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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7.03.03|조회수1,225 목록 댓글 0

장상호(1982). 『피아제: 발생적 인식론과 교육』. 교육과학사.

pp.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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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이론


   A. 발생적 인식론

   피아제의 일생에 걸친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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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적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인식론이란 지식의 범위, 성질, 근원 등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로 알려져 왔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內省과 思辨을 토대로 이 문제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생물학의 배경을 가진 피아제는 인식의 문제가 순수히 철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환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가 불만을 가진 것은 철학적 사유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이 객관적인 증명의 과정을 생략한 채 주장된다는 것이었다. 한편, 과학은 객관적인 관찰과 자료의 수집에 의해서 신념의 타당성을 엄격하게 검증하는 내규를 택한다. [각주 11: 피아제가 일컫는 과학은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나 좁은 의미의 경험주의(empiricism)의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과학은 관찰적 자료와 그것을 나타내는 언어뿐만 아니라 질문→자료→해석이라는 능동적인 과정을 모두 내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피아제 이론의 특이한 공헌 중의 하나다.] 피아제는 이제까지의 인식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과학의 내규에 따라 평가됨으로써 주장자 자신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을 탈철학자(ex-philosopher)로 자처한 그는 그의 특이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우리는 철학과 과학간의 경계가 항상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경계는 제시되는 문제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과학적이라거나 분명하게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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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과학의 경계는 다만 그 문제들의 가능한 한계와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한정된 질문을 실험, 논리-수학적인 공식, 혹은 그 모두에 의존하여 처리할 수 있게 하는 방법상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나는 ‘발생적 인식론’을 꿈꾸어왔다. 이는 지식의 문제들을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취급하는 것으로 한정시킨다. 이 질문은 모두 지식의 형성과 역사적인 발전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과학적인 학문의 성공을 판정하는 기준은 협동이다. 그리고 철학의 환상에서 깨어난 이래, 나는 점차 어떤 개인의 작업도 그것이 갖는 잠재적인 결함에 의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며, 또한 어떤 사람이 피아제의 체제를 논의한다면 이는 그만큼 나 자신의 실패를 결론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Piaget, 1971a, pp. 28-29).”


   인식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제기하면 그것은 단지 사변적인 논쟁만을 일으킨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문제를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느냐?”라는 범위로 국한시킨다면, 그것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피아제는 바로 이 후자의 입장을 택한 것이다. 그가 규정하는 발생적 인식론의 과제는 지식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기제와 저급의 지식이 고급의 것으로 이행하는 경로를 밝히는 것이다(Piaget, 1970a).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피아제는 공간, 시간, 인과성, 수, 논리-수학적인 분류 등과 같은 개념들과 지식이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어디에서 연유되어 어떻게 변형되는지에 대한 가설과 이론을 구성하고 그들을 증거에 의해서 입증하였다. [각주 12: 피아제는 “역사비판적 방법(historico-critical method)”에 의해서 집단적 지식의 발달과정을 해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역사적인 기록은 가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특히 새로운 관념이 발전되고 정교화되는 과정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개인의 지식 발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지식의 발달에 관한 과학사적 고찰에 관해서는 Hanson(1958), Kuhn(1962), 그리고 Toulmin(1961) 등을 참고하여 보면 그들이 피아제의 이론과 매우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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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한 개인으로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벅찬 과제였다. [각주 13: 피아제가 Einstein을 방문하고 아동의 보존개념(conservation concept)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자, Einstein은 “심리학은 물리학보다 얼마나 어려운 학문인가!”라는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피아제는 심리학자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탐구과제의 어려움을 Einstein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고 그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다(Piaget, 1971a, p. 167).]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제는 이 황무지를 일구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이 피아제라는 특정인의 자아로부터 “탈중심화(de-centered)” 될 수 있기를 바랬다.

