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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자료

조동일. 발상의 전환에서 창조의 결실까지 / 1부 발상 전환의 현장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143 목록 댓글 0
조동일(2001). 『발상의 전환에서 창조의 결실까지』. 서울: 인간과 자연사.

제1부 발상 전환의 현장



   머리말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쓴다. 인터넷 내 홈페이지 ‘질의와 응답’란에 이화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최유진이 2000년 8월 24일에 질문을 올리고, 학문을 하는 공부 방법을 물었다. 그 때 제대로 하지 못한 대답을 이 책에서 편다. 초등학교 6학년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부담 없이 읽기 바란다.

   초등학교 학생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고자 할 때에는 누구나 공부 방법을 진지하게 묻는다. 공부가 좋아서 방법을 탐구하고자 할 수도 있지만, 입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절박한 물음이다. 입시제도가 바뀔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다. 수학능력시험 공부는 물론 논술고사 공부까지도 도사라고 자처하는 해결사들이 있지만, 이제 새롭게 실시하는 구술고사는 대책이 없어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구술고사를 실시하는 쪽도, 지도하는 쪽도 당황해 하고 있다.

   구술고사의 방향을 잡는 것이 이 책에서 하려고 하는 일이다. 그래서 구술고사가 진행되는 긴장된 현장을 이야기하면서 필요한 논의를 전개한다. 구술고사를 준비하는 학생을 물론, 구술고사를 담당하는 교수, 지도하는 교사, 걱정하는 학부모가 모두 읽어 구체적인 도움을 얻는 책을 쓰고자 한다. 구술고사가 또 하나 실패한 제도가 되어 부작용이나 낳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착실하게 정착해 이 나라 교육을 바로잡는 데 적극 기여를 하도록 하려고 한다.

   책을 쓰는 더 중요한 목적은 이 나라의 교육이 창조하는 교육이 되게 하는 길을 제시하자는 데 있다. 교육은 창조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데 대해 모두 찬성하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창조하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창조를 방해하는 교육이다. 왜 그렇게 잘못되고 있는가 밝히고,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 말하고자 한다.

   창조하는 교육을 하라고 지시하고, 요구하고, 주장해도 아무 소용도 없다. 발언의 강도를 높이고 회수를 늘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창조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치 자기만 발견한 진리인 듯이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창조”라는 말을 “창의”나 “창발”로 바꾸면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에 관한 동서고금의 이론을 해박하게 들어 장광설을 펴도 사태가 호전되지 않는다. 창조하는 교육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정확한 대답을 이론이 아닌 실제의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책의 표제로 내놓은 “발상의 전환에서 창조의 결실까지”는 교육이나 연구의 전과정이다. 그것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에다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가? 아니다. 어렵고 복잡한 책은 독자를 공연히 괴롭혀 신선한 발상을 죽인다. 창조에 대해서 말하면서 창조를 죽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해 세계의 학문을 바꾸어놓는 논문에 이르는 과정으로 독자 여러분과 함께 쉽고 신나게 나아가고자 한다.

   이 책을 쓰는 목표, 내용, 방법이 모두 창조이다. 과연 그런가는 독자가 시비할 일이다. 이 책의 가치를 어느 정도까지 평가하든, 독자는 창조의 성과가 더욱 두드러진 작업을 해서 나를 무색하게 하기 바란다.

   창조는 젊음의 특권이다. 그런 줄 모르고, 용기와 의욕을 잃어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환갑을 지나고 정년퇴임이 가까운 늙은이가 분발하자고 외치면서 이런 책을 쓰는데 젊은이들은 잠자코 있어서 되는가? 떨치고 일어나 앞서나가야 하지 않는가?



  1. 발상 전환의 현장


   발상 전환의 현장

   

   대학입시 구술고사를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술고사는 전에 면접이라고 하던 것과 다르다. 면접은 응시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조금 물어보고 평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배점을 높이고 점수 폭을 넓힌 면접고사를 상당한 시간 동안 깊이 있게 해서 합격 여부를 가리려고 한다. 새로운 형태의 심층면접고사는 구술고사라고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그 말을 썼다.   

   세 교수가 앉아 있는 방에 응시자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맞은편에 자리 잡는다.

   한 교수가 말한다.

   "선택한 문제를 읽고 대답하세요.”

   학생은 10분 전에 문제 상자에서 문제를 몇 개 뽑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대답할 말을 준비하고 왔다. 문제를 읽는다.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

   응시자에게 전공 선택의 동기를 묻는 문제이다. 구술고사 문제에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알아보는 일반적성 측정 문제와 어떤 생각을 하고서 전공을 선택했는가 묻는 전공적성 측정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그 가운데 전공적성을 측정하는 문제이면서 일반적성을 측정하는 데도 아주 좋은 것이다.

   전공 선택의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왜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  “장래 희망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예사이다. 그 정도의 질문은 미리 예상하고 모범답안을 준비해 외고 왔다. 좋은 대답을 다 잘 한다고 모두 입학시킬 수는 없다. 그런 질문으로는 입학해야 할 학생을 선발을 할 수 없으므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택했는가?”라고 하는 것은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는 응시자를 가려내기 위한 질문이다. 시키는 대로 공부하기만 하는가, 공부 방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가 확인하려고 그렇게 물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가 생각하는가, 생각해서 무엇을 알아냈는가 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평가 기준이다.

   시키는 대로 하는 공부는 공부로 끝나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서 깨닫고 하는 공부는 학문으로 발전한다. 대학의 전당이므로 학문을 할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 대학에 입학하면 학문을 할 학생인지 검증하기 위해서 지식을 평가의 척도로 삼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학문에 대한 지식이 아닌 학문을 하는 태도나 능력을 측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구술고사가 필답고사보다 더욱 효과적인 시험 방법이다.

   구술고사 성적이 합격 여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지금에 와서는 누구나 준비를 단단하게 하고 온다. 그런데 이 무슨 이상한 일인가?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대개의 경우 예상 밖이다. 생각하지도 않고 있던 수학을 들먹이면서 질문이 엉뚱하게 나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 상자에서 뽑아낸 다른 몇 가지 문제는 대답하기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이 문제를 택했지만, 대답하기가 만만하지 않다.  

   그건 학생의 사정이고,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준비해온 대로 말하는 판에 박힌 대답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학생이 지닌 능력을 알아보려고 이런 문제를 냈다. 말을 알아듣는 이해능력, 이치를 따지는 논리능력, 자기 생각을 전개하는 창조능력을 알아보고자 해서 예측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능력은 수학을 하건 국어를 하건 모든 공부에 필요하다. 대학에 입학해서 학문을 하려면 자기 능력을 점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향상이 가능하다.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라고 하는 문제를 택한 여러 학생이 다녀갔는데, 상당수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렇게 물을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수학도 공부하고, 문학도 공부했다. 그러나 수학 시간에 문학에 관한 말을 하지 않듯이, 문학 시간에는 수학을 잊었다. 수학은 수학이고 문학은 문학이었다. 수학과 문학이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 잘못을 깨고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가 확인하기 위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냈다. 언제나 경험하고 있던 바를 다시 생각해 새롭게 살피는 데서 발상의 전환이 시작된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되돌아보면 무엇이든지 예사롭지 않다. 관습의 틀이 깨어지고 숨은 진실이 드러나는 감격을 맛본다.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관관계를 알아차리면 창조 작업을 향해 나아간다.

   수학과 문학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그 둘을 함께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둘이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서로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가 생각해내는 것은 창조이다. 생각해낸 것을 정리해서 글로 써서 발표하면, 그것은 창조의 결실이다. 그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책제목을 “발상의 전환에서 창조의 결실까지”라고 했다.  

       

   질문하는 방식과 의도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라고 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놓을 수 있다.

   “과학공부와 어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수학과가 아닌 국문과를 선택했는가?”

   “문학공부와 수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국문학과가 아닌 수학과를 선택했는가?”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각기 그것대로 특성이 있다. 사회과 교과목에서 하는 공부는 그 둘과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 아니면 그 둘을 합친 것인가?”

   “문학공부와 어학공부가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수학공부와 물리학공부가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공부 방법은 교과목에 따라서 어느 정도 달라져야 하는가? 교과목의 예를 들어 말하라.”

   “공부 방법을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것과 생각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교과목의 예를 들어 말하라.”

