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Polanyi의 生涯와 業績 ... 3
Ⅱ. 學問의 自律性 ... 13
Ⅲ. 人格的 知識 ... 28
Ⅳ. 存在와 知識의 位階 ... 47
Ⅴ. 敎育의 두 가지 過程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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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Michael Polanyi(1891-1976)의 生涯와 業績
이 소개서의 주인공인 Michael Polanyi는 1891년 Budapest에서 유태계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도운수업을 경영한 부친과 Budapest의 지성계에서 널리 알려진 모친을 둔 그의 지적 배경은 학자로 성장하는 데에 애초부터 유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형제 가운데는 경제인류학의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Karl Polanyi [각주 1: Karl Polanyi의 주저서인 The Great Transformation(1944)은 국내에서 번역된 바 있다(박현수 역, <거대한 변환: 우리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 민음사, 1991).] 가 있다. Polanyi는 어려서부터 화학에 흥미를 가졌으나 유태인으로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Budapest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화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후 독일의 Karlsruhe에 있는 기술대학에서 물리화학(physical chemistry)을 공부하였다. 그는 학문생활의 초기에 열역학의 제 3법칙을 연구한 것이 계기가 되어 Albert Einstein과 학문적인 교분을 가진 적도 있다.
일차대전 중에 Polanyi는 군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에도 물리화학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면서 여러 편의 논문을 써서 1919년에 Budapest 대학에서 화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논문은 흡착작용에 관한 독창적인 이론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920년에 Berlin 대학의 섬유연구소에 취직하여 많은 야심에 찬 동료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섬유질과 금속의 구조를 X광선을 이용하여 분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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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 분야의 많은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며 그 후 계속해서 약 20년 동안 그 나름의 독보적인 주제에 사로잡혀 몰두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당시 화학적 반응의 비율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고체에 작용하는 기체분자의 흡착현상의 연구에서 상당한 수준의 창의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23년에 Berlin에 있는 Wilhelm 물리화학 연구소의 소장인 Fritz Harber의 초청으로 연구소의 한 부서의 책임자로 일하였고, 1926년에는 Berlin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았으며, 그의 업적이 인정되어 Max Planck 연구소의 종신회원이 되었다. 이 때 그는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그 중에는 H. Eyring, H. Mark, E. P. Wigner 등과 같은 이름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그의 학문생활은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점차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Hitler가 정권을 잡기 이전에도 Polanyi는 Max Planck 연구소의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유태계 학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저항하는 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위험의 신호가 점차 명백해짐에 따라 그는 연구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영국으로 이주하여 Manchester 대학의 물리화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그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의 연구실에서 기체확산의 특성을 연구하는 정확한 방법뿐만 아니라 화학적 반응의 전환상태에 관한 혁신적인 이론들이 나오게 된다. 이 부분의 연구는 그 후 약 반세기 동안 이 분야의 연구와 논의에서 귀중한 자료로서 주목을 받았다. <원자반응(Atomic Reaction, 1932)>이라는 과학서가 이 즈음 발표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러 Polanyi의 관심은 전혀 다른 주제로 바뀐다. 그것은 전체주의가 과학과 인간의 문화 전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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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위협에 대한 경고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얼른 보기에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Hungary에서 보낸 젊은 시절에서부터 그의 형인 Karl Polanyi와 더불어 광범하고 사변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친구들의 사회주의적인 사상과 당시 풍미했던 실증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었다. 다만 그러한 관심의 표명이 그의 자연과학분야의 연구 때문에 한동안 지연되었다가 주변의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더욱 성숙한 면모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자유주의자였다. 1930년대의 다른 지성인들과는 달리 그는 자유를 위협하는 논조가 좌파나 우파의 양쪽에서 비등하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그는 당시 영국이 Marx의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과학은 사회적인 목적을 달성하도록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사조에 휩싸여 있음을 우려하였다. 예컨대, 과학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J. D. Bernal 같은 인물은 과학을 중앙에서 통제하기를 주장하였는데 Polanyi는 그 입장에 도전하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계획된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조에 저항하고 싶어하는 과학자들이 그 당시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대응할 논리가 빈약하였다. 따라서 Polanyi는 그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 즈음에 자유사상을 정리하는 세 권의 중요한 저서가 계속해서 발표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적인 관심을 <자유에 대한 모독(The Contempt of Freedom, 1940)>, 경제적 관심을 <완전고용과 자유무역(Full Employment and Free Trade, 1945)>, 그리고 과학적 탐구에 관한 관심을 <과학, 신념, 사회(Science, Faith and Society, 1946)>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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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별개의 저서를 통해서 각각 표명하였다.
Polanyi는 그의 동년배인 F. A. Hayek와 Karl Popper처럼 자유와 질서간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문제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 인간 행위, 지식의 역동적인 과정을 해명하는 데 관건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1948년에 화학교수직을 포기하고 대신 Manchester 대학에서 “사회연구(social studies)”라는 특수한 명칭으로 교수직을 수락하여 1958년까지 그 직책을 지켜나갔다. 교수직이라고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가르치는 의무가 특별히 면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Rockfeller 재단이 연구비를 지원해 줌으로써 이 기간동안 그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는 집중적인 사색과 집필을 할 수 있는 남부러운 여건을 향유할 수 있었다. 1951년에 Polanyi는 <자유의 논리(The Logic of Liberty)>라는 일종의 예고적인 저서를 내 놓았으며, 그 후 Gifford의 강좌(1951, 1952)를 출발점으로 하여 드디어 하나의 혁신적인 사상을 드러내었다. 약 10년의 집중적인 연구 끝에 나온 알찬 열매가 바로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 1958)>이라는 명저이다. Polanyi는 이 역작이 이전의 학문적인 전통에 비추어 너무도 다른 입장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이나 유관한 분야의 학자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인간의 연구<The Study of Man, 1959)>라는 후속 저서를 출간하여 그가 이러한 입장을 택하게 된 좀더 큰 범위의 맥락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인격적 지식>의 부제가 “탈비판철학(a Post-Critical Philosophy)”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olanyi는 물리화학을 활발히 연구할 때 비판적, 경험적, 분석적 방법들을 이용하였지만 그 방법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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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결코 우선권을 인정해 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종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식론을 제창하였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공헌이다. 그는 철학의 인식론에서 거론되어 온 형식논리가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학문활동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였다. 그는 자연과학도로서 약 30년 간 성공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면서 학문의 뿌리가 더 깊은 곳에까지 뻗어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발견적인 행위의 이면에는 우주의 숨겨진 질서를 발견하려는 개인 혹은 일단의 탐험가가 가진 신념, 헌신, 책임감이 앞서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보통 큰 의미를 부여하는 명제화된 지식이나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은 오히려 이에 부수하는 결과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은 이러한 발상의 일대 전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는 학문의 체험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뼈 속 깊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즉 이른바 “黙知(tacit knowledge)”가 있다고 보고 그 살아있는 체험적인 측면을 그의 인식론에 두드러지게 반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가 접하는 지식을 그 결과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발견되는 방식과 더불어 설명하고자 하였다.
Polanyi가 이러한 창조적인 통찰을 글로 써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환영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우선 난해하였으며, 설사 그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이전의 관례적인 인식론과 지혜를 포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는 냉정하다거나, 그들의 판단은 가치중립적 이라거나, 과학은 어떤 형식적인 논리를 따른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Polanyi는 이러한 생각이 과학공동체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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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실상과 괴리된 가공적인 생각에 불과한 것으로 느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혁신적인 사상을 다른 저서, 예컨대 <암묵적 차원(The Tacit Dimension, 1967)>, <앎과 존재함(Knowing and Being, 1969)> 등을 통해 열정적으로 굳히고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차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예컨대, 과학철학의 새로운 관점을 등장시킨 T. S. Kuhn(1962)도 많은 부분에서 Polanyi의 통찰을 계승하고 있다.
1959년에 Polanyi는 Oxford의 Merton 대학의 연구교수로 옮겼다가 1961년에 은퇴하였다. Manchester를 떠난 뒤 약 15년 동안 그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철학, 정치, 미학 분야의 주제를 다룬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겸손하였으나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다른 동료나 일반인들에게 설득하는 데 남다르게 열정적인 일생을 보냈다. 그가 써낸 다양한 주제의 논문들은 <앎과 존재함(Knowing and Being, 1969)>, <과학적 사고와 실재(Scientific Thought and Reality, 1974)>, <의미(Meaning, 1975)> 등의 명칭으로 여러 차례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그는 다양한 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많은 대학(Princeton, 1946; Leeds, 1947; Aberdeen, 1959; Nortre Dame, 1965; Wesleyan, 1965; Manchester, 1966; Toronto, 1969; Cambridge, 1969)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1976년 2월 22일 85세의 장수를 누리고 타계할 때까지 그는 한 학자로서 성취하기에는 대단히 많고 깊은 것을 우리에게 선물하였다.
Polanyi가 제시한 사상의 특징은 탁상공론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가 설파하려는 이론이나 주장은 철두철미하게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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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는 독창적인 과학의 이론을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이 형성될 때부터 전파되는 경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것을 반성적으로 추상화한 것이 그의 새로운 인식론의 골격을 이룬다고 보면 된다. 그 결과는 철학에서 누대에 걸쳐 쌓아온 전통적인 인식론과 그 내용의 면에서 크게 대조된다. 그의 사회관도 역시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동시대의 지성인들이 단지 관념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동경할 때 그는 그들의 이론을 토대로 정치무대에 오른 정권의 정책에서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생각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용기를 보였다.
Polanyi의 견해나 이론은 늘 시대를 앞서는 예견력을 가졌다. 그의 박사논문에서 제시흡착작용에 관한 이론은 불행하게도 Harber와 Einstein 등 당대의 지배적인 과학자들의 불리한 증언으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였고 그 주장은 반세기 후에야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에게는 노벨상을 받은 두 명의 제자가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이 같은 학문상의 경력이 스승의 영향으로부터 비롯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위대한 업적을 지금도 인정해 주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그의 자연과학적 공헌은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연과학도에서 사회과학도로 변신을 꾀하여 다른 사상가들이 희망을 걸고 있던 시대사조를 역행하면서까지 공산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혜안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 나타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그의 외로운 주장이 타당함을 입증하였다. 그의 새로운 인식론은 아직 철학분야에서 주류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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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받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날로 재조명되고 있다. 과학에 관한 체험적인 관점이 아쉬울 때 그의 견해는 새로운 요소가 되고 있다(Coulson & Rogers, 1968). 그의 인간과 과학에 대한 견해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부 심리학자들에게도 환영을 받고 있다. Schwartz(1974)는 그의 논문을 편집하여 심리학의 전문지인 <Psychological Issues>에 全載하는 열광적인 성의를 보였다. Brownhill(1983)은 Polanyi의 지식론이 교육에 주는 새로운 의미를 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심지어 그의 견해는 그가 직접 관여하지 않은 분야인 철학적 인간학에서도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Holbrook, 1988).
Polanyi의 사상은 방대하고 심오한 것이 특징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이라는 경계를 그는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는 물리화학적 현상, 정치와 경제 현상, 예술과 신앙 등등 어느 것 하나 남겨놓지 않고 다루었다. 대개의 창의적인 학자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그의 논문이나 저서에는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생소한 개념들이 난해한 문체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의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연결시켜 볼 경우 뚜렷이 그 사상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적은 지면이지만 여기서 가급적 그 사상의 통일성을 특징 있게 소묘하고자 한다. 그의 업적에서 특별히 제외된 것이 있다면 물리화학에 관심을 갖고 탐구했던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소개자가 門外漢이라는 점도 있지만 전체의 논조에서 너무 이질적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도 그 체험의 측면에서 이 글에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그의 과학적인 삶은 후에 그가 학문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그 학문관은 이 글의 첫 절에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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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Polanyi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4년 전부터다. 이전에 배운 교육학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서 그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교육학을 정립시켜야 한다는 당돌한 임무를 가지고 “외로운 방랑아”로 헤맬 때, 나는 우연히 그의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이라는 저서와 만났다. 그 만남은 十年知己와의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다. 물리적으로는 가깝게 지내지만 사상을 소통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이방인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참으로 낯선 곳에서 산 그가 바로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결코 낯선 정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정표의 구실을 하였다. 그는 비록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위치한 곳을 그의 지도에서 정확하게 지표화해 놓았으며 그것은 나에게 한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 교육학도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내가 이제까지 걸어 온 길을 시대를 앞서 자신의 지도 속에 친절하게 作圖해 놓았던 것이다.
어떻게 한번도 상면한 적이 없는 두 사람이 이제까지 다른 학자들이 다루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서로 비슷한 이론적인 맥락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신념이 다른 한 사람에 의해서 지지받는다는 것이 이처럼 대단한 안도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튼 그 후부터 그의 다른 저서와 논문을 차츰 수집하여 읽어 나가면서, 내가 불확실함 속에서도 부단히 찾아 왔던 곳이 결코 미로의 막다른 골목이 아님을 점차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거의 어떠한 책도 그의 저서처럼 설레는 흥분으로 독서한 적이 없다. 또 무슨 이야기가 다음 페이지, 다음의 논문, 다음의 저서에서 나올까? 그의 저술을 아끼는 마음으로 읽어 온 지금, 그의 사상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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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널리 그리고 다소나마 쉽게 소개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하나의 약속된 임무처럼 느껴진다.
이미 지적했듯이 Polanyi는 교육학자의 테두리에 넣기에는 너무도 넓은 범위의 세계를 작도한 지적인 탐험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방대한 세계지도 위에 교육이 어떤 맥락에서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그에게 신뢰를 보내고 크게 감동한 위치도 바로 그 곳에서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그의 사상을 소개할 때도 자연 그 부분에 큰 비중을 둘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교육이라는 것이 마치 그의 사상의 자연스런 귀결처럼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구성방식은 Polanyi가 그의 사상을 구성하는 방식과 크게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사상은 그것을 소개하는 필자의 선입견에 의해서 다소나마 재구성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재해석의 체계는 Polanyi와 같은 대학자의 큰 생각을 적은 지면으로 소개할 입장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피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이 소책자가 우리들 사이에 Polanyi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육학도들이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교육이라는 것을 재검토하는 과정을 밟아 주기를 권고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교육학은 그것이 관심을 두어야 할 교육의 차원에는 무관심하고 교육과는 거리를 두어야 할 개념들을 타학문으로부터 끌어들이는 중대한 範疇錯誤를 범하고 있는 듯 하다(장상호, 1986, 1990). 오늘날 분석철학, 행동주의 심리학, 기능주의적인 사회학의 재생산이론 등이 무분별하게 교육학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이 모든 것들이 Pola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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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는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교육에 대하여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을 시사하고 그 교육학이 정착할 넓은 터전을 지정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 전체를 교육학적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최근에 내가 교육학의 자율성을 의식하고 그 자리매김을 모색해 온 것(장상호, 1991)을 둘러싼 좀더 큰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사상체계에 각별한 애착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Polanyi의 이론체계에 동조할 수 있는 독자는 내가 근래에 제시하려는 새로운 교육관에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 권의 책을 쓰기에도 모자랄 방대한 내용을 이 짧은 글에서 소개하는 것이 무리라고 느껴진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 독자에게 내가 보일 수 있는 하나의 특별한 친절이 있다면 특수한 부분의 Polanyi의 사상을 소개할 때마다 그것을 더 세부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原典의 관련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 원전은 Polanyi 저서의 약호로서 두 개의 영문자를 사용하여 표시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다만 그 가운데 국문으로 번역된 바 있는 SF(Science, Faith and Society)와 M(Meaning)의 경우는 그 관련된 페이지를 번역본(이은봉 역, 1990; 김하자와 정승교 역, 1992)을 기준으로 표시했다. 독자는 원전보다는 번역본을 구입하기가 쉬우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착오가 없기를 바란다.
