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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동. 교육의 본질과 교육학 / 제7장 교육의 두 가지 활동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524 목록 댓글 0

엄태동(2006). 『교육의 본질과 교육학』. 서울: 학지사.

제7장 교육의 두 가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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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교육의 두 가지 활동


   교육은 과정적 활동의 세계다. 그것은 자신의 자아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상구 활동과 타자의 자아 성장을 조력하려는 하화 활동을 구성 요소로 하여 성립한다. 그러나 상구 활동과 하화 활동은 서로 밀접히 관련을 맺기는 하지만, 각기 구분되는 활동들일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적인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 활동은 이러한 상구 활동들과 하화 활동들이 상호 관련을 맺는 가운데 출현하는 상위 활동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상구 활동들과 하화 활동들은 앞의 6장에서 논의한 교육의 내재적 원리들을 충족시키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미리 밝혀두는 바이지만, 아직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상구 활동들과 하화 활동들을 포괄적으로 망라하여 드러내는 데까지 탐구를 진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상구와 하화의 내재적 원리들과 상구와 하화의 요소적인 활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적인 관련성을 충분할 정도로 해명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다. 이 장에서 소개하는 상구와 하화 활동들의 세세한 부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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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해명하고, 이것들이 각기 상구와 하화의 내재적 원리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준수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려면, 장기간에 걸쳐 좀 더 치밀하게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아래의 논의는 하나의 잠정적인 탐구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사항을 당부하고 싶다. 그것은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상구와 하화 활동들을 각자가 수행하고 있는 교육 활동들에 비추어 보면서 전자가 후자를 의미 있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교육이론은 그것이 타당한 것이 되려면, 실제 우리의 교육적인 삶의 양상을 온전히 드러내어 설명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을 제대로 된 교육이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나는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상구와 하화 활동들에 대한 논의가 적어도 기존 교육학의 학습이론들이나 교수이론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는 실제 우리 교육 활동을 설명하는 데에 더 호소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장의 논의를 다 읽고 난 뒤에도 실제 자신은 온갖 형태의 학습이론이나 교수이론이 제안하거나 권고하고 있는 바대로 배우거나 가르치고 있다고 판단하는 독자가 여전히 있다면, 이를 어찌 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독자에게는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이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구와 하화 활동들은 물론 아니며, 어쩌면 그는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이 아닌 다른 활동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각주 52: 개나 고양이, 또는 비둘기 같은 유기체가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훈련받거나 조형당하는 것을 가리켜 학습이라 부르고, 어떠한 내용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중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조직하여 제시하는 것을 가리켜 교수라 부르고 있는 것이 현재 교육학의 학습이론이고 교수이론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이론들은 교육이라는 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지나치게 왜소하고 사소한 것들로 전락시키고 있을 뿐이다. 나의 이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독자는 이 분야의 문헌들을 직접 읽어보면서 과연 그것이 교육일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자문(自問)해 보기를 진심으로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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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구: 상승과 거듭남의 여정


   상구는 단일한 활동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적 활동이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상구 활동을 각자 자기 수준에서 전개해 나가고 있다. 고급 수준의 상구 활동을 수행하는 자도 있고, 다소간 낮은 수준에서 상구 활동을 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아래서 논의하고 있는 상구 활동들은 교육본위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들을 기초로 하기는 하였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상구 활동에 대한 반성적 사고의 산물에 해당한다. 즉, 내가 이러한 활동들을 중심으로 나의 상구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상구 활동에 대한 기술(記述)에 그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것일 수는 없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여러분 각자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상구 활동을 떠올리는 가운데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가운데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상구 활동들이나 잘못 기술된 상구 활동들이 있다면, 이를 지적하고 적극적으로 제안해야 할 것이다.


   1) 현재 품위에 대해 거리두기


   누구나 특정한 수도계상의 품위를 소유하고 있다. 문외한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특정한 영역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품위에 해당하는 것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경우란 생각하기가 어렵다. 가령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학문, 그 가운데서도 교육학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높은 품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가령 물리학이나 정치학 등과 같은 영역에서 나는 문외한이라 할 만큼 대단히 낮은 품위를 지니고 있다. 물리학이나 정치학 분야의 대가들이 보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초라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해당 영역과 관련된 나의 소박한 품위에 해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러한 나의 품위에 근거하여 물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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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세계를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은 수도계의 종류 자체를 예술이나 도덕, 또는 종교 등으로 확장할 경우 더욱 심해진다. 나는 예술과 관련해서는 정치학이나 물리학보다도 더 낮은 품위에 있으며, 도덕이나 종교 등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형편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각 영역과 관련한 나의 품위에 근거하여 나는 사고하고 행위하며 믿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나의 품위들은 적어도 내게는 최선의 것으로서 내 존재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품위는 우리들 자신에게는 자존(自尊)의 핵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자존적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자존의 기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품위인 것이다.

   품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주체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고 있는 품위들이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주로 본위화하는 세계들과 관련된 품위들일 경우에 그것은 각고의 노력을 통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의 품위는 우리에게 그만큼 각별하고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주로 몰입하여 헌신하고 있는 세계에서 자기가 점유하고 있는 품위에 대하여 그러한 자긍심(自矜心)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품위에 대하여 그것이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열정과 소신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각자의 품위에 이처럼 애착을 지니고 안주(安住)하려고 든다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의 자기 모습을 구현하는 일은 요원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것처럼 동굴 속의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품위의 노예가 되기 쉽다. 또는 김춘수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몸짓에 불과한 것을 꽃이라 믿고, 꽃에 해당하는 것을 의미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며, 도상(途上)의 존재다. 따라서 아무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획득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품위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기 위한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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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이고 징검다리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각주 53: 실용주의(實用主義)라는 오해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불완전하며 그 경험의 산물인 학문과 예술, 도덕 등은 그 이후의 더 나은 경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 도구(instrument)에 해당한다고 보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통찰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험의 계속적 재구성’을 주장하는 듀이의 교육이론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부단히 쇄신해 나가야 됨을 강조하고 있는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J. Varela)가 그들의 저서 『인식의 나무(1987)』에서 자신들의 결론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다음의 우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해준다.

   

   옛날 어느 섬에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의 꿈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다른 땅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문제는 항해술과 헤엄치는 법이 조금도 발달하지 않았거나,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이 이를 잊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섬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그 섬에서 사는 일 말고는 다른 것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또 다른 이들은 물을 건너가지 않고 그 섬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풀려고 했다. 이따금 섬사람들 가운데 헤엄치는 법을 새로 알아낸 이가 있었으며, 희망을 품고 그를 찾아가 제자가 되려는 이도 가끔 있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헤엄치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요.”

   “그럼 먼저 계약을 맺을까요?”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 양배추 자루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양배추라뇨?”

   “그거야 물론 제가 저쪽으로 건너가서 먹을 식량이죠.”

   “거기 가면 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싫어요! 전 양배추를 꼭 가지고 갈 겁니다.”

   “하지만 양배추 자루를 가지고는 결코 헤엄을 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갈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짐이라고 하지만, 제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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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처럼 소중한 식량입니다.”

   “우리 한 번 비유를 써서 양배추 말고 ‘추측’이나 ‘상상’, ‘선입견’, ‘확실함’ 같은 말을 써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차라리 양배추를 가지고, 저한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을 다른 스승을 찾아가겠습니다.”(최호영 역, 1995: 255-257).


   위의 우화에 시사되어 있듯이 자신의 현재 품위를 상징하는 양배추 자루를 버려야만 그것보다 더 값진 새로운 품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화 속의 섬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양배추 자루(현재의 품위)를 부여안은 채 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재 품위에 대해 거리두기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동굴 속 죄수들이나 김춘수 시인이 말한 몸짓을 꽃으로 착각하는 자로, 또는 위의 우화에 나타나 있는 섬에 갇혀 사는 사람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상구의 첫 단추 끼우기부터 문제가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좀 더 위대한 존재로 향상시키고자 하는 상구 활동은 시작과 동시에 끝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품위를 새로운 것으로 갱신하여 스스로 거듭나고자 하는 상구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가 소중한 것만큼 그것에 열정과 소신을 지니는 일은 물론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현재 품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상구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품위에 대해 거리두기는 상구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상구 활동에 해당한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이러한 상구 활동도 오랜 수련을 통하여 우리가 갈고 닦아야 하는 상구의 역량에 속한다.


   2) 성장 지향적 자세 갖기


   자신의 현재 품위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두기를 제대로 할 수 있으려면,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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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에서 벗어나 새롭게 지향할 수 있는 대안적인 품위에 대한 비전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품위는 그것의 수준이 높든 낮든 간에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는 존재의 기반에 해당한다. 만약 자신의 현재 품위에 대하여 거리두기를 취할 뿐 다른 무엇인가로 나아갈 바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이는 거처 상실(居處 喪失)의 불안감과 공허함을 안겨주게 된다. 인간의 성장은 어딘가에서 벗어나 다른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벗어나기만 할 뿐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면, 이는 우리를 허무의 수렁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상구자는 자신의 현재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기꺼이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미지의 가능성에 자신을 개방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추구하려는 자세에 힘입어 현재 품위에 대한 거리두기도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물론 현재 품위라는 존재의 편안한 집을 버리고 새로운 존재의 집을 모색하는 일은, 비유를 들어 말하면, 언제 끝날지를 알 수도 없는 험난한 여정에 참여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동물의 새끼가 편안한 안식처였던 어미의 둥지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진정한 상구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에 안주하는 데서 따라 나오는 편안함은 순간이며, 그것이 곧 지루함으로 돌변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새로운 품위를 향해 나아가는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하며, 이에 필요한 길 떠나는 자의 자세와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길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러한 현재 품위에 대한 거리두기와 성장 지향적 자세 갖기는 앞의 6장에서 교육의 수레바퀴 모형을 분석하는 가운데 언급한 자리(自利)라는 상구의 동기에 의하여 촉발되는 상구 활동들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상구 활동들은 시간의 흐름상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으며, 오히려 그 경우에 각각의 활동들이 원활히 전개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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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상위 품위와 선진 탐색하기


