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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자료

장상호. 학문이란 무엇인가 / 제 1장 서장 1.1. 학문과 학문론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2,001 목록 댓글 0

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1장 서장


1.1. 학문과 학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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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서장


  이제 장문의 글을 시작하면서 걱정스러운 것은 어떻게 하면 나의 생각과 입장이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독서는 어차피 독자가 하는 것이고, 그 해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소관사항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저서를 통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주장을 성립시키고자 하며, 저서의 모든 부분은 이러한 전반적 의도에 맞도록 구성되었다. 물론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은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여러분이 나의 의도와 전체적인 논의의 틀을 먼저 이해한다면, 서로 간에 원활한 동반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본 장에서는 그러한 전체의 맥락이 무엇인지를 소개할 것이다.

  제일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저서는 최근의 학설이나 주장을 이것저것 소개하는 개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저러한 것들을 두루뭉수리하게 하나로 묶는 절충주의는 처음부터 거부된다. 절충은 생활의 지혜일 수는 있으나 학문에서는 용납되기 어렵다. 그러한 인쇄물은 너무도 많아 쓰레기통이 넘쳐날 정도이다. 거기에다 그런 유의 글을 또 하나 첨가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쓰레기가 될지언정 독창적인 하나의 발언을 담고 있는 것이 되었으면 한다. 정보의 홍수를 막겠다는 소신에 따라 남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서 가급적 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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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저서의 내용이 나의 고유한 발언으로 독자에게 평가받기를 바란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학자들의 주장과 입장이 인용된다. 그러나 본 저서가 제한된 지면에 그들의 견해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각주 1: 여기서 소개되는 수많은 학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각각 그에 대한 단행본을 저술해야 될 것이다. 그러한 방법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나로서는 먼저 이 문제에 있어 독자의 양해를 구할 도리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내가 다소나마 공헌할 수 있는 몫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주장은 나의 독특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고, 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의 주장을 원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며, 또 그들이 나의 고유한 발언에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본 저서는 학문과 교육이 서로 교차하고 있는 영역을 특수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드러내고자 한다.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떠한 정답이나 정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학문계 자체도 변하고 있고, 그 해답도 변하고 있다. 우리 각자는 그 속에 참여함으로써 학문계의 전통을 전수받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 전통의 쇄신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 가운데는 당연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몫도 있다.

  학문은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모로 발전하여 왔으며, 지금도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미래를 향해 진행하고 있다. 학문의 본질이 장차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예상할 수 없다. 과거 백 년 전에 학문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할 수 없었듯이, 다음 세대의 학문이 어떤 양태를 띠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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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서는 예측불허이다. 학문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추가되며, 또 재구성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재구성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학문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학문은 분명 지금의 것과는 다를 것이며, 과거 모든 시대의 것들이 그러했듯이 항상 새로움과 흥미로움을 보여줄 것이다.

  학문은 개별적인 학자가 전모를 밝히거나 규정하기가 어려울 만큼 질과 양의 면에서 너무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모든 학문의 분야를 그것이 출범할 당시의 모습에서부터 현재와 같은 최첨단의 발전양상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의 경험범위에 넣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학문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자들은 각기 자기 경험의 범위 내에서 포착되는 학문의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 줄 뿐이다. 그런데 논자마다 경험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만큼 상이한 그림이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어떠한 일률적인 해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본 저서의 다른 하나의 주제 항목인 교육에 있다. 학문의 실재성은 결국 교육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으며, 또 밝혀질 수밖에 없다. 상이한 수준의 학문이 교육을 통해서 확인되고 검증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우리는 학문을 일률적으로 정의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학문과 교육에 대한 나의 독특한 관점이다.

  본 저서의 내용과 그것이 겨냥하는 목적에는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학문과 교육은 무수한 개념적 탐색이 가능한 영역이고, 아직도 해명되어야 할 불확실성을 너무도 많이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선 그 영역에서 근래에 제시되고 있는 제반 문제들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해명해 나가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탐색작업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독창성을 토대로 하여 대상적 현실의 어떠한 부분을 개선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과제가 본 저서를 통하여 무난히 풀려 나가고, 또 그 해결방안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가 독자 여러분에게 일관되게 전달되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먼길을 동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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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저서에서 나의 입장이 독자에게 가능한 한, 오해 없이 명료하게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여러분의 동조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논의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나의 주장이 누구에게나 달콤한 것으로 들리게 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저서에서 필요한 논의를 생략하거나, 불확실하고 자신 없는 부분을 모호한 말로 호도하거나 할 생각이 없다. 나는 독자가 나의 글이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힘 때문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나의 글이 합리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설득력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무조건의 동조를 받기보다는 오해받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글이 길어진 이유도 이런 나의 우려 때문이다.

  본 저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의 산물이다. 동시에 이것은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필요로 하였다. 기존 학문의 만족스럽지 못한 면들을 교육학적으로 해소시키려고 하면서도 현존의 교육학적 입장은 이 저서에서 부정된다. 나는 현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교육학을 통해서 학문의 문제를 타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가고자 하는 길은 새로운 길을 뚫고자 하는 수년간의 난공사를 통해서 얻어낸 전인미답의 길이다. 단 몇 미터의 진전을 가져오기 위해 무수한 나날의 터널 공사를 해야 했다. 나는 독자들을 그 험난했던 투쟁으로 점철된 새로운 길로 안내하려는 것이다. 독자 가운데에는 동조세력과 반대세력이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그러한 갈림과 논쟁을 예상하고 있으며, 동시에 바라고 있다. 나는 나의 논의에 동조할 수 있는 독자에게는 이 글이 그들의 입지를 정당화시키는 든든한 무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나와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는 독자에게는 나의 주장이 그들을 건설적인 논쟁으로 이끄는 정중한 초대장이 되기를 바란다.

  이 저서의 내용은 나의 학문적 저술의 어느 것보다도 장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에는 나 나름의 하나의 주제가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긴 여행에 들어가기 전에 독자가 이 저서의 의도와 전체적인 도식을 대략적으로라도 먼저 짐작하도록 이끄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될 것이다. 긴 교향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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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는 서곡에서부터 시작된다. 서곡은 대개 작곡가가 도입하려는 주요 음률을 소개함으로써 그것이 교향악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전개되고 동시에 변화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것이 서곡의 형식이다. 이 저서의 내용은 서장에서 소개되는 의도와 도식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변화를 줌으로써 이를 심화 ·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1.1. 학문과 학문론


  1.1.1. 기본입장


  이 세상에는 대답하기보다는 질문하는 편이 훨씬 편안한 주제가 많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학문의 경우가 전형적인 예이다. 학문은 발전하는 세계의 하나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로 보기 어렵다. 학문계는 역사의 과정에서 변모를 거듭해 왔다. 역사적 과정 그 자체를 비롯한 모든 매개적 과정은 일련의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발전의 각 단계는 변증법적인 지양에 의해 극복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모순의 각 단계는 더 높은 통일성 속에서 종합을 이룬다. 따라서 그 가운데 어느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것을 이해하려는 우리들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같은 입장에 봉착한다.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학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학자는 원래부터 그러한 질문을 앞에 던져 놓고 지속적으로 추궁해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자가 인식하려는 대상에 대한 당연한 태도를 반성해야 하듯이 학문 자체도 당연하게 보아서는 안 될 대상이다. 학문계도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려는 우리들도 변하고 있으며, 그만큼 학문은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학문의 궁극적인 실체를 파악할 때까지 그것에 대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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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연기해야만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무한소급의 수렁에 빠질 필요까지는 없다.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학문을 하는 작업현장에서 항상 절실하게 제기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최종적인 해답을 얻기에는 과분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 답 가운데 어떠한 것은 다른 것보다 더욱 발전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명할 수 있을 때까지 해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겸손이며, 또한 책임의 회피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건방진 확신이나 혹은 반대로 지나친 회의나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진실로 안다는 것이 끝없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최종적인 답은 아니더라도 중간보고가 지니는 가치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학문은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양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구체적인 사실로서의 일반적인 역사와 구체적 사실에 대한 개념적 탐구의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 그 구분의 범위를 좁히면 학문의 역사와 학문에 대한 논의의 역사도 구분된다. 이제까지 학문의 현상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엄밀하게 따지면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그 가운데 후자에 속한다. 즉, 이미 있었던 학문계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모종의 체계적인 관점을 갖추어 보자는 데 의미와 목적이 있다.

  어떠한 일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유치한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수가 있다. 예컨대, 뇌가 진화해 온 역사와 뇌에 대한 학문이 진화해 온 역사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뇌는 놀라울 정도의 신비로운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뇌 자체에 대한 학문적인 인식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훌륭한 학문활동을 하고 있고, 위대한 업적을 내고 있으며, 또 학문의 전통을 전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자기의 실천이 기초하고 있는 무의식적 토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거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인류가 실제 해왔던 학문의 역사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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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한 인식이 훨씬 뒤떨어져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학문에 관한 연구는 고정불변의 실재적인 것을 직접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 동안 학문을 구성하는 데 참여해 온 사람들이 실재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고 취급해 온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다양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문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연구 가운데 어느 것도 고정적인 것은 없다. 또한 연구자는 어떠한 원전, 심지어는 가장 분명한 문서자료나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그가 파악하려는 실재와의 상호투명한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어느 시점에서 어떠한 시각으로 그것을 파악하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의미의 첨삭은 불가피하다.

  학문이 역사적 진화의 산물이듯이 학문에 대한 학문도 역사적인 변천을 거쳐 왔다.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학문의 본질 · 대상 · 방법 그리고 종류나 분류방식에 대한 견해를 표명해 왔다. 이러한 의미의 특이한 목적을 가진 학문분야를 학문론이라고 한다. 학문론은 학문의 목적 · 방법 · 기초 · 근본원리 · 전제 · 분류 등에 관한 모종의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한다. 학문론은 학문의 역사만큼 긴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인식론이라는 범주에 의해서 다루어 왔다. 인식론은 어원으로 보면, 희랍어인 ‘episteme(인식 혹은 학문)’에다 라틴어인 ‘logic(논리학)’을 합성한 것으로서 영어로는 ‘epistemology(인식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인식(앎)에 대한 이론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인식론을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로 다룬 사람은 플라톤(Platon: B.C. 422~347)이다. 그는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테아에테투스(Theaetetus)>에서 인식론의 본질을 뚜렷하게 밝혔다. 그는 앎의 대상인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앎(episteme) 자체를 알기 위하여 “앎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기하고, 앎의 본질과 개념을 밝히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참된 앎은 개별적인 사물을 이해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앎 자체의 본질과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앎의 근본이요, 최후의 목표는 “앎 자체에 대한 앎(episteme tes epistemes, 학문의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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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초기의 학문론은 “학문의 학문”이라고 자처했던 철학의 중심문제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면, 근대 인식논리학을 형성함으로써 합리주의적인 인식론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의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는 플라톤의 사상에 입각하여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서의 앎(connaissance humaine)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앎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탐구함으로써가 아니라 도리어 대상에 대한 앎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구함으로써 학문의 기초를 밝히려고 하였다. 독일의 칸트(Knat: 1724~1804)는 “앎 일반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물은 뒤에 이를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의 인식론은 동시에 학문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피히테(Fichte: 1762~1814)의 지식학은 일반의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참된 철학으로서의 지식학은 지식을 정신의 여러 정립을 통해서 고찰하고 기초 짓는 과제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처럼 학문론은 인식론에 의해 다루어지다가 차츰 더 많은 개별 학자들의 관심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학자들은 그들의 작업에서 학문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종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두를 학문론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암묵적인 수준의 학문에 대한 전제에 기초하여 그들의 활동을 전개하지만, 그것을 명시화하는 단계는 생략해 버린다. 이에 비해서 그것을 명시화시키는 단계에까지 학문을 그들의 주된 탐구영역으로 삼은 많은 학자들이 있다. [각주 2: 예컨대 학문의 방법과 분류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Bacon, Wundt, Windelbant, Rickert, Dilthey, Weber, Marx 등이 각각 대표적인 저술을 남기고 있다. 이들의 입장은 적절한 맥락에서 본 저서를 통해 그때그때 소개될 것이다.] 그들의 학문론에는 물론 당대의 학문의 수준과 그것을 이해하는 자신의 한계가 나타나 있다.

