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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자료

장상호. 학문이란 무엇인가 / 1.3. 우리의 역사적 과제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459 목록 댓글 0

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1장 서장


1.3. 우리의 역사적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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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의 역사적 과제


  1.3.1. 학문계의 전래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에 걸쳐 외래의 수도계를 수용해 왔다.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대양을 접하는 반도에 위치하여 우수한 외국문화에 인접해 있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한동안 중국을 거쳐서 불교를 전수받았고,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 후 주로 일본과 미국을 통해서 이제까지 논의해 온 서양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도계의 전래가 주로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학교의 형태가 달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학교에서 택한 교육의 소재가 시대마다 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 소재 이외의 다른 것들을 배제하면서 획일적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은 학교에서 서양의 학문만을 교육의 소재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것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을 세속계의 구속에서 구하고, 인간으로서 자기수양을 꾀하도록 한 것은 도가와 불가와 유가의 덕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화함으로써 오로지 유교 일색의 것만이 수용되고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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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류에는 언제나 현실적으로 다소간의 세속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조선시대의 경우 ‘君子不器’를 표방하고 오직 군자의 도를 구한다는 의미의 ‘爲己之學’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그 주된 내용은 송나라의 성리학설이었다. 중국을 통해서 전래된 경서를 위주로 하는 한문중심의 학문은 退溪 · 栗谷 · 花潭 등과 같은 석학에 의해서 어느 정도 독창적인 학문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교철학의 주류는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학교는 주로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서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조를 거쳐 조선말엽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이렇다할 변동 없이 계승되었다. ‘小中華’의 사대주의가 지배하던 당시의 학교, 특히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기관은 그 체제는 물론, 내용에 있어서도 중국적인 것이 압도적이었다. 다만 교육의 소재가 그때그때의 사정에 의해서 달라졌을 뿐이었다. 19세기 후반에 현존하였던 학교제도를 오천석 선생(1964)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성균관 · 사학 · 향교 · 서원 및 서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성균관을 대학으로, 서학 · 향교 및 서원을 중등학교로, 그리고 서당을 초등학교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들은 현재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대학 · 중등학교 및 초등학교가 계단식으로 하나의 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독립한 교육기관으로 존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육기관을 통솔하고 장려하는 중앙정부의 행정기구로는 최고 행정관청이었던 의정부 산하의 육조(吏 · 戶 · 禮 · 兵 · 刑 및 工) 가운데 하나인 禮曹가 있었고, 그의 長인 예조 판서가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으며, 지방에는 道 觀察使 밑에 있는 六房의 하나인 禮房이 교육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예조는 학교와 과거에 관한 사무 외에 禮樂 · 祭祀 및 朝聘(신하가 임금을 뵙는 일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신을 보내는 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있었다(pp.22-23).


  유교철학에 젖어 있던 우리나라는 점차 서양의 이질적인 문명과 접촉한다. 우리나라와 서양문물과의 첫 접촉은, 굳이 따지자면, 멀리 16세기까지 소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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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주로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을 통하여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과 같은 문명의 利器가 들어왔고 천문학과 역법에 관한 서적이 유입되었으며, 여러 가지 전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양학문의 내용은 이전의 학문의 내용과 너무도 그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이후에 일반적으로 전자를 ‘新학문’ 그리고 후자를 ‘舊학문’이라는 말로 구분하였다. 당시에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는 사상은 물론 구학문, 즉 유학이었다. 신학문은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邪敎로 간주되거나 혹은 異敎로서 탄압되었다.

  이처럼 구학문과 신학문이 충돌하게 된 이면에는 물론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하였지만, 다른 일면으로 이것은 그만큼 양자의 내용이 판이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각주 37: 조동일은 <우리 학문의 길(1993)>에서 ‘신학문’과 ‘구학문’을 이렇게 구분한다. “‘학’이 ‘행’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실천을 위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양에서는 학문하는 사람이 학문 그 자체의 논리에 충실한 연구업적을 내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학자에게 윤리적인 행위에서도 모범을 보일 것을 기대하고,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도록 요구한다”(p.165). 이런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학문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학문’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 저서는 기본적으로 그 가운데 오직 ‘신학문’만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 수도계 혹은 구학문을 경원해서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수도계로서 그것들의 이질성이 너무도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서로 다른 것으로 존중하고 그 중 하나만을 다루는 것으로 논의의 한계를 확정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자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상이한 수도계를 대표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가 · 도가 · 불가 등의 동양의 수도계 혹은 ‘구학문’은 삶의 바른 도리, 윤리적인 행위, 커다란 깨달음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그 본질을 탐색해 나가겠지만, 서양의 학문은 주로 이성적인 논리에 의존하여 대상세계를 이론화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 당시의 선비들은 구학문을 고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동양학문에 대한 수구와 서양학문에 대한 배척은 이후 우리나라가 근대화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신학문은 정권담당세력의 적극적인 수용에 의하여 전래되었다기보다는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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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불가피한 상황과 서구세력의 압력에 의해서 우리 민족에게 수동적으로 부과되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접촉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의 실체가 직접적으로 감지된 것은 西勢東漸의 물결이 거세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였다. 확장일로에 있는 열강의 세력이 “은자의 왕국”을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미 우리 민족은 정치적인 각축장의 한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해안에 개방을 요구하는 서구의 함선이 출범하고, 서구의 문물을 수용함에 있어서 한발 앞선 일본은 이미 국세의 면에서 우리나라를 위압하고 있었다. 주로 유학에 의존해 온 지배계급은 서구문명이 구사회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리만큼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쇄국주의로 서구의 세력을 막아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렇지만 현실의 대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간에 서구문물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것에 적응해야만 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서구문명과 신학문이 처음에는 선교의 수단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다가 대한제국이 일본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일본은 서세동점의 흐름을 미리 감지하고 우리와는 다르게 서구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전통문화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한국이 항상 일본에 앞서 있었던 우월적 지위는 이제 근대화 과정에서 역전되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학교체계를 현대식으로 정비하고, 서양의 학문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각주 38: 일본이 처음으로 현대식 학교제도를 마련한 것은 명치 5년, 즉 1872년이었다. 일본은 그 때 이미 전국을 8대 학구로 나누고, 각 구에 하나씩의 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였으며, 소학교의 교육 연한을 상 · 하를 합하여 8년, 중학교 연한을 다시 상 · 하로 나누어 6년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뒤에 소학 6년, 중학 5년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를 강점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강압적인 상황에서 일본의 학교체계가 우리나라에 새롭게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서양학문이 이전의 동양적인 교육의 소재를 대체하는 일원적 체제로 변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한동안 영화를 누리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그 자리를 유교에게 내어 주었듯이 조선시대의 유교는 이제 신학문의 체계로 대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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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러한 경향은 해방 후의 미국의 영향을 거쳐 오늘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전통은 일시에 혁신되는 것이 아니며, 외래적 영향은 항상 본토의 전통에 의하여 여과되어 수용되기 마련이다. 그 점에서 우리나라의 학문과 교육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신학교체제가 일본과 미국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아직도 그 이념과 방법의 면에서 전래의 전통과 일본의 주입식 방법 그리고 서양의 개발식 방법이 미묘하게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그 동안 새로운 미국식 교육이론이 소개되고 온갖 강습회와 재교육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교육” 혹은 ‘교육혁신’이 제창되었으며, 구세대와 일제하에서 훈련받은 교사의 대부분이 은퇴한 현재가 도래하였음에도 학교에 대한 정책은 여전히 국가주의적이고 관료적이다. 학교의 분위기 역시 일방적이고 전제주의적이다. 학생들은 언제나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피교육자’이다. 인격을 존중하고, 개성과 창의력을 중시하며, 개인의 특색 있는 소질과 가능성을 신장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취지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을 거듭하고 있다. 한 학급의 학생수는 분명히 교육이 가능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나 학교 당국은 그 곳에서 교육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학교교육’이 처해 있는 실정이다. 그 저변에는 분명히 아직 청산되지 못한 관례적인 전통이 관류하고 있다.

  역사적 검토를 통하여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로 수도계는 인류에게 보편적이라는 교훈을 들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어떠한 것은 외래사상이고 다른 것은 우리의 사상이라고 분류한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토착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것들도 외래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유학을 우리의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학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 맹자 그리고 송대의 성리학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맥을 지켜 온 사유체계로서 그 발원지는 중국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보편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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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교훈의 두 번째는 교육의 소재는 다양하다는 점이다. 서구에서 들어 온 학문을 ‘신학문’이라고 하고, 이전에 토착화되어 있었던 유학을 ‘구학문’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명칭상 잘못이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후자가 전자보다는 덜 발전된 것이라거나 혹은 후자가 전자로 대체되어야 할 어떠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이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동양과 서양에서 출현한 것이며, 내용에 있어서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될 다른 종류의 수도계에 속한다. 원칙상 우리는 구학문이든 신학문이든 간에 그들이 서로 다른 수도계라면, 그것을 차별 없이 교육의 소재로 채택할 수 있다. 우리가 분명하게 다시 다짐해야 할 것은 서구적인 학문계만이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구적 학문에 대한 일원론적인 집착은 그것을 배제하려는 다른 일원론적인 집착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교육의 소재를 일률적으로 통일시킬 필요는 없으며, 생활의 다원화를 위해서 다양한 수도계를 병립시키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불가나 유가를 소재로 하는 교육을 실행하는 공립학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토록 교육소재의 선택이 편중되어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대세에 대한 정치적 혹은 문화적 종속의식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반성을 요하는 대목이다. 그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던 나라가 서양의 지배를 받게 되자 새로운 세대는 서양의 우월성이 오직 과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전통적인 요소를 간과한 채 오직 서양의 학문만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서양의 학문만을 소재로 하고 있는 학교는 서구적인 쇼비니즘을 부추기는 주된 기능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 더 나아가서 학문이 동양적인 다른 수도계와 양립할 수 있으며, 그것들 모두가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이는 최근에 서양이 자신의 문화적 빈곤을 동양에서 보완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과도 역행한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불행한 사태의 진전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의 교훈은 우리가 학문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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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구의 학문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西勢東漸’이라는 시대사조의 산물이다. 그것은 서구열강이 영토를 확장하는 여세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학문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발원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는 학문은 비록 희랍에서 발원한 것이지만, 오늘날 미국과 같은 먼 나라에서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그 발원을 떠나서 외래의 좋은 문화내용을 흡수하여 자기화하는 데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옮겨 심는 차원이 아니라, 뿌리내리고 부흥시키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서구의 학문을 무조건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량으로 서구인들이 우리를 따르게 할 것은 없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유럽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낼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학문이라는 넓은 공동체에서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는 방법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1.3.2. 학문계의 수용태도