   이것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응시자에게는 생소한 대학 교과목 이름은 피하고, 고등학교의 교과목을 들어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하면서 대학에 입학할 능력을 갖추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여러 교과목의 공부 방법을 비교해서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공부를 선택했는가?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이 질문을 하는 구체적인 목적이다, 학문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을 측정하고 전공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학문을 하는 데 요구되는 적성을 갖추었는지 검증해야 대학에 입학할 자격을 가진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학부 또는 학과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나 장차 그 학부 또는 학과에서 할 공부와 긴밀한 관련을 가진 고등학교의 교과목을 앞에다 내세워 다른 것과 비교론을 펴는 것은 공통되는 질문 방식이다. 무엇을 묻는가 하는 핵심은 서로 다르지 않다. 어느 교과목의 공부 방법은 잘 알지만 다른 교과목의 공부 방법은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질문의 형태도 경우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문학공부와 어학공부", “수학공부와 물리학공부"의 차이에 관한 질문은 한 학과 또는 학부 안에서 갈라져 있는 학문 분야에 대한 이해를 물은 것이다. 전공에 대한 사전 이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데 필요한 질문이다. 끝으로 든 두 질문에서는 교과목 명칭은 응시자가 들도록 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어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막연해서 말이 막힐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어느 것이든지 해당 교과목을 공부하면서 얻은 지식을 말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에서 한 공부와는 동떨어진 엉뚱한 질문인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공부에 매몰되어 관습화된 사고를 하는 데 머물렀는가 아니면 거기서 벗어나는 발상의 전환을 하고 창조의 가능성을 키웠는가? 이 점을 확인하는 질문을 한다.

   대학은 고등학교와 두 가지 점이 다르다. 이미 개발되어 있는 지식을 전수받던 공부가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는 학문으로 바뀐다. 모두 교과목을 함께 공부하던 단계를 지나 전공이 나누어진다. 공부에서 학문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전공 선택을 적성에 맞게 하는가? 이 둘을 가려서 입학할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 위에서 든 것들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구술고사 문제를 유형에 따라서 나누면 문제해결 능력, 전공 적성, 인성, 가치관에 관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따로 측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따로 측정하기 위해 단답형의 질문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 문제해결 능력을 알아보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해야 한다.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고 전공 적성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문의 가치를 신뢰하고 학문에 헌신하는 것이 대학생에게 요구되는 인성이고 가치관이다. 위에서 든 질문은 유형 분류를 한다면 전공 적성에 관한 것이지만, 다른 유형의 문제 노릇까지 하는 종합적인 효용이 있다. 

   구술고사를 진행하면서 질문을 하나만 하지 않고 여럿 한다. 한 유형의 질문만 하지 않고 여러 유형의 질문을 한다. 유형별로 문제를 제시하고 고찰하는 것은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다가는 논의가 산만해지고 핵심이 불분명해진다. 구술고사에 대한 다각적인 대비책을 제시하려고 하면, 발상의 전환에서 창조의 결실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말해줄 수 없다, 

   위에서 든 질문이라도 모두 자세하게 다룰 겨를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처음 제시한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를 한 본보기로 들어 집중적으로 고찰하면서 필요한 논의를 단계적으로 심화한다. 책을 통독한 다음에 다루지 않고 남겨둔 문제를 각자 해결하기 바란다. 더 좋은 문제를 각자 내고 해결하기 바란다. 그래야만 책을 쓰느라고 수고한 보람도 있고 읽고 익힌 보람도 있다. 


   수학능력시험과 구술고사


   대학입시에 대해서 말이 많다. 국민 모두 일가견이 있다. 대학입시가 자주 바뀌는 것은 여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론을 따라 이렇게 고쳐놓고 보니 저런 여론이 들끓어 저렇게 고친다. 입시경쟁을 줄이고, 입시준비 때문에 사교육비가 덜 들게 해달라는 여론은 거의 공통되어, 국정 담당자는 누구나 그렇게 해서 국민 전체가 일제히 보내는 커다란 지지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입시제도를 바꾸어 그렇게 할 묘책은 없다. 제도를 바꿀 때마다 개악했다는 비난이 뒤따른다.

   대학입시는 선발이다. 선발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는 없다. 낙오자도 있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마땅한 뽑아야 할 사람을 뽑고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은 뽑지 않는 것이 잘하는 선발이다. 뽑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대학에서 학문 수준의 공부를 잘 하려면 창조력을 가져야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공부도 발상의 전환에서 창조의 결실까지 나가는 훈련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 발상의 전환을 막고, 창조의 결실을 바라지 않는 것이 예사이다. 말로는 창조니 창의니 창발이니 하면서 기존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외도록 하는 공부를 한다. 기존의 지식도 취급 범위를 부담이 없을 정도로 줄여 외는 데 한 점 착오도 없게 하려고 만점이 많이 나오는 시험을 치러 학력을 평가한다.

   그런 교육은 당연히 개혁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교육은 당장 개혁하지 못한다 해도 대학입시에서는 창조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해 대학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이 창조의 능력은 측정하지 못하므로, 논술고사로 결함을 보충해왔다. 이제 논술고사보다 구술고사가 더욱 중요시된다. 구술고사로 당락을 사실상 결정한다. 그것은 아주 잘된 일이다. 교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전기가 왔다.

   지금의 형편으로는 고등학교 졸업성적이 우수한 사람과 대학 공부를 잘 할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수학능력시험은 고등학교 졸업성적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로 그 의의가 한정되므로, 대학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학생은 구술고사로 뽑아야 한다. 수학능력시험은 만점 받는 응시자가 많아지도록 쉽게 출제하고, 구술고사는 배점을 늘이고 점수차가 많이 벌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수학능력시험과 구술고사는 무엇이 다른가? 이것도 구술고사의 문제가 될 만하다. 글로 쓰고 말로 하고, 쓰고 나오면 그만이고 다시 묻고, 채점을 컴퓨터가 하고 사람이 하고 하는 등의 차이를 많이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피상적인 차이이다. 수학능력시험에서나 취급할 만한 내용이고, 구술고사에서는 문제삼을 것은 못된다.

   수학능력시험에서는 지식을 묻고, 구술고사에서는 생각을 묻는다고 하면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좀더 깊이 들어가려면, 지식과 생각은 어떻게 다른가 따져야 한다. 그러면 문제가 어려워 생각이 모호해진다. 구술고사에서 생각을 묻고 답하는 수준의 말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명쾌하면 더 좋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도표를 그려 대답할 수  있다.

 

        수학능력시험                 구술고사

         ------→Ⅰ                 Ⅰ------→  

  

   수학능력시험에서는 도달점을 정해놓고 도달점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 측정한다. 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내용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을 간추려 도달점으로 한다. 도달점이 너무 멀면 성적이 나쁘기 때문에 가까이 당겨놓고 완전하게 도달한 만점자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도달점을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 만점 이상의 점수는 없다. 만점자가 늘어나 모든 응시자가 만점을 받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구술고사에서는 도달점이 아닌 출발점을 정해놓는다. 예사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공부한 수준을 출발점으로 하고,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는가 알아본다. 한계는 무한하다. 출제를 하고 질문을 하는 교수가 생각한 것이 한계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얼마든지 더 나아갈 수 있다.

   수학능력시험은 정확하고 치밀한 태도를 요구한다. 주의력이 산만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학생은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 수학능력시험 출제자들이 단순한 암기는 피하고, 종합적 사고와 응용력, 더 나아가서 창조력을 측정하는 문제를 냈다고 아무리 강조해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시험의 방법 자체가 가진 본질적인 결함을 담당자의 능력으로 시정할 수는 없다. 너무 쉽다는 여론을 감안해 조금 어렵게 출제해 만점자를 줄여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는다. 난이도 조절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두 가지 시험방법의 효용은 그 자체로 판별할 것이 아니다. 교육의 목표가 어느 쪽인가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 한국의 대학은 남들이 이미 개발해놓은 기존의 지식을 받아들여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한 치의 착오도 없는 기능공을 양성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수학능력시험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대학이 새로운 지식이나 원리를 스스로 창조하는 훈련장이라고 한다면, 수학능력시험과는 아주 다른 구술고사를 통해서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이 어느 위치에 와있는지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다. 선진국을 착실하게 배우고 따르는 모범적인 중진국, 이것이 우리 위치라면 수학능력시험을 학생 선발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기존의 선진국들과 경쟁해서 새로운 선진국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방향을 과감하게 바꾸어야 한다.

   수학능력시험 준비에는 좋은 참고서도, 이름난 학원강사도, 족집게라고 자처하는 과외선생도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문제를 예상해서 답을 일러줄 수 있다고 한다. 시키는 대로 공부하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는 믿음 때문에 학교교육이 황폐해지고 과외공부가 극성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자아냈다.

   그러면 구술고사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구술고사의 경우에도 문제를 예상해 답을 준비하고, 문답 훈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름난 학원강사가 좋은 참고서를 교재로 다수의 수강생을 상대로 강의를 해서 성적을 향상시키기는 어렵지만, 족집게 과외선생이 학생과 마주앉아 일대일로 훈련을 시키면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구술고사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과외가 성행해 사교육비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비난이 일어나고 있다.

   과연 그런가? 구술고사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시험관 노릇을 하는 교수가 문제가 되지 않을 질문을 하고서는 말장난이나 하다가 인상을 보고 채점할 수 있다. 채점자의 기분에 따라 점수가 달라질 수도 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잘못 알아듣고 그릇되게 채점해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모두 비슷한 점수를 주어 하나마나한 일을 하고 말 수도 있다. 여러 교수의 채점을 평균하면 잘못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기 잘못된 것들의 평균은 무의미하다.

