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동(2003). 『초등교육의 재개념화』. 서울: 학지사.
제6장 초등교육의 교육본위론적 재서술 ... 213
1. 교육학도의 상심 ... 213
2. 개념적 혼미 속의 초등교육 ... 221
3. 교육본위론의 선택 ... 240
4. 새로운 교육의 조망 ... 266
5. 초등교육의 재서술 ... 297
6. 재서술에 대한 변명 ...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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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초등교육의 교육본위론적 재서술
1. 교육학도의 상심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이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의견이 제시되어 왔지만, 교육의 정체를 보여주는 만족할 만한 해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짐작하기로 이러한 사정이 조만간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그만큼 교육은 우리의 좁은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러나 교육에 대하여 적어도 이러한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정체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교육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과 비교하더라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소망스럽고 아름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많은 학문들을 제쳐두고 교육학을 선택하여 평생 학문 활동을 전개하는 교육학자들의 대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소망스러운 교육이라고 하는 인간적인 삶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인 탐구를 진행하고, 이를 통하여 교육의 아름다운 면모를 좀 더 여실하게 체험하는 일, 그것은 분명 매력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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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것이 사범대학의 교육학과에 입학하는 교육학도들 그리고 그들보다 앞선 수많은 선배 교육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믿음이고 선택일 것이다.
교육학의 이러저러한 강좌들을 수강하다가 교육학도들 가운데 상당수가 곧바로 직면하게 되는 놀라움은 교육학이 가장 전형적인 응용학문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당혹스러운 것일 수가 있다. 첫째는 교육학이 응용해야 될 학문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육철학, 교육사,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교육행정학, 교육인류학, 교육통계학, 교육경제학, 교육정치학, 교육공학 등등이 교육학과에서 접할 수 있는 교육학의 과목들이다. (각주 1: 교육학을 구성하고 있는 학과목들이나 분과학문들의 종류에 대한 국가간 비교연구에 따르면, 교육학의 학과목들에는, 여기서 제시한 것 이외에도, ‘교육사회심리학’, ‘교육생리학’, ‘교육인구통계학’(educational demography), ‘교육민족지학’(educational ethnology) 등과 같은 이름조차 생소한 것들도 모두 포함된다(Mialaret, 1985).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교육학의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계속 생성되고 있다.) 이들 교과목 명칭에서 ‘교육’이라는 수식어를 제외했을 때 남게 되는 학문들이 바로 교육학이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응용해야 될 학문들이다. 이는 거의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철학,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등과 같은 학문들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려울 만큼 이질적인 학문들이다. 그런데 교육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들 학문들을 총동원해야 된다면, 이는 사실상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이들 학문들 모두에 해박하지 않는 이상에는 이 세상 어느 교육학자도 교육을 이해할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교육학에 갓 입문한 교육학도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이상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째는 교육학의 고유한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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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모든 분과학문들을 남김없이 공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교육학도들은 그 가운데 몇 개, 예를 들어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교육학도들은 순수한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들을 제외할 경우, 이들 분과학문들에 남게 되는 교육학만의 지식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응용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철학이나 심리학을 교육에 적용하는 가운데 철학이나 심리학의 그것과는 구분되는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의 지식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조금은 생산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짤막짤막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그다지 신기할 것이 없는 이야기들이 교육적인 시사나 함의(含意)라는 식으로 실려 있을 뿐이며, 그것마저도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육학도들의 의문을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이러한 형편은 교육철학이나 교육심리학만이 아니라 교육학의 모든 분과학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느끼게 될 것이지만, 종합대학 내에서 교육학의 학문적인 위상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교육학이 응용하고자 하는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과 같은 학문들, 즉 교육에 응용되어야 하는 다른 학문들을 가리켜 흔히 ‘모학문’(母學問, mother discipline)이라 한다. 교육학이 이들 모학문들을 응용하는 학문인 이상, 교육학의 학문적인 위상은 모학문들의 그것에 비하면 언제나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학이 제시하는 교육적인 시사나 함의라는 것도 사실은 모학문들 속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이미 들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교육학과 학생들은 3학년이나 4학년이 되면, 직접 모학문들을 공부하기 위하여 철학과나 심리학과 또는 사회학과의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철학과나 심리학과 또는 사회학과 등에서 개설하는 강좌들을 직접 수강하는 가운데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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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것은 교육이란 다양한 모학문들의 지식을 응용함으로써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다른 모학문들의 지식을 요청하는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교육학도들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대학에 입학하여 2년이나 3년 이상 교육학을 공부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교육학과 학생들의 머릿속에 교육에 대한 희미한 생각일망정 나름대로 정립되어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의 강좌에 참석한 교육학과 학생들을 발견하면, 철학 교수나 심리학 교수가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이 교육학에 응용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를 말해 보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 자신도 궁금하다는 것이다. 교육학과 학생들에게 이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요구이지만, 나름대로 책임감도 있고 해서, 교육학의 이러저러한 논의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생각한 점도 곁들여 발표를 한다. 물론 그 내용은 대부분 구체적인 교실 수업에서 사용되는 교수방법에 대한 것이거나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방식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를 듣고 ‘잘 알았다, 수고했다’라고 말하는 교수들은 별반 없다. 철학과나 심리학과의 교수들은 추가적으로 ‘나는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너만큼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지금 네가 말하는 교육적인 시사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그러니 교육적인 시사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이 유익한 시사를 준다고 하는 그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달라’고 요구를 한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교육학도들이 이러한 요구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학도들은 솔직히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없다. 교육학을 공부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리저리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교육에 대해서 문외한(門外漢)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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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내용일 뿐이다. 교육학도의 발표를 듣는 철학이나 심리학 교수만이 아니라 교육학은 공부해 본 적도 없는 철학과 학생들과 심리학과 학생들도 할 법한 이야기 이외에 교육에 대한 매력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교육학도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모학문들을 직접 배우기 위하여 철학이나 심리학 등의 강좌를 수강하다가 이러한 봉변을 몇 번 당하고 나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다음 학기에도 철학과나 심리학과에 가서 강좌를 계속 들으려는 교육학도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는 교육학도들도 있을 수 있다. ‘나는 교육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에 교육학과에 들어왔다. 그런데 교육을 알려면, 철학이나 심리학 등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 그런 지식들을 통하여 교육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이나 심리학을 배우러 간 나에게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지를 말해 보라고 하는 것은 선후(先後)가 뒤바뀐 요구가 아닌가?’ 모르긴 해도 이러한 질문은 모학문을 수강하다가 이러저러한 봉변을 당한 교육학도들의 머릿속에 어떤 형태로든 생겨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나 심리학과의 교수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먼저 네가 생각하는 교육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보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다가 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또는 그것을 개선하기 위하여 다른 학문들로부터 지식을 응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해하거나 개선하려는 현상이 어떠한 종류의 현상이며, 어떠한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다소나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응용이라는 말은 무엇(甲)에다가 다른 무엇(a)을 도입하여 본다는 뜻이다. 이러한 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적어도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진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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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한다. 즉 ‘갑은 어떠어떠한 사태 또는 현상이며, a는 이러이러한 원리 또는 법칙이다. 따라서 갑은 a를 요구한다.’ 우리의 이러한 추론이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a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갑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그 갑에 a를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원리들 a, b, c, d, … z 가운데 어떠한 원리를 도입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또한 a를 모르면 그것이 갑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사태 갑(甲), 을(乙), 병(丙), 정(丁), … 가운데 어떠한 사태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특정한 법칙이나 원리를 응용한다는 것은 그 법칙이나 원리의 도입을 요청하는 사태나 현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필요한 만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태나 현상에 도입하려는 원리나 법칙이 어떠한 것인지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성공적인 응용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나 현상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과 ‘우리가 도입하고자 하는 원리나 법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교육학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의 지식을 교육에 응용하는 경우를 들어보자. 만약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직면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상에 해당하는 ‘교육’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그러한 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 또는 법칙에 해당하는 ‘철학적 지식의 종류와 그 내용’에 대한 이해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할 때, 우리가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그러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거나 교육의 실제를 개선하는 데에 필요한 철학의 지식을 찾아 이를 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모든 지식들이 교육에 응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철학의 지식을 응용하는 경우만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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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인류학 등의 지식을 교육에 응용하는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이 바로 철학과나 심리학과의 교수가 철학이나 심리학의 지식을 응용하겠다고 나서는 교육학과 학생들에게,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부터 말해 보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다. 교육학이 응용학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응용이 건실하게 이루어지려면, 먼저 우리는 교육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모학문의 지식들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교육학이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는 응용학문일 수 없다는 자각이 숨어 있다. 모학문의 지식들을 응용하려면, 응용 이전에 교육학은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선이해(先理解)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며, 이것을 체(screen)로 삼아 모학문의 지식을 수용하는 가운데 그 선이해 자체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이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과 같은 모학문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교육학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궁리하고 이를 개념화하여 체계화하는 가운데 교육에 대한 선이해가 하나의 교육이론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 교육학은 응용학문일 수 없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순수학문이며 자율적인 학문이어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점들에 생각이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일종의 화두(話頭)처럼 교육학도들에게 다가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학 공부는 바로 이 질문을 붙잡고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마땅하다. 그러나 교육학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현재의 교육학과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교육의 정체를 해명하려면, 교육학은 상당히는 이론 지향적인 학문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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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이론이라는 것은 다른 학문들의 단순한 응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교육학 고유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학이 그러한 고유한 지식이나 이론을 확보하고 있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그러한 노력을 권장하고 보호하는 풍토도 확립하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는 모학문의 지식들로 교육학을 채우는 것 이외에 교육학의 자생적인 이론을 구성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오래된 타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학의 고유한 이론을 모색하는 데에 더 큰 장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교육학을 실천 지향적 학문으로 보는 풍토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는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가 아니라, 흔히 교육 현장으로 거론되는 학교와 관련된 온갖 문제들을 다루는 연구들이 득세한다. 그 문제들도 교육학자들이 학교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발굴한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교사, 학부모, 기업인, 정치인 등등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들로 채워진다. 교육학자들은 이들이 요청하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종의 기능인들인 셈이다. 이른바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현안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연구들이 여기저기서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많은 경우에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한다. 사회가 교육문제라고 지적한 것들을 교육학자들이 나서서 만족스럽게 해결해 준 전례는 거의 없다. 사실은 교육학자들로부터 학교를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는 일반인들도 별로 없다. 교육학자들끼리도 자신들의 프로젝트 보고서가 가시적인 실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 보고서들은 교육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다른 문제로 향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채 소리 없이 폐기될 뿐이다. 이러한 형편에서는 학교와 관련된 실제적인 지식이라 할 만한 것도 축적될 여지가 없다.
젊은 교육학도들 가운데 상당수는 교육의 정체를 밝히는 교육학 고유의 이론이 필요하며, 바로 이를 연구해야 된다는 문제의식을 어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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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도 모학문들을 응용하여 그때그때 현안이 되는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힘을 쏟는 교육학자들로 변모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가슴 한쪽에는 자신들이 교육학에 입문하면서 소망하던 것, 즉 교육의 아름다운 면모를 바라보고 싶다는 애초의 기대가 자리 잡고 있다. 무엇인가를 보려면,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개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지동설이 드러낸 것과 같은 천체 현상은 태고적부터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대면하게 된 것은 지동설이라는 개념체계가 구성된 후의 일이다. 교육을 교육답게 보려면,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철학이나 심리학, 또는 사회학 등과 같은 다른 학문들의 개념체계가 대행해 주지는 못한다. 이들 학문들은 교육학이 교육의 개념을 먼저 정립하였을 때, 그 개념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교육의 개념 자체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 다른 학문들을 동원하여 학교와 관련된 온갖 문제들을 다루는 이상, 교육을 교육답게 인식한다는 교육학도들의 소망은 더 큰 좌절에 빠지게 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교육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를 교육으로 보게 되면, 그 순간 교육의 정체성은 극도의 혼미 상태에 빠지게 된다. 교육을 사랑하고,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싶어서 교육학을 공부하기로 선택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하여 교육을 놓치게 된다는 이 현실은 젊은 교육학도들에게는 커다란 상심(傷心)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2. 개념적 혼미 속의 초등교육
교육학도의 상심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꾸며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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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그러한 상심을 목격하는 경우는 결코 드물지가 않다. 그리고 적어도 그것은 나에게 아주 리얼한 현실이었다. 사범대학의 교육학과에 입학한 때부터 치면 나는 거의 20여 년 동안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 학문적인 연륜으로만 보면 그다지 길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세월이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교육학도의 상심은 이 기간 동안 나에게서 한순간도 떠나지를 않고 있다. 이러저러한 노력을 통하여 교육이론이라 할 만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전개하고는 있지만, 조만간 이러한 상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교육의 개념이 부재하다는 자각에서 온 상심은 내가 교육대학의 선생이 된 이래로 더욱더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상심 정도가 아니라, 아주 크나 큰 통증으로 와 닿고 있다. 그것은 교육의 개념 부재로 인하여 비롯되는 교육의 정체 혼미와 왜곡 현상이 초등교육의 경우에 더 심각하다는 데서 기인하고 있다. 교육의 개념 부재로 인한 초등교육의 정체 혼미와 왜곡에 대해서는 앞의 글들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가 있지만, 그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초등교육: 잘못된 작명
초등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제도교육의 시작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제도교육의 한 시기를 가리키는 단순한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이 명칭은 교육에 대한 온갖 그릇된 발상의 원천이 되고 있다. ‘초등교육’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다가 보면, 그것이 제도교육의 첫 단계를 지칭하는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라, 교육의 질과 수준을 평정(評定)하는 가치부여적인 용어임을 직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교육의 등급을 매기는 용어인 것이다.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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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중등, 고등이라는 용어는 무엇인가에 대한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떠한 척도에 비추어 평정하고 등급을 부여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하여 그것은 공연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초등교육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연상하게 되는 것은 ‘손쉬운 교육’, ‘기초적인 교육’,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교육’, ‘다음 단계의 본격적인 교육을 준비하는 교육’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초등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에 우리의 머릿속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로 인하여 초등교육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오도(誤導)된다. 초등교육을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과 비교하여 그 가치와 의의를 높게 평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이러한 인식은 초등교육을 담당한다는 현직 교사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들 자신마저도 스스로 중등교사에 비하여 격(格)이 떨어지는 교육을 담당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교육은 어차피 중등교육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초등교사는 아동들을 물리적으로 잘 보살피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심리적인 문제들이나 해결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초등학교는 일정한 시간 동안 부모들 대신에 아동들을 맡아서 안전사고 등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면 되는 것이고, 초등교사는 생활지도나 잘 하면 된다는 식의 인식이 교단에 팽배해 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초등학교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명분마저 상실하고, 탁아소나 놀이방 정도로 전락하고 있다. ‘유치원에서는 종일반이라는 것을 운영하여 아이들을 하루 동안 맡아주고 있는데 왜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일찍 귀가시키는가’라고 따지는 맞벌이 학부모들의 항의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교육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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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할 경우 상대적으로 교직에 진출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초등교육이 여러모로 중등교육의 그것에 비하여 위상이 낮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학창시절 내내 방황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상은 초등교육이라는 말이 곧 초급교육을 연상시키는 데에서 빚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초등교육이라는 말이 초급교육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실제 초등교육으로 지칭되는 교육이 당연히 초급교육인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초급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교육 활동의 질과 수준이 높지 않은 교육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교육 활동의 질과 수준이 낮다는 것은 특정한 교과의 내용을 가르치고 배움에 있어서 그 가르치는 활동과 배우는 활동의 질과 수준이 낮은 경우를 뜻한다. 이는 다시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하기는 하지만, 그 활동이 따라야 하는 교육적인 원리에 충실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초급교육, 그리고 그것과 함께 성립하는 것으로서 중급교육이나 고급교육이라는 것은 제도교육의 단계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수준의 제도교육기관 내에서도 병존(竝存)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초등학교 내에서도 초급교육, 중급교육, 고급교육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으며,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도 초급교육, 중급교육, 고급교육이 동시에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단계의 제도교육을 한정하여 지칭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은 각기 특정한 단계의 제도교육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적 관행에는 교육 활동의 질과 수준을 교육 활동이 아니라 다른 것을 척도로 삼아 판정하는 오류가 숨어 있다. 각급 제도교육에서 다루는 교과의 지식을 초급, 중급, 고급으로 구분한 후에,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든지 간에, 초급지식을 다루면 초등교육, 중급지식을 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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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중등교육, 고급지식을 다루면 고등교육으로 판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지식의 수준이나 가치가 곧바로 교육의 수준이나 가치는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른바 초급지식을 갖고 충실히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고급교육을 수행하는 교사와 학생도 있을 수 있고, 고급지식을 갖고 부실하게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초급교육에 머무르고 마는 교사와 학생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교육 활동의 충실성은 따지지 않은 채, 교과지식의 수준을 갖고 교육을 초등, 중등, 고등으로 구분하는 발상은 그릇된 것이다. 이러한 발상에는 교육의 가치와 교과의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혼동이 자리 잡고 있다.
2) 교육의 가치와 교과의 가치 혼동
교육의 가치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물론 교육은 여러 가지 점에서 가치있는 활동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이 사용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교육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가치를 떠올리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현재 교육학에서 거론되는 교육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째는 교육의 결과로 생겨나는 사회·경제적인 가치들을 교육이 추구해야 되는 가치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소망하는 직업이나 지위, 사회적인 영예 등을 얻기 위하여 교육을 받는다. 만약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직업이나 지위, 사회적인 영예 등을 얻지 못한다면, 이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상황으로 인식된다. 이른바 과잉교육(over-education)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사회가 교육에 투자하는 경우에도 교육의 결과로 그 사회가 얻게 될 경제적인 발전 등이 교육의 가치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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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자신들의 교육이 다른 사회의 교육과 비교하여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온갖 형태의 교육 개혁안이 마련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교육의 국제 경쟁력이라는 구호도 실상은 교육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가치의 크기를 따지는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으로 교육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교육이 가져올 수 있는 특정한 종류의 결과나 기능을 교육의 가치 또는 교육이 추구해야 되는 목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사회·경제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 교육이 가장 좋은 통로라는 증거는 없으며, 또 사회·경제적인 가치를 실현시킨다고 해서 그 교육이 교육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러한 입장은 흔히 교육의 외재적 가치(extrinsic value)에 주목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이 경우 교육은 교육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동원되는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된다(엄태동, 2000a; 장상호, 1997a, 2000a). 그리고 교육이 도구인 이상, 그것은 원래 의도했던 목적, 즉 사회·경제적인 가치가 어느 정도 실현되면, 관심 밖으로 밀려나거나 버림받는 역설적인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둘째는 교육의 가치를 교육의 바깥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안쪽에서 구해야 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는 첫 번째 입장과는 달리 교육의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에 주목하는 것으로 자처하고 있고, 또 외관상으로만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입장을 견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의 가치로 제시하는 것은 이른바 교과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들이다(이홍우, 1987, 1991; Peters, 1966). 그들이 보기에 교과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교과의 가치란 학문과 예술과 도덕이 추구하는 진, 선, 미라는 가치로 상정된다. 이들은 학문이나 예술이나 도덕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가 사회·경제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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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에 붙박혀 있는 고유한 가치에 있다고 보는 점에서 진보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에도 난점이 있다. 만약 진, 선, 미 등이 교육이 추구해야 되는 내재적 가치에 해당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그러한 가치의 실현에 좀 더 다가서 있는 교육이라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이란 가장 수준이 높은 최고 최신의 학문이나 예술이나 도덕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의미한다. 그러한 교육이라야 교육의 가치에 충실한 것으로서 고급의 교육이나 고등의 교육이라는 찬사를 받을 수가 있다. 반면에 고급교육의 그것보다 낮은 수준의 교과들을 다루는 교육들은 중급의 교육이나 초급의 교육으로 판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식으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교과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충실히 가르치고 배울 수 있으며, 이 경우 그 교육은 고급의 교육일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엄태동, 2000a, 2000b, 2001a, 2003a). 초급 수준의 교과들을 갖고도 고급의 교육을 수행할 수 있으며, 고급 수준의 교과들을 갖고도 초급의 교육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다양한 교과들에 내재해 있는 가치들은 그것을 다루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체험될 수 있는 가치들이기는 해도, 그것이 곧바로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교과의 가치를 그다지 높은 수준에서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내용들을 갖고도 충실히 가르치고 배워서 그 자체로 자족적인 성장의 기쁨과 조력의 보람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교육의 내재적 가치는 교과의 수준이 아니라 그 교육 활동에 수반되는 자족적인 체험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할 것이다.