  인간생활에서 수도계가 가진 특별한 매력은 그것의 점유가 그것을 자기화하려는 주체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다. 권력을 잡으려면 권모술수를 써야 하고, 대중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부의 축적은 시장의 상황에 의존한다. 사회적 지위는 배경이 좋아야 한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부귀영화의 조건도 변한다. 이러한 상황의존적인 세속계와는 달리 수도계는 우리의 수련에 의해서 그것을 획득할 수 있고, 일단 그것을 우리의 몸 안에 지니게 되면 남에게 빼앗길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황의 변화에 상관없이 내면의 보물을 연마하고, 그것을 항상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세계이다.

  수도계는 인간본성의 보편적인 실현가능성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국경을 넘어서서 세계화가 가능하다. 수도계는 그 발원지가 인도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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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냐 혹은 희랍이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수도계가 외래적인 것이냐 혹은 자생적인 것이냐 하는 점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판소리나 태권도의 경우처럼 자생적인 것이 있음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고유한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소중히 가꾸고 보존하며 발전시키는 일에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수도계에는 국경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넓게 보아서 인류가 모두 참여하여 발전시키고 공유해야 할 세계인 것이다.

  수도계의 발전과 향유는 그것이 어디에서 기원했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 서양의 학문이 희랍에서 발원하였다고 해서 오늘날 그리스인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거나 혹은 자신의 것이 최고라고 주장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은 그 나름의 문화와 민족을 갖고 있으며, 서양에서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수도계를 보유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발원된 수도계의 하나인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의 것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번창할지는 지금으로서 예측하기 어렵다. 원래 수도계가 발원한 지역이나 국가와 그것이 오늘날 최고의 수준에서 발전하여 개화한 지역은 동일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특정한 수도계는 그것이 교육의 소재로 선택되는 시간과 장소를 중심으로 번창한다는 점이다.

  교육의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서 동양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나 서양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이 가져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불필요한 제약이다. 소재의 제약은 우리 스스로를 빈궁하게 만든다. 배타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이른바 사대주의라고 하는 것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대세에 따라서 무조건 선진국의 것을 일방적으로 모방하고 수용하는 것은 비굴하고 위험한 자세이다. 우리는 수도계 가운데 외래적인 것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전통적인 것은 세계 방방곡곡에 널리 전파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진실로 풍부한 인간 혹은 위대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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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계는 지배가 아닌 공존, 착취가 아닌 공생이 가능한 세계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속성에 알맞다. 수도계는 어느 것이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이 다양할수록 인간적인 삶의 질은 풍부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은 수도계가 누구나 종사해야 할 세계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어떠한 가치를 스스로 체험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세계라는 뜻을 갖는다. 그것을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가, 조선시대는 유가 하는 식으로 일원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정치적 체계의 폐쇄성이나 수용자의 편협함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결코 수도계나 교육계의 속성은 아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학교교육이 우리의 역사에서 전통으로 뿌리를 내린 다양한 수도계를 무시하고 오직 서구의 학문만을 소재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여기에는 역시 외세의 추종이 선진화를 위한 최상의 방안이라는 고질적인 사대주의적 발상과 일원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수도계는 다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서양에서 발원한 학문을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궁리해야 한다.

  서양의 학문은 이제 서양 사람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가 ‘신학문’이라 부르게 된 어떤 것도 아니다. 우리는 수도계가 가진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특성을 거듭 강조해 왔다. 서양의 학문은 이미 기원전 5세기경에 희랍에서 발원했고, 한동안 서양의 일부 사람들이 주로 종사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성숙하는 데는 희랍 이외의 인접지역으로부터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것을 오늘날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은 유럽과 미국이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학문은 단순히 희랍의 것이라거나 혹은 서양의 선진국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수도계로서 학문계의 세력은 여타의 세계에까지 확장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학문은 시대나 장소와는 상관없이, 또한 특정한 정치체제, 경제체제 혹은 사회체제와도 상관없이 전세계적인 것으로 보편화되었다. 물론 지금도 학문은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종사하는 세계가 아니고, 학자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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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영위된다. 그러나 그것은 본원적으로 그 세계 자체의 특성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그 세계를 선택해서 열심히 참여하면, 그 보편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을 발전시키고 향유하는 것은 인간 모두의 몫이다. 우리가 학문을 예찬하고 그것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서양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동양인 혹은 한국인은 학문에 대한 지난날의 수동적인 입장을 떨쳐 버리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켜 발전시키는 적극적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완전히 거리가 먼 수도계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수도계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해 온 사실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수도계와 진정으로 생동적인 접촉을 이루는 것뿐이며, 이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복할 수 없는 완강한 장애가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서구에서 이루어진 경제학 · 정치학 · 사회학 등이 그것에 스며들어 있는 서구 사회의 특수성을 은폐한 채, 마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인 양 학문체계의 대종을 형성할 수도 있다. 또한 사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만큼 그것의 보편성을 의심해야 하고, 동양적인 특수성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혹은 서양과 동양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더 넓은 의미의 보편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학자들은 특정한 이미지화, 상투문장, 어휘, 형상화를 통해 동양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이른바 <오리엔탈리즘(said, 1978)>으로 지칭되는 그들의 서구중심주의는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며 비난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일방적인 세계관을 교정할 책임은 우리들 동양인에게 있다. 실제로 서구인들은 세계를 서구중심으로 구성하였다. [각주 39: 사소한 예가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라고 ‘교육받았다.’ 한국은 지금도 ‘극동’이라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그만큼 우리는 서양의 눈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보거나 우리 자신의 영토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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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양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은 있는가?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

  이제 특정지역의 학자가 학문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까지는 서구의 학자들이 학문을 주도하고 여타 지역의 학자들은 그들을 추종하여 왔지만, 그것은 당연시될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비슷한 논지에서 동양학자가 동양을 연구하면 이는 정통파적인 것이고, 구라파를 연구하면 비정통파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인문 · 사회과학적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범주와 시각에서 고찰해야만 그 전모가 드러날 수 있다. 이 점에서 조동일(1993)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호쾌하고 시원한 맛조차 느끼게 한다.


  철학은 보편적인 원리의 논리적 진술이므로 어느 나라, 어느 문명권에서 이룩했든 인류 전체의 자산이다. 그러므로 문명권 단위로 합쳐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철학사로 통괄해야 한다. 서양철학사이든 동아시아철학사이든 세계철학의 일부로서 소중한 의의가 있다. 그 점에서 인도철학사나 아랍철학사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때의 공동문어를 기준으로 삼아 다시 구획한다면, 한문 · 산스크리트어 · 아랍어 · 라틴어권의 네 문명권에서 각기 이룩한 철학사가 다시 통합되어서 세계철학사를 구성해야 한다(pp.102-106).


  우리나라에 서양의 학문이 전래되고, 대학을 비롯한 학교체계가 그것을 교육의 소재로 삼은 지 이미 한 세기가 넘었다. 초 · 중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규 교육과정에서 채택하고 있는 소재는 거의 서양학문의 성과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그것을 교육하는 체계와 방식까지도 서구에서 형성되었던 것을 모델로 삼고 있다. 그만큼 서양의 학문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면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을 외래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서양학문을 수도계로 만드는 본질적인 면모가 어떠한 것인지를 파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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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가? 단순히 그 형식과 결실만을 추종하거나 모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학문계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우리 나름의 불리함과 유리함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심각하게 점검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1.3.3. 선의의 경쟁


  사해형제와 같은 대의와 보편성을 추구하는 수도계는 원칙상 애국심과 같은 세속적인 범주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수도계는 정상의 품위가 왕위를 차지하는 귀족사회이다. 그 이하의 품위는 그것을 가진 사람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왕의 통제를 받게 마련이다. 가능한 한 그 질을 높이는 주체가 주인이기 때문에 수도계에 대한 참여 자체가 경쟁의 원리를 따른다. 경쟁의 단위는 아주 적게는 주변의 특정한 집단을 거쳐서 국가 혹은 인류 전체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 범위는 개인적 소아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고개를 높이 들면 들수록 확장된다. 우리가 목하 문제시하려는 단위는 그 중간에 국가적 단위이다.