   그래서는 안된다. 구술고사는 제대로 실시해야 한다. 그것은 구국 수준의 성스러운 과업이다. 대학별고사, 학력고사, 수학능력시험, 논술고사를 모두 나무라고 마지막으로 택한 방안마저 실패하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 교육을 살리고 대학을 정상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으면 장래가 암담해진다.


   전환의 의의 


   지금 실시하고 있는 구술고사를 최후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일종의 궁여지책이다. 다른 방법을 다 써도 대학입시를 위한 지나친 경쟁,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가를 막지 못하니 구술고사를 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이면서 다행이다. 궁여지책이 최상의 대책이다.

   교육은 원래 구술로 시작되었다. 시험도 구술고사가 최상의 방법이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구술하는 선생이었다. 저술은 하지 않고 말만 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교재라고는 없었다. 들은 말을 일일이 필기한 것도 아니다. 요점만 알고 있었다. 공자가 한 말을 여러 제자가 기록한 <<논어>>는 아주 소략하다.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했는가 적어놓은 수제자 플라톤의 자못 방대한 저술에는 허구가 많다.

   그 시대를 지난 뒤에 동서양의 중세대학에서도 책은 흔하지 않고 말로 가르치고 평가했다. 스승과의 논쟁이 학생이 공부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대학에서는 구술고사로 성적을 평가하는 곳이 많다.
   구술을 불신하고 필답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은 근대인의 선택이다. 말보다는 글이 훌륭하다고 하고, 필답고사를 보아야 객관화된 증거가 남는다고 했다. 인쇄문화를 자랑하고 숭상하면서 교재를 사용해 가르치고, 가르치는 사람은 교재를 집필해야 했다. 많은 학생을 일시에 평가하는 데 필답고사가 유리했다.

   필답고사의 문제가 논술형에서 단답형으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객관식택일형으로 바뀌었다. 객관식택일 답안 채점을 한 점 착오도 없는 컴퓨터에게 맡겨 기술 발달이 최고에 이르렀다. 시험방법 개발의 역사는 종말에 이른 것 같다. 더 좋은 시험방법이 있다면, 사람 머리를 컴퓨터에 바로 연결시켜 머리에 든 지식을 직접 채점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컴퓨터로 채점하는 객관식택일 방식의 시험은 평가 내용에서는 가장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어 극에서 극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수학능력시험은 존속시키되 쉽게 내어 만점자를 늘여 변별력을 줄이고, 그 대안이 되는 방법을 각 대학에서 다양하게 개발해 실시하도록 한 근래의 방침은 마치 먼 안목을 가지고 역사의 전환을 이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시비하지 말자.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고 하자. 

   수학능력시험에서 구술고사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교육을 정상화하고, 대학을 살리고, 학문을 학문답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구술고사 만세를 부르자.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일제히 분발하자. 구술고사에서는 지식과 구별되는 능력을, 기억력과는 다른 창의력을 평가하고, 착실한 기능공과는 다른 뛰어난 창조자를 선발하자.


   짓밟히는 능력                  


   수학능력시험은 모험을 기피하고, 시행착오를 겁내고, 실패를 싫어하는 틀에 박힌 성격의 착실한 사람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창조력을 가진 인재는 위험하다고 배제해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런 인재는 능력이 없다고 낙인을 찍어 내쫓아 실패의 쓰라림을 안고 방황하다가 자포자기하도록 한다. 그런 실패를 본받지 말고 어려서부터 시키는 대로 공부하기만 하고 딴 길로 가지 말며, 외라는 것이나 외고 엉뚱한 생각은 하지 못하게 한다. 

   주의력이 산만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은 창조적인 사고를 한다는 증거이다. 이것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저것을 생각하고, 한 가지 일을 끝마치지도 않고 다른 일을 지어낸다. 자기 생각에 스스로 도취되어 남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없는 것을 지어내니 거짓말쟁이 같다.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창조를 시도할 수 없다. 창조는 모험이다. 시행착오가 있게 마련이다. 실패를 해보지 않고서는 성공이 없다.

   지금의 교육제도나 방법은 위대한 창조자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 후환을 없앤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 불가능하게 해서 나라 안팎의 기존 질서가 흔들리지 않게 한다. 불만이 있으면 데모나 하다가 말 일이지, 학문의 세계를 뒤집지는 못한다. 이렇게 방어선을 치고, 안으로는 민족의 저력을 훼손해 새 역사 창조를 방해하고, 밖으로는 의존이나 종속이 항구적이게 한다. 말로는 선진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후진의 굴레가 더욱 단단해지게 한다.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잘못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가해자인 줄 아는 가해자는 없다. 말을 들어보면 모두 피해자이다. 창조 능력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게 된 피해자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도 피해자라는 구실을 내세워 스스로 의식하지 않고 있는 가해행위를 계속해서 그 누구도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교육을 관장하고 시키고 담당하는 위치에 있는 당국자, 관리자, 교사들은 누구나 자기네가 창조하는 교육을 실시한다는 구호를 되풀이해 도전이나 비판이 불가능하게 방어선을 치고서,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착각하기까지 하면서, 실제로는 창조를 학살하는 데 일제히 매진하고 있다. 그런 위선의 구조가 교육을 위기에 몰아놓는 근본 이유이다.   

   그런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창조하는 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분상 그럴 듯한 말이지만, 받아들일 만한 처방이 아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은 행정적인 규제가 심하고, 교과 내용 선택의 자율성이 없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고, 입시를 앞두고 있어 혁신하기 어렵다. 그 전체를 바꾸어놓지 못하더라도 부분적인 혁신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드세다.

   창조력을 가진 인재를 찾아내 일찍부터 격려하고 키워주기 위해 영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하는 구체적인 방안이다. 한 때 나라에서 조사해 영재로 선발된 아이들이 적절한 지도를 받지 못해 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평범한 교육을 받느라고 흥미를 잃고 재능이 죽어 대학입시에도 실패하는 사례가 많다고 개탄하는 신문보도를 가끔 볼 수 있다. 평준화된 교육 때문에 영재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지금 실시하고 있는 교육의 맹점이라고 소리 높여 나무란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우선 영재 여부 판별이 문제이다.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한글은 물론 영문자까지 알고, 한자공부도 해서 천자문을 외기까지 하고, 구구단을 익혀 곱셈과 나눗셈까지 한다는 것을 영재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든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력의 증거가 아니다. 엉뚱한 질문을 퍼붓고, 납득하기 어려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창조력이 있는 증거이다. 그런 창조력은 일상의 언동을 통해서 나타나다가 글쓰기나 그림을 통해서 일부 표현되기도 한다. 일상의 언동은 관찰이나 측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글이나 그림은 고려 밖이다.

   구구단・영문자・천자문은 자라면서 공부할 것들이다. 장차 공부할 것을 미리 앞당겨 익히는 것이 창조는 아니다. 주위의 성인들이 잘 알고 있는 주어진 과정에 자기를 맞추어 칭찬을 듣는 것은 구속이다. 나이에 맞지 않은 구속을 미리 하도록 하고 칭찬하는 것은 창조력을 죽이는 길이다.

   지능지수라는 것을 믿고, 지능 발달이 빠르면 좋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지능은 다양해 한 가지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기존의 지식을 일찍 받아들이는 것을 지능발달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느 단계까지 가다가 발달을 멈춘다. 잘못 선발된 영재를 두고 학년 앞당기기 공부를 시키면 초등학교 때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를 하고, 중학교 때 대학공부를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시키지 않은 공부는 하지 못하니,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인생을 앞당겨 사는 것이 무슨 잘한 일인가?

   예전에는 어린아이가 글공부를 남다르게 잘 하면 공부를 중단시켰다. “이 아이는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판정해서 글방에서 내보냈다. 재능이 뛰어난 것을 경계했다. 재승(才勝)은 곧 박덕(薄德)이라고 여겼다. 재주가 뛰어나면 사람됨이 모자라게 마련이므로, 재주를 눌러 함부로 앞서나가지 못하게 했다. 사람됨이 모자라면 재주가 있어도 얄팍한 재주이고, 재주가 있다고 자만하다가 인생이 그릇된다. 그릇된 재주를 가지고 세상을 해롭게 하는 것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얄팍한 재주란 외기는 잘 하고 자기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외는 재주는 송재(誦才)라고 여기던 것인데, 자랑거리라기보다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다. 재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람됨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송재가 있다는 것은 다른 재주는 없다는 말이다. 누가 재주가 있다고 하거나 송재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고 비난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려서 송재가 뛰어난 나이를 영재라고 하면서 특별히 가르쳐 그 능력을 계속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송재가 뛰어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전을 다 외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전을 이용할 줄 알면 된다. 지금은 필요한 자료를 컴퓨터에 넣어두고 필요한 대로 찾아 쓸 수 있으니 머리가 기억 저장고 기능을 적게 해도 된다. 기억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머리를 창조하는 사고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계산 능력을 숭앙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 곱셈이든 나눗셈이든 계산기가 더 잘 한다. 암산왕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없어졌다. 산수는 수학이 아니다. 산수를 잘 못하는 것은 수학을 잘 하는 증거일 수 있다.