Ⅱ. 學問의 自律性
사람들에게 “학문이란 무엇이며 왜 하느냐?”는 질문을 하면 그 대답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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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응은 반응자의 학문에 대한 수준을 정확히 반영한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학문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그 본질에 대한 모종의 定說이 또한 따로 있을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기실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속성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변용되어 왔고 또 지금도 변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있었던 학문의 역사적인 사실을 접하는 우리들 개개인의 체험도 다르다. 따라서 앞서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당대의 학문공동체의 상황과 그것을 논하는 개인의 체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학문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그 방식의 면에서 크게 다른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 한 부류는 직접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반성적으로 해답을 얻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탐구의 직접적인 체험이 없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학문에 대한 개념을 단지 전달받거나 혹은 학문 밖에서 규정하는 학문의 기능적인 측면만을 곁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Polanyi는 분명히 전자에 속하며, 이 점 때문에 그의 학문관은 종전부터 말로 전해오는 철학적인 사유나 대개 문외한들이 택하는 기능주의적 시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학문 내부의 실상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다. [각주 2: 이제부터 좀더 자세하게 Polanyi의 학문관을 탐색하게 될 터인데 먼저 이해되어야 할 것은 그가 말하는 학문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그가 주로 언급하는 대상은 “과학(science)”이다. 독자는 이러한 그의 언급이 학문의 하위영역에 국한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차츰 밝혀지리라 보지만, Polanyi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엄밀한 한계를 거부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과학은 학문 일반을 의미한다고 해서 조금도 무리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독자는 일단 염두에 두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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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nyi의 학문관은 과학이 과학 외적인 관심사와 세력에 의해서 지배될 위기에 처한 특별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형성되었다. 1930년대의 영국에서는 과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출현하였다. 당대의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이란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나왔으며, 순수과학이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공리적인 개념을 내세워 그들은 과학이 대중의 복지에 봉사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통제되어야 한다는 논조를 폈고, 물론 대중은 그 취지에 동조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Polanyi는 누구보다도 진리와 같은 문화적 가치가 공공선이나 공리적인 개념으로 종속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가 영국과 같은 자유국가에서 조성되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스스로 사회적 용도와 목적의식에서 해방된 진리탐구의 중요성을 대변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LL ch.5 ; ST ch1 & 2).
사회적인 유용성이라는 가정에 근거해서 혹은 지배적인 “목적(cause)”을 위해서 학문의 자유를 유보하는 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는 당시 유럽대륙의 전체주의 국가의 상황을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주권을 대표하는 국가의 복리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거부된다. 독일의 Hitler 정권이나 소련의 Stalin 정권은 과학을 국가적인 利害의 하위수단으로 간주했으며, 과학자체를 위한 과학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로 인하여 당시 이들 나라에서 학문을 포함하는 모든 문화가 파괴되는 실상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Polanyi는 그러한 사실들을 자세하게 예증하면서 과학이 더 이상 그것 이외의 목적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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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했다(SF13 ; LL28, 58-64 ; PK157-8, 180-3, 237-9 ; ST25-33, ch2, 62-4).
Polanyi는 과학이 그 자체의 목적을 떠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존립하는 것에 반대한다. 과학의 최고목표는 진리탐구다. 과학은 그 자체를 위해 자유롭게 추구되어야만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학문 자체가 다른 어떤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고급의 인간적인 의무사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식활동 자체에 內在的인 興味와 價値를 느낄 수 있다(SM62, 84 ; KB54, 83). 이 때문에 적어도 그러한 수준에서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용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식 자체를 위한 연구를 거침없이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LL ch.1 ; ST ch.3). 과학의 본질이 지식에 대한 사랑이라면 지식의 용도가 우리들의 일차적인 관심일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경우에 따라 진리추구를 위해서 물질적, 사회적 보상을 거부할 수도 있다.
Polanyi가 과학의 유용성을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니다. 과학은 결과적으로 그 용도를 증대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용도가 과학의 내재적 가치를 떠나거나 앞서 갈 때 당장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올 위험성에 직면한다. 첫째, 그는 과학을 하는 최고의 동기유발은 아무래도 그 내재성에서 나온다고 본다. 어떤 중요한 발견도 그것에 근거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PK183). 따라서 좀 어색한 표현이 될지 모르나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할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진리탐구라는 순수한 동기에 의존해야한다. 그 순수한 동기에 의한 발견이 선행하지 않고는 유용성의 개념은 그야말로 무용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그는, 우리가 정치적 권력, 경제적 이익, 사회적인 지위와 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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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안정, 기타 무의식적인 욕구라는 하급수준의 영역에 기초하여 과학이라는 상급수준의 영역을 평가할 경우에 결국에는 후자는 전자의 것으로 타락하게 된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주목한다(SF75, 112-3 ; LL 44-5 ; ST32). 이러한 맥락에서 Polanyi는 흔히 우리가 성과(fruitfull-ness)에 비추어 진리를 규정하는 방식에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애써 강조한다(PK147). [각주 3: Polanyi는 과학과 기술이 각각 다른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인정한다(LL73-6 ; PK178-80). 예컨대, 지식은 眞僞가 문제이지만 기술적 행위는 성공여부가 문제다. 학문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지만, 기술은 어떤 알려진 이익에 봉사하는 새로운 운영원칙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새로운 지식은 특허를 받을 수 없지만, 발명은 특허를 받는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 간에는 상대를 평가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기술의 혁신을 이룩할 수도 있고 또 기술의 진전이 간접적으로 과학의 지원세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각자가 특성을 살릴 때 증대되며, 한쪽이 다른 편의 수단으로 종속될 때 그 관계는 유지되기 어려워진다.] 그는 “과학적 연구를 그것 자체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교도하려는 시도는 어떤 경우나 과학의 발전으로부터 그것을 빗나가게 하려는 시도다(KB59)”고까지 단언한다.
따라서 Polanyi는 학문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사회적인 제도와 여건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과학자집단, 국가, 그리고 일반대중이라는 서로 다른 주체를 상정할 수 있다. Polanyi는 과학의 발전단계에서 그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의 해법은 대체로 과학이란 그 자체의 독자성을 가진 세계이기 때문에 국가와 대중은 그것을 진흥시킬 수 있는 지원을 하되 결코 그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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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내용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LL30, 41, 49, 58, 76-8, ch.6). 국가와 학문 간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때 전자가 후자를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가는 대중의 복지라는 표어를 내세워 과학을 계획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 바 있다. 대중은 과학자나 그 집단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탐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와 설비를 마련해 주어야 하며, 바로 그러한 방식에 의해서 그들은 종국적으로는 과학으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
과학은 우리 사회의 한가지 하위문화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Polanyi는 그것을 “탐험가의 사회(TD ch.3)”라고 규정한다. 학문은 일단 우리의 감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어떤 심층의 실재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PK5-6).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체계를 발견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실재의 깊이는 학문이 진전됨에 따라 더욱 심화된다. 우리의 이론적인 체험의 깊이가 심화됨에 따라 그것은 상식의 세계를 점차 초월한다. 그 체험의 깊이가 심화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틀을 개선해 나감을 의미한다. 학문적인 활동은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인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혹은 아직 우리의 인식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은 실재를 향해 전진한다. 이제까지 무수한 학자들이 그 작업을 수행해 왔고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발견될 수 있는 존재의 넓이와 깊이에 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실재의 조그마한 편린 이상의 것이 아니다. 학자는 스스로의 예견적인 틀을 수정하면서 그 미지의 실재를 스스로 예측하고 그 예측했던 더 심층의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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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접촉하여 한없는 만족을 느낀다. 이런 의미에서 학자를 탐험가라고 말한다고 해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Polanyi는 그러한 탐험가들만으로 구성된 “과학의 공화국”을 상정하고 있다(LL ch.4 ; St25, 62 ; M266-8). 공화국은 어떤 독립된 영토와 국민과 입법을 갖추고 있을 때나 적용되는 말이다. 그것은 고유한 왕국의 하나로서 그 나름의 높은 원리를 구체화시킨다. “발견은 탐구에 흠뻑 빠진 마음에게만 다가온다.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 과학자는 그의 목적을 강렬하게 공유하고 그의 수행을 예리하게 통제하는 비슷한 마음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격리된 장소를 필요로 한다. 학구적인 과학의 풍토는 치외법권적이어야만 과학적 의견으로 그 규칙을 준수할 수 있다(KB64)” 그 치외법권적인 자유란 과학적 탐구의 과정에서 모든 것이 과학자 자신에 의해서 규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들 자신의 관점에 준해서 탐구하며, 그 결과를 그들 자신의 지적인 쾌감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그것을 자신의 견해에 따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공동체는 그것 이상의 더 높은 권위에 의해서 지배받아서는 안 된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과학을 어떤 종류의 권위도 거부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폐습이다. 사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학은 신화와 상식의 권위, 기독교적인 권위, 정치적인 권위와 충돌하였고, 그들 간의 투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따라서 일반인이 과학과 권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Polanyi는 과학이 모든 종류의 권위나 전통을 배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본다(TD63).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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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신화, 기독교, 정치 등 과학 외적인 권위를 거부해야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떤 종류의 자유라도 용납받아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한 외부의 권위로부터 과학이 간섭받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은 그 자체의 자유로운 탐구를 촉진하고 통제하고 보호하는 그 나름의 특수한 권위를 확립해야 한다(KB65).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학문은 협동작업이다. 연구는 이 지구상에 있는 수천 수만의 자유로운 과학자가 단일한 체계적인 목표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LL88-9). 한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단편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개개의 창조력이 고립되어 있을 경우보다 연구의 목표가 유리하게 성취될 수 있도록 집단의 성격을 조성하는 것이 학문공동체의 큰 과제다. 그것은 한사람의 성취가 다른 사람의 성취를 위한 토대가 될 때 가능한 것이다(LL35, KB58). 서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적인 학자들이 정의하기 어려운 가정과 표준을 공유하면서 한 단계씩 서로 협동해 나가야 한다. 이처럼 집단적인 창의력의 영역이 살아나려면 상호적인 참고와 적응이 필요하며, 그에 따른 모종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과학에서의 권위와 전통이라는 것은 타 분야의 것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과학은 점차 더 높은 실재를 탐색하는 작업이며, 그 높은 수준의 실재에 대한 해명은 이전에 발견한 실재에 대한 해명과 갈등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그 속성상 서로 다른 수준간의 갈등과 괴리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고, 세대마다 과학을 심각하게 재주조해 왔다. 일류학자들 간의 “극적인 競合(LL51 ; ST17)”이 늘 일어나며, 이 때 그 과학의 권위는 쇄신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다. 과학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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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은 이러한 이유에서 결국 자체의 전통을 쇄신해 나가는 특별한 내용을 포함하여야 하며, 그 특수한 전통이 과학의 공화국에서 계속 전승되어야만 한다. Polanyi는 이 과학 내부의 권위간의 조정문제를 예리하게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남다른 탁견을 제시한다.
과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대립이 있을 수 있고, 그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이 때 과학의 공화국에서 적용되는 오직 하나의 기준은 眞理다. 그러나 막상 무엇이 진리이며, 그것은 어떻게 검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우리는 다시 막연해지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Polanyi는 이제까지 적용되어 왔던 진리규정의 제반 방법들, 예컨대, 대응설(PK304), 반증설(PK20-1, 47, 63-4, 167), 정합설(PK294), 성과중심설(PK147), Marx-Leninist 인식론(PK237-9), 합의중심설(PK216-9, 217) 등을 검토하고 이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래서 결국 그는 진리의 기준을 재정의(PK71, 104, 254-7, 333n)해야 하는 난제에 스스로 봉착한다. [각주 4: 과학에서 지적인 열망이나 하나의 공헌에 대한 과학적인 관심 혹은 과학적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서 Polanyi는 신뢰성 혹은 정확성, 그 체계성, 탐구주제의 내재적 흥미라는 세 가지 척도를 자주 지적한다(PK135-9, 174, 187-9, 217-8 ; TD66-7).]
흔히 진리의 기준은 개인을 떠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진리에 대한 하나의 체계적인 입장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Polanyi는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진리의 수립은 형식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일단의 개인적인 기준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PK71).” 이것은 종전의 인식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혹은 금기시되는 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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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하다. 진리에 대한 판정은 과학자로부터 나온다. 과학자는 진리추구를 사명으로 삼고 있으며 “p는 眞이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그것이 진정 진리인 것으로 믿고 있다. 각자는 그 나름의 기준에 의해서 진리를 판단한다고 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어떤 것을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성실한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그것은 裏書를 하지 않고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처럼 일단 믿을 수 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PK254-5). 각각의 과학자는 그 수준에 관계없이 진리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가 진리라고 믿는 바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접할 때 우리는 흔히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혹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라는 대립된 논쟁에 휘말린다. 그러나 Polanyi는 이러한 이분법적인 문제를 초월한다. 먼저 이 문제는 주관의 문제도 객관의 문제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普遍性”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PK300-324). “인격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은 구분된다. 적어도 인격적으로 과학자가 어떤 것을 주장할 때는 그 주장이 보편성을 가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저 아무렇게나 한 번 해 본 생각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 다음에 그 보편성은 그것이 절대성을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다. 과학이 발전하는 세계인 한 그 어떤 지식도 절대적인 위치를 계속 시킬 주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주장은 일단 그 주장자들에게는 진리성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편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믿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고, 그 보편성의 주장 사이에 좀더 상대적으로 유망한 지식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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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이제 문제는 각각 다른 진리의 기준을 가진 과학자가 그들의 생각이 진리라고 주장한다고 할 때, 그 우열의 수준을 평가하는 별도의 절차가 무엇이냐에 집약된다.
그 절차로서 Polanyi는 학문공동체 내부의 상호조정을 든다. 그런데 그 조정이라는 것이 Polanyi에 있어서는 종전에 생각해 오던 것보다는 훨씬 복잡해진다. 학문공동체의 권위는 대개 현재의 패러다임이나 혹은 소수의 원로 과학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나 현존지식은 유능한 권위이지만 최고의 권위는 아니다. 따라서 학문공동체에서 특정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사전에 인정하는 것은 위험하다(SF90 ; LL13, 15, 53-4 ; PK164, 170 ; KB51).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위대한 발견의 주장은 그것이 이상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 위대한 발견이 잘못으로 인하여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권위의 통제 하에서도 개인적인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Polanyi는 개인에까지 세분화된 통치권(SF104), 상호통제의 원칙(TD72-74), 내부적 긴장관계의 유지(KB54) 등의 독창적인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그것은 중앙에서의 통제와 임의적인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정이다(KB51). 주지하다시피 이 용어는 Adam Smith가 서로 독립된 생산자와 소비자가 시장의 상품가치에 따라 행동할 때 가장 큰 물질적 만족을 얻는다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학문공동체는 다른 과학자들의 결과가 주는 이득으로 인하여 상호조정 된다고 본다. 여기서 과학자의 이득이란 물론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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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더 높은 수준의 실재와 만나는 정신적인 것이다.