  특정한 수도계를 중심으로 개인 혹은 국가가 상호경쟁하는 좋은 예를 우리는 운동경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4년마다 한 번씩 올림픽이라고 하는 인류의 큰 잔치를 벌인다. 각국의 선수들이 기량을 닦아 실력을 겨룬다. 또한 새로운 기록경신을 마치 우리의 것인 양 축하한다. 그러나 그 명예의 상당한 부분은 국가단위에 부여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스포츠에 있어서는 이미 선진국에 진입하고 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오랫동안의 국가적인 정책적 지원의 결과이다. 상대국가의 전력을 평가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며 집중적인 지원을 한 결실이다. 국가 간의 경쟁은 스포츠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학문의 경우는 어떠한가? 체육은 주로 신체적인 것임에 비해서 학문은 정신적인 것이다. 체육은 가시적인 것임에 비해서 학문은 비가시적인 것이다. 이 가운데 정신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이 오히려 인간다운 위대성의 표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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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의 상대적인 비교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항이다.

  두 국가를 수도계와 관련하여 비교할 때, 우리의 입장에서 그 선진성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약관화하다. 특정 수도계와 관련하여 배울 것보다는 가르칠 것이 많은 나라가 가르칠 것보다는 배울 것이 많은 나라보다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배민족이 피지배민족의 문화를 배운 경우가 많았다. 이는 세속적인 위계와 수도계의 위계가 전혀 다른 기준에 의해서 평가됨을 반증하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그 위계의 순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국민들의 삶의 질의 지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도계의 선 · 후진의 차원을 토대로 국가 간의 선의의 경쟁을 점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나라와 좋은 경쟁상대가 된다. 한 · 일 운동경기는 항상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그 승전보는 예외 없이 우리 국민을 흥분시킨다. 그렇다면 각종 수도계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기에 긴 시간의 안목조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떠한 비교우위에 있었으며, 지금은 어떠한 상태에 있고,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고대문화에 있어서는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흔히 우리가 일본에 문물을 전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상대적인 우월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비해 문화적인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회고주의적인 타령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 금세기에는 자원이 빈약한 섬나라가 패전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하여 당당하게 선진국의 대열에 서 있다. 일본은 일반적인 국력의 면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다. 이처럼 일본이 세계의 선진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해답의 하나는 일본의 외래문명에 대한 수용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외래의 탁월한 수도계 혹은 문화를 과감하게 수용한다. 여기에는 외래의 것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독창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량이 포함되어 있다. 한동안 중국과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은 그것들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저력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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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일본인들은 외래문화와 문명을 수입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닦아 근대에 이르기까지 발전시켰다. 그러한 논리는 서양문명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들은 서양의 문명과 학문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는 자신들이 서양보다 후진에 속한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재와 같은 새로운 문명의 기초를 다지고 있다.

  학문계와 같은 수도계를 발전시킴에 있어서도 각 단위에서의 선의의 경쟁이란 불가피한 것이다. 지구상의 여러 국가가 있지만 학문의 발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떠한 국가는 학문을 창조해 나가고, 어떠한 국가는 항상 그것을 뒤쫓기에 바쁘다. 서양학문의 경우 일본은 이 점에서 우리나라보다 현재 앞서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그것을 도입하였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노벨상 수상자도 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오는 학생보다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유학가는 학생의 수가 더 많다. 일본도 외국에 유학을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내박사 학위자보다 나은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이러한 몇 가지 외형적인 것만을 가지고 보아도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적어도 학문의 경우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나라 안팎의 정세를 비교하고, 밖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배워야 한다.

  우리의 논점은 일본이라고 하는 특정한 국가를 목표로 삼아 우리가 그들보다 앞서는 것을 목적으로 삼자는 취지를 지니지는 않는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그 주된 목적은 학문을 더 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일본은 우리를 자성하는 비교의 준거가 될 수는 있다. 독자들 가운데는 경쟁 하면 이른바 ‘학력’을 연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경쟁은 대학입학식의 경쟁이 아니다. 뒤에 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비교의 준거가 될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넓게는 수도계, 그리고 좁게는 학문을 수용하는 기본자세와 틀에 있어서 일본으로부터 배울 만한 점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우리는 이 부면에서 일본 특유의 장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일본이 지향하고자 하는 학문발전의 흐름에 대하여 일본학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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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한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일본은 국내의 사정을 검토하고 끊임없이 학문발전을 일관성 있게 도모하여 왔다. 그 발전의 방향에 있어서 일본은 대체적으로 소극에서 적극, 수입에서 자립, 외재적 관점에서 내재적 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좀 먼 역사로까지 소급해 보자.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의 열강은 그 세력을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로 확대하여 이들을 식민지화하였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침략자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일본은 서양문명의 섭취와 나라의 독립이라는 두 가지 요청을 조화시키면서 어떻게 자국의 생존을 보장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심한 최초의 동양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일본은 침략자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논리에 의해서 부국강병책을 쓰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여기에는 德川 말기에서 明治 초년에 이르는 동안의 위대한 선각자와 계몽사상가의 공헌이 컸다. 그들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토대로 서양세력의 확장과 충격 앞에서 어떻게 강자가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궁리하고, 국민을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일본은 “서구 따라잡기”에 정책의 목표를 두었고, 그 목표는 유신 이후 1세기 안에 달성되었다.

  명치유신의 많은 계몽적 선각자 가운데 우리가 주목할 만한 위대한 인물의 하나가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1835~1901)이다. 우리는 그의 행적을 통해서 일본이 오늘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 비결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그의 주장과 정신이 후학들에게 전승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고,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반성하기로 한다. 거의 일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분명히 일본으로부터 여러 가지 점을 배울 수 있다.

  후쿠자와는 당시의 상황에서 서양인이 하나에서 열까지 일본인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서양의 우월한 비밀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것을 일본인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1860~1867년에 걸쳐 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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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국과 유럽을 직접 관찰하여 근대 서양을 형성해 온 비밀, 다시 말해서 미래의 일본을 구축할 비밀을 그 나름대로 파악하여 <서양사정(1866~1870)>이라는 저서를 완결하였다. 그것은 서구 도시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자주성, 신앙의 자유, 자연과학적 기술의 발달, 학교교육, 사회적 질서, 국민의 복지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서양적 경험의 전달은 당시의 정치개혁세력의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민중의 지지에 힘을 얻은 바 크다. 그의 주장은 일본의 민중에게 자기확인의 언어를 제공하였다.

  일본의 지성계에서 자리를 굳힌 후쿠자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양의 유형적인 것보다는 무형적인 것에 주목하였다. 그에 따르면, 무형적인 것에 들어 있는 비결은 한마디로 서양의 학문이었다. 그는 <학문을 권함(1872~1876/1993)>이라는 약 4년간에 걸친 논설을 통해서 서양의 학문관을 일본에 소개하였다. 이 저서의 보급은 1872년 7월에 당시의 내각이 포고한 교육제도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교육기회의 균등, 실학주의, 개인주의 등의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이러한 일련의 정부정책의 호응과 더불어 당시의 반동적인 지식인들을 겨냥하여 다소 중후하고 논증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일본의 지성계를 지배하던 봉건시대의 국학자와 한학자들의 무능과 병폐를 서양의 학자들과 대비하여 드러내었다.

  후쿠자와는 배움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유학의 개념과는 달라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우선 단지 문자를 읽는 것이 배움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러한 참신한 시각에서 배움을 과학정신에 입각한 분석 · 인식 · 판단이라는 지적인 방법론과 직결시켰다. 그는 시효를 이미 상실한 지식을 마치 절대적 진리인 양 가르치는 것은 헛된 학문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그러한 식의 배움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길을 막는다고 단죄한다. 그는 서양을 배운다는 것은 표면적인 문화현상을 모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이룩한 산물의 정신적인 원동력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후진국이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 선진국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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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대주의는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조건 영속적으로 종속되는 경우와, 자립을 위하여 잠정적으로 선진의 지위를 인정하는 경우라는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사대주의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후쿠자와의 서양학문의 수용태도는 분명히 후자에 속한다. 그의 논조는 서양의 맹신주의자가 아닌가 할 정도로 일견 서구지향적이다. 그는 후진국으로서 일본 국민이 서양학문을 배우는 것은 당분간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자와는 놀랍게도 일본이 언제까지나 학문을 서양의 학자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수치라는 엄청난 포부를 피력한다. 19세기 말에 쓰인 그의 글에는 벌써 다음과 같은 일본식 결의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수백 년간의 쇄국을 개방하고 갑자기 서양 문명국과의 교류를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불과 물이 서로 만난 것과 같다. 이러한 양자의 불균형을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서양사람을 고용하거나, 서양의 물품을 산다든가, 급한 고비를 넘기고 이 커다란 파란을 가라앉히는 것은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때의 공급을 외국에서 구하는 것도 국가의 실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겨우 스스로 위로가 될 뿐이다. 그 일시적인 것은 언제면 끝나는 것일까? 공급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에서 조달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 단지 지금의 성공을 꿈꾸고 있는 청년학도들에게 자국의 수요를 떠맡게 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학생들의 양 어깨에 걸린 책임이다. 그 책임은 매우 무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1993, p.150).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서양문명의 도입을 꾀하는 단계에서부터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식 결의는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배울 만한 대목이다. 이러한 발언이 있고 난 후 일본의 지성계가 후쿠자와의 희망과 기대를 얼마나 지키려고 노력했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의 관심사이다. 당시 일본에도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쇄국주의자들이 있었다. 후쿠자와의 높은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들 구세력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문명론의 개략(1875/1986)>이라는 후속의 저서에서 이러한 강력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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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투철한 상황의식을 줄기차게 표명하였다. 그는 일본이 서양에 개국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저급한 世論과의 불화를 이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그러한 예가 적지 않다. 위장이 약한 자가 영양 많은 음식을 먹으면 소화할 수 없어서 더욱 병을 조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고매한 논의는 사회에 유해무익하게 보이지만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고매한 논의가 없으면 후배로 하여금 고매한 영역으로 이르게 할 길이 없다. 위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영양 많은 음식을 없앤다면 환자는 쓰러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잘못 생각한 탓으로 동서고금에 슬픈 일이 생겼던 것이다(p.17).