  그 후 상황은 변했다. 오늘날에는 한 개인이 학문 전체에 대한 내용을 논의하기에는 학문의 규모나 내용이 엄청나게 확장되고 심화되었다. 거기에는 종류의 분화와 수준의 정교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종합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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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학문은 발전과정에서 점차 그 영역이 세분화되어 왔다. 모든 사람들에게 학문의 내용을 소개하겠다는 개인 수준의 목표는 전세기에는 가능했을지 모르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비현실적이다. 이제 물리학자는 물리학을 소개하고, 사회학자는 사회학을 소개하는 식으로 각 분과학문이 자신의 학문을 소개하고 있다.

  다른 한편 어떠한 분과학문은 학문 일반을 그들의 특정한 분과학문적 대상이나 사실로 다루는 방식을 취한다. 그 가운데 철학에서의 분석철학, 심리학에서의 학습이론 그리고 사회학에서의 지식론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들의 특징은 그들이 그 동안 확보한 특이한 개념체계에 의해서 학문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학문에 대한 일의적인 의미가 있을 수 없고, 그러한 것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학문에 대한 이러한 분과학문적 접근은 당시의 학문의 상황 그리고 그것에 대한 논자의 관심과 이해능력에 따라 성격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다양한 시각을 통해서 학문적인 사실 자체가 여러 방향에서 조명받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학문은 이들 분과학문의 개념망으로 포착할 수 없는 미궁의 여지를 항상 남기고 있다. 나는 이 저서에서 학문에 대한 또 하나의 분과학문적 이해를 추가시켜 보고자 한다. 그것은 교육학적 관점이다. 그 동기는 기존의 제반 학문론은 학문의 면모 가운데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불만에서 생긴 것이다. 철학 · 심리학 · 사회학 등 기존의 분과학문들은 학문을 각각의 학문적 소재로 취급하는 데 다소의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있지만, 그들이 학문을 논의하는 동기와 안목은 제한되어 있다. 그 종합성과 고차원성에 비해서 학문은 그들의 개념체계 내에서 편파적이고 저급한 양상으로 환원되고 있는 듯하다. 교육학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부적절하거나 최소한 극복해야만 할 요소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기 이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 교육학의 위상을 바로잡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교육학은 아직 정체성이 모호하다. 후에 더 자세하게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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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겠지만, 교육학은 자생적인 학문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고 기존의 타학문들로부터 개념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형성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육학이 개념을 차용해 온 학문 가운데는, 이미 학문론에 참가하고 있는 학문, 즉 철학 · 심리학 · 사회학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러한 방식의 교육학은 교육현상을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육학이 분과학문으로서 할 수 있는 고유한 공헌을 저해한다고 보는 남다른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저서에서 외재적 관점이 배제된 교육학 고유의 관점을 제안하고, 그것이 이제까지 교육학자들이 의존해 온 학문들과는 구분되는 방식으로 학문을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본 저서는 교육학이 만약 교육의 자율적인 맥락을 포착하는 새로운 개념체계에 도달한다면, 기존의 분과학문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학문 일반을 이해하는 데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나는 교육이 학문의 방법 면에서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학문과 관련하여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절차를 내부에 장치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증은 그 자체로 새롭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나, 그 의도는 더 큰 것을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대외적으로는 교육학의 새로운 관점을 천명하고, 대내적으로는 그러한 가능성이 자체의 자율적인 개념체계를 구안함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흔히 교육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은 교육학의 고유한 이론적 맥락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기존의 타학문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차용하여 ‘응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놓으면 교육학이 될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저서를 통해서 교육학자들의 그러한 종속적 입장을 역전시켜 혁파하고자 한다. 즉, 학문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학이 나름의 순수한 학문적 체계를 가지고 그것을 더욱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응용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나의 논증이 성립될 수 있다면, 이는 교육학이 학문공동체내에서 자율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타학문과 더불어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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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제해결에 고유한 공헌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하에서 각 분과학문이 자기 자신의 학문을 소개하는 방식과 철학 · 역사학 · 심리학 · 사회학 등의 인문 · 사회과학들이 학문 일반을 소개하는 경향을 간략히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시도하는 교육학적 입장이 이들과는 어떻게 구분되며, 어떠한 점에서 학문을 이해하는 데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밝힐 것이다. 여기에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개별적인 분과학문의 자기소개는 한정적이며, 대중을 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인문 · 사회과학적 관점 역시 학문을 자신의 개별적인 분과학문적 사실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날 사실은 학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의 양상은 그러한 기존의 분과학문들의 시각으로는 포착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교육학은 나름의 시각에 의해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논의의 후반부는 우리가 현실에서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부각시키게 될 것이다. 우선 이론적인 문제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1.1.2. 분과학문의 자기소개


  이 저서의 다른 부분(제 3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사항이지만, 분과학문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나마 먼저 정의해야 할 듯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분과학문은 학문계의 하위영역으로서 사소하고 중요한 것들을 변별하는 특색 있는 개념범주를 설정하여, 특정한 사실을 구성해내는 고유한 전통을 가진 탐구분야라고 할 수 있다. 분과학문은 그것에 고유한 특정한 사실들을 규정한다. 이 때 한 분야의 변인은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각 분야의 것들은 중첩될 수 없다. 이 말은 그들의 견해는 갈등보다는 서로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과학문들의 시각의 차이는 그들 간에 긴장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나의 간결한 정의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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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별적인 분과학문(a discipline)은 학습이 유례없는 방식으로 성취해낸 탐구분야의 하나이다. 이해를 겨냥한 대부분의 인간적인 노력은 실패한다. 극소수만이 성공하게 마련이며, 이러한 결실 있는 사고의 방식들만이 분과학문으로 보존되고 발전된다. 개별적인 분과학문은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해의 성장이라는 목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결실을 보여주는 분야라고 증명된 탐구의 한 가지 유형이다(Phenix, 1964, p.316).


  독특한 인식대상을 해명하는 체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계속 수정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오늘날의 학문은 이러한 분과학문들의 집합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각각의 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성장하는 동안 방대하고 정교로운 지식들을 생산해 내었다. 분과학문의 지식들은 뿌리가 다르고 날로 그 높이를 더해 가며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물론 다른 분야의 학자들조차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하다. 따라서 이제 개인은 일생을 통해서 그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학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통상 여러 가지 분과학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는 정도이다. 개별학문의 특성이 서로 다른 만큼 이렇게 한 분야를 선택하여 탐색함으로써 얻은 경험과 배경을 가지고 학문 일반을 이해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다. 예를 들면, 양자화학의 지식을 알고 싶어하는 생리학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부류의 학문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이미 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물리학자가 최근의 생물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라는 한 분야의 이해조차도 평생 동안의 과업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학문이라는 세계는 보통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심대한 세계가 되고 말았다.

  탐구영역이 무엇이든 간에, 과학 또는 체계적인 연구는 통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그들을 다듬고 그들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어휘를 소유하게 된다. 분과학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얻은 첨단의 지식을 그 수준에서 어떠한 정연한 논리 속에 추상화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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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이 발전해 온 과정을 생략하거나 부정하고, 마지막의 결과만을 택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이들은 학문의 결과적인 산물, 그 중에서도 주로 言述化될 수 있는 것을 중시하고, 그것의 진위를 판정하거나 다양한 이론 가운데 우수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모종의 보편적인 기준과 형식화된 절차를 찾는데 주로 집착해 왔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접하는 분과학문의 소개서는 자신의 학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었으며, 지금까지의 지식에 도달하는 데 어떠한 과정과 실천이 필요했는지를 소개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최근에 성취한 학문적인 체계를 소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은 역사적 과정을 단지 학문사적인 입장에서 걸출한 영웅들의 이름만 거론하는 방식으로 취급할 뿐, 그들이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학문의 발전에 참여하였는지를 소상하게 다루지는 못한다. 그러한 것들은 단지 역사학자들의 소관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지식의 양과 관계된다. 각 학문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확보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 역사를 남김없이 설명한다는 것은 우선 양적으로 불가능하다. 분과학문이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성과를 소개하는 일을 꺼리는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미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학문들의 입문서나 전공서적은 그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오류의 역사를 말끔하게 청산하고, 최종의 형태만을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지금의 지식에 도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오류의 역사가 있었는지를 은폐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이전의 지식은 지금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오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공동체는 이미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진 이론, 혹은 지금의 것과 모순되는 것을 대중에게 소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학문 하면 그것이 얻은 최근의 결과만을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관행은 일면 수긍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 자체를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학문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을 모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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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본 저서의 입장에서 이러한 관행이 지니는 한계와 문제는 일단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주제이다. 이 문제는 특히 최근에 과학의 발전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와 실천을 하나의 관념과 기술의 발전하는 실체로 볼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과학적 관념들과 방법들 그리고 과학 자체의 지배적인 목표 자체조차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과학적 관념의 역사나 혹은 과학의 논리와 방법을 효과적으로 생명력 있는 방식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진화적 과정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역사가로서 특정한 발견이나 교조 혹은 사람들에 관해서만, 그리고 예상과 사례들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철학자로서, 우리는 탐구의 대상인 살아 있는 과학을 하나의 형식적이고 동결된 추상물로 대치시키는 것으로 결말을 맺을 뿐이다. 이러한 형식적 탐구의 결과들이 어떻게 실무에 종사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지적이고 실제적인 일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과학의 역사를 순전히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과학사나 과학을 순수하게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철학도 동일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Toulmin. 1961, p.109).


  최종적인 결과만 가지고 과학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위험스럽고 일면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각 분과학문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입체적인 세계이다. 마지막의 끝부분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역사와 전통의 일부일 뿐이다. 학문이 성취한 결과들을 평면화시키거나 그 과정을 엄정한 객관의 이름하에 치장함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는 생략되어 버린다. 그러나 학문의 본질적인 측면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생략되어 버린 발전의 과정이다. 학문계는 오류의 계기를 통해서 점차 발전한다. 학문적 지식은 이전 단계의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진보하였다. 한 단계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그것을 개선하는 또 다른 지적 체계가 구성된다. 이 때문에 각각의 단계는 진리로 향하는 하나의 계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각 단계의 지식이 지금의 지식을 산출하는 발판이 되었고, 지금의 지식조차도 다음 단계에 의하여 오류로서 지양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학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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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발생적 과정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당대에서 인정되는 공적 지식에 안주하거나 이에 고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학문의 본질적인 일면을 은폐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지식을 학문의 전체인 양 소개하는 전문서적의 잘못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문적인 세계의 밖에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초보자에게 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복잡한 용어와 개념범주는 선행지식을 기초로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이 특별한 개념과 어휘들은 비록 일상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일상언어와는 구별되는 존재이며, 가끔은 심각할 정도로 일상언어와의 간극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마치 등산가들이 아주 높은 산을 등정하고, 그 곳에 이르는 길을 차단해 버리는 것과도 같다. 혹은 학문의 탐구과정을 건물의 건설에 비유한다면, 건설에 사용했던 사다리를 제거해 버리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최신의 지식에 접근할 길이 차단된 일반대중들은 학문을 친밀한 것으로 대하기는커녕 쉽게 사귈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일반인에게 있어서 학문은 秘傳的인 것이다. 거리에 있는 일반사람들은 최근의 학문적 발견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내막을 파악할 길도 없다. 그들에게 학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낱말의 나열 또는 관념의 나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학문의 정점에 있는 지식, 즉 그 분야의 최근의 지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저 높은 선반 위의 비밀스러운 물건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로 인하여 분과학문이나 학문 일반은 먼 피안에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식되거나 이상한 사람들의 독점물로 지각된다. 이런 인식은 학문 자체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학문의 발전은 저변확대에 의해서 탄탄한 기초를 확보할 수 있다. 초보자들이 처음부터 그것에 대한 접근 자체를 꺼린다면, 저변확대를 기대할 수 없다. 또한 학문을 지원하는 세력은 바로 대중이다. 만약 일반인이 학문을 몰이해하거나 외면한다면 그만큼 지원세력을 잃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분과학문이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을 차단하고 있다는 앞서의 주장은 지나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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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평이라는 반박이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분과학문은 각각 그들의 최근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 필요한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과학문의 학자들은 결과에 도달하는 데 동원되는 절차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이른바 방법론을 다루는 문헌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학문의 면모 가운데 하나이다. 결과를 소개하는 것보다는 방법론을 보여주는 것이 그 분과학문 혹은 학문 일반의 실재를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유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조차도 냉철한 이성과 불편부당한 객관적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학문의 소산을 얻을 수 없다는 식의 규범적인 관심이 앞서고 만다. 그래서 대개의 방법론은 학문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실상과는 다른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학자들이 실제로 지식을 얻기까지의 실천적인 생활의 면모, 예컨대 그들의 인간적인 오류 · 갈등 · 좌절 · 모순과의 조우, 그것을 해결하려는 열정, 해답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등의 치열한 측면이 재구성된 논리로 치장되어 방법론의 이면으로 은폐되고 만다.