학문공동체는 자유로운 사회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회로 볼 수 있다. 학문공동체의 다른 하나의 기능은 지식체계간의 경합이다. 누구의 이론이 더 앞선 것이냐에 대한 예리한 대립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치열한 경합을 통해서 학문은 발전할 수 있다. 혁신적인 지식은 수년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의 소산이다. 창조적인 과학자가 당대의 정상과학을 추월하는 이론을 제시했을 때 과학공동체가 당장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수락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 지식체계의 우열을 당장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절차가 현 단계로서 보장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혁신적인 이론의 우수성을 금방 입증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끈기있게 그가 믿는 바의 이론이 우수함을 동료들에게 설득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토로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하면서 자기 자신의 의견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유형의 지식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다. 그 공식은 개개인이 서로의 생각과 노력을 존중하고 서로의 생각을 재조정할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차츰 분명해지겠지만 Polanyi가 말하는 지식은 언술화 하기 어려운 暗黙的인 要素를 지니기 때문에 간단한 관찰이나 논증으로 그 조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설사 진리가 논증가능 하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알 수 있으며 또 그것을 판별할 방법은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각 과학자는 각자의 수준에서 자신의 생각이 보편성이 있을 것으로 믿으며 그 보편적인 타당성(universal validity)을 인정받고자 한다(SF105 ; LL22, 31, 40 ; PK22, 189, 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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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396). 예컨대 “두 가지 명제에서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두 가지 명제 사이의 논의에서 논증적 성격은 더욱 더 사라지게 되고 한쪽이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부터 다른 쪽이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변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M94).” 결국 진리에 대한 판정은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그 기준은 원래 아무에게나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다(PK174). 이처럼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지식의 평가는 그것을 감식할만한 자격을 요구하므로, 낮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식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주장하려는 사람은 상대가 교육에 의해서 좀더 세련된 지적인 기준을 획득하도록 돕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서로 수준이 다른 사람들 간에 서로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의 중첩된 영역이 생길 것이고(KB55-6, 84-5), 결국 낮은 수준의 것이 높은 수준의 것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때가 올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복종과 헌신이 결국 조건화, 사회화, 혹은 종교적인 교조화와는 다른 방식, 즉 교육에 의해서 가능해지고, 그 교육이 결국 과학의 자율적인 발전을 보장한다.
Polanyi는 특별히 과학의 권위와 전통을 강조한다. 후에 더 자세하게 다룰 주제이지만 그 전통 속에는 암묵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그것을 직접 나타내거나 전달하거나 이해하기는 어렵다. 문외한이 과학적 진술을 수락하는 것은 권위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자가 자신의 전공과는 다른 분야의 연구결과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또한 같은 분야의 학자라고 하더라도 동료 학자의 권위에 상당히 의존해야만 한다(TD64). 과학의 공화국은 독립된 제반 창의력이 연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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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아직 미결된 성취를 향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하나의 전통적인 권위에 봉사함에 의해서 단련되고 동기 지워졌으나 이러한 권위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단선적이고 경직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다. 그 권위가 계속적으로 존속하는 것은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독창성을 통해서 그것이 부단히 쇄신되고 그 쇄신된 표준과 전통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기 때문이다.
그 전통의 전수는 성격상 예술적, 도덕적, 법률적인 전통이 전수되는 양태와 같다. 과학도 하나의 실천이다(ST21-23). 과학의 전제들을 망라하는 언명이란 상상할 수 없다. 학문의 현실은 사실상 말로 나타내거나 전하기가 어렵다. 위대한 전통의 지지자는 실천의 무의식적 기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신의 전제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 규칙이라는 것도 명확하게 정식화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의 공통된 기반은 모든 과학자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고 그들이 과학의 전통적인 훈련을 실제로 받음으로써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Polanyi는 그 전통의 전수방법에서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과학공동체의 이상이 견습 수업과 도제식 전수에 의해서 그 구성원에게 체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SF78, 98, 128 ; ST88). 직접 학문에 참여하면서 학자로서 그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실감해야 하며 바로 그러한 실습을 통해 전통이 전수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교과서에 쓰인 고답적인 말을 되 외우거나 학문 자체는 모르면서 그것이 갖는 학문 외적인 기능만을 강조하는 이제까지의 행태가 지니고 있는 맹점을 극복할 수 있다.
학문공동체는 지역적 특징을 갖기 마련이다(LL56-7).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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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과학은 서양에서 유래하여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어 왔다. 그 전달의 각 단계에서 전적으로 독창적인 해석적 판단이 부가되기 마련이다(SF82-83). 이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반성을 해보자. 우리나라의 학문공동체는 혹은 내가 소속한 특수한 학문공동체는 Polanyi가 말하는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얼마의 점수를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지성의 자유와 가치에 대한 확신을 물질적이고 생물적이며 본능적인 안락의 욕구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수단의 기능에서 찾거나 사회적인 복지를 증진시키는 수단의 기능에서 찾고 있지는 않는가? 그럼으로써 우리의 사유와 모든 사유작업의 위상을 물질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과학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당국이나 과학공동체는 그 저차원성과 그 저차원의 인식에 호소하여 과학을 진흥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국내사정은 과학은 그 유용성이라는 동기에서 해방되어 과학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과학공동체와 그 취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대중 속에서 고유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Polanyi의 논지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학문관은 우리에게 적어도 학문공동체가 고수해야 할 이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이 생각과 반성을 염두에 두고 Polanyi의 연관된 사상의 총체에 점차 접근해 보기로 하자. 그의 사상을 소개함에 있어서 필자가 먼저 학문공동체의 문제를 다룬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는 Polanyi가 그의 사상을 전개시키는 핵심적인 거점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는 자신의 학문생활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좀더 큰 세계에 대한 사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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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거꾸로 말하면, 학문공동체를 종전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좀더 확대된 세계의 틀 안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을 그가 확보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찾은 그 좀더 폭넓고 깊이 있는 의미체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 글에서 다루어야 할 나머지 주제다. 우리는 <인격적 지식>이라는 절에서 Polanyi가 말하는 과학적인 지식은 더욱 보편적인 지식의 한가지 종류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은 그 깊이와 수준에서 위계가 있다. 이 문제는 후속하는 절에서 다룰 <존재와 지식의 위계>라는 범위에까지 확장된다. 인간은 스스로 그의 존재의 수준을 드높일 우주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존재수준과 지식이 입증되고 또 개인 각자가 그 높은 수준의 것을 열정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육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교육의 두 가지 과정>이라는 절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Ⅲ. 人格的 知識
Polanyi의 공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인식론에 가하는 혁명적 관점이다. 인식론은 오랫동안 철학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식론은 주로 철학자들의 사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Polanyi에게는 그것이 실제 학문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실상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철학자들은 지식 가운에서 주로 겉으로 드러난 명시적인 측면만을 주목하고 그것을 형식화하고 상징적으로 조작하는 일에 치중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행은 체험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경시하고 결과적으로 인식활동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내용을 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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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가져 왔다. 그러한 탁상공론에서는 우리가 인식을 하는 동안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의미를 체험하는 통로와 과정이 논의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언어로 쓰여진 것이거나 지도나 혹은 수학적 공식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은 일견 명백하고 객관적인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Polanyi가 내세우는 주장은 그러한 객관성과 외재성만으로 우리가 생활에서 접하는 지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엄밀한 규칙과 측정으로 드러낼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오로지 인식주체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그의 새로운 인식론적인 견해를 “人格的 知識(personal knowledge)”이라는 표제를 붙여 제창한다. 인격적인 지식 속에는 언제나 명료화할 수 없는 “暗黙的 次元(tacit dimension)”이 있으며, 그것은 객관적인 방식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제까지 인식론에서 이러한 중요한 부분이 객관성과 확실성이라는 그늘에 묻혀버렸다고 보고 그것을 재건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인식은 인식주체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그 인식주체를 중심적인 위치에 놓고 설명되어야 한다. 인식주체와 가장 가까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身體다. Polanyi는 우리 모두는 결국 우리의 신체 내부에 있는 端緖에 의존하여 모든 것의 의미를 파악한다고 보고 그 신체와 외계의 대상을 연결시키는 과정에 어떤 것이 개입하느냐하는 문제를 추궁하면서 점차 인식론적인 실마리를 찾아간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것을 지각한다고 할 때 그 지각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그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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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이 의존하는 주된 단서들은 신체 내부에 있다. 그 신체 내부의 것은 객관성, 명료성, 공공성이 희박하며 얼른 보기에 지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것이 Polanyi가 말하는 이른바 “黙知(tacit knowing)”라는 것이다(SM14, 16-7, 23, 25). 묵지는 어두운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종전의 인식론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묵지의 위상을 복권시키기 위해서 Polanyi는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그릇된 생각을 해체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고대 희랍에서 발원한 서양철학의 주된 전통 가운데 하나는 理論과 技術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들은 산수를 푸는 능력과 장기를 잘 하는 것은 그 내용과 가치의 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Polanyi는 그러한 서양철학의 전통을 근거 없거나 불필요한 신화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아는 기술”과 “행하는 기술”은 다같이 기술이라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다를 바 없다(PK54-5 ; TD7 ; KB126). 그래서 그는 이제까지 전통적인 철학이 간과했거나 평가절하했던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이 그가 부각시키려고 하는 묵지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일단 간주하고 나서, 기술의 한 특수한 형태로서의 “아는 기술”에 관한 것들을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여러 가지 형태의 “행하는 기술”에서 유추해내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부터 우리가 우선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Polanyi가 말하는 인격적 지식은 다양한 종류의 능력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비단 학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 도덕, 예술, 종교, 각종의 특수한 기술 등 모든 분야의 능력을 포함한다(PK337 ; SM98 ; KB163-4, 182 ; ST91-2,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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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의 특수한 기술로서는 예컨대, 자전거 타기, 줄타기 곡예, 매듭짓기, 피아노 연주, 의사의 진단과 치료, 사람을 식별하는 일, 예술작업 등등이 있다. 제반 기술의 한가지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을 전부 명시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Polanyi의 특별한 공헌은 비학문적인 지식 및 기술의 성격과 그 형성과정에 비추어 학문적인 지식에 대한 이제까지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간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이러한 묵지의 부분이 우리가 그 엄밀성과 객관성을 인정해 주는 과학적 지식 속에도 있음을 강조한다. 이제부터 그가 그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해결은 어쩔 수 없이 특수한 이론적인 용어에 익숙해져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Polanyi는 기술을 숙달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과정이 있다고 주장한다(PK55-7 ; SM30-3, 44-9, 52, 57 ; M54). 그 하나는 “補助識(subsidiary awareness)”이고, 다른 하나는 “焦點識(focal awareness)”이다. [각주 5: 동양의 학문에서 “識”은 인식작용을 가리키는 말의 하나로서,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을 통합하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Polanyi의 “awareness”와 잘 대응한다. 초점식은 의식의 상태에서 이루어지지만, 보조식은 그 의식의 정도에 있어서 초점식과 차이가 있다(PK92). 그러나 보조식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적인 과정과는 다르다(KB194, 197). 보조식은 원한다면 의식에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에 토대를 두고 있는 초점식의 의미가 상실된다.] 그가 이 두 가지 과정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망치질이다(M54). 우리는 망치질을 할 때 그 망치의 손잡이가 우리의 손바닥에 닿았다고 느끼지 않고 망치부분이 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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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렸다고 느낀다. 이 때 망치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기술의 한 요소로서 손바닥의 느낌이 매우 중요한 인식으로 작용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망치 끝에서 일어나는 사건에만 주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례에서 그 손바닥의 느낌이 보조식이고 망치 끝에서 주목하는 부분이 초점식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계는 망치질뿐만 아니라 모든 숙달된 수행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지식에는 우리가 주로 그 의미를 깨닫는 부분과 그 깨달음을 보조하는 또 다른 깨달음이라는 두 가지 과정이 동시에 작용한다. Polanyi는 이러한 두 가지 과정이 단순한 기술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지식을 창출해나가는 과정에도 작용한다고 보고 초점식의 기초가 되는 보조식에 큰 비중을 두면서 지식의 일반적인 구조를 밝혀 나간다(ST119).
묵지는 보조적인 제반 특수사항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명시적으로 기술할 수 없는 긴 통로를 거쳐 마지막으로 하나의 통합된 초점식에 이른다(PK57-8, 327, 344 ; KB161-2). Polanyi는 이러한 일반적인 앎의 구조가 네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KB212 ; TD10-13). 그것들은 각각 機能的, 意味的, 現象的, 存在的인 側面이다. 기능적인 측면이란 보조식이 우리를 정합적인 패턴의 통합으로 이끄는 기능을 말한다. 의미적인 측면이란 일단의 특수사항들이 통합되어 하나의 정합적인 실재의 의미를 얻는 것을 말한다. 현상적인 측면이란 보조식에 의해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형태가 현상으로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의 존재적인 측면은 결국 이러한 세 가지 측면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묵지적인 특성들이 종합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위계적인 실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이끄는 측면을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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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어떻게 그러한 측면이 있게 되는지를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초점식에 나타난 실재는 어떤 양상으로 파악되는가? Polanyi는 “우리가 의식적인 경험을 할 때는 언제나 그들을 의미 있게 통합하는 힘을 역시 갖게 된다(KB162-3)”고 말한다. 이는 초점식에서 그 의미가 파악되는 바로서의 실재는 항상 통합적인 것으로서 포괄적인 판단력을 전제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일단의 서로 연결되지 않은 보조식의 세부항목들을 하나의 전체 속에 부분들로 파악할 때, 우리가 주목하는 초점은 지금까지 파악되지 않았던 그 세목들을 초월하여 한꺼번에 그들의 협동적인 의미의 이해로 전환된다(PK92, 97, 398 ; SM28-9 ; TD7-8, 55 ; ST91, 94). 다시 말하면, 서로 분리되어 있던 무의미한 것들이 갑자기 어떤 하나의 맥락 속에서 우리의 주목의 대상이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의 수준에서 실재의 총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Polanyi는 “com-prehension(會得)”이라는 합성된 단어를 써서 나타낸다.