   우리의 주위에는 우리가 추구할 만한 진리롭고 선하며 아름답고 성스러운 세계들이 즐비하게 존재한다. 문화와 문명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좀 더 다양하고 심도 있는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우리의 존재 자체의 풍요로움과 위대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세계들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의 존재로 점유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통하여 노래한 것처럼 우리가 그것을 부르지 않는 이상, 즉 그것을 소재로 삼아 상구 활동을 전개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몸짓에 불과할 뿐 아름다운 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신의 자아를 위대하게 성장시키기 위하여 상구의 여정에 착수한 상구자는 자신이 상구할 만한 새로운 품위, 그의 현재 품위를 능가하는 품위를 식별하여 이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구자의 눈에 그가 상구할 수 있는 위대한 품위들이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상위의 품위를 낮은 품위에 있는 자가 제대로 알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의 현명함을 분별할 수 없으며, 하수(下手)는 고수(高手)의 경지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낮은 품위에 있는 자에게 상위의 품위는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고,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부조리하게 비치기 십상이다. 인상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상구자에게 상위의 품위는 그의 현재 품위보다도 낮으며 하위에 있는 품위들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애써 상구 활동을 시작한 연후에도 무엇을 상구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기 쉬우며, 심한 경우에는 거리두기를 시도했던 우리의 애초 품위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동굴의 비유를 통하여 소크라테스가 시사했던 것처럼 밝은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굴의 어두움으로 되돌아가 그림자를 다시 진리로 받아들이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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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불상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상구자가 당장 상위의 품위를 정확히 식별해 낼 수 있는 비법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탐색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간접적인 단서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장상호, 2000: 467-468). 특정한 수도계의 대가들은 그에 걸맞은 명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명성 그 자체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품위의 위대함을 언제나 올바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상구자는 대가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품위를 일단 자신의 것보다 상위의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특정한 수도계에서 빈번하게 인용되거나 거론되는 인물을 선진으로 수용하는 방법도 있다. 해당 수도계의 종사자들이 인용하거나 거론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고 있는 사람을 선진으로 인정하는 길을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도움에 힘입어 성장한 제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해당 수도계에서 자신보다 선진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인 것이다. 나의 현재 품위에서 내가 인식하거나 체험하는 바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비판하는 가운데 새로운 것(설사 그것이 내게는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을 내놓고 있는 사람도 나에게는 선진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단서들을 통하여 상구자는 그가 추구해 나가야 할 새로운 품위가 무엇인지, 또는 그러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선진들이 누구인지를 탐색해 나갈 수 있다. 상위 품위나 선진을 찾는 활동도 모든 상구 활동들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생득적으로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별도로 개발해야 하는 인간적인 역량이다. 자신이 상구해야 할 상위 품위나 자신의 상구를 도울 수 있는 선진을 찾았다고 하면, 상구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위 품위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선진을 탐색하는 일은 교육의 수레바퀴 모형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혁신’(革新)이라는 상구의 생리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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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청교의 수행


   일단 자신의 현재 품위를 넘어서는 상위 품위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선진을 찾았다면, 그와 교육적으로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해야 한다. 앞에서 이루어진 선진의 탐색은 하나의 가정이며 짐작일 뿐이지 아직 그가 선진이라는 점을 확증한 것은 아니다. 선진으로 짐작되는 사람을 찾았을 뿐이다. 선진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해서 당장 그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하여 각자 하화하고 상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상구자는 선진에게 자신을 상대로 하화를 해 줄 것을 청함으로써 교육적인 교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물꼬를 터야 한다. 이를 청교(請敎)의 활동이라 부를 수 있는데 청교를 통하여 그와 선진 사이에 교육적인 교섭을 실현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선진이 자신에게 하화할 의지나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화는 분명 가치 있는 인간적 삶의 양식 가운데 하나지만, 선진이라고 해서 누구나 예외 없이 하화의 세계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어느 선진은 하화보다는 상구 본위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에 여념이 없어서 타자의 성장을 조력하는 일에 나설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 선택에 해당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상구의 가치를 맛보기 위하여 상구를 수행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하나의 가치 선택인 것처럼, 상구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하화의 가치 추구에 전념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존중받아야 하는 또 하나의 가치 선택인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청교에도 불구하고 선진이 하화의 길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거나 다른 선진을 추천받는다거나 아니면 직접 다른 선진을 다시 탐색해야 한다.

   선진이 하화의 길로 나서도록 하려면, 상구자는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밝히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간청해야 한다. 이 때 자신의 계획과 포부는 가능한 한 자세할 필요가 있으며, 선진의 추가 질문에 대해서도 충분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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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선진은 상구자의 짐작과는 달리 상구자가 걷고자 하는 길과는 다른 길에 관심이 있으며 그 길을 걷고자 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상구자는 특정한 학문의 어떠한 문제에 관심이 있고 이를 탐구하고자 하는데 선진은 다른 문제들에 관심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학문의 길을 걷고 있을 수도 있다. 앞에서 교육적 관계 형성과 유지의 원리 가운데 하나로 이야기한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원리에 맞도록 스승과 제자는 같은 수도계에 종사하면서 각자 하화하고 상구해야 한다. 이 점에서 후진은 자신을 피력하는 가운데 선진이 걷고 있는 길과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이 일치되는지를 따져 묻고, 선진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상구자는 상구에 임하는 자신의 각별한 각오와 남다른 자세를 피력하여 선진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선진이 아무에게나 하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뿐만 아니라 하화를 제대로 수행하여 그에 수반되는 보람과 가치를 맛보고자 한다. 따라서 자신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상구할 수 있는 자를 가려내어 하화를 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상구자는 자신이 상구자로서의 남다른 각오와 자세를 지니고 있음을 보이고, 이를 통하여 선진의 하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고 있을 뿐 좀처럼 하화의 길에 나서지 않는 달마대사에게 청교하기 위하여 자신의 팔을 잘라 보이며 상구 의지를 보였다는 혜가(彗可, 487-593) 대사의 설중단비(雪中斷臂)라는 사례는 너무도 유명하다. 물론 혜가 대사의 사례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청교의 당사자인 후진이 상구에 임하는 자신의 각오와 자세를 선진에게 피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직감할 수 있다.


   5) 선진에 대한 신뢰와 비판의 조절


   품위 습득은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행위를 하는 틀 자체의 변경과 갱신을 수반하는 것으로 오랜 시간을 요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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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과제다. 따라서 후진은 선진이 요청하는 것만큼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선진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상구 활동이 품위라는 커다란 틀 자체의 갱신과 관련된 것인 만큼 선진에게 하화를 받아 상구를 전개하는 초기에 상구자는 그의 현재 시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스승의 발언과 지시 및 안내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상구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그의 품위가 상승하게 되면, 그것이 무슨 의미이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납득할 수 있게 되지만 지금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상구자는 스승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다고 해서 스승을 의심하거나 불신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을 도와 하화를 전개하는 선진을 일단은 신뢰하면서 그의 안내에 충실히 따를 필요가 있다. 스승에 대한 이러한 신뢰가 상구자에게 필요한 자세이고 활동이라는 점은 이미 여기저기서 지적되어 온 바가 있다(장상호, 1991, 1997a, 2000a; Polanyi, 1946, 1958; Schön, 1987). 그 가운데서도 특히 쇤(Donald A. Schön)은 ‘불신을 자발적으로 연기하기’(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말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맺어져야 하는 일종의 계약과도 같은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의 의문과 도전을 허용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옳은 것으로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배우는 자는 기꺼이 자신의 불신을 유보하고 가르치는 자에게 가르칠 기회를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가르치는 자가 제공한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면밀히 따져 보아야만 한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행하기도 전에 그에게 완벽한 정당화나 설명을 요구하면, 훼손되거나 와해될 어떠한 의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자가 가지고 있다고 기꺼이 믿어야 한다. … 배우는 일에 있어 훌륭한 자는 자발적으로 불신을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Schön, 1987: 94).


   상구를 통하여 새로운 품위를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려면, 먼저 스승을 믿어야만 한다. 스승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그의 안내나 지도에 따라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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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를 상구해 나갈 도리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신뢰가 맹목적인 것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상구자는 이를 명심해야 한다. 상구는 상대방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묵종(黙從)하는 활동이 결코 아니다. 위에서 소개한 쇤의 글에서도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상구자는 일단은 스승을 신뢰하고 그에게 가르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상구의 과정에서, 또는 한 단계의 상구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스승이 하화한 바가 옳은 것이었는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에도 소홀하면 안 된다.

   상구자는 스승의 발언과 지시가 당장에는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이는 스승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품위가 낮은 데서 초래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상구자는 하화자인 스승의 안내를 믿고 따르면서 상구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신뢰는 자신과 스승 사이에 교육이 아니라 인독트리네이션이나 조건화, 주입 등을 가져온다는 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스승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상구자는 하화자인 스승을 신뢰하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두고 합당한 비판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상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지시나 발언이 납득되지 않을 때, 또는 의심스럽거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때, 상구자는 망설이지 말고 이를 스승에게 토로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스승도 자신의 하화 활동을 상구자에게 맞추어 적절히 재조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을 신뢰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것을 함께 요청하는 패러독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상구의 세계에서는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상구 활동들이다. 상구는 선진을 대상으로 한 청교를 통하여 그를 스승으로 맞아들인 뒤, 그 스승을 신뢰하면서도 비판한다고 하는 패러독스적 활동을 통하여 제대로 수행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상구 활동은 존현(尊賢)이라는 상구의 원리에 맞도록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선진을 존중하고 그의 안내에 따르면서 동시에 적절히 비판을 수행한다는 존현의 활동들은 상구자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도 일종의 상구의 역량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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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습득될 수는 없으며 오랜 시간의 수련과 단련을 거쳐야만 습득될 수 있다.