  한 주제의 역사 전체는 그 주제의 가장 새롭고 가장 진보된 단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최근의 것(이것은 최종적인 것과 구분된다)이 보여주는 대상세계는 적어도 수십 년 혹은 수세기 동안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성의 학문계 밖에서 생활하고 있다. 또한 학문계에 입문한 많은 사람들도 그 분과학문의 최신 지식을 참되게 느낄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길을 자기 수준에 맞게 걸어가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 학문이 거쳐온 오류의 역사가 그들이 다시 걸어가야 할 하나의 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 길을 통해서 최근의 지식에 도달해야 한다. 그 과정을 생략하고 최종적인 지점에 단번에 손쉽게 도달하는 길은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 그러한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탐구의 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각 분과학문은 자신들의 후진을 양성하는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때 주로 사용되는 자료가 이른바 ‘교과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가 진정 후진의 양성에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앞서 우리가 지적한 결과주의적인 오류를 반복하고 있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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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교과서에는 그 학문이 발전해 온 역사가 간략하게 소개된다. 그러나 학문의 최신지식과 교과서를 배우는 자 사이의 간극이 심대하기 때문에 교과서에 실린 역사적 서술이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교과서의 역사서술은 지나치게 간결하기 때문에 교과서를 통하여 충분할 정도의 중간적 체험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교과서는 과학자들이 탐구해 온 지식 가운데 표본적인 것들만을 어떠한 정형에 맞춰 정연하게 논리적으로 제시한다. 그 학문 안에 아직도 다양한 이견이 있고, 또 해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는 점은 은폐되거나 생략된다.

  학생들이 과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을 일깨워 줄 만한 전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과서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에는 그 학문의 역사가 흔들림 없이 전진하는 한 가닥 직선인 것처럼 분장되어 있다(Kuhn, 1970).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자신들의 학문이 엄격한 규범에 따른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의 소산이라는 인상을 주고, 현대적 지식의 불완전성을 미봉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미화된 이상을 마치 현실인 양 배운다. 학생들은 과학적 활동이나 그 소산으로서의 지식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무미건조하고 天上的인 것으로 경험할 뿐이다. 혹은 학교라는 상황적 요구에 의하여 억지로라도 외우거나 모방해야 할 대상으로 그것을 지각한다.

  교과서의 기술형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모든 감정적인 요소가 배제된 기술형식이다. 교과서의 저자는 그 학문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봉착했었던 애초의 지적인 장애와 발견의 열정을 이미 극복했고, 또 각 단계에서 해답으로 제시되었던 것들을 둘러싼 흥분상태를 지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한다. 따라서 발견에 따르는 흥분, 잘못된 출발점, 희망과 실망, 혹은 각 단계에서 자신이 얻게 된 개선된 사고의 내용마저도 기술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독자는 거기에 순수한 의미의 열정조차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에 이르기까지의 영웅적인 고민과 보람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반역사적인 기술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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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정도 과거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 과거가 어떠한 오류를 범하여 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서술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술은 그 학문을 소개받고자 하는 초보자에게는 “산을 거꾸로 올라가는 기분”을 갖게 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뒤에 자세히 검토하겠지만, 학문과 교육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는 후에 교육에 관해서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교육은 ‘교과서’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담고 있지 못한 많은 다른 요소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 관련하여 교과서적인 소개는 결국 진리라고 하는 것이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 덜 그릇된 생각에 이르는 과정에서 체험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 간과된 측면이 바로 우리가 학문을 추구하는 오직 하나의 매력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과정적 측면의 배제가 그 분과학문의 저변확대와 활력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또한 현존의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은 그 내용의 수준이 어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준 자체는 최후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숙명적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고 있다. 우리는 분과학문을 포괄하는 학문 전체는 물론 학문이 소속하고 있는 더 큰 범주의 세계와 관련하여 학문을 논하는 입장을 취한다. 차츰 설명이 되겠지만 그것은 ‘修道界’라고 하는 세계이다. 이것은 우리의 개념에 의하면, 교육에 의해서 그 실재가 우리에게 점차 드러나고 있는 세계를 통칭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다. 이러한 우리의 접근은 분과학문이 개별적으로 그 학문의 관심사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 그치고 마는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도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교육은 결과보다는 체험적인 과정을 중시한다. 교육은 역사적으로 학문의 세계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있었다. 교육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수준의 지식이든지 간에 그것은 완성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발전의 과정에서 생긴 잠정적인 디딤돌 정도의 의의를 지닐 뿐이다. 분과학문들이 아무리 정교한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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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로 내용을 소개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최종의 지식이 아니라 부단히 발전하고 있는 한 단계의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예컨대, 과학적인 추정의 과정은 일련의 단계를 거쳐서 점차 그 대상세계의 실재에 가까이 접근해 왔다. 각 단계는 그 후의 단계에 의해서 부정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다른 하나의 개선된 해결점에 도달하는 중요한 초석이 된다. 이 때문에 학문이 어느 단계에 속하고 있느냐를 밝히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반적인 속성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교육은 단계별 과정이다. 한 단계가 성취되고, 그것이 다음 단계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자 장애가 되며, 그 장애를 다시 극복하려는 과정에는 일련의 실천이 개재된다. 그것이 곧 교육으로서 그것은 고유한 구조와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가정된다. 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하게 보이는 현존의 높고 높은 지식도 언젠가는 교육에 의해서 해체되고 극복되어야 할 한 단계의 이정표에 불과하다. 교육의 입장에서 볼 때, 진리는 그 자체가 인식을 보장한다기보다는 그것을 향하는 인식자 자신의 변용에 의해서만 체험될 수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개별학문의 초기에 출현한 단순한 지식도 최근의 지식과 동일한 교육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그러한 다층적인 각각의 수준을 우리가 단계별로 탐색해 나가는 것과 관련된 세계이다.


  1.1.3. 제반 인문 · 사회과학적 관점


  위에서는 각 분과학문이 자기 자신의 학문을 소개하는 측면을 다루었는데, 이와는 달리 분과학문이 학문을 그들의 학문적 사실로 보고 연구하는 측면도 있다. 이들 제반 분과학문은 각각 자신들의 독특한 학문적 시각을 통해서 학문의 다양한 면모를 밝히고 있다. 그 모든 연구를 항목별로 소개하는 것은 저자의 역량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미 다른 저서에서 이 부분을 요약해 놓은 것을 소개하는 정도로 그치고자 한다. 미트로프와 킬만(Mitroff & Kilmann, 1978)은 철학 · 역사학 · 심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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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이라는 네 가지의 분과학문에서 과학적 탐구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학문에 대한 근래의 연구물들을 다음과 같이 목록화한 바 있다(pp.108-111). [각주3: 여기서 제시된 연구자와 저서는 본 저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거론되는 것일 경우에만 본 저서의 참고문헌에 포함시켰다. 여기서 소개된 모든 것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Mitroff & Kilmann(1978)의 것을 직접 참고해야 할 것이다.]


  과학철학

Reichenbach(1968) [각주 4: 이 목록에서 원저자의 이름을 표기할 때는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로 적지 않고, 원저자의 나라말로 직접 표기한다.] 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의 불연속성을 소개한다.

Feigl(1970)은 과학적 이론(기초개념, 해설되지 않은 관찰적 토대, 형식적인 이론적 언어, 결과의 연역)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론적 실재와 관찰적 실재를 구분한다.

Hempel(1966, 1970)은 설명의 논리, 과학적 이론의 포괄법칙적 모델, 과학적 설명의 연역적 특성을 소개한다.

Nagel(1961)은 과학적 법칙의 논리적 특성을 다룬다.

Popper(1963, 1972)는 과학적 지식의 특징적인 면으로서 반증을 강조한다; 사회심리와 과학의 논리를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의 차이를 토대로 구획한다; 과학의 논리가 사회심리학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심리주의와 사회학주의를 비판한다.

Scheffler(1967)는 Kuhn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론의 불편부당한 중재자로서 과학적 자료의 비상대주의적 · 중립적 특성을 재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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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Caws(1969)는 발견이 정당화보다 성격상 덜 “논리적인 것”은 아님을 밝힌다.

Polanyi(1967)는 과학적 지식의 인격적이고 암묵적인 차원을 부각시킨다.


  과학사

Duhem(1954)은 과학적 실험의 비결론적 특성을 강조한다; 과학에서 결정적인 반증의 실험이란 존재할 수 없다.

Hanson(1961, 1969, 1970)은 관찰과 이론은 실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발견은 유형화를 의미하며, 결국 理論負荷的인 것이다. 

Kuhn(1970)은 정상과학과 혁명과학을 구분한다; 과학적인 패러다임, 이론과 자료의 상호작용, 과학의 사회적 · 역사적 특성, 교과서에 준한 과학교육의 부작용 등을 논한다.

Feyerabend(1975)는 과학을 규칙을 준수하는 ‘합리적’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신 비합리적 · 무정부적 · 주관적 · 개성적 특성을 강조한다; 모든 관찰의 이론의존성을 강조한다; 이론 간에는 불가공약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Holton(1973, 1974)은 과학에서 서로 갈등하는 주제의 역할을 지적한다; ‘공적’ 과학과 ‘사적’ 과학 사이의 상호작용을 밝히고, 모호성에 대한 관용과 갈등하는 주제가 위대한 과학자들의 주된 특징임을 지적한다; Einstein에 대한 사례연구가 있다.

Price(1969)는 과학적 전문지, 과학공동체의 성장을 소개한다; 과학에 대한 인구학적 연구가 있다.

King(1971)은 과학에 대한 Merton의 표준을 역사학적으로 비평한다.

Ravetz(1973)는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문제와 맥락을 지적한다.

Lakatos(1970)는 Popper의 소박한 반증이론을 비판한다; 이론을 성급한 반증과 미숙한 정당화로부터 보호하는 방안을 강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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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lmin(1972)은 ‘논리주의’와 과학철학의 무미건조한 형식성을 비판한다.


  과학의 심리학

Roe(1951, 1953, 1961)는 다양한 분과학문에서의 학자들을 전통적인 임상적 도구, 배경자료, 유년기의 흥미와 종교적 흥미의 근원 등을 밝히면서 심리학적으로 묘사한다.

Eiduson(1962, 1973)은 과학자들과의 심층적인 면접과 가정배경을 다룬다.

Kubie(1954, 1961)는 과학자의 경력에 따른 문제를 정신분석적으로 분석한다.