  후쿠자와는 민중의식의 저급성에 굴하지 않았으며, 용기를 가지고 서구의 학문을 도입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대체적으로 말해서 서양 제국은 문명의 나라인 반면, 일본은 아직도 문명에 못 미쳤다는 것”(p.214)을 전제로 일본국의 향후 진로를 밝힌다. 이 저서에서 반봉건주의, 진보사관 그리고 창조적인 지성에 대한 신뢰라는 세 가지 입장이 개진되었다. 그는 봉건주의에서 해방된 민중이 서구식의 창조적인 지성을 동원한다면, 서양이 밟아 온 진보의 경로를 일본도 되밟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당시 후쿠자와의 학문관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점이 보인다. 그의 논의는 학문의 내재성보다는 수단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은 후진국으로서의 일본국이 어떻게 독립과 중흥을 이룰 것인가 하는 수단적 관점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그는 <문명론의 개략>에서 수시로 ‘지금으로서는’이라는 상황적 단서를 붙여서 심지어 “나라의 독립은 목적이며, 오늘날 일본의 문명은 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다”(p.240)라고 극언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한 정치적인 야망을 앞세운 그는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일본이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여서 서양에 못지않은 강국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라고 보고, 그의 숙원이 성취되었다고 감격해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한 근대화의 발상이 결국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화와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제국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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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귀결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때 그러한 수단적 학문관의 피해자로서 수치스럽고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시 우리나라에는 왜 그러한 정도의 높은 선각자와 계몽주의자가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후쿠자와는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소극적인 배외사상은 위험함을 지적하고, 문명국가의 단계에서 자립국가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서구문명을 수용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적인 확장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그러한 선견지명이 없이, 시세에 역행하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유교를 국교로 삼고 천주교와 그것의 배경을 이루는 서학은 이교로 간주하여 탄압하던 대한제국은, 종국에 가서는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씻지 못할 역사적 착오를 범하였다. 침략의 주체를 미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또한 침략당한 예속체를 미화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당시에 일본이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처하던 방식으로 우리가 일본에 대처하였다면, 역사적 불행의 무력한 예속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경종은 지금도 유효할지 모른다.

  서양의 학문이 국가의 자립을 위한 도구라는 후쿠자와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유보적인 단서가 붙은 것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는 <문명론의 개략(/1986)>에서 ‘지금으로서는’이라는 상황적 단서를 붙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더욱 높은 차원의 것으로 지양되어야 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놀라운 여유를 보인다. 그는 첫째로 현재의 문명, 둘째로 나라의 독립, 셋째로 전인류적인 문명의 진보라는 발전단계를 나누고, 당시의 상황에서는 마지막의 원대한 이상에 대한 논의가 전개될 여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의 발언이 우리를 참으로 놀라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본의 상황을 오늘날의 일본에 한정시켜서 고찰하고, 논의의 범위 역시 좁혀서 오직 일본의 독립을 목표로 보며, 이러한 것들에 잠정적으로 문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한 오늘날의 일본의 문명이란 문명의 본뜻은 아니다. 우선 그 첫걸음으로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여타의 것은 둘째 걸음으로 남겨 두며, 후일 그것을 위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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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자는 취지인 것이다”(p.240). 여기서 우리는 이 선거자의 예지가 얼마나 투철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후쿠자와라는 일본의 선각자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하나는 서구문명을 열심히 배우되, 어느 단계에서는 서구를 능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가피한 여건에 의해서 서구문명을 수단의 측면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그것을 문화적 향유라는 본연의 고귀한 위치로 복권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일본의 지성계와 학자들은 그 당시의 상황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잊지 않고 추진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정신을 차려 연구하고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이에 대한 것을 여기서 장황하게 소개할 자료도 없고 지면도 없다. 다만 그 결론은 후쿠자와의 일본식 결의가 지금도 대체로 충실히 완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서구의 문명을 정확하게 소개하고, 거기에 비판과 반성을 추가시킨다. 그들은 항상 서구적인 것에다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가시켜 역수출한다. 학계에서 자연과학을 제외한 인문과학의 경우 외국학위 같은 것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외국의 문물이 주체적으로 수용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인에 의한 오리엔탈리즘적 학문이 성장하지 못한다. 이것은 일본의 지성이 후쿠자와의 유업을 지금까지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스스로 그러한 일본식 유업을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또한 후진들에게 상기시키고 전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동경대학의 교수 및 학장을 거쳐 현재 동경대학 경제대학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마스다시로(增田四郞)는 <대학에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1994)>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후쿠자와 유기치를 자신의 학문생활의 신조와 결부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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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뭔가 남들을 놀라게 할 만큼 독창적인 연구를 했거나, 혹은 새로운 학설을 주장했다거나 하는, 그러한 뛰어난 학자는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교육 전문가인 것도 아닙니다. 정말 평범한 老書生이라는 표현이 꼭 맞을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학문이나 공부라는 걸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합니다만, 100년 전 후쿠자와 유기치 선생이 쓴 <학문을 권함> 같은 책을 쫓아가기는 애당초 무리한 일이고, 그러한 야심은 아예 처음부터 갖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에 힘써 왔고, 앞으로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내 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계속 그렇게 해가려고 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한평생을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으며, 앞으로 남은 삶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겸손의 말로 시작된 저서에서 마스다는 시종 자신이 수행해 왔던 연구의 예를 들고, 그것을 他山之石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그 타산지석이란 단지 서양의 학문체계를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독자적인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경제학도로서 봉건사회의 연구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러한 업적을 배경삼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서구중심의 사상이나 이론을 추종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을 설계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독립과 자유는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그 저서의 마지막 소주제에서 그는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앞에서 큰 목표와 꿈을 가지라고 했는데, 내 자신이 버릴 수는 없고 그래서 여러분도 가져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꿈은 20세기 후반인 지금부터 21세기에 걸친 새로운 세계이론을 개척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이 남들의 디딤돌이 되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하다 보면 때론 힘들고 어렵기도 하겠지만, 머지않아 동양이 서양과 처음으로 완전히 대등한 위치에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동양이 서양의 식민지가 되어 서양을 선생으로 우러러보며 살아왔지만, 이제 그러한 시대는 사라졌습니다. 이를 정치에 옮겨 말하면, 우리나라의 독립이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정신사적으로도 茶道나 禪 같은 것 말고 학문적으로 우리의 정신적 자유를 쟁취할 때가 왔습니다(pp.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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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있는 다도와 선은 수도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마스다는 그러한 수도계의 측면에서 일본이 서양에 앞서 있다는 자긍심을 잊지 않고 상기시킨다. 그 다음에 학문의 경우도 이미 후진국의 단계를 거쳐서 선진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을 그는 밝히고 있다. 禪은 원래 중국과 한국을 통해서 일본으로 전해진 수도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것을 일본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후쿠자와나 마스다 같은 일본적 결의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전승된다면, 21세기에는 일본이 서양보다 학문분야에서도 앞서지 않을까 하는 전망도 나옴직하다. 그렇다면, 학문을 단지 수단이 아니라 향유의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후쿠자와의 두 번째 결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결의도 아직까지 일본의 지성계에서 계승되고 있다는 단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일본에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廣中平祐)는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특이점 해소”라는 획기적인 수학의 업적을 남긴 공로로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학문생활을 회고하면서 <학문의 즐거움(1984/1993)>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다분히 일본의 젊은이들을 겨냥한 이 저서에서 그는 자신이 가정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재능의 면에서 보통사람 정도의 혜택도 누릴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은 한 가지 원인 때 문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학문을 일단 좋아하고, 그것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 혹은 특이점을 해소시켜야 한다는 특정한 문제 자체에 매혹 당했음을 강조한다.


  감정이나 정념하고는 전혀 무관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수학이지만, 수학에서의 창조활동도 역시 情念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의 정념하고는 관계가 먼 것같이 보이는 자연과학에서도 새로운 이론이나 법칙, 정리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는 틀림없이 정념의 힘이 많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p.151).


  본 저서를 통해서 우리가 강조하려는 대목도 바로 학문의 내재성에 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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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수단으로서의 학문은 저단계에서 일시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높은 수준의 단계에서는 수단의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학문은 세속계적인 수단 이상의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학자들은 스스로 큰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에 정열을 쏟아야 한다. 그것을 해결하려는 욕구가 내부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외부의 정세에 따라서 연구를 추진하는 힘이 쉽게 사라지고 만다. 히로나카도 그러한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대중들처럼 특이점 해소가 쓸모가 없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몰지각한 상황에 이렇게 대처하였다고 술회한다.


  나는 이 문제(특이점 해소)를 알게 된 후부터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그것이 어떻게 이용되고 응용되는가 하는 따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p.156-157).


  말하자면 그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학적 공적을 얻게 한 끈기와 창조적인 힘의 원천은 연구문제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연구의 성과를 인정받아 일생 동안의 연금과 훈장을 받아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산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상까지 받다니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p.179)고 말한다. 이는 학문의 내재적 가치가 이 학자의 삶의 본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세계적인 학자들은 이러한 학문적 자세와 풍토에서만 배출될 수 있는 것이다.