   예전에는 어려서 재주가 뛰어난 아이는 가르치다가도 그만두게 하고 글방에서 내보는데, 오늘날은 어려서 재주가 뛰어난 아이는 영재이니 특별히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옛 사람들은 무얼 몰랐던가? 아니다. 그 반대이다. 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아이는 헛된 자만심을 가지지 않고 남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사람됨의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가르쳐주지 않은 공부를 자기 나름대로 하면서 스스로 깨닫고 창조력을 키웠다. 사람됨의 공부와 창조력 함양을 함께 해서 박덕의 잘못을 시정하고, 재승의 재주가 헛되지 않게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글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덕분에 쓸데없는 구속이나 방해에서 벗어나 스스로 깨달아 뛰어난 창조력을 기르고 발현한 선인들을 여럿 들어 논의를 더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그런 분들의 사례를 모두 기억한다고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재에 대한 오늘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 가르치는 사람은 가해자가 되지 말고, 배우는 사람은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고금 비교론을 전개한다.  

   송재가 조금 보이면 영재라고 추켜들고 사방 자랑하면서 더 많은 것을 외게 해서, 자만심을 한껏 키우고, 스스로 묻고 깨달아 창조력을 기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전에는 없던 오늘날의 추태이다. 그런 아이는 부모의 허영 때문에 곧 평균 이하가 되고, 아주 바보가 되기도 한다. 영재 교육기관을 나라에서 별도로 세워 그런 잘못을 얼마나 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모의 허영을 막고, 외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아 스스로 깨닫는 공부를 하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 않다.

   영재교육기관이라고 별도로 설립한 곳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다가는 학부모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상급기관의 질책 때문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성장 촉진제를 사용해 식물을 조기재배하는 원리로 교육의 단계를 빨리 거쳐 영재가 위대한 발명이라도 하는 가시적인 효과를 당장 내놓으라고 다그칠 것이다. 그런 영재교육기관이 없는 것이 이 나라의 복이다. 그런 기관이 생겨난다면 걸려들지 않는 것이 행운이다.        

   창조력은 가르쳐서 늘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자기 스스로 발견하고 키우는 데 교사는 보조적인 구실을 한다고 보는 편이 마땅하다. 교사가 자기 생각대로 끌고나가면 역효과를 낸다. 방해가 되는 환경을 제거하는 데 힘쓰기나 하고 지도하지는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은 방법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토론자가 되어 창조력을 자각하도록 촉구하고, 좋은 발상을 평가하고 격려하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하겠는데, 그렇게 하기 어렵다.  

   영재는 따로 있지 않다. 누구나 영재일 수 있다. 영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창의력을 스스로 발견하는 용기가 있고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영재이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졌지만 번뇌망상을 물리칠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야 자기에게 있는 불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없고 남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착각은 번뇌망상 가운데서도 큰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지루한 시간, 하기 싫은 공부에 어떻게 해서라도 적응해 성적을 올리느라고 탐구를 그만두지는 않고, 적응하기 싫어 공부 자체를 포기하지도 않고, 그릇된 공부와 마음속으로 싸우면서 자기 길을 찾은 사람, 그런 인재는 얼마든지 있다. 교사가 할 일은 그런 인재를 격려하는 것이다. 그런 인재를 찾아서 대학에 입학시키면 대학은 창조의 전당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공부 잘한 학생은 고등학교 우등졸업생으로 끝나고, 그것으로 족하고, 고등학교 때까지의 공부에 항거하면서 자기 길을 찾은 숨은 인재는 대학에 입학해서 다음 단계의 공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학은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의 연장이 아니고 새로운 출발이어야 한다. 그 점을 분명하게 해서 우선 대학부터 살린 다음 장차 고등학교까지의 교육도 개혁해야 한다.

       

   망하고 있는 대학 


   지금은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가에 따라 일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희망하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일생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자부해 더 노력할 필요가 없다. 공부라면 지긋지긋해 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희망하는 대학에는 낙방하고 아무 대학에나 입학한 학생은 좌절감에 사로잡혀, 해도 보람이 없는 공부와 인연을 끊는다.

   그렇다고 해도 졸업에 필요한 점수를 따기 위해서 교실에 들어가야 하지만, 강의란 것을 들어보면 실망한다. 학원강사나 과외선생은 알아야 할 것을 다 잘 알고 있어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했는데, 대학교수란 사람들은 흐리멍덩한 소리만 한다. 배우는 사람마저 멍청이를 만들려고 한다. 대학을 다니면 더 똑똑해져야 하는데 똑똑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곳이 대학이란 말인가?

   아는 것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것이나 말하면서 미해결의 문제를 두고 학생이 스스로 생각해 답을 찾으라니, 그럴 줄 알면 왜 비싼 등록금을 내고 배운단 말인가. 문제를 스스로 찾으라니 더욱 가관이다. 그런 일에 머리를 썩혀서 무얼 하는가? 졸업하고 입사시험을 보더라도 머리가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잡념이나 키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똑똑한 선배들이 거듭 충고하고 은밀하게 일러주는 대학공부의 요령은 우선 학문을 한다고 거드름을 떠는 교수는 멀리 하고 지식 전달을 착실하게 하는 교사를 찾으라는 데서 시작된다. 학원강사나 과외선생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비슷한 사람은 더러 있어 실망을 적게 하게 한다. 지식이 앞서면서 태도는 친절한 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미덕이다.

   인문학의 위기니 어쩌니 하는 말을 강의 내용으로 삼으면서 자학이나 일삼는 것은 꼴불견이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개탄이나 하는 말이 무슨 자랑이라고 알아주기를 바라는가. 그런 데는 얼씬거리지도 말아야 정신위생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연구한 성과를 강의한다는 교수도 없지 않으니 잘못 걸려들지 않도록 더욱 엄중하게 경계하라. 아직 검증되지 않은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백해무익이다. 자만과 공상은 전념이 되는 병이다. 구제역을 피하듯이 피해가라.

   노력은 적게 하고 학점이 잘 나오는 강의를 신청하라. 그런 강의의 족보를 인계받아라. 이따금 출석해서 웃어주기만 하면 좋은 점수가 나오는 강의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전과목이 최고점수로 장식된 성적표는 선택을 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취직을 할 때 성적표를 보자는 곳이 많으니 성적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컴퓨터와 영어회화는 필수이다. 그밖에도 취직에 필요한 공부는 시간이 나는 대로 해두어라. 어차피 수지 맞추기는 글렀지만, 등록금 낸 밑천을 조금이라고 뽑으려면 그런 과목을 찾아다녀라.

   그래도 무언가 공부다운 공부를 하려면 고시공부를 시작하라. 고시공부는 할 만하다. 합격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는 말할 필요가 없으며, 공부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고 하면서 자기를 달래는 것만은 아니다.

   고시공부에는 권위 있는 교재가 있다. 교재를 쓴 사람이 학자라고 자처하면서 학설상의 문제점 같은 것을 논한 대목이 있다고 언짢게 여기지 마라. 법학을 학문으로 하는 것과 고시공부는 아주 다르다. 교재에서 미해결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지 않고 확실한 지식을 잘 정리해놓은 대목이 중요하다. 믿고 따르고 외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다. 외는 것은 자신 있다. 정답이 있는 시험이니 얼마나 신이 나는가.

   수학능력시험에서처럼 만점은 주지 않고 점수가 짠 것을 자랑으로 삼지만, 고시 출제위원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 수학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뒤에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불만스러운 세월을 보내다가, 고시에서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법학 학점을 얼마 이상 따지 않으면 고시에 응시하는 자격을 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기득권을 확장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만이 있으면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얻으면 된다. 대학의 등급을 낮추어서도 법학과에 입학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전과나 편입학을 알아보자. 그 길이 없으면 다시 입학하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시공부를 택하는 학생이 나날이 늘어난다. 그래서 대학이 거대한 고시학원이 되고 있다. 법학을 공부해 고시에 합격한 법조인이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를 움직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빚어지는 대학의 위기가 나라의 위기이고, 나라의 위기가 대학의 위기이다. 법조인이 다스리는 나라는 헌병이 지휘하는 군대와 같다. 지휘받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힘은 전투력이 아니며, 전투력을 파괴하는 작용이나 한다.

   한국의 법조인은 나라 안에서나 큰 소리를 칠 따름이고 대외경쟁력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경제나 지식을 발전시키는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법률에 관한 업무를 대외적으로 개방하면 외국 변호사들이 대거 진출해 국제적인 활동을 벌여 한국 변호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법률문제가 국제적으로 얽힌 폭과 양상이 나날이 확대되는 시대에 국내용 법조인을 양산해서 무얼 하겠다는 말인가?