McClelland(1970)는 Roe의 연구를 심층적으로 요약하고, 과학자의 상념을 연구한 결과를 소개한다.

Hudson(1966)은 예술학도와 과학도의 차이, 확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의 차이, 과학자의 배우자들을 연구한 결과를 소개한다.

Maslow(1966)은 과학적 방법, 경직성, 강박성 등에 내재된 심리적인 갈등의 요소를 분석한다; 구조화되지 않고 미지의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한 공포와 개방성이 대비된다; 구조화를 연기하고 미지의 것을 환영하는 능력이 강조된다.

Mitroff(1974)는 서로 다른 과학자들의 역할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 물리적 대상의 투사적 상념, 과학의 지나친 공격성, 과학자들의 배우자, 현존하는 인식론과 사용중인 표준의 특징을 지적한다.

Garvey(1971)는 과학의 소통체제의 구조를 밝힌다.

Simon(1973)은 과학을 복잡한 문제해결활동으로 파악한다; 발견의 ‘논리’를 발견적 특성으로 정당화한다.


  과학의 사회학

Merton(1938, 1961, 1969, 1973)은 17세기의 과학과 과학공동체, 과학의 표준의 형성, 특권적인 인종, 과학자의 양가적 갈등, 지식사회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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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룬다.

Zucherman(1967, 1970)은 과학의 보상체계와 노벨상 수상자에 관한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Crane(1969, 1972)은 과학에서 그 선별적 기능을 연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학이라는 현상을 다룬다.

Hagstrom(1965)은 과학의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 구조를 밝힌다.

Cole(1967, 1970)은 과학의 소산, 그것의 사회적 인정 그리고 연구결과의 인용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Mullins(1972, 1973)는 상이한 과학적 전문분야의 구조와 사회학에서의 학파를 소개한다.

Barnes & Dolby(1970)는 과학에 대한 Merton식 표준을 비판한다.

Mulkay(1969, 1972) 역시 Merton식 표준을 비판하고 과학적 이론의 표준적 기능을 부각시킨다.

Lodahl & Goldon(1972)은 상이한 과학분야의 구조와 패러다임적 발전의 수준을 밝힌다.


  위에서 인문 · 사회과학의 각 분과학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학문론을 예로 들었지만, 그들이 포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 연구가 분과학문별로 정리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꼭 찍어서 어떠한 분과학문에 든다고 말할 수 없는 학자나 연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학문현상이 각 분과학문의 전통에 따라 선택적으로 연구되고 있다는 점을 위의 예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과학문적 관점은 서로 상이한 전통에 의해서 수립되었다고는 하나, 그들 간에 긴장과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전반적인 경향만을 간략히 설명해 보겠다.

  위의 예에서 과학철학의 관점은 폴라니(1967)의 것을 제외하고는 과학사적인 관점에 의해서 해체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과학철학’의 범주에 의해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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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되는 학자들은 학문의 논리적 특성을 강조하고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엄격히 구분하려고 한다. 이에 비해서 ‘과학사’의 범주에 속하는 학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부정하는 역사적 사례들을 부각시킨다. 과학의 역사는 실제로 과학의 본질이 논리의 형식으로 포착하기 어렵고, 상당 부분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임을 보여주는 입장을 취한다. 그만큼 과학의 이념적 논리와 역사적 사실 간에는 괴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 기본적인 점에 있어 역사적 관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과학철학의 극복을 제안할 것이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과학의 심리적 측면이나 사회적 측면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합의된 입장이 정립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쿤(1970)은 심리학과 사회학 모두에 대해서 공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 상당부분 그들에 의존하고 있다. 파이어아벤트와 핸슨 역시 그들의 접근에서 심리학을 이용한다. 이에 비해서 툴민(1972)은 과학이 하나의 고정된 합리성의 규칙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없으며, 대신에 ‘진화적’ 과정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한편으로 문화적 관점을 택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심리학이나 사회학보다는 생물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심리학은 앞서의 목록에서 제시된 다른 분과학문들과 교섭이 거의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이먼(1973)의 것을 제외하고 과학의 심리학은 과학에 대한 분석철학자나 역사학자의 관점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과학자의 성격 · 가정배경 · 종교적 배경 등을 다룬다. 마슬로우(1966), 미트로프(1974), 그리고 사이먼(1973)의 연구를 제외하고 어떠한 주제와 관련하여 과학의 심리학적 입장이라 할 만한 것을 밝힌 연구는 거의 없다. 이는 부분적으로 심리학이 아직 그들 나름의 학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후에 심리학의 학습이론과 정보처리이론이 학문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를 검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의 사회학 간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과학사는 역사의 분석에서 과학의 사회학의 입장을 적용하려고 함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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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과학의 사회학은 머튼(1973)을 제외하고는 역사학의 개념을 원용할 용의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의 사회학이 사회적 제도로서의 과학을 강조하고, 과학의 공동체와 그들의 보상체계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지식사회학은 인간의 사유가 역사보다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학사회학자들 가운데에도 머튼이 제시한 지식의 보편성 문제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과학사적인 연구를 고려에 넣는 경향도 점차 나타나고 있다(Mulkay, 1979).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뒤(1.1.6.)에서 특별히 지식사회학적 관점을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본 저서에서 취하고자 하는 시각은 어디까지나 이 네 개의 분과학문들의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바로 교육학적 시각이다. 우리는 교육학의 관점이 학문을 바라보는 독특한 하나의 관점으로 추가되어, 학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유망한 시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양한 분과학문이 각자의 시각에서 학문의 실체를 조망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각각의 학문 가운데서 과학사의 영역을 제외한 과학철학, 과학의 심리학, 과학의 사회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특정한 이론들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그들은 분석철학 · 인지심리학 · 지식사회학이다. 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러한 이론들이 그들을 모학문으로 삼고 있는 현재의 교육학에 깊숙이 침투되어 교육학의 논의에 직 · 간접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점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만큼 현존의 교육학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본 저서에서 택한 새로운 교육학적 관점에 대한 최소한의 비교준거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본 저서는 지금의 종속적인 교육학과는 다르게 교육학의 자율적인 토대를 구축하고, 그러한 관점에 의해서 학문의 문제를 취급하고자 한다. 이러한 대비는 교육학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본 저서의 새로운 시도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바가 기존 분과학문들의 성과와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그러한 시도가 왜 필요한지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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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인문 · 사회과학적 관점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과학사적인 관점이 제외된 것에 대하여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우리가 이 저서에서 모색하려는 철학적 인식론을 극복하는 데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 및 칸트에 이르는 인식론의 주류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에 이르는 현대의 인식론 등은 확실한 인식이 가능하며, 철학이 그러한 확실한 인식의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전제는 더 이상 견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자연과학 혹은 학문계를 역사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분명해지는 것은 지식이 역사적인 생명과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지식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완벽성을 보장하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학문적 사고의 근본적인 특징은 과학의 역사적 변화를 고찰하는 과학사가들(쿤 · 핸슨 · 파이어아벤트 그리고 바슐라르를 필두로 하는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우리가 이후에 제안할 교육은 그러한 전제하에서 또 하나의 대안적인 인식론을 제안하고 있다.


  1.1.4. 분석철학


  분석철학은 금세기에 들어와 철학 자체의 한계를 규정하려는 데서 출범한 현대철학의 한 분야이다(Ayer, 1959). 萬學의 아버지로서의 철학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많은 학문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철학에서 다루던 주제를 그들 나름으로 체계적으로 다루게 되자, 이제 철학 자체의 정체성이 의심스럽게 되었다. 분석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취해 온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들의 무의미성을 청산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철학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학문이 되고자 한다면, 세상사의 사실을 탐구하기보다는 그러한 탐구의 결과로서의 지식이 갖추고 있는 형식과 논리를 다룸으로써 좀더 엄격한 의미의 학문적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최초의 분석철학은 오스트리아의 비인(Wien)學團의 논리적 실증주의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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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국의 케임브리지학파에 의하여 출범하였다.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논리적 실증주의는 이제까지 철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형이상학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놀라운 입장을 택했다. 그들이 새롭게 찾은 철학의 고유한 과제는 논리적인 분석이다. 그들은 철학자의 과제란 명제의 의미를 분석을 통해서 명백히 밝히고, 무의미한 비경험적 · 형이상학적 요소를 철학에서 배제하며, 또 과학적 방법을 철학에 적용함으로써 과학적 철학을 새롭게 수립하는 것이라 보았다. 지식은 그 결과가 언어로 표현된다. 그것을 개념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철학은 다른 분과학문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연과학, 더 나아가서 학문의 현상에 대해서 고유한 방식의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분석철학자들이 지식의 문제에 접근하는 지배적인 경향은 지식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것의 결과를 분리시키고, 후자만을 자신들의 과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하고, 후자만을 철학적 인식론의 주제로 삼는다. 우리가 지식을 발견하고, 검증하며, 수정하는 과정 자체에 관한 사실은 철학자들의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연적인 사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필연성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사실과 관련된 영역은 심리학자나 역사학자들이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대신 그들은 발견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에만 집착한다(Reichenbach, 1951; Suppe, 1977, pp.125-165). 라이헨바흐(1951)는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 바 있다.


  발견의 행위는 논리적인 분석을 회피한다. 천재의 창조적인 기능을 대행하는 “발견하는 기계”를 조립하는 논리적인 규칙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을 설명하는 것이 논리학자들의 과제는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이론이 사실들을 설명한다고 주장할 때, 그에게 제시된 주어진 사실들과 그 이론 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논리는 오직 정당화의 맥락에만 관계된다. 그리고 관찰적 자료와 관련하여 하나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귀납이론의 주제인 것이다(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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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실증주의는 과학의 역사적 발전이나 여타의 조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신 과학철학자들의 과제는 탐구의 결과로서의 지식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일이다. 지식의 언어구성체의 형식적인 성질에서 모종의 정당화를 위한 기준들을 발견하고 상술하며 재구성하는 것이다. 분석철학자들은 이러한 기준의 설정에 의해서 주관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비합리주의의 오류가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분석철학은 특이한 지식관을 내세웠다. 그들에 의하면, 지식은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으로 국한된다. 그들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주로 과학에서 비롯된 언명(statement), 문장(sentence) 그리고 명제(proposition)이다. 명제는 언어로 명시화될 수 있으며, 명제는 眞이거나 僞의 어느 것에 속한다. 이러한 명제들 가운데서도 지식은 진리임이 판명된 신념체계이다. 분석철학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용어를 규정하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일단의 순환논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기호나 언어에 대한 논리적인 반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한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기 전에 도구이며 중개자인 기호 또는 언어를 검토하여, 그 구성에 과오가 없도록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분석철학은 기호논리학을 중요시하고, 의미론(semantics), 구문론(syntax) 그리고 화용론(pragmatics)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분석철학적 관점은 여러 가지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자신이 이러한 의미에서의 분석철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기의 관점은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다. 다만 그 처지를 파악할 수 없는 저급의 학자들이나 학문공동체에서만 그 여파가 청산되지 않은 채 여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동안 나타난 문제점 몇 가지만을 지적해 보겠다.