  히로나카는 이 저서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미국과 일본을 대비하여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진로를 밝히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후쿠자와의 첫 번째 유업을 받들어 미국이 하나의 경쟁상대라는 점을 은근히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우선 문화교류란 쌍방적인 것이며, 이제 서구사회도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히로나카의 말대로 “미국은 지금, 한 마디로 말해서 明治 이후 서구의 문명을 수입하여 모방하기만 해온 것같이 보이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시 돌아보고, 그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정치 · 경제 · 문화 · 사회에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을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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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실제로 미국은 일본의 경제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도계의 측면에서 일본은 미국을 앞서고 있는 경우도 많다. 미국은 전통의 예능, 다도나 화도와 같은 예술이나 무도, 또 일본 건축양식 등을 배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히로나카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부질없는 자만을 경계한다. 물론 미국은 많은 약점이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장점을 간과한다면, 21세기의 일본은 크게 후회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본은 멍청하게 지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전후 30여 년이 지나서 ‘경제에서는 미국을 따라잡았다. 지금부터는 추월의 시대이며, 미국에서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위의 말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p.218). 그는 일본의 좋은 점을 미국에 가르치고, 거꾸로 미국의 장점을 익히고 돌아와야 함을 지적하면서, 학문의 면에서 아직도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 장점은 미국이라는 나라는 초일류의 인재를 만들어 내는 데 적합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해외로부터 인재를 자국으로 도입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식을 생산해 낼 인재의 양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외국에서 이미 생산된 지식을 수입하는 경우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점을 그는 미국에서 자신이 학문활동을 한 경험에 근거하여 지적하면서 일본 국민들에게 학자의 양성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미국은 소위 연구를 수행하는 인재를 수입하는 나라인 데 비해서 일본은 연구성과를 수입하는 나라이다. 미국은 외국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연구, 장래성 있는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인재를 데려가는 방식을 쓰고 있다”(pp.218-219). 히로나카 자신도 그러한 인물의 하나이다. 그러한 인재를 통해서 뜻밖의 성과를 얻어낸다. 이러한 미국의 강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일본의 교육체계에 대해 이렇게 우려한다.


  일본은 교육입국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확실히 전후 일본의 교육수준이 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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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향상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교부가 중심이 되어 학습지도 요령이나 검정으로 교과서의 내용이 제약, 통일되는 등 일본 학교교육의 일반적인 교육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일반적인 국민감정으로서 소위 교육의 기회평등주의, 즉 “차별을 없애자, 학교격차를 없애자, 그것이 공평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서양에 비하여 강하다(pp.221-222).


  이 부분은 아마도 오늘날 일본의 학교가 빠진 입시 위주 혹은 출세 위주의 경향을 지적하려는 것이리라. 이 점은 다음 절에서 우리가 국내의 사정과 결부시켜 검토할 사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이 점에서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히로나카의 발언이 우리가 이제까지 검토한 후쿠자와가 남긴 유업의 연장선상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학자들의 저서에 포함된 내용을 몇 마디씩 인용하는 것으로 일본 전체의 학문적 동향과 전략에 대한 일반적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논조는 우리나라 학자들의 것과는 사뭇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독자는 금방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선진국을 따르는 후진국의 길을 극복하고,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굳은 국민적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 아닐까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국내의 사정에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우리나라는 학문적으로 후진에 속한다. 그 출발 자체가 늦었다. 후진국의 국민은 선진국의 것을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고 수입하는 데 급급해 왔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배타주의 혹은 폐쇄주의보다는 모방과 수입이 더 낫다. 학문적인 후진국으로서 우리나라는 외국에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외국인 교사가 넘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부족한 현실에서 서양의 장점을 수용하고, 우리의 단점을 보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방적 유입은 미래의 역전을 기약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후진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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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자신이 후진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열심히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때인가 선진국을 추월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 [각주 40: 이 주제는 하권 제 6장에서 ‘교육적인 진화’라는 개념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날을 기약하면서 자체의 학문적인 역량을 기르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만의 독창적인 지식과 학문적인 업적을 쌓아 지금의 일본이 그러하듯이 선진국에게도 호혜적으로 그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일본과는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폐습은 체질적으로 남의 학문을 따르기만 하는 “노예적 사대주의의 근성”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문화의 측면에서 지나친 사대주의와 종속주의의 노선을 밟아 왔다. 우리는 상당히는 상대국의 위력에 압도되어 외래문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단순히 곧이곧대로 그것을 모방하여 숭경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독창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인정받는 학문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나라에도 맞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학문의 형식은 한문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좋은 나라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국말로 학문을 하였다. 그 내용 역시 주로 중국의 예화를 다룬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앞서 지적한 ‘구학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그 폐습이 ‘신학문’의 수용에서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학문의 내용과 형식은 서양의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서양의 원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학문하는 것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시대를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속적 사대주의의 양태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지식도 오직 수입품이어야만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다. 변화가 있다면 그때그때의 외세에 의존해서 수입선을 바꾸는 정도이다. 이제 한문이 영어나 독어로 바뀌고, 또 그 내용 역시 서양의 것이 되었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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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서양사회를 연구하여 얻은 지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식이고, 또 대중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 소수 특권계급은 권위를 향유할 수 있다. 영어 · 독일어 · 불어가 그러한 신비적 효능을 가져오는 데에 일조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미국에서 좋은 것이면 한국에도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자연과학의 경우 그 자체가 보편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수용의 태도가 어느 정도 용납될 수 있지만, 인문 ·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그 내용 면에서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그러한 특수성에 따른 선별을 찾아볼 수가 없다. 대학의 철학과는 거의 그대로 서양철학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사회학 · 정치학 · 경제학 역시 서양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해방 후 대학교육이 활성화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급의 학자양성은 외국유학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동안 서양에 유학하고 돌아온 학자만이 교수의 자격이 있는 것처럼 간주되었다. 한국의 학계는 거의 미국에 유학한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일면 국내의 수준과 선진국의 수준의 비교에서 오는 수준상의 차이를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국산의 질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국산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수로 채용한다면 바른 일이 못 된다. 그러나 학위의 질이나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외국산 학위자만을 선호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은 외국의 학문과 학설의 대리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이나 교수들은 서양에서 이미 이루어진 학문의 수입업자나 하청업자의 역할을 하기에 바쁜 실정이다. 그들은 대부분 외국학문의 최신 동향을 신속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자기의 몫을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 외국에 나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경력만 가지고 학자 행세를 하며, 걸핏하면 재충전을 명목으로 하여 외국의 대학에 나가 최근 이론을 입수해 오고 있다. 그러고는 선진국의 새로운 학문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학문을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러한데, …” 하는 식의 말을 강의에서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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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듣게 된다. 이 때 마치 우리의 상황이 서양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 잘못된 일인 듯한 착각과 혼돈이 초래된다. 이래서 우리의 사회는 그 나름대로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양의 학설이나 이론에 맞도록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역리가 전개될 정도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저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예속적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자체의 특징 있는 교육에 의해서 문화를 좀더 자주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자면 이미 남의 나라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그 결과를 그들이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를 질문하면서 학문적 지식의 산출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차 한국의 학문과 교육은 단순히 외래의 사조를 모방하는 후진적 단계를 극복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발전하여야 한다. 학문적인 선진국으로의 진입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서양에서 수세기에 걸쳐 형성된 수도계를 단지 일세기 또는 단시간 내에 소화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은 조급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전통의 형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듯이 장기간의 계획과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일본이 그러했듯이 선진국 진입을 위한 분명한 의지를 세우되, 긴 시간을 두고 우리 자신들의 지식을 창출해 내는 노력을 지속하면서 독자적인 지식의 생산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이제 다음 세기는 동양이 중심이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의 서양중심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우리 나름의 학문을 정립해 나갈 준비를 해야 된다. 이제 학문은 서양의 것만이 아니다. 서세동점의 역사 때문에 지금까지는 동양이 서양을 추종하는 데 급급하였지만, 시세는 달라지고 있다. 정치적인 독립 못지않은 것이 정신적인 독립이다. 우리 동양은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서 서양과 더불어 학문의 발전에 공조할 날을 기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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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제약을 받으면서 학문을 하고 있지만, 그 맥락적 한계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요즈음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럽의 근대라는 것이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얼마나 특수한 시대였는가를 자각시켜 준다. 서구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될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자연과학의 경우는 별도로 하더라도, 인문 ·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서양과 동양의 지역적 특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학문적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우선 우리의 실정과 현실 그리고 풍토에 부합하는 특수이론 모델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보편은 특수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이론이 갖추어지면, 서양의 기존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잘못을 시정하며, 포괄범위를 확장하여 인류의 보편성에 공헌하는 일반이론으로까지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의 학문이 아직 외국의 선진국에 필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막대한 인력과 시간과 재화를 외국의 학문을 수입하는 데에 낭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계속 인력이나 학문적 지식을 수입하여 소모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더구나 그러한 방식으로 학문의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제 단순한 수입이나 모방의 단계를 넘어서서 우리 자신의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공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방은 쉽고 창작은 어렵다. 모방으로 선진국에 접근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모방만으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거나 혹은 선진국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학문이 우리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 자생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스스로 창조적인 학문을 발전시키고, 세계학문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역사적 전환을 모색할 때이다. 학문의 면에서 선진국이 되려면, 우선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후진을 양성해낼 수 있는 自家人力生産體系가 구축되어야 한다. 세계 여러 민족에게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을 창조하는 일은 이러한 인적 토대 위에서만 탄탄하게 구축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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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 동도서기적 관점의 극복