초등교육은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종류의 가치들 모두에 있어서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에 비하여 말 그대로 초급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초등교육이 사회·경제적인 가치나 실용적인 가치를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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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데에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교과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에 비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 가치가 교육과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또 추구해야 되는 가치들의 전부는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가치와 구분될 뿐만 아니라, 교과의 가치와도 같지가 않은 교육의 가치, 즉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 자체에서 비롯하는 가치들이 있다(장상호, 1997a, 2000a). 이러한 교육의 내재적 가치는 우리의 체험을 반성해 보면, 그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해당 교과의 수준으로 보더라도 그다지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교과의 내용이지만, 이것을 갖고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값진 체험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때 우리가 체험한 것이 바로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학은 이러한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제대로 주목해 오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교과의 수준, 그리고 그 수준에 상응하는 교과의 가치를 척도로 하여 교육의 질과 수준을 판정하는 관행이 득세해 왔다. 그러나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주목하면, 우리는 다른 식으로 제도교육의 각 단계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모르긴 해도 그것은 초등학교에서는 초급교육, 중·고등학교에서는 중급교육, 대학교에서는 고급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발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3) 외래적인 개념들의 만연: 교육의 잠식
개념은 우리가 세상을 어떠한 것으로 바라보기 위하여 의존하는 일종의 안경과도 같다. 붉은 색 렌즈로 된 안경을 통해 보면, 세상은 온통 붉게 보인다. 파란 색 렌즈의 안경을 통해서는 파란 세상만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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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렌즈의 색과는 다른 색채를 지닌 세상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떠한 개념들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그 때 보이는 세상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일 수밖에 없다.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동일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동설의 개념체계를 지닌 자는 그것이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으로 지각한다. 반면 지동설의 개념체계를 가진 자는 이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 운동을 하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상이한 개념을 지니고 있으면, 설사 동일한 현상을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교육은 분명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출현한 이래로 인간의 곁에서 함께 생성·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의 눈에 동일한 것으로 지각되는 자명하고도 단일한 현상은 아니다. 다른 모든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그것을 조망할 수 있는 개념의 체계를 요청하며, 이를 통해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물론 그것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상식을 통해서도 파악될 수 있는 다면적인 실체이다. 이 점에서 일반인들이 그들의 상식적인 개념을 통해서 교육을 보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교육의 좀 더 여실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우리는 학문적인 개념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학문은 상식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의 진실을 보여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교육학은 바로 상식 차원의 이해를 넘어서 교육에 대한 학적인 인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교육학이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교육을 교육답게 드러낼 수 있는 수준 높은 고유의 개념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교육학은 전형적인 응용학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응용이라는 것이 자신의 관심사를 조망하는 관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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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론적인 안목은 정립하지 못한 채, 다른 학문의 인식적 관심이나 개념체계를 그대로 차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비록 응용학문이라는 명칭으로라도 그것을 ‘학문’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교육학을 응용학문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학은 다른 학문들로부터 개념들과 이론들을 수용할 경우에 그것을 걸러낼 수 있는 체로 사용하는 데에 충분할 만큼 교육의 개념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이로 인하여 빚어지는 현상은 모학문들에서 최신의 이론으로 대두되고 있는 것들을 거의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교육학의 발전은 관련 모학문들의 지식을 얼마나 빨리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모학문의 최신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을수록 일류 교육학자로 대접을 받는 풍토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학의 관행인지조차 검증되지 않은 외래 개념들의 만연을 불러왔다. 교육학자들은 모학문들의 관점을 통하여 다양한 학문적 개념들을 구사해 가며, 교육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외양적으로 보면, 분명 교육에 대한 연구와 논의에 헌신하고 있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헌신이 교육에 대한 제대로 된 학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떠한 모학문의 관점을 택하고 있느냐에 따라 교육학자들 사이에도 곧잘 논쟁이 벌어진다(이규호, 1974; 이돈희, 1974; 이홍우, 1983; 정범모, 1974). 교육철학자들이 보기에 교육심리학자들이나 교육공학자들의 논의는 교육의 성격을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그릇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교육공학자들이나 교육행정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교육철학자들이나 교육사회학자들의 이야기는 교육의 효율성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변적이고 공허한 담론일 뿐이다.
학문 내에서 논쟁이 전개된다는 것은 해당 학문의 발전에 필수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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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고,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교육학의 속사정은 이러한 기대와는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 사이의 논쟁이 교육의 정체를 해명하는 데에 생산적으로 기여한 적은 별로 없다. 서로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다가 외면해 버릴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택하고 있는 모학문의 학자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보는 일종의 강화(reinforcement)를 받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교육철학자들이 교육을 보는 관점과 교육을 설명하는 개념 등은 철학자들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며, 교육심리학자들의 그것은 다시 심리학자들의 그것과 너무도 동일하고, 교육행정학자들의 생각은 행정학자들의 그것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교육학자들은 자신들이 택하고 있는 모학문의 학자들과 동일한 관점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탐구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안도한다. 교육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견해의 차이는 그들과 모학문의 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비하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러한 형편에서는 교육학 내에서의 논쟁이 교육학 자체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사실 교육에 대한 교육학자들의 관점과 개념은 철학자나 심리학자, 행정학자들의 그것을 그대로 교육에 대한 것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교육에 대한 교육학자들의 논의라는 것도 해당 모학문의 학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애를 쓰면, 그들의 지식으로부터 곧장 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점은 교육학자들이 보는 교육이라는 것이 실상은 철학이나 심리학 또는 행정학이나 사회학 등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교육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철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나 행정학자들은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현상이거나 심리적 현상, 사회현상이나 행정현상으로 본다. 교육학이 아닌 자신들 학문의 관점과 개념으로 포착된 것을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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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현상이 아닌 교육현상으로 간주할 모학문의 학자들은 없다. 이러한 사실은, 다시 말하면, 교육학자들이 보여주는 것은 교육학의 관점에서 드러날 수 있는 교육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학자들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교육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교육현상이 아니라 사회현상, 심리현상, 행정현상, 경제현상, 문화현상 등인 것이다. 교육학은 교육 아닌 다른 현상들을 모두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들이 보여주어야 할 교육현상은 충분히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장상호, 1986, 1990). 그러면서도 이들 현상들을 한꺼번에 교육현상으로 총칭(總稱)함으로써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보도록 만드는 체계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육이 교육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는 문제도 심각한 것이지만, 이것 못지않게 크나 큰 문제도 초래된다. 외래 학문들의 개념을 통하여 교육을 바라봄으로써 ‘교육은 가치있는 어떤 것’이라는 교육학도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마저도 무너져 버리는 불상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교육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제라든지, 종사하는 직업 수준 이상으로 교육받는 것은 과잉교육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주장들 속에서 교육은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인간적인 삶의 형식이기는커녕 부조리하고 병리적인 사회현상으로 매도되고 만다. 더 나아가 이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공격적인 행동이든, 침을 흘리는 행동이든, 소매치기 기술이든 간에 모두 학습의 결과라는 주장들 속에서 교육은 무엇인지도 모를 추하고 악한 활동으로 전락되어 버린다(엄태동, 2000a). 교육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교육의 소망스럽고 가치로운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기는커녕 혐오스럽고 필요악과도 같은 어떤 것이라는 인상이 교육학도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마땅히 시간을 내어 자신의 것으로 익혀야 하며, 이는 세상 무엇보다도 가치있는 일이다. 또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제자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그에게 자신이 익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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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르칠 수 있으며, 이 또한 배우는 일 못지않게 가치있는 일이다’. (각주 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論語」, 學而). 이 구절에서 붕(朋)은 사회적 교제의 대상인 친구가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적 교제의 대상인 제자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뒤의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는 바로 앞의 ‘學而時習之不亦說乎’가 그리고 있는 배움의 가치와 대구(對句)를 형성하는 구절, 즉 가르침의 가치를 노래하는 구절로 정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식의 통상적인 해석은 이 구절을 ‘배우고 마땅히 익히면 이것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앞의 구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게 만드는 난센스를 초래한다.) 선인들이 자신들의 교육적 체험을 담아 후대에 전해준 이러한 소중한 교육학적 통찰은 이제 교육학도들에게 별다른 의미와 감흥을 주지 못한다.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문제, 즉 교육이 교육 아닌 것으로 뒤바뀌고, 교육이 가치 지향적인 세계라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마저도 흔들리는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로 인하여 교육이 교육 아닌 것에 의하여 잠식되는 현상이 초래될 우려가 상당히 큰 것이다(Egan, 1983; Nyberg & Egan, 1981). 다른 학문들로부터 개념들과 이론들을 들여오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종합대학 내의 사범대학에서도 심각한 것이지만, 특히 교육대학의 경우에는 상당히 우려할 만한 것이 된다. 종합대학 내의 사범대학은 모학문의 개념들을 사용하는 데에 교육대학보다는 상대적으로 신중하다. 그것은 모학문의 학자들이 바로 옆에 있어서 그들의 개념들이나 이론들을 차용하는 경우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담보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학문의 논의 수준 정도는 따라가야만 모학문으로부터 지적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사범대학의 교육학 강좌에는, 드물긴 하지만, 철학과나 심리학과, 행정학과의 학생들도 수강생 자격으로 출석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대학에는 모학문으로부터 개념들과 이론들을 도입하여 교육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 제동을 걸 만한 다른 단과대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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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학문들이 없다. 그렇다보니까 모학문의 개념들을 차용하는 과정이나 이를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신중함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 더욱이 단과대학 규모인 교육대학의 위상은 종합대학 내에 위치하고 있는 사범대학의 그것보다 높지가 않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모학문들로부터 최신의 개념이나 이론을 들여오는 데에는 교육대학이 사범대학보다 결코 느리다고 보기 어렵다. 사범대학보다 발 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교육대학의 위상을 사범대학의 그것 이상으로 높일 수 없다는 생각도 작용할 것이다. 철학, 사회학, 심리학, 행정학 등을 담당하는 교수가 없기 때문에 교육학과의 교수들이 이들 과목들을 교양과정에서 가르치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초래되는 외래 개념들의 득세와 교육의 잠식은 더 이상 그리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교육대학에서는 외래학문의 개념과 이론을 들여오는 일에 교육학과 교수들보다 오히려 교과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앞장을 서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사범대학도 마찬가지 형편이지만, 교육대학의 경우에도 교사교육의 주도권을 놓고 교육학과와 교과교육과들 사이에 해묵은 알력과 갈등이 존재한다. ‘교육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와 운영의 원리 등을 모르고 어떻게 교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주장과 ‘교과를 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 교육 현장에 대한 이론적이거나 방법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맞서고 있는 것이다. 교과교육과들이 담당하는 해당 학문들, 즉 국문학, 영문학, 수학, 물리학 등으로부터 오는 압력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교육대학의 교과교육과 교수들은 대신 시선을 교육학이나 교육학의 모학문들에 돌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학이나 교육학의 모학문들에서 유행하거나 통용되는 개념들 및 이론들을 교육학 교수들보다 먼저 도입하기도 한다. 교과를 모르는 상태에서 전개되는 교육에 대한 논의는 추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교육학의 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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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은 자신들이 담당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국어교육사회학, 과학교육철학, 수학교육평가, 교과교사교육, 교과교육과정, 교과교육사 등을 자신들이 개척하여 담당할 수 있으니 이와 관련된 교육학 강좌를 양도하라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논쟁을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며, 이들 주장들 가운데 어느 편을 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 교육을 드러내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개념들이 교육대학에 만연하게 되며, 이는 교육의 잠식이라는 면에서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4) 교사양성기관: 교육과 학교태(學敎態)의 혼동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은 모두 교사 양성을 표방하고 있다. 특히 특정한 과목을 전공으로 하는 사범대학과는 달리 10여 개의 교과를 모두 다루어야 하는 교육대학의 경우에는 졸업생들이 교직이 아니면, 다른 직종으로 취업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처럼 졸업생들이 거의 100% 교직으로 진출하다 보니 교육대학 교수들의 학문적인 관심사나 강좌에서 다루는 내용 등은 모두 학교 현장과 관련된 것 일색으로 채워지게 된다. 교육대학 학생들도 학교 현장에 즉각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해 달라고 요구한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다루는 강좌에는 수강생들이 몰려들지만, 교육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강좌에는 소수의 학생들만이 출석할 뿐이다. 그러나 장차 교직에 종사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직업교육을 위한 것으로 교육대학의 각종 연구나 교육과정이 흐르면 흐를수록 교육의 본질은 나날이 흐려지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진다.
학교는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물론 학교가 교육을 전담하는 것은 아니며, 학교 밖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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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는 학교에서보다도 더 양질의 교육이 전개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학교가 마치 교육의 전당(殿堂)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학교와 교육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반드시 유념해야 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 교육이거나 교육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교육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의 세계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과의 관련을 떠나서 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그러한 것은 교육일 수가 없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교육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학교는 수많은 교사들과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하다 보니 그곳에서는 구성원간의 심리적인 갈등도 생겨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충돌도 발생한다. 체벌이나 왕따, 절도, 혹은 학교폭력처럼 사람들이 우려하는 일들도 부지기수로 생겨난다. 학교는 이러한 일들도 통제해야 된다. 가정적인 문제로 학교에 출석하지 않거나 가출하는 학생들도 많다. 이러한 가정들을 관리하고 해당 학생들을 학교에 출석하도록 하는 것도 학교가 수행하는 일이다. 학생들의 안전을 강구하고 급식을 챙겨주는 것도 학교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깨끗한 환경을 꾸미기 위하여 학교의 시설이나 교실을 가꾸고 청소하는 일들도 학교의 소임이다. 학생들의 소풍이나 수학여행 등과 관련하여 일정을 계획하며, 여행사와 계약하고 여행지의 숙소를 물색하는 것 등도 학교가 하는 일이다. 학교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에는 많은 인력과 재정이 소요된다.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여 배치하고, 학교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을 책정하여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며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징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나의 공공기관으로서 학교는 상급기관에서 내려오거나 외부에서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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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다양한 행정사무들도 처리해야 된다.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하지만, 여기서 잠깐 살펴본 것처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아닌 다른 많은 일들도 수행하고 있다. 학교가 수행하거나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활동 및 일들을 총칭하여 ‘학교태’(schooling)라 부를 수 있다(장상호, 1986, 1990). 그 속에는 교육도 포함되지만, 분명 교육 아닌 것들도 들어 있다. 이 점에서 교육과 학교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을 제외하면, 학교에서 벌어지거나 학교가 수행하는 일들은 가정, 직장, 군대, 사회 등에서도 벌어지는 것들이다. 그것은 성격상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일들인 것이다.
교사는 무슨 일을 하는 존재인가? 이 질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 말 그대로 교육자라고 답을 할 것이다. 교사는 가르치는 일(teaching)을 하는 ‘teacher’가 아닌가? 이 점에서 이 질문은 우문(愚問)처럼 들린다. 그러나 교육대학에서 교사를 양성한다는 명분하에 그들에게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은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는 능력만은 아니다. 유능한 교사란 학교태도 부를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모두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대학에서는 학교태에 대처하거나 이를 관리하는 것과 관련된 각종의 기법과 기능 등을 예비교사들에게 가르친다. 예비교사들도 이를 당연시한다. 교육대학 구성원들인 교수들이나 교육대학 학생들에게는 학교태가 곧바로 교육인 것이다. 물론 이는 사범대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육=학교태’라는 등식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교사교육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교육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학교태를 논의하고 있지만, 이는 틀린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체벌이니 왕따니 학교폭력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교육의 문제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심지어는 가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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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인터넷 중독, 노후화된 학교시설, 불결한 학교급식과 이로 인한 식중독 등도 교육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교사의 잡무 부담, 경제적인 처우, 재정의 악화로 인한 학교의 파산 등도 모두 교육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교육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것들은, 정확히 말하면,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사회현상, 경제현상, 행정현상, 위생문제, 환경문제, 정신건강 등에 해당한다.
가정 폭력이 심각해지면서 부부간의 폭력을 더 이상 가정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는 법적인 제재가 요구되는 병리적인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가정의 실직이나 가족 간 종교갈등 등으로 인하여 가정이 붕괴되는 현상도 더 이상 가정의 문제로만 치부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인 지원과 해결책을 요청하는 경제문제로 간주된다. 또는 종교에 대한 잘못된 자세와 맹목적인 수용으로 인한 종교문제로 해석된다. 이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회현상이나 경제현상 또는 종교현상 등으로 분별하여 볼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성숙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분별있는 인식이 ‘교육=학교태’를 전제하는 교사양성기관에서는 좀처럼 생겨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을 차별화하여 교육에 대한 좀 더 고급스러운 인식을 제공해야 할 교육학자들부터가 그러한 분별있는 인식을 추구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교육학자들은 그들이 택하고 있는 모학문의 관점과 개념들로 무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학교를 들여다 볼 경우에 드러나는 것은 학교 내의 교육현상이 아니라 심리현상이나 사회현상, 행정현상 또는 경제현상 등일 뿐이다. 심리학이나 사회학, 행정학이나 경제학 등과 같은 다른 학문들을 통하여 교육현상을 볼 도리는 없는 것이다. 교육학적인 관점과 개념의 부재라는 문제는 학교태를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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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으로 보는 관행과 맞물려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는 가운데 종국에는 교육 아닌 것을 교육으로 보고, 정작 교육에 해당하는 것은 놓쳐 버리는 불상사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정체는 혼미 상태에 있지만, 이는 초등교육의 경우에 더욱 심각한 듯하다. 교육의 질과 수준을 평정하는 교육적 가치 기준의 부재, 교육학의 응용학문적 성격에서 비롯되는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의 혼동, 이를 부채질하는 ‘교육=학교태’라는 전제 등에서 초래되는 문제들이 초등교육의 경우에는 더욱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미의 정도가 심각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초등교육의 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초등교육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일반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문제가 심각한 것만큼 이는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의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것이 교육학의 고유한 관점과 개념체계의 구성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지적한 문제는 교육을 교육 아닌 다른 것들과 차별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개념적인 틀이나 안목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적인 안목과 개념의 부재는 교육의 가치를 제대로 포착하는 데에 있어 문제를 불러왔으며, 여기서 초등교육이니 중등교육이니 하는 그릇된 작명이 초래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학교태를 곧 교육이라 보는 관점을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정착시켰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교육학의 고유한 관점과 개념체계를 찾거나, 찾을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서라도 이를 통해 교육을 새롭게 조망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외형적으로는 그러한 교육학의 관점과 개념을 동원하여 초등교육을 재개념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는 초등교육이니 중등교육이니 하는 구분을 떠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는 교육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도록 교육학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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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육본위론의 선택
교육학의 관점에서 교육학의 개념으로 초등교육을 새롭게 서술하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것이 ‘교육본위론’(敎育本位論)이다. 이는 나름대로의 교육이론을 만들기에는 학문적인 능력과 연륜이 모자라는 나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는 몇 마디의 보충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교육본위론은 내 스승이신 장상호 선생님이 거의 20여 년에 걸쳐 구성한 새로운 교육학이다. 나는 교육본위론을 선택하면서 한참을 망설여야만 했다. 이는 나와 선생님의 개인적인 인연이나 학문적인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아마도 듀이의 경우를 제외하면, 교육학의 관점을 모색하여 교육을 새롭게 조망하려는 시도를 한 교육학자는 장상호 교수가 거의 유일한 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왜 듀이의 교육이론을 택하지 않고, 교육본위론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듀이가 교육학적인 관점을 정립하여 교육을 바라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을 구안하기보다는 교육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들을 재정의하여 교육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그의 교육이론은 개념의 불명료함이라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는 현재의 형편도 여기서 기인하는 듯하다(엄태동, 2001b, 2003b). 따라서 듀이의 교육이론을 통하여 교육을 새롭게 조망하는 일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자칫하면 그의 개념을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늘 생각하는 교육만을 보게 될 우려도 있다. (각주 3: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듀이의 교육이론을 실용적인 발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를 지지하고 학교에 적용함으로써 듀이가 생각하는 교육을 일종의 ‘생활적응교육’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교육은 먹고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는 통상적인 생각에 맞도록 듀이의 교육이론이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교육학사(敎育學史)에서 대단히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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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하여 장상호 교수의 교육본위론은 교육학의 관점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어서나 이를 통해 드러나는 교육을 교육학의 용어로 개념화하는 데에 있어서 강점이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교육본위론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나의 형편으로는 장상호 교수의 교육본위론을 제대로 이해하여 소개하거나, 이를 통하여 교육을 새롭게 조망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자칫하면, 이는 애써 출범한 교육본위론의 진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내 스승의 영예(榮譽)를 해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한동안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등교육,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이 어쩌면 나의 망설임으로 인하여 영원히 미궁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힘입어 이 일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라도 나서지 않으면 이 일은 시작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비록 능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여기 3절에서 제시되는 교육본위론은, 일일이 출전을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장상호 교수의 교육학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요약하면서 설명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차피 나에게 방대한 분량의 교육본위론을 짧은 요약으로 압축할 능력이 없는 바에야 오해를 막기 위하여 어렵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조금 자세하게 풀어쓰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교육본위론에 대한 소개는 원전에서 볼 수 있는 교육본위론의 참모습으로부터 크게 이탈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각주 4: 교육본위론을 직접 접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 책의 말미에 있는 참고문헌으로 제시되어 있는 장상호 교수의 논문들과 저서들을 구하여 읽어볼 것을 권한다. 특히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와 『학문과 교육(하):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는 교육본위론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하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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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속계와 수도계 그리고 교육계
우리를 둘러싸고 있거나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는 단일한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서로 구분되어야 할 이질적인 세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세계들은 그것이 추구하는 고유한 목적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는 독특한 방식과 활동을 갖고 있다. 이 세계들은 서로 관련을 맺는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보강하거나 지원함으로써 공존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의 목적 실현을 놓고 다른 것들과 갈등하거나 충돌을 빚을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세계들을 구분하는 고정된 방식은 없으며, 이들 세계들 자체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세계들 모두를 대상으로 동시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으며, 우리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여 그 세계의 양상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우리가 선택한 세계가 전경(前景)으로 등장하고 다른 세계들은 배경(背景)으로 물러서게 된다. 우리는 전경으로 다가선 세계에 참여하는 가운데 그 세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어느 특정한 세계를 선택하여 그 세계를 중심에 놓고, 이에 근거하여 다른 모든 것을 지각하고 인식하며 체험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가리켜 ‘본위화’(本位化)라 한다.