   6) 자기 문제의 발견

   

   상구 활동은 상구자의 현재 품위 이상의 품위를 소재로 삼아 전개된다. 그것은 상구자의 현재 품위와 하화자인 스승의 현재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중간 품위들, 더 나아가서는 선진인 스승의 품위 이상의 것들도 소재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 현실적으로 상구자에게 최적의 상구 활동을 보장하는 품위는 그의 현재 품위와 지나치게 어긋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치하지도 않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품위다. 그러한 품위야말로 상구자에게는 알 듯 모를 듯한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다가설 수 있으며, 상구자의 흥미와 관심을 사로잡아 그의 도전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품위로서의 지식을 구분하는 방식은 단일하지가 않고 다양하다. 그때그때 우리의 관심에 부합하도록 지식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일단 교육의 관점에서 상구자의 수준과 관련하여 지식을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Egan, 1979: 99, Whitehead, 1929: 1-5). 첫째는 상구자의 현재 품위보다 낮은 품위에 해당하는 지식으로서 지나치게 쉽고 단순하여 상구자의 상구 활동을 유발하지 못하는 ‘장난 같은 소일거리에 불과한 지식’(entertaining knowledge)이다. 둘째는 상구자의 현재 품위를 지나치게 넘어서는 것으로서, 장차 상구의 소재가 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상구자의 역량으로는 도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구를 유발하는 힘이 없는 ‘무기력한 지식’(inert knowledge)이다. 셋째는 상구자의 현재 품위와 적절히 불일치되는 상위 품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상구자의 흥미와 관심, 도전감 등을 불러일으켜 상구자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영양가 있는 지식’(aliment knowledge)이다. 이 가운데 세 번째 경우의 지식이 바로 상구자에게 최적의 상구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한 단계 높은 품위에 해당한다.

   물론 한 단계 높은 품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구자의 현재 품위와는 질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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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이다. 현재 품위를 논리적으로 확장하거나 양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는 한 단계 위의 품위로 나아갈 수가 없다. 천동설을 아무리 내용이 풍부하고 정교한 것이 되도록 발전시켜 나간다고 하더라도 지동설에 이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품위 사이에는 논리적인 간극이 존재하고 있어서 어떠한 연결 고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소개한 메논의 역설, 즉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배울 수 없다’는 역설이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논의 역설은 형식 논리에 너무 집착하는 역설일 뿐이다. 상구자의 현재 품위와 한 단계 상위 품위는 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지만, 이 두 품위 사이에는 우리가 흔히 ‘문제’라는 말로 부르는 일종의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의 현재 품위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서 우리의 품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또한 한 단계 위의 품위에서는 문제로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서 한 단계 상위 품위의 아래쪽에 존재한다. 이 점에서 문제란 현재 품위에서 벗어나 한 단계 상위 품위로 나아가도록 하는 도약판, 징검다리, 사다리, 또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듀이는 ‘흥미’(interest)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다. 흥미란 그 어원(語原)으로 보면 ‘사이’를 의미하는 inter와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esse라는 말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이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거리가 있는 두 가지 이질적인 것을 관련짓는 것을 뜻한다(Dewey, 1916: 134). 문제란 바로 현재 품위와 한 단계 상위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구자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힘을 지닌다. 이러한 흥미 있는 문제를 발견하여 이를 해소하는 가운데 상구자는 한 단계 상위 품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문제의 발견이라는 상구 활동은 순차(順次) 또는 상향적 점진화라는 상구의 내재적 원리에 충실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위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한 독자라면, 문제란 언제나 ‘누구의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우리의 현재 품위와 한 단계 위의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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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서 우리들의 품위가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은 이상 각자에게는 각자의 문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 단위의 수업이 끝나면 학습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이를 풀도록 요구한 뒤 그 결과를 측정함으로써 성적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경우 수업 종료 후에 제시되는 문제들은 사실상 모두의 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문제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문제를 받자마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답을 하는 학습자들에게 그것은 그의 현재 품위나 그 이하의 것을 묻는 것으로서 문제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를 써서 표현하자면, ‘장난 같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문제’일 뿐이다. 또한 아무리 애를 써도 답을 할 수 없는 학습자들에게도 그것은 그들의 현재 품위를 상당히 상회(上廻)하는 것으로서 문제가 될 수 없다. 이런 문제 역시 상구 활동을 유발하는 힘이 없는 ‘무기력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받고 도전감과 흥미를 느끼면서 이를 해결하는 가운데 새로운 품위에 도달하는 학습자들에게만 그것은 진정한 문제, 즉 ‘영양가 있는 문제’일 수 있다.

 

   그 자체로 문제나 발견인 것은 없다. 누군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조바심을 내도록 만들어야만 그것은 문제일 수 있다. … 체스 경기에서 생겨난 어떠한 문제는 침팬지나 바보에게는 아무 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가 되지 못한다. 한편 위대한 체스의 명인도 그 해답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로 본다거나 이에서 혼란을 느낀다거나 하지 못한다. 단지 그의 능력이 그 문제를 다루는 데에 적절한 사람만이 그것에 강하게 사로잡힐 뿐이다(Polanyi, 1958: 122).


   상구자가 자신에게 적절한 문제를 발견하였다면, 이미 상구 활동 가운데 절반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문제의 발견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다. 상구자는 선진인 스승의 안내에 따르면서 자신에게 도전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적절한 수준의 문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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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안내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문제를 발견하는 주체는 상구자다. 그는 자신의 현재 품위를 점유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어떠한 문제가 그의 흥미를 유발하는지를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또한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구의 주체인 것이다.

   간혹 스승이 제자인 상구자의 품위를 진단한 뒤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제자에게 적절한 문제를 찾아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자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하화를 받는다는 것은 상구자에게는 분명 축복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한 가지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하화자가 언제나 제자에게 적절한 문제를 찾아준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이다. 하화자인 스승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설사 스승인 하화자가 제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상구 활동을 유발하지도 못한다고 하면, 상구자는 지체 없이 이러한 사정을 스승에게 보고함으로써 적절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스승이 문제를 제공해 주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문제의 적절성을 판단해야 하는 당사자는 여전히 상구자 자신이며, 최종적인 책임도 자신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7) 해답의 주체적 추구


   문제를 발견한 상구자는 문제의 성격을 자신에게 분명히 한 뒤에는 이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각종의 자료들과 실마리, 그리고 단서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문제 해결에 긴요한 자료와 단서들을 찾는 능력도 상구자가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상구의 역량이다. 아무렇게나 해서는 제대로 된 자료와 단서들을 찾을 수 없다. 상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또는 스승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가운데 자료와 단서들을 찾고 수집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승의 도움을 받는 경우에도 스승에게 직접 자료를 찾아달라고 매달리거나 스승이 직접 자료를 제공해 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구자는 스승에게 적절한 자료와 정보, 단서 등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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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잡아 주기를 바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자료와 단서들을 찾는 방법은 상구자가 익혀야 하는 중요한 상구의 역량이며, 상구의 역량을 확충하는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상구자 자신의 소임인 것이다.

   자료와 단서, 정보 등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이를 통하여 문제의 해결에 임하려면, 상구자는 필요한 만큼의 독서, 사색, 실험, 관찰, 견학 등 다양한 활동들을 수행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아무렇게나 이들 활동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하며, 그때그때 중요한 사항들을 기록하여 정리하거나 어느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들도 사라지지 않도록 적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료나 단서를 파악하는 중간 중간 자신에게 이해된 바를 서로 관련지어 사고해 봄으로써 해결책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상구자는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을 전개하면서 그때그때 자신의 진전(進展) 과정을 스승에게 보고함으로써 자문을 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자료나 단서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문제의 해결 방향이 올바른 것인지를 스승과 함께 검토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 이 단계의 활동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상구자는 예기치 않았던 난관에 직면할 수도 있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또한 이 단계의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생략할 수도 없고 대충 건너 뛸 수도 없는 필수불가결한 상구의 국면에 해당하며, 스승이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상구 활동들이다. 여기서 상구자는 다시금 상구에 임하는 자세와 각오를 새롭게 하고 문제 해결에 나설 필요가 있다. 문제 발견에서 시작하여 해답을 추구하는 일련의 상구 활동들은 자조(自助), 또는 체험적 실천이라는 상구의 내재적 원리에 따르면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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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암기와 모방의 경계


   문제에 대한 해답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보면, 상구자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추정되는 발언들을 언어적으로 모방하고 이를 재생하는 길을 택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자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결론이나 해답에 해당하는 것이 특정한 저작에 실려 있거나, 누군가의 입을 통하여 발설되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글이나 발언이 왜 문제에 대한 답이 되는지,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구자는 그 이해되지 않는 글이나 발언을 흉내 내거나 모방함으로써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드문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어느 대가(大家)의 언어를 흉내 내거나,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특정한 행동을 모방하는 경우는 초등학교의 어린 학습자들로부터 특정 수도계에 종사하는 학자나 예술가 등의 상구 활동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목격된다.

   물론 특정한 언어적 표현이나 행동 등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품위가 밖으로 표출되는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해당 품위가 내면에 존재하는 가운데 표출되는 언어나 행동은 그 품위를 누군가가 지니고 있다고 추정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징후들이다. 그러나 해당 품위는 부재한 가운데 그 품위가 밖으로 표출되는 양상만을 모방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어느 품위를 통하여 해소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고 할 때, 그 문제를 조금만 달리 표현하거나 원래 문제와 동일한 수준의 문제로 이를 바꾸기만 해도 모방된 언어나 행동은 이에 적용되거나 응용되지 못한 채 곧바로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특정한 언어나 행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당 품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상구 활동을 통해서도 곧잘 체험되고 있다. 물론 이는 상구 활동이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각주 54: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교육의 장면에서 어떠한 경우에는 암기나 모방도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이를 상구 활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문에 접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암기나 모방과 같은 특정한 활동을 놓고, 그것이 상구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그것이 상구 활동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상구의 내재적인 원리들에 따르는 상구 활동의 일환으로 활용되고 있느냐를 따져보아야 한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아닌 게 아니라, 암기나 모방은 교육적인 활동으로서 상구 활동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암기나 모방은 품위의 진정한 점유화라는 상구의 취지에 맞도록 활용되고 있는 것이며,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의 단순 암기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종국에는 그 의미가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게 된다. 만약 상구 활동이 그것의 본래적인 모습대로 진행되도록 하는 데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만 있다면, 암기나 모방만이 아니라, 그 어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상구 활동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암기나 모방이 품위의 점유화라는 상구 활동을 대치하는 가운데 품위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를 저해함으로써 상구 활동을 가로막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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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구자는 이상과 같은 점을 명심하고 품위의 점유화라는 과제를 품위의 외적 표현체인 언어나 행동의 모방으로 대치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품위의 모방은 세속계적인 적응이나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방략(方略)은 될 수 있어도 상구의 세계에서는 금기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코 상구 활동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고 언어적인 암기나 행동의 모방을 상구 활동으로 착각할 경우, 상구 활동을 일종의 고역(苦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할 우려마저 있다. 외부의 언어나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암기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하면 할수록 지루하고 힘든 일이 되고 만다. 이때 이것을 암기나 모방으로 보지 않고 상구라고 착각할 경우, 상구는 고역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누명을 덮어쓰게 된다. ‘학교에 다니면 다닐수록 학교에 가기가 싫다’거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가 염증난다’는 우리의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고백은 어쩌면 상구의 이름으로 상구 활동이 아닌 암기와 모방의 활동을 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암기와 모방을 경계하는 활동들 역시 자조나 체험적 실천이라는 상구의 내재적 원리에 맞도록 수행되는 상구 활동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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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현재 품위의 해체와 새로운 품위의 구성