   발생적 인식론은 다양한 학문과 관련지어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피아제의 경우는 생물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피아제는 이 학문들의 어떤 기존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그 나름의 특색있는 관점에 의해서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한마디로 그의 이론은 철학에서 합리론과 경험론, 생물학에서 다윈(Darwin)의 돌연변이설과 라마르크(Larmark)의 용불용설, 그리고 심리학에서 영미계열의 연합주의와 구라파계열의 게슈탈트학파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각주 14: 피아제는 Hegel의 영향을 다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Elkind, 1976, pp. 29-31). 그의 구조주의적인 논의 가운데 전체는 부분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는 생각, 후에 설명하겠지만 그의 이론 가운데 핵심적인 개념인 적응을 동화와 조절이라는 상보적 과정의 평형화로 본 점, 그리고 그가 기존의 상반된 이론을 종합하는 논리 등이 다분히 변증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제 이와 같은 피아제의 경로를 대충 검토해 보는 순서를 밟아보겠다.

   지식의 근원과 관련하여 철학 분야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대립된 가설이 있어 왔다. 그 하나는 선천설(apriorism)이다. 예컨대 데카르트(Descartes)는 수와 논리의 개념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은 경험함이 없이 연습만으로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로크(Locke)와 같은 경험론자들은 데카르트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극단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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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의하면 아동은 아무 관념도 없는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며, 그는 오감을 통해서 그곳에 현실을 복사함으로써 비로소 외계에 대한 지식을 누적시킬 수 있게 된다. 칸트(Kant)는 이 양쪽의 입장을 그 나름대로 종합하려 하였다. 그는 외계의 감각적 자료가 지식의 형식에 필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경험론자의 주장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감각적인 자료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보존개념 등과 같은 어떤 선험적인 범주에 의해서 여과되고 재구성됨으로써 지식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고 칸트는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철학적인 논의에서 칸트의 입장이 피아제의 것과 가장 유사하다. [각주 15: Kant의 선천설을 가정하는 동물학자의 하나인 Konard Lorenz는 피아제계열의 학자들과 약 3년 동안의 연구를 한 후에 “나는 피아제가 Kant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Kessen & Kuhlman, 1962, p. 18)”고 말하였다. 피아제 체제는 가끔 신칸트주의(neo-Kantism)라는 평을 받는다.] 피아제는 지식이 개인에 의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칸트의 주장에 동조한다. 다만 그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수정을 가한다. 피아제는 칸트와는 달리 시간과 공간 혹은 여타의 범주개념들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있는 외부적 현실의 경험적인 발견도 아니고 처음부터 이미 형성된 것도 아니다. 그에 의하면 지능이나 지식은 개인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부단히 쇄신되고 재구성된다. 다음의 글은 피아제의 기본입장을 잘 요약하고 있다.  


   “경험주의자(empiricist)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발견은 그것을 성취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이지만 발견된 것은 이미 외부적 현실에 존재했었던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현실의 구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선천론자(nativist or apriorist)는 지식의 형식들이 인식주체의 내부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에도 역시 새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발생적 인식론자에게는 지식이 계속적인 구성의 소산이다. 왜냐하면 이해라는 행위의 각각에는 어느 정도의 창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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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분야에서 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에로의 통과는 이전에 외계나 인식주체의 마음속에 없었던 새로운 구조의 형성에 의해서 항상 특징지어진다. 발생적 인식론의 주된 문제는 새로운 것들이 이렇게 구성되는 기제를 밝히는 것이다(Piaget, 1970a, pp. 77-78).”

  