보조식의 제반 세목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초점식의 총체적인 의미를 이루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Polanyi의 해답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다. 다만 그는 “平衡化(equilibration)(PK341-3, 398)”라는 자연발생적인 경향을 가정한다. 그가 이를 설명하는 데 자주 동원하는 간단한 사례가 형태심리학에서 말하는 사물에 대한 지각이다(SF18 ; PK57 ; SM28-9 ; TD6, 43 ; ST121). 여기서 지각은 지각자가 분명하게 통제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하여 실마리를 선별하거나, 그것을 분명한 형태로 만들거나, 그것을 동화한다. 형태는 하나의 전체적인 구성물이며, 이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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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적인 요소의 기초 위에 출현하지만 그 출현된 내용은 결코 그 요소적인 것으로 환원되거나 형식적인 조작으로 대치될 수 없다(SM49). 이러한 식으로 모든 지식은 보조식과 초점식의 양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Polanyi가 제안한 묵지의 일반적인 구조를 정리해 두고 거기서 함축되어 나오는 묵지, 혹은 그것을 좀더 포괄적으로 기술할 때 쓰이는 “인격적 지식”이 어떤 것인지를 더욱 자세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도식을 토대로 종전의 인식론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지식의 특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지면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 중 다섯 가지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묵지를 포함하는 모든 인격적 지식은 말의 경계를 뛰어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Polanyi는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 수 있다(TD4 ; KB141-2)”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그는 묵지의 “列擧不可性(unspecifiability)”을 강조한다(PK62-3, 87-91 ; SM33). 여기서 그 열거성은 우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 전체를 그것에 공헌한 그 요소들로 세분하여 언어로 자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묵지는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특수하게 열거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남아 있는 부분이 있을 만큼 풍부하기 때문에 그 세부항목을 완전하게 열거할 수 없다. 이 부분은 동양권에서 강조하는 “不立文字” 혹은 “言語道斷”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두 종류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데 그 하나는 암묵적인 지식이거나 다른 하나는 암묵적인 지식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KB195).” 이러한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묵지의 개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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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Polanyi는 과학, 더 나아가서 학문의 과정을 모종의 엄밀하고 형식화된 분위기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모든 노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초점식은 보조식의 특수한 세부항목들이 통합되어 의미화된 것이지만 그 통합은 그것을 가져오게 한 보조적인 것들에는 내재해 있지 않은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그 초점식이나 그에 의해서 포착된 실재를 그것을 뒤에서 가능하게 해준 보조식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러한 방식에 의해서 초점적인 지식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 설사 그러한 특수한 세목들을 망라한 후 각각으로 분리해서 열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단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비통합적으로 우리가 주의를 주는 순간 그들은 그것이 가져오는 통합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비교적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KB165, 197). 예컨대, 앞서 우리는 보조식과 초점식의 관계를 밝힐 때 망치질의 예를 들었다. 그 경우 만약 망치질을 하는 사람이 손바닥에 느끼는 충격에만 신경을 쓰면 이전에 가졌던 망치와 못 사이의 충격에 대한 의식을 놓치게 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가령,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손가락에 지나치게 주의를 집중하면 연주를 망치게 된다(TD18 ; KB146). 무대에 나가 연기하는 사람이 그 연기내용과는 다른 무대의 세부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면 공포심을 가져 제대로 연기할 수 없다(PK56). 그러나 더 좋은 예는 한 쌍의 입체사진을 보는 경우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두 개의 사진을 확대기를 통해서 보면서 그것들의 통합적인 영상, 즉 입체화된 영상을 본다(KB211-3).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공헌한 두 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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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목하게 되면 아까의 통합된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말로 듣거나 인쇄된 문장을 읽을 때에도 나타날 수 있다(TD19 ; ST121). 인쇄된 글자는 우리가 명세화할 수 없는 보조식을 통합하여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글자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될 때나 혹은 하나의 단어에 주목할 때, 이전에 관심을 가졌던 의미를 놓치게 된다. 한 마디의 말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입술과 혀의 동작과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단어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 마찬가지의 원리에 의해서 시의 의미로부터 시의 산문적인 내용이나 줄거리로 중심적인 주목을 옮길 때 그 시의 의미는 파괴된다. 왜냐하면 그 시의 내용은 그 시에 관계되는 보조적인 사항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격적 지식은 신체를 거점으로 점차 확대되고 발전한다. Polanyi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신체 내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신체를 확장시켜서 더욱 원거리의 보조식을 확보하면서 외부세계 속에 뛰어든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보조식과 초점식의 관계가 점차 확장됨으로써 가능해진다(PK61). 보조식의 끝에 초점식이 나타나며, 그 초점식이 다시 보조식이 되어 새로운 통합적인 발견에 이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보조적인 단서의 거리가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점차 확장해 나간다. Polanyi는 보조석과 초점식은 서로 출발점과 종점이라는 기능적인 관계하에 있음을 강조하게 위해 이를 “from-to relation(~로부터 ~까지)”의 구조라고도 표현한다(KB145-6). 보조식은 항상 내면화된 수많은 특수항목으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원거리에 있는 통합된 전체를 파악하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그러니까 보조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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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近位項(proximal term)”이고, 초점식은 언제나 “遠位項(distal term)”이 되는 셈이다(TD10, 34 ; KB140-1 ; ST98-9, 101). 이러한 경로를 거쳐서 우리는 비가시적이며, 좀더 심도있고, 좀더 포괄적이며, 더욱 순수한 실재와 대상을 초점적으로 파악하는 단계에 이른다(KB159-68). 모든 보조적인 단서들은 이처럼 신체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집중적으로 주목하는 대상까지 뻗어 나가기 때문에 Polanyi는 이러한 작용을 “자아중심적 통합작용(self-centered integration)”이라고도 부른다(M105).
단어나 수학공식과 같은 기호체계도 마치 지도의 경우처럼 보조적인 단서의 내용이 되어 우리의 인식범위를 확장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끄는 것은 단어나 수학공식이 아니라 바로 단어로 이루어지는 의사교환의 意味다(SM30). 사실상 의미화된 언어는 그 물리적인 혹은 문자적인 것을 초월하고 있다. 이러한 보조식은 인식의 출발점은 신체로부터 매우 먼 거리에 해당하는 중간단계를 거쳐 왔음을 알아야 한다(SM13, 25-26). 그런데 우리가 그 형태를 추구하고 그것을 전체로서 파악할 때 그 형태의 지각에 공헌한 세부적인 단서는 고려에서 제외되고 단지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일시에 그것이 성취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고매한 학자들은 그들의 깊은 사상을 고도의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대개 독자가 그 글의 의미를 직접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 그들은 그 사상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확장된 보조식의 공헌을 잠시 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조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는 그 글이 가진 물리적인 특성은 눈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 글의 단서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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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그들이 전달하려는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다. Polanyi가 지적하는 종전의 철학적인 인식론의 근본적인 결함은 바로 그러한 암묵적인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Polanyi가 이제까지의 인식론자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발견의 과정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령 우리가 자연을 연구할 경우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에 대한 규칙성을 찾는다. 이 때 필요한 것이 “現象的인 變形”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보면서도 감각지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통합적인 의미를 구성하여 자연의 일관성과 규칙성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그 과정을 세분해서 분석할 수 없는 암묵적인 과정, 즉 暗黙的인 推理行爲(tacit inference)라는 것이 포함된다(KB ch.10). 그러나 이러한 추리들은 분명한 형식논리에서 말하는 연역적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것과는 판이하다. 그 근본적인 차이는 연역적 추리는 전제와 결과라는 두 개의 초점항목을 연관시키고 있는 반면에 암묵적 통합은 보조적인 것들이 초점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그 통합은 명백히 기계적인 절차에 의해서 대치될 수 없다. 이와 같은 특징을 우리는 후에 교육의 두 가지 과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셋째, 인격적인 지식에서 종합적인 실재가 우리 내부에 오는 것은 사물들을 바라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우리 내부의 것으로 동화시킴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앞서 얼핏 언급했듯이 우리는 신체 밖에 있는 실재나 사건의 의미를 신체 내부에 있는 단서를 통하여 파악하는 과정을 밟으며, 이것을 Polanyi는 “體得化(interiorizing)”라는 좀더 특수한 용어를 써서 지칭한다(PK59 ; KB146-82, 185). 반대로 우리의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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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 보조적 단서로 되돌림으로써 그 외재하는 실재나 사건의 통합적인 의미를 상실하거나 박탈하는 과정을 “外面化(exteriorizing)”라고 한다(KB185, 215). 인격적 지식의 이와 같은 특성은 앞서 지적한 첫 번째와 두 번째 특성과 동일한 원리에서 도출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시사하는 점은 크게 다르다. 하나의 종합적인 실재 X는 우리가 그것의 구성요소를 보조식으로 포섭하여 체득화함으로써 파악된다. 그 의미는 어떤 일관성을 발견하는 해석적인 틀(interpretative framework)에서 나오며 그 틀의 종류에 따라 그 의미의 종류도 다양화된다. 또한 그 틀의 변화는 곧 자신의 존재방식의 변화를 포함한다. Polanyi는 이처럼 외계의 일부를 우리의 존재의 일부로 동화시키는 과정을 “內住(dwelling or indwelling)”라는 특수한 용어를 빌어 나타낸다(PK59 ; TD18 ; KB162).
흔히 우리가 “자연을 이해한다”, “사회와 문화를 이해한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데, Polanyi는 그 “이해한다”는 말 대신 “체득화”나 “내주”라는 말을 써서 묵지의 역동적인 차원이 가미된 특수한 이론적 맥락을 여기에 첨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지식은 한편으로 외재하는 자연물 혹은 문화적 소산과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통합하여 의미화하는 신체 내부에 있는 보조적인 인식이 상호작용한 결과다. 우리가 후자를 의식으로 떠오르지 않은 단서로서 이용하여 하나의 통합적인 의미를 구성할 때 비로소 자연이나 문화는 우리에게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때 그 의미는 어차피 有形的인 것(tangible thing)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하나의 큰 소득은 方法的인 統一의 가능성이다(TD17 ; KB156, 160 ; ST91 ; M69, 86). 이제까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혹은 과학과 비과학 간에 그 대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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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놓고 분파적인 갈등이 있어 왔다. 이와 같이 암묵적 인식의 역동적인 차원이 고려된 내주라는 개념은 학문을 포함하여 예술, 도덕적인 판단, 종교, 그리고 임상전문의의 지식과 같은 숙련된 기술들을 모두 의미의 일관성을 찾는 과정으로 확대시켜 통합할 수 있다. 심지어 내주의 이와 같은 속성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KB152, 170).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상대의 세계 속으로 내주함으로써 가능하다. 예컨대, 보통 사람들인 우리가 어떤 大家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그 대가의 경지에 도달하는 꾸준한 훈련을 쌓아 그 대가의 관점으로 그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내주해야 한다.
넷째, 인격적인 지식은 그 자체 내에 평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식이란 그 우열을 따지는 가치추구의 활동이라는 점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가치란 무엇이며, 그 수준에 대한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하게 되는 것인가?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가? 전통적인 인식론에서는 인식의 평가 기준이 따로 외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상 이제까지 우리는 어떤 지식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주관성을 떠나야만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믿어 왔다. 그러나 Polanyi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결한다. 앞 절에서 이미 잠시 지적한 바 있지만 그 문제를 인격적 지식이라는 맥락에서 드러내자면 바로 이렇다. Polanyi는 가치평가를 인식주체와 인격적 지식 자체에 내재된 하나의 속성으로 본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개인적인 의미의 확대는 거듭되는 會得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처럼 새로운 수준의 회득에 이를 때마다 인식주체는 동시에 지적인 만족을 느낀다(PK189, 398). 그리고 지식을 구축해 나가는 매 단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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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평가가 요구될 때 우리는 그 회득된 내용을 당분간이나마 외재하는 지식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KB184).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지식 속에는 이미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포함되어 있다.
개인은 각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면서 동시에 그 지식을 평가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은 바로 암묵적인 지식이 확장하여 좀더 발전된 초점적인 의미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외계를 내주하는 틀의 개선에 의존하기 때문에 오랜 수련을 요구한다(KB134). 이러한 훈련을 통해서 전문가들은 어떤 대상이나 조건의 가치나 의미를 평가할 수 있는 예외적인 감각을 발전시킨다. 전문가들은 특정한 일에 대한 공인된 비평가다(SF23 ; PK54-5 ; ST96-7 ; M68). 예컨대, 의사, 포도주 감식가, 운동선수나 무용가들은 자신의 활동을 비판하는 전문가로서 행위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활동에서 선택은 최종적으로는 과학자의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지고 있다(SF53 ; PK54-5, 60, 64-5). 오늘날 고도로 정확한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실험도구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관찰은 인간적인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동화된 기록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재들이 곧바로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것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관찰내용은 잘 훈련된 예민한 눈, 귀, 촉각을 가진 능숙한 과학자의 안목에 맡겨진다. 말하자면 과학에서 주어지는 객관적인 자료조차도 그 식별과 판독은 사용하는 자의 묵지와 기술에 의존한다. 아무리 훌륭한 자료라고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의미있게 식별하거나 감식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의 차이는 그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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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력의 차이와 비례함을 알 수 있다.
다섯째, 인격적 지식은 개인의 소신이며 그 속에는 責任과 獻身이 포함되어 있다. Polanyi는 이와 관련하여 영어로 “commitment”나 “responsibility”라는 말을 자주 쓰면서 인식의 주체가 자신의 신념의 강도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헌신해야 함을 강조한다(LL23 ; PK59-65, 276 ; KB134 ; ST123). 어떤 것에 대해서 인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지식에 대해서 신념을 가지고 성실하게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 지식은 내주하는 것이며, 내주는 외계를 우리의 존재의 일부로 동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인격적 지식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동일하다는 뜻도 된다. [각주 6: Marjorie Grene이 Polanyi의 논문을 편집하면서 그 제목을 <앎과 존재함(Knowing and Being)>으로 붙인 것은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말하자면 그 지식은 그 소유자의 서명이 있는 문서와 같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지식을 불신한다면 이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불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만약 우리의 인격적인 지식의 일부에 상처를 입는다면 이는 곧 우리 자신의 일부가 상처를 입음과 같다. 신념이 없이 어떤 것을 주장하고 타인이 그것을 믿도록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만이나 다름이 없다(PK253-5).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신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그 믿음을 기초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와 같은 인격적 지식이 갖는 소신과 책임의 속성은 과학적인 지식에도 적용된다. 흔히 우리는 과학을 엄밀한 것 또는 비인격적인 것으로 보는 인식론에 익숙해 왔다. 또한 과학은 매사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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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그러나 Polanyi는 그러한 통념을 비판하고(PK269-98), 그 자리에 “과학적인 信念(PK292-4; ST68, ch.5)”의 요소를 보충하려고 한다. 그는 진리의 확인이 암묵적인 신념과 그것의 정합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Polanyi는 만약 새로운 관찰 결과가 과학적 명제와 모순되면 과학자들이 반드시 그 명제를 포기한다고 하는 널리 알려진 관점까지를 거부한다(SF17). 예컨대, 이른바 “진리의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에 따른다면 이론과 관찰이 일치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이론을 파기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Polanyi는 이론과 관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단지 그 불일치한 사실만을 토대로 과학자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이론을 의미없는 것으로 파기해 버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불일치성은 다른 과학적 사유에 의해서 차후에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독자는 다시 한번 Polanyi의 지식론이 다분히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특히 모든 지식은 객관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해 왔던 사람들은 여기서 모종의 가치혼란 같은 것을 예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소에 그 객관적인 진리관이 갖는 허구성과 취약성을 느낄 정도의 세련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그의 논에는 주관주의니 객관주의니 하는 오래된 논쟁을 초극하는 절묘한 해답이 마련되어 있음을 내심에서 발견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말하는 “인격적”이라는 수식어는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PK300-3). 역사상 무수하게 등장했던 “객관적인 사실”이나 “객관적인 가치”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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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도 사실은 어떤 특정한 인식주체나 집단의 주관적인 구성의 소산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우리는 가끔 그러한 주관을 아무런 내면의 공감, 책임, 열정, 느낌이 없이 객관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오류를 범해 왔다. Polanyi는 이러한 객관주의의 횡포를 목격하고 우리가 말하는 사실이나 가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구성과 열정의 소산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Polanyi는 인격적 지식은 모종의 정신적인 노력에서 비롯된 소신으로서, 적어도 그 주체에게는 만민에 대해서 “普遍性”을 가진 것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들어, 인격적 지식이 결코 단순한 주관적인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모든 개별적인 인식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Polanyi는 이른바 “相對主義”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식은 唯我之論的인 것을 초극해서 모종의 보편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만 한다(PK316). 그러나 문제는 그 보편성을 만족시켜 주는 최종적인 인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때 일어난다. 객관주의자는 그것이 있다는 말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은 어떤 특정한 주관적인 인식을 객관적인 것으로 속단한 것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Polanyi는 그러한 순진하고 폐쇄적이며 전횡적인 객관주의를 경계한다. 대신 그는 각각의 인식주체가 그 보편적인 인식을 찾고 주창하기를 강조한다. 이른바 “보편적인 표준”은 어느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그것을 정립하려고 열정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또 스스로 발견한 것들을 가지고 타인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誤謬를 범할 수 있고, 앞서 학문의 자율성을 논하면서 지적했듯이, 진리의 기준 역시 응당 서로의 비판에 의해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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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신념에 토대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Polanyi가 애써 강조하는 부분이다. 만약 자기주장에 대해서 아무런 소신이나 믿음도 없이 두 사람 간에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비판은 애초부터 싱겁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각 분야에서 인간 지식의 본질과 그 형성과정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들은 학문이 실제로 기초하고 있는 암묵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Polanyi는 바로 지식의 암묵적인 차원을 도입함으로써 이제까지 철학분야에서 오도되어 온 측면을 시정하고 좀더 학문의 실상에 부합한 통합된 이론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묵지의 차원을 도입한 그의 체계에서는 서양철학에서 수세기 동안 날카롭게 대립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온 마음과 신체, 이성과 경험, 주체와 객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실과 가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학문적인 지식과 기술이라고 하는 二分法이 한꺼번에 붕괴된다. 또한 Polanyi의 체계에서는 우리가 갖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명확성으로 치장하기보다는 그 애매모호함을 적나라하게 수용하고 있다. 명백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지 않은 방식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Polanyi가 자신의 이러한 독특한 인식론적인 입장을 확보하고 특별히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른바 客觀主義라고 하는 神話다.