   양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한국의 국내용 법조인들은 법밖에 모르고 다른 전문지식은 없다. 법 공부도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해서 창의적인 개발 능력은 없다. 수학능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학문의 길은 외면하고 고시공부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고시에 합격하면 일생의 목표를 완전히 달성했으니 공부할 필요가 없다. 시험만능주의, 합격의 영광, 만점의 신화 같은 것들이 인성을 황폐하게 하고, 대학을 망치며,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살아날 길이 있는가


   교육을 살리는 혁명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거대한 움직임이 일거에 일어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대하지 말자. 지금의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하자. 창조작업을 하는 연구로 강의 내용을 삼아 학생들이 동참하게 하면서, 학생들의 능력을 개발하는 방법을 찾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

   구술고사라는 것이 생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대학이 창조의 전당이라는 데 동의하고 그렇게 할 의향과 능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진력하자. 누구도 반대하거나 방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본보기를 들어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연구에 바쳐야 할 시간을 잘라내 나는 이 책을 쓴다. 다른 분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힘을 합치기 바란다.

   창조하는 교육을 하려면 대학부터 달라져야 한다. 대학이 먼저 변하면 그 하위의 교육이 변하게 할 수 있다. 대학의 교수는 스스로 개혁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이 더 크고, 여건을 탓할 만한 이유가 상대적으로 적다. 제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새로운 교육을 시작할 수 있다. 싸워서 이긴 다음 개혁을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개혁을 하면서 개혁의 확대와 발전을 위해 싸울 수 있다. 
   대학의 교수가 교육혁명의 주동자가 되어 동참자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교수가 교육혁명의 주동자가 되어 창조하는 학문을 스스로 하면서 학생을 가르쳐 동지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그럴 능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도도 관습도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잘 해야 한다. 학생이 잘못 선발되어 대학을 망치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대학이 창조의 터전이고 학문의 전당일 수 있게 하는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기회인 구술고사가 혁명의 진원지이고, 구국투쟁의 시발점이다.

   대학이 살아나는 길이 있는가? 있다고 하면 있다.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있다. 대학이 일거에 달라지리라고 기대하지 말자. 그런 일은 없다. 대학의 교수가 모두 대학을 살리고 학문을 살리는 투사가 되리라고 기대하지 말자. 그런 일도 없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은 지금 분발할 때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창조하는 능력을 죽이지 않고 스스로 가꾸어온 학생들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대학에 지원하고, 정당한 평가를 거쳐 대학생이 된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이 통일 조국의 앞날을 밝히는 데까지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위해 기여한다. 그 점에 대해서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자.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응시자가 부당하게 낙방하는 경우도 있다고 인정된다. 구술고사라고 해서 일거에 바르게 되지 않는다. 문제를 잘못 내고 평가를 적절하지 하지 못하는 교수가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 일이 있어 낙방을 한다고 해서 비관할 필요는 없다. 입학을 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대학에는 미련을 두지 않고 다른 대학을 찾아볼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자.

   세상에서 알아주는 대학은 혁신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존의 방법으로 학생을 선발하기를 희망하고 구술고사를 새로운 기회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평가의 등급이 낮은 데 분개해서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학은 이번 기회에 분발할 수 있다. 창조의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라면 그런 곳을 찾아갈 만한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차이가 대학뿐만 아니라, 학문의 분야에도 있다. 지금 잘 나가고 잘 팔리는 학문은 혁신을 원하지 않는다. 창조의 능력을 가진 학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금 천대받고 있는 학문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힘을 써서 부당한 평가를 뒤집어놓고자 한다. 그런 분야의 교수가 분발하고 있는 현장에 들어가 동참자가 되는 것이 슬기로운 선택이다. 

   좀더 깊이 들어가 말한다면, 근대를 이룩하고 이끌어온 학문은 자만심에 가득해 새로운 시도를 멀리 하고 혁신의 필요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근대 동안에 부당하게 격하된 학문은 근대를 극복하고 다음 시대를 이룩하기 위해서 분발한다. 창조의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에서 고등학교까지 푸대접받은 학생이 앞쪽을 택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뒤쪽을 택해서 미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앞쪽에 속하는 현재의 학문이 어느 것이고, 뒤쪽에 속하는 미래의 학문이 어느 것인가 가려서 논해야 이 대목의 논의가 완결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결론은 말하지 않고 문제를 던지고, 내 말에 이끌리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지 않고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 좋다.

   창조의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 어느 대학, 어느 분야의 입시에도 실패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수학능력시험 같은 입시로 학생을 선발하는 경우에는 창조력은 낙방과 직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학에 입학해 원하지 않는 공부에 시달리지 않는 덕분에 위대한 창조자가 되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그 길이 어디 있다고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할 필요는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자기 스스로 찾고 개척하는 길만 창조의 길이다. 예를 들어 말하는 것도 부질없다. 이미 알려진 것은 무효이다. 아직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위대한 창조가 시작된다.


   수학공부와 문학공부


   이제 구술고사로 돌아가자. 구술고사에서 무엇을 묻고, 어떻게 답하는 것이 마땅한가 생각해보자. 이 책은 구술고사 준비용 참고서가 아니다. 논의를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예로 구술고사를 택한다. 구술고사가 전환의 계기이고, 창조력의 시험장이기 때문에 계속 거론한다.

   구술고사가 구술고사다우려면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수학능력시험에는 나오지 않은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러면 대학 공부를 미리 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평범한 물음을 던져 해답을 스스로 구하게 해야 한다. 구술고사에서도 응시자가 예상한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외운 대답을 말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외운 답을 말하는가 자기 생각을 말하는가는 표정에 나타나 있다. 표정관리를 잘 해서 위기를 모면해도 재질문을 하면 당황하고 만다. 문답 훈련을 한 대로 응답하면 재질문도 거뜬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말자. 허위를 진정인 것처럼 말하면 들통이 나게 마련이다.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라고 하는 것이 적합한 문제의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 응시자들은 대부분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당황해 하고, 머뭇거리고, 더듬거리다가 마지못해 한두 마디 했다. 예상문제에 놓고 미리 준비해온 대답을 적당하게 변조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리를 갖춘 말을 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경청할 만한 대답은 극소수였다.

   구술고사에서 주는 점수는 0점에서 8점까지이다. 수학능력시험은 만점이 몇 점이라고 정해놓아야 하지만, 구술고사는 위에서 도표를 그려 나타낸 것과 같은 이유에서 점수 상한선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입시는 객관화된 기준을 가지고 진행되는 행정절차이므로 8점을 최고점으로 하는 제도를 받아들여, 8점에다 8점에서 ∞점까지를 8점에다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과학부가 아닌 어문학부를 선택했는가?”라고 한 질문에 대한 갖가지 대답의 요점을 점수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까지 열거해보자.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해도 말이 되지 않은 경우는 물론 0점이다. 1점에서 6점까지 평가할 수 있는 대답의 본보기를 들기로 한다.

   여기 제시하는 대답은 본보기이지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없고, 가능한 대답은 무한히 많다. 무한히 많은 답 가운데 몇 가지를 택해서 본보기로 삼을 따름이다. 대답을 간추려 적은 것은 논의를 전개하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하는 대답은 더 길고 자세하다. 대합할 시간을 10분 주는 것이 예사이다. 시간을 얼마나 사용하는가는 채점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10분을 넘기는 것은 곤란하다. 5분 정도 말하고 멈춘 다음 보충질문을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구술고사는 몇 사람 교수가 동시에 평점한 다음 평균한다. 이 글 서두에서, 세 교수가 앉아 있는 방에 한 학생이 들어와서 맞은편에 자리 잡는다고 했다. 시험관이 셋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더 많으면 더 좋으나, 교수 수가 많지 않고, 부담이 크기 때문에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세 교수는 대답을 듣고 서로 알지 못하게 각기 채점한다. 채점 결과를 평균하는 작업은 구술고사가 대개는 다른 사람들이 맡아서 한다. 

   세 교수의 평점은 일치하지 않는다. 혼자 채점하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다.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고, 그 이유는 견해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는 크지 않다. 점수 분포를 미리 정해두기 때문에 점수가 박한 사람과 후한 사람의 차이는 미세하다. 평균을 하면 그런 정도의 차이 때문에 생긴 문제는 해소된다. 지금부터 적는 점수는 어느 한 교수의 평점이라고 해도 좋고, 세 교수 평점의 평균이라고 해도 좋다.

   지금부터 적는 대답은 요약이다. 실제 대답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산만하다. 중간에 말이 막히기도 하고 앞뒤가 어긋나기도 한다. 당황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 턱 놓고 하고 싶은 말을 자유스럽게 해도 말은 글과 달라 반드시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말하는 어조나 태도나 추가되어 부정확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 글로 적으면 혼란이 생긴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파악한 내용만 간추려 적고 논의를 계속한다.