   현재 품위를 논리적으로 확장하거나 현재 품위에 속할 수 있는 요소들을 누적시켜 나가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품위로 나아갈 수 없다. 현재 품위와, 상구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는 새로운 품위 사이에는 논리적인 간극이 존재한다. 논리적인 간극이 존재한다는 말은 현재의 품위와 새로운 품위는 질적으로 상이한 체계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상구자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활동을 통하여 중요한 것으로 포착된 사실과 정보, 지식, 활동들을 중심으로 전혀 새로운 품위를 구성해 나가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상구 활동을 통하여 수용하게 된 새로운 것들을 요소로 하는 하나의 구조로서의 상위 품위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동시에 그는 이전부터 갖고 있던 종전의 품위를 그릇된 것으로 해체시켜 새로운 품위의 구성 작업에 그것이 부당하게 관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낡은 관념이 새로운 착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갖고 있던 종전의 품위들이 완전히 무용(無用)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전 품위는 이후 품위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발판이자 징검다리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상구자는 이전 품위를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서도 새로운 품위 구성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은 선별하여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천동설에 해당하는 품위를 논리적으로 확장해서는 지동설이라는 품위에 도달할 수 없다. ‘태양이 운동하고 지구는 고정되어 있다’는 천동설의 기본적인 가정을 유지하면서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 운동한다’는 지동설의 관념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천동설이 지동설이라는 품위 구성에 부당하게 개입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천동설 가운데서도 ‘행성의 운동’이라는 개념은 지동설에 도입되어 새롭게 재해석됨으로써 지동설의 구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회전 운동을 하는가를 놓고 천동설과 지동설은 화해할 수 없는 상충된 입장을 견지하지만, 행성이 회전 운동한다는 것만은 양자 모두 인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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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전의 품위를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서도 상구 활동을 통하여 새롭게 습득한 사실, 정보, 지식, 다양한 활동의 역량들을 확충하거나 관련짓는 데에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은 살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전 품위의 요소들 가운데 일부와 새롭게 습득한 것들을 서로 관련지으면서 이전 품위를 해체함과 동시에 새로운 품위를 구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전 품위의 요소들은 새롭게 구성된 품위 체계 내에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변모하기 마련이다. 천동설에서 행성의 운동은 자연적인 섭리에 의하여 부여된 이상적인 원 운동으로 가정되지만, 지동설에서 그것은 행성과 행성간의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하여 성립하는 가변적인 타원 운동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품위의 구성이라는 것은 낱낱의 사실이나 정보, 또는 단편적인 지식이나 행동들을 산술적으로 합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 요소들 간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키면서 질적으로 상이한 품위의 체계를 구조화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전 품위의 발전적인 해체와 새로운 품위의 구성 작업은 기계적인 절차나 논리적인 형식을 따르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요소와 요소들 간의 관계를 구상하는 과정에는 상상과 직관, 추측 등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한다(Polanyi, 1958, 1966; Polya, 1957). 그런데 이들 상상, 직관, 추측 등은 사전에 예상할 수도 없고, 그것의 수행을 규제하는 형식화된 법칙을 만들 수도 없다. 이 점에서 해체와 구성의 과정은 형식 논리적인 법칙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새로운 품위의 구성 과정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이거나 우연적인 시행착오의 산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상상과 직관, 추측 등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아니며, 여기에는 오랜 수련을 통하여 습득된 창조적인 역량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 역량은 다시 형식 논리로 구체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생리와 논리에 따르는 것으로서 형식적인 논리와는 다른 차원의 합리성을 준수하는 듯하다.

   요소와 요소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오랜 사색과 고민을 전개하고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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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직관 그리고 추측 등을 수행하다가 보면,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요소들 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통해서 출현하는 새로운 의미를 통찰하게 된다. ‘아하’(Aha!), ‘유레카’(Eureka!) 등과 같은 탄성이 표출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상구자는 새로운 구조로서의 품위에 대한 전체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는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 이전에 상구자가 수행해 온 오랜 기간의 상구 활동에 힘입은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요소들 간에 성립하는 전체 게슈탈트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상구자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품위의 소유자로 거듭나게 된다.


   10) 새로운 품위의 고귀함에 대한 주체적 확증


   상구는 현재 품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품위를 겨냥하여 전개되는 활동이다. 현재 품위를 수평적으로 확장하여 이러저러한 문제나 현상에 그것을 응용해 나가는 것이 상구라기보다는 현재의 품위를 발판으로 삼으면서도 상위의 품위를 향해 도약함으로서 종전에는 볼 수도 없었고 체험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세계상에 이르려는 수직 운동이 상구인 것이다. 그러나 상구 활동을 전개하기 이전에는 주체가 자신이 상구하고자 하는 품위가 그의 현재 품위보다 우월한 것임을 미리 확인할 길이 없다. 그는 수집 가능한 자료와 단서, 그리고 실마리 등에 근거하여 그것이 우월한 품위라는 가정 하에 상구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가정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이제 한 단계의 상구가 종료되어 새로운 품위가 습득되는 시점에서 상구자는 자신이 획득한 품위가 상구를 전개하기 이전의 품위보다 우월한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확증해 보아야만 한다.

   흔히 품위의 우월함을 주체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철학의 인식론 분야에서 제안하고 있는 진리의 검증 방식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상구를 통한 주체의 변화를 상정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 주체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이상 이론과 그 이론이 설명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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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간의 일치 여부를 따져 진위를 판정하자는 취지의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은 각자가 자신의 현재 품위에 부합하는 현상만을 관찰하기 마련이므로 어느 품위가 우월한 것인지를 밝혀주지 못한다. 가령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모순되는 품위를 놓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이들 품위가 설명하려는 천체의 현상과 일치하는지 또는 대응하는지를 따져 보기 위하여 실제 관찰을 수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응설의 기대와는 달리 이 경우 천동설과 지동설을 자신의 품위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천체 현상을 각자의 품위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의 품위를 지지하는 것으로 지각하게 된다. 아래의 인용문이 보여주고 있듯이 천동설의 지자자는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천동설에 맞게 해석할 것이고, 지동설의 지지자 역시 이를 지동설에 일치하는 것으로 지각할 것이다.


   케플러가 언덕 위에서 동이 트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의 옆에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같이 있다고 하자. 케플러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는 것은 지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톨레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티코는 그 광경이 지구는 고정되어 있으며, 다른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Hanson, 1961: 5).


   하나의 이론 체계가 지니고 있을 내적인 일관성과 무모순성을 따져서 해당 이론의 진위를 판정하자는 정합설(coherence theory)도 모든 품위가 그 나름으로는 논리적인 일관성과 체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어느 품위가 우월한 것인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컵의 형태가 변하면 그 속의 주스 양도 변하기 마련이라고 사고하는 전조작기 아동의 인지구조도 그 자체로는 어떠한 내적인 모순도 없이 대단히 합리적이다. 전조작기 아동에게 양이 아니라 수나 무게 등의 보존과 관련된 문제를 주는 경우에 그는 일관되게 형태의 변화와 함께 수나 무게 등도 변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반면 형태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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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된다고 사고하는 구체적 조작기 아동의 인지구조도 내적인 정합성을 지닌다. 보존과 관련된 문제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제시해도 구체적 조작기 아동은 일관성 있게 수나 무게, 양 등의 보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어느 것이 논리적인 비일관성이나 모순을 지니고 있는지를 따져서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판정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세속적인 의사 결정 과정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다수에 의한 결정이라는 것이 수도계의 우월한 품위를 가려내는 절차일 수도 없다. 수도계의 고귀한 품위를 소유한 자는 언제나 소수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온 힘을 다하여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군중은 비진리’이며, 군중들에게 진리의 문제를 맡기면 고귀한 것이 군중들의 평범한 의견으로 격하되어 하향적으로 평준화되고 만다(Kierkegaard, 1998: 106-112).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수도계 품위의 우월성을 다수결로 정하려고 들 경우에 최고 최신의 품위는 언제나 기존의 낡은 품위에 밀릴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수도계의 품위가 얼마나 실제적인 유용성을 지니는지를 중심으로 그 우월성을 평가하자는 실용적 발상도 성립하기가 어렵다. 수도계의 품위를 세속계적인 가치 기준에 의하여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실제적인 유용성이나 쓸모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지식이 참되고 진리로운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올바르고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유용성이나 쓸모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품위의 실제적인 유용성을 따지기 이전에 그 품위가 우월한 것인지를 확인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 과제로 남는 셈이다. 