  서양을 극복하는 관건은 먼저 서양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東道西器’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용어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서양의 학문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반영하고 있다. 서구의 과학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기술과 연결되었고, 그 후 서구의 공업화를 촉진시켰다. 이로 인해서 동양과 서양 간의 세력에 불균형을 가져왔기 때문에 당시 서양의 학문은 동양인에게 오직 도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과학기술이 생산력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 절에서 소개한 후쿠자와의 견해도 그러한 도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을 단순히 기술의 차원에서 이해하거나 도입하려는 것은 과학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우리는 지양하고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고대에까지 소급해 본다면, 우리의 동양문화는 물질보다는 정신, 그리고 세속계보다는 수도계에 큰 비중을 두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동양의 학문은 그것을 통해서 어떠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제공하는 보람 때문에 추구되었다. <논어>에는 ‘君子不器’라는 말이 나온다. 선비 혹은 군자는 기능적인 匠人과 구분되었다.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물질적인 희생은 불가피하다. <맹자>에서는 대장부의 자질로서 安貧樂道를 찬양했다. 그들은 물질보다는 정신의 풍요로움을 택했다. <장자>에서는 “쓸모없는 나무”가 역설적으로 예찬된다. 동양의 군자와 선비들은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우주만물과 인간의 근본이치를 밝히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 하며 그 도리에 비추어 세상 사람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수도적 생활은 사람으로서 자기도리를 하는 것이며, 특별히 다른 보상이나 칭찬이 필요 없는 것이다. 용도와 이익 등이 가끔 인정되지만, 그것은 저급한 자를 수도적 생활의 보람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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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유구한 수도계 본위적 전통은 오늘날의 세태로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어려운 면모이다.

  고대의 동양문명의 전통을 들어서 동양문화는 정신적임에 비하여 서양문명은 물질적이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동양의 제자백가적인 것, 유가의 인의 사상, 선사상, 불교적인 인생관 등과 같은 고급의 정신문명을 서양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동양의 정신문명은 그 자체의 추구를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동양인은 서양의 과학을 무조건 도구적인 범주에 넣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인류가 일찍이 누려 보지 못했던 위대한 힘을 주었다. 우리는 그것에 의존하여 자연의 세력을 지배하게 되었고, 생산을 증대하게 되었으며, 온갖 어려운 질병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이 주는 힘의 연장선상에서 동양은 서양의 세력에 굴복하였다. 서양 열강의 지배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거나 혹은 식민지화된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의 입장에서는 서양의 학문이 외재적인 것으로 보인 것은 당연하다. 후쿠자와가 서양학문을 당분간이나마 독립의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후진국’들은 서구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 때 그 후진성에 대한 개념의 정의에는 서양을 바라보는 세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다. 세속적 요소에는 열강이라는 정치적 요소와 물질적 풍요라는 경제적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동양,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그러한 의미의 서구화를 서두르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정신이 물질적인 삶의 풍요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대 동양의 수도계적인 전통은 다분히 소비적이고 향락적이라고 지탄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공부를 위한 공부”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금도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위정자나 그 정책을 지원하고 따르는 일반 대중의 머리 속에는 수도계의 내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많은 부분 ‘공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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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잘못된 선입견에서 유래하기도 한다. 그것은 시세의 대국에는 눈이 어두운 채, 그저 독서나 습자로 옛 사람들의 지식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암송하기에 몰두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우리 조상들은 觀念과 文을 숭상한 나머지 실제적인 삶의 바탕이나 물질의 가치를 소홀히 하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거기에는 양반과 상인이라는 계급적인 경계를 고착시키려는 저의도 있었다. 공리공론에 빠진 양반계급이 물질적인 것을 소홀히 하여 나라가 황폐하게 된 역사가 있는 우리로서는 그러한 공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우리의 역사에 있었던 정신적인 전통을 버리고, 그 반대편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는 심각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정신적인 풍요는 물질적인 풍요와 모순되는 것인가? 물질만능에 빠져서 정신문화가 황폐해진다면 그것은 질 높은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양의 학문이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판단은 옳은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판단이나 선택은 그렇게 정확하거나 현명한 것 같지 않다.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목욕탕의 더러운 구정물과 함께 어린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서구화를 지향하면서 국가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잘못된 점은 우리의 수도계적 전통에 대한 무시, 서구의 학문에 대한 몰이해와 그 몰이해에 기초를 둔 정부의 정책이다. 국가와 과학은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다. 막대한 금액이 과학적 아이디어의 개선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수도계, 특히 동양적인 수도계의 지원에 비하면 거의 파격적인 것이다. [각주 41: 서양보다 우수한 우리 동양의 수도계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투입되는 예산의 규모와 관심의 정도를 과학에 대한 투자 및 관심과 비교해 보라.] 이것은 한정된 국가자원을 한 군데 집약시켜 투자한다는 취지에서 일면 수긍할 만한 점도 있다. 그러나 학문 혹은 과학을 장려하는 동기 면에서 우리는 결정적인 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학문이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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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의 가치를 진흥시키려는 동기라기보다는 학문이나 과학의 세속적 · 물질적 수단성을 확보하려는 동기이다. 정부는 학문을 물질적이고 생물적이며 본능적인 안락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보거나, 사회적인 복지를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여기에 관련 학문공동체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국가가 지원해야 된다고 호소하고, 또 그 호소에 부응하여 국가의 정책이 결정됨으로써 악순환이 생겨난다.

  현재 우리나라는 상당한 비율의 물적 자원을 과학이나 기술의 개발에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과학은 보다 커다란 정치나 사회의 목표와 연결되어 있다. 산업계나 정부 혹은 독립기관의 지원하에 전영역에 걸쳐 과학적 형태를 띤 연구나 실험이 수행된다. 그 목적은 주로 상업적 이익 · 건강 · 환경보호 · 방위 등 온갖 세속적 관심 및 목표달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 정책결정에는 정치가 · 행정가 · 예산담당 관리 등 과학과 무관한 문외한의 의견도 상당한 비중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아카데미즘’에 기초한 연구는 전체 연구와 비교하면 극소한 지지와 지원을 받게 될 뿐이다. 물질적인 풍요와 무관한 듯한 인문 · 사회과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정책의 뒷전으로 물러나고 만다.

  그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점차 물질적인 번영과 피상적인 명성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척도로서 통용되는 좁고 경직된 사회로 변모되고 있다. 정부수준이든, 민간수준이든지 간에 학문을 국가중흥의 중요한 수단이라고만 보는 풍조가 생겼고,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음을 본다. 학문이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책담당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학문에 대한 외재적인 동기의 면에서 국가수준의 것과 개인수준의 것은 거의 같은 길을 가고 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은 사치스러운 일이다. 국가나 개인이나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지식의 내재성을 따질 겨를이 없으며, 이미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억지로라도 배워서 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학을 물질적인 풍요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서양의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 풍요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전략의 면에서도 단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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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을 도구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서양의 학문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서양에도 동양처럼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들이 있다. 여기서 논의하려는 과학 혹은 더 넓게는 학문이 그러한 수도계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이다. 본 저서의 전반부를 통해서 더 자세하게 검토할 기회가 있겠지만, 학문적 결과나 효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결과나 효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학문을 순전히 결과상의 효과만으로 보는 것은 극히 피상적인 관찰이다. 서양의 과학이 위력 있는 전쟁수단, 신속한 통신과 교통, 편리한 생활용품 등의 놀랄 만한 산물을 산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무형의 원리와 정신이 작용했다. 물질적인 결과는 철두철미 그러한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하는 표면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 점을 우리가 간과한다면, 서양의 종속에서 벗어나 열강의 대열에 드는 것 자체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구의 과학을 발전시킨 과학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대부분 일상의 실제적인 관심을 초월하는 가운데 과학을 발전시켰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의 학문이 발전하게 된 근본적인 자산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 자체에서 그 나름의 내재적 가치를 찾는 태도나 자세였다. 서양의 학문을 수도계의 하나, 즉 우리가 그것 자체의 추구에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 세계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그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과학하는 일 자체에 삶의 의의를 두었으며, 그러한 연구결과가 부차적으로 일상인의 세속적인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만약 그들의 관심이 애초부터 세속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학문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는 장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양의 오랜 전통은 수도계를 세속계와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은 서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각 세계는 그 세계 내에서의 독립적인 체험을 위한 내적인 태도를 요청한다. 세속계적인 생활과 학문적인 생활은 다르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 역시 다르다. 서양학자들 역시 그 점을 존중한다. 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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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폴라니는 과학공동체가 탐구가들 만으로 구성된 하나의 독립된 왕국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나름의 <자유의 논리(1951)>를 요청한 바 있다. 왜 독립된 왕국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학자라는 집단이 특이한 목표를 추구하고, 그에 부응하는 특별한 생활태도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생활태도란 다음에 오우크쇼트(1933)가 지적하는 철학자의 삶과 다를 바 없다.


  한 사람이 오직 철학자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다소간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번쯤은 열을 내어 그러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래 견뎌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인 생활이란 (가끔은 소망하는 바이면서도 실상 그것을 성취하는 일은 드물지만) 확신에 차고 완벽할 때 만족스럽다. 그리고 철학이 추구될 때에는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외부적인 이해관계, 특히 실제적인 관심으로부터 철학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존재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p.3).