 

       문학은 고매한 이상을 추구해 황폐해진 인간성을 치유한다. (1점) 

수학은 싫고, 문학은 좋다. (2점)  

수학은 재미없고, 문학은 재미있다. (3점)

수학은 푸는 것이고, 문학은 외는 것이다. (4점)

수학은 딱딱하고, 문학에는 인간미가 있다. (5점)

수학 공부를 할 때에는 적절한 교재를 선택해야 하고, 문학 공부에는 적절한 교재가 없다. (6점)

수학 공부는 순서대로 해야 하고, 문학 공부는 하고 싶은 것부터 해도 된다. (6점) 

수학은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고, 문학의 경우에는 가능한 답을 각자 생각해낸다. (6점)

수학공부는 사고를 따로 분리시켜 발달시키지만, 문학공부는 사고, 감정, 가치관, 실천을 하나로 포괄하는 전인적인 향상에 기여한다. (7점)

수학공부는 특별한 훈련이어서 수준이 높아질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더욱 단절되지만, 문학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을 더 잘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널리 이해되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결과를 내놓는다. (7점)

수학공부의 새로운 창조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전문학자라야 할 수 있지만, 문학공부는 입문 단계에서 이미 기존의 견해와는 다른 창조가 가능하다. (7점)    

문학공부는 문학창작과 창작된 문학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이중의 작업이지만, 수학공부는 그런 구분이 없는 단일 작업이다. 성격이 서로 다른 문학창작과 창작된 문학에 대한 이해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사고를 넓히고 탐구를 확장하는 것이 문학공부의 장점이다. (7점)


   문학은 이상을 추구해 황폐해진 인간성을 치유한다고 하는 것이 사전에 준비해온 대답의 좋은 본보기이다. 말이 너무 거창해 자기 생각인지 의심된다. 수학과 문학을 비교하지 않고 문학에 관해서만 말한 대답은 설사 진실성이 있다고 인정되어도 최하점을 주어 마땅하다.  

   싫은가 좋은가는 자기의 소감이고 수학과 문학의 특성은 아니다. 두 가지 공부에 관한 말은 더욱 아니다. 둘을 비교하기는 했어도 적절하지 못한 대답이다. 왜 싫고 좋은가 말해야 요구하는 대답에 가까워진다.    

   재미없고 재미있고 하는 것은 자기의 소감뿐만 아니라 대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가지 공부에 그런 차이가 있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재미란 무엇인가도 말해야 한다.

   수학은 풀고 문학은 왼다는 말은 문학에 관해서 잘못 생각한 결함이 있지만, 공부방법을 지적했다. 푼다는 것이 무엇인가 밝혀 논하면 더욱 진전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자기가 하는 말에 해결해야 할 의문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대답을 생각해야 한다.

   수학은 딱딱하고, 문학에는 인간미가 있다는 말은 싫고 좋고, 재미가 있고 없고 한 차이점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했다. 그렇지만 인간미가 무엇인지 말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문학이 지닌 인간미란 무엇이고, 수학에는 왜 그런 것이 없다고 하는가? 이런 반문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넷은 수학공부와 문학공부의 차이에 관한 주관적인 인상을 단편적으로 말하는 데 그쳤다. 반듯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고, 반대의 견해도 성립 가능하다. 발상의 전환은 어느 정도 보여주었으나 창조의 성과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의 셋은 양쪽이 서로 다르게 하는 객관적인 사실을 체계적으로 인식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바의 심층적인 이유를 드러내서 알려준다.  

   적절한 교재가 수학 공부에는 있고 문학 공부에는 없다는 것은 좋은 지적이다. 늘 경험한 바를 주의 깊게 살피고 정리해서 말했다. 문학 공부를 할 때에는 교재라고 할 것이 없다.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수학 공부는 순서대로 해야 하고, 문학 공부는 하고 싶은 것부터 해도 된다는 것도 잘된 대답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실을 표현을 바꾸어 지적했다.

   수학은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고, 문학의 가능한 답을 각자 자기가 생각해낸다고 한 것도 평가할 만한 대답이다.

   이 세 가지 대답을 서로 관련시켜 다시 정리하면 한층 진전된 논의를 펼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을 창조의 성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단서를 마련했다, 그러나 두 가지 공부의 방법이 어떻게 다른가 말하는 데 그치고 더 좋아하는 이유는 말하지 못했다. 객관적 사실의 체계적인 인식에 치우쳐 가치평가는 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

   다음 네 가지 대답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에서 가치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객관적인 타당성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가치문제 해결에도 적극 기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창조의 성과이다.   

   수학공부는 사고를 따로 분리시켜 발달시키기만 하지만, 문학공부는 사고, 감정, 가치관, 실천을 하나로 포괄하는 전인적인 향상에 기여한다고 한 것은 수학은 딱딱하고, 문학에는 인간미가 있다고 한 것과 비슷한 대답이지만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밝혔다. 문학공부가 수학공부보다 더 좋다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수학공부는 특별한 훈련이어서 수준이 높아질수록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더욱 단절되지만, 문학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을 더 잘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널리 이해되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결과를 내놓는다고 한 것은 깊이 생각해서 얻은 수준 놓은 대답이다. 이렇게 말하면 문학공부를 선택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수학공부의 새로운 창조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전문학자라야 할 수 있지만, 문학공부는 입문 단계에서 이미 기존의 견해와는 다른 창조가 가능하다고 한 것도 대단한 경지에 이른 대답이다. 창조는 두 학문의 공동 목표이지만, 달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전혀 다르다. 전문학자가 되서 수학을 창조하기까지는 기존의 수학을 학습하는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문학공부에서는 입문자가 전문학자를 능가할 수 있다. 창조하는 학문을 일찍 경험하면서 창조의 기쁨을 누리려면 문학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문학공부는 문학창작과 창작된 문학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이중의 작업이지만, 수학공부는 그런 구분이 없는 단일 작업이라고 한 데서 시작해 창작의 의의와 이해의 의의에 대해 많은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이것을 위의 세 가지 대답에서 한 말을 재론하는 좋은 논거로 삼을 수 있는 수 있다.  

   7점이 많은 것은 모두 대등한 수준으로 잘 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을 하나만 하지 않고 보충질문을 통해 문답을 계속하고자 해서 8점을 다 주지는 않았다. 첫째질문에 대답을 잘 한 응시자에게는 보충질문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능력이라도 다른 질문을 통해 수준을 다시 가늠해야 한다.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위에서 든 것들만은 아니다. 다른 대답이 얼마든지 있다. 지금 나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들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뛰어난 대답도 있을 것이다. 어떤 대답이 그런 대답일까? 이 책을 읽고 알 수는 없으니, 책을 덮고 생각해볼 일이다.

 

   2와 둘에 관한 질문


   물음에 대답한 말을 출발점으로 삼아 더욱 진전된 논의를 유도하기 위해 질문자는 “그것은 왜 그런가?”하고 되묻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대답하는 사람은 말이 막힐 수 있고, 어렵고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논리가 뒤틀릴 수 있다. 그 때문에 감점당한다면 억울하다.

   더욱 진전된 논의를 유도하려면 보충질문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보충질문은 먼저 한 질문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여 발상을 새롭게 해야 한다. 내용이 단순하고 표현이 명쾌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면서 한층 심오한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보충질문은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그 대답에 맞게 즉석에서 생각해내야 한다. 질문하는 사람이 창조력을 발휘해야 그럴 수 있다. 보충질문을 제대로 할 만한 창조력이 없다면 시험관의 임무를 맡지 말고, 교수직 사임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구술고사가 교수에게도 자기 시험의 좋은 기회이다.

   처음 질문은 미리 내놓은 것들 가운데 응시자가 골라 대답할 준비를 했으나, 보충질문은 즉석에서 제시해 생각해볼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대답하게 한다. 처음 한 질문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해도 보충질문은 예상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질문을 예상해 처음 대답은 잘 한 응시자가 뜻밖의 보충질문을 받고 당황해 헛말이나 하고 마는 것은 있을 수 있고, 또한 바람직한 일이다. 대답하는 사람의 능력을 시험하는 데 보충질문이 처음 한 질문보다 더 큰 의의가 있다.

   위의 평점에서 최상의 대답 둘을 만점인 8점보다 두 점 모자라는 6점으로 평점한 것은 보충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어보고 7점이나 8점으로 올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빗나가게 하면 감점을 하고, 대답을 잘 한 경우에는 점수를 가산한다.

   처음 한 질문이 질문의 한 본보기이듯이, 여기서 드는 보충질문 또한 한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처음 한 질문은 미리 준비한 몇 개 가운데 하나이만, 보충질문은 대답을 듣고 즉석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수많은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본보기로 드는 보충질문의 문제는 이렇다.

   “2은 어떻게 다른가?”

   문제가 무슨 뜻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응시자를 위해 설명을 해줄 수 있다.

