠식(蠶食)되는 현상이 초래될 우려가 상당히 큰 것이다(장상호, 1986, 2000a, 2005; Egan, 1983; Nyberg & Egan, 1981). 만일 이러한 진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교육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교육에 대한 정상적인 이해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진다는 대단한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어떠한 학문이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학문이 보여줄 수 있는 특정한 현상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학문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학은 교육학의 존재 이유인 교육을 조망할 수 있는 고유한 개념 체계는 만들지 못하고, 외래 학문들의 이질적인 개념 체계만을 넘치도록 수입(輸入)하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조무남, 2004; Flitner, 1982; Walton, 1974). 이십 년이 넘게 교육학을 공부하며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입장에서 교육학의 이러한 속사정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다. 현존하는 교육학에 대한 이러한 자성(自省)의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들리고 있다. 해바라기가 해를 쳐다보는 것처럼 우리나라 교육학자들이 마치 교육학의 원천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미국의 교육학계에서도 다음과 같은 통절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어 있는가, 혹은 정립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전부터도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과연 교육을 학과목의 형태로 대학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인가를 놓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가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경에 교육은 대학의 학과목에서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었으며, 그렇게 되고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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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점차 새로운 학문적 탐구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탐구에 어떠한 초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탐구 방법에 있어서 단일한 특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철학, 심리학, 그리고 통계학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사회과학들을 이리저리 다양하게 조합하는 가운데 교육에 대한 탐구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교육학은 처음부터 이질적인 것의 다양한 복합체라는 성격을 지니고 출범한데다가 교육 연구와 관련하여 하나의 자율적이면서도 유대가 강한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는 데도 실패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교육학 분야는 아직도 하나의 학문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고도의 내적 응결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Lagemann, 2000: ⅸ).
여기서 우리는 교육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공감대도 없이 이러저러한 학문들을 응용하기만 하는 교육학이 현재 어떠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을 해소하지 않는 이상 교육학은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성립할 수조차 없다는 진단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교육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어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하면서 학문적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이미 교육학의 바깥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현존하는 교육학이 학문으로서 결격 사유를 지니고 있음은 교육학 밖의 인사(人士)들에게도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국문학 교수가 교육학에 대하여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교육학자들을 향한 무례한 인신공격이 아니라, 교육학자 스스로 교육학의 형편을 자성하도록 촉구하는 학문 공동체의 건설적인 지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교육학이 학문인가? 남들의 기존 지식이나 이론을 수입하는 활동도 학문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교육학은 학문이며 그 경력이 화려해 자랑스럽다. 우리 전통 학문을 이어 오늘의 문제를 다루고, 주체성과 세계성을 아울러 갖춘 이론 창조의 작업을 해야 학문을 한다고 평가한다면, 교육학은 아직 많이 모자란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러 분야 가운데 교육학의 열세는 특히 현저하다. 미국 이론 수입을 가장 열심히 하고, 우리 이론 창조를 가장 소홀하게 한 분야가 교육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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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교육학 때문에 교육을 망쳤다고 하는 비난이 과장되지 않았다(조동일, 1994: 46-47). [각주 5: 물론 여기서 조동일 교수는 현존하는 교육학이 우리의 교육을 해명할 수 있는 자생적인 한국 교육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외국의 교육이론만을 일방적으로 수입하고 있는 실태를 주로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국문학자가 아니라 교육학자였다면, 외국 교육이론의 수입보다는 다른 학문들의 이론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것이 교육학의 근본 문제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교육학은 아직 학문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개선에 성급히 개입함으로써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점 등을 통찰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분명히 해두고 싶은 말은 현존하는 교육학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교육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 자식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는 부모라면, 결코 이를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지금부터라도 자식의 문제를 찾아 지적하고 고쳐나가도록 촉구하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육학이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면, 교육이론을 탐색하는 데에 평생 헌신해야 하는 교육학자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교육학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는 공연한 트집을 잡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 학자로서 당연한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3. 교육 현상의 개념화: 교육학의 길