   품위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경로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닌 상구 활동이다. 상구를 통하여 주체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변모된다. 그는 새롭게 습득한 품위를 근거로 하여 이전과는 다르게 세상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행동한다. 이 경우에 주체는 이전 품위와 현재 품위를 대비하는 가운데 어느 것이 세계의 진상을 좀 더 여실하게 보여주는지를 판단할 위치에 있게 된다. 어두움 속에서만 머무르는 경우에는 그것의 밝기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두운 상태에서 밝은 상태로 나아가는 가운데 주체는 어두움과 밝음의 대비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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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밝기를 비교할 수 있다. 우월한 품위의 식별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새로운 품위가 보여주는 세계상이 이전의 것보다 우월하다는 주체적인 판단, 이전의 품위에서는 해소되지 않던 문제가 현재 품위에서는 더 이상 문제로 성립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주체는 이전의 품위와 현재의 품위 가운데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더 우월한 것인지를 확증할 수가 있다. 진리의 식별이 주체의 변화 이전과 이후의 비교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 활동을 반성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지적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합하는 개념 체계들의 우열을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비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Toulmin, 1972: 225). … 이전에 타당한 것으로 합의되고 그에 상응하는 권위를 인정받던 것이 이제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바뀌게 된다. 무엇이 더 나은 개념 체계인지는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개인이 판단할 문제다(241-242). … 합리성이란 상대적 비교에 의하여 식별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영원히 합리적인 것은 없다. … 존재하는 것은 지금 현재로서는 좀 더 나은 것일 뿐이다(371).


   프래그머티스트들은 다양한 어휘와 문화들이 서로 경합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좀 더 새롭고 개선된 발화(發話)와 행위의 방식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즉, 사전에 알고 있는 기준을 참조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전의 것들보다 분명히 좀 더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한 발화와 행위의 방식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Rorty, 1982: ⅹⅹⅹⅴⅱ ).

 

   우리는 다소간 문제가 있다고 느끼던 상태에서 그것보다는 좀 더 만족스러운 상태로 옮겨 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떠한 지식을 진리롭다고 판결하게 되는 경로다(Polanyi, 1958: 26).


   주체의 변화 과정 속에서 상대적 비교를 통하여 좀 더 진리롭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가는 현상은 특정 수도계의 대가들만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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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이는 우리의 상구 체험 속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특정한 품위를 공부하는 가운데 몇 년 전에 작성한 자신의 보고서나 기록물을 읽어 보면서 내가 과거에는 이러한 식으로 유치하고 어리석게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하고 새삼 놀라는 경우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고 선하며 아름답다고 믿던 것이 훗날 우리의 새로운 행동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낯 뜨겁고 부적절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상구를 통하여 이전의 품위와 새로운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감(差別感)과 차등성(差等性)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상구자는 선진인 하화자가 안내한 품위가 더 우월한 것임을 자발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상구의 결과로 도달하게 된 품위가 상구 이전의 품위보다 고귀한 것임을 알고 이에 심열성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구 이전의 품위와 이후의 품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상구 활동은 자증(自證)이라는 상구의 원리에 맞도록 수행된다. 자증은 위대한 것을 위대한 것으로 확인하고 인정하려면, 그 위대한 것을 향해 상구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그 위대성을 직접 체험하는 경우에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11) 습득된 품위의 공고화


   새로운 품위를 습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상구자가 자신의 새로운 품위가 갖는 의의와 적용의 범위,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귀결 등을 당장 남김없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품위에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그 품위가 갖는 진리로움과 선함, 아름다움 등을 전반적으로 실감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학문사를 보더라도 새로운 이론은 그것을 주창한 자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며, 그 외연이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품위를 습득한 상구자는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태에 품위를 적용하면서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깨닫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피아제가 인간의 지적 발달과 관련하여 새롭게 습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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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구조에 맞도록 현상들을 폭넓게 동화(同化, assimilation)함으로써 인지구조를 견고히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도 습득된 품위의 공고화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Piaget, 1936, 1971). 이처럼 상구를 통하여 습득한 품위를 다양한 사태에 적용하는 가운데 상구자는 새로운 품위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며, 그것에 대하여 한결 더 강한 열정과 소신을 지니게 된다.

   습득된 품위를 공고화하는 활동은, 언뜻 보면, 자신의 새로운 품위에만 집착하고 안주하려는 독단과 아집을 불러올 우려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상구의 세계에서는 금기시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상구 활동 가운데 하나라 보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구 활동을 수행하면서 상구의 고유한 보람과 가치를 맛 본 사람이라면, 그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습득된 품위의 공고화 활동은 단기적으로는 특정 품위의 보강이라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장기적으로는 다양한 사태에 해당 품위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품위로는 해소되지 않는 변칙 현상(anomaly)이나 문제 사태에 상구자가 직면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Kuhn, 1970; Schwebel & Raph, 1973). 이로 인하여 주체는 자신의 인식과 체험의 구조를 새롭게 변경하는 조절(調節, accommodation)에 착수하거나, 품위의 전면적인 재구성에 임하게 된다(Piaget, 1936, 1970, 1971). 결국 습득된 품위의 공고화는 상구자를 다시금 상구의 여정에 착수하도록 이끄는 문제의 발견으로 이어져 새로운 품위를 겨냥한 상구 활동이 재촉발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12) 상구의 재출범


   어떠한 품위도 완전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기 마련이며, 그것 이상의 품위로 나아가기 위한 잠정적인 발판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상구자는 새로운 품위를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기 위하여 상구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따라서 상구자가 자신의 새로운 품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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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갖고 이를 견지하려는 자세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상구자는 다시 자신의 품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독단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는 모든 품위의 불완전함과 새로운 품위로의 성장 가능성을 전제하는 상구의 세계에서는 금기시해야 할 바다.

   더욱이 상구자가 습득한 새로운 품위는 후진인 자신과 선진인 하화자의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여전히 선진의 하화를 받아가면서 계속 상구할 여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구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로운 품위를 찾아 나서는 상구의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상구의 애로가 컸던 만큼 그 과정에서 상구자는 상구의 고유한 보람과 가치를 체험할 수가 있었다.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그 상구의 보람과 가치를 계속 맛보기 위해서도 상구자는 끝없는 상구의 여정에 다시 착수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상구의 가치와 보람을 맛 본 자에게 상구의 중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각별했던 삶의 의미를 잃게 되는 크나큰 상실일 뿐이다.


   2. 하화: 하강과 변신의 운동


   상구가 그러하듯이 하화도 다양한 활동들의 복합적 총체다. 하화가 어떠한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그려 보여주는 교육학적 탐구는 여전히 부재 상태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앞서간 선인들이 남겨 놓은 문헌들이나 각종 수도계 종사자들이 보고하고 있는 문서들에는 그에 대한 간접적인 단서들이나 부분적인 묘사들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장차 이를 분석하면서 하화 활동들을 하나하나 탐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하화 활동에 대한 좀 더 충실한 묘사는 우리 각자의 하화 활동을 수준 높은 것으로 개선해 나가면서 이를 반성적으로 사고하여 기술함으로써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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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나름대로 하화 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그것이 우리의 교육적인 삶이나 체험과는 무관하게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소개되는 하화 활동들은 교육본위론을 참조하는 가운데 저자인 나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하화 활동들을 반성하면서 포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독자들의 비판과 보완을 필요로 한다.


   1) 품위의 고립에 대한 경계


   자신이 상구 활동을 통하여 아무리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최고 품위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자족(自足)한다거나, 아니면 또 다른 품위로 나아가는 상구 활동에만 몰입한다면, 그는 자신의 뛰어남을 개인적으로 향유하거나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경우 그는 자신이 애써 개척한 그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품위가 그의 생물적인 소멸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자아와도 같은 고귀한 품위를 세상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답답한 현실과도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새로운 것이면 새로운 것일수록 품위는 각광을 받기보다는 오해를 받고 경시되거나 무시되며 곡해되기 마련이다. 그의 새로운 품위를 제대로 평가해 줄 수 있는 타자가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는 참기 어려운 사태로 다가선다. 물론 주체는 이러한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위대성 실현에만 매달릴 수도 있고, 이로 인하여 상구 활동에만 몰입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세상의 몰이해로 인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보람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선택과 결단의 순간이 존재한다. 세상의 몰이해를 감내하고 상구에만 전념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개척한 품위를 그러한 몰이해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활동에 착수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직면하는 것이다.

   전자를 택하는 것도 자연스러우며, 후자를 택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럽다. 각각은 하나의 가치 판단이고 선택인 만큼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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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자를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것과는 다른 길에 그가 접어들었으며, 새로운 도전적 과제가 그의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화라는 새로운 세계다. 하화는 결코 위대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품위보다 낮은 품위의 사람에게 하화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사람과 대면할 경우 강한 하화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폴라니(Michael Polanyi)는 자신과 다른 품위를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새로운 발견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경우에 그를 자신의 품위로 전향시키려는 강한 욕구가 우리에게 생겨남을 지적하고, 이를 ‘설득의 열정’(persuasive passion)이라 명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용어로 말하면, 바로 하화의 열정에 해당한다. 다음의 글은 하화의 열정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가를 보여준다.


   설득의 열정은 발견이 개인적인 전유물로 남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발견한 바를 주장하고, 상당한 정도의 압력을 가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설득의 열정은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을 모든 사람들이 수용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 설득의 열정은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논리적 간극에 직면함으로써 생겨난다. 발견자가 새로운 실재에 대한 비전에 자기 자신을 헌신적으로 투사하고 있는 정도만큼, 그는 아직도 옛날의 자신처럼 사고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떨어뜨려 놓게 된다. 그의 설득의 열정은 … 모든 사람들을 자신처럼 세상을 바라보도록 전향시킴으로써 이러한 간극을 메우도록 박차를 가한다(Polanyi, 1958: 150).


   누구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정과 이를 타자들에게도 납득시키려는 설득의 열정을 지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모두는 상구와 하화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상구와 하화를 비롯한 교육 활동들은 이러한 우리의 보편적인 열정에 힘입어 촉발된다. 이 점에서 교육은 외재적인 보상이나 가치가 아닌 우리 속에 내재하는 교육에의 열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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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입어 출현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할 필요가 있다.