  우선 분석철학자들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철학의 영역에서 추방해 버리고자 했던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철학 속에는 그들이 추방하고자 한 형이상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학문영역이 너무도 크고, 또한 그 성과도 무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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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어려울 정도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 우리의 체험범위에 편입됨으로써 오늘날의 제반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을 단지 경험론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임의적인 내규에 의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자체의 인식론적인 틀에서 불분명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인식의 초보적인 오류에 해당한다. 그들은 이전의 형이상학과 결별할 때 그것의 非事實性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논리적인 분석 자체가 학문을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 더욱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것이다. 즉,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비난하는 종류의 형이상학적 공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분석철학자들이 취한 실재와 언어 사이에는 대응성이 있다는 선험적 가정은 점차 그릇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주어진 명제의 논리적 의미를 반드시 언어의 형태로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언어가 실재 속에 들어있을 의미를 고정된 형태로 포착하여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단지 約定的 관계가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의미 있는 지식은 언어로 명시될 수 없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이른바 명제적인 지식은 그러한 暗默的인 토대가 없이는 체험적인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은 스스로의 과제를 이론체계의 형식논리적인 분석에 한정시킴으로써 학문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세계관의 깊이를 피상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철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사용되는 개념의 의미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는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약정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그 명제를 다루는 전문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많은 경우에 철학자의 능력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논리실증주의는 감각내용과 그에 대응하는 언어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일의적인 대상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언어의 의미는 대상과의 대응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어내의 요소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나온다. 분석철학은 그들의 최종적인 분석에서 원자적인 명제를 상정하고, 그러한 것들이 경험에 의해서 실증될 때 전체적인 지식의 진위가 논리적으로 판명될 수 있을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언어나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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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진위는 진술의 목적, 문맥, 그리고 상황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실질적인 의미의 맥락을 떠나서 외견상의 말의 의의나 명제의 의미를 아무리 추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 있는 논의가 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학문의 문제를 단지 언어와 논리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분석적인 활동이야말로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정당화의 맥락에는 특정한 명제가 진인가 아니면 위인가를 판단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러한 확정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진리임이 판명된 지식이라는 것이 학문에서 얼마나 있는지는 극히 의문사항에 속한다. 우리의 견해로는 진리에 접근하는 지식은 있을 수 있으나, 완결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현실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反學問的인 것이다. 분석철학자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최첨단에서는 모든 것이 불명료한 상태에 있다. 확정지을 수 없는 불확실성이 점차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만드는 일이 바로 학문활동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위의 문제를 단순한 논리적 분석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 논의 자체가 철학자 스스로의 유희물에 불과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하는 것은 과학의 실천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들이 정당화의 맥락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발견의 과정 속에 들어 있다고 선험적으로 가정했던 것들은 실제의 발견의 맥락에 비추어보면 너무도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인식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최근의 철학자들(쿤 · 라카토스 · 파이어아벤트 · 포퍼 · 핸슨 · 툴민 등)은 인식을 역사상에 비추어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과학을 과학사의 계기들에 비추어 봄으로써 철학이 이제까지 간과해 왔던 인식의 실제적인 생산조건을 드러내어 철학적 인식론의 맹점을 보완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결과는 모든 과학적 인식활동이 따라야 될 초역사적인 과학적 목표나 초역사적인 합리성의 기준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지식이건 그것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소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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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그 지식이 절대적 시초도 아니고, 절대적 종착점도 아니라는 사실에 당장 접하게 될 것이다. 학문적 용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같은 계열의 지식들이 동일한 어휘로 나타내고 있는 개념도 서로 모순될 만큼 다른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학문의 개념들은 부단히 변증법적으로 변전한다. 흔히 분석철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개념의 변전과정을 그들 나름의 처방적 정의로 고정시켜 대치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비현실적인 시도를 용인하는 현장의 학자들은 없다.

  과학에 있어서 이성은 보편적인 것일 수 없으며, 비이성(unreason)은 배제될 수 없다. 과학적 지식들도 역시 그것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편견과 실수를 포함하고 있고, 또한 그로 인한 자만심, 열정, 즐거움 등을 담고 있다.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의 고집스러운 추구 그리고 그에 대한 열정 등이 과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적인 요인들을 배제하고는 지식을 생산하고 발전시키며 정당화하기가 어렵다.

  학문은 지식의 창조과정으로서 이에 대한 설명이 없는 학문론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분은 특히 교육과도 유관한 것이므로 교육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지식의 창조과정에 대한 타당한 설명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지식의 창조과정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리적 분석은 논리분석자가 스스로 자인하고 있듯이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 실례를 우리는 이른바 “메논의 딜레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얻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적인 난점을 <메논(Menon)>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 논리는 대충 이렇다. 당신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든가, 아니면 모르고 있다. 그런데 만약 알고 있다면 당신은 찾을 필요가 없으며, 알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고 또 찾으리라는 기대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인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역사를 통해서 지식이 엄청나게 창조되고 확장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논리적 분석 자체가 학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방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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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지식의 창조과정을 생략하고 있는 공허한 논리적 분석을 앞세우는 철학적인 논의가 교육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외래의 학문을 도입하여 모학문으로 삼고 있는 교육학의 경우에 분석철학적 사조는 아직까지도 정세의 변화에 둔감한 교육학도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전형적인 예를 들어보자. 교육의 관점에서 인식론을 소개한다는 취지를 내세운 쉐플러(I. Scheffler)는 그의 저서 <지식의 조건(1965)>에서 지식의 세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p.11).


X는 다음의 경우에만 Q를 안다.

(1) X는 Q를 믿고,

(2) X는 Q에 대한 적절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3) Q는 진리이다.


  이것들은 각각 신념조건, 증거조건 그리고 진리조건으로 불린다. 쉐플러는 이러한 조건들에 기초하여 분석철학의 관례를 따라서 여러 가지 교육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말의 용례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예컨대, “X가 Y에게 Q를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약정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모든 교육적 용어가 이러한 논리의 일관성을 토대로 구성되면서 그것들을 교사들이 진리로 알고 받아들일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쉐플러 자신의 이론 자체가 그러한 진리의 조건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마디로 그가 말하는 지식의 조건들은 앞서 분석철학의 특징처럼 너무도 탁상공론적이다.

  쉐플러는 진리의 상대성을 부인한다. 그는 경험상 지식이 오류가능성이 있지만, 진리 자체는 불변하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가르침과 배움의 조건으로 지식의 진리조건을 전제한다. 이러한 논의는 철학이 주장하고자 하는 합리적 분석의 틀에 비추어 볼 때, 흥미롭고 간편한 지적 유희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진리의 조건을 갖춘 지식이 실재하는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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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다. 그러한 의미의 지식만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면, 교육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 역사상 실재했던 지식은 거의 예외 없이 상대적인 것들이었다. 한때 진리로 인정받았던 것들을 이후에 부정해 온 것이 학문의 역사이다. 교육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과정에 참여해 왔던 것이다.

  실재하지도 않는 것을 단지 논리적인 명료성만을 위해서 가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진리를 대면해야 하는 학문적 태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학교교육은 쉐플러의 것과 같은 환상적인 지식관을 토대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그러한 환상을 시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식의 상대성을 시인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규정하는 현실적인 교육관을 정립하는 일이다. 또한 위의 증거의 조건 역시 논리의 편의를 따르는 안이한 해결이다.

  후에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무엇이 지식의 증거가 되는가 하는 것도 항상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우선 진리판정에 대한 어떠한 객관적인 기준이나 증거가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자체가 이제까지의 인식론에서 허다한 의문으로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그 난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고 있는 난점을 해소하고 교육의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일의 순서에 맞다. 무엇이 진리규정의 난점이며, 교육은 어떻게 그러한 난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는가, 또 실행되어야 하는가? 쉐플러의 개념분석적 접근은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해결방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기서 분석철학이 학문과 교육을 접맥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고, 우리의 관심과는 동떨어진 측면들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쉐플러처럼 지식이 진이거나 위로 판정될 수 있고, 그것을 전제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차츰 우리의 논의에서 분명해지겠지만, 진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분법으로는 쉽게 판가름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가정하고 그것의 논리적인 명료성 · 일관성 · 엄밀성에 집착하는 것은 아직 장래가 불확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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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한 치도 어김이 없는 옷의 치수를 맞추는 것처럼 자기 제약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만을 가져온다. 학문은 발전하고 있고, 그 중도의 지식은 그것이 지향하려는 방향을 따라 언제든지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발견의 과정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구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하는 것은 가공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발견의 과정 속에서 그것에 대한 정당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것이 정당하다는 확신과 자각이 전제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어떠한 지식이 그에 대한 정당화의 절차가 없이도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막에서 나침반이 없이도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과 같은 우연을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하나의 발견을 한다는 것은 배움의 과정을 거쳐서 전과는 다른 전략을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다른 전략을 통해서 발견이 확인된다. [각주 5: 이에 해당하는 좋은 예가 있다(Peursen, 1981, p.180). 가령, 우리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하려면 유클리드적인 전략을 버려야 한다. 만약 그 전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상이거나 이하이다”라는 말은 엉터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직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의 현상은 매우 복잡해서 그 현상의 이면에는 아직도 불확실한 것이 많다. 거기에는 온갖 암묵적인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폴라니(1981)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청한다.


  발견에 대한 예견과 발견 자체는 모두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그들의 타당성을 규정하는 명시적이고 비인격적인 기준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어떠한 경험적 진술의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三重으로 불확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명세화할 수 없는 단서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단서들을 정의될 수 없는 원칙에 의해서 통합하고 있고, 또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술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의 불확정성을 제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과학을 단지 하나의 의미 없는 가상물로 대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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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이란 유능한 탐구의 결과에 불과하며, 그 유능함은 결과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그 자체가 형성되는 과정 속에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준거를 지니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탐구가 탐구의 주체에게 주는 새로운 경험이다. 쉐플러를 포함하는 분석철학자들은 지식이 창조되고 발견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스스로 무관심하다고 공언하면서도 자신들이 지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폴라니가 우려한 일, 즉 탐구의 과정에 작용하는 불확실성을 무모하게 제거하는 일을 시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탐구 자체의 과정 안에서 작용하는 진리의 상대적인 체험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우리는 이러한 분석철학적 입장을 교육에 적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석철학자들이 봉착하고 있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교육에 의해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우리가 하권의 제 7장에서 제안할 이른바 “敎育的 認識論”은 어떠한 특정한 순간에 있어서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이 과정적 측면을 해명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더 추궁할 주제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이고 항구불변하며 보편적인 진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지식의 진위를 절대적으로 규정해 주는 어떠한 기준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교육은 현실적으로 있지도 않는 절대적인 진리를 전제로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절대적인 지식보다는 상대적인 지식을 가정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교육은 상대적인 지식들 사이의 우열을 확인하는 하나의 절차를 내재하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진리를 그 결과로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끝없이 접근하는 일이며, 교육은 그 과정에서 진리를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추구하는 과정이 없이 새로운 지식이 나올 수 없으며, 그 지식의 정당한 평가 역시 추구의 과정을 생략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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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인지심리학


  학문계에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은 사실의 문제로서 철학자들이 특별히 이에 대한 해명을 해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심리학이 그 대안으로서 주목을 받을 수도 있다. 자연과학의 엄격한 통제와 관찰이 인지현상의 연구에 도입될 때, 우리는 자연과학에서 눈부신 설명적 업적을 성취했던 그러한 방법론이 학문 일반의 해명에까지 확장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심리학에서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분야가 있다면, 인지심리학이 될 것이다.

  심리학은 인간에 관한 지식의 과학적 검증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철학으로부터 분리해 나온 학문이다. 이 학문은 기본적으로 인과법칙에 의한 설명체계를 추구하는 자연과학을 모델로 삼고 있다. 심리학의 대상은 행동이며, 행동은 자연적 현상에 국한된다. 그것들은 기계적인 인과론에 의하여 설명된다. 초기에 그 연구대상이 주로 인간 이외의 단순한 생물체였다는 것은 그러한 취지와 무관하지 않다. 쥐 · 비둘기 · 개 · 침팬지의 행동연구의 모델이 인간에게도 적용되어 이른바 학습의 현상이 연구되다가 그것을 인간에까지 일반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 왔다.

  대부분 행동은 환경과의 함수관계 속에서 종속변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자연과학에서 널리 쓰이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개념이 행동의 변화를 구명하는 학습이론에 도입되었다(Hilgard & Bower, 1975). 동일한 자극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률적인 반응을 전제하는 모형은 초기의 하등동물의 연구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예언력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그러한 전제가 적용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증거가 점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자극과 반응 사이의 수많은 매개과정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매개과정은 유기체의 개인차에서 기인될 수도 있고, 혹은 그 내부기제의 복잡성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인간 고유의 인지현상을 다루기 위해서 근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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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한 인지심리학 혹은 정보처리이론은 이 중 후자의 입장에서 문제해결을 모색한다. 즉, 인간은 복잡성의 수준에서 다른 유기체와 차이가 나지만, 종류의 면에서는 동일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하에 인지심리학은 유기체와 종류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복잡성의 면에서만 차이가 있는 물리적 기제를 밝히는 방식으로 인지현상을 다루고 있다.