  학자는 세속계적인 삶과 다른 삶을 추구한다. 오우크쇼트는 우리가 세속적인 삶에 열을 올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학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무미건조한 생활임을 지적한다. 이 문구는 동양의 고전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서양의 학문은 이러한 가치를 추구해 온 과학자들의 철두철미한 실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자기 자신의 활동 외부의 어떠한 대상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것 자체 안에, 즉 자기 자신의 규범들과 그 존재기준을 생산하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서양학문의 역사적인 전통이다.

  자율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수도계를 추구하고 그것에 종사해야 될 사람들이 세속계에 관심을 가질 때, 동양의 선인들은 그것을 ‘外道’로 규정하고 경계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학문이 오늘날 세속적인 것에 의해서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은 서양에서도 하나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바슐라르(1884~1962)의 글은 수도계가 세속적인 것에 의하여 오염되는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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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알려고 하는 노력은 공리주의로 오염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적 개념들이 단순한 효용가치들로 간주되고 있다. 사고가 소신에 차 있고 열정적이며 매우 생기 넘치는 과학자가 추상적인 사람으로 표현된다. 학구적인 사람이나 숙련된 사람들에게 부여되던 가치가 점점 더 훼손되고 있다. 과학은 하나의 작은 모험, 이론이라는 공상의 나라에서, 인위적인 실험들의 어두운 미로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모험에 불과하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과학적 활동에 대해서 비평가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과학자들을 자연적 가치들로 격리시키고 있으며, 관념들의 합리적 조직은 새로운 관념들을 획득하는 데 해가 되고 있다(Lecourt, /1996, pp.12-13에서 재인용).


  동양에서는 수도계와 세속계가 각각 그들 나름의 특성으로 다른 세계와 관련을 맺고 상호 간의 협력을 모색하였다. 국가와 대중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의해서 수도계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와 재정적 지원을 하되, 결코 그 목적과 내용을 간섭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았다. 국가와 수도계 간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때 전자가 후자를 관용하였다. 국가는 대중의 복지라는 표어를 내세워 수도계를 자신의 논리에 맞게 계획하고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물질을 추구하는 방법과 정신을 추구하는 방법은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수도계의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정신적인 수련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반대로 그들로부터 세속계적인 지원을 받는 자세를 보였다.

  수도계와 세속계의 이러한 관계는 서양에서도 권장되고 있다. 일찍이 <과학적 지식과 그 사회적 문제(1973)>라는 저서를 낸 바 있는 라베츠(J. R. Ravetz)는 그 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과학자는 일반인들을 무식쟁이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또한 일반인들은, 비록 그들이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과학자들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신뢰해야만 한다. 그러한 상호 간의 존중은 양편이 진정으로 의미를 소통하는 데에는 애로가 있다는 점을 깨닫기 전에는 성취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자신들에게 주어진 신뢰가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특별한 책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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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에게 있다(p.14).


  일반 대중은 설사 그들 자신은 세속계적인 잡사에 의해 구속된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학자들은 현실생활의 각종 자극이나 관점에서 해방되어 진정으로 학문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학자들은 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현실관을 가지고, 그러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흔히 학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오히려 세속계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 자료를 조작하는 식의 <배신의 과학자들(Broad & Wade, 1983)>도 있다. 혹은 학자라는 신분을 다른 여타의 세속적인 지위상승을 위한 중간단계쯤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흔히 본다. 이러한 경우, 대중과 학문공동체 사이의 신뢰는 무너지고, 또한 앞서 말한 분업적 관계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까지 물질과 정신을 상호 배타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의 물질생활은 과학과 같은 정신적인 활동의 소산이며, 또한 과학의 발전은 그 물질적인 지원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물질적인 생산성의 면에 함께 공헌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위험은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저버리고, 어느 한 편의 것에 치중하게 될 때 일어난다. 흔히 “과학을 통한 기술”이라고 할 때 그것에는 과학이 수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그것은 과학자들이 진실로 추구하는 더 높은 수준의 가치에 대한 몰이해가 담겨져 있다. 본 저서가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그러한 측면이다.

  어떠한 활동이나 그것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하나는 그 활동의 구조와 본질이 구명되고, 그것 자체에 충실 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부류의 동기는 그것을 수단으로 여타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전자를 내재적 동기 혹은 내재적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고, 후자를 외재적 동기 혹은 외재적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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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와 관련하여 내재적 가치 때문에 그 세계에 종사하는 것과 외재적 가치 때문에 종사하는 것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내재적 동기나 가치에 의해서 추진되는 활동은 그 목적이 달성될수록 더욱더 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열기가 고조된다. 그러나 외재적 동기나 가치에 의해서 추진되는 활동은 그 동기나 가치가 만족될 때 활동 자체가 중단되거나 혹은 더 효율적인 수단이 생기면 그것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원리는 학문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세속적 관심만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의 학문이 발전할 수 없다. 외재적인 목적을 통하여 학문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적어도 소수나마 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도구적 관점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도구적 관점을 갖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소수정예적인 학문은 일반대중의 지원을 받아야 하고, 그 세력이 학문을 위한 진정한 배경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도 학문 자체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는 학문과 교육의 밖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도, 학문계가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목표와 활동을 가진 세계라는 사전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학문의 진정한 지원자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이 자신들의 세속적인 이익으로 환원되는 경우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것이 학문 고유의 특징을 살려 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좀더 사려 깊은 도구적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국세의 위력을 세계만방에 떨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우리는 근대화 혹은 서구화라는 말을 오래 전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고, 이제는 선진국 진입이라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삶의 질 향상이라는 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선진화를 경제적인 성취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부문의 부흥만을 내세워서 마치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삶의 질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학문을 포함하는 수도계 혹은 교육계와도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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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중요한 부면의 발전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경제 쪽으로만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면, 여타의 부면에 대한 발전은 물론 경제부흥 자체도 한계에 부딪힐 것이 분명하다.

  학자와 일반인은 서로 정확한 소통과 이해에 기초하여 손발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우선 학문계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자세가 반석처럼 확고해야 한다. 학문계는 자진해서 찾는 길이다. 다양한 수도계 가운데 학문은 더 진리로운 이론을 추구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어떠한 다른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추구로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자족성을 갖는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에 따른 대가를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 동양의 선인들은 예로부터, 비록 서양의 학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자세로서 수도계를 추구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학문 자체에 몰입하기보다는 출세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문은 그것에 직 ·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학문적 역량과 학문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 의존한다. 정부당국 · 국민 · 유력한 기업가 · 학교경영자들은 학문의 직접 당사자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학문의 지원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세력은 그 관심의 방향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정치 · 경제 · 사회와 같은 세속계적인 목표가 수도계적인 목표를 압도하고 있다. 국가는 세속계적인 논리에 따라서 투자에 대한 이익을 계산하여 학문의 진흥목표를 세우고, 그 외재적인 목표달성을 위해서 “교육을 일방적으로 시키려고”한다. 일반대중은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학문을 부귀공명의 수단으로 보고 이에 참여하며 지원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한 책임의 근원은 학문공동체를 구성하는 학자들로 귀속된다. 왜냐하면, 라베츠의 지적대로, 학문의 내재성을 입증하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확보하는 최종적인 책임은 학자집단에게 있기 때문이다.

  학문하는 일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동기가 아니라, 외부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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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생기 찬 생명력을 이미 기대하기 어렵다. 학문적인 지식은 바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때 가장 내실 있게 발전될 수 있고, 또한 여타의 생활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학문은 그것의 수단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풍토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의 학문은 그러한 저급한 기능적 관심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우리의 핏줄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오래된 동양적 전통의 복권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수도계와 교육 자체를 세속계적인 것보다 앞세우는 삶의 자세를 보였다. 그런데 우리 후손은 서구화와 국가발전이라는 이름하에 그러한 고급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혹은 그 우선순위에 있어서 세속계적인 것보다 후차적인 것으로 그 가치를 전도시키고 말았다. 앞서의 후쿠자와의 논리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이 문명의 본래적인 실체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본래적인 문명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강변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어떠한 논리가 더 적절하고 유효한 것인가? 후진국은 후쿠자와와 같은 전략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의 근거로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인의 도구적 관점이 학문과 교육의 발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쿠자와식의 전략은 시급히 전환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도구적 관점은 오늘날 학교의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히 드러나고 있다. 학교교육의 실정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하다. 초 · 중등학교에 취학하는 실제적인 목표는 대학에 진입하고, 그것을 통해서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을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속계적인 요소가 더욱 강조됨으로써 학문 자체보다는 대학 입학의 좁은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하급학교의 실제적인 목표로 둔갑되고 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학문 자체의 발전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학문의 내용보다는 시험의 공정성과 형식에 관심이 집중되고, 학문의 이해보다는 암송을 강조하는 낮은 수준의 학문관과 입시방법이 결탁됨으로써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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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강력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일반 시민이나 정책당국이나 학문과 교육을 수단시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대부분의 국민이 참된 의미의 학문과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교육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제반 실천을 의미할 뿐이다. 제도가 실질을 보장한다는 착각이 만연하고 있다. 학교를 많이 세우면 그만큼 교육이 신장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열’은 그러한 교육관에 근거하고 있다. 반성하건대, 그것은 학교에 진학함으로써 얻게 될 물질적 소득에 대한 열정일 뿐, 교육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사고가 지속되는 한 지금의 소모적인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오랜 관행에 의해서 이루어진 수단적인 학문관과 교육관을 일시에 쇄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도된 개념은 우리 동양의 수천 년 역사에 비추어 보면, 최근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동안 학교의 개혁을 위한 국가수준의 정책이 있었다. 그러나 위로부터 강요된 일방적인 개혁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제 학교에서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주체적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일반인의 공감과 지원을 촉구해야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이전의 학문관과 교육관에서 탈피하여 학교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학문과 교육의 본질에 충실하도록 개편하는 것이다. 학문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향유해야 할 수도계의 하나이고, 교육과 자아실현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또한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 자체도 삶의 보람이 될 수 있다. 학문의 내재성과 교육의 내재성을 동시에 살리는 것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길임과 동시에 선진국과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길이다. 학교는 그러한 인식상의 혁명을 토대로 재건되어야 한다.