   2) 타자의 성장 가능성 신뢰하기


   자신의 품위를 고립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하화의 길을 택하기로 결단한 주체는 본격적으로 하화에 착수하기 이전에 한 가지 점을 더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그의 품위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타자들이 과연 그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품위를 제대로 습득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조심스러운 사색이다. 자신의 품위를 소재로 삼아 타자들에게 하화를 수행하기로 결단하였다고 하더라도, 타자들이 그러한 품위에 도달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회의적이라면, 하화는 실행되기 어렵다. 또한 자신의 하화에 힘입어 상구를 수행할 의지나 역량을 타자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의 하화에 대한 결단은 실행으로 옮겨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품위에 도달하였다는 겸허함 속에서 타자들의 내면에도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으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다는 믿음을 구축해야 한다. 타자를 이전의 자신과 같은 존재로, 또는 과거의 자기 자신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한 자세와 믿음을 통하여 그는 타자에 대한 교육적인 애정을 갖고 그를 조력하는 하화의 행위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리처드 바크(Richard Bach)가 쓴 소설 『갈매기의 꿈』에는 하화자가 지녀야 하는 자세와 믿음이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날이 감에 따라 조나단은 자기가 떠나온 지상의 일을 이따금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만약 내가 여기서 배운 것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저쪽에서 알고 있었다면, 저쪽 생활은 얼마나 풍부했었겠는가! 저쪽에도 자기의 한계를 깨뜨리려고 고투하고 있는 갈매기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일을 먹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나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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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투하고 있는 그런 갈매기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갈매기 떼 앞에서 새로운 진실을 피력함으로 말미암아 나처럼 추방당한 갈매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배우면 배울수록 조나단은 더욱더 지상의 갈매기 떼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는 갈매기에게 이미 자신이 발견한 진실의 몇 분의 일이라도 나누어주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사랑을 증명하는 그 나름의 방식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Bach, 1970, 김진욱, 정홍신 역, 1984: 61-62).


   하화자가 지니는 타자에 대한 애정은 독특한 것이다. 의사 역시도 자신을 찾아온 환자, 즉 타자에 대한 애정을 지니지만, 그것은 자신의 치료를 통하여 타자가 정상적인 생물적 존재로 복귀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애정이다. 성직자가 타자에 대해 지니는 애정은 누구나 신앙을 통하여 성스러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의 애정이다.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지니는 애정은 자신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자기 분신에 대한 사랑이다. 하화자가 상대방에 대하여 지니는 애정은 자신의 하화를 통하여 그가 성장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공유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품위를 개척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생겨나는 교육적인 사랑일 것이다. 김춘수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내가 그것에 대하여 상구하였던 것처럼, 누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다오. 그렇게 나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열의를 지니고 있다면, 나도 그에게로 가서 하화하여 그것이 몸짓이 아니라 꽃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싶다’는 하화 욕구와 열정이 우리 속에 분명 내재해 있다. 하화의 욕구와 열정에 힘입어 하화 활동이 출범하는 하화의 초기 국면에는 교육의 수레바퀴 모형에서 설명한 이타(利他), 또는 동굴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우리가 끌어낸 이타적 자아복제욕이라는 하화의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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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자의 탐색


   하화에 착수하기로 결단한 선진은 적절한 후진을 확보하여 제자로 삼은 뒤, 그의 상구를 촉구하고 안내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원칙상 누구나 상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자의 확보는 쉬운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낮은 품위를 소유하고 있는 후진들 모두가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며, 실제 제자 확보는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그 조건을 모두 거론하기는 어렵다. 제자 선택은 구체적인 상황적 조건이나 하화자의 개인적인 특성 등에 의하여 그때그때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고려 사항은 존재할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자신의 현재 품위보다 지나치게 낮은 품위를 지닌 후진보다는 적절한 수준의 품위를 지니고 있는 후진을 선택할 수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자신의 하화에 힘입어 조만간 자신의 품위를 공유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전자를 대상으로 하화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의 하화를 필요로 하는 후진을 그의 품위가 지나치게 낮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것은 하화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후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만을 대상으로 하화하는 것도 제대로 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상적인 경우는 적절한 수준의 후진을 제자로 확보한 가운데 낮은 품위의 후진들도 제자 무리에 포함시키는 조치일 것이다.

   상대방의 품위 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제자를 선택하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하화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현재 품위에 안주하고 상위 품위에 대한 개방성을 지니지 못한 자보다는 자신의 품위를 넘어서는 상위 품위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의와 자세를 지닌 자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신의 품위와 인접한 품위의 후진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후진의 상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높지 않다면, 그를 제자로 삼기는 대단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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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 경우에는 품위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상구의 열정과 올바른 상구자의 자세를 지니고 있는 후진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품위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구 활동에 나태한 후진보다는 그의 품위가 아무리 낮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상구의 열정과 자세를 지닌 후진이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다.

   ‘후진의 품위 수준에 대한 고려’와 ‘후진의 상구 열정과 자세에 대한 고려’ 가운데 어느 것이 제자 선택에 있어 좀 더 중요한 기준인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하화자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화자는 자신이 하화 활동을 통하여 제대로 된 하화의 보람을 체험하려면, 누구를 제자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한지를 염두에 두면서 제자를 탐색하고 선택할 것은 분명하다. 이는 특히 오랜 기간 하화를 수행하면서 하화의 내재적 가치를 체험한 하화자의 경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하나의 짐작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하화자는 제자의 품위 수준보다는 상구하려는 자세나 열의를 일차적으로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


   4) 청학의 수행


   제자가 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는 후진에게 자신의 품위가 지니는 우월성을 암시하거나 호소하여 자신에게 청교(請敎)하도록 유도하거나, 아니면 나의 제자가 되어 상구를 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권유하는 방식, 즉 청학(請學)에 나섬으로써 선진은 자신의 제자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품위의 우월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낮은 품위의 후진에게 선진의 높은 품위는 전혀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진은 자신에게 너무도 분명하고 타당하게 보이는 그의 품위가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는 선진의 품위보다 우월한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후진의 눈으로 보면, 자신의 어리석은 품위가 꽃으로 보이고, 선진의 우월한 품위가 의미 없는 몸짓으로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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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로 인하여 후진이 선진의 청학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이를 웃어넘기거나 조롱하고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네가 무슨 권리로, 무엇이 잘 났기에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라는 반응은 드문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너무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선진은 후진의 이러한 반발을 무마해 나가기 위하여 자신의 품위가 우월하다는 것을 후진이 직감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발언과 행동, 간접적인 단서와 실마리 등을 제공하면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후진이 확신하고 있는 바가 사실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능한 만큼 보여주거나, 후진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나 단서를 암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선진은 자신의 제자가 될 만한 후진을 실제로 자신의 제자로 삼기 위하여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교육적인 삼고초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후진이 선진을 대상으로 청교에 나서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청학이라는 것은 하화자에게 대단히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교육을 통하여 우리의 자아가 위대한 것으로 성장한다고 할 때, 실제 성장이라는 열매를 맛보는 것은 하화자가 아니라 상구자다. 자신의 성장을 유보해 두고 타자의 성장을 조력하는 하화의 이러한 기이한 특성은 ‘다른 사람이 천국(天國)에 도달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스스로는 자신의 천국을 포기하는 일’(Maslow, 1968: 186)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어떻게 본다고 하더라도, 아쉬운 것은 하화자가 아니라 오히려 상구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화자는 선진을 몰라보고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후진에게 제발 배워보라고 간청하고 매달려야 한다. 성장의 당사자는 상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화자가 너를 성장시켜 줄 터이니 나에게 배워보라고 애원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장면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을 것이다.

   하화의 세계에서 하화자가 어느 정도 성숙하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점은 그 동안의 하화 활동을 통하여 체험한 하화의 가치와 보람을 계속 향유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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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와 동기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실제로 구현하고자 하면, 적절한 교육적 파트너로서 상구자가 필요하다. 상구자가 하화자의 도움에 힘입어 성장의 열매를 맛본다면, 하화자는 상구자의 충실한 상구에 힘입어 그가 추구하는 하화의 가치와 보람을 만끽하게 된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화자가 교육적인 삼고초려를 감내하면서까지 후진을 대상으로 청학에 나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5) 하화의 여건 조성


   자신의 청학을 받아들여 후진이 자신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도록 만들었다면, 하화자는 후진을 상대로 자신과 그 사이에는 그들이 함께 지켜 나가야 하는 일종의 교육적인 규칙이 있음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신과 후진의 교육 활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의미를 지닌다. 후진이 제대로 상구 활동을 수행하고, 선진이 그 맞은편에서 정상적으로 하화 활동을 수행하려면, 그들이 유념하면서 지켜야 하는 교육적인 규칙이 존재한다는 점을 두 당사자 모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인 규칙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포함될 수 있다.

   먼저 스승은 제자에게 그들이 수행하려는 교육적인 교섭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것으로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하나의 품위에서 다음의 품위로 나아가는 일은 도대체 단시간 내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품위는 단편적인 사실이나 정보, 능력 등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행위를 하는 데에 기반이 되는 전체적인 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승은 제자에게 새로운 품위를 상구하고 하화하는 데에는 필요한 만큼의 교육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로 스승인 자신의 지시나 안내가 미심쩍을 경우에도 이를 의심하기보다는 일단은 신뢰하면서 이에 따르는 자세가 필요함을 주지시킨다. 상구는 새로운 품위의 실체를 먼저 자신이 납득하고 난 뒤에 이를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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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무리 기이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신뢰하면서 상구하는 가운데 점차 납득해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다. 스승은 단기간 내에 상위의 품위에 이르려고 시도하는 약삭빠른 제자보다는 스승을 신뢰하면서 장기간 그의 안내에 따르는 우직한 제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야 한다.