  근래에는 이른바 정보처리이론에까지 심리학의 관심영역이나 연구의 주류가 발전되고 있다(Lindsay & Norman, 1972). 학문과 관련하여 정보처리의 인지심리학이 관련을 맺을 수 있는 탐구의 영역은 인간의 지식에 대한 사실과 그것을 획득하는 데 작용하는 기제에 관한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는 이러한 것들을 인과적 측면에 한정된 초보적인 모형과 언어로 환원하여 해명하고 있다. 비교적 조작과 측정이 용이한 변인들 간의 관계를 제한된 범위 내에서 탐색하는 연구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법과 번잡스러운 연구활동이 가져온 소득은 우리가 본 저서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문의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비천할 정도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심리학의 역사에서 비교적 고급의 행동현상을 취급한다고 하는 정보처리이론의 주된 내용은 인간에게 어떻게 자극의 형태로 정보가 입수되고, 저장되며, 또 재생되는가와 관련된 기계적인 부분들이다. 그 동안 지각현상 · 정보의 기억 · 정보의 재생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밝혀졌을 뿐이며, 컴퓨터와 인간의 지능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실정이다. 이는 우리가 인간의 지식이 생산되고 창조되는 과정에 있어서 철학이 미치지 못하는 모종의 대안적 설명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연구실적이다.

  혹자는 이러한 결과를 두고 심리학의 출발이 늦었고, 또 아직도 충분할 정도의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원인은 보다 근본적인 데 있어 보인다. 우선 대상과 방법의 면에서 학문과 같은 인간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예컨대, 컴퓨터는 기계적인 고안물로서 그 자체가 지식을 창조하고 그것에 대해서 정조적인 감응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컴퓨터의 작동방식을 연구하여 인간적 활동의 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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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모델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정보를 재생하는 컴퓨터와는 전혀 다른 능력과 과정에 의해서 학문활동을 한다. 인간은 정보의 보관과 재생에 있어서 컴퓨터보다는 부정확하지만, 자신의 오류를 식별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방법의 면에서도 심리학은 학문과 같은 인간의 창조적인 활동을 포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정통파의 심리학자들은 객관성과 연구결과의 재생이라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심리학의 내규로 고집하고 있다. 그 내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심지어 생물현상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목적론적 측면조차도 대부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 자기비판적으로 지적되고 있다(Brown, 1974). 이로 인해서 학문과 같은 행위에 관계되는 복잡하고 인간적인 측면에 대한 지식을 희생시키고, 과학의 엄밀함만 추구하는 무의미한 연구결과들을 번거롭도록 전문적인 용어와 수치로 치장하면서 양산하고 있다.

  인간에게도 자연과학이 설명하려는 물체적이고 생물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자연과학의 내규에 준하는 그러한 연구의 결과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는 결코 학문과 같은 현상이 포착될 수 없다. 학문계에 대한 이해를 얻으려면,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한다. 예컨대, 감각자료가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 세상은 낱낱의 원소들로 분해될 수 있다는 것, 수학이나 논리라는 형식언어가 가장 정확하고 의미 있는 지식의 형식을 마련해 준다는 것, 지식의 문제는 가치나 감정의 문제와 별개라는 것 등등의 기본가정은 물체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영역에서조차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한 인식론적인 그물에 인간의 학문활동이 포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앞 절에서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저명한 자연과학자들의 환경과 심리적인 특성을 연구한 사례(Roe, 1961; Mitroff, 1974)를 든 바 있다. 이 경우도 역시 심리학이 고수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연과학적 패러다임의 한계 때문에 학자 혹은 학문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얻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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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것들이 인간의 인지현상, 예컨대 그러한 연구물을 생산하고 있는 심리학자들 자신의 활동을 의미 있게 심층적으로 해명하기에는 너무도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연구들은 대부분 학자들의 특성을 종속변인(지능 · 태도 · 흥미 등)으로 삼고, 그들의 환경적 특성(유년기 경험 · 가정배경 · 기타 사회경제적 지위 등)과의 함수관계를 파악하는 인과적 모형을 따른다. 이 때문에 학자들의 특징인 개인적인 창의력과 자유에 의한 행위의 의미가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심리학이 자연과학의 모형을 따르고 또 인간현상을 자연적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적어도 우리가 원하는 학문현상에 대한 그들의 해명은 실상과는 다른 저차원의 것에 머무를 것이다. 학문활동은 일종의 문화적 활동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서 경험주의의 일면적인 틀 안에서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독자적인 정신적 내실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것 자체는 자연의 범주에 들기보다는 문화의 범주에 든다. 따라서 자연과학 혹은 자연과학자의 고유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다른 다양한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인간과 자연현상은 근본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으며, 그 전형적인 예가 학문활동이다. 학문하는 행위는 인간이 대상세계를 구성하고 해석하며, 또 그 해석 자체를 초월하려는 강한 목적의식에 의해서 추진된다. 이러한 행위들은 운동과 같은 인과적 개념으로는 충분하게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자극의 제약을 받지 않는 융통성 있고 창의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오류를 범하며, 이를 극복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환경을 구성하며, 그 구성된 환경을 현실로 전환시킨다. 인간은 전체 속에서 부분의 의미를 파악한다. 우리는 학문이라는 인간적인 활동에 대해서 조급하게 자연과학적인 엄격성을 도입하기 전에 그 대상의 특이성을 수용하는 좀더 넓은 안목을 확보해야 한다.

  후에 더 자세하게 논의할 기회(제 5장)가 있겠지만, 학문활동 자체가 실증주의적 방법을 초월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그 결과물은 원인과 결과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 해석과 이해로만 접근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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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따르고 있는 실증주의적 방법 이외에 이를테면 개념분석법 · 현상학적 방법 · 해석학적 방법 · 구조주의적 방법 그리고 변증법 등의 제반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이들은 학문을 하는 방법이며, 따라서 그 세계 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자들도 그러한 방법적 지평의 확장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또 다른 방법론 혹은 인식론을 추가하려고 한다. 그것은 “교육적 인식론”이다. 학문계는 자연현상과는 다른 문화현상, 그리고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는 수도계를 형성한다. 교육은 수도계의 실재를 확인하는 과정의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그 실현된 본성을 자각하는 과정인 것이다. 학문과 학자라는 대상은 전혀 다른 고차원의 인식적 안목에 의해서만 제대로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 본 저서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한 방법론적인 가능성은 <하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할 부분은 이러한 의미의 학문에 대한 인식방법은 이제까지 타학문의 체계를 적용하는 데에만 급급해 왔던 현존 교육학의 전통을 파기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교육학은 심리학의 과학성을 내세워 그 기계론적인 도식을 ‘교육’의 현상에 적용한다는 식의 범주착오를 범하여 왔다. 교육의 목표를 행동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계획과 실행을 하며, 그 결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식의 관행적 도식은 알고 보면 모두 심리학적인 전통의 파생물인 것이다(Bobbitt, 1918; Tyler, 1949). 앞으로 분명하게 밝혀지겠지만 교육현상은 그러한 심리현상과 질적으로 다른 자율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 [각주 6: 후에 밝혀지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인간성을 ‘品位’라는 개념으로 나타내고자 한다. 품위는 심리학의 ‘行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간적 범주이다.] 은 실천에 의해서 주체적으로 자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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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지식사회학


  마지막으로 사회학적 관점 가운데 하나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회학의 한 전공영역으로 지식사회학이라는 것이 있다. 이 분야의 학자들 역시 심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업이 철학적 연구라기보다는 실증적 연구라고 생각해 왔다. 지식사회학은 지식이 사회나 문화내의 여타 존재적 요소들과 맺는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넓게 보면 지식사회학자들은 관념이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고 성장한다는 점, 그리고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 개인이 태어난 모태로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9세기 이 분야의 주된 공헌자로서는 마르크스(K. Marx: 1818~1883)와 뒤르켐(E. Durkheim: 1858~1917)을 들 수 있다. 최근의 지식사회학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학자들로는 만하임(K. Mannheim)과 슈타크(W. Stark)를 들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며,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각주 7: 본 저서에서 Marx의 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주로 McLellan(1982)과 Elster(1985)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사람의 사회적 활동들 가운데서 물질적 하부구조를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구별하여, 전자가 후자를 결정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순수해 보이는 이론도 언제나 그 시대의 사회질서와 ‘생활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고양식과 이론들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내포한 신념체계로서 사회적 계급에 따라 사람들은 그 이데올로기에 물들게 된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적 지식사회학의 특징이다.

  이러한 설명과는 대조적으로, 뒤르켐(1912)은 인간 사고의 기본적인 범주의 발생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그는 시간과 공간, 힘과 모순이라는 관념이 집단에 따라 다르고, 또한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시기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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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현상이 부분적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미분화된 소규모의 사회에서는 종교적 사유가 집단의 응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그 내부가 분화되면서 지적인 활동은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점차 독립된다. 과학적 사고는 바로 그러한 독립의 한 결과인 것이다. 이처럼 그는 과학이 종교를 대치하면서 인류역사에서 점차 객관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식이 등장한다고 보았다. 뒤르켐(1895/1964)에 따르면, 이제 과학은 주변의 현상들에 문화적으로 결정된 관념의 형태라기보다는 “그들의 내적인 속성과 관련하여”(p.35) 드러내게 된다.

  이 두 가지 큰 흐름 가운데서 오늘날 크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적 관점이다. 사회적 조건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고 있다. 이는 다분히 그 주장의 타당성보다는 논쟁성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초기의 지식사회학자들은 주로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주된 관심대상으로 삼았다. 지식사회학자들의 지적대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주제는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1929/1976)> [각주 8: Mannheim은 모든 인간적인 사고가 사회구조 속에서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입장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에서는 상상이 현실적 가능성을 앞당겨 오는 어떤 종류의 변혁작용을 지님에 비해서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은폐하는 작용을 지닌다.] 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체계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각주 9: Mannheim은 지식사회학을 사회학적인 학문분야로 파악하고 자신의 저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1976)>의 제 5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식사회학을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지식사회학은 지식(knowledge)과 존재(existence)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p.237). 지식사회학은 “이론들 및 그 파생체들을 형성시키고 또 그것을 일부로 하고 있는 집단들 및 총체적인 상황의 전형과 밀접히 관련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사유와 사회적 존재 간의 내적인 연관은 …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맥락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정의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 지적인 생활이 현존의 사회 · 경제적 세력들과 어떤 형태로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우리 연구의 테마이다”(p.277).] 그는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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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한 특정적 개념과 전체적인 개념의 융합을 최초로 달성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p.66)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전체적인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일반적으로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이론이 지식사회학으로 발전하게 된다”(p.69)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조는 다분히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물론은 정신을 고도로 조직된 특수한 물질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것을 극단으로 몰고 가면, 학문적인 지식이 단순히 사회적 사실이나 계급적 이해관계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러나 만하임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론이 지니는 당파적 성격을 지양하려고 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신념은 밖에 존재하는 경제적인 조건보다는 전체적인 사회상황에 의해서 제약된다고 본다. 그는 사유를 역사주의적인 입장에서 각 시대의 사회구조에 의해서 설명하고, 그 전체적인 종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체적인 종합의 사명을 달성하고 당파적인 정치로부터 생기는 모순을 해결하는 비계급의 중간층으로서 그는 특수한 집단의 존재를 인정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의 지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집단은 이른바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이다.