세계의 구분은 그 구분을 시도하는 사람의 관심과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많은 경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과 같은 범주들을 사용하여 세계를 나누고 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정치를 본위로 하여 그것에 참여하는 가운데 정치를 중심으로 다른 세계들을 바라볼 것이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경제 본위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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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고,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종교 본위로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다른 세계들이 종교를 지원하고 보강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우리가 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다양한 세계들 가운데 당연히 교육을 선택하여 교육적인 삶을 영위하려 들 것이며, 그럼으로써 교육의 실체를 체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들이 그러한 교육적인 삶을 보장하고 후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들 것이다. 이것이 교육본위적인 삶이다. 그러나 교육본위적인 삶이 곧 교육본위론은 아니다. 교육본위적인 삶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교육의 실체를 인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교육적인 삶 속에 흐르고 있을 교육의 가치와 활동의 양상과 원리 등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려는 인식적인 활동의 산물이 교육본위론이다. 교육본위적인 삶과 교육본위론은 각각 교육과 교육학의 구분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교육본위론은 교육을 중심에 놓고 교육과 관계 맺는 다양한 세계들을 세속계(世俗界)와 수도계(修道界)라는 두 개의 범주로 정리하여 구분한다. 물론 이는 교육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임의적인 세계 구분 방식이다. 세속계와 수도계는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거나 아니면 교육을 통하여 생겨나는 결과라는 식으로 교육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세속계와 수도계는 교육의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로서 그것이 교육의 내용이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일 수는 없다. 세속계와 수도계는 나름대로의 본질과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양자의 그것은 서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교육도 세속계나 수도계의 본질이나 내용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을 지니고 있다. 물론 교육의 그러한 본질이나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 교육학의 진정한 소임이다.
세속계는 하나의 생물적 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들의 평온한 일상과 생존을 위하여 형성한 다양한 종류의 생활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사회에서 생성되는 권력을 획득하고 배분하며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정치적 세계가 이 속에 들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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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인간의 삶과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물질과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교환하며 소비하는 것과 관련된 경제적 세계도 포함된다. 또한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도록 제도화된 역할의 유형과 역할의 수행 및 교섭의 방식, 통제 및 관리의 위계 구조 등과 관련된 사회적 세계도 세속계에 속한다. 같은 세속계에 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 세계들은 각자 추구하는 가치와 활동의 방식 등을 달리하면서, 협조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들 세계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어 세속계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세속계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한 개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속하고 있으며, 사회적인 삶의 영위를 목적으로 하는 특정한 관습과 제도와 규칙을 근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자연적인 세계와는 달리 인간적인 기원을 갖는 것으로서 어떠한 시점에 인간에 의하여 구성되어 누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며,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형성·변화되고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이제 사회적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에게 그의 힘으로는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흐름과 질서를 지닌 세계로 다가선다.
둘째, 특정한 사회 속에서 출생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계에 참여하는 가운데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개인은 그들 세계의 규칙과 교섭의 방식, 기준 등을 수용하여 그것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속계에 스스로를 맞추지 않고는 사회적으로 일탈하게 되며, 이는 세속계로부터의 통제와 처벌과 격리 등을 초래하게 된다. 세속계에 대한 적응은 ‘사회화’(socialization)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는 개인의 의식적인 노력에 힘입어 진행되기도 하지만, 출생하는 그 순간부터 개인의 희망이나 의도 또는 의식의 여부 등과는 관계없이 진행되기도 한다. 사회화는 한 사회가 규정하거나 요구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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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으로서의 자질과 능력 등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인간다움의 고양(高揚)이나 위대성의 실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주 5: 세계 2차대전 당시의 독일 사회나 일본 사회에서도 어린 세대를 기존의 규범과 가치관에 맞도록 사회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사회의 기준이 병든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다움의 고양이나 위대성의 실현 등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배반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회화의 한 가지 양상이다. 이에 주목하면, 사회화를 곧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상당한 정도로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세속계에 대한 적응의 장면에서 일차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그 세계의 기준과 활동의 방식에 대한 외양적인 동조나 기능적인 순응이며, 그에 대한 내면적인 이해나 진정한 수락의 여부가 아니다. 후자가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전자가 수반되지 못할 때, 해당 개인은 부적응, 불능, 일탈 등의 낙인이 찍혀 외부의 압력이나 사회적인 통제에 시달리게 된다. 따라서 외부의 시선과 평가가 적응의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되며, 사회적인 인정을 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방략들이 이른바 처세술(處世術)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기도 한다.
넷째,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가치를 갖는 권력, 물질, 재화, 지위, 위세, 영예 등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회 구성원들을 모두 충족시키기에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그러한 것들은 희소하다는 점에서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로 인하여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이 유발되며, 공정성이나 정의(正義)가 이를 관리하는 원칙으로 등장한다. 이 원칙이 준수되든 되지 않든 간에, 이들 가치의 획득 여부와 그 정도를 기준으로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등이 생겨나며, 후자보다는 전자가 세속계적으로 좋은 삶의 기준이 된다.
세속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있는 세계이다. 흔히 세속적이라 하면, 이를 저급한 것을 지칭하는 표현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것은 정의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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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으로 운영되는 가치있는 세계가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현실적으로 세속계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생존 기반인 이상, 그것을 건전한 사회로 승화시켜야 할 책무가 누구에게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세속계를 모든 점에서 폄하하거나 백안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속계에 속하는 다양한 생활세계들을 기반으로 삼아 살아가는 존재이지, 이를 초탈한 성자(聖者)나 은자(隱者)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세속계적인 삶이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삶은 아니다. 인간은 세속계적인 삶과는 구분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추구해 왔고, 진정한 인간다움은 바로 이런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출현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수도계이다.
수도계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실험하고 실현시켜 나가는 일과 관련된 세계이다. (각주 6: 교육본위론에서 이야기하는 세속계와 수도계의 구분을 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수도계’를 구청(區廳)의 행정조직에 빗대어서 “그것이 ‘상수도계’(上水道係)를 말하는 것이냐, ‘하수도계’(下水道係)를 말하는 것이냐”는 식으로 농담을 한다고 들었다. 이것이 출처가 없는 낭설이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에 대해서는 이런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진지하게 교육본위론을 공부하고 그 취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그저 장난삼아, 말 그대로, 농담 삼아 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결코 학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다른 학자의 이론적인 논의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천박함과 학문하는 일은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종류와 그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적인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고 헌신적으로 추구하는 그 만큼만 우리에게 드러날 뿐이다. 세속계는 이러한 수도계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도계를 억압하고 저해하는 세력도 될 수 있다. 역사상 수도계는 세속계로부터 상당한 정도의 영향을 받아 왔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계에 의하여 그 진로(進路)가 바뀌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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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가 곧 수도계인 것은 아니며, 수도계를 대신할 수도 없다. 수도계가 세속계에 의하여 부당하게 억압될 경우, 그 종사자들은 세속계와 단절하거나 세속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수도계를 숨겨 보호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수도계는 세속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인 것이다.
수도계도 세속계가 그러하듯이 그 속에 다양한 하위세계들을 담고 있다. 학문, 예술, 도덕 등은 일반인들에게도 그 이름이 친숙한 수도계들이다. 그러나 수도계에는 이러한 세계들 이외에도 기도(棋道), 검도, 궁도, 유도, 서도(書道), 다도(茶道), 선(禪), 유가(儒家), 도가(道家) 등 수많은 세계들이 속해 있다. 지금도 수도계로 분류될 수 있는 다양한 세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발전하고 있다. 수도계는 종류만이 아니라 그 높이 또한 확정되어 있지 않다. 수도계의 양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서 어느 것을 특정 수도계의 대표적인 수준으로 거론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수도계는 종류에 있어서나 높이에 있어서 또는 횡적(橫的)인 차원에 있어서나 종적(縱的)인 차원에 있어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몇 마디 언어로 고정시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수도계로 분류될 수 있는 세계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첫째, 수도계는 주체의 당사자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그 실재성을 접할 수 있는 세계이다. 특정한 종류나 높이의 어떠한 수도계에 대한 간접적인 보고를 통하여 그 수도계의 진면모를 체험할 수 있는 비법은 없다. ‘학문에 왕도(王道)가 없다’는 말은 수도계의 이러한 속성을 지칭한다. 수도계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해당 수도계가 요청하는 활동들을 그 활동들이 따르는 원리를 준수하면서 직접 실천해야 된다. 이러한 수도계적인 실천을 통하여 주체 스스로가 변하지 않고는 그 수도계가 줄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의 양상과 가치있는 체험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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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수도계가 추구하는 가치는 내재성(內在性)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내재적이다. 하나는 특정한 수도계가 지향하는 가치는 해당 수도계의 밖이 아니라, 안쪽에 들어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이다. 바깥에 있는 가치들은 그 수도계가 자체의 정상적인 진로를 따라 진행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닌 이상, 외재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하나는 수도계의 가치가 주체의 당사자적 체험을 통하여 그 자체로 자족적인 가치로 수용된다는 점에서 내재적이다. 수도계가 제공하는 가치의 체험은 그것만으로도 주체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되며, 따라서 주체는 일차적으로 수도계의 내재적 가치를 지향할 뿐, 수도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외재적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셋째, 수도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헌신적인 실천을 통하여 끊임없이 질적인 변전을 거듭한다. 어느 시점에서 수도계의 정점(頂點)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단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부정되고 가치를 상실한다. 이전의 것과 이후의 것은 동일한 수도계에 위치하고 있는 것들이면서도 전자를 확장해서는 후자를 포섭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수도계의 위계를 형성하는 각 단계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질적인 간극이 자리 잡는다. (각주 7: 수도계의 이전 수준과 이후 수준 사이에 질적인 간극이 존재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러한 점을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쿤은 학문의 전개 과정에서 이전의 이론체계와 이후의 이론체계 사이에는 논리적인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점을 논증하면서 이를 ‘불가공약성’(不可公約性, incommensurability)이라는 말로 개념화하고 있다(Kuhn, 1970). 예를 들면,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에는 불가공약성이 자리 잡고 있어서 전자를 수정하거나 개선하는 방식으로는 후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도계의 단계들 간에는 질적인 간극이 존재한다는 말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한 현상은 학문의 전개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지적인 발달 과정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예컨대, Piaget, 1958, 1972 참조).)
넷째, 수도계에서는 정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단계만이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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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계의 진면목을 대표하며, 그 수도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표적이 된다. 아래의 단계들은 위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발판이자 사다리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래의 단계들을 충실히 거치지 않고는 위의 단계로 오를 수가 없다. 정상을 지향하고 가급적 신속히 그곳에 도달하기를 소망하지만, 거쳐야 할 단계들을 생략하거나 건너뛸 수는 없으며 이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수도계의 묘미가 있다.
세속계와 수도계는 이질적인 목적과 가치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을 지니고 있다. 세속계는 수도계의 발전을 위한 환경이나 조건으로 작동할 수가 있다. 수도계의 자율적인 진로 탐색과 발전을 보장하는 정치적인 보호막이 될 수가 있으며, 수도계의 원활한 운영과 유지를 위한 경제적인 지원 세력이 될 수도 있고, 수도계적인 활동의 능률적인 수행과 관리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제공할 수도 있다. 반면 수도계는 그 성과를 세속계에 제공함으로써 사회적인 삶과는 구분되는 인간다운 삶의 면모를 사회 구성원들이 경험하도록 도울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수도계적인 체험은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세속계의 유지와 발전에도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세속계와 수도계는 이질적인 세계들로서 각각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협응(協應)해야 되며, 어느 하나를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을 일방적으로 그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삼을 경우, 협조적 공존은 파기되고 만다.
교육계는 수도계와 공존하면서도 수도계의 그것과는 구분되는 목적과 활동의 수행 방식 등을 지니고 있는 자율적인 세계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던 것처럼 수도계는 다양한 하위 수도계들로 구분되며, 특정한 하나의 수도계는 다시 위계를 형성하는 수많은 수준이나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본위론에서는 이러한 수도계의 수준이나 단계를 ‘품위’(品位)라는 개념으로 지칭한다. 수도계의 위계를 형성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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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이나 단계들은 각각이 하나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나 위의 것들과는 양적인 차이나 정교함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이거나 구조적인 차이를 지닌다. 동일한 수도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준이나 단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인식하며, 전혀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또한 수도계의 수준이나 단계는 그것에 도달해 있는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면에 침투하여 수도계 종사자로서 그의 사람됨이나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 수준이나 단계에 도달한 사람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상적인 용어인 수준이나 단계라는 말로는 수도계의 각 위계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을 제대로 개념화하기가 어렵다. 수준이나 단계라는 개념은 각 위계가 갖고 있는 구조성이나 그것이 참여자의 사람됨을 형성한다는 뜻에서의 ‘인격성’(人格性)이라는 특징을 담고 있지 못한 것이다. 품위라는 개념은 이러한 일상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하여 사용된다. 품위라는 말이, 일상적인 장면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든지 간에, 품(品)이라는 말은 어떠한 것이 다른 것과 구분되는 경계를 형성하면서도 그 경계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뜻을 지니며 이 점에서 구조성이라는 속성을 담고 있다. 또한 품은, 품격(品格)이나 품성(品性)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특정인의 사람됨을 이루는 것으로서 주체와 혼연일체가 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품위라는 말에서 위(位)는 특정한 기준에 의하여 높고 낮음으로 구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면,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품위라는 개념은 수도계의 특정한 위계들이 갖는 특징들을 그 안에 온전히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수도계들이 횡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수도계는 다시 종적으로도 무수히 많은 품위들로 나뉘어 있다. 우리는 수도계의 횡적인 차원과 종적인 차원으로 형성되는 좌표(座標)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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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인가에 위치하고 있다. 말하자면, 특정한 수도계의 발전 과정에서 생성된 위계 가운데 어느 것을 각자의 품위로 지니고 있다. 나보다 높은 품위를 차지하고 있는 ‘선진’(先進)이 있는가 하면, 나보다 낮은 품위를 지니고 있는 ‘후진’(後進)도 존재한다. 높고 낮음의 차이는 있지만, 어떠한 품위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느 수도계에 참여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발전하는 수도계의 속성상, 우리는 각자의 품위를 부단히 쇄신해 나가야 한다. 교육계는 수도계의 이러한 속성과 결부되어 각각의 품위를 매개하고 연결하며 끌어올리고 돕는 과정적 실재로 출현한다. 우리는 보다 높은 품위를 겨냥하여 배움의 활동을 전개하거나, 선진으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가면서 배움의 활동을 수행한다. 또한 우리보다 낮은 품위의 후진을 자신의 품위 쪽으로 이끌기 위하여 가르침의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수도계의 각 품위를 매개하는 과정적 실재로서의 교육과 관련하여 우리는 ‘가르침’이나 ‘배움’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용어들은 수도계의 품위 향상과 관련된 과정적 실재인 교육계의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일상적인 장면에서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기능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연필 잡는 법을 가르친다’, ‘커피 자판기 사용법을 가르친다’, ‘신발 끈 매는 법을 배운다’,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고 배운다’든가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가르침이나 배움은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수도계의 품위를 놓고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상어로서의 가르침과 배움에는 그것이 다루는 내용이 구조성과 위계성을 지니고 있는 수도계의 한 가지 발전 단계에 해당한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다. 더욱이 일상적인 장면에서 가르침이나 배움이라는 개념은 ‘소매치기 기술을 가르치고 배운다, ‘욕설을 배운다’, ‘술이나 담배를 배운다’ 등과 같은 경우에도 사용된다.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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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나 배움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이 인간이 추구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의 여부와는 전혀 관계없는 개념이 되어 버린다.
단순한 기능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경우를 두고 가르치고 배운다고 한다든가, 인간의 성장과는 방향이 정반대에 해당하는 가치 파괴적인 내용을 다루는 경우를 두고 가르치고 배운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교육의 실체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일상적 개념인 가르침과 배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교수’와 ‘학습’이라는 개념의 경우에도 거의 그대로 생겨난다. 교수는 학습자가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높은 득점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내용을 조직하여 전달하는 기법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학습자가 내용을 비교적 쉽게 장시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뜻한다. 심한 경우에는, 가르침이라는 일상적 개념이 그러하듯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러한 가치 추구에 위배되는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상대방이 쉽게 습득하도록 전달하는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행동주의 학습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행동을 하는 것’도 학습으로 지칭되며, 인지적 학습이론에서 보듯이 ‘아동이 폭력적인 TV 프로그램을 시청한 결과로 공격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도 학습으로 간주된다. 과연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은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두고 학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우며,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라기보다는 인성의 파괴에 해당하는 데도 이를 두고 학습이라 할 수 있는지는 도대체 분명하지가 않다. 대개의 경우 이는 우리가 교육과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배우는 활동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훈련이나 습관의 형성 등을 학습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거론되는 정보처리이론에서도 단기기억이나 장기기억의 방식으로 특정한 내용을 파지(把持)하고 있다가, 적절한 상황에서 이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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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하는 과정 정도를 학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기억이나 암기일 뿐, 교육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다(엄태동, 2000a). 바로 이러한 점에서 교수와 학습은 교육본위론을 통하여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교육계를 형성하는 활동의 명칭일 수가 없다.
교육본위론에서는 특정한 수도계의 품위를 거점으로 후진이 선진의 품위를 추구해 나가는 활동과 선진이 후진의 성장을 돕기 위하여 전개하는 활동을 각각 ‘상구’(上求)와 ‘하화’(下化)라는 개념으로 지칭한다. 이는 불교라는 수도계에서 석가가 열어 놓은 품위를 놓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생겨난 용어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서 따온 개념들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뜻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수도계의 품위를 놓고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계의 양상을 묘사하는 데에 적절한 개념이다. 그러나 상구와 하화라는 개념은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모든 수도계에 적용될 수 있으며, 수도계와 공존하는 교육계의 두 가지 과정적 활동의 양상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육계는 수도계의 품위를 전제하며, 거의 언제나 수도계와 더불어 공존한다. 그러나 교육계는 수도계와는 다른 생리를 지닌 별도의 세계이다. 수도계의 발전은 정점에 위치하고 있던 품위를 지양하고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품위를 개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새로운 품위가 출현하면 그것이 수도계의 가치를 대표하게 되며, 그것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이전의 품위들은 수도계 발전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징검다리로 기념될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수도계의 가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심한 경우 그것들은 하나의 오류로 치부되어 폐기처분되기도 한다. 이처럼 수도계에서는 최고의 품위만이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에 소수만이 일류가 되고 그 밑의 다수는 이류나 삼류에 머무르고 만다. 최고의 품위에 도달하기 위한 수도계 종사자들간의 경쟁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열하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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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계는 최고의 품위를 지향하면서도 그곳에 도달하려면 그 밑의 품위들을 충실히 거칠 것을 요구한다. 이전의 품위를 논리적으로 확장하거나 양적으로 풍부하게 함으로써 이후의 품위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전의 품위를 충실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품위로 도약할 수도 없다. 결과상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모든 품위들을 하나하나 거치는 과정적 충실성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피할 수는 없다.