언젠가 현직 교사들로 재직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다가 저자는 갑자기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 ‘현대철학과 교육’이라는 명칭의 강좌인 것은 기억나지만, 그 때 내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당시 그 강좌에서 내가 철학의 인식론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몇몇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설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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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구성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강의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매 강의의 결론마다 나는 거의 습관적이라 할 만큼 ‘이들 철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또는 이러한 사조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으니, 장차 우리 교육도 이러저러한 것으로 변모되거나 개선되어야만 한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강의에서 다룬 철학자들이나 철학의 사조들이 교육에 주는 시사점이나 함의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는 난 데 없이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심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나의 강의를 수강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현직 교사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언제나 남의 모범이 될 만큼 충실한 교육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매번 자신들의 교육적인 행위를 대상으로 삼아 반성적으로 사고하는 가운데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교육적으로 탁월한 삶을 살고 있는 가운데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심각하게 사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라는 현직에 종사하면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대학원에 진학하고, 교육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점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다’는 사람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농담조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강의 시간에 언급한 사람들이 다들 훌륭한 철학자들이고 심리학자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적인 삶을 영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교육학자가 아닌 이상 그들에게 교육은 본격적인 학문적 관심사도 아니고, 그들의 이론 속에 교육이 온전히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별달리 크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그들은 교육을 자신들의 삶 중심부에 위치시키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개인적으로 고뇌하는 현직 교사들보다 교육에 대하여 문외한(門外漢)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교육적인 체험이나 인식에 있어서 오히려 더 수준이 높을 수도 있는 현직 교사들에게, 그들 철학자나 심리학자가 직접적으로 말한 바도 없는 것을 끌어내 이야기하고,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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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떠든 것은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당시에 내가 느꼈던 충격이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교육학자이고 나의 강의를 수강하고 있는 현직 교사들이 교육의 전문가라고 인정받거나 자처하는 이상, 그들과 나는 각자의 교육적인 삶의 체험을 반성하는 가운데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교육의 고유한 면면들을 살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했어야 맞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애써 찾은 교육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키거나 설명하는 적절한 어휘 또는 개념들을 기존의 교육학에서 찾기 어렵다면, 독자적으로 적절한 개념화 작업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또한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선인(先人)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나 체험적 고백 속에 혹시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교육의 고유한 면모를 살피는 일에도 모든 힘을 쏟아 부었어야 했다. 교육에 대하여 본격적인 학문적 관심을 갖고 탐구를 진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철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가 읽고 사유해야 할 공부거리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이 수행한 교육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아 이를 묘사하고 있는 문서들이 도처에 있으며, 현재 우리가 행하고 있는 교육적인 삶과 교육 행위가 교육학적인 탐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나는 그 학기 또는 다음 학기에 대학원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학문의 이론들을 공부하기보다는 교육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찾거나 내가 별도로 구성해서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같이 토론하고 고민해 나가게 되었다. 지금 이 글도 바로 그러한 방향전환에 따라 내가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 것이며, 교육을 다른 학문의 개념이 아닌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을 만들거나 찾아 나가면서 논의한 성과물이라 볼 수 있다. ‘교육의 교육학적인 환원(還元)’이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은 국내의 어느 교육학자가 교육학만이 드러낼 수 있는 교육의 고유한 본질을 탐색하는 작업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만든 용어다(장상호, 1986). 원래 환원은 철학의 현상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특정한 현상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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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와는 무관한 잡다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배제해 나가면서 사태 자체에 충실한 가운데 그것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탐구의 방법을 말한다(Husserl, 1952, 1970). 교육의 교육학적인 환원이란, 결국 교육 현상을 포착하는 데에 부적절한 다른 학문의 외래 개념들은 철저히 배제하는 가운데, 교육이라 불릴만한 고유한 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찾아 이를 교육학의 독자적인 개념을 구성하여 이론화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고 또 현존하는 교육학을 통해서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교육의 교육학적 환원을 통하여 교육의 본질에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 글이 시도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는 세상 사람들이 교육학에 기대하는 바일뿐만 아니라, 학문으로서 교육학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명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