“객관주의는 우리가 알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치켜세우고 우리가 알 수는 있으나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모호한 발언으로 은폐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통째로 허위화시켰다. 사실은 후자의 지식이 우리가 증명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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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모든 것의 저변에 깔려 있어서 그 증명을 최종적으로 보증해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의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 따라서 명백하게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에 제한시키려고 애를 씀으로써 객관주의는 우리 마음의 전반적인 존재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비판적이지 않은 선택(the acritical choices)이 있음을 간과했고, 결국 이러한 결정적인 선택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는 문제에 있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다(PK286).”
이러한 의미의 객관주의의 범주에 드는 사상적 조류는 참으로 많다. Polanyi는 그들을 예거하면서 그 오류를 지적한다. 거기에는 경험주의(SM64), Kant의 비판철학(KB156, 160 ; ST120), 현대철학의 범주로 각광을 받았던 논리실증주의(PK9 ; KB156-7, 179, 187, 195 ; ST56-7, 73, 84), 신체-정신의 관계에 관한 Ryle의 입장(PK98, 372; SM65 ; TD7, 15-6 ; KB222-3), 과학성을 표방하며 등장한 행동주의(SM65 ; KB152, 159, 166, 169-170, 215-6 ; ST82), 정신적인 과정이 결국 자연과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으리라는 환원주의(KB46, 151-2, 226), 정확성과 객관성만을 추구하고 있는 과학주의(TD20 ; KB151-2 ; ST82), I-Thou에 대비되는 I-It의 관계(ST122, 127-8)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객관성이라는 그릇된 이상과 연합하고 우리가 內住에 의해서 파악해야 할 존재의 높은 차원을 저급의 수준에서 外面化함으로써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심대한 의미의 확장과 공유라는 과제를 저급화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Polanyi는 그러한 인식론적인 잔재를 청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금세기의 사상에 대한 반항자요 해독자라고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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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存在와 知識의 위계
인간은 광활한 우주 속의 극히 미미한 공간만을 치자한 채로 생활하고 있다. 우리가 그 우주적인 것에 우리의 존재를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진정 인간과 삶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인가? Polanyi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우주적인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우주는 그 속에 더 의미 있거나 규칙적인 관계를 성취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어떤 위계를 따라 발전한다. 인간은 물질성을 갖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생명성과 더 나아가 정신성까지를 획득하면서 그 우주적인 성취의 최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Polanyi는 전 생애에 걸쳐, 특히 사망하기 전 몇 년 동안에, 우주적인 진화의 선두에 선 인간이 과학, 시, 예술, 의식, 그리고 종교의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어떻게 그 자신을 발견하고 삶에서 좀더 풍부한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낮은 수준의 존재양상에서 가능했던 것 이상의 더욱 더 풍부한 존재양상을 그 내부의 가능성으로 갖추고 있으며, 또 그러한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인간된 자로서의 의무에 속하는 것이다.
Polanyi는 제반 綜合的 實在가 서로 수준이 다른 일련의 位階化된 構造를 가진 것으로 가정한다(PK123, 343-6, 378-9, 393-7; SM46-7, 52, 54-6, 58-60; TD ch.2 ; KB216-7 ; ST136-8; M76-8). 각각의 실재는 서로가 다른 것의 기초를 형성하면서 사다리형의 구조를 이룬다. 그 유층적인 구조에서 일반적으로 하위의 실재를 구성하는 구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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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적인 조작의 출현을 위한 하나의 선행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낮은 수준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 작용은 그 위 수준의 것으로 개방되어 있다. 낮은 수준은 항상 어느 정도의 불확정적인 범위를 가지며, 그것을 상위의 것이 출현하면서 결정하고 규정해 나간다. 따라서 각 수준의 원리들은 바로 다음의 더 높은 단계의 통제하에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Polanyi는 “境界統制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rginal control)”라고 칭한다(TD40). 높은 수준은 낮은 것을 토대로 출현하지만 후자는 결국 전자의 존재적 원리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각 수준의 실재는 서로 다른 원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불연속적이며, 그들 간에는 불가피하게 論理的인 間隙이 있다. 이 때문에 각각은 서로 다른 논리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각 단계에서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개념적인 틀을 변경시켜야만 한다. 그 사실은 단순한 물체와 기계의 경우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시계, 타자기, 보트, 전화기, 자동차, 카메라 등 모든 기계는 그것이 달성하려는 기능과 목적을 갖는다. 즉 그들의 모든 수행이 모종의 옳음의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이 점에서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나 혹은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함축한다. 그런데 만약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원리를 이해함이 없이 단지 그것들을 물리적인 또는 화학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PK328-31 ; SM52 ; KB153, 175-6). 이러한 원리를 예증하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이 들 수 있다. [각주 7: Polanyi는 이러한 불연속적인 수준의 위계를 설명하는 방편으로서 문장의 구성(TD35 ; KB154, 233)이나 혹은 장기게임과 도시계획(TD34-5) 등의 예를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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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통계의 원칙은 앞서 우리가 논의한 인격적 지식의 위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PK389 ; SM46-7, 71 ; TD45 ; KB178, 218). 이제 독자는 Polanyi 체계에서 존재와 지식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식은 결국 존재를 內住한 것으로 보면 된다. 우리의 지식은 신체를 중심으로 점차 원거리의 추상적인 대상으로까지 확장되어 나간다. 이때 각각의 단계에서 낮은 수준은 다음으로 높은 수준을 초점적으로 인식하는 보조식의 기능을 한다. 즉 높은 수준은 그 낮은 수준에서 나타나지 않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출현한다. 일단 그 다음 단계의 높은 수준이 출현했을 때, 그 종합적 실재를 특징짓는 더 높은 수준의 의미나 기능 또는 원리는 그것을 생성시킨 지금까지의 낮은 수준의 단계를 이루는 특정 내용들과 그것들을 지배하는 법칙으로 정의하거나 명세화하거나 설명하거나 환원시킬 수 없다. 우리는 이 원칙을 앞에서는 초점식을 보조식으로 환원시켜 정의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이미 밝힌 바 있다. 만약 지식이 이와 같이 단계별로 발전할 때 그처럼 새롭게 등장한 실재를 주목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우리가 낮은 수준의 원리에 주목한다면 그들에 토대를 둔 높은 수준의 원리의 작용을 파괴하거나 교란시킨다. 우리는 이 원리 역시 앞서 살펴 본 바 있다.
모든 발견적인 진전은 不可逆的이다. 일단 발견이 이루어져서 이전에 없어 보이던 실재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순간, 혹은 불확실한 것이 이제 확실하게 되는 순간, 그 이전의 무지상태나 불확실한 미정의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된다(PK123, 172, 208, 251, 333, 391). 이러한 원리는 존재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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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나 지식의 수준 어느 경우에도 적용된다. 적어도 가치 면에서 높은 수준의 회득이 출현한 다음에는 그 회득은 계속 상승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기계가 망가지거나 생물체가 생명력을 잃으면 그것이 물질의 원리에 의해 지배받게 되는 경우처럼 어떤 잘못된 사건이 일어나 이전의 단계로 퇴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퇴행은 적어도 주체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식의 수준에 있어서도 外面化의 경우가 그렇듯이 발전단계의 이전 수준의 보조식에 주목함으로써 이후의 초점식의 의미가 박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실수의 형태로 나타나며 곧 그 주목의 대상이 더 높은 수준의 것으로 전환됨에 따라 그 퇴행은 해소된다. 이는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사실의 제약 속에서도 가치론적으로 좀더 철저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함을 시사한다.
Polanyi는 이와 같은 불가역의 발전원칙을 한 개인의 발달은 물론 모든 생명체의 進化까지 확장하여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는 이러한 취지에서 진화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PK382-404 ; TD46-7). 이제까지 진화론자들은 주로 이후의 세대가 이전의 세대보다는 더 강한 再生能力을 갖는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곧 진화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예컨대, Darwin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각종의 생물을 진화된 것으로 보고 그 진화의 과정을 우연성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 Polanyi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PK382-5).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역사는 존재수준의 위계질서라는 개념을 묘사하는 뚜렷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PK ch.12 ; SM59 ; KB154-5, 177, 234). 발생적인 계열로 볼 때 식물성, 동물성, 지능을 가진 인간으로의 진화는 우주가 좀더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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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수준으로 조직의 변화를 거쳐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화적 존재의 上昇的인 出現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우주적인 성취로서 서로 다른 수준의 것들이 비록 한 시점에서 공존하지만, 그들은 서열이 있는 다른 조직원리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각주 8: 각각의 존재수준은 그 나름의 수준에서 학문적으로 구명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수준이 높은 존재양식을 그 이전의 존재양식을 탐구하는 학문의 지식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오류다. 제반 분과학문은 자체의 연구주제에 합당한 특수한 회득적인 실재를 감식한다. 그 인식대상은 그것이 지배받는 원리의 면에서 위계가 있다. 따라서 각 분과학문은 그런 한계조건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생물성이나 기계의 작동을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포착하기 어렵다(TD37-40, 42 ; ST133-6). 생리학은 물리학과 화학이 다룰 수 없는 존재의 수준을 이해하여야 한다(SM54-6). 인간은 진화의 꼭지점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물리화학적인 것이나 식물이나 동물적인 것을 초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극히 높은 인간적 차원에 적합한 이해방법을 요구한다(SM lecture Ⅲ).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과학의 미명 하에 가시적인 것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을 그것보다 하위의 원리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ST131-3, ch.9). 종전의 실증주의적인 인식론과 행동주의적인 접근방법은 고차원의 인간경험을 저차원화시키고 있다(SM64-6). 이들의 문제는 과학의 이름 하에 인간에 관한 고차원의 지식을 외면한다는 데 있다. 같은 인간의 범주에 든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출중하고 위대한 인물들이 있다. 이때 그들이 남긴 흔적은 그것을 감식할만한 체험을 인식자에게 요구한다. 인식대상의 수준을 내주할 수 없는 인식자는 불가피하게 그 인식대상을 자기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이 점에서 Polanyi는 현상학을 한편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KB236-7). 역사적인 이해방법이 갖는 문제점도 검토의 대상이 된다(SM71-6, 78-9, 81, 83-4, 88-9). 결국 이런 존재수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해의 난점은 이해대상과 인식자간의 수준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이해자의 참여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SM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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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출발이 物質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광막한 세계는 기계론적인 결정주의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로부터 生物이 출현했다(PK381-97).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는 무의미한 물질을 의미 있게 조직한 결과이다. 유기체가 진화적으로 발전해 온 일반적인 방향을 주시하면 이러한 의미 있는 조직이 모두 우연히 발생했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 방향은 더 의미가 풍부한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생물은 이제 이미 물리나 화학의 법칙을 떠나는 조직의 원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특성을 갖게 되며, 그 물질성은 이제 더 고차원의 속성인 생물성의 지배 하에 놓인다.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DNA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그것을 입증한다. Polanyi는 DNA가 물리학과 화학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경계조건을 알려주는 유전적인 암호를 가지고 있으며, 고로 인해서 좀더 높은 수준의 개체발생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살아있는 유기체가 물리학적이거나 화학적인 사건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KB235 ; M ch.12)
생물은 무생물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DNA는 더 많은 의미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정향되어 왔으며 그 막대한 가능성이 위쪽으로 열려 있다(KB ch.14). 실제로 생물은 낡은 “목적”을 새로운 “목적”으로 대치시키면서 발전한다. 생물계 내부에도 위계가 있다. 생물계는 자체의 생존을 대비하고 재생산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미시적인 단세포 식물에서부터 환경과의 조우에서 보다 좋은 습관을 몸에 습득해 나갈 수 있는 복잡한 동물, 그리고 고등한 포유류를 거쳐서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성취의 도정을 보여준다. 그 진화의 과정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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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더불어 실패도 있다. 예컨대, 생물성이라는 특성은 생존이 유지되는 조건에서만 실현된다. 만약 그 조건이 부재할 때 그것은 무생물화되고 만다. 따라서 생물 수준에서부터는 무생물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문제가 심각하게 등장한다(TD44).
서로 다른 種의 생물은 수준의 위계에 있어서 다른 서열에 위치한다. 일반적으로, 動物은 식물에 비해서 좀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동물계는 기계와 같은 고안물이 갖는 작동원리의 지배를 받는 수준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창조적인 충동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문제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한편의 기능에 결함이 있을 때 임기응변적으로 그것을 다른 기능으로 대처해 나가는 이른바 “等位能力(equipotentiality)(PK337-43 ; TD43)”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단세포 동물과 곤충의 수준을 하찮게 본다. 그러나 Polanyi는 이 단계에서부터 생물은 학습을 통해 자발적으로 순응적인 재조직화를 해 나가는 능력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등동물들이 그 나름의 문제를 학습의 과정을 통해 해결해 나가고 있음에 주목한다(PK71-7, 120-2, 365-8). 그들도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등 위쪽의 실재와 접하려는 원초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PK98, 133, 194, 300), 더 나아가 그 학습의 결과를 공유하려는 경향조차 보인다(PK205, 209-10)고 주장한다. [각주 9: Polanyi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뿐만 아니라 쥐(SM57), 사자(ST142), 침팬지(PK74, 133 ; SM59) 등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의 학습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인다.]