교육계는 수도계가 요청하는 과정적인 충실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종국에는 수도계의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된다. 이 점에서 수도계는 교육계의 가능 조건이지만, 동시에 교육계에 힘입어 발전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도계와는 달리 교육계는 품위의 높낮이를 중시하는 세계가 아니다. 교육은 불완전하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인간이 자신의 부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도달한 품위의 높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달하기 위한 과정적 활동의 충실성과 그것에 깃들어 있는 성장의 체험이 소중한 것이다. 전자는 수도계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을 형성한다면, 후자는 교육계가 지향하는 가치있는 목적이 된다. 이 점에서 수도계가 오류로 판정하여 폐기처분의 대상으로 삼는 품위들도 교육계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품위와 마찬가지로 귀중한 교육적 가치를 지닌다.
고귀한 수도계적 체험은 높은 품위를 요구하며, 이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소수이다. 그러나 고귀한 교육계적 체험은 어떤 종류의 수도계, 어떤 수준의 품위에서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수도계에서의 대가(大家)와 교육계에서의 대가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높은 품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품위에 안주하여 정체상태에 있는 사람은, 비록 수도계의 대가일 수는 있어도, 충실한 교육계적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낮은 품위에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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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있다고 하더라도 부단히 자신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그 과정에서 보람을 체험하는 자가 교육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계의 위계와 수도계의 위계는 구분되어야 한다. (각주 8: 교육본위론의 이러한 통찰과 수도계에 해당하는 교과지식의 수준 또는 학문이나 예술 등의 수준을 근거로 교육의 위계를 판정하는 기존 교육학의 관점을 비교해 보라. 초급교과를 다루면 초등교육, 중급교과를 다루면 중급교육, 고급교과를 다루면 고등교육이라고 보는 기존 교육학의 시각은, 교육본위론의 관점에서 보면, 수도계와 교육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수도계가 그러한 것처럼 세속계 역시도 교육계가 다루어야 되는 품위나 교육의 소재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세속계에서 충실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가르치고 배워야 할 내용들이 있으며, 따라서 교육계는 수도계만이 아니라 세속계와 결부되어서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계에서의 충실한 삶은 교육을 통한다기보다는 사회화나 문화화, 훈련이나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 암기와 주입, 모방 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물론 현재의 교육학 이론들 가운데는 이러한 것들을 교육으로 간주하고 교육이 세속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식으로 교육을 정당화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을 모두 교육으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교육과 교육 아닌 것들을 체계적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반증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 활동들이 속성상 교육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나 문화화, 훈련이나 인독트리네이션, 암기와 주입, 모방 등을 교육으로 보는 그 순간 정작 교육에 해당하는 것이 교육의 밖으로 밀려나는 불상사가 생겨난다.
한 가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그렇다고 해서 교육이 세속계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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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들과는 하등의 관련도 없이 혼자 독존(獨存)하는 것은 없다. 교육은 그 결과로 세속계적인 좋은 삶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세속계적인 좋은 삶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석하는 순간 다시 교육은 사회화나 문화화, 훈련이나 인독트리네이션, 암기와 주입, 모방 등으로 대치되고 만다. 교육이 교육계의 생리에 맞도록 운영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부수적인 결과들은 무수히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속계적인 좋은 삶일 수도 있다. 헤아린다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교육의 부수적인 결과들 가운데 하나를 들어 그러한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육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교육의 부수적인 결과나 세속적인 기능이 교육계가 추구해야 되는 목적은 아니며, 교육의 목적은 이러한 것들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 자체에 들어 있다. 교육계는 바로 이 교육 내재적인 목적을 추구하며,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나 기능은 교육본위론의 입장에서 보면 부차적인 것에 속한다.
2) 교육 활동의 구조: 교육의 수레바퀴
교육은 특정한 수도계의 어느 한 품위를 거점으로 시작되어 그것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의 품위에서 일단락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루어진다. 그것은 수도계의 한 품위와 다음 품위를 연결하는 과정적인 활동의 세계이다. 그 과정적인 활동의 양상은 그것과 결합되는 수도계의 종류와 수준과는 무관하게 동일한 구조로 전개된다. 교육의 과정이 시작될 때와 일단락될 때 출현하는 결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교육의 과정은 동일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수도계의 어느 품위들을 연결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든, 언제나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적인 활동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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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는 다시 ‘상구계’(上求界)와 ‘하화계’(下化界)로 구분된다. 상구계는 주체가 자신의 현재의 품위가 불완전한 것임을 알고 이를 넘어서는 다음의 품위를 탐색하고 추구해 나가는 것과 관련된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자신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이다. 반면에 하화계는 자신이 현재 점유(占有, appropriation)하고 있는 품위보다도 낮은 품위를 점유하고 있는 후진에게 이를 넘어서 상위의 품위를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조력하는 것과 관련된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타인의 상구를 조력하는 데서 생겨나는 독특한 삶의 보람을 겨냥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상구계와 하화계는 서로 구분되는 목적과 이를 추구하는 활동의 방식을 지니고 있는 이질적인 세계이면서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교육계를 창출한다.
상구계와 하화계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들이 서로 결합함으로써 교육게를 창출하는 방식을 교육본위론은 [그림 6-1]로 제시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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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레바퀴’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만 이 그림으로 제시된 것은 교육 활동의 구조를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교육학적인 탐색의 과정을 통하여 발견한 잠정적인 성과를 예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육계도 끊임없이 성장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포착한 그것의 구조적인 양상은 다음 순간 교육계의 발전에 의하여 지양되는 것이다. 교육의 의 수레바퀴 모형에 따르면, 상구와 하화는 서로 대비되는 6개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요소들은 맞은 편의 다른 요소들과 협응함으로써 교육이라는 공조 체제를 형성한다.
(1) 자리와 이타: 행위의 동기
상구와 하화는 우리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각자의 인간적인 가능성을 탐색하는 가운데 이를 실현하고 공유하려는 열정과 책임이라는 행위의 동기를 갖는다. 그것은 언뜻 보면 수도계적인 행위의 동기와도 유사하다. 그러나 수도계가 참여자들간의 경합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적인 가능성을 수도계의 최정점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최고에 대한 동경으로 채워져 있다면, 상구는 각자가 자신의 현재 품위를 넘어서 새로운 품위로 나아가는 과정적인 흐름을 충실히 향유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는다. 그것은 반드시 최고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일 필요가 없다. 더욱이 하화는 자신의 품위 향상이 아니라 후진의 품위 향상을 조력하려는 동기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타자와의 경합을 통하여 수도계의 최고 자리를 추구하려는 수도계적인 동기와 충돌하고 갈등할 수도 있다.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꿈꾸는 수도계 종사자들에게 하화란 그의 향상에 투자해야 할 시간과 노력을 침해하는 일종의 낭비일 수도 있고, 자신의 품위를 경쟁자에게 넘겨주는 우(愚)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구와 하화는 수도계의 그것과는 구분되는 동기를 지니지만,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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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라는 내용상의 차이를 갖고 있다. 상구는 누구나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자기, 또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자기’를 꿈꾸는 가운데 수행되는 것으로서 자기 사랑이라는 동기를 지닌다. 반면에 하화는 과거의 자신처럼 살아가는 후진에 대한 연민을 그 후진의 상구를 조력하려는 헌신으로 승화시키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타로 지칭될 수 있는 하화의 동기는 하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순전히 이타로만 서술하기 어려운 것으로 변모되기도 한다. 후진을 타자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자신이나 또 다른 자신의 분신(分身)으로 보는 가운데 선진은 후진을 자신의 확대된 자아로 해석함으로써 이타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자리로 승화된다. 또한 선진은 하화의 과정에서 후진에 대한 이타적 사랑이라는 차원에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화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는 가치와 보람을 체험하기도 한다. 선진은 하화 자체를 추구할 만한 가치를 지닌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체험하여 하화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도 하화의 동기는 자리나 이타라는 대립을 초월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하화가 초기에는 이타라는 동기를 갖다가 점차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의 동기로 변모되는 이러한 양상은 하화 자체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는 하나의 활동으로서 하화 자체도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세계라는 점을 고려하는 가운데 밝혀질 수 있는 탐구의 주제일 것이다.
(2) 존현과 존우: 상대주의적 조망
우리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품위를 기반으로 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행동한다. 자신의 품위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진리나 아름다움, 선함 등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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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바하의 작품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 등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품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볼 수 없고 감상할 수 없는 자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또한 자신도 한때 거쳐왔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현재 품위보다 낮은 품위는 유치하고 조잡하며 엉성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컵의 형태가 변했을 뿐인데도 컵 속의 주스도 그 양이 함께 변한 것이라고 사고하는 전조작기 동생의 반응은 구체적 조작기인 형의 눈으로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리석고 유치하다. ‘병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치료약을 훔쳐야 한다’는 신통한 대답에 감동을 받아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엄마가 없으면 밥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라고 답하는 아동의 도덕 판단은 성인의 눈으로 보면, 황당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품위의 한계 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교육의 장면에서 상구와 하화를 제대로 수행하고자 하면, 이러한 한계로 인하여 생겨날 수 있는 독단(獨斷)을 피해야 한다. 자신의 품위만을 고집하고 상대의 품위를 외면하거나 경시해서는 상구와 하화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존현’(尊賢)과 ‘존우’(尊愚)의 태도이다. 후진의 위치에 있는 상구자(上求者)는 자기 앞에 있는 선진의 높은 품위를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알아볼 수조차 없다. 그러나 자신이 납득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자신의 품위를 통하여 선진을 해석해 버리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상구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겨난다는 자각 속에서 자신의 품위를 유보하고, 지금 당장은 납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진을 존중하고 그로부터 상구하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반면 하화자(下化者)는 후진의 품위가 어리석고 유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경시하거나 외면하기보다, 한동안은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선진의 눈으로 보면, 후진의 품위는 어리석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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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당사자에게는 있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후진의 최선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는 공연히 후진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며 선진 자신의 정상적인 하화도 가로막는다.
(3) 순차와 역차: 단계적 배열
교육은 선진과 후진 사이에 존재하는 품위의 간극을 좁히려는 활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간극을 신속하게 일시에 좁히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높은 품위에 도달하려면 그 밑의 품위들을 단계적으로 충실히 밟아 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교육은 바로 그러한 과정적 활동이다. 결과에 도달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과정을 부실하게 거치거나 이를 생략하려 드는 것은, 그 과정 속에 교육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교육적인 자세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과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품위의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는 효과적인 접근법일 수도 없다.
상구는 ‘순차적’(順次的)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상구자는 최선의 품위를 겨냥하기보다는 그가 한 단계의 상구를 통하여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차선의 품위를 모색하여 나아가야 한다. 수도계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최선의 품위는 최고의 수도계적 가치를 지니며, 상구자가 선택한 차선의 품위는 상대적으로 수도계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나 수도계적인 가치로 충만한 품위가 교육적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도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최선의 품위는 현재 상구자의 능력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상구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상구자는 자신의 품위를 기준으로 차선의 품위들을 설정하고 이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상구함으로써 최선의 품위를 겨냥해야 된다. 그러한 차선의 품위들이야말로 특정한 상구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며 교육적인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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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는 하화는 ‘역차적’(逆次的)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하화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를 소재로 삼아 후진을 인도하려는 조급함을 버리고, 후진의 품위를 진단하여 그곳까지 하강(下降)한 뒤에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화를 진행해야 된다. 상구자가 자신의 품위에서 출발하여 그에게 차선이 되는 품위들을 하나씩 예측하여 나아간다면, 하화자는 자신의 현재 품위로부터 하나씩 아래로 내려가면서 상구자가 거쳐야 하는 품위들을 모색하고 이를 역(逆)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신의 품위와 상구자의 품위를 연결해야 된다. (각주 9: 앞장에서는 듀이의 ‘순차적인 교육’(progressive education)과 대비시켜 전통적인 교육을 ‘역차적인 교육’(retrogressive education)으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역차와 지금 여기서 말하는 역차는 같은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가장 상위의 지식, 듀이가 성인의 교과라고 말한 것을 그 내용은 그대로 두고 좀 더 쉽게 꾸미는 방식으로 아동의 교과를 구성하였다. 이 점에서 전통적인 역차적 교육에서는, 내용을 조금씩 쉽게 꾸몄다는 점을 제외하면, 성인의 교과를 누구나 배워야 하는 단일한 교과로 간주한 셈이다. 반면에 하화자가 역차적으로 배열하는 품위들은 하나의 품위를 쉽게 꾸며서 양적인 차이가 생겨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상이한 구조들을 발생적으로 배열하여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다. 전통적인 역차적 교육은 하나의 교과(a1)와 그것을 좀 더 쉽게 꾸민 교과들(a2≒a3≒a4)을 설정하여 이를 ‘a1←a2←a3←a4 …’라는 식으로 계열화한다. 반면에 하화자의 역차적인 접근은 ’상이한 품위들(a≠b≠c≠d …)을 선구자가 순차적으로 밟아 나갈 수 있도록 ‘a→b→c→d …’로 배열한다.)
(4) 자조와 원조: 변형적 활동의 형식
선진의 품위와 후진의 품위는 양적인 차이나 풍부함의 차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와 구조적인 차이를 갖는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품위를 논리적으로 확장하거나 정교화함으로써 다른 품위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상이한 품위들을 연결하는 상구와 하화는 형식논리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는 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메논의 역설은 형식논리로만 성립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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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와 하화라는 교육 활동을 통하여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상구는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활동이며, 이에 종사하는 상구자는 현재의 품위를 해체하고 새로운 품위를 구성해야 된다. 이러한 해체와 구성의 과정은 문제의 발견, 단서와 자료들의 수집, 장애가 되는 요소들의 배제와 생략, 해결책의 잠정적 모색, 품위의 재구성 등과 같은 복잡한 활동들을 수반한다. 또한 이 과정에는 상상, 직관, 추측 등과 같은 형식논리를 벗어나는 지적인 능력들은 물론이고 기대, 의지, 열정 등과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능력들과 요소들을 동원하는 가운데 상구자는 전진적인 ‘자조’(自助)의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새로운 품위를 구성한다. 그것은 선구자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수행해야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조의 활동이며, 현재의 품위를 넘어서는 상위의 품위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전진적이다.
반면에 자신은 알고 있고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고 기이하게 여기는 사람과 대면하여 그도 알 수 있도록 이끄는 활동이 하화이다. 선진이 자신의 품위를 언어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자세히 설명해 준다고 하더라도 후진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품위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 하화는 언어적인 전달을 초월하는 활동으로 진행된다. 하화자는 선구자가 전진적인 자조의 활동을 수행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하며 지도하고 조언하는 활동을 통하여 그에게 도움을 제공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원조적’(援助的)인 활동이다. 여기에는 후진의 품위에 대한 진단과 그곳으로의 하강, 후진에 대한 반박, 문제의 암시,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하는 아이러니의 연출, 자료의 제시, 해결책의 촉구, 방향의 시사 등과 같은 활동들이 들어 있다. 원조적인 활동들은 하강과 역차적인 접근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선진이 과거의 품위로 회귀하는 과정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각주 10: 물론 그것은, ‘작전상 후퇴’라는 말도 있듯이, 하화를 위한 퇴행일 뿐이다. 하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선진의 품위가 실제로 그 밑의 품위로 퇴행해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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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증과 타증: 증명의 방식
특정한 수도계에서 품위를 달리 하는 사람들이 각자 그들의 품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품위의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는 제3의 기준이나 절차는 없다. 흔히 그러한 객관적 기준으로 정합성(coherence)이나 대응성(correspondence)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 단계의 모든 품위는 하나의 구조로서 동등한 정도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자는 언제나 그들의 품위에 근거하여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의 품위는 각자에게 모두 세계와 대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것들은 품위 판정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합의나 물리적인 강제력의 동원 등을 통하여 수도계에 속하는 품위의 우열을 가릴 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은 세속계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방책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수도계의 이질적인 품위에서 비롯되는 문제의 해소책은 될 수 없다.
교육은 인간을 변화시켜 품위와 품위를 이어주는 가운데 선진의 품위와 후진의 품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하는 ‘자증’(自證)과 ‘타증’(他證)이라는 절차를 내장하고 있다. 수도계의 품위는 우리가 추구하고 헌신할 만한 가치의 보고(寶庫)이다. 따라서 그것은 주체에게 가치로운 진면목이 절실히 체험되고 참된 것으로 확인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품위에 대한 동의가 강제되거나 강요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증은 선구자가 자신의 것보다 한 단계 높은 품위를 구성하여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이전의 것보다 상대적으로 고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체험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 우월함을 승인하는 것을 말한다. 타증은 선진이 후진을 조력하여 자신의 품위 쪽으로 향상하도록 이끌면서 그 향상의 과정에서 얻은 품위가 후진의 이전 품위보다 고귀한 것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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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이는 후진의 자증을 유도하면서 후진이 자신의 것보다 높은 품위에 ‘심열성복’(心熱誠服) (각주 11: 심열성복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덕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하면, 그들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과 기쁨을 갖고 복종한다’(以德服人者 中心悅誠服也, 公孫丑章句)는 구절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교육본위론에서 심열성복은 외부적인 권위나 압력 또는 물리적인 강제력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품위를 진정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것의 우월함을 깨닫고 진심으로 승인하며 따른다는 뜻을 갖는 것으로 사용된다.)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상구를 통한 자증과 하화를 통한 타증의 절차를 통하여 수도계의 품위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로 인정받게 된다.
(6) 혁신과 보수: 결과의 주체적 의미
수도계는 최정상의 높은 품위를 가장 가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세계이다. 최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품위의 개척만이 창조로 평가받고 혁신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반면에 교육계에서는 자신의 현재 품위를 뛰어넘어 습득한 품위는, 그것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개척되거나 창조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에게는 모두 창조이고 혁신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이 점에서 어떤 수도계의 어떤 품위를 소재로 삼아 상구를 수행하든지 간에 선구자가 새롭게 점유한 품위는 그에게 ‘혁신’(革新)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반면에 상구자의 혁신을 조력하는 하화 활동의 결과는 하화자에게 이미 습득하고 있던 품위를 좀 더 견고한 것으로 만든 ‘보수’(保守)로서 의미를 갖는다. 후진과 선진이 조우하여 한쪽은 상구를 통해 혁신에 도달하고 다른 쪽은 하화하여 보수를 이루는 이상, 그들의 상구와 하화는 최적의 조화를 이루어 교육의 수레바퀴를 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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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로운 교육의 조망
바로 앞의 3절에서 소개한 것들이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교육본위론의 대강을 짧게 요약한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요약은 원본(原本)을 대신할 수가 없다. 요약은 그것이 요약하고자 한 것의 윤곽만을 보여주는 데에 그칠 뿐이다. 교육본위론은 그 방대한 분량으로만 본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요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요약의 과정에는 어쩔 수 없이 요약하는 사람의 이해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어서 어쩌면 앞의 소개는 도대체 교육본위론에 대한 요약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로 인하여 생겨나는 오해를 완전히 차단할 길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교육본위론이 보여주고 있는 교육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앞의 요약이 교육본위론을 지나치게 축약함으로써 유발하는 난해함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본위론의 기본 골격만을 더듬은 앞의 요약에 살을 붙여서 교육본위론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좀 더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이를 통하여 오히려 교육본위론의 진의가 훼손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교육본위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 아니면 교육본위론을 왜곡하는 것이 될지는 지금으로서 도저히 판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교육본위론에 살을 붙이기에 앞서서 교육본위론이 상정하고 있는 교육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머릿속에 좀 더 선명하게 떠오르도록 교육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시 한 편을 방편(方便)으로 삼아 새로운 교육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먼저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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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을 위한 서시(序詩)
교육본위론은 지금까지의 교육학이 보여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교육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경우 교육본위론이 보여주는 교육의 모습은, 이전의 교육학을 통하여 우리가 떠올릴 수 있었던 교육과 비교하면,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윤곽에 있어서 차이를 지닌다. 물론 교육본위론도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다면적 실체이다. 따라서 그것을 접하는 사람마다 교육본위론을 상이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교육본위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교육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의 수렴성(收斂性)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그것은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해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본위론이 제공하는 교육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어떠한 것인가? 다음의 시가 제공하는 하나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교육본위론을 통하여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교육에 대한 그림과 상당한 정도의 구조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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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위의 시가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작품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암송하는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이 시가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회자(膾炙)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이 애초에 이 시를 쓸 당시 어떠한 시상(詩想)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시의 이면에 어떠한 동기나 의도를 감추어 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즐겨 읊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도리는 없다. 아마도 김춘수 시인이 이 시를 통하여 노래하고자 한 것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통하여 떠올리고 있는 것도 교육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시를 교육과 관련지어 해석하려는 시도는 접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의 가슴 속에는 교육본위론이 보여주는 교육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교육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그것도 새로운 교육을 그리고 있는 서시로 해석하여도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꽃이라는 이 시를 교육을 위한 서시로 해석하는 것은 엉뚱한 시도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의 작가인 김춘수 시인조차 이러한 시도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해석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면,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것은 시라는 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성립할 수 있다. 먼저 시의 1연과 2연은 몸짓이 꽃으로 바뀌는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몸짓으로 지칭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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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에게 다가와 꽃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바뀐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다. 그는 이전부터도 꽃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꽃이다. 다만 이전의 나는 아름다운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몸짓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꽃’이라는 상징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들 가운데는 실상 대단히 아름답고 진리로우며 소망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러한 것으로 인식되거나 체험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끝없이 창조되고 있는 학문적인 지식들이 있으며, 인간과 세상을 통하여 체험한 아름다움을 색이나 소리나 형태로 드러내고 있는 각종의 예술 작품들이 있다. 인간적인 한계에 도전하면서 모색되고 있는 위대한 능력과 활동의 세계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러한 세계들이 아마도 꽃이라는 말로 상징화되고 있을 것이다. 꽃이라는 표현이 연상시키듯이 그러한 세계들은 우리가 추구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소망스러운 세계들에 해당됨은 물론이다.