   셋째로 스승인 자신에 대하여 교육적인 신뢰를 하되, 그것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적절한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함을 주지시킨다. 스승의 말이므로 무조건 따른다는 자세가 아니라 그것이 무슨 말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스승은 제자에게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고하고 의문을 가지며 질문을 하는 것이 바로 제자 몫의 상구 활동임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넷째로 자신의 품위를 숨기지 말고 스승에게 거의 완전할 정도로 투명하게 노출시켜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자신의 질환을 의사에게 숨기는 환자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이 깊어지거나, 심한 경우, 생물적인 죽음에 직면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 상태와 그것의 변화 및 진전 양상을 스승에게 숨기는 제자는 스승으로부터 적절한 하화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적인 교섭은 주고받는 상호 작용의 양상을 띠기 마련이며, 제자의 침묵과 묵종 속에서는 정상적인 하화와 상구가 이루어질 수 없음에 대하여 스승과 제자 모두 동의하고 이에 맞도록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자의 탐색과 청학, 하화의 여건 조성 등은 자신이 제공하려는 품위가 후진에게는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라는 점, 그러나 그것이 선진 자신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점을 선진이 확신하기에 가능하다. 그러한 확신이 없이는 후진을 찾아 제자를 삼는 것과 관련된 하화 활동들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상대에게는 미지의 새로운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 이를 상대에게 제공하려는 활동에 열정을 갖고 임할 수는 없다. 상대에게도 기지(旣知)의 것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냉소적인 반응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상대에게는 새로운 것이 자신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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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이라야 한다. 자신에게도 새로운 것을 상대에게 하화할 도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단계의 하화 활동들은 선진에게는 과거에 해당하는 기지의 것이 후진에게는 혁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교육의 수레바퀴 모형에서 언급된 바를 중심으로 말하면, 이 단계의 하화 활동들은 상구 활동의 혁신적인 성격과는 달리 보수(保守)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6) 제자의 품위 진단

   선진과 후진은 각자의 품위에 상응하는 세계를 인식하고 체험하며 행위를 하는 가운데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품위 차이는 질적인 차이로서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질적인 차이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교섭이 불가능하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사이의 완전한 소통과 교섭은 몇 단계의 교육을 수행하여 그들 사이의 품위 차이가 사라져야만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교섭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선진과 후진 사이의 교육 활동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생겨날 여지도 없게 된다.

   선진은 나면서부터 현재 품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상구를 비롯한 각종의 활동들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현재 품위까지 상승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승의 과정에서 선진은 후진이 현재 처해 있는 품위를 거쳐서 나아갔을 것이다. 후진의 입장에서는 선진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선진은 후진을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받아들이면서 후진의 상태를 떠올릴 수가 있다. 후진은 선진의 경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하고 싶어도 전혀 할 수가 없지만, 선진은 후진의 수준을 역지사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진과 후진이 교육적인 교섭을 진행하기 위하여 한 쪽이 다른 쪽으로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고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후진이 아니라 선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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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은 자신의 현재 품위를 타자와 공유하기 위하여 하화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장 자신의 품위를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보여주게 되면, 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제자는 스승에게 압도되어 정상적인 상구 활동을 진행해 나갈 수도 없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보라’는 식으로 스승이 자신의 현재 품위를 제시할 경우, 이를 도저히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제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스승의 하화 활동도 궁지에 몰리게 되며, 종국에는 그들의 교육적 관계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하여 하화자는 제자가 상구할 수 있을 만한 품위를 찾아서 단계적으로 이를 하화해 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하화자는 먼저 상구자의 현재 품위 수준을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진단(診斷)은 의학적 용어다. 그것은 환자가 앓고 있는 질환의 종류와 상태를 여러 가지 병의 증후(症候)를 통하여 의사가 추정해 나가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는 일반인들이 흉내를 내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으로서 의사가 오랜 수련을 통하여 습득한 전문적인 역량에 해당한다. 그런데 하화자도 이러한 성격의 진단 행위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는 제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성장의 정도를 제자의 말과 행동 등 여러 가지 단서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물리적인 단서들을 통하여 병의 원인을 찾는 의사의 진단 활동은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구자가 밖으로 보이는 외현적인 단서들을 통하여 상구자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품위 수준을 추정하는 하화자의 진단 활동도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가능한 인간적인 역량에 해당한다. [각주 55: 하화자의 진단 활동을 형식화된 평가 도구, 예를 들어 진단 평가 같은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진단 평가도 하화자가 동원할 수 있는 교육적인 진단의 한 가지 도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객관화된 검사 도구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품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탁월함의 경지인 품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검사 도구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품위의 알맹이가 아니라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것이 인간적인 역량인 이상, 의사가 오진(誤診)을 범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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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하화자의 진단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하화자의 진단은 하화의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제자의 현재 품위를 진단한 뒤에 하화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에서 내려와 제자의 현재 품위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제자의 입장과 눈높이에서 제자의 현재 품위와 자신의 현재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몇 단계에 걸친 중간 품위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하여 하화자는 그가 수행해야 할 하화 활동의 소재들과 그 소재들을 다루는 방식 등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잠정적인 하화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계획은 실제 하화의 과정에서 언제든 융통성 있게 변화해야 한다. 하화 활동은 사전에 그 전반적인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계하여 기계적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교육적인 상황 속에서 출현하는 예측 불허의 다양한 요인들에 대응하는 가운데 탄력적으로 운영되는 기예적(技藝的, artistic) 활동에 가깝다. [각주 56: 교육학의 전공 영역 가운데 ‘교수설계’(instructional design)라는 분야가 있다. 어떠한 내용이 되었든지 간에 이를 상대방에게 교수하기 위하여 따라야 하는 형식적 절차가 있고, 이에 맞도록 교수 활동을 사전에 체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론이고 이 세상 어느 하화자도 이러한 방식으로 하화 활동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교수설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사람 자신도 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교수 활동을 설계하여 가르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현존하는 교육학이 실제의 교육 현상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7) 하화적 변신과 열정의 연출


   몇 번을 이야기하지만, 품위가 다르다는 말은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의미다. 높은 품위에 있는 스승은 낮은 품위에 있는 제자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은 하화를 위하여 제자의 수준까지 하강해야만 한다. 스승이 하강한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제자의 그것으로 변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의 품위는 제자에게는 진리롭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의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자 열정의 원천이다. 물론 그 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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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하화에 힘입어 곧 한 단계 높은 품위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디딤돌로서의 문제들에 대한 것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스승에게는 제자의 품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제자가 상구를 통하여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도 어리석고 유치하며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제자의 품위나 문제는 스승에게 더 이상 관심과 흥미와 열정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제자에게 그러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제자의 품위와 문제가 열정의 대상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의 품위나 제자의 문제 그 자체는 결코 열정의 대상일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하화의 맥락 속에서 스승은 제자의 품위와 문제에 대하여 열정을 보이거나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Kierkegaard, 1962a, 1962b, 1967a). 열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냉담하게 기계적으로 다루면, 하화를 정상적으로 전개할 수 없다. 또한 열정이 없는 스승을 앞에 두고 제자가 정상적인 상구를 진행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스승이 하화의 소재가 되는 제자의 문제나 품위에 대하여 하화적 열정을 갖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하화적 열정의 표출은 선진이 존우(尊愚), 또는 과거 품위의 존중이라는 하화의 원리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제자의 수준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제자의 품위와 문제에 열정을 보이는 스승은 더 나아가 제자의 입장에서 현재 품위로부터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도상에 존재하고 있을 난관이나 이를 해소하기 위한 길 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도 제자와 같은 품위에 있는 한 사람의 상구자인 것처럼 완전히 변신하여 제자의 상구 활동을 조망하고 이를 안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스승은 마치 자신도 제자와 같은 품위에서 상구를 전개하는 상구자인 양, 제자의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이러저러한 해결책을 모색하며 시도해 보는 일을 제자와 함께 전개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제자에게 문제의 해결 과정을 시범보이는 일을 하는 셈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스승은 문제의 답을 언어로 설명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행해야 하는 활동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시범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하화적 변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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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은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마치 자신도 아동인 것처럼 말하며 생각하고 행동하여 아동을 이끄는 장면이나, 유아교사가 한 사람의 아동으로 탈바꿈하여 아동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의 말과 행동 등을 조율(調律)하면서 상호작용하는 장면 등을 통하여 우리는 이를 목격할 수 있다.

   하화적 변신의 활동에 힘입어 하화자는 이전에 자신이 수립한 하화의 계획 속에 들어 있던 중간 품위들, 즉 그의 현재 품위와 제자의 현재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품위들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얻게 된다. 하화자는 자신이 하화하고자 하는 중간 품위들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이다. 따라서 이를 하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화적 변신을 통하여 자신을 제자의 입장에 놓고 생각하게 됨에 따라 그 중간 품위들이 하화자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제자에게 비춰지거나 기이한 난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중요하다고 본 것이 제자에게는 그렇지 않으며, 용이하다고 본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만 하면 충분할 것으로 보았던 중간 품위들의 계열화가 마치 몇 개의 디딤돌이 빠져 있는 징검다리처럼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보폭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보조적인 품위들을 도입해야 할 수도 있다. 심할 경우에는 계열화된 품위들의 배열 순서를 변경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어서 안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품위들이 막상 하화의 장면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설명과 안내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산을 올라가면서 보는 경관(景觀)과 내려오면서 보는 경관은 같지가 않다. 산을 올라가는 활동과 내려오는 활동은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화자는 과거 자신이 품위의 사다리를 통하여 위로 올라가고자 수행했던 상구의 체험이 하화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충분한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하화적 변신을 통하여 제자의 눈으로 사태를 조망하고, 제자의 입장에서 상구가 가능하도록 품위들을 계열화하여 배치하며, 제자가 수행할 수 있는 활동들을 중심으로 하화라는 조력을 제공하지 않으면, 설사 자신이 딛고 올라온 품위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하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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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이러한 체험이 거듭됨에 따라 하화자는 안다는 것과는 구분되는 하화한다는 것의 의미를 자각해 나간다.