人間은 지구상의 생물체 가운데 가장 고급의 형태다. 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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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기계 혹은 생물 사이에 불연속적인 수준차이가 있듯이 다른 생물과 인간 사이에는 인격성이라는 수준의 유무 면에서 불연속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정신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선택된 존재다. 인류는 언제부터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자율성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신경계통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을 토대로 정신적인 존재로까지 뛰어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격성의 성장과 견고화를 위해 5억 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 세월은 진정한 정신적인 생활의 문턱에까지 인간을 비약시키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인간이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짐승의 단계에서 갑작스러운 상승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또한 5만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Teilhard de Chardin은 인간의 지식이 싹튼 이러한 궁극적인 진화적 단계를 noogenesis라고 칭하였다. 이는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언어를 창조하여, 그 언어에 의해서 영속적인 사고의 분절적인 틀을 창조함으로써 이룩되었다. Teilhard는 이러한 틀을 noosphere라고 칭한다. 우리는 어린이가 전통적인 noosphere에 입문함으로써 책임 있는 인간성을 성취하는 것을 보아왔다. 전체로서 인간이라는 우리의 種은 그것 자체의 noosphere, 즉 세상에서 유일한 noosphere를 창조함으로써 그러한 인간성을 성취하였다(PK388-9).”
우리의 정신은 비록 육체에 근본을 두고 있지만 그 활동에 있어서 육체적인 결정요소로부터 자유롭다(SM59-60, 71). 인간은 제반 하급의 수준들이 가지고 있는 경계조건들을 초월하여 상승하면서 더욱 더 높은 수준의 의미에 도달해 왔다. 인간은 더 높은 의미와 위대성을 성취하려는 데 유별나게 큰 熱情을 보인다(PK377, 389 ; SM27, 34, 36-8). 뿐만 아니라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거의 그 한계를 정하기 어려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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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로 막대한 學習能力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반 속성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오로지 선발된 존재로서 스스로 진화의 역사를 창조해내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PK ch.13 ; SM59-60, 71 ; TD47-9, 91 ; KB154 ; M77). 이러한 정신계는 애초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특이한 種으로서 인류는 계통발생적으로 장구한 세월에 걸쳐 무수한 정신계를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위대한 정신적인 고양은 기원전 5세기에 중국, 인도, 그리스 등지에서 광범한 영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제까지 역사를 통해서 그 의미가 심화된 영역으로서 Polanyi는 과학적인 탐구, 상징과 언어기능, 예술, 제의, 종교 등 비감각적인 정신세계의 예를 들고 있다(SM61-3, 77, 98 ; M246). 그러나 그 잠재적인 의미의 전 영역이 무엇일지는 현 단계에서 밝힐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PK377). 어떤 것이 가장 우수한 지식인가? 그것도 현재로서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족하다(PK374-9).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지금도 그것들의 영역이나 수준을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 확장되고 발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M247). 우리는 본래 의미의 성취를 향해 있고 우리가 이제까지 견지해 왔던 것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달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인간에게 가능한 의미를 충분한 영역에서 다시 한번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른바 “客觀性”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현존하는 지식으로 확정 지워 버리려는 인식론적 시도 자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신계는 인간 전체로 볼 때 한 개인의 일생을 초월한 전수과정에 의해서 계승되고 발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정신계는 거의 예외 없이 각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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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련을 통하지 않고는 전승될 수 없었다. 세대를 이어오면서 각 세대는 이전에 이루어 온 성취를 감상하고 그것을 좀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혁명적인 투쟁을 하였다. 여기서 系統發生과 個體發生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항상 남아있다(PK335, 395-6, 399-400 ; TD36). 개체는 선대가 이룩해 놓은 정신계의 모든 수준을 그것을 이미 성취한 선진으로부터 반복해서 배워야 한다. 더 나아가 인간 중에서도 개인의 수련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의 존재양식을 갖출 수 있다. 창조적인 개체는 이전의 종족발생적인 수준을 계열적으로 학습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것 자체로서 환원될 수 없는 좀더 높은 수준의 존재양식을 계속해서 추구하고 성취함으로써 인간의 종족발생적 수준을 한 발자국씩 확장할 수도 있다(PK396). 이러한 개체발생적인 과정이 성공적으로 매 세대에서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인간에게 가능한 정신계가 계통발생적으로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류발생의 과정에서 개성은 순전히 식물적인 성질에서 시작하여 능동적이고 지각력 있는 단계를 거쳐 결국 책임 있는 인격의 단계로 점차 발전한다. 이러한 계통발생적인 출현은 개체발생이 분명하게 그러하듯이 계속된다. 이러한 까닭에 진화의 출현적 형태를 지배하는 고급의 원리들이 그 진화하는 존재를 점차 지배한다. 이는 그 원리들이 인간의 태아적, 유아적 발달의 과정에서 점차 좀더 두드러지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방식과 같다. 특히 우리가 특별히 거론할 것은 인간의 상승이 개성의 계속적인 강화를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부모의 유전자가 경합한 접합자로부터 하나의 인간이 형성될 때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PK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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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 정신계의 발전에는 인간의 노력이 개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실패와 성공의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SM67). 그 노력여부에 따라 정신계는 쇠락하거나 번창할 수 있다. 여기서 Polanyi는 그 진화의 유지가 인간에게 주어진 宇宙的인 責任임을 강조한다(PK321-4 ; SM69-70 ; KB238). 정신계는 우주의 최첨단에서 성취한 진화의 형태이고,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만인은 그것에 대한 소명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호의존의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껏 인간으로서 주어진 가능성을 자유롭게 탐색하고 가치의 차원에서 그것들을 추구하여 나가야 한다. 앞서 인격적 지식은 가치판단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판단의 능력은 바로 이러한 상이한 수준의 존재양식을 내주하게 됨으로써 획득된다고 하였다. 그 정신적인 열정의 만족은 그것을 만족시키는 대상을 소모시키거나 독점하지 않는다. 그 정신적인 열정의 만족은 타인 속에서 동일하게 만족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그가 이미 내주한 것을 또한 내주하도록 돕는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로써 하나의 과학적인 발견, 하나의 예술품, 혹은 하나의 고상한 행위가 모든 인간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이것을 Polanyi는 이른바 “共歡性(conviviality)”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PK346 ; TD51-2 ; ST143, 148-9). 만인은 각각의 역량과 수준에서 자신에게 가능한 것을 계발하고 그것을 타인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서로가 좀더 위대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아울러 그에 따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 인간된 우리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수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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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敎育의 두 가지 過程 [각주 10: 이 절에서는 필자의 교육관(1991)에 비추어 Polanyi의 논점을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Polanyi의 글에서 산발적으로 교육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PK207-9, 245 ; SM66, 98-9 ; TD45 ; KB133, 136-7 ; ST81 ; M61). 그는 교육을 사회적 지식의 전달이라거나 혹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자기수정의 과정이라는 관점을 보인다. 그는 또한 자신의 지식관에 비추어 지식이 단지 객관적으로 주어지거나 혹은 어떤 외래의 독점적인 권위체에 의해서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그 발전을 확인하고 정당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기도 하고, 그 교육의 과정을 단순히 특정한 객관적인 지식이나 명시적인 지식을 언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될 조건들을 상술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olanyi는 그의 이론의 핵심 속에다 교육을 만족스럽게 접목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이 작업은 필자와 같은 교육학도가 창의적으로 재구성할 과제로 보여진다. 필자는 그가 말하는 “발견적 과정”과 “설득적 과정”을 교육의 맥락에서 각각 “배움”과 “가르침”의 범주에 넣어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에 이르는 진화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이루어져 왔다. 그 과정은 무엇일까? 생물학자들은 생물적인 진화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은 될망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유기체에서 신경체계가 형성되는 데 수백만 년이 소요되었다. 그것을 제한된 일생을 가진 개체가 반복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생물적인 조건은 이제 각 세대마다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생물적인 것 이상의 또 다른 진화적인 과정이 추가되어야만 한다. 그것들이 무엇일까? 그 중의 하나로서 분명히 敎育이 포함될 것이다. 여기서 교육은 크게 두 가지 구분되는 과정의 상호작용으로 정의된다(장상호, 1991). 그 하나는 각자가 현재의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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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계속 앞장서서 좀더 높은 존재의 실상을 체험해 나가는 배움의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높은 체험을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가르침의 과정이다. 한 개인을 두고 말하면 교육은 자신의 지식을 위로 확장할 때는 배움을 택하고, 자신이 배운 바를 전파할 때는 가르침을 택하는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서로 다른 수준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는 先進과 後進이 함께 공생하고 있는 형태를 취한다. 이들은 서로 의미를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갈등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각각 스승과 제자라는 교육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한다면 그 진화의 고리가 매 단계에서 강화되어 인간의 진화는 전반적으로 급속화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진화의 과정을 “敎育的인 進化”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떻게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고 또 전파되는가? 이에 대한 Polanyi의 관심은 전술한 교육적 진화의 맥락과 거의 일치한다. 이 문제를 그는 우리가 앞서 살펴 본 그의 특이한 지식론 및 실재의 위계론과 일관성을 갖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고, 그만큼 그의 관점은 교육을 위해 이례적인 시사를 준다. 그가 택했던 특이한 입장을 간결하게나마 정리해 보자.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지적, 예술적, 도덕적, 종교적인 것 등 수많은 종류의 수월성을 포함한다. 이것은 모두 “암묵적인 차원”을 갖는다. 지식의 발전이란 진화적인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좀더 높은 실재를 내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특이한 점은 인간의 진화적인 단계나 지식의 수준에는 “논리적인 간극”이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낮은 수준의 것을 가지고 높은 수준의 것을 정의할 수 없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서로 다른 그 실재의 수준을 같은 원리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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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는 없다. 환언하면, 지식의 확장과정에서 초점적으로 會得한 의미를 그것의 형성에 공헌한 보조식의 내용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각 개인은 스스로 좀더 높은 지식을 획득하고 그것을 전달할 소명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Polanyi는 또 한 차례의 창의적인 해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절에서 교육의 맥락에서 새롭게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이다.
이제까지의 인식론적인 주장, 그중에서도 이른바 Polanyi가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는 “客觀主義的 見解” 속에 그 나름의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논조가 항상 그러하듯이 그들의 해답은 명백한 형태를 띤다. 이 노선에 따르면, 신념은 일련의 엄격하게 명시적인 조작을 거쳐 형성되고, 그것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절차가 따로 있다. 그 발견의 논리로서 연역법이니, 귀납법이니, 가설연역법이니 하는 학문의 방법들이 제시된 바 있다. 객관주의자들은 모종의 객관적인 절차나 공식을 명세화하고 인식의 문제를 그 공식을 적용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이론과 관찰이라는 과정이 독립해 있고 그 대응성을 따져서 진리를 규명할 수 있다는 규칙도 있다. 객관적인 증거가 진리를 판별해 준다. 모든 지식은 언어라는 형식으로 진술되고 그 언어를 통해서 널리 전달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인식론은 지식이 입증되고 전달되는 과정을 비교적 쉽고 명료한 방식으로 정형화시켜 왔다. 그렇다면 Polanyi는 왜 그러한 전통적인 해결방식을 따르지 않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러한 설명들이 그 명백성을 추구하는 것만큼 실제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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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명시적인 논리는 Polanyi 개인의 체험에 의하면 너무도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학문생활의 전반부에서 과학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이론의 형성, 승인, 그리고 전파의 과정이 앞서 말한 객관주의자들이 가정하는 바와는 판이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이었다. [각주 11: Polanyi는 “X광선과 결정체와 더불어 보낸 시간들(KB ch.6)”이라는 회고조의 논문에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객관주의적인 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자신아 만든 이론과 관찰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때 그 대응성의 규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주제를 계속 탐구함으로써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존하는 방법은 마치 주말학교에서처럼 한쪽의 증거가 이론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 이론을 부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시) 내가 그런 교훈을 거역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p.100).” 타당한 이론이 가끔 증거와 모순될 수도 있다. 이 모순된 증거들 때문에 타당한 이론이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모순은 차후에 또 다른 발견에 의해서 변호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M132-3). 과학자는 자료에 의해서 판단을 바꾸기보다 때로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자료를 재해석할 수도 있어야 한다(TD63). 객관주의는 발견된 이론을 자료를 제시해서 증명하려고 할 때에도 그것이 표명하는 것과 같은 위력을 보이지 않았다. Polanyi는 1919년 Budapest 대학에서 흡착작용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여 박사학위를 얻은 이후 그것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발표하였으나 약 반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이론은 전적으로 무시되었다(KB ch.6). 그 이유는 자신의 이론이 타당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 이론이 택했던 물질의 구조에 대한 기본가정이 당시에 과학사회에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대가들은 그의 이론에 주목하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의 신념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당대의 기본가정이 변화함에 따라 그의 이론이 수락되었고 이와 더불어 그가 제시했던 증거가 비로소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과학공동체의 권위 행사에 착오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조사는 흡착작용에 대한 바른 이론을 수락하는 일이 거의 반세기 동안 지연된 사실로 어리둥절해하는 과학자들에게 흥밋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것의 주된 흥밋거리는 그 이야기가 과학적인 방법에 주는 시사점이다(KB91).” Polanyi는 이러한 쓰라린 체험을 토대로 허울좋은 객관주의를 극복하면서 지식이 입증되고 전파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갔다.] 많은 경우 새로운 이론의 창조자는 당대의 지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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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설을 배반해야 하는 고독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과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설사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쉽게 여러 사람들에게 수락되고 인정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객관적인 증거가 진리를 판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증거는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증거의 효과가 있다. 따라서 Polanyi는 그러한 객관주의적인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할만한 새로운 입증방법을 찾아야만 하였다. 앞으로 검토하겠지만 지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입증하는 과정에도 객관적으로 명시할 수 없는 암묵적인 과정이 개입된다는 것이 그가 보는 남다른 시각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Polanyi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구축한 고유한 이론을 검토해 보겠다. 우리는 앞서 학문의 암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Polanyi가 택했던 전략을 기억한다. 그는 아는 기술이 여타의 제반 기술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후자의 특성에 비추어 전자의 의미를 확장하는 방법을 택해 왔다. 그의 지식론에서는 학문적인 지식과 여타의 지식이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지식이 확장되고 보급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 두 분야간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PK65, 389; SM36-9; TD67; M135-6, 146-7, 157). 과학자나 예술가는 “보편적 의도(universal intent)”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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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그것의 “보편적 타당성(universal validity)”을 주장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은 그것이 단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타당성은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그것의 내용에 합의(合意)한다는 조건만 갖추면 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제 어느 정도나마 Polanyi를 이해한 독자는 그 보편성이라는 것이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감식될 수 있다는 것쯤은 짐작했을 것이다. 예술가가 스스로 세운 기준이 주관적이고 독단적이며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그 고급의 지식을 감식할 수 있는 黙知를 대중에게 발전시키는 또 다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정당화의 작업은 결코 합리주의의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Polanyi는 이러한 특수한 난점을 감안하면서 지식이 발견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Polanyi 체계에서 각각 수준이 다른 존재 및 지식 사이에는 총체적인 단절이 있다. 지식을 확장하는 핵심적인 과제는 결국 각 수준 사이에 있는 論理的 間隙을 뛰어 넘는 것이다. 