  만하임에 의하면, 인텔리겐치아들은 적어도 근대 민주사회에서는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충원되지만,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가운데 당파적 ‘이데올로기들’의 상호 모순적이면서도 보완적인 일면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서 생명 없는 획일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다양성이 어느 정도 보존되는 복합적인 통일성으로 나아간다. 만약 교육의 수준이 단순한 기술과 정보의 전수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치와 시야를 확대시켜 계급적 이해와 사회적 상호작용에 따른 흐름에 상대적으로 덜 휩싸이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매우 그럴 듯한 추론을 도출해낸다.

  지식사회학은 지금의 것보다 훨씬 정련화를 요구하는 분야이다. 그리고 다행히 최근의 경향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늘날 지식사회학은 초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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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관점에서 벗어나 좀더 서로 다른 국면들을 구분하여 한정적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일반적 관념과 사회와의 관계도 앞서의 마르크스적인 계급성과 물질의존성과는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가 발표된 지 약 30년 후에 등장한 슈타크(1958)는 지식사회학을 논리적으로 이데올로기론에 선행하며,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본다. 지식사회학은 특수한 세계관의 형성을 문제로 삼으며, 이데올로기론은 그 세계관의 변형을 문제시한다. 전자가 긍정적인 현상을 다룬다면, 후자는 부정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는 사고의 사회적 결정성과 이데올로기적 결정성이 서로 다른 것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넓은 의미에서 지식사회학은 관념 일반의 기원이 어떠한 적합한 사회적 상황과 발생론적인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는 관념이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고 성장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자신이 태어난 모태로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 사회적 존재는 반드시 계급적인 것만은 아니다. 또한 사회적 관념에 대한 사회적 결정성은 사회를 구성하는 하위문화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른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발전과정에서 학문과 사회적 조건 간의 예외적인 관계가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논리에 따르면, 이러저러한 특수한 관념복합체나 개별적인 예술의 양식들은 하나의 상부구조로서 물질적인 생산양식이라는 하부구조를 반영한다. 따라서 학문이나 학자들의 사고 역시 그러한 계급적인 이데올로기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사회적 하부구조”의 개념은 불행하게도 명료하지 못한 개념이다. 학문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의 발전이 건실하고 명쾌히 진척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불명료성이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지식사회학에서 사회적 사실은 학문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지원체계로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첫째, 학문적 지식은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관념체계라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계급 혹은 계층과 유관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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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지식은 이데올로기적인 것과 구분된다. 만하임과 슈타크는 과학적 지식의 독자적인 지위에 대해서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에 관한 관념과 물리의 세계에 관한 관념 간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연과학자들은 불변의 자연과 그들의 공식 간의 대응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적 조건과는 독립해서 지적인 합의를 볼 수 있다. 사회적 사실에 관한 신념체계의 경우 사회과학적 지식이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결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데올로기는 학문적 지식과 구분되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것의 사회적 결정성을 부분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주제로 보면서도 학문적인 지식을 이데올로기와 같은 계급적 이해관계와는 분리시켜 보아야 할 대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둘째, 과학자 혹은 학자라는 집단이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독립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 학자들의 지식도 자기 시대의 일원이고 대변자일 수 있다. 그만큼 학자들을 에워싼 학문 외적인 사회적 환경에서 지식의 원천을 찾는 것도 흥미있는 접근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을 단지 사회의 물질적 토대 혹은 자신이 소속한 계급의 대변자라고만 본다면, 그것은 학문계 자체를 제대로 직시한 것이 못 된다. [각주 10: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Marx 이론 자체도 관념들의 집합이고 관념은 계급적 배경을 지니게 마련이라면, 그의 이론도 예외 없이 그의 계급적 배경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Marx의 이론은 Marx 자신의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가? 당시 독일 중간계급의 대다수 후예들이나 러시아 소도시 출신의 대부분의 청년들은 직업적 지위나 정신에 있어서 공히 쁘띠 부르주아적이었지만, 그 중에서 Lenin 같은 세계적 인물이 출현하였다. ‘프롤레타리아적’임을 표방하고 있고, 또 사실 유럽대륙의 일부분의 프롤레타리아로부터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념체계가 사실은 그 계급의 일원이 아닌 Marx와 Lenin이라고 하는 두 상층계급 출신자의 접목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에서 Weber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Marx와 Lenin이 지배계급 출신이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그들의 사고가 지니는 실체를 제대로 밝혀 낼 수 없다. 여기서 학자들의 사고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식의 지식사회학적 설명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다(Stark, 1958, pp.371-382).] 학문적 지식의 주인과 예술적 가치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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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는 개인이며, 그 가치는 개인에 의해서 확인되며 전달된다. 마르크스적 논조의 지식사회학을 내세운 만하임조차도 인텔리겐치아라는 집단을 인정함으로써 과학적 사유의 독립성을 다소나마 인정한 바 있다.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인간의 관념이 제약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있는 사회학적 연구결과이다. 이에 따르면 지식은 사회에 따라 상대성을 지닌다. 또한 상이한 사회이론의 주창자들 사이의 갈등은 종종 그들이 소속한 집단과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을 내포하며, 과장과 비본질적인 논쟁을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대적인 것을 모두 진리로 인정할 수는 없다. 지식사회학은 기본적으로 관념의 타당성보다는 기원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둔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식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에 관한 아무런 시사도 담겨 있지 않다. 이 점에서 그것은 인식론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본 저서의 다른 곳(2.3.5.)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지만, 지식의 사회문화적 상대성과 진리의 추구라는 학문적인 과제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 구분에 따른다면 지식사회학은 후자의 범주에서 학문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그것이 취급하는 관념은 사회적 조건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러한 주장을 세우는 지식사회학적 지식의 타당성은 학문 내적인 규준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한다. 만약 모든 사유를 사회적이거나 계급적인 이해의 반영으로 본다면,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지식사회학은 어떠한 사회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가? 그러한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도그마이지 본래적인 학문연구의 취지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창조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사회와는 구별되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학문적인 지식은 대중적 신념 및 상식과는 달리 특수한 학문공동체의 산물이다. 이제 과학의 사회학이라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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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분야가 출현하면서 이 특수한 공동체는 지식사회학이라는 일반적 범주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어떠한 창의적인 학자의 학문적인 업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학자가 속하고 있는 특수한 사회적 배경이나 그와 타자와의 상호작용적인 삶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머튼(R. K. Merton, 1973) 같은 사회학자는 과학공동체의 규범문제를 다루면서 이러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과학이라는 제도는 보편성 · 공유성 · 무사공정성 · 조직화된 회의주의라는 규범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멀케이(M. Mulkay, 1979)는 최근의 과학사적인 연구를 검토하면서 사회적 표준과 과학적 지식의 생산 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재규정한다.


  표준의 의미는 항상 사회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어떠한 특수한 표준은 외견상으로 서로 다른 행위의 넓은 범위와 일관성을 갖도록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의 생산을 단순히 어떠한 특수한 규범적 공식에 따름으로써 생겨나는 결과라고 볼 수 없다. 나는 대신 과학의 규범을 그 구성원들이 자신과 그들 동료의 행위를 위해서 의미를 섭외하는 데 사용하는 용어들로 취급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 과학 내부에서의 사회적 섭외에 관한 연구는 현재로서 별로 없는 형편이지만, 그 결과는 구성원들의 관심, 그들의 지적 · 기술적 책임감, 가치 있는 정보에 대한 구성원들의 통제 그리고 과학적 권위에 대한 그들의 주장의 강도와 같은 요인에 의해서 영향받는 듯하다(pp.93-94).


  지식사회학은 사고의 사회결정성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개인정신의 창조력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또한 집단은 그 구성원의 사고를 무조건 기계적으로 결정한다기보다는 집단에 따라 개인의 창의적인 사고를 권장하고, 그들 간의 자유로운 경합에 의해서 더 나은 것을 선택해 나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집단 자체의 테두리 내에서 향유되는 개인의 자유를 반드시 해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학문공동체의 영향을 받지만, 학문공동체는 구성원의 행위나 정신에 있어서 자유를 허용한다. 오히려 성원들의 사고 및 믿음들이 불협화음적 변조들을 보이며, 그 충돌을 통해서 해당 분야의 학문이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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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일반 사회와 학문공동체는 그 내규의 특징과 자유의 진폭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본 저서의 하권 제 9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넷째, 존재가 사유를 결정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과관계의 상호성을 또한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모종의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할 때, 그 역이 되는 인과적 관계도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관념이 그 독특성에 의해서 다시 존재영역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일방적인 인과관계보다는 쌍방적인 것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관념은 반드시 사회적 조건에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경우 동시대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특출한 인물에 의해서 지식이 형성된다. 위대한 학문적인 발견은 단지 사회적인 연원을 따져서는 드러날 수 없는 독창적인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지식은 거꾸로 대상영역 혹은 실천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연과학에서의 발견, 인간에 관한 새로운 인식체계 등이 이전의 통상적인 생각에 변혁을 주고, 그것이 다시 그 대상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특히 그것은 제 4장에서 다룰 응용학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비록 간결하나마 지식사회학이 학문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매우 제한적이고 특수한 점이 있음을 지적함과 아울러 그것들을 본 저서에서 취사선택하는 방식에 대해서 언급했다. 우리가 학문에 관해서 설명할 부분은 어디까지나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학적인 관점이다. 학문과 교육 사이의 관계를 밝히려는 본 저서에서는 사회학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와는 분명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이는 흔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교육’과 연관시키는 제반 지식사회학적 논의(예컨대 Apple, 1979; Giroux, 1981)와 대비되는 입장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논의는 교육과 “학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혼동하고 있다. 차츰 분명하게 되겠지만 이데올로기는 사회화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교육의 대상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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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학문적인 지식을 분리시키고, 교육이 후자와 관계하는 부분만을 다루게 될 것이다.


  1.1.7. 교육학적 접근의 모색


  우리는 지금까지 학문 일반의 속성을 그것보다 하위영역인 분과학문의 안목에서 보려고 할 때 부딪치는 제반 한계와 난점을 간략하게 검토하였다. 분과학문이 스스로를 일반인들에게 안내함에 있어서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인문 · 사회과학의 제 분야, 특히 그 중에서도 언어의 분석에 치우치는 분석철학, 경험주의 인식론에 갇혀 있는 인지심리학, 지식의 사회적 근원을 다루어 왔던 지식사회학 등이 학문의 현상을 다룸에 있어서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간략하게 다루었다. 어떠한 관점이건 간에 우선 지적할 것은 그러한 시도는 일면성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학문은 그만큼 아직도 다른 분과학문적인 조명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국면들을 가지고 있다.

  본 저서의 목적은 그러한 다양한 분과학문의 시각에 “교육학적 관점”을 추가시켜 보려는 데 있다. 추가라는 말은 기존의 학문이 간과하고 있는 학문의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교육학은 기존의 분과학문, 예컨대 앞서 지적한 철학 · 심리학 · 사회학 등과는 구분되는 고유한 이론적 맥락을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간단하게 보이지만, 이전에 한 번도 시도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지난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교육이 학문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은 직감적으로 매우 호소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그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이 과정을 생략한다면 우리는 관련을 따지기도 전에 개념의 모호성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한 발자국의 진전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이라는 말은 널리 쓰이고 있지만, 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그 의미는 너무도 다의적이고 확장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이 무엇인가를 구체화하는 데에 거의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못할 정도로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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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개념을 조사해서 그것을 망라한다면, 이러한 결론이 나올 것이다. 교육은 모든 것이다. 교육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는 개념은 결국 아무 것도 의미하지 못한다. 그것을 다시 뒤집어서 말한다면, 교육은 없다는 말도 할 수 있다.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것을 학문과 연관시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개념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이다. 우리는 본 저서에서 ‘교육’이라는 말을 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하여 저자와 독자 사이에 아직 합의된 바는 없다. 우리가 본 저서에서 교육학적인 시각을 보충하려고 할 때 적용될 교육이라는 개념은 그러한 다양한 의미들을 모두 포용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교육관 가운데 서로 대비되는 것들을 우선 지적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상의 문제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우리가 통상 접하는 교육관은 크게는 일반상식으로서의 교육관과 교육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관의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상식적인 교육관은 대개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을 교육으로 보는 관점이라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교육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육관이다. 독자는 아마도 이 저서에서 근거하고 있는 교육관이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식에 의존하는 교육론을 우리가 더 이상 반복할 필요는 없으며, 이 점에서 우선 본 저서가 의거하고자 하는 교육관은 학문적인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서 그 교육관은 현존하는 교육학이 규정하는 교육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현존하는 교육학과 구분되는 교육학이 있다면 그것은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점이 우리가 더 깊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통과해야 할 하나의 난관이다.