   피아제는 이와 같은 연구과제에 대한 해답을 생물학에 근거하여 얻으려고 하였다. 그 이유의 하나로 물론 그 분야에서 그가 과학적인 훈련을 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생물학이 살아있는 인식주체의 행동 속에서 인식론적 과제를 정착시키는 가장 유리한 학문 영역이라는 데 있었다. 생물학은 유기체와 환경간의 상호작용에서 유기체의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 학문이다. 이 점에서 피아제(1971b)는 생물학적인 법칙이 지적 발달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지능이 생물학적 성장의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고 가정하였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가끔 “정신적 발생학(mental embryology)”이라거나 혹은 “지능의 생물학적 이론(biological theory of intelligence)”라고 칭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생물학에도 다양한 이론이 있기 때문에 피아제가 그것을 토대로 그의 이론을 구성했다는 말은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그는 이 분야에서도 그 나름의 특이한 입장을 택하고 있다. 그의 초기의 연체동물에 관한 연구는 유기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의 문제와 관련하여 라마르크의 경험주의나 혹은 그 반대편의 다윈주의의 어느 것도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게 하였다. 라마르크는 진화과정에서 새로운 특성이 출현하는 것은 환경이 유기체에게 그 특성의 사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획득된 특성이 환경의 압력에 의해서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다윈은 새로운 특성의 출현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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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과 돌연변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유기체의 새로운 특성은 돌연변이라는 우연에 의해서 출현하며, 그 가운데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종이 환경에 덜 적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종을 도태시키며 번창한다. 이 체제하에서 환경은 단지 적절한 종과 부적절한 종을 선별하는 기능 이상의 것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각주 16: Darwin의 이론은 그의 從弟인 Francis Galton으로 하여금 지능이 유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 역사적인 관념은 지금까지도 심리학계의 일부에서 잔존한다.] 피아제는 이 대립된 가설의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는 역시 그 중간에 있다는 입장을 택한다.

   피아제는 모든 유기체의 특성이 유전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유기체 자체의 적극적인 활동이라고 그는 믿는다. 연체동물(Limnaea stagnalis)의 형태발생에 관한 그의 관찰과 실험은 이 특이한 기본가정의 타당성을 입증하였다. 일종의 달팽이인 이 동물은 출생하자마자 잔잔한 수중에서 깊고 물결이 높은 곳으로 옮겨졌는데 그로 인해서 그들이 깊은 호수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태로 변모하였으며, 그 변모된 새로운 특징은 다음 세대에서도 나타났다. 피아제는 이 새로운 특징이 유전이나 환경적 압력의 어느 하나만으로 생기지 않았으며, 그들을 중재하는 유기체 자체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 즉 격한 물결은 그 달팽이로 하여금 바위에서 씻겨나가지 않으려는 활동을 점차 증가시켰으며, 그 활동이 그것의 껍질을 넓히거나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이한 환경은 다른 잠재된 유전적 가능성을 생기게 하였으며, 이 점에서 새로운 속성은 돌연변이라는 우연적인 요인에서 보다는 다소 환경의 압력에 의해서 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변종은 무한정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어떤 주어진 “반응표준(reaction norm)”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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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르크가 상정했던 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부면, 즉 유기체가 그의 구조에 맞게 환경을 선택한 부면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유기체의 유전적 가능성은 유기체 자체의 활동에 의해서 상이한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각주 17: 피아제(1971b)는 “표현형모사(phenocopy)”라는 가설을 근래에 발표한 바 있다. 이는 표현형적인 변종이 유전자형의 출현에 선행하며, 또한 유전자형이 그 자체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과정을 통해서 특정한 환경에서의 표현형을 모사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가설로 인하여 피아제는 가끔 신라마르크주의자(neo-Larmarkian)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제3의 입장은 Dobzhansky나 Waddington과 같은 현대의 생물학자들의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 신다윈주의자(neo-Darwinist)로 분류되는 Waddington은 Larmark의 이론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획득된 유전”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유전자형은 단지 전달될 뿐만 아니라 환경의 압력과 그 자체의 신진대사에 의해서 변형되는 하나의 전체적인 생성적 체제(a total epigenetic system)라는 것이다(Piaget, 1971b, pp. 30-81).] 이와 같은 피아제의 입장은 마치 상이한 종의 생물이 환경에 자체를 적극적으로 적응하면서 점차 진화하듯이 한 개인도 마찬가지로 그가 접하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면서 진화한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한다.

   생물학의 연구에서 인식과 지식의 연구로 관심을 돌릴 때 피아제는 생물학적인 적응체제가 인간의 지적인 적응행동을 마찬가지로 설명해 줄 것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을 택하였다. 그는 아동의 심리적인 발달이 애초에는 유기체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지식이나 지능과 같은 인간 특유의 인식능력은 이와 같은 생물적인 근원에서 출발하여 그 생물적인 적응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 지적인 도구를 이용하여 인간은 그들이 봉착하는 환경을 보다 능률적으로 정복하면서 생명체로서 거의 완벽한 진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피아제는 믿었다.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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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적인 적응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적응의 확장이다. 그러나 인지적 적응의 고유한 기능은 그들의 무한대한 동화와 조절의 능력과 이 두 하위기능간의 평형화의 안정성에 힘입어 유기체적인 수준에서 획득할 수 없는 부류의 형태를 성취하는 데 있다(Piaget, 1971b, p. 185).”