교육본위론에서는 그러한 소망스러운 세계들을 수도계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각종의 수도계를 우리의 환경이나 세계로 지니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수도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도계가 우리와 동시대에 같은 공간을 점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우리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능력이 그것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향유할 만한 수준에 있지 못하면, 각종의 수도계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리적인 환경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사태는 누가 보더라도 불행한 일이다. 아름답고 소망스러우며 진리로운 세계를 접하고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삶은 그 만큼 왜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진리로운 것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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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로 인식하며, 소망스러운 것을 소망스러운 것으로 체험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 자신이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모하지 않는 이상, 수도계는 꽃이 아니라 언제나 몸짓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수도계의 진정한 면모를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가 스스로를 변모시키는 활동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위의 시에서 나의 변모를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묘사되어 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라는 것은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이며, 그것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행위 가운데 하나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배움의 행위, 교육본위론의 용어로 표현하면, 상구의 활동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도계를 대상으로 상구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동안 나의 시야를 벗어나 있던 수도계의 아름답고 진리로우며 소망스러운 면모가 나의 것으로 다가서게 된다. 어쩌면 상구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의 정체를 생각하기조차 어려울지도 모른다.
1연과 2연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상구의 활동을 통한 나의 변모와 함께 그것으로 지칭되던 수도계는 몸짓에서 꽃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이는 상구의 활동을 통한 우리의 성장이 우리가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품위의 양적인 팽창이나 그것의 논리적인 확장이 아니라, 질적이며 구조적인 변전(變轉)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지칭되는 수도계의 특정한 품위를 소재로 삼아 상구의 활동을 전개하기 이전의 나의 품위에서 그것은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상구의 활동이 일단락되었을 때, 내가 도달한 품위에서 그것은 꽃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상구의 활동에 착수하기 이전에 바라보던 것이나 상구의 활동을 전개하고 난 이후에 바라보는 것이나 동일한 현상이며 세상이다. 이처럼 우리가 동일한 현상이나 세상을 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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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에도 불구하고 상구를 통한 품위의 상승으로 인하여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나 세상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러나 바뀐 것은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이나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품위이다. 품위의 변화로 인하여 우리가 접하는 세상 자체가 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교육본위론이 말하는 이질적인 품위들 간의 구조적인 간극(間隙)을 보게 된다.
더욱이 꽃으로 상징되는 수도계의 특정한 품위에 도달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것으로 변모한다. 3연의 2행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나 자신이 변모하였을 때, 그로 지칭되는 꽃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바로 내가 된다. 나 자신이 바로 꽃으로 바뀌어 꽃이 갖고 있는 빛깔과 향기를 지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상구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습득하는 품위는 그것 자체가 우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인간다움을 형성하는 실체가 된다. 상구의 결과로 얻게 된 수도계의 품위 자체가 나의 자아가 되어 그것과 나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수도계의 특정한 품위가 상구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체득(體得)됨으로써 우리의 인격성을 형성한다는 교육본위론의 취지를 너무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의 1연과 2연, 그리고 3연의 1행과 2행이 그리고 있는 장면을 통하여 상구의 내재적 가치를 볼 수도 있다. 몸짓이 꽃으로 바뀌는 그 순간은 이를 체험하는 나에게 그 자체로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대단히 소망스러운 보람과 열정을 제공한다. 상구의 활동이 가져오는 세속적인 이익에서 상구 활동의 의의(意義)를 구하는 것과 같은 세속계적인 발상은 이 장면에 조금도 발을 붙일 수가 없다. 더욱이 나와 혼연일체가 된 그 꽃이 다른 꽃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아름답고 소망스러운 것인가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나 각자의 꽃을 갖고 있다. 꽃을 몸짓으로 밖에는 볼 수 없었던 우리의 현존하는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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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상구의 활동을 수행하고 이를 통하여 우리가 체득하게 되는 한 단계 더 높은 차선의 품위들은 누구에게나 그 순간 그 자신의 꽃으로 상구자를 매료시킨다. 그 꽃이 가장 완벽하며 최고의 소망스러움을 담고 있는 ‘절대적이며 최종적인 꽃’인가 하는 점은 선구자가 체험하는 보람의 깊이와는 관계가 없다. 이는 교육본위론이 강조하고 있듯이 상구의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품위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상구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보람과 흥취에 해당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품위에서 꿈꿀 수 있는 나름대로의 꽃을 지니고 있으며, 그 꽃을 자신의 품위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상구의 내재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물론 그 꽃은 다시 몸짓으로 변모하고,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차선의 품위를 꽃으로 겨냥하는 데에 필요한 발판이 된다. 이처럼 몸짓을 꽃으로 체험하고, 다시 그 꽃을 몸짓으로 바꾸어 버리는 새로운 꽃을 향해 나아가는 끝없는 상구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구의 가치를 맛보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노래하던 시는 3연의 3행에서부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상대방에게 ‘나아가는 행위’를 노래하는 것으로 곡조(曲調)가 바뀐다. 나는 상구의 활동을 통하여 나의 품위를 향상시킴으로써 나의 품위에 상응하는 수도계를 더 이상 몸짓이 아닌 꽃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주변에는 이전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꽃을 아직도 몸짓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나의 빛깔과 향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사람됨의 결함이 아니라 상구 활동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일일 뿐이다. 몸짓을 꽃으로 보게 된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선진이며 그들은 후진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선진인 나는 후진인 그들과 교육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해야 된다. 내가 과거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후진들도 상구의 활동을 통하여 한 차원 높은 품위를 습득할 필요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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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러한 필요와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활동을 이 시에서는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는 구절로 노래하고 있다. 이는 후진을 상대로 상구의 활동을 수행하도록 촉구하는 ‘청학’(請學)이자, 선진인 자신에게 와서 하화의 활동을 청하라는 ‘청교’(請敎)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청학이 되었든 청교가 되었든 나는 그에게, 즉 후진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동일한 실체를 어떤 이는 몸짓으로 보고 어떤 이는 꽃으로 본다고 할 때, 이러한 상이한 인식과 체험을 낳는 그들간의 품위의 차이는 엄청난 갈등과 충돌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이러한 충돌과 갈등은 다수에 의한 합의나 물리적인 강제력을 통하여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을 몸짓을 보자고 다수가 합의하거나 강제한다고 해서 꽃을 꽃으로 보게 된 나의 품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그것은 몸짓이 아니라 꽃이라고 항변한다고 해서 꽃을 몸짓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그들의 품위가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이름을 부르고 그에 화답하여 그들에게 나아가는 활동이 개입해야 된다. 교육본위론의 용어로 말하면, 상구의 활동과 하화의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를 ‘부른다’, ‘간다’라는 식의 행위에 대한 요청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교육 활동에 대한 요청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3연을 교육본위론적으로 해석하면, 후진을 상대로 하화하여 꽃을 몸짓이 아닌 꽃으로 보도록 그들의 품위 향상을 돕고 싶다는 절실한 심정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하화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러한 절실한 심정 속에 하화의 내재적 가치가 선명하게 들어 있다. 어떠한 세속계적인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후진에게 자신의 품위가 몸짓이 아니라 꽃이라는 점을 타증하려는 하화자의 순수한 동기가 담겨 있을 뿐이다. 이 때 하화자가 지니고 있는 꽃이 수도계의 위계상 어느 정도의 수준을 점하고 있는 품위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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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품위가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것을 소재로 삼아 상구할 수 있는 후진이 있는 이상, 그는 그 후진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품위가 지니는 상대적인 우월성을 입증하는 행위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화의 활동 그 자체가 하화자에게 충분한 보상이 된다는 점, 즉 하화의 활동이 그 자체로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
마지막 4연은 위로는 상구하고 아래로는 하화하는 교육적인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는 구절에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가운데 이를 향유하거나 공유하려는 교육적인 소망이 들어 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라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선진에게는 상구하고 후진에게는 하화하여 교육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동기가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상구하고 하화하는 그 꽃이, 또는 품위가 세속계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든, 수도계적으로 얼마나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교육의 소재로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상구고 하화할 수 있는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품위로 계승될 수 있는 것이다. 수도계에서는 최고의 품위를 보존하고 그 이전의 것을 폐기하지만, 교육계에서는 수도계의 어떠한 품위든지 간에 이를 놓고 상구하고 하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이상, 이를 보존하여 남겨 놓는다.
설사 자신이 상구하여 개척한 품위가 아무리 전인미답의 최고 품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후진과 교육적 관계를 형성하여 서로 하화하고 상구하는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계승되거나 보전되지 못하고 소멸하게 된다. 수도계의 최정점에서 상구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경우에도 자신의 품위를 후진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하화하고 상구함으로써 후진의 내면에 살아 있도록 만들어야 된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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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수도계 최정점의 품위도 그것을 개척한 상구자의 생물학적인 소멸과는 무관하게 수도계의 품위로 계승되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현재에도 수많은 수도계가 탄생하고 발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끝없이 소멸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수도계의 생멸과 발전의 이면에는 교육계가 작동하고 있다. 수도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품위를 거점으로 삼아 위로는 상구하고 아래로는 하화하는 활동을 수행하는 이상, 그들의 수도계는 의미 없는 몸짓으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소망하는 꽃으로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와의 관계 속에서 선진이나 후진이 되어 나름대로 상구하고 하화하는 삶을 영위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가치롭고 소망스러운 수도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꽃이 아닌 몸짓으로 변모하고, 종국에는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몸짓이 꽃으로 바뀌는 자증의 체험을 통하여, 꽃을 꽃으로 입증하는 타증의 체험을 통하여 상구와 하화는 누구나 그 자체로 소망스럽게 생각하는 세계로 성립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교육의 세계에 참여하는 가운데 상구하고 하화함으로써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우리들은 모두 상구하고 하화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통하여 교육계는 하나의 발전하는 세계로 존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계에 힘입어 각종의 수도계는 그것을 몸짓이 아니라 꽃으로 보는 사람들을 확보함으로써 잊혀지거나 소멸하기보다는 하나의 의미있는 세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꽃이라는 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시인이 이 시를 노래한 원래의 의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음미하고 있는 이유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의도나 세상의 통상적인 해석이 아니다. 시란 원래 자신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이 공감을 받을 수 있을 만한 부분을 지니고 있는 것만큼 하나의 해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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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교육본위론을 통한 이 시의 해석에 공감하고 수긍할 수 있다면, 그것은 꽃이라는 시 해석의 지평(地平)을 넓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교육본위론의 의의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교육본위론을 통하여 꽃이라는 시를 교육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한 이 해석은 문학이나 미학은 물론이고 철학이나 심리학 또는 사회학이나 인류학 등을 통하여 가능한 해석들과도 동일한 것일 수가 없다. 이 점에서 그것은 새로운 관점에서 가능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관점이 교육학의 관점이라는 점, 더욱이 이는 기존의 교육학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자율적인 교육이론으로서 교육본위론의 의의를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교육의 가치와 목적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혹은 ‘교육이 실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수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교육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세속계적인 삶의 향상에 기여해야 되며, 따라서 세속계적인 가치가 교육이 마땅히 실현해야 되는 목적을 형성한다는 생각이다. 사회·경제적인 지위, 사회적인 위세와 권력, 국가의 경제적인 발전 등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교육의 기능이거나 결과적인 산물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어도 교육의 가치나 목적일 수는 없다. 교육본위론은 교육의 결과로 생겨나거나 실현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교육의 가치나 목적으로 보지 않는다. 교육의 가치와 목적은 교육에 내재하며, 교육이 이러한 내재적인 가치와 목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될 때, 사람들이 기대하는 세속계적인 결과나 효과도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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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볼 뿐이다.
교육본위론이 교육에 내재하는 가치와 목적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교과의 내재적 가치를 떠올릴 가능성이 있다. 교육학 논의에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과의 내재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본위론의 관점에서 보면, 교과의 내재적 가치란 수도계적인 가치에 해당되는 것이다. 흔히 교과라는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은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이며, 이것들이 추구하는 진, 선, 미 등의 가치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아니라 수도계의 가치일 뿐이다. 수도계의 가치는 품위가 향상될수록 고양되기 마련이며, 수도계 종사자들은 최정상의 품위를 놓고 경합한다.
반면에 교육의 가치는 결과로서 도달하는 품위의 높낮이와는 무관하게 수도계의 어떤 품위를 소재로 삼아 이루어지든 동등하게 체험될 수 있다. 품위의 높이와는 무관하게 교육 활동이 앞에서 소개한 교육의 수레바퀴 모형에 맞도록 진행되면, 교육의 가치는 고양되는 것이다. 더욱이 정상의 자리를 놓고 경합하는 수도계에서 잠재적인 경쟁자에게 자신의 품위를 전해준다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지만, 교육계에서는 하화를 통하여 후진을 향상시켜 종국에는 후진이 하화자의 품위를 넘어서도록 하는 것이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칭송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Daedalus) 이야기는 수도계가 추구하는 가치와 교육계가 추구하는 가치가 그 방향과 생리를 달리하는 것임을 짐작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이달로스는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자손이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발명하고 만드는 데에 특히 재주가 있었다. 인간을 각별히 사랑하여 그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전수해 주던 여신(女神) 아테네는 다이달로스를 제자로 받아들여 각종의 기술을 가르쳤다. 다이달로스는 아테네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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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배운 것들을 활용하여 도끼나 송곳, 자 등과 같은 많은 연장들을 발명하였고, 위대한 건축물을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다이달로스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되는 뛰어난 조각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장인(匠人)이자 조각가로 성장하였으며, 훗날 소크라테스조차 대화편에서 그가 만든 조각상(彫刻像)은 마치 살아 있는 것과도 같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다이달로스는 자신의 재능에 엄청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조카인 페르딕스가 다이달로스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으며 그는 이를 받아들여 조카를 가르쳤다. 페르딕스 역시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아서인지 재능이 있었으며, 무엇인가를 배우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는 해변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물고기의 등뼈에서 착안하여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톱을 발명하였다. 또한 페르딕스는 두 개의 막대를 이어 붙여 한쪽에는 못을 박고 반대쪽은 뾰족하게 만든 뒤에 막대를 벌려서 원을 그리는 컴퍼스(compass)를 발명하였다. 페르딕스의 재능에 놀란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였다. 어떤 이는 그의 재능이 스승 다이달로스를 넘어선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다이달로스는 자신과 어깨를 겨룰 자가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더욱이 그 자가 자신이 가르친 조카 페르딕스라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분노했다. 그는 어느 날 조카 페르딕스를 높은 탑으로 데리고 가 탑의 창문 아래를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페르딕스가 몸을 숙이는 순간 그를 창문 너머 아테네 광장 위로 떨어뜨려 죽이고 말았다. (각주 12: 이 이야기는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의 Metamorphoses(이윤기 역, 『변신이야기』, 서울: 민음사)와 토마스 벌핀치(Thomas Bulfinch)의 Myths of Greece and Rome(이윤기 역,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서울: 대원사)에 나오는 다이달로스 이야기를 관련 자료들을 중심으로 각색한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수도계 본위로 해석할 수도 있고, 교육계 본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먼저 수도계 본위로 해석하면, 다이달로스는 특정한 수도계의 최정상 품위를 점유하고 있는 대가이며, 조카 페르딕스는 다이달로스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는 수도계상의 경쟁자이다.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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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는 최고의 품위를 지향하는 세계이다. 최고의 품위가 해당 수도계의 가치를 대변하며, 이를 제외한 나머지 품위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다이달로스에게 최고의 자리를 제외하면, 그 어떤 것도 가치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수도계의 경쟁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품위를 전해준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렵다. 전해주기는커녕 빼앗기지 않도록 숨겨야 한다. 다이달로스는 이 점에서 일생일대의 실수를 범했다. 그는 조카 페르딕스에게 자신의 품위를 전수함으로써 최고의 자리를 놓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반면에 이 동일한 이야기를 교육계 본위로 해석하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신 아테네는 다이달로스를 상대로 자신에게 한 번 배워 볼 것을 청한다(請學). 다이달로스는 아테네로부터 배워 자신의 품위를 부단히 향상시키며 이윽고 최고의 품위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최고의 품위는 하나의 결과일 뿐, 다이달로스에게는 그가 소질이 있는 수도계에서 자신의 품위를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소망스러운 체험이다. 최고의 품위를 목표로 한다면, 그 과정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미건조할 것이며, 아마 다이달로스는 중간에 수도계에서 이탈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조차 페르딕스가 찾아와 다이달로스에게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請敎). 다이달로스는 이를 받아들여 하화하고, 페르딕스는 상구한다. 그들은 교육의 수레바퀴 모형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교육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페르딕스가 최고의 품위 부근까지 향상한 것을 보면, 다이달로스와 페르딕스는 각자 충실히 하화하고 상구한 것이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 하화의 내재적 가치와 상구의 내재적 가치를 체험한 것이 확실하다. 하화에 몰입하여 그 가치에 빠지지 않고서야 다이달로스가 자신의 작품은 하나도 만들지 못하면서까지 페르딕스의 상구를 돕는 데에 그렇게 매진할 이유가 없다. 상구에 몰입하여 그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페르딕스가 이탈하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높은 다이달로스의 품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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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나아가는 그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
교육본위론에서 상구나 하화의 가치로 이야기하는 것은 실상 수도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수도계의 가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교육의 내재적 가치로 거론하고 있는 것은 수도계와 관련하여 수도계 내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교육계는 수도계의 품위를 소재로 삼아 수도계와 공생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지금 막 거론한 반론은 순수하게 수도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육계의 도움을 받아 발전하고 있는 수도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서는 수도계의 가치와 교육계의 가치가 분리되지 못한 채, 후자가 전자로 환원되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수도계는 필요한 모든 단계들을 충실히 거치면서도 종국에는 최고의 품위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를 지향하는 세계이며, 이를 둘러싼 경쟁에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다이달로스적인 강박 관념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이다. 반면에 교육계는 최고의 품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품위를 개선하여 새로운 품위로 나아가는 상구 활동을 수행하는 가운데 거기서 비롯되는 보람과 가치를 추구한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기보다는 자신의 품위를 중심으로 후진에게 하화함으로써 청출어람으로 표현되는 가치를 향유하려는 세계이다. 교육본위론이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이질적인 세계들, 즉 수도계와 교육계를 분리하여 인식하고 ,수도계의 가치는 수도계에 돌려주며 교육계의 가치는 교육계에 귀속시키는 일이다.