   8) 문제의 간접 제공


   제자의 현재 품위보다 한 단계 높은 품위라고 하더라도 이를 직접 하화할 수는 없다. 품위와 품위 사이에는 논리적이며 질적인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화자는 제자의 현재 품위와 한 단계 높은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를 끌어내어 제자가 이에 직면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화자가 문제를 직접적인 형태로 상구자에게 주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수가 있다. 문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가 직접 발견하여 그것이 문제임을 알게 될 때, 주체를 사로잡는 힘을 지닌다. ‘하던 일도 멍석을 깔아주면 안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자의 현재 품위와 바로 위의 품위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이를 스승이 직접 찾아 제공하면, 제자는 이를 외부에서 부과된 하나의 과제로 볼 뿐 문제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수가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스승은 제자의 현재 품위로는 해결되지 않는 점을 암시하거나, 또는 제자가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거나, 아니면 제자를 논리적인 난관으로 이끌거나 하는 방식 등을 동원하여 제자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도록 간접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대화의 상대방이 확신하고 있는 의견의 한계와 내적인 모순 등을 드러내어 그의 의견을 논박함으로써 상대방을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도록 이끄는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세밀히 연구해 보아야 하는 사례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현 단계에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화는 어떻게 본다고 하더라도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활동이 아니라 문제를 주는 활동이며,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게 간접적으로 주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제자를 그가 흥미와 관심을 갖고 몰입할 수 있는 문제로 눈에 띄지 않게 은연중에 유도하는 하화의 역량은 하화의 보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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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를 체험하려는 모든 하화자들이 소망하는 대단히 수준 높은 하화의 경지일 것이다.


   9) 상구 활동의 처방과 안내


   일단 제자가 문제에 사로잡히게 만들면, 하화는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에 사로잡힌 자는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상구자는 문제 해결의 열정을 지니게 되고, 이에 힘입어 자발적으로 상구의 길에 나서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견해를 직접 제공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견해를 논박을 통하여 해체함으로써 상대방이 새로운 견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에로스(eros)라는 열정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데에 전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엄태동, 1998).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상구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 하화가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스승은 제자의 상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제자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행할 필요가 있는 상구 활동들을 지시하거나 처방해 주어야 한다. 다시 이는 문제에 대한 답을 설명하는 활동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절한 활동을 안내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답이 상구 활동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적 활동이 상구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답을 묻는 제자에게 자신도 모른다는 식으로 물러서거나, 손쉬운 해결 방안을 찾는 제자의 나태함을 경계하면서 등을 돌릴 필요가 있다.

   간혹 제자는 스승이 ‘왜 답을 말로 해 주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며 답답해 할 수도 있지만, 이는 스승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말로 품위를 전해 주고 전해 받을 수 있다면, 인간사는 어떠한 점에서 대단히 편안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데에 교육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교육의 어려움을 제대로 해소만 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교육의 묘미로 바뀌게 된다. 이를 잘 아는 스승은 제자의 조급함을 누르면서 제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시할 뿐이다. 어떠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스승은 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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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주기보다는 제자가 읽어야 할 자료들, 보아야 할 사례들, 실천해야 할 특정한 활동들, 주목해야 할 단서나 현상들을 지시하거나 처방해 주고 제자가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촉구해 나가야 한다. 스승의 그러한 상구 활동에 대한 처방과 안내는 적중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스승은 다시 제자에게 가능한 활동으로 이를 변경하거나, 제자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그 수행 방식에 대하여 조언한다. 이처럼 하화의 활동은 언어적인 전달의 활동이 아니라 제자의 상구 활동을 안내하고 이를 통하여 제자가 새로운 것을 체험하도록 이끄는 활동이다. 이러한 하화의 활동 속에는 원조(援助)나 산파적 조력이라는 하화의 내재적 원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


   10) 언어적 전달의 경계


   하화는 언어적 전달 활동이 아니라 상구 활동 자체의 수행을 조력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하화 활동은 상당한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상구자도 조급해 질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하화자도 조급함에 사로잡힐 우려가 있다. 아직 그가 공유하고자 하는 하화자 자신의 현재 품위를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칫하면 하화자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언어적으로 직접 전달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와 제자 사이의 교육 활동은 점차 무너지게 된다. 제자가 소화할 수도 없는 언어적 표현들은 설사 스승의 권위나 압력 등에 힘입어 제자가 이를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품위로 자리 잡을 수가 없다. 이 때 제자가 수행하는 것은 상구가 아니라 암기나 모방이 된다. 또한 스승은 하화가 아니라 주입이나 인독트리네이션 등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 점에서 하화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적 전달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품위에 대한 언어적 전달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제자가 상구 활동을 통하여 필요한 품위를 습득했을 경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언어가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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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의 습득이 앞서는 것이며, 언어는 습득된 품위의 자연스러운 발현일 뿐이다. 그리고 하화는 언어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의미의 기반으로 품위 습득을 조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품위 습득의 조력이라는 선결(先決)되어야 할 과제를 그것이 수행되었을 때 그 결과로 뒤따르게 되는 언어로 대치하려는 것은 선후가 뒤바뀐 경우를 초래하고 만다.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하화 활동들 가운데 ‘제자의 품위 진단’, ‘하화적 변신과 열정의 연출’, ‘문제의 간접 제공’, ‘상구 활동의 처방과 안내’, 그리고 ‘언어적 전달의 경계’라는 일련의 하화 활동들은 역차(逆次)나 하향적 점진화, 또는 원조나 산파적 조력이라는 하화의 원리에 따르면서 전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들은 스승과 제자의 교육적인 교섭 과정에서 그때그때 출현하는 상황적 필요에 의하여 여러 차례 순환하는 가운데 전개된다. 예기치 않았던 상황적 변수와 요인에 맞추어 가면서 이러한 순환의 과정을 조율해 나가는 하화자의 역량은 다양한 소리와 음색, 개성 등을 지닌 악기들과 연주자들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절묘한 화음(和音)을 만들어 내는 지휘자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지휘자가 그러한 화음 창조의 과정에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흥취를 느끼는 것처럼 하화자 역시 하화의 과정을 조율해 나가면서 하화의 고유한 가치를 만끽하게 된다. [각주 57: 이 세상의 모든 하화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 역시 하화의 과정에서 내가 하화하려는 품위가 나의 제자들에게 제대로 수용되고 있는지를 그들의 미묘한 표정과 반응, 그리고 발언 등을 통해 읽어 나가는 가운데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을 몸으로 느끼고 이에 대처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교육의 과정을 조율해 나가도록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세계가 바로 교육이며, 나와 제자들을 심취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하화와 상구의 내재적 가치다. 지금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교육이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자체의 고유한 질서와 생리를 지니고 있는 가치 있는 삶의 양식이라는 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은 도대체 독자들을 그러한 교육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독자들이 여전히 교육에 대한 그러한 체험과 인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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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심열성복의 유도


   제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를 넘어서는 상위 품위의 우월함과 고귀함을 아직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구를 통하여 이를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고자 하는 것이며, 스승의 하화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은 새로운 품위를 하화한 뒤에 그것이 제자의 상구 이전 품위보다 개선된 것임을 제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정의 과정에는 스승이 지니는 어떠한 권위나 힘, 또는 압력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승의 하화에 힘입어 새로운 품위를 습득한 제자의 주체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야 하며, 제자의 심열성복(心悅誠服)에 근거한 것이라야 한다. 여기서 진, 선, 미 등의 가치에 대한 세인들의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 내려는 그 어떠한 형식적 절차라고 하더라도, 하화를 통하여 상대방을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경로를 통하지 않고는 제대로 작동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니는 품위의 고귀함을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 상대방을 대상으로 하화하여 그가 자신 만큼 높은 수준에 오르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화의 활동에는 타증(他證)이라는 하화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타증이라는 하화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하화의 전 과정을 주도해 온 스승은 자신의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새로운 품위를 습득하고 이에 매료되어 있는 제자를 볼 수 있게 된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었던 자신의 제자가 이제 세상의 진상을 볼 수 있게 되고, 참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제자를 지금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하되, 그 새로운 존재의 양태에 제자가 진정으로 감응(感應)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하화 활동이다. 하화에 의한 타증은 스승 자신이 상구를 통하여 접해 온 품위들이 더 이상 자신만이 아니라, 제자라는 타자에게도 우월하고 고귀한 것으로 수용되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품위의 간주관적(間主觀的) 타당화의 경로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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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하화의 재출범


   제자의 상구 이전 품위보다 한 단계 높은 품위로 제자를 이끌어 새로운 품위에 대한 제자의 심열성복을 유도하였다고 하면, 하화의 한 사이클은 종료된 셈이다. 이를 통하여 스승은 자신이 제자보다는 선진임을 교육적으로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승의 역할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 하화자인 스승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현재 품위에 이르는 도상의 중간 품위들 가운데 하나를 하화한 것에 불과하다. 아직 그에게는 하화를 통하여 그 고귀함을 입증해야 되는 품위들이 너무나도 많다.

   따라서 하화자는 새로운 품위에 매료되어 이에 자족해 하는 상구자의 곁에서 그의 열광이 식기를 기다려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제자가 그의 새로운 품위를 공고히 하는 데에 필요한 사태들을 제공하거나, 그러한 사태들로 안내해야 한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되면, 스승은 제자에게 아직 그들이 하화하고 상구해야 할 것이 많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제자를 상대로 하는 새로운 하화 활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처럼 거듭되는 하화의 여정 속에서 스승은 하화 활동이 타자에 대한 사랑이나 스승 자신의 고귀한 품위를 복제하려는 욕구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자체의 고유한 보람과 가치를 내장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화의 내재적 가치이자, 하화의 재출범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위에서 논의해 온 것들이 상구와 하화의 내재적 원리들에 맞도록 수행되어야 하는 개별적인 상구 활동들과 하화 활동들이다. 상구와 하화의 활동들이 각기 상구와 하화의 내재적 원리를 충족시키면서 전개되는 경우에 상구와 하화의 주체들은 이를 통하여 각자 상구의 내재적 가치와 하화의 내재적 가치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아무렇게나 상구하고 하화한다고 해서 교육의 고유한 가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치를 높은 수준에서 제대로 맛보고자 한다면, 적어도 우리가 논의해 온 것과 같은 상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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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화의 활동들을 교육의 내재율에 맞도록 까다롭게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여기서 소개한 상구와 하화 활동들은 있을 수 있는 교육 활동들의 세밀한 부분들을 망라하여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현재 우리 수준에서 포착된 것으로서 탐구의 잠정적인 성과일 뿐이다. ‘교육의 내재적 원리가 무엇이며, 이에 맞도록 전개해야 하는 교육의 활동들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탐구 주제는 교육에 대한 좀 더 고급스러운 체험과 인식을 향유하려는 역량 있는 탐구자들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탐구자들이 우리의 길을 이어 받아 우리가 다 가지 못한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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