   “수학에서 2라고 하는 것을 문학에서는 이라고 한다. 수학과 공부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려면 2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가장 쉬운 질문이다. 2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초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모든 사람은 2는 무엇이고 은 무엇인지 안다. 그런데 2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질문처럼 생각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2을 각기 따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기 따로 아는 것은 초보적인 앎이다. 2을 비교해 서로 같고 다른 점을 알아야 둘 다 제대로 안다.

   각기 따로 알고 있으면서 아무런 의문도 없던 것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발상의 전환이다. 친숙하게 알고 나날이 경험하던 것을 뒤집어 생각하고, 새삼스러운 문제거리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모든 창조의 출발점이다.  “2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하는 물음은 아직까지 아무도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문을 가지는 순간에 수십억 인류가 모두 바보로 지내온 잘못을 일거에 깨고 새로운 진리를 밝혀내는 놀라운 창조의 작업이 시작된다. 진리란 먼 곳에 있지 않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일상적인 무관심 속에 숨어 있다. 무관심의 장막을 걷어내고, 일상이 본임을 아는 순간 진리와의 대면이 가능해진다. 대면한 것의 정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창조의 결실이다. 

   2과의 차이점을 밝히면 그 성격이 더욱 명확해지고, 또한 그렇다. 2을 포괄하는 공통의 원리나 이해의 틀을 찾는다면 학문 일반이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 학문의 원리를 온통 밝혀낼 수 있다.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을 석학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생과 석학은 백지 한 장 차이밖에 없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바로 석학이 될 수 있다.

   “2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받은 학생은 당황했다. 예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답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질문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무엇을 묻는지 설명했다. “수학에서는 2라고 하는 것을 문학에서는 이라고 한다. 2이 같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2은 같기만 하지 않고 다르기도 하다. 2이 어떻게 다른지 말하면 수학과 문학의 차이점이 한층 명확해진다”라고 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리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채점의 기준을 정해놓을 수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예시는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점수를 -와 +로 표시한다. +를 받을 만한 대답을 들어본다. 첫 질문에서 6점 이상을 받은 응시자가 보충질문에서 +3점을 받으면 합계 9점 이상이 되어 8점 만점을 넘어선다. 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어 8점으로 평점한다.

   보충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4점 이상, +∞점까지도 줄 수 있으나, 구술고사도 점수를 내야 하는 시험이므로 최고점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 지금의 제도에는 그런 제한조건이 있다. 상한선이 없는 채점을 할 수 있으면 구술고사의 의의가 더 확대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어떤 응시자에게 만점을 주면서 그 학생은 학사과정이 아닌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 입학시켜야 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적 있다. 그러자 내 마음 속에서 다른 자아가 반론을 제기했다. “아니다. 바로 교수로 모셔야 할 인재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2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자.

  

2는 세계 공용의 숫자이고, 은 한국어 단어이다. (+1점)

2는 누구에게든지 항상 꼭 같고, 은 사람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다르다. (+2점)

2는 항상 2이지만 이면서 하나일 수 있다. (+3점)


   세계 공용의 숫자와 한국어 단어의 차이는 명쾌하다. 그러나 이미 드러나 있는 사실을 지적해서 말한 데 그쳤다. 일상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고의 단서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이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

   항상 같은 것과 경우에 따라서 다른 것의 구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경우를 정리해서 논하면 수학과는 다른 문학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창조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 

   2는 항상 2이지만 이면서 하나일 수 있다고 한 것은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실제로 구현한 창조의 성과이다. 말은 간단하면서 내포하는 의미는 아주 크다.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쟁점, 경우에 따라서 달라지는 양상을 널리 포용하고 있다. 학문연구의 바람직한 성과는 그런 표현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경우에도 위에서 들지 않은 대답이 얼마든지 있다. 내가 생각한 범위를 넘어선 곳에 참으로 뛰어난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지 못하니 말할 수 없다. 용기를 가지고 달려 나가는 사람이 무한하게 열려 있는 새로운 탐구의 주역이 된다.

           

   자료 찾아 대답하기


   2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자료를 조사한 다음 다시 와서 대답하라고 하면 한층 진전된 구술고사를 치를 수 있다. 

   도서관에 있는 그 많은 책 어디에 찾는 자료가 있는지 아는 것이 실력이다. 우선 몇 단계 추리를 해야 한다. 문학작품에 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알려주는 자료는 이 한국어 단어이므로 한국문학에서 찾아야 한다. 간략하면서도 뜻이 깊어야 하니, 산문보다 시가 적합하다. 시 가운데 짧은 것이 좋다. 오늘날의 시보다 옛날 시가 한국문학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

   시조가 그런 조건을 두루 갖춘 최상의 자료이다. 고시조를 집성한 책을 뒤지기로 한다. 을 명사로 쓴 것만 찾을 것인가 관형사로 쓴 것도 무방한가 문제가 되는데, 관형사로 쓰기도 하는 것이 문학의 다양성이라고 판단한다. 찾아낸 것들 가운데 전형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것만 들기로 한다. 현대 표기로 바꾸어 적는다.

   이제 수학의 2와 문학의 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분명한 예를 들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수학의 2:


     1+2=3

     1-2=-1

     2+2=4

     2-2=0

     1x2=2

     2x2=4

             

   문학의 둘:


     우리 몸 갈라 난들 두 몸이라 아지 마소    

     분형연기하니 이 이른 형제니라

     형제야 이 뜻 알아 자우자공하자스라


     우리 둘이 후생하여 네 나 되고 내 너 되어

     내 너 그려 끊던 애를 너 날 그려 끊어보렴

     평생에 내 서러워하던 줄을 돌려볼가 하노라


   앞 “분형연기”라고 한 것은 “分形連氣”이다. “형체를 나누고 기운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 바 형제라고 했다. "자우자공"이라고 한 것은 “自友自恭”이다. “스스로 우애를 가지고 스스로 공경한다”는 말이다. 형제는 둘이면서 둘이 아닌 하나라고 했다.

   뒤에서 “후생”이라고 한 것은 “後生”이다. “다음 생”이란 말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 애끊는 고통을 다음 생에는 네가 내가 되어 나를 그리워하면서 겪어보라고 했다. 둘이 둘이기만 할 수 없어 그리워하고, 둘로 나누어진 것이 다음 생에는 반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2이 다른 점을 이처럼 예증을 들어 보여주는 것은 문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모든 문학 작품은 예증이다. 문학론은 예증이 가지는 특징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논술해야 한다.

   수학의 2는 항상 일정하고, 다른 것들과 관련을 보이는 본보기들 사이에 체계적인 관계가 있다. 새로운 본보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주 힘들다. 최상의 수학자라도 2에 관한 새로운 수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학의 은 경우에 따라서 달라지고, 다른 것들과 관련을 보이는 본보기들이 각기 독립되어 있다. 새로운 본보기를 만드는 것이 쉽게 가능하다.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에 관한 시를 지을 수 있다.     

   수학의 2는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다. 2가 의미를 가지고 이해되기 위해서 밖에 있는 무엇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화가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어도 2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그것은 절대적인 불변의 영역이다.

   문학의 은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 앞의 시조에서는 형제이고, 뒤의 시조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형제의 우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움이 의 의미이다. 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관심을 어떻게 가지는가, 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은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 변화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것은 상대적인 가변의 영역이다.


   철학 불러오기


   이런 해명을 더욱 다듬어 일반화하면 이론이라고 할 것이 마련된다. 그렇게 하면 철학의 영역에 들어선다. 수학과 문학의 관계를 이론을 갖추어 해명하려면 철학이라고 하는 제3의 영역이 필요하다. 철학을 낯설게 여기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철학 또한 수학이나 문학만큼 쉽게 친할 수 있다.

   초등학교 학생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쓴다 하고서 철학을 등장시키는 것을 잘못이라고 나무라지 말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계속 공부한 사회 과목이나 윤리 과목에 철학이 들어 있다. 위에서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는 각기 그것대로 특성이 있다. 사회과 교과목에서 하는 공부는 그 둘과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 아니면 그 둘을 합친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한 적 있다. 그 질문이 암시한 세 가지 공부를 비교하는 작업을 여기서 하기로 한다. 세번째 공부인 사회과공부 또는 철학공부는 수학공부와 문학공부를 합친 것이 아니고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방법이 있어 셋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공부 또는 철학공부”라고 했는데, 그 둘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공부는 분야가 많고 내용이 잡다하다. 그 핵심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 철학이다. 철학을 생소하게 여기지도 말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철학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어도 이치는 따지므로 누구든지 철학을 하고 있다.

   자료 찾아 대답하기와 이치 따지기는 각기 그 나름대로의 결함이 있어 서로 도와야 한다. 이치는 추상적이므로 자료에서 예증을 구해야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자료는 아무리 많이 모아도 더 있다. 자료는 경향이나 가능성을 말해줄 따름이고 대상 전체에 대한 확정적인 해명은 배제한다. 그 작업은 이치의 필연성을 따져야 할 수 있다.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도 이치 따지기의 소관이다.