세속계를 본위로 하면, 교육의 목적은 세속계적인 삶의 장면에서 좋게 평가되는 가치들을 실현하는 것이다. 수도계를 본위로 생각하면, 교육의 목적은 수도계의 최고 품위에 도달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교육계를 본위로 하면, 교육의 수레바퀴로 묘사된 교육의 내재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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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在律)을 충실히 따르면서 교육 활동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다. 수도계적인 성취나 세속계적인 성공은 바로 이러한 교육의 목적이 제대로 실현되었을 경우에 기대할 수 있는 결과에 해당한다. 교육본위론의 입장에서 말하면, 교육의 가치는 상구와 하화의 과정적 활동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교육의 목적은 교육의 내재율에 맞도록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각주 13: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교육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듀이는 ‘교육의 과정은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으며, 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다’(Dewey, 1916a: 54). 또는 ‘성장에는 더 성장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목적이 없는 것처럼, 교육의 경우에도 더 교육받는 것 이외에 교육이 기여해야 되는 목적은 없다’(56)라고 말한다. 이는 교육본위론에서 이야기하는 교육의 목적과 일맥상통하는 견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육의 목적과 가치는 실생활에의 유용성 같은 세속계적인 것에서 구해야 된다고 말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다.)
3) 수도계와 교육의 소재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과 같은 교과가 바로 교육의 내용이며, 교육이 추구하거나 실현해야 할 가치나 목적은 모두 이들 교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아마도 이들은 교과가 바로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수도계에 해당한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교육학에서 마치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이라도 되는 것처럼 통용되고 있는 이른바 ‘교과’(subject matter)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교과서가 교과의 구체적인 대용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때의 교과는 도대체 정체가 불분명한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 교과서가 담고 있는 지식이나 앎이라는 것은 학문이나 예술이나 도덕 등의 세계에서 공인된 이른바 정설(定說)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교과서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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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들이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그 자체도 아닐뿐더러, 이들 세계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최고의 품위가 아닌 그 밑의 품위들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도계의 속성상 최고의 품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설일 수가 없다. 수도계의 최고 품위는 그것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소수일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변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만큼의 정설로 포착되거나 고정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들이 누가 보더라도 타당한 정설이고 정답에 해당한다면, 이는 특정 수도계가 이미 거쳐 지나간 과거의 품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시 이들 과거의 품위들을 정답이나 정설로 보는 것은 과거의 품위들을 지양하고 최고·최신의 품위를 지향하는 수도계의 속성상 용납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보면,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수도계의 최고 품위도 아니고 그것보다 아래의 품위도 아닌 이상한 것이 되어 버린다.
교과서가 교과가 아니라면, 교과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가능한 대답은 학문, 예술, 도덕 등이 바로 교과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답이 없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과를 이야기하다가 은연중에 이 말을 학문이라는 말로 바꾸어 논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교과는 바로 학문, 더 나아가 예술·도덕 등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학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의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학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뜻인가? 교육학에서 학문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마다 거론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브루너(J. S. Bruner)이다. 그에 따르면, 학문은 해당 학문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탐구의 방식과 그 산물로서의 지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학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바로 학문을 학문답게 가르친다는 의미로서 학자들이 수행하는 학문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면서 가르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이홍우, 1993: 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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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er, 1977: 12). 이렇게 보면 그것은 아마도 학문이나 예술이나 도덕 같은 수도계의 최고 품위를 그 성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결국 교과는 수도계의 최고 품위와 그 품위를 통하여 세상을 설명하고 체험하며 행동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교과인가? 교과가 이러한 것이라면, 이른바 교사는 수도계의 최고 품위를 점유하고 있는 자라야 한다. 그런 존재라야만 최고 품위를 최고 품위답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교과를 이렇게 해석하는 교육학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교사는 학문의 최전선에서 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지식을 그 학자들이 다루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자라야 하며, 이 점에서 교사는 곧 학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학생 역시도 최전선에서 학자들이 탐구하고 있는 지식을 바로 학자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존재이다. 이 점에서 가르치는 자는 곧 배우는 자이며, 그들이 하는 일은 성격상 학자들이 하는 일과 동일하다는 것이다(이홍우, 1987: 99-120). 이러한 논의는 실제의 교사가 그러한 위치에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학생들이 그러한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의 여부와도 관계없이 대단히 달콤한 찬사로 들린다. 적어도 논의의 전개 과정에서 논리적인 비약이나 모순도 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교육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공부하고자 하는 많은 교육학도들을 사로잡기도 한다. 이러한 매력적인 논의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를 간과하고 있다. 교육본위론에 따르면, 우리는 특정한 수도계의 어떠한 품위를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품위를 중심으로 그것보다 한 단계 위의 품위를 겨냥하여 상구하며, 그보다 낮은 품위의 점유자인 후진을 대상으로 하화한다. 이러한 교육 활동은 누구나 자신의 품위를 거점으로 전개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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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품위의 높낮이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상구하고 하화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교육적 가치로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런데 교과를 수도계의 최고 품위로 한정하고 가르치는 자를 최고 품위의 점유자로 규정해 버리면, 이는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삶의 형식 가운데 하나인 하화를 우리로부터 박탈해 버리는 셈이 된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의 삶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화의 활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록 매력적이기는 해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교과를 최고 품위로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학습자들이 최고 품위를 학습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도 성립할 수가 없다. 교과란 무엇인지가 확실하지 않기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교과라고 부르려면, 그리고 교과가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교육의 장면으로 끌고 들어와서 교육의 생리에 맞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교육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것으로서 학문, 예술, 도덕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굳이 교과라고 불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이 그 자체로 교과인 것이 아니라, 이를 교육의 활동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보장하는 소재가 될 수 있게 교육의 원리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 교과라야 한다.
교육본위론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교과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상구자의 차선의 품위들과 관련된 것이라야 한다. 브루너가 소망하는 것처럼 수도계의 최고 품위를 직접 겨냥하여 상구하고 하화할 수는 없다. 그러한 시도는 기껏해야 화이트헤드(Whitehead, 1929)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구자에게 그 의미가 불분명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무기력한 관념’(inert idea)을 낳을 뿐이다. 교육본위론에서는 상구자에게 최선의 것이 아니라 차선에 해당하는 것들을 순차적으로 배열하거나, 하화자 입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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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먼 과거에 거쳐온 품위들부터 그의 현재 품위에 이르기까지 역차적으로 계열화함으로써 상구와 하화를 진행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품위의 배열이나 계열화의 형태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과 같은 수도계의 전형적인 모습일 수가 없다. 그것은 수도계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거나 이끄는 데에 활용되는 교육적인 계단일 뿐이며, 그 조직의 방식과 배열이 수도계의 품위가 형성하고 있는 위계의 양상과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또한 그것은 수도계를 대표하는 정상의 품위까지 이어질 수는 있어도 수도계의 정상 품위 그 자체도 아니다. 이처럼 수도계를 교육의 생리에 맞도록 조직하고 배열하는 방식은 수도계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육의 내재율에 따른다. 만약 우리가 교과라는 개념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뜻에서의 교과는 교육의 내용이 아니라 교육의 소재(素材)이다. 흔히 이야기하듯이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을 교과라고 하고, 이 교과가 곧 교육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면, 교육은 학문과 예술과 도덕 등을 모두 포함하는, 너무나도 거대할 뿐만 아니라, 기이하기 그지없는 실체가 되고 말 것이다. 교육의 내용이라고 하면, 내용(內容)이라는 말 그대로 교육의 경계 안에 들어 와 있는 무엇을 지칭하며, 그 무엇은 다른 것이 아니라 상구와 하화의 활동들이다. 교육적으로 계열화된 수도계의 품위들은 상구자의 품위를 고려하여 상구자 자신이나 하화자가 선택한 교육의 소재이며, 이러한 소재에 상구와 하화라는 교육의 활동이 결합하는 것이다.
물론 교육의 소재를 선택하는 데에는 상구자의 품위 수준뿐만이 아니라, 그의 소질과 적성도 고려해야 된다. 전자가 교육을 위하여 수도계의 품위 수준을 선택하는 데에 작용한다면, 후자는 수도계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에 기준으로 작용한다. 상구자의 품위와 어울리지 않는 수준의 품위는 그의 상구를 유발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구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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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질과 어긋나는 수도계 역시 그의 상구를 가로막는다. 상구자의 소질과 부합하는 수도계이면서, 그 수도계에서 선구자가 점유하고 있는 현재의 품위에 대하여 차선에 해당하는 품위가 상구의 활동을 유발하는 힘을 지닌 교육적인 소재일 수 있다.
4) 교육의 활동과 메타교육
교육은 활동의 세계이다. 그 대체적인 양상은 앞에서 교육의 수레바퀴를 통하여 소개하였다. 물론 이는 교육의 활동에 대한 하나의 완결된 논의일 수는 없다. 교육을 형성하는 세세한 활동들이 더 탐구되고 그것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양상들이 더 자세하게 해명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육계도 다른 세계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어서 이를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이론으로 포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교육이 발전하는 세계라는 점은 그동안 우리가 주목해 오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교육이 성립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대개의 경우 교육은 학문이나 예술 또는 도덕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이를 흔히 교과교육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여기서 소개된 교육본위론도 수도계의 품위를 소재로 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의 형태를 상정하고 교육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교육은 수도계와 마찬가지로 발전하는 세계이며, 그 발전의 양상은 교육을 구성하는 활동들이 더욱 더 세분화되고 새로운 활동들이 추가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활동의 구조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 단계의 교육의 활동은 그것을 지양하는 새로운 교육의 활동으로 대치되며, 이들 간에는 질적이며 구조적인 간극이 형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도 수도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교육의 활동들도 발전하면서 그 때마다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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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품위를 끊임없이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수도계의 품위가 있고 위계가 있듯이 교육계에도 교육의 품위가 있고 위계가 있다. 초급교육으로 지칭할 수 있는 낮은 품위의 교육도 있고, 고급교육으로 불러야 할 높은 품위의 교육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교육은 품위를 소재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당장 우리는 수도계의 품위를 소재로 하는 교육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계의 품위를 소재로 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을 생각할 수도 있다. 교육본위론에서는 이를 ‘메타교육’(meta education)이라 부른다.
메타교육은 한마디로 말하면, 교육에 대한 교육 또는 교육을 소재로 하여 전개되는 교육이다. 그것은 네 가지의 복잡한 양태를 취한다. ‘상구에 대한 상구’, ‘상구에 대한 하화’, ‘하화에 대한 상구’, ‘하화에 대한 하화’가 바로 그것이다. 상구계는 여러 가지 요소적인 활동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구의 내재율에 맞도록 진행될 경우, 상구자에게 그가 헌신할 만한 내재적 가치를 제공한다. 그런데 상구는 하나의 양태로 고착되어 있는 정태적인 활동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활동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가,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고 몇몇 낡은 요소들이 배제되는 가운데, 기존의 요소들과 새로운 요소들이 상호작용하여 이전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활동으로 변모한다. 이것이 상구계의 발전이며, 이 과정에서 질적으로 상이한 상구의 품위들이 생성된다. 우리는 다양한 소재를 통해 상구 활동을 전개하다가 자신의 상구 활동에 어떠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상구의 과정 전반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을 진행할 수가 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상구의 동기, 그러한 동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원한 상구의 요소적인 활동들, 그리고 그 요소적인 활동들의 유기적인 결합의 양상 등을 반성적으로 점검하면서 문제가 있는 부분들을 고쳐나갈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상구 활동은 좀 더 고급의 것으로 발전하며, 이것은 새로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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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품위를 낳는다.
상구자들은 동일한 품위의 상구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품위의 상구 활동을 수행한다. 상구계의 내재율에 맞도록 자신의 상구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요한 요소적인 활동을 결여하고 있거나 요소적인 활동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전체적인 상구의 활동에 부족함과 부조화를 초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 간에 서로의 상구 품위를 소재로 하여 상구에 대하여 상구하고 하화하는 삶이 가능하다. 고귀한 상구의 가치를 체험하려면, 상구의 품위가 높아야 한다. 상구의 품위가 낮은 사람은 한 단계 높은 상구의 품위를 습득하기 위하여 상구를 전개하며, 반대로 상구의 품위가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화를 전개할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수도계의 품위를 소재로 하여 상구하고 하화하는 가운데 그러한 것처럼 상구계의 품위를 소재로 삼아 상구하고 하화함으로써 교육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상구계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들은 거의 그대로 하화계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하화계도 발전하는 세계로서 그 도상(途上)에 질적으로 상이한 하화의 품위들을 낳는다. 하화는 그것에 고유한 하화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인간이 추구하고 소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상구가 그러하듯이 고귀한 하화의 가치는 높은 하화의 품위를 요구한다. 하화의 품위가 낮은 사람은 한 단계 높은 하화의 품위를 소재로 하여 상구에 착수하고, 높은 하화의 품위를 지닌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후진으로 삼아 하화를 진행한다. 그들도 하화계를 소재로 삼아 교육의 내재율에 맞도록 상구하고 하화함으로써 교육계의 발전에 참여한다.
메타교육은 교육을 통하여 교육을 개선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교육의 발전을 가져오는 한 가지 길이다(신기현, 2002; 장상호, 1997b, 2003). 흔히 교육의 발전을 학교 체제에 대한 행·재정적인 지원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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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거나 학교에 관련된 제도 등을 혁신함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파악한다. ‘공교육의 내실화’나 ‘학교교육의 정상화’ 등과 같은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들은 교육 발전의 조건일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가 교육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지원을 강화하고 제도를 혁신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상구하고 하화하는 자들의 교육적인 품위가 낮아서 저급의 상구와 하화를 수행한다면, 그것은 고급의 교육이 아니라 저급의 교육을 가져올 뿐이다. (각주 14: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이라는 표현 또는 초급교육, 중급교육, 고급교육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면, 그것은 여기에 사용되어야 한다. 어떤 학교의 체제에서든 ‘그곳이 초등학교인가, 중·고등학교인가, 아니면 대학교인가’와는 무관하게 상구와 하화의 품위가 낮은 교육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초급교육이며, 중간 수준이면 중급교육, 높은 수준이면 고급교육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이들 용어들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그러한 관행적인 사고로부터 내실 있는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적인 조치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 교육평가의 본질과 기능
우리 사회가 교육에 대하여 보이는 지대한 관심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바로 교육평가이다. 해마다 수학능력시험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렵게 출제되어도 문제이고 쉽게 출제되어도 문제이다. 잡음을 줄이려고 ‘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를 국가가 주관하여 출제하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왜 이처럼 교육평가에 목을 매고 있는가? 교육열이 높은 사회인만큼 우리의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문제점이 있다면 이를 찾아 개선함으로써 더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마음에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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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관련하여 솔직하고도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교육을 위하는 마음이나 교육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명문대학으로의 진학 또는 사회적인 선발, 더 정확하게는 제한된 사회·경제적 지위를 놓고 경쟁적으로 이를 차지하기 위한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다. 가장 좋은 교육평가는 자기 자녀의 진학에 유리하고, 실제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평가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도대체 교육평가일 수가 없다. 실제로 이루어진 교육 활동의 질과 수준을 재는 것이 교육평가라면, 지금 현재 우리의 교육평가는 제한된 사회·경제적 지위를 차지할 만한 태도를 지니고 이에 필요한 갖가지 노력을 경주했는가를 재는 세속계적 삶의 자격 평가이다.
현재의 교육평가는, 교육 활동의 질을 재고 문제점을 개선한다는 평가의 근본적인 취지를 훼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이 아닌 다른 것을 재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의 본질을 크게 왜곡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교육평가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습득한 교과지식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학업 성취도를 측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무리 좋게 본다고 하더라도, 교육이 아닌 수도계의 품위를 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던 것처럼 교육은 그 결과로서 특정한 수도계의 품위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교육은 아니다. 교육은 하나의 품위에서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품위로 나아가고 이끄는 것과 관련된 과정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결과로서 수도계의 특정한 품위를 가져오지만, 그 품위의 높낮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높은 품위에 도달했다고 해서 과정적인 활동으로서의 교육이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결과상 낮은 품위에 도달하는 데에 그쳤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교육본위론의 입장에서 보면, 교육평가란 말 그대로 교육을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을 평가한다는 것은 교육을 통하여 도달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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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잰다는 뜻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 그 자체를 평가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간과하고 학업 성취도를 재는 것을 교육평가라고 보면, 교육평가가 교육을 추방하는 불상사가 초래된다.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데에는 교육보다 훈련, 암기, 주입, 세뇌, 외양만을 꾸미는 연극(show), 강제, 순응, 인독트리네이션 등이 훨씬 효과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학업 성취도에 집착하는 교사,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은 현재 학교에서 상구하고 하화하는 활동에 힘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아닌 활동들에 몰두하고 있다. (각주 15: 학교에서 배우는 특정한 교과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질문을 하는 학생에게 ‘모르면 외우기라도 해라’라는 식으로 답변하는 교사가 있다고 한다. 또한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필요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교사에게 ‘그것이 시험에 나오나요? 진도 나가지요’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학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암기나 주입 또는 강제와 순응일 뿐이다.) 이로 인하여 교육이 교육 아닌 것들에 밀려날 뿐만 아니라, 교육을 밀어낸 교육 아닌 활동들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생겨난다. 자신들이 교육을 내쫓고 교육 아닌 활동들에 매달리고 있으면서 다시 그 활동들을 가리켜 ‘잘못된 교육’, ‘병든 교육’, ‘질식할 것만 같은 입시교육’이라고 불평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체계적인 오해 속에서 교육의 내재적 가치라든가, 교육이 보람 있는 삶의 하나로 성립할 가능성에 대한 논의 등은 아예 들어설 여지도 확보하지 못한다.
물론 단순한 학업 성취도가 아니라 학생들이 수행하는 학습 활동의 과정적인 양상을 측정하자는 뜻에서 이른바 ‘수행평가’(遂行評價, performance assessment)가 도입되어 시행되기도 한다(백순근, 2000). 이는 교육본위론적으로 해석하면, 결과가 아닌 과정을 평가하는 것으로서 교육평가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수행평가는 교육의 과정을 평가하고 개선함으로써 양질의 교육에서 누릴 수 있는 가치와 보람을 향유하게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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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는 거리가 멀게 운영되고 있다. 오히려 이전에는 한 단위의 수업이 종료되면 시행하던 결과상의 성취도 평가를 수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게 쪼개어 매 순간 시행한다는 악순환이 초래되고 있다. 학업 성취도 평가가 그 근본에서는 변화하지 않은 채, 일회(一回) 시행에서 다회(多回) 시행으로 변화된 것뿐이다.
교육본위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교육을 도모한다면, 교육평가는 현재와 같은 모습에서 크게 탈피해야 된다. 새로운 교육평가의 전체적인 양상을 계속 연구될 문제이지만, 지금 현재로서도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첫째로, 교육평가는 상구와 하화 활동의 전체적인 양상이 교육의 내재율에 맞게 이루어지는지를 반성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함으로써 좀 더 높은 품위의 상구와 하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야 한다. 이러한 교육평가 속에서는 훈련, 암기, 주입, 세뇌, 연극, 강제, 순응, 인독트리네이션 등이 교육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이러한 활동들은 상구와 하화의 활동 속으로 포섭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구와 하화의 내재율에 맞도록 수행될 수도 없다. 새로운 교육평가는 교육 아닌 활동들을 찾아내어 교육의 바깥으로 추방함으로써 교육의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교육평가라면 저급의 교육과 고급의 교육을 감별할 뿐만 아니라,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을 감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새로운 교육평가는 상구자와 하화자가 스스로 자신들의 활동을 평가하고 개선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데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교육평가를 외부의 전문가가 교사나 학생의 교육 활동을 평가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새로운 교육평가는 이를 지양해야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수행하는 활동의 주체이며, 그 활동의 원활한 진행여부를 누구보다도 제대로 감식할 수 있는 당사자이다. 교육평가는 상구자와 하화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육 활동을 반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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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문제점을 발견하며 이를 해소하는 방식 등과 관련하여 평가의 기준과 안목, 평가의 결과를 교육에 반영하는 능력 등을 길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교육평가를 생각할 때, 이 과정에는 앞에서 논의했던 메타교육이 필수적인 것으로 수반된다.
현재의 교육평가는 학습자는 물론이고 교사와 학부모 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이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일들이 간혹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평가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교육의 과정을 평가하여 이를 개선함으로써 좀 더 보람 있는 교육의 활동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평가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상구자나 하화자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육 활동을 개선하여 좀 더 높은 수준에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환대(歡待)를 받을 수도 있다.