하급의 수준에서 고급의 수준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활동을 통해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서로 다른 수준의 존재를 체험할 때 그것의 높고 낮음을 立證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또 그 상이한 존재수준을 체험한 사람들이 서로 어떤 종류의 協力을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그가 도입한 핵심적인 개념이 이른바 “發見的 熱情(heuristic passion)”과 “說得的 熱情(persuasive passion)”이다(PK150-1; SM34-7, 42; ST115). 도구적인 열정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열정은 그것 자체로서 투여할 가치가 충분한 인간의 감정이다. Polanyi가 여기서 내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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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열정은 모두 그의 이론체계에서 각 단계의 지식수준 간에 있는 논리적인 간극을 메우고 뛰어넘으려는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으로 정의된다. 발견적 열정은 개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수준과 그 다음 단계의 지식수준 사이에 개재하는 에너지로서 이것을 기반으로 우리는 더 높은 지식체계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 설득적 열정은 서로 수준이 다른 개인 간에 존재한다. 다른 수준의 존재를 회득한 개인들이 서로를 보편적인 의도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설득하여 그들 간의 논리적인 간극을 줄이려 한다. 이 두 가지 열정이 상승작용하여 한편으로 선진은 더 높은 수준의 표준을 습득하도록 돕고, 다른 한편으로 후진은 그것을 습득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Polanyi의 해법이다.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 자체가 감격스럽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강렬한 성향을 소수의 선발된 인구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다소간이나마 그처럼 배우고 가르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의 일반성과 만난다. 우리는 누구나 항상 좀더 깊고 높은 실재와의 접촉을 원한다. 그로부터 배움의 활동이 태동한다. 또한 더 높은 실재를 체험할 때 우리는 대개 Polanyi가 말하는 “보편적인 의도”라는 것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상태에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 다른 동료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놓고 자신의 수준이 “보편적 타당성”이 있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로부터 가르침의 활동이 진행된다. 그 각각의 과정을 이제 이 절의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하게 검토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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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發見의 過程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고안물을 창조해 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발견의 사례는 점차 가속화의 길을 치닫고 있다. 오늘날 각종의 문제해결, 수수께끼의 풀이, 실용 고안물의 발명, 질병의 진단, 희귀종의 확인 등이 매일 신문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학자들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낸다. 이 경우는 엄밀하게 말하면,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의 발견, 다시 말하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하는 새로운 메커니즘 혹은 체계의 발견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SF39-40). 흔히 우리는 최초의 발견만을 대서특필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해명해 낸 사실을 다시 새롭게 파악하는 과정도 하나의 발견이다. 최초의 발견과 그 발견의 재생은 특허청의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작용하는 원리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생활은 매순간 발견하는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적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형식논리에 의하면 명백한 모순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이 이른바 “Meno의 딜레마(SF21-2; SF124)”로 알려져 있다. 이 딜레마에 따르면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그 새로운 지식이 밝혀질 때까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는 점뿐이다. 실재는 위계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형식논리로 연결할 수는 없다. 그 애로를 Polanyi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계층화된 실재의 더 높은 원리는 그 더 높은 원리가 작용하는 더 높은 원리의 경계조건 속에 우리가 내주함으로써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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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내주하기는 더 낮은 수준을 지배하는 법칙에 우리가 고정시켜 주목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KB221).” 그러니까 이 과정을 어떤 논리에 의해서 공식화하는 일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고 굳이 논리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出現의 논리(PK393-7)”라고나 할 어떤 것을 찾아야 한다. 발견이란 지극히 미묘하고 개인적인 기술로서 그 논리는 형식화가 불가능하다(SF47, 125-6; PK123). 다만 가능한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현상 자체와 그것을 유발하는 조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Polanyi의 관점을 편의상 문제의 발견, 내주활동, 예측, 보조식의 재조직화, 발견에 의한 만족이라는 순서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각주 12: Polanyi는 그의 저서 <인격적 지식>에서 각종 동물의 학습과 문제해결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학습의 종류로서 trick(type A: 71-2, 73, 75-6, 99, 174, 328, 365), sign(type B: 72-3, 75-6, 99, 168, 174, 328, 344, 365), latent(type C: 33-4, 75-6, 82, 100, 102, 117, 184, 328, 335, 365)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그는 또한 문제해결과정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정리하기도 한다(PK120-4). 그러나 그것들은 Polanyi 자신의 체계와 접목시켜 설명하는 일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가 말하는 발견적인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문제해결은 자신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시인과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PK271, 276-8). 우주는 늘 우리에게 일련의 全人未踏의 사태를 제시한다(PK317). 그 사태는 어느 계기에 우리의 주관적인 확신에 충격을 가하고, 우리는 그것을 불합리성, 수수께끼, 불편함, 갈등, 문제사태 등으로 경험한다. Polanyi의 인식론에 의하면, 그것은 “불확정된 범위에 있는 실재의 발견(PK317)”이나 혹은 “아직 명세화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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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한 각성(KB171)”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보편적인 의미의 “문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PK294-8). 발견적인 과정은 불가역적이다(PK123). 출발점에서는 문제였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문제가 될 수 없다(PK143). 이 원리는 개인 간에도 적용된다. 어떤 특정한 주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PK124). 한 사람의 문제가 그것을 이미 해결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 일련의 문제사태(PK122)에서 자기수준에 알맞은 “비낭비적인 문제(PK124)”를 설정하는 것이 발견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해결하기에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운 것은 낭비적이다. Polanyi는 이러한 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의 발견은 그 자체로서 발견에 해당한다고 본다(PK120). 그는 “모든 진정한 과학적인 연구는 깊고 장래가 촉망되는 문제와 만나면서부터 시작되고, 이것으로서 발견의 반은 이루어진 셈이다(KB118)”고 말한다.
이는 문제의 발견이 이미 발견적 과정의 깊은 단계에 돌입한 상태임을 뜻한다. 그 후부터는 발견적인 열정과 집착이 생겨서 문제해결의 적극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PK127, 142-5, 150; KB132, 171). 예컨대, 첨단의 과학자는 실재의 더 깊은 의미를 찾아가는 도중에 그 누구도 아직 느끼지 못한 문제를 감지하고 흥분하며 그 해결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그를 아직 누구도 얻어낼 수 없었던 놀라운 해결에 이르도록 만드는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이다.
문제와 문제해결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창조적인 과학자들은 그 간극을 뛰어넘고 보통 사람들이 보는 바대로의 세계를 창조적으로 전환시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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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다. 발견하려는 자에게 그 최종적인 발견물은 아직 불확실하며 모호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매 단계 역시 알려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간극을 연결시켜 주는가? Polanyi는 그 새로움의 원천을 역시 암묵적인 인식에서 찾는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것이 묵지의 특징이다. 모든 인식은 내주를 통한 참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주의 행위, 즉 개인적 지식으로의 묵지를 형성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앞서 인격적 지식의 발전이 묵지의 확장,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지식의 초점이 점차 근거리에서 원거리화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짐을 밝힌 바 있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 等位能力에 의해 암묵적인 수준에서 해결이 모색된다(PK121-2, 126, 129-31, 339). 이처럼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해서 보조식이 점차 성숙되고 그것들이 이전보다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통합될 때 드디어 새로운 발견에 이를 수 있게 된다(SM18-9; TD87; KB133, ch.8).
그런데 어떻게 그 보조식을 성숙시키느냐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보조식은 명세화할 수 없는 부분이며, 따라서 이 단계의 특수한 내용을 자세하게 항목화 하는 것 자체가 Polanyi의 이론체계에 어긋나는 것이다(KB143-4). 다만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단서 혹은 지식의 외관적인 결과물에 접하는 것만으로 보조식이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Polanyi는 觀察(SF129-33; PK73, 76, 174-5, 184, 328)과 讀書(PK70, 78, 101, 104-17; KB152)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들은 인간의 지적인 우수성을 형성시키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그 단서나 활동들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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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의 과정에서 보조식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보조식을 강화시키기보다는 보조식을 전제로 해석되어야 할 단서에 불과한 것이다. 대신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인식범위를 벗어나는 실재와 조우하여 그 새로움을 체득하는 것이다. 암묵적 인식은 수동적인 관찰과 독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직접 관련된 세계에 뛰어들어 오랜 기간에 걸쳐 活動하고 實習하는 과정에서 성숙한다(SM18-9, 62, 91; KB139).
발견의 과정에서 豫測이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Polanyi는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바라보라”는 Polya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PK127). 이 말은 일견 모순되어 보인다. 지식의 단계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따라서 이전의 단계에 있는 눈으로 이후에 발견할 단계를 합리적으로 예견할 수 없다(ST11). 그렇다면 그 미지의 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Polanyi는 이른바 “暗黙的 推論(tacit inference)”라는 개념에 의해서 해결한다(KB ch.10, 194-5). 이것은 이른바 “형식적 추리”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묵지에 토대를 둔 예감 같은 것이다. 보조식이 성숙되는 과정에서 명시화할 수 없는 숨겨진 단서들과 그것을 토대로 하는 개인적인 판단이 추가된다. 그것을 활용하라는 것이 Polanyi의 처방이다(PK126-9; KB171). 앞서 지적했듯이 내주의 활동에 의해서 적절한 보조식이 충분히 성숙함에 따라 인식주체는 지금까지는 숨겨져 있던 실재와 형태를 발견할 새로운 감별력을 갖추게 된다. 그것을 토대로 의미 있는 단서를 찾고 다시 그것들을 토대로 알지 못하는 어떤 것, 즉 미결정된 실재에 대해서 예견하려고 노력하면 어떤 정의할 수 없는 사고의 힘에 의해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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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발견하거나 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발견적인 추측을 숨은 단어 찾기나 문자 퍼즐 등의 단순한 문제의 해결에서부터 全人未踏의 지식의 창안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으로 본다.
과학적인 발견이라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진실한 整合性을 식별하는 일이다(KB138-40). Polanyi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알려진 것을 토대로 논리적인 추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未知였던 현실의 유형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과학적 발견은 예술작품의 창조와 흡사하다. 작품은 전체적인 상을 추구하면서 이루어지는 데 그 전체상이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추구의 과정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는 개별적인 여러 세부항목들의 통합에 의해서 출현한다. 여기에는 지식의 묵지적인 요소에서 일어나는 많은 미묘한 변화가 포함된다. 그 과정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분석된 형태의 인지와 유사하다는 것은 앞서 시사한 바 있다. 형식적 추리의 범위를 뛰어넘는 이 부분을 철학에서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直觀의 작용으로 본다. 그러나 Polanyi의 발견의 논리에서 이는 적절한 보조식의 자발적인 재조직화를 의미한다. “암묵적인 통합의 속도와 복잡성은 그 자체의 영역에서 명시적 추리의 조작을 훨씬 능가한다. 이것이 직관적인 통찰이 순식간에 설명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이다(KB144-5).” 그 재조직화와 통합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견자 자신에게는 그 발견이 우연한 사건이 아닌가 하는 느낌조차 준다(PK120). 그러나 사실 그 발견에의 접근은 그 시작과 해결 간에 개재하는 논리적인 간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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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좁혀나가는 오랜 시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PK129). 숨겨져 있던 실재를 발견하는 일은 발견이 이루어지는 동안 확보되는 새로운 보조식들이 적절하게 통합되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핀 특수한 용어를 쓴다면 발견의 순간 발견자는 문제와 문제해결 사이에 개재하는 논리적인 간극을 가로질러 넘었다고 말할 수 있다(PK143). 인격적 지식의 논리를 따르면, 발견의 성공을 확인하는 것은 외부적인 권위체가 아니라 인식자 자신이다(PK130).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가? 그 확인은 적어도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진다. 첫째, 그것은 “Eureka!”와 같은 발견의 쾌감으로 식별된다(PK122, 133-7, 367). 이러한 만족에 의해서 발견은 그들 자체를 영속화시키게 된다(PK100, 173). 둘째, 그것은 발견 이전의 상태와 발견 이후의 사태간의 변화를 선택지로 했을 때 후자가 전자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식별됨으로써 가능해진다. Polanyi에 있어서 발견이란 바로 “해석적인 틀의 변화(PK106, 143, 388).”, “의미의 변화(PK110, 111, 114, 115-6, 202)”, “개념의 변화(KB198-200)”,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의 “실존적 존재양식의 변화(TD80-1; KB134)”를 의미한다.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상하는 방식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온 것이다. 환언하면, 발견자는 이 순간 서로 수준이 다른 두 가지 통합된 의미에 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좀더 깊고 높은 통합된 의미를 통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 새로운 의미에 자진해서 복종하게 된다(PK123, 202, 319-20, 396; M69). 일단 좀더 높은 수준의 실재를 발견하게 되면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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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세상을 더 의미 있게 바라볼 줄 알면서도 덜 의미 있게 그것을 바라볼 수는 없다. 더욱 깊고 폭넓은 판단력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낡은 판단에 의존할 수는 없다. 이처럼 발견자는 논리적인 간극이 있는 강물을 건넜을 때 그가 지식의 향상된 수준에 도달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Polanyi가 말하는 모든 인격적 지식은 인식주체의 자아에 의하여 세워진 가치기준에 준해서 본능적으로 인도된다.
복잡한 과정을 너무 압축한 느낌이 있지만 Polanyi의 저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발견적 과정”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하자. 이 발견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소 필자가 자료를 재정리하는 수고를 거치기는 하였지만 여기에 그가 하지 않은 말을 임의적으로 덧붙인 것은 없었다. 이 과정은 대략적으로 볼 때 교육에서 배움의 과정에 대응하는 것인 바 독자는 여기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검토할 것은 Polanyi가 설명하는 說得的 過程이다. Polanyi의 체계에서 이 설득적인 과정은 크게 인격적 지식의 檢證과 傳播라는 두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것은 교육의 편에서는 가르침의 과정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예리하고 이례적인 시사에 접하게 된다.
발견적인 과정은 발견자에게 새로운 실재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러나 그 발견자는 그 사건에 의해서 발견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과 격리된다. 이 단계에서 그에게 자신의 발견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전파하는 과제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수행해야 할 하나의 사명이고 책임이라고까지 Polanyi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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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했다. 그러나 그 과제의 수행은 그렇게 용이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발견한 것을 타인에게 입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제까지의 인식론은 이와 관련하여 모종의 객관적인 절차가 있을 것으로 가정했다. 가령 실증주의와 경험주의는 특정 이론의 타당성을 그것과 관찰간의 대응성을 따져서 판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온 Polanyi의 이론에 따르면 그 생각이 얼마나 소박한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정확하고 타당한 입증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그 자료를 감식할만한 이론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면 그것이 곧바로 입증의 단서나 증거가 될 수 없다(ST8-9; M41-42). 그렇다고 해서 지식 자체의 진리성보다는 그것의 유용성의 기준을 따라 지식의 타당성을 판정하는 실용주의의 대안을 Polanyi가 쉽게 따르는 것도 아니다(PK233-4; KB172-3). 이 점은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지적된 바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지식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입증의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전파의 문제다. 새로운 발견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 공유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PK303-45). 그러나 그것들은 흔히 유관한 전문가 집단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한 동안 남아있다(PK160). 그 이유는 그 새로운 발견이 당대의 전문가 혹은 더 나아가서 대중들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과학자가 지금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던 높은 실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과학에서의 천재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찾아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독창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기존 학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내부적인 긴장관계와 위협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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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새로운 인식수준에 공감하고 같은 정도의 열정을 느끼게 되지 않는 한 그것은 사회와 문화 속에 존속하기 어렵게 된다. 여기서 다시 발견자의 높은 세계로 대중을 유도하는 문제가 제기된다(PK216-7). 수준이 다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서 생활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어떻게 높은 수준의 지식을 보급시킬 것인가?