   철학은 수학과 문학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셋을 비교해야 서로의 관계와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그것이 이치 따지기의 기본과업이다. 셋의 관계나 차이를 해명하는 데는 문학의 방법, 철학의 방법, 수학의 방법이 각기 있어 셋 다 써야 한다. 문학의 방법으로 셋을 다 말하고, 다시 철학의 방법으로 셋을 다 말하고, 수학의 방법으로 셋을 다 말해야 온전한 해명이 이루어진다.    

   “수학・철학・문학은 어떻게 다른가?” 문제가 다시 이렇게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문학의 방법, 철학의 방법, 수학의 방법을 사용해 말하라.” 대학입시 구술고사에서 이렇게 묻는 것은 무리인가? 그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지금은 우선 내가 앞서서 가능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내가 전개하는 논의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가능한 시험일 따름이다. 다른 사람은 이보다 더 나은 새로운 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철학에서는 2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밝혀야 철학이 문제 해결의 어떤 측면에서 관여하는지 밝혀진다. 철학에서는 2가운데 을 사용하고 2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의 은 문학의 2와 다르다. 문학의 은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지만 철학의 은 고정되어 있다. 그 점에서 수학의 2와 같다. 그러면서도 “1+2=3”인 것은 아니다. 과 하나의 관계만 문제되고, 셋과의 관계는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와 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상반된 견해가 있다.

        

   (가) 하나는 하나이고, 이다.

   (나) 하나가 이 되고, 이 하나가 된다.

   (다) 하나는 하나이면서 이고, 이면서 하나이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은 수학과 다르다. 이렇게 갈라지고 더 없는 것은 문학과 다르다. 이렇게 갈라진 것들은 각기 그것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공존할 수 있어 문학과 상통하고, 타당성 여부를 놓고 논쟁하고 있어 수학과 상통한다.

   (가)는 수학에서처럼 불변의 원리를 말한다. (나)와 (다)는 문학에서처럼 가변의 원리를 말한다. (가)의 은 각기 따로 존재하고, (나)와 (다)의 은 투쟁하는 관계에 있다. 그러면서 (나)에서는 화합과 투쟁이 단계별로 나누어져 있고, (다)에서는 화합이 투쟁이고 투쟁이 화합이다.  


   수학으로 이루는 결실 


   2이 수학, 철학,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예증을 들어 살핀 바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데 수학의 방법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정리한 결과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 2=2   2

   철학: 2=둘  둘

   문학: 2 


   수학으로 이루는 창조의 결실은 이처럼 의문이나 반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체계를 갖춘다. 말은 아주 간단하면서 무한이 많은 사실을 지니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발상의 전환은 산만하게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거기서 시작한 새로운 창조는 체계화된 결과에 이르러야 완결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사고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함부로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  

        

   철학으로 이루는 결실


   수학에서 제시한 바가 무엇을 뜻하는지 일상적인 말로 옮겨 설명하는 것은 수학이 스스로 할 수 없고 철학의 소관이다. 철학은 학문에 대한 학문이어서 수학・철학・문학 비교론은 철학에서 잘 할 수 있다.

   수학의 2=2는 동일성의 원리이다. 2는 언제나 2여야 하고 1일 수는 없다. 동일한 것은 항상 동일해야 한다. 2은 순수성의 원리이다. 2처럼 다의적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순수한 개념에 다른 것이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철학의 2=둘은 순수성 상대적 배제의 원리이다. 철학의 은 한편으로 수학의 2와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의 과 같다. 개념의 순수성이 그 자체로 유지되면서 또한 다른 것들을 포괄해야 한다. 은 동일성 배제의 원리이다. 동일한 것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아야 한다. 위에서 든 (나)에서 “하나가 이 되고, 이 하나가 된다”하고, (다)에서 “하나는 하나이면서 이고, 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한 것이 그런 경우이다.

   문학의 2은 순수성 절대적 배제의 원리이다. 문학의 은 수학의 2와 아주 다른 가변성이나 상대성을 가진다. 개념의 순수성이 그 자체로 유지되지 않고 다른 것들을 포괄해야 한다. 은 동일성 배제의 원리이다. 이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고 하나일 수도 있어야 문학이 성립된다. 철학에서와 달리 문학에서는 이 조항이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 

   철학에서 정립한 이론을 간추려보자. 수학은 동일성과 순수성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철학은 순수성 상대적 배제와 동일성 배제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은 순수성 절대적 배제와 동일성 배제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철학으로 이루는 창조는 이처럼 체계화된 결실을 그 자체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나 의의에 대해 스스로 풀이하면서 이해를 구한다. 완벽한 체계를 고수하려고 하지 않는 열린 자세를 지녀 융통성이 있다. 수학의 체계에는 접근할 수 없는 사람도 철학과는 대화를 트면서 수학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어 어려운 말을 하면서도 이해하는 사람을 많아지도록 하려고 애쓴다. 


   문학으로 이루는 결실

        

   문학연구는 수학이나 철학에 견줄 수 있는 독자적인 방법이 없다. 철학의 방법을 가져다가 필요에 따라서 변형시켜 사용한다. 그러나 문학창작은 독자적인 방법이 뚜렷하다. 문학창작은 음악이나 미술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예술이고, 수학이나 철학과 한 자리에 서는 학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창작은 형상이면서 인식이다. 형상이라는 점에서는 음악이나 미술과, 인식이라는 점에서는 수학이나 철학과 경쟁한다. 수학이나 철학과 경쟁해서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가? 미리 염려하지 말고 결과를 보자.


  1+2=3

   1-2=-1

   2+2=4

   2-2=0

   1x2=2

   2x2=4


   이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다.

   누구나 우러를 수 있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

   가장 높고 영원한 별이다.    


   하나는 하나이고 이다.

   하나가 이 되고 이 하나가 된다.

   하나는 하나이면서 이고 이면서 하나이다.


   이것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땅덩어리이다.

   위에서 보면 서로 같고 다르지만,

   우리 모두 한 곳에서 나고 자라 저쪽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 몸 갈라 난들 두 몸이라 아지 마소    

   우리 둘이 후생하여 네 나 되고 내 너 되어


   이것은 산이고 나무고 잎이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고 눈짓이다.      

   이루지 못한 소망이고 미래의 꿈이다.


   수학・철학・문학에서

   천(天)・지(地)・인(人), 삼재(三才)를 본다.

   삼재는 셋이다.

   아니다. 삼재는 하나이다.

   눈을 다시 뜨면

   셋이 하나인 줄 아는 통찰을 얻는다.


   위아래가 없는 곳에서

   별은 생겨나고 소멸한다.

       

   땅덩어리들이 나날이 가까워져

   가고 오니 방향이 자주 바뀐다.

       

   마음을 비우면 하늘이 그 속에 들어오고

   꿈이 커서 땅을 짊어지고 다닌다.

        

   문학으로 이루는 창조의 성과는 이처럼 쉬운 말을 한다. 어느 한 가지로 개념화되어 있지 않은 언어를 사용해 체계를 넘어선다. 발상의 전환이 마침내 창조의 성과에 이르러 탐구 과정이 끝났다고 하지 않고, 창조의 성과가 발상의 전환임을 보여준다.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는 체계를 거부하고 발상의 전환을 더욱 새롭게 하는 것이 최고 경지에 이른 창조의 성과라고 한다. 깨달은 사람이 따로 있지 않고 누구나 이미 깨닫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마무리


   여기까지 이른 것은 대단한 진전이다. 수학・철학・문학의 차이를 이렇게 해명하는 원리는 세계를 통틀어 처음 발견되었다.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한 작업이 창조작업의 구체적인 결실을 얻었다. 창조작업은 연구의 내용과 방법에서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그 의의가 더 크다.

   이 결과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미비점을 찾아 계속 보완해야 한다. 연구의 내용과 방법 양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작업을 해서 상이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

   수학・철학・문학을 별개의 것으로 놓고 차이점을 찾다가 마지막에서는 그 셋이 별개가 아니라고 했다. 그 최종 통합 작업을 수학이나 철학에서는 하지 못하고 문학에서 했다. 말을 더 보태면, 수학은 이성에 머무르고, 철학은 이성에서 통찰로 나아가려고 하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학은 통찰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 점은 큰 시비거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문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편파적인 판정을 했다고 다른 두 분야에서 나무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통합작업을 세 분야에서 세 차례 한 다음에야 진정한 대통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초등학교 학생도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겠다고 서두에서 한 말을 되돌아보자.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학의 예증을 생소한 작품에서 가져왔다. 철학이 참여하면서 말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수학에 관해서는 그런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된다. 수학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논리는 초등학교 학생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도 풀어 밝힐 수 있고 대석학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원리를 밝히는 것이 학문에서 하는 창조 작업의 최상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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