6) 학교의 교육 독점과 교육 아마추어리즘
하나의 제도로서 학교가 설립된 데에는 다양한 동기들이 작용하고 있다. 학교가 오직 교육적인 동기에 힘입어 성립되고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동기나 경제적인 고려, 사회적인 이유 등 수많은 것들이 개입한다. 그렇기는 해도 학교는 교육을 위한 제도이고, 교육과 관련하여 수많은 공헌을 해 왔다. 이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학교가 출현하여 교육기관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도 생겨났다.
학교가 초래한 부작용 가운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학교가 교육을 독점(獨占)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 된다. 학교를 떠나고 싶어도 그럴 경우에는 자신이나 자녀의 교육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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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 학생으로 등록해야만 안도할 수 있다. 학교를 벗어나서는 교육적인 지원을 받을 도리가 없다.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않은 곳에서는 교육이 금지된다. 현실적으로 학교 밖에서 자신의 교육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가 없다. 그만큼 학교는 교육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를 남겨 놓지 않고 있다.
학교 밖에서 제 아무리 노력하여 높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기능을 익혀도 이는 학력(學歷)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반면에 학교에 등록하여 졸업장이나 수료증 등을 받기만 하면, 설사 제대로 학습 활동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남에게 전해줄 만한 나름대로의 앎을 지니고 있어도 자격증이 없으면 가르치는 일을 수행할 수가 없다. 경우에 따라서 이는 법적인 제재를 받기도 한다. 교육의 활동은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교육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만큼 학교는 교육과 관련하여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교사 집단이 생겨나고 자격증으로 무장한 이들 교사들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활동을 전문직의 소임으로 정착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들만이 잘 가르칠 수 있고, 또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교육 독점에 해당한다. 학생은 그가 실제로 학습을 하고 있는 가와는 무관하게 학습과 관련된 모든 것을 독차지한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자격도 거의 전부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학습을 장려하고 지원하기 위한 각종의 보조금이나 시설 및 자원 등도 학교에 등록한 학생들의 몫이다.
이처럼 학교와 교사 또는 학생들은 교육을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일로 고착시키고, 각종의 수혜를 독차지하려고 든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교육의 활동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거나 교육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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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와 보람을 만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교육으로 간주하다 보니 교사의 설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적어서 기억하였다가 재생하는 활동이 곧 배우는 일이고, 교과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판서(板書)하고 설명하는 활동이 바로 가르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활동이 지니고 있던 능동성, 적극성, 몰입, 흥미, 열정 등은 사라져 버리고 수동성, 무관심, 언어적인 전달과 암송 등이 교육의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교육본위론에 따르면, 교육은 보편적인 인간적 삶의 양식으로서 그것 나름의 가치를 내장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품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는 상구하고 아래로는 하화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교육적인 삶의 보람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교육이란 원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교교육은 이러한 모습에서 너무도 멀어지고 있다. 이는 학교가 교육을 자신의 전문적인 소관 사항으로 독점하므로 인하여 벌어진 현상이다. 이를 개선하려면 원래의 교육이 지니고 있는 생리에 맞도록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교육에 필요한 것은 프로페셔널리즘이 아니라 아마추어리즘이다.
아마추어(amateur)란 흔히 체육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그것을 본업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과 대립되는 용어로 사용된다. 체육이나 스포츠를 하나의 취미로서 사랑하고 즐기는 자가 곧 아마추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아마추어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amator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체육이나 스포츠와 관련해서 사용해야 되는 용어는 아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어떠한 활동을 그 자체로 좋아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 이른바 '애호가'(愛好家)가 곧 아마추어이다. 지금 교육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들 아마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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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그러한 사람들의 교육적인 삶의 기본 자체이며 태도인 교육 아마추어리즘이다.
교육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교육 애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육은 일종의 고역(苦役)과도 같은 것이지만, 이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보상이나 지위, 명예 등을 위하여 참고 견뎌야 한다는 우리의 흔한 생각에 비추어 보면, 교육 애호가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일이 어찌 염증날 수가 있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어찌 권태로울 수가 있겠는가’(學而不厭 誨人不倦)라는 교육적인 삶에 대한 공자의 고백이 남아 있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上求菩提 下化衆生)에 평생을 헌신한 석가의 행적이 있다. 모르고 있던 것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를 사로잡는 ‘발견의 열정’(heuristic passion)을 담고 있으며,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설득의 열정’(persuasive passion)을 제공한다는 체험적 주장도 발견할 수 있다(Polanyi, 1958). 이러한 단편들 속에서 우리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감응하고 있는 교육 애호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결코 몇몇 뛰어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새롭고 기이한 것을 만나면 그 옆을 떠나지 못한 채 어른들에게 성가실 정도로 질문을 퍼붓고, 자신이 최선을 다한 조그마한 성취에도 흡족해하고 내심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어린 아이 속에도 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살아 숨쉬고 있다. 문제는 교육의 보람과 가치가 있고 평생을 걸고 추구할 만한 교육적인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각하거나 체험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있다.
아마추어로서 교육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교육 아마추어리즘은 우리가 교육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이에 맞추어 교육의 활동을 전개하면 누구에게나 그의 것이 될 수 있다. 교육본위론을 통해 보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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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새로운 교육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품위를 거점으로 하여 한 단계 높은 품위를 추구하는 상구의 활동을 전개하고, 자신보다 낮은 품위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하화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교육의 활동을 교육의 내재율에 맞도록 수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교육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보람과 흥취를 체험하고 이에 헌신하는 교육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5. 초등교육의 재서술
교육본위론에 대한 소개를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초등교육을 새롭게 재개념화하는 일’과 ‘교육학의 속사정을 논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서 교육본위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초등교육의 정체에 대하여 현재 별다른 이해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속사정은 물론이고 심한 경우에 초등교육을 오해하고 있는 형편도 현존하는 교육학의 지식들이나 관점들로부터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해소하고 새로운 초등교육을 모색하는 일은 교육본위론의 문제의식이나 교육본위론의 이론적인 내용들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교육학을 넘어서기 위하여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교육의 이론이 교육본위론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全無)하다는 점에서 이는 불가피한 조치이다.
지금부터 여기서 시도하려는 것은 교육본위론의 관점에서 초등교육이 어떠한 형태의 교육일 수 있는지를 가능한 만큼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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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본위론의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교육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에 문제가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그 용어의 의미를 아무렇게나 짐작해서는 안 된다. 의미를 알기가 어려울 때에는 바로 앞에서 소개한 교육본위론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가능한 만큼 소개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앞에서 소개한 교육본위론만 가지고는 여전히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교육본위론의 원래 저자인 장상호 교수의 논문과 저작들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초등교육과 일차교육
우리가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제도교육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유입된 서구의 교육 제도이다. 우리는 그러한 제도교육의 단계들을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 용어들은 서구의 제도교육을 통하여 유입된 서로 구분이 가능한 교육들을 지칭하는 서구의 용어들을 우리 나름대로 옮긴 번역어들이다. 번역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서구식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해야 된다. 그리고 그 번역의 충실성 여부는 원래 서구 용어가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살아나는가에 비추어 결정된다. 그렇다면 초등교육은 무엇의 번역어인가?
초등교육은 primary education의 번역어이다. 이와 연결되는 서구식 용어는 secondary education과 tertiary education이다. 물론 초등교육을 elementary education의 번역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higher education과 짝을 이룰 뿐, 우리말의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표현을 지니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elementary education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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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er education이라는 표현은 교육의 소재에 해당하는 특정한 수도계의 품위와 교육의 품위를 혼동하고 있다. 높은 수준의 품위를 소재로 삼아 교육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higher education이라고, 즉 교육의 품위가 높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elementary education이나 higher education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찾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의 원래 서구식 표현으로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primary education은 물론이고 secondary education이나 tertiary education을 초등교육, 중등교육 그리고 고등교육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이들 표현들은 교육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할 때, 선행되는 교육과 그것을 뒤따르는 교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 자체 속에 교육이 초급이라거나 중급이라는, 또는 고급이라는 식의 뉘앙스는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점에서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은 국적 불명의 오역(誤譯)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용어들은 그 교육에서 다루는 교육의 소재가 지니는 품위를 기준으로 교육의 품위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하여 각급 제도교육을 생각하는 데에 있어 건전한 착상을 오도(誤導)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처럼 득보다는 실이 많은 개념이라고 하면, 우리가 그것을 견지해야 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primary education, secondary education, tertiary education을 무엇으로 바꾸어 불러야 하는가? 이들 용어들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번역이 안 되는 경우에는 원래의 용어를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프라이머리 에듀케이션’, ‘세컨더리 에듀케이션’, ‘터씨어리 에듀케이션’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어색할 뿐만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굳이 번역을 해야 한다면, 이를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도록, 각각 ‘일차교육’, ‘이차교육’, ‘삼차교육’이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조심해야 될 것은 일차교육, 이차교육, 삼차교육이라는 표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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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이차교육이나 삼차교육은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교육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교육은 그 나름으로 다 소중한 교육이다. 이러한 점은 여기서 누누이 강조한 바 있으며,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차교육, 이차교육, 삼차교육이라는 말을 중요도의 순서로 보기보다는 교육이 순차적으로(progressively)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러한 순차적인 흐름 속에서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선행하고 후행하는 교육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 이외에 어떠한 다른 의미를 첨가하려는 것은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이라는 표현의 경우만큼이나 교육의 본질을 흐려 놓을 우려가 있다. 우리는 이를 특히 경계해야 된다. 이들 표현들은 듀이가 아래에서부터, 또는 아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교육의 형태를 그려나가려고 시도하면서 이야기한 순차적 교육(progressive education)이나 교육본위론에서 상구의 활동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면서 그에 맞도록 품위의 단계적 배열을 논하는 장면과 관련지어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차라리 적절하다. 물론 이것보다 더 적합한 번역어가 있다면, 이들 표현들을 언제나 그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 이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이라는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그릇된 이미지를 피하기 위한 조치일 뿐이다.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을 각각 일차교육, 이차교육, 삼차교육으로 바꾸어 부른다면, 일관성을 기하기 위하여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도 일차학교, 이차학교, 삼차학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물론 이 표현도 잠정적인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가 고쳐야 할 언어적인 관행이 있다. 그것은 교사와 학생에 대한 것이다. 교육본위론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교사(敎師)와 하화자(下化者)는 엄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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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곧 하화자는 아니다. 물론 교사도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하화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교사가 수행하는 활동은 하화만이 아니다. 그는 성인으로서 학습자들을 보호해야 되는 소임도 지니고 있고, 공직자로서 수행해야 되는 각종의 행정 사무도 지니고 있으며, 학급의 경영자로서 맡아야 하는 관리의 업무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의 소임도 있고, 생활지도와 선도의 업무도 담당하며, 학교 운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맡거나 협조해야 될 소임도 있다. 이 밖에도 교사의 업무는 이루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교사가 수행해야 될 일들이 너무도 많다는 하소연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다양한 일들을 모두 수행해야 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하화 활동을 희생하고라도 이들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교사라고 하면, 교사는 곧 하화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교사라는 개념은 학교라는 제도와 관련된 것일 수는 있어도 교육과 관련된 개념일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과감하게 교사라는 용어를 버리고 하화자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교사가 teacher라면, 그는 이 표현에 맞도록 ‘teaching’에만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본위론의 개념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그는 하화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일들은 하화자로서의 교사의 소임이 아니다. 학교와 관련된 다른 일들은 가능한 한 이것을 맡아서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넘기는 것이 좋다. 학교가 교육을 위한 곳이라면, 그리고 그 속에서 교사가 하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조치이고 너무도 당연한 요구이다. 교사를 하화자로 바꾸고 그 소임도 하화의 수행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 연후에는 초등교사, 중등교사, 대학교수라는 표현을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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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하화자, 이차하화자, 삼차하화자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學生)이라는 표현은 영어 student의 번역어이다. Student는 ‘열망’과 ‘헌신’을 뜻하는 라틴어 studium 또는 그것의 형용사인 studionsus에서 파생된 말로 ‘학습을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말이 학교라는 제도와 관련된 것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갖고 있던 의미는 거의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이제 학생이라는 말은 학교에 등록하고 있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설사 학습을 사랑하기는커녕 학습의 활동을 조금도 수행하고 있지 않아도, 학교에 적(籍)을 두고 있으면, 그는 엄연히 학생이다. 반면에 학습을 사랑하고 이에 헌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학교에 등록하고 있지 않으면 그는 학생이 아니다. 학생이라는 말은 교육에의 참여와 헌신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학교라는 제도 속으로의 공식적인 참여라는 차원에서 사용되는 말로 의미가 완전히 변질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학생이라는 말은 더 커다란 의미의 변화를 겪었다. 학교에 등록하여 다니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고 있을 나이로 짐작되면서 아직 아저씨나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는 이른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총각이나 아가씨로 부르기도 어색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바로 학생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학생이라는 용어는 교육학의 개념도 아니고 교육의 토착적인 용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학교와 관련된 말도 아니다.
학생이라는 용어 대신에 학습자라는 표현의 사용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습이라는 말은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가운데 외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종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흘리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학습이며, 교사의 언어적인 설명을 수용한 뒤에 외부의 요구나 자극이 있을 때에 이를 재생해 내는 것이 학습이다. 그것은 습관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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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나 행동의 변화, 상징의 기억 등을 의미한다. 이는 심리학적인 개념일 수는 있어도 교육학의 개념일 수는 없다. 학습이라는 말은 교육과 관련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현재의 우리가 비록 막연하게나마 배움이라는 말로 떠올리려는 활동조차도 지칭하지 못한다.
교육본위론에 따르면, 학생이나 학습자라는 표현은 상구자(上求者)라는 개념으로 변경되어야 한다. 이것이 일상어로서의 학생이나 심리학의 개념인 학습자를 대신하는 교육학의 개념이다. 상구자는 그가 습득하는 품위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품위에서 다음 품위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과정적 활동인 상구의 활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구의 활동을 상구의 내재율에 맞도록 조율하면서 제대로 수행하는 자가, 굳이 이야기하자면, 고등상구자(高等上求者) 또는 고급상구자(高級上求者)이다. 물론 이를 제대로 못하는 자가 바로 초등상구자(初等上求者)이며, 초급상구자(初級上求者)이다. 이것이 교육의 소재가 갖는 수준을 근거로 초등학생, 중등학생, 고등학생을 가르는 편법보다는 훨씬 교육적이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초등학생, 중등학생, 대학생이라는 현재의 표현을 일차상구자, 이차상구자, 삼차상구자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이처럼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일차교육, 일차학교, 일차하화자, 일차상구자 등과 같은 개념들을 제안하는 것은 이들 개념들이 실제 제도교육의 장면에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제도교육의 현장에서 어떠한 용어나 개념들을 사용할 것인지가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닐 뿐만 아니라, 이는 제도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현장 종사자들이 결정할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제안하는 개념들은 제도교육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그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론적인 개념들이다. 이를 통하여 제도교육의 실천을 개선하거나 혁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이들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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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개념들이 실제로 제도교육을 실천하거나 개선하는 데에 유용하지 않다거나 번거롭다고 해서 그릇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천의 장면에는 그 장면에 맞는 용어가 있을 수 있으며, 실천을 대상으로 삼아 전개되는 이론적인 장면에는 이에 맞는 용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도교육을 대상으로 교육학적인 사고를 전개하고 이론적인 논의를 하는 경우에는 제도교육의 실천과 관련된 현장의 용어들이 아니라 그에 적절한 이론적인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용어들이나 제도적인 개념들을 갖고 교육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사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차교육, 일차학교, 일차하화자, 일차상구자 등과 같은 개념들은 제도교육에 대한 이론적인 사고와 논의를 위한 것들이며, 그 의의는 바로 여기서 확보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제도교육의 실천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실천 장면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개념들로 정착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이론적인 의의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2) 일차교육의 소임
일차교육, 이차교육, 삼차교육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교육의 단계들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구분이 가능한 세 가지 교육의 양상들을 이론적으로 상정하는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이 의미를 지니려면, 이들 세 가지 교육의 양상들이 각기 어떠한 것이며, 이들이 서로 관련을 맺어 공조 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순차적인 교육을 창출하는지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들 개념들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제도교육을 형성하는 첫 단계의 교육인 일차교육은 어떠한 교육인가? ‘초등교육의 개념’이라는 장(章)에서도 설명했듯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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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교육은 ‘메타교육’과 ‘소질의 탐색’을 중심으로 한다. 외형적으로는 다양한 교육의 소재들을 상구하고 하화하는 ‘소재교육’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 일차교육은 상구에 대하여 상구하고 하화하는 ‘메타교육’의 한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한 일차상구자들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특정한 소재들을 갖고 어떻게 상구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질 그들의 상구 활동이 어떠한 원리에 맞추어 어떠한 요소적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전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앎이다. 물론 이러한 앎은 언어적인 지식의 형태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구 활동을 전개하면서 그 과정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활동을 통하여 습득된다. 다양한 교육의 소재들은 이러한 메타교육을 위한 도구이다. 일차상구자의 맞은 편에서 일차하화자들은 소재의 품위 내용을 전수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를 소재로 하여 이루어지는 상구에 대하여 하화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다. 일차상구자들이 상구에 대하여 상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상구 활동을 살피면서 조언하고 지시하고 처방하며 격려하는 것과 같은 상구에 대한 하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일차하화자들의 소임이다. 물론 이는 일차교육에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의 교육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차교육의 장면에서는 메타교육이 전경이 되고 소재교육은 배경으로 자리 잡으며, 이차교육이나 삼차교육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다른 방식으로 재정립된다.
일차교육이 메타교육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제도교육의 장면에 들어서기 이전에도 누구나 나름대로 상구 활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것은 주체를 사로잡는 매력과 흥미의 원천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나름대로 상구의 내재적 가치를 체험한다. 그런데 제도교육의 장면에 들어서면 이러한 교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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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과 매력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교육이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고역과도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특히 제도교육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일차교육에서부터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그 다음 교육들의 경우에는 그 영향이 더욱 증폭되고 만다. 일차교육의 장면에서 메타교육은 자신의 상구 활동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가운데 문제점을 찾아 개선함으로써 좀 더 높은 품위의 상구를 모색하는 활동이다. 이를 통하여 상구자들은 자신들의 상구 활동으로부터 고유한 보람과 흥취를 느낄 수 있고 이것이 상구의 가치에 해당한다. 제도교육의 첫 단계인 일차교육에서부터 상구자들이 상구의 가치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을 때, 일차교육은 물론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차교육이나 삼차교육도 탄력을 받아 원활히 진행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상구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서의 메타교육은 전체 제도교육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일차교육의 소임은 메타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구자들이 자신들의 소질이나 적성에 맞는 교육의 소재들을 탐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일차교육의 중요한 소임이다.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우리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세계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이들 세계들은 인간이 추구할 만한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를 내장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다양한 세계들을 접하고 이를 소재로 삼아 상구의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나의 주체가 이 모든 세계에 대하여 소질과 적성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으며, 모든 세계에 걸쳐 균등한 품위의 향상을 도모할 수도 없다. 이 점에서 다양한 세계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부합하여 적절한 상구 활동의 소재가 될 만한 세계를 탐색하는 과정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일은 일차교육만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의 교육에서도 진행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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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통하여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소재를 아주 구체적인 수준까지 세밀하게 탐색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상구의 활동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소재들의 커다란 방향성을 확인하는 일은 일차교육의 중요한 소임이다.