  교육이 학문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우선 일상인의 상식과는 수준이 다른 고도의 정교하며 이론적인 개념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존재적 성격은 당연히 타학문이 아닌 교육학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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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교육적인 측면이란 이제까지 교육학이 누적시켜 온 관점을 학문 일반에 적용하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교육학은 그것이 교육이라고 하는 고유한 현상을 포착하는 별도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으리라는 통상적인 기대와는 어긋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장상호, 1986, 1990). 교육학의 역사에서 대상을 순수하게 파악하려는 어떠한 체계적인 시도조차 없었다. 이는 본 저서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분명해질 것으로 보지만, 우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존하는 교육학은 다른 순수학문의 경우에서 보듯이 고유한 인식대상을 포착하는 개념을 구성하려는 열망보다는 특정한 시대적 과제와 실제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교육학은 ‘학교’라는 제도의 출현과 더불어 출범하였으며, 발생의 초기에서부터 학교에 대한 관심을 최우선시하였다. 초기에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교사교육의 내용이었다. 아직 교육에 대한 나름의 개념정립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이미 분과학문의 위치를 향유하고 있었던 제반 이질적인 학문들이 교사교육의 교직과목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단의 이질적인 학문들이 모여서 교육학이라는 학문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즉, 지금의 교육학은 외래의 학문의 체계를 단순히 응용한다는 명분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학문이 아무런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교육학의 영역으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타학문에 종속된 상태에서 오늘날 학교라는 생활공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부터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귀결의 하나는 교육학내에는 개념적인 동질성이나 응집성이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모학문적인 사실들은 명목상으로 중심점을 지니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들이 모인 전체로서의 교육학은 그것을 구성하는 각각의 이질적인 사실들을 향해서 원심적으로 이탈한다. 철학적 논의 · 심리학적 사실 · 사회적 사실 · 행정적 사실 등이 각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됨으로써 논의의 맥락이 그 때마다 달라질 뿐만 아니라, 이들 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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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사실들을 동질적인 것으로 혼동하는 개념적 혼란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는 분석철학 · 정보처리이론 · 지식사회학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차적 통로는 언제나 일차적 통로보다 부차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 교육학의 능력으로 학문의 이해에 공헌한다는 것은 이미 기존의 학문에서 한물 간 것으로 생각되는 이론을 잉여적으로 재사용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교육학이 봉착한 문제는 개념적인 혼돈에 그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이 분야에는 교육에 대한 고유의 개념이 없다. 복잡한 이야기는 차츰 본 저서의 다른 곳에서 하기로 하고, 이 문제를 간단한 논리를 사용하여 이해하기로 하자. 교육학이 아닌 학문들이 교육학이 될 수 없다. 그때그때 각각의 분과학문의 맥락에서 ‘교육’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지칭하고 있는 것은 기실 교육과는 거리가 있는 이질적인 사실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이라는 현상이 바로 교육학에 의해서 이질적인 사실로 왜곡되는 아이러니에 접하게 된다.

  건설적인 논의를 전개하려면 ‘範疇錯誤’ 혹은 ‘論點離脫’을 피해야 한다. 그것은 예컨대, 모양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야 될 자리에서 색깔을 거론하는 잘못을 의미한다. 항상 교육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교육학자들이 전면에 나타나 문제해결을 자처하고 나서지만, 막상 그들 자신들이 논점이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건설적인 해결을 하기도 전에 지리멸렬한 에너지 낭비를 초래한다. 말하자면, 교육현상 자체는 일반인의 상식에 의해서, 그리고 다음에는 각각 다른 외래학문들을 모학문으로 삼고 있는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왜곡되며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학이 교육현상, 더 나아가서 교육을 통한 학문의 이해나 진흥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일은 애초부터 헛된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독자에게 학문에 대한 교육학 고유의 공헌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본 저서는 당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모종의 새롭고 고유한 의미의 교육관이 적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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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본 저서가 지칭하는 교육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전의 교육관을 토대로 고유한 의미의 교육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다. 만약 교육이 교육답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교육관을 청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잡은 학문이라면, 그것을 바로 잡는 작업이 언제라도 착수되어야 한다. 전면적으로 방향을 재조정하고,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교육의 개념적인 문제를 은폐하면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우리는 안락하고 익숙한 관례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 저서는 바로 그러한 잘못된 관례를 타개하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일반인의 상식에 의해서 그리고 교육학자들이 그 동안 아무 반성도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외래학문의 체계에 의해서 소외되고 밀려나게 되었던 원래적인 의미의 교육의 부분을 개념적으로 재정립해야 된다. 그럼으로써 고유한 교육이 우리의 생활 전반에서 활성화되도록 부각시켜야 한다. 분명히 교육은 이전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야 된다. 문제는 어차피 문제를 의식하는 자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교육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나름의 길을 찾기보다는 기존의 학문이 닦아 놓은 타학문의 길을 무조건 따르는 데서 비롯하였다. 우리는 이 저서에서 대동강 물 팔아먹기와도 같은 그러한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육학이 다른 학문과는 구분되는 방식으로 학문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으려면, 이제 그 나름의 길을 찾아야 한다. 즉, 우리를 교육적 사실로 안내하는 새로운 개념적 체계를 세우고, 그 시각에서 교육을 학문과 접맥시켜보는 순서를 택해야 한다. 새로운 길을 닦는 일은 무수한 터널 공사와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다. 또한 새로운 학문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본 저서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교육에 대한 개념은 한정적인 것이다. 우리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교육학적 관점을 택하고자 한다. 이 관점이 무엇인가는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무엇과 혼돈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밝힘으로써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것은 우선 시정에서 상식적으로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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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는 다르다. 만약 교육이 상식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면, 교육에 대한 학문이 별도로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제까지 교육학자들이 말해 왔던 교육과도 달라야 한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재의 교육학은 교육의 본래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인 학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학은 성립단계에서 분과학문이 지켜야 할 하나의 기본적인 규칙, 즉 드러내고자 하는 인식의 대상세계를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지금의 교육학은 교육을 논할 때 논점이탈 혹은 범주착오에 빠지게 되며, 타학문들이 이미 설명한 것을 다시 이차적으로 설명하는 불필요한 잉여적 산물을 내놓을 뿐이다.

교육은 분명히 다원적 세계들의 하나일 것이다. 교육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 등의 다른 제반 인간세계와 구분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유한 맥락을 드러내는 자율적인 개념체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개념은 그것이 소속된 이론적 맥락에 따라 의미가 규정되기 때문에, 교육학은 독자적인 이론적 맥락의 확보를 통해서 자율화되어야 한다. 교육은 비교육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순수화될 수 있다. 혹은 우리의 삶을 교육본위로 경험함으로써 정립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취지에서 최근에 교육을 그 고유의 맥락에서 새롭게 규정하는 ‘再槪念化’를 모색해 왔다(장상호, 1991). 이것은 분명히 기존의 어떠한 학문의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지식체계로서 앞으로 교육학을 하나의 독자적인 분과학문으로 발전시키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이 저서에서 쓰이는 교육의 의미는 새로운 개념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 절과 하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교육에 관한 개략적인 윤곽을 잡는 초기단계의 것이며, 만족스러운 단계에 도달한 것은 아직 아니다. 그렇기는 해도 본 저서는 다른 분과학문의 개념을 빌리지 않고, 교육의 고유영역을 포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환기시키고 싶다. 본 저서는 미숙하나마 그러한 교육의 개념을 학문의 문제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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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는 데 적용해 보고, 이를 새로운 발전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의 교육에 대한 개념이 교육학이 택해야 될 오직 하나의 선택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독자는 독자 나름의 교육관을 가질 수 있고, 또 발전시킬 수 있다. 그 점에서 본 저서의 입장은 “또 하나의 교육관(장상호, 1994c).”인 것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저서는 독자가 생각하는 모든 교육에 대한 개념을 수용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본 저서에서의 새로운 교육관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물론 독자가 포함된다. 따라서 독자는 가능한 한 교육이라는 개념을 특수한 맥락에서 제한적으로 쓰려는 본 저서의 의도에 보조를 맞추어 전통적인 교육관을 일단 접어 두고, 이 저서에서 규정하는 의미체계 안으로 들어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교육을 우리의 생활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학교생활에 국한시키는 잘못된 개념체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현존하는 교육학은 외래적인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생활 속에서의 생생한 교육적 체험을 마치 교육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우리의 교육에 대한 개념을 기존의 개념에 비추어 보는 독자는 엄청난 생소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잘못된 관행과 개념에 의하여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교육의 본래적 양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활 속에 잠재해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개념화되지 않은 교육의 양상을 포착하려는 본 저서의 교육관은 독자가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이해하려고 할 때 의외로 친숙한 것으로 다가설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교육관을 이해하는 방식은 상식과 외래학문적인 개념을 일단 유보하고, 자신의 생활의 일부를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길이다. 그러한 태도를 취하면 교육현상은 마치 잊혀진 고향처럼 자연스럽게 실감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개념은 먼 장래의 발전을 위한 토대라는 의미에서 초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념이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점과 독자의 관점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논리적인 간극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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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를 일시에 밝히는 일을 피하려고 한다. 독자들이 생각하는 교육관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관점이 그 교육관과 충돌하는 가운데 점차적으로 그 면모가 단계별로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저서의 여러 군데를 읽고 또 거듭 읽으면서 그 맥락에 도달하려고 할 때, 교육은 기존의 상식적인 교육관이나 혹은 타학문을 모학문으로 삼는 교육관이 말하는 바와는 참으로 이질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교육은 우리를 중심으로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서 항상 진행되고 있고, 또한 그렇게 진행되도록 노력할 수 있는 실천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독자는 공감하게 될 것이다.

요약해 보자. 교육학은 물론 학문이 범주에 드는 분과학문이다. 교육학은 철학 · 역사학 · 심리학 · 사회학 등 기존이 다른 분과학문들과는 구분되는 방식으로 학문계의 이해에 공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의 교육학으로 학문을 해명하는 방식은 기존학문의 이차적인 통로를 통한 학문의 해명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육학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새로운 학문적인 공헌은 응용학을 자처해 온 기존 교육학의 전통을 답습해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육학은 제반 잡박한 관점이 배제된 독자적이고 순수한 의미의 새로운 개념적 유형과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 저서는 한마디로 이러한 새로운 교육관의 한 가지 응용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작하는 기분으로 우리의 개념을 확장하고 수정하면서 종국에는 교육학을 하나의 당당한 자율적 분과학문의 자리로 격상시켜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 타당성은 서로의 공감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본 저서는 그러한 입증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이 저서를 통해서 만약 이제까지 여타의 분과학문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측면을 부각시킬 수 있다면, 그만큼 새로운 교육관은 정당화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꼭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본 저서에서 주로 다룰 학문의 하나로서의 교육학과 그 대상인 교육을 서로 다른 세계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러한 엄격한 개념구분에 따르면, 교육학과 교육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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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서로 관련은 있으나 동질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자율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육학은 물론 교육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의 일종이다. 우리의 개념에 의하면 교육과 교육학은 서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새로운 교육학은 그 새로운 관점을 교육을 통해서 얻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관점이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 있는 교육을 제대로 파악하고 설계하는 지적인 토대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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