   피아제는 생물적인 측면과 인지적인 측면 간에는 그 구조와 기능의 면에서 “부분적인 동형성(partial isomorphisms)”이 있다고 가정하고 생물학적인 개념들을 빌어 지식과 지능의 발달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발생적 인식론을 생물학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물적인 적응과 인지적인 적응 간에는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유기체와 환경간의 관계를 물질과 에너지의 생화학적 교환에 국한시켜 취급한다. 그러나 인식 문제는 그와 같은 설명이 미치지 못하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간의 기능적 관계를 구명해야만 한다. 피아제는 이것을 바로 발생적 인식론의 과제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피아제는 자기의 고유한 탐구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로부터 아동이 생후 차츰 그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그의 인지적 도식이나 구조를 변형시키고 정교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을 구성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는 인간의 지적 구조가 선천적으로 주어졌다거나 혹은 그 반대로 환경에 의해서 전적으로 형성된다는 주장의 어느 것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과 지능은 개인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그 개인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발생적 인식론이라는 말과 더불어 흔히 “상호작용주의”(interactionism)라거나 혹은 “발달적 구성주의(developmental constructionism)”라는 말로 지칭된다.

   가설이나 주장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만 그것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철학은 이 점에서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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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학적 접근은 생물학과 같은 과학에서 개념을 차용하여 어떤 현상을 설명한다고 해서 무조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핵심은 가설과 관련되는 자료를 실지로 수집하고 그 자료에 의해서 가설의 객관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피아제는 이른바 “임상적 방법(clinical approach)” 혹은 “비판적 탐색방법(the method of critical exploration)”이라는 방법론을 택하였다. [각주 18: 이에 관한 것은 Piaget(1960, ch. 1)와 Inhelder, Sinclair & Bovet(1974, pp. 18-24)를 참고하라.]

   근래에 여러 심리학자들(예컨대, Flavell, 1977; Brown & Desforges, 1979)은 피아제의 이론을 비판할 때 그가 사용한 “임상적 방법”이 과학적인 엄격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의 유용성은 그것이 제기된 문제를 푸는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함을 여기서 지적하여야겠다. 다시 말하면, 방법이 문제에 우선하면 마치 말이 수레에 이끌려가는 것과 같이 어색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임상적 방법”은 적절한 것으로 평가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우선 피아제가 발생적 인식론의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 문제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탐색된 바 없는 영역이었다. 그는 지능이나 지식의 내용을 단순히 기술하려는 것보다는 그것들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기본과정과 구조를 설명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전대미문의 영역을 탐색함에 있어서 조급하게 형식적이고 엄격한 과학적인 절차와 내규만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본래의 목적을 어긋나게 할 위험성조차 갖는다. 더구나 피아제는 자연상태를 관찰하고 그것의 배면에 흐르는 법칙을 추리하는 천부적인 재질과 학문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임상적 방법은 피아제로 하여금 인식의 문제를 자유분방하게 탐색하고 검증하게 하는 융통성을 부여하였다.

   피아제는 자연스러운 사태에서 유아나 아동이 보이는 행동내용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이면에는 어떤 정신적인 과정과 구조가 작용할 것인가를 추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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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특수한 상황을 그들에게 거듭 제시하거나 변형시키거나 혹은 다양한 질문을 던져 그 추리나 가설들을 체계적으로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는 연구를 돕는 조원들에게 관찰하는 기법들을 적어도 일년 이상 훈련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가설을 수없이 반복하여 검증하게 하였다. 그의 저서는 대부분 이 과정에서 구성한 특이한 개념과 이론 그리고 그들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특수한 관찰사례들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피아제의 연구를 좀 더 엄격한 절차와 내규에 따라 반복하고 있는데 그들의 발견은 놀라울 정도로 피아제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와 같이 철학과 심리학의 교차 지점에서 구성된 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은 심리학의 발전에 매우 특이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이론은 한 마디로 영미 계열의 연합주의와 유럽대륙 계열의 게슈탈트 심리학이 갖는 결함을 지양하고 그들을 좀더 균형있는 체제로 종합하여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Piaget, 1973b).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 내력을 밝히는 데 다소의 지면을 할애하기로 하자.