새로운 지식의 발견에 후속하는 두 가지 문제, 즉 입증과 전파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으로 Polanyi는 “說得”을 든다. 이것은 결국 발견자의 수준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일치시키는 활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Polanyi는 그 一致 자체를 곧 진리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의 보편성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합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합의가 반드시 진리의 근거일 수는 없다(PK163-4). 왜냐하면 합의는 여러 가지 다른 수단, 예컨대 종교적인 개종(PK151, 318-9; ST126), 사회화나 충성심에의 호소(PK216-20), 세뇌(PK224)와 선전(PK226-7, 230), 미신(PK240), 행태적인 조건화(M290) 등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Polanyi가 말하는 설득이란 이러한 과정과 구분된다. 그가 말하는 설득은 암묵적인 동의(PK95-100), 서로 강제하지 않은 자발적인 공감(PK204-7), 계속된 중첩에 의한 표준의 발전(PK217-8, 375) 등이 포함된 복잡한 과정이다. 한마디로 설득은 서로가 공감에 의거하여 心悅誠服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고도의 인간적인 활동이다.
설득이 단지 지식의 전파라는 결과만을 가지고 정의될 수는 없다는 점은 참으로 중대한 시사다. 전파에는 두 가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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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가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그 지식이 창출되는 과정을 체험하지 않고 그 결과만을 어떤 수단을 거쳐서든 습득하여 이용하는 경로가 있다. 예컨대, Newton의 법칙은 Newton이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을 되살릴 필요가 없이 습득될 수 있으며 이용될 수 있다. 전화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A. G. Bell의 상상적 통찰력을 되살릴 필요는 없다. 이 경우 우리는 단지 컴퓨터와 같은 기계적인 기능 이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M124).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강요된 것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값진 것인지를 우리는 인간적으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의 경로는 지식의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포함시키고 그 자체를 암묵적으로 이해하고 즐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최초의 상상력 넘치는 통찰력을 재생시켜 그 발견적인 흥분을 공유할 수도 있다. Polanyi가 말하는 설득은 후자의 경로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교육에서 말하는 가르침의 조건이기도 하다.
Polanyi는 설득이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진 뒤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후속현상으로 본다. 한때 우리가 어리석거나 틀린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PK12, 110). 그름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옳음을 알게 되었다. 그 옳음은 보편적 의도를 가질 만큼 열정의 근거가 된다(PK143-5). 발견적인 과정을 거쳐 무지의 바다를 건넜을 때 아직도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은 발견자에게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다. 나의 옳음과 상대편의 그름이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이 “설득적 열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발견은 많은 경우 불가피하게 설득이라는 활동과 연결된다. Polanyi 자신의 말을 빌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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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적 열정은 발견적 열정에 후속하는 것으로서 발견적 열정처럼 역시 論理的인 間隙에 봉착하여 드러난다. 발견자가 스스로 새로운 실재관에 헌신하는 정도만큼 그는 아직도 옛날 식으로 생각하는 타인들과 격리되어 있다. 그의 설득적 열정은 이제 모든 사람을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轉向시킴으로써 이러한 논리적인 간극을 건너 넘을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한다. 이는 발견적 열정이 발견을 향해 나아가고자 자신 앞에 놓여있던 간극을 넘도록 그에게 박차를 가한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PK150).”
발견적인 것이든 설득적인 것이든 모두 지식의 수준의 차이에 따른 논리적인 간극을 뛰어 넘어야 하는 과제라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점에서 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개인 내부의 문제임에 비하여 후자는 개인간의 문제다. 이 점에서 그 과제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달라진다. 인격적 지식의 속성에 비추어 보면 서로 다른 수준의 지식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Martin Buber의 용어를 따른다면, 그들은 서로 의미의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득불 “나와 그것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설득은 그러한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선진이 후진으로 하여금 자신과 동일한 수준에 이르도록 돕는 과정에 해당된다. 그것이 성공할 때 비로소 그들은 하나의 해석적인 틀 안에서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PK28-9, 60, 253-7, 346, 348; KB148-9).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설득한다거나 가르친다고 할 때 그 수단으로서 언뜻 생각하는 것은 많은 사물을 직접 보여주거나 인쇄된 책을 많이 제공하거나 혹은 대화를 하는 것이다(PK77-8, 92-3, 133, 204-7; SM24-5; KB206). 그러나 Polanyi는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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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준의 지식을 가진 선진과 후진의 경우 그러한 방법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음을 자주 지적하고 있다(PK87-95, 204-7, 375-6; SM21, 24; KB106-7, ch.12, 235-6; ST93, 118). 모든 소통에는 신호와 잡음이 섞여있다.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수신자의 역량과 관련되어 있다. 외계의 사실이나 제공된 언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능력에 따라 다르며, 바로 그 능력은 곧 Polanyi의 경우 묵지의 수준을 일컫는다. 따라서 발견의 과정에서처럼 순서상 그 묵지를 형성하는 일이 관찰과 독서에 선행되어야 한다. 즉 선진과 후진 사이에는 다소의 묵지의 차이가 있으며, 그것이 보충되지 않는 한 그들 간에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일류급 화학자, 생물학자, 의사들은 교재를 저술하여 그들의 지식을 후진들에게 손쉽게 전파하려는 의도를 가질지도 모른다. 이때 그 교재가 전파를 보증할 수 있는가? 아마도 객관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Polanyi는 그렇게 용이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후진들은 부분적으로 교재에 의해서 그들의 전문 지식을 획득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들이 그 인쇄된 활자에만 주목하고 거기에 자신을 일치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소기의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없다. 다음의 언명이 그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화학, 생물학 및 의학의 교재는 각각 그들의 주제에 대한 인격적이고도 암묵적인 지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만큼 아주 공허하다. 유명한 의학 상담자나 외과의사의 우수함은 교재를 더 열심히 읽는 것보다는 실제 경험에서 얻은 개인적인 기술-진단자와 치료자로서의 그의 기술에 달려있다(M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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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는 데 말을 매체로 쓴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 교재를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사전의 훈련이 별도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모든 감각을 주의 깊게 훈련시키고 관련된 묵지를 형성시켜야 한다. 선진이 안다고 해서 후진이 그 아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 결과만을 습득시키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두고 설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후진도 우리가 앞서 검토한 바 있는 발견적인 과정, 즉 체험적인 배움의 과정을 거쳐야만 어떤 의미 있는 화학적 사실을 이해하고, 어떤 생물표본을 확인하고, 질병증세를 진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진은 그 순서를 바꾸어 특별한 화학적인 사실, 생물표본, 질병증세를 단지 보여 주는 것만으로 그 지식을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로, 즉 후진이 그가 거친 배움의 과정을 거치도록 돕고 그 후에 그것들을 그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음성적인 말도 이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말로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한다면 말은 가르치는 도구라기보다는 그 가르침이 끝난 후에야 그것의 의미가 제대로 소통될 수 있는 제반 단서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설득의 상황에서 선진이 후진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 체험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 말은 대개 다음과 같이 그 체험을 촉구하는 것에 국한된다.
“여러분, 나는 당신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더 많은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KB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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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과 후진간의 언어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그것 이상의 사전 활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 말의 단서들을 종합하여 그것을 총체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는 암묵적인 인식을 후진에게 보강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르침에 의한 배움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결국 훌륭한 설득이라는 것은 바로 후진의 배움을 촉구하는 것과 같다. 묵지는 언술내용을 따져서 수용하거나 거부한다는 의미의 비판적인 과정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모든 묵지를 배우는 과정은 인식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계속적인 체험과 내주를 요구한다. 선진과 후진간의 언어를 통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현장의 맥락에서 묵지를 숙달시키는 매일의 경험, 실습, 훈련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격적 지식은 외재하는 실재가 우리의 신체 속에 그리고 그 신체의 능력을 확대시키는 도구들 속으로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가까운 대상을 체내화하고 점차 다른 매체를 통해서 더욱 원거리의 대상까지 점차 우리 속으로 편입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공의 거리가 있는 외계를 우리 내부에 포함시키는 일련의 내주의 과정은 자연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해와 같은 인문 사회적 대상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이 원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에 있는 선진과 후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후진은 결국 선진의 상황에 들어가서 그의 세계에 내주함으로써 선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체스 선수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대가의 정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 속에 내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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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해한다. 그는 대가의 정신을 그 대가의 동작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대가의 행위에서 그의 정신을 보고, 대가의 정신 속에 있는 전략에 대한 보조적 단서인 이러한 행위에 내주한다. 그러한 동작들은 전체적인 전략에 통합되는 것으로 보일 때에만 마침내 의미 있게 된다. 그리고 인간행동은 일반적으로 전체적인 정신에 통합될 때에만 의미 있게 된다(M74).”
체스 선수들이 체스 대가의 마음을 알고자 할 때 그들은 대개 그의 게임을 연습하는 활동을 먼저 한다. 이것이 그 대가의 정신 속에 내주하는 정석적인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종의 세계를 우리의 정신의 행위 속에 내주함으로써 정신의 목적을 함께 나눈다. 그렇다면 선진의 입장에서 설득은 후진으로 하여금 자신을 내주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한편 후진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그 관련된 지식의 분야에 들어가서 선진을 찾아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배움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Polanyi의 체계에서는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큰 신뢰감을 가지고 있는 글과 말의 역할이 격하된다. 대신 그는 교육이 스승과 제자 간에 徒弟的인 關係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LL26, 52; SF25; PK53-5, 207; KB219-20; ST94-6; M62-6, 74).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학문과 기술 이전도 결국 언어적인 소통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형성에 의존한다고 본다.
도제적인 관계에서 Polanyi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은 스승의 權威에 대한 제자의 信賴感이다(SF23; PK53, 208; TD60-1). 도제로서 제자는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시인하고 그를 가르칠 스승의 권위를 일단 받아들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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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에 의해서 배운다는 것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스승을 따르는 것은 설사 당신이 그 효과를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일하는 방식을 당신이 신뢰하기 때문이다. 스승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가 시범으로 보이는 현장에서 그의 공력을 본받음으로써 도제는 스승 자신에게도 명시적으로 알려지지 못한 부분을 포함하는 그 기술의 규칙을 의식적으로 얻어낸다. 그 숨겨진 규칙은 그 정도로 자신을 죽이고 무비판적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본받는 사람에 의해서만 동화될 수 있다. 인격적 지식의 보고를 보존하고자 하는 사회는 전통에 굴복해야 한다(PK53).”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주의 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타인이 혹은 어떤 권위체가 단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무조건 추종하는 것은 Polanyi의 체계에서 결코 배움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승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배움의 과정에서 왜 필요하며, 어떻게 확인되는 것인가? 원칙상 스승의 지식은 제자가 당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자는 배움의 첫 단계에서 그 알 수 없는 지식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신뢰하지 않는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역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신뢰가 아무런 확인과정도 없이 배움의 마지막 단계까지 연장된다면 Polanyi가 말하는 설득이 제대로 성공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 자신이라는 사실을 앞서 지적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한 배움도 결국 제자의 깨달음으로 종료되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자는 일단 스승으로부터 배울 때 보편적인 의문을 당분간 보류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그 보편적인 타당성에 스스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스승에게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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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는 것은 그의 기준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기꺼이 수락하는 것을 의미한다(PK208, 302, 373, 378). 그렇다면 설득의 과정에서 권위의 수락은 共歡性과 心悅誠服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Polanyi가 설득과 공환을 결부시키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선진은 그의 높은 지식을 단지 전달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후진으로 하여금 그것을 자진해서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예술가들의 경험에 대한 해석은 대중의 평범한 지각과는 예리하게 다르다. 그들의 지각은 일반대중의 일상적인 지각과 날카롭게 부딪친다. 대중과 평론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만약 그 혁신가의 지식과 대중 혹은 평론가의 지식 간에 수준의 면에서 지나친 괴리가 있을 경우 전자는 후자에 의해서 전적으로 무시될 것이다. 이 결과는 바로 설득과 가르침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 편차가 있는 지식의 간격을 일시에 해소시킬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설득은 상대의 수준에 맞게 점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PK124, 217-8; KB52). 그러자면 설득은 설득하려는 상대의 수준과 타협하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과학자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문제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도록 애태우지 않는 문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의 능력의 일부를 낭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자신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를 공략하는 것은 그의 능력을 송두리째 낭비하는 일이 된다(KB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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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은 우리가 발견의 과정을 검토할 때 문제의 수준을 비낭비적인 것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과학과 예술의 높은 경지는 장기적이고도 끈기있는 수련의 결과로 습득된다. 새로운 보조식의 형성과 통합은 장시간의 개인적인 수련을 요구한다. 이는 바로 인식자가 그 자신의 존재적 수준을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다. Copernicus, Newton, Einstein 등의 창의적인 과학자들이 이룩한 발견이 예측으로부터 확증에 이르는 데는 보통 몇 해의 경과가 필요했고, 거기에는 또한 자신을 해체시키는 진통이 동반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현실을 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결과를 일시에 대중에게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천부적인 재능은 보조식-초점식의 위계를 역으로 따라 내려가서 대중이 가진 묵지의 가장 단순한 수준과 연결되어야 한다. 설득은 앞서 지적했듯이 상대의 수준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마지막 단계에 접근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이러한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설득의 경로에 의해서 고귀하고 혁신적인 지식이 대중에게 고귀한 것으로 입증되고 또 그것이 널리 공환될 수 있게 된다.
이제 Polanyi의 인격적 지식의 확장이라는 주제를 마무리 할 때가 왔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생활에서 표방하는 교육의 양상이 어떠한가를 반성하는 계기를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Polanyi가 말하는 발견적 과정과 설득적 과정을 각각 배움과 가르침의 과정으로 본다면 교육은 그의 주장대로 열정에 토대를 두어야만 한다. 열정은 내재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이 말은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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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음을 함축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축제분위기에서 지식을 확장하고 보급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중이 손쉽게 도달할 수 없는 높고 높은 지식의 결과를 객관성의 이름으로 미리 정해 놓고, 낮은 수준의 대중이나 미숙한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그것을 말의 수준에서 수동적으로 내면화하도록 강요하는 경향은 없는가? Polanyi 체계에 따른다면 그것은 결코 발견과 설득의 범주에 들 수 없다. 그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억지로 따르도록 기능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가치로운 것은 가치롭게 전파되어야 한다. 그것이 강요된다면 그것은 결코 인격적인 지식의 확장이라고 할 수 없고 교육일 수도 없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확인해 두자. 그 사실 하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Polanyi가 남긴 지식의 寶庫를 가치롭게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느꼈고 독자도 그렇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필자나 언설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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