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경(2003). 『교육과정과 교수방법』. 서울: 교육과학사.
제3장, pp. 56-61.
전통적인 인식론인 객관주의의 관점에서는, 실재와 언어 그리고 인식 사이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그들 간의 일치에서 진리를 구한다. 진리 혹은 실재는 인식 주체와는 무관하게 ‘저기’ ‘별도로’ 존재하며, 인간은 ‘이성’과 ‘감각 경험’을 통해 그러한 진리를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냄으로써 진리를 획득해나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지식이나 언어의 타당성은 그것과 실재의 대응성 여부의 확인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소위 ‘대응이론’ 혹은 ‘상응이론’(correspondence theory)이라고 칭해지는 이 관점에서는 진리의 판명이 분명한 것처럼 그것의 전달도 명백하고 단순하다. 인간은 오염되지 않은 실재 그 자체를 나타내는 언어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언어를 정확하게 구사함으로써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의 진리에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소통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외부세계와 상응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진술들은 ‘객관적’인 것이고, 인식 주체자의 배경이나 경험, 의견, 가치, 감정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관적’인 것으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최근의 대안적인 인식론에 있어서는 그러한 실재관, 진리관, 언어관, 지식관 등의 타당성이 송두리째 반박되고 있다. 이 관점에서는 첫째, 과연 절대 불변하고 궁극적이며 보편적인 실재나 진리 기준 등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는가, 둘째 그러한 실재를 ‘객관적으로’ 표상해 낼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원천 혹은 토대가 있는가, 셋째, 언어와 외계의 실재가 대응된다거나 언어의 의미가 확정되어 있다는 가정이 타당한가 등의 측면에서 객관주의의 논리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후기 Wittgenstein(1968)을 비롯 Toulmin(1953), Hanson(1958), Winch(1958), Kuhn(1970), Feyerabend(1975), Roty(1979), Glassersfeld(1995) 등에 의해 특히 강조된 이러한 입장에서는 실재, 진리, 합리성 등이 특수한 개념 체계, 이론적 준거, 패러다임, 삶의 양식, 사회 혹은 문화 등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본다. 즉 실재나 진리 등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대안적인 주장과 관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양한 의미들을 연출해낸다는 것이다.
실재에 도달하거나 또는 인간의 인식의 결과에 상응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려면 그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별도의 눈, 즉 인간의 눈이 아닌, ‘신의 눈(God's-eye view)이 필요하다(Willis, 1995) 그러나 그러한 눈은 아무리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인간에 의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은 결코 자신의 존재론적인 특성들, 예컨대 시대, 국적, 인종, 성별, 계층 등의 영향을 초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순수’한 이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실재에 관한 하나의 해석을 또 다른 관점과 비교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관찰이나 실험을 중심으로 얻어지는 감각 경험 자료를 지식의 기초로 삼았던 경험론과 실증주의의 입장 역시 관찰과 실험의 ‘이론 의존성’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그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으로 보면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선호, 기대 등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보는 객관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기초가 되는 감각 경험의 객관성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즉 감각 경험과 더불어 과학이 시작한다는 것과, 그것이 지식을 유도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 경험을 배타하는 관찰과 실험이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고 보는 이러한 믿음은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과학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가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에 입각하여 주의를 기울일 대상을 포착하게 된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대상을 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서로 다른 정보나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경우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며, 엄격히 말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같은 태양을 관찰하면서도 Brahe는 움직이지 않는 지구의 주위를 회전하는 천체를 보았고, Kepler는 지구가 그 주위를 회전하는, 우주의 不動의 중심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구성주의자인 Glassersfeld(1995)는 지식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아야 하며, 인식의 기능은 경험적 세계를 조직화하는 데 이바지 하는 것이지, 결코 객관적인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Maturana & Varela(1987/1995)는 “인식이란 ‘저기 바깥에’ 있는 바로 저 세계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임의의 한’ 세계를 되풀이하여 내놓는 일이다”(p.14).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視界를 체험할 뿐이다. 또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색채공간을 체험할 뿐이다(p.32)”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의 앎에 대해 알아내는 일은 마치 ‘눈에게 눈 자체를 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순환의 고리를 회피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구성하고 동시에 변형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식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이성 혹은 감각경험의 객관성과 확실성 등이 의심을 받게 됨에 따라, 결국은 지식의 본질에 대한 종전의 관점 전체가 그 타당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지식의 토대 자체가 객관적이고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얻어진 인간의 지식 체계 역시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영원불변하는 ‘진리’라기보다는, 상대적이고 맥락적이며, 잠정적이고, 오류가능성이 있는 ‘믿음 체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지식의 성장 과정은 ‘입증된’ 지식의 축적 혹은 ‘참’인 것의 증가 등으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관점에 의한 끊임없는 재해석의 과정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의 대안적 인식론에서는 객관주의자들이 상정했던 ‘객관성(objectivity)’의 아이디어를 포기하고, 대신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아이디어를 제안(Glassersfeld, 1995)하거나, 또는 객관적 진술과 주관적 진술의 개념을 재정의(Rorty, 1979)한다. 객관주의자들이 말하는 객관적인 진술, 즉 특정한 언어 혹은 명제가 외부세계와 상응하는지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대신 집단 내에서 합의(consensus)여부를 ‘객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또한 언어의 의미 역시 확정되거나 독립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과는 달리, 사용되는 과정이나 맥락을 통해 의미가 생성되고 변화하는, 살아있는 실체라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Wittgenstein의 후기 작업 이후 주목되어온 언어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철학적 해석학, 구성주의, 해체주의 등에 의해 심층적이고 다각적으로 파헤쳐지고 있다.
Wittgenstein은 자신이 초기에 개진했던 언어의 그림이론의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후기 작업에 이르러 그것을 부인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단어가 관찰자와 독립된 대상을 지칭한다는 생각, 즉 세계 자체의 그림이라고 보았던 전기의 주장 대신, 그는 한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공동체 내에서의 게임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생겨난다는 새로운 입장을 전개하였다. 언어는 그것 밖에 있는 절대적인 참조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그 내부의 사용 규칙 및 다른 개념의 맥락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의미가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듯이, 언어 역시 논리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만큼 확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하나의 언어적 기호에 절대적이고 순수하며 고정된 의미는 없다는 철학 내부의 자각은 특히 Derrida(1967)에 의해 강하게 표출되어왔다. 그는 기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확정되지 않은 채 시간과 더불어 변하고 유보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언어의 의미가 언어 체제 내에서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Saussure에 의해 이미 지적된 바 있으나, Derrida는 이른바 ‘差延(differance)’이라는 개념을 창안해내었다. 차연이라는 개념에 더해 Derrida는 ‘散種(dissemination)’이라는 말을 도입하여 기호로 나타난 단어는 처음 사용된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곳곳에 흩어지며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의미작용을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개념을 동원하여 Derrida는 하나의 언어적 기호가 어떠한 다른 실재를 고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는 기존의 언어관을 해체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문장은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장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Rorty의 주장도 이러한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철학적 해석학을 주장한 Heidegger(1927)와 Gardamer(1975)는 이성과 이해는 역사성을 가지며, 텍스트의 의미는 해석자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갖는 의견, 관심 등과 상관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의미는 고정된 것일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텍스트의 고정되고 일의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려 했던 종전의 객관주의적인 해석학과는 궤를 달리하였다.
지금까지 종전의 지배적인 관점이었던 객관주의 인식론의 입장과, 그것의 허점을 논박하면서 대두되어온 최근의 대안적인 인식론의 입장을 진리관과 언어관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