다양한 소재들을 접하는 가운데 메타교육을 통하여 상구의 능력을 신장시키고 자신의 소질에 맞는 소재들을 찾는 일을 중심으로 일차교육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이러한 일차교육과의 관계 속에서 이차교육은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전행된다. 이차교육은 일차교육을 통하여 확인된 상구자의 소질과 부합하는 소재들을 중심으로 ‘심화소재교육’(深化素材敎育)을 진행한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이에 투입하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들을 좀 더 높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룬다. 그러나 이차교육이 심화소재교육을 통하여 다룰 수 있는 소재들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심화소재교육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소재들도 상구자에게 교양 수준으로 제공하는 ‘교양소재교육’(敎養素材敎育)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차교육이 수행하는 이러한 소재교육은 일차교육을 통하여 상구자의 소질과 부합하는 소재들의 커다란 윤곽이 확인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소재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일차교육이 메타교육을 통하여 상구자들에게 상구의 역량을 배양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차교육에서도 메타교육은 이루어지지만, 이 경우에는 일차교육과는 달리 심화소재교육과 교양소재교육이 전경이 되고 메타교육은 배경이 되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이차교육이 이렇게 진행될 때, 이와 관련하여 삼차교육의 윤곽이 나타날 수 있다. 삼차교육은 이차교육이 심화의 형태로 제공했던 소재를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수준에서 다루는 전공교육의 형태를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이차교육에서 상구자의 소질을 고려하여 과학이라는 수도계를 심화소재교육의 형태로 다루었다면, 삼차교육에서는 과학 가운데서도 선구자가 더 흥미와 관심을 갖는 분야, 즉 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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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이나 유기화학, 미생물학 등에 주력하는 ‘전공소재교육’(專攻素材敎育)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들 분야를 제외한 과학 분야들은 그 관련성을 고려하여 다른 소재들과 함께 교양소재교육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삼차교육이 가능하려면, 일차교육에서 선구자가 지니고 있는 소질의 대체적인 방향이 확인되고, 이차교육에서 그 방향에 부합하는 소재들을 중심으로 심화소재교육을 수행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전공소재교육의 이면에는, 이차교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타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차교육이든, 이차교육이든, 아니면 삼차교육이든 간에 그것들이 모두 교육인 이상에는 교육이 따라야 하는 교육의 내재율, 예를 들자면,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교육의 수레바퀴를 형성하는 원리들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메타교육이든 소재교육이든 간에 이를 형성하는 상구와 하화의 양상을 동일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들 교육들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차이를 지니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차이는 교육으로서 이들이 지니는 근본적인 동일성에 기반을 둔 차이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공존하기보다는 서로 결합하여 공조 체제를 형성함으로써 하나의 제도교육을 순차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제도교육의 틀 속에서 일차상구자와 일차하화자가 그러한 것처럼 이차상구자나 이차하화자, 그리고 삼차상구자나 삼차하화자가 수행하는 교육 활동의 성격과 양상도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3) 일차교육의 소재와 평가
일차교육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나 기능, 예를 들면 독(讀), 서(書), 산(算)의 지적 기능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는 일차교육을 생각하는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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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흔하게 우리가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며, 동시에 일차교육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편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이러한 지적인 기능이 현대를 살아가는 데에도 가장 기초적인 기능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도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이다. 또한 교육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보는 실용적인 발상은 교육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부작용마저 낳게 된다. 교육의 기능들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교육의 본질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작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마저도 훼손하는 것이다. 더욱이 가장 중요하게는 그러한 일차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일차상구자들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교육의 성격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기초적인 지적 기능을 습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일차상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리도 만무하다.
일차교육을 다음 단계의 이차교육이나 삼차교육을 위한 준비교육으로 보는 관점 역시 넘어설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게 되면, 일차교육은 그 내용과 형식 등 모든 점들이 다음 단계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자체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물론 일차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차교육이나 삼차교육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아마도 이것이 일차교육이 이차교육이나 삼차교육을 위한 준비가 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뜻에서의 준비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그것은 일차교육이 그 나름의 본질을 구현하는 가운데 순리(順理)대로 다음 단계의 교육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야 된다.
일차교육의 소재는 기초적인 삶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이 아니며, 다음 단계의 교육을 받는 데에 필요한 내용들을 쉽게 꾸며 놓은 것으로 규정될 수도 없다.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하였던 것처럼 일차교육은 다양한 교육의 소재들을 활용하여 상구자들의 소질과 적성에 부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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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그러한 종류의 소재들을 찾고, 동시에 어떻게 상구해야 되는지에 대한 상구와 하화로서의 메타교육을 수행한다. 일차교육이 이러한 소임을 수행하는 교육이라고 보면, 그것이 다루는 교육의 소재나 평가의 방식 등과 관련하여 새로운 착상을 시도할 수 있다.
먼저 일차교육의 소재를 특정한 것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으며, 이차교육의 소재를 차용하거나 끌어오는 방식으로 일차교육의 소재를 결정해야 될 이유도 없다. 무엇을 일차교육의 소재로 삼아야 하는지는 일차교육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라야 옳다. 일차교육의 소재는 상구자들이 자신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교육적인 소질과 적성의 방향을 확인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양화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상구의 활동을 향유할 수 있으며,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부합하는 세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육의 세계에는 ‘학습장애’나 ‘학습부진’이라는 말로 지칭되는 현상이 존재할 수가 없다. 특히 일차교육의 경우 선구자가 상구의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거나 그가 다른 상구자들보다 성취의 정도가 미미하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해당 상구자도 나름대로 상구하고 성장할 몫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질이나 적성에 부합하는 교육의 소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빚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고민해야 된다. 다소 강하게 말하면, 일차상구자 모두가 나름대로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그러한 종류의 교육 소재들을 접할 수 있도록 일차교육은 다양한 교육의 소재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일차상구자가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 상구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지 못하다면, 문제의 원인을 선구자가 아닌 하화자에게서 구하여 해소하는 것이 옳다.
또한 일차교육은 상구자들이 자신의 교육적인 소질이나 적성에 부합하는 교육의 소재들을 접하게 되었다고 하는 경우에도 이들 소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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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다양한 내용들을 습득하도록 하는 데에 일차적인 강조점을 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소재들을 다루는 가운데 어떻게 상구해야 하는지를 습득하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일차교육의 중요한 소임 가운데 하나가 메타교육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차교육의 소재는 그 범위를 한정하지 말고 다양화하되, 상구자들이 상구의 내재율에 맞도록 다양한 상구의 활동들을 수행해 볼 수 있도록 조직될 필요가 있다.
흔히 한 단위의 수업을 위하여 교과를 다룰 적에도 교과 내용들 간의 논리적인 일관성을 앞세움으로써 도입 부분부터 결론 부분까지 수미일관(首尾一貫)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방식은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논리적인 구성을 가져올지는 몰라도, 실제 탐구의 과정이나 문제해결의 과정을 담는 데에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일차상구자는 탐구의 결과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문제의 발견에서부터 있을 수 있는 다양한 해결의 방식들을 나름대로 강구하고 이를 실험해보는 과정을 충실히 거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가 습득해야 되는 것은 특정한 품위가 아니라, 하나의 품위에서 다음의 품위로 나아가는 과정을 주재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탐구의 과정을 나름대로 체험하는 가운데 일차상구자는 상구에 대하여 상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문과 같은 수도계의 경우에는 최고의 품위를 중심으로 그것과 양립할 수 있거나 그것에 도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최고의 품위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품위들을 선정하고 조직할 수가 있다. 이는 품위의 학문적인 조직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많은 경우에 언어적인 설명과 논증의 방식이 사용된다. 그러나 학문을 소재로 하는 교육의 경우에는 상구자의 현재의 품위를 거점으로 삼아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과 함께 상구자의 품위로는 포섭할 수 없는 사례들을 함께 조직한다. 선구자가 자신의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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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종의 ‘변칙 사례’(anomaly)에 접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인지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선구자가 지적인 당혹감을 해소하는 데에 필요한 다양한 단서들과 이들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문제해결 활동들이 소개된다. 학문적 조직에서는 품위의 내용을 설명하는 언어가 사용된다면, 교육적 조직에서는 이 장면과 관련하여 ‘무엇 무엇을 해보라’라는 식의 상구 활동을 처방하고 권고하는 언어가 활용된다. 이러한 상구의 활동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품위는 상구자의 원래 품위보다 한 단계 높은 것으로서 그것은 해당 수도계의 최고 품위일 필요가 없으며, 그것마저도 선구자가 새로운 품위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 활용되어야 하는 징검다리나 발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각주 16: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지식관은 흔히 ‘지식은 도구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 때 지식이 도구라는 말은 그것이 실생활에 대한 도구가 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지식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도구가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를 간과할 경우, 프래그머티즘을 실용주의로 해석하게 되지만, 이는 프래그머티즘의 원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듀이의 교육이론은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 일차교육의 소재를 선정하여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이 점에서 이는 일차교육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주제에 해당한다.
일차교육이 상구자들의 소질과 부합하는 소재들을 탐색하고, 이를 통하여 메타교육을 수행하는 소임을 지니고 있다면, 일차교육의 소재 선정과 조직의 방식만이 아니라, 일차교육의 공과(功過)를 평가하는 방식도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 지금 현재 모든 형태의 교육에 통용되고 있는 평가의 방식은 교육의 결과로 이른바 학습자가 도달하거나 습득하게 된 교과의 성취도를 재는 학업 성취도 평가이다. 학습자가 특정한 수준의 성취를 보일 경우,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과정이라 볼 수 있는 교육의 활동이 제대로 수행된 것으로 간주된다. 교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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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는 다양한 형태의 앎이 온전히 전수되고 습득되었는지를 특정한 기법을 동원하여 측정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이러한 학업 성취도 평가가 곧바로 교육의 평가일 수는 없다.
교육본위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현재의 학업 성취도 평가가 재는 것은 교육의 결과로 우리가 습득하거나 도달하게 되는 수도계의 품위일 뿐이다. 물론 교육의 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질 경우, 상구자는 그 결과로 특정한 수준의 품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품위 그 자체는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하나의 품위에서 다음의 품위로 나아가는 활동과 그러한 활동을 조력하는 활동이다. 만약 우리가 교육을 평가해야 된다면, 그것은 교육의 결과인 품위가 아니라 교육의 활동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라야 한다. 교육의 활동이 충실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품위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일 수가 있다. 반대로 교육의 활동이 부실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품위는 높은 것일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품위를 측정한 결과를 가지고 교육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학업 성취도 평가는 특히 현재 우리가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는 일차교육을 위한 것일 수가 없다. 앞에서도 논의한 것처럼 일차교육은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는 가운데 선구자가 자신의 소질에 맞는 소재를 탐색하고, 이 과정에서 상구하는 능력을 상구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일차교육의 장면에서 선구자가 얼마나 높은 품위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맞는 소재를 발굴하여 상구하는 가운데 좀 더 높은 수준의 상구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이다. 일차교육이 이러한 것이라면 현재의 학업 성취도 평가는 일차교육을 위한 것일 수가 없다. 일차교육의 본질적인 측면을 재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측면을 측정하고 있으면서 이를 일차교육의 평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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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차교육의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여기서 확정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렵다. 일차교육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일차교육의 평가 역시 제대로 탐구된 적이 없는 처녀지(處女地)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차교육의 평가가 지향해야 되는 바와 관련하여 현재로서도 이러한 말은 할 수가 있다. 일차교육의 평가는 품위의 수준을 재는 것이 아니라, 품위의 상승을 위하여 선구자가 수행하는 상구 활동 자체의 질을 재는 것이라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차상구자가 상구의 내재율에 부합하도록 상구의 다양한 활동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재는 것이 바로 일차교육의 평가일 수 있다. 이는 일차교육의 본질이 상구에 대한 상구와 하화라는 점에서 자연히 따라 나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일차교육의 평가는 하화자가 수행하는 ‘상구에 대한 하화의 활동’도 평가의 범위 속에 포함한다. 교육이 상구와 하화로 구성되는 것인 이상, 교육의 평가는 상구의 활동뿐만이 아니라, 하화의 활동도 평가하는 것이라야 한다. 현행의 교육평가는 학습자의 학업 성취도 평가를 상구에 대한 평가로 대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업 성취도 수준의 높낮이를 통하여 하화 활동의 충실도를 평가하고 있다. 학습자의 학업 성취도가 높으면 잘 가르친 것이고, 낮으면 못 가르친 것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학업 성취도를 좌우하는 것은 교수 활동의 질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학습 활동의 질, 학습자의 건강 상태, 학급의 분위기, 가정환경과 부모의 관심도, 순간순간의 온갖 우연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잘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다른 요인들에 문제가 있으면 학습자의 학업 성취도는 낮게 나오기 마련이며, 설사 못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다른 요인들이 제대로 작용하면 학습자의 학업 성취도가 높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학업 성취도를 근거로 삼아 교수 활동에 대한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일차교육의 평가는 교육의 결과로 선구자가 도달하게 되는 품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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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을 재는 방식이 아니라, 하화자의 하화 활동과 상구자의 상구 활동이 각기 하화와 상구의 내재율을 충족시키면서 조화를 이루어 전개되는가를 재는 방식이라야 한다. 즉, 교육의 결과 가운데 하나를 재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과정 그 자체를 재는 것이 교육의 평가인 것이다. 그리고 교육을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활동의 문제점을 찾아 이를 개선하는 데에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상구자들끼리, 또는 하화자들끼리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구자와 하화자 각자가 이전에 수행하던 교육 활동과 현재의 교육 활동을 비교하여 재는 방식이 동원된다. 각자가 자신의 이전 상구 활동이나 하화 활동에 비하여 현재의 활동을 교육의 내재율에 맞도록 전개하고 있으면 이는 개선이고 진보로 평가된다. 반면 이전의 활동보다 현재의 활동이 교육의 내재율을 위배하고 있다면, 이는 문제로 진단되고, 이를 해소하는 방안이 탐색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교육본위론에서 말하는 교육의 평가는 평가의 목적, 평가의 대상, 평가의 준거, 평가의 방법 등에 있어 기존의 학업 성취도 평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탐색하려는 일차교육의 평가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닮아야 한다.
4) 일차교육과 일차학교
여기서 우리는 일차교육과 이차교육 또는 삼차교육을 주로 제도교육과 관련하여 논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일차교육과 이차교육 또는 삼차교육 등으로 번역된 primary education, secondary education, tertiary education 등이 제도적인 형식교육을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차교육, 이차교육, 삼차교육 등에 대한 논의가 바로 제도교육의 세 가지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이유는 없다. 교육은 학교와 함께 시작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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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고 학교와 함께 끝나는 것도 아니며, 학교 밖에서도 교육이 나름대로 전개되고 있다. 학교교육이 학교 바깥의 교육보다 교육의 내재율을 더 충실히 충족시키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일차교육은 정확히 말하면, 일차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교육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교육적인 소질의 탐색과 상구를 소재로 한 메타교육이 어느 정도 완결되는 시점까지 진행되는 교육을 말한다. 어쩌면 그것은 태교(胎敎)로부터 시작되어, 필요하다면, 인간의 삶의 상당 기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일차학교는 일차교육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전담하는 것은 아니다. 일차교육은 분명 일차학교의 외연을 넘어서 전개되는 교육이다. 물론 일차학교는 일차교육을 자체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일차교육의 생리와 본질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도록 일차학교의 모습이 현재 초등학교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일차교육을 현재와 같은 초등학교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은 일차교육의 모습을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일차학교는 어떠한 모습을 지녀야 하는가? 먼저 일차학교는 학교 안에서는 물론이고 학교 밖에서도 메타교육과 교육적 소질의 탐색에 필요한 모든 종류와 수준의 소재를 발굴하여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10여 개의 교과들이 일차교육의 원활한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소재가 될 수는 없다. 일차상구자의 소질과 적성은 10여 개로 한정할 수 없을 만큼 그 종류가 무한하며, 따라서 가능한 한 일차학교는 일차상구자에게 다양한 소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학교의 안과 밖을 가르는 담장을 해체시킬 필요가 있다. 일차상구자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소재가 학교 밖에 존재한다면, 이를 발굴하거나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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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상구자가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차학교의 소임이다. 일차상구자가 메타교육을 수행하는 데에 더 적절한 장소와 공간이 학교 바깥에 존재한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차학교의 담장을 없애야 할 뿐만 아니라, 일차교육의 소임을 일차학교 하화자의 전유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일차학교의 하화자가 초인(超人)이 아닌 이상, 그가 자신에게 배우는 모든 일차상구자들의 소질과 적성에 부합하는 다양한 세계들에 널리 능통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세계가 일차상구자의 소질과 적성에 부합한다면, 그는 일차학교의 바깥에서 상구자를 도울 수 있는 일차하화자를 찾아 해당 상구자와 결합시켜 주어야 한다. 이는 일차학교의 하화자들로부터 교육적인 역할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 밖의 일차하화자를 찾아 그가 상구자와 만나 하화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닐뿐더러, 이 역시도 대단히 소중한 교육적 역할이고 과제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차학교에 출석하는 상구자들 가운데서도 동료 상구자의 소질과 적성에 부합하는 세계와 관련하여 일차학교의 하화자보다 품위가 높은 자가 있다. 일차학교의 하화자는 필요하다면, 당연히 이들이 서로 만나서 하화하고 상구하도록 조처를 취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도 반드시 필요한 교육적 소임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활동이기도 하다. 여기서 제안하는 일차교육의 논리가 일차학교를 해체하거나 일차학교 하화자들의 역할을 축소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일차학교의 하화자는 필요한 경우, 학교 안이나 밖의 일차하화자를 발굴하여 상구자의 일차상구를 위하여 활용해야 될 뿐만 아니라, 일차학교 내에서도 하화 활동과 무관한 활동들은 과감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차학교 안에도 그가 상구자로 삼아 하화 활동을 전개해야 되는 일차상구자들이 여전히 많다. 이 일을 제대로 하는 데에도 시간과 능력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차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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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하화자가 일차학교 속에서 일차하화를 제대로 수행하면서 동시에 일차학교의 운영과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모두 수행할 수는 없다. 학교의 운영과 관련된 행·재정적인 활동들, 학교 제도와 관련된 갖가지 공적인 업무들, 선구자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겪는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들을 상담하고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 일들, 상구자의 학교생활이 쾌적하도록 만드는 환경 조성, 급식, 의료 등의 활동들은 일차학교의 하화자가 담당하기보다는 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당연히 그들의 업무로 돌려주어야 한다. 이 일 저 일을 모두 수행한다고 해서 훌륭한 하화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전념해야 되는 활동을 수행해야 되며, 그렇지 않은 일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실제로 학교가 그러한 모습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촉구해야 한다.
6. 재서술에 대한 변명
위에서 논의한 것이 교육본위론을 통하여 일차교육을 새롭게 조망하는 일과 관련하여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물론 그것은 보잘것없는 진전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 공간한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장의 개념과 논리에 근거하여 1장부터 5장까지의 내용들을 새롭게 재작성할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앞의 장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가운데 동원했던 기존 교육학의 개념들은 이 마지막 장에서 소개한 개념들로 대치하면서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성과가 미미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시도하고자 한 것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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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하는 초등교육을 새롭게 재개념화하는 일이었다. 재개념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그것은 지금 사용되거나 통용되는 것과는 다른 개념들을 구안하여 교육을 설명함으로써 이전 개념들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교육의 숨은 양상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외견상 지금까지 우리가 수행한 것은, 특히 이 마지막 장에서 수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재개념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성과를 놓고 우리가 원래 약속했던 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초등교육을 일차교육으로 재개념화하고 관련된 개념들을 새로운 것으로 대치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전의 개념들로는 도저히 드러내어 설명할 수 없었던 일차교육의 숨겨진 측면들을 밝히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우리가 나름대로 구안한 개념의 체계를 통하여 수행된 것이 아니라, 교육본위론이라고 하는 교육학의 새로운 개념체계를 원용하는 방식을 통하였다. 물론 교육본위론은 우리가 넘어서려고 하는 기존의 교육학 개념체계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새롭게 구안된 것으로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무관하기는커녕, 보기에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참조해야 되는 거의 유일한 교육학의 개념체계에 해당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교육본위론을 원용하거나 참조한 것은 그다지 커다란 잘못이 아니라, 현재로서 취할 수 있는 불가피한 접근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시도한 것은 교육본위론을 참조하여 일차교육을 재서술한 것일 뿐, 이를 새롭게 재개념화하는 작업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차교육을 제대로 개념화하는 일, 그것은 결국 일차교육을 포함하여 교육 일반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이론을 구성하는 일로 연결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물론 새로운 교육이론을 만드는 일은 일회적인 시도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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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수행한 작업의 한계는 충분히 양해될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새로운 교육이론의 단초를 제공한다거나, 아니면 교육본위론을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다거나 하는 성과에는 도달하지도 못했다. 교육본위론의 관점으로 일차교육을 재서술하는 데에 그쳤으며, 그러한 재서술마저도 교육본위론의 근본 취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확언하기가 어렵다. 이 점에서 우리의 작업은 교육을 재개념화하기 위하여 처음에 섰던 여정의 출발선상에서 그다지 크게 나아간 것이 못 된다.
이러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 변명할 점은 있다. 그것은 일차교육을 재개념화하는 일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차교육만이 아니라 전체 교육을 새롭게 재개념화하는 일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완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학문적 역량이 뒤떨어지는 나로서는 한 걸음을 내딛기도 상당히 힘에 부치는 과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형편은 조만간 개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아는 나로서는 완주(完走)를 중단하고 재개념화 작업을 한동안 미루어두고자 한다. 지금은 학문적인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나에게 더 급선무이다. 충분한 준비가 되었을 때 일차교육, 더 나아가 교육의 전체를 재개념화하는 과제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형편이 지금보다는 덜 부끄러운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