   지능과 관련하여 영미계열의 심리학자들은 검사제작을 통한 개인차의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비네검사를 필두로 시작된 이런 부류의 연구들은 개인과 집단 간에 사고의 내용과 수준에 모종의 차이가 있으며 그들 간에 모종의 상관이 있다는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막상 지능이 어떤 기제에 의해서 어떻게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방식으로 형성되는지에 대한 해명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영국의 경험론을 토대로 한 연합주의 심리학도 그 공백을 메우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연합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단지 자극과 반응간의 기계적인 연결과 그 연결들의 집합으로 환원시킨다. 이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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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과 성인 간에는 구조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자적인 연합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소의 견해상의 다양성은 있겠지만 이 연합주의는 경험론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성이 환경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각주 19: 여기서 독자는 Watson(1928)의 유명한 발언, 즉 적절한 조건화의 절차를 허용한다면 그는 유아를 “백정, 빵제조업자, 걸인 혹은 왕”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극단의 환경주의적 발언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러나 피아제의 이론과 관찰은 이 입장과는 전혀 불일치한다. 그에 의하면 지능은 자극과 반응의 누적이나 습관체제가 아니라 상호간에 구조적인 관련을 갖는 내면화된 행위의 체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외부적 환경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의 능동적인 활동의 소산이다. 즉 한 개인이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 현실을 자신이 창조한 구조로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피아제는 영미의 연합주의를 “구조가 결여된 발생주의(a geneticism without structure)”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연합주의와는 달리 구조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에 의하면, 감각동작적이거나 지각적인 조직은 상호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의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복잡한 구조로서 존재하며, 유기체와 환경을 포괄하는 하나의 장을 지배하는 평형(equilibrium) [각주 20: 이는 물리학적인 개념으로서 이전에 불균형상태에 있었던 두 가지 이상의 요소 간에 균형과 조화가 유지된 상태를 지칭한다. 피아제를 비롯한 많은 심리학자들이 이 개념을 원용하고 있다.] 의 법칙을 따른다. 피아제는 게슈탈트 이론의 이와 같은 구조주의적인 접근방법 자체는 연합주의보다 발전된 수준의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이 이론이 적어도 두 가지 부면에서 지능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한 것으로 보았다. 그 하나는 지능은 게슈탈트 심리학이 주로 다루는 지각현상으로 환원시켜 버릴 수 없는 고차원의 속성을 지녔다는 점이다(Piaget, 1969b). 지각적 게슈탈트는 물리적인 의미의 평형화를 모델로 하기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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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자신의 자율조정(autoregulation)에 의한 점진적인 평형화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예컨대 지각적 게슈탈트는 비연합적(nonadditive)이고 비가역적(irreversible) 임에 비해서 지능의 구조는 합산적임과 동시에 가역적이다. [각주 21: 예컨대, 2+2라는 조작은 정확히 4라는 합계를 가능하게 하지만 지각의 장에서는 조금 많거나 적게 보이는 정도에 그친다. 또한 조작이 가역적이라는 말은 2+2=4를 4=2+2와 같이 바꿔 놓을 수 있음을 뜻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이 지능을 다루는 데 부적절한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다루는 구조가 선천적으로 주어지거나 고착된 것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이는 피아제의 이론 및 관찰과 전적으로 상치된다. 후에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피아제 체제 안에서의 구조는 개인의 적응과정에서 부단하게 생성되고 변형되고 재구성되며 몇 가지 특징적인 단계를 거쳐 발전되는 성질을 지닌다. 이 때문에 피아제는 게슈탈트이론을 “발생이 결여된 구조주의(a structuralism without genesis)”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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