  후쿠자와 자신이 시사했듯이 수도계가 세속계의 수단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느 단계에서든 문화, 더 좁게는 학문에 대한 도구적 관점을 보다 높은 차원의 것으로 쇄신해야 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교육에 대해서도 그 내재성을 인정해야 된다. 학문과 교육은 유용성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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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그 자체로서 애호될 수 있는 세계들이다. 이 세계들은 일단 그것에 몰입해 본 사람들만이 실감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학문계를 통해서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 자체를 밝히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정상인의 눈이 맹인의 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자신과 타인의 발전을 도모하는 교육계 역시 그것에 몰입하는 사람에게 고유한 가치를 제공한다. 두 눈이 있음을 맹인에게 뽐내는 일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두 눈도 수련을 쌓으면 더 밝은 것을 볼 수 있다. 자기와 타인을 창조하는 데는 한편으로 고통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한한 기쁨이나 만족감이나 행복감이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과제는 우리가 어느 수준에 있느냐가 아니라, 각 수준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초월하려 하느냐에 있다.

  우리는 수도계와 교육계에 개인적인 삶의 큰 비중을 두었던 우리 선인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 삶의 풍요화를 위한 재각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찾아보면, 우리의 선조 가운데는 진정 수도계와 교육의 본질을 그대로 이해하고, 그러한 삶을 영위하는 데 모범을 보인 인물이 참으로 많다. 우리는 그들을 본받아 오늘의 상황을 반성하고 타개하는 계기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에 우리는 우리다운 전통을 되살려 그 전통의 향기를 자손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후일 우리의 자손은 우리가 우리들의 선인의 삶을 추앙하고 감사하듯이 우리들의 세대를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세계문화와 문명의 발전에 공헌하는 길이기도 하다.


  1.3.5. 선인의 귀감


  우리는 근대화의 기치하에 서양의 문물을 동도서기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학문계를 세속화시키는 길을 밟아 왔다. 서양의 학문을 도구로만 보는 것은 큰 오해이며, 그 오해를 극복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학문의 후진적 종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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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하기 어렵다. 아무리 짧은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단 형성되고 난 다음에는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현재 그러한 오해에 근거한 전통은 학교라는 기관을 통해서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시 먼 거리까지 소급해서 우리의 선인들의 삶을 검토하면, 순수한 의미의 수도관과 교육관도 있었다는 확증을 얻게 된다. 우리는 그 원형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은 우리나라에 비해 선진국이었으며, 우리는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종속적 사대주의에 그친 것은 아니다. 한국철학이 중국철학을 따르다가 대등한 수준에 이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앞지른 역사적 사례가 있다. 그러한 역전은 朱子學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추인물 가운데 하나가 退溪 李滉(1501~1570)이다. 그가 내세운 주자학을 다시 발전시키자 거나 혹은 재현하자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부터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선택적인 삶의 자세이다. 그는 우리가 이 저서에서 택한 세계에 대한 본위를 그대로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言行錄>에서 세상의 환심을 사기 위한 ‘爲人之學’을 배격하고, 마땅히 알아야 할 도를 깨닫는 ‘爲己之學’을 역설하였다. 그는 위인지학을 위해서 명리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바르게 실행을 가다듬기를 강조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인 업적은 바로 그러한 생활태도의 소산인 것이다.

  퇴계 선생의 학설이나 업적을 여기서 소개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중국의 주자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데에 근간이 되었던 그의 생활태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만 엿보기로 한다. 다른 선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의 생활세계가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될 다종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 수도계와 교육계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우리의 논의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모범적인 삶을 선택한 선인 중의 한 분이다. 그의 삶은 후진으로서 우리에게 참으로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우리 전통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선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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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체가 증명해 주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글에서 그 어떠한 서양의 문헌을 통해서도 접하기 어려운 수도계적이고 교육적인 삶의 고유한 무늬와 흥취를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다양한 생활자세의 차이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선생의 ‘陶山十二曲’의 일부를 소개해 보겠다. 이 노래는 퇴계 선생이 陶山書院 [각주 42: 도산서원은 당시 출세와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학교체계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만들어진 교육기관이다. 그 후 성격이 다소 바뀌었지만, 적어도 퇴계가 운영할 당시의 이 기관은 우리가 본 저서를 통하여 이론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비교적 제대로 반영된 학문기관 혹은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에서 후진을 가르치던 때에 당시의 심정과 감흥을 표현한 것으로서 세속의 생활, 수도의 생활, 교육의 생활이 대조적으로 담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여기서는 제 10곡, 제 9곡, 제 8곡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12곡의 순서로 그 뜻을 음미하기로 한다.


  當時예 녀든 길흘 몃 해를 바려 두고

  어듸 가 단니다가 이졔사 도라온고

  이졔나 도라오나니 년듸 마음 마로리 (제 10곡)


  이 노래 속에는 수도계와 세속계의 가치를 함께 섬길 수 없는 선생의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선생은 23세에 등과하여 중앙에서 대사성 · 대제학 · 좌찬성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 동안 그는 온갖 세속적인 것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處世’가 ‘行道’를 앞선다. 그것은 그 세계에 머물기를 작정했다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벼슬길이 ‘外道’로서 반성되고 있다. 이는 그가 학문수행의 길을 의미 있는 생활로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원래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것을 몇 해씩이나 잊고 세속계에 묻혀 지내다가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古人을 몯 봐도 녀던 길 알픠 잇네.

  녀던 길 알픠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제 9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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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래는 수도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야말로 간결하고 적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수도계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의 선인이 닦아 온 수양의 길이다. 그 길은 결코 새로운 길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것을 멀리서 관망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세계인가를 알 수 없다. 사실 그 세계는 단순히 생물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곳이다. 그 수도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선인들이 걸어갔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의무나 강제의 길이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간됨을 실현시키는 데 그것 이상의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漸入佳境의 경계가 열리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단지 말만 듣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길을 다시 가면서 인간으로서 높은 수준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높이 오른 자에게만 높은 세계가 보인다. 단지 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수준에서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선생은 선인이 그러했듯이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스스로 걸어야만 할 것으로 작정한다. 물론 후진으로서 우리는 선생이 택한 수도계는 당시로서는 성리학이라는 특수한 학문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를테면 자연과학이나 예술과 같은 여타의 수도계라고 해도 선생의 이 노래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雷霆이 破山하야도 농자는 몯 듣나니

  白日이 中天하야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耳目聰明 남자로 농고갇디 마로리 (제 8곡)


  이 노래는 앞에서 소개된 수도계의 ‘품위’의 본질을 밝혀 주고 있다. 그 성격과 품위에 있어 차이가 있는 선진과 후진이 얼마나 서로 다른 삶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인가를 참으로 간결한 비유로서 설명하고 있다. 품위는 수도계의 각 단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역량이다. 여기서는 품위가 낮은 자가 귀머거리와 눈먼 봉사에 비유되고 있다. [각주 43: “눈뜬 장님”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선진과 후진은 같은 공간 내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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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서도 실상 그만큼 서로 다른 수준의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간의 대화나 이해가 얼마나 어려울지를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선진은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말하고, 후진은 눈이 없는 제약 속에서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교육은 그러한 엄청난 애로와 장애를 극복하는 매개활동이다. 귀머거리의 귀가 소리를 듣게 하고, 봉사가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는 세계가 교육계인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한 단계 높은 세계로 진입하고, 또한 타인의 진입을 도울 수 있다. 그것은 후진편의 치열한 상구와 선진편의 열성 있는 하화가 서로 만나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 이 노래에서 퇴계는 교육이라는 세계의 난점과 보람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이름난 후진을 양성해 낸 그의 관록으로서 교육의 과제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聖人도 몯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낫 듕에 늙는 주를 몰래라 (제 11곡)


  이것은 도산십이곡의 마지막 노래다. 우리는 이 노래에서 선생이 얼마나 교육적인 삶을 평생 동안 즐겼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앞서 논의되었듯이 수도계와 교육계의 차이는 전자가 오류의 크기를 심각하게 문제 삼는 세계임에 비해서 후자는 오류와 불완전의 절대적인 크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고 줄여 나가는 데 오히려 큰 비중을 두는 세계이다. 그러니까 교육은 수도계의 품위수준과는 상관없이 어느 수준에서나 추구할 수 있는 독특한 삶의 양상인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성인들은 어려운 문제도 잘 푼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그에게도 어려운 문제는 어렵다. 어리석은 사람은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한다는 말도 틀렸다. 그에게도 쉬운 문제는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쉽게 푼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관점이 옛 선인의 노래에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흔히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을 갈라놓는다. 또 갈라놓는 기준을 절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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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그러한 임의적인 구분을 부인하는 안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택하면, 성인이든 우자이든지 간에 상구와 하화의 생활이 보장된다. 자신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상구하고, 쉬운 문제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상대로 하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을 통해서 퇴계는 평생을 상구하고 하화하면서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교육적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모양이다.

  흔히 퇴계는 주자학을 대성한 인물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편력과 이 노래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그는 오히려 교육적인 삶을 더 사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는 특히 마지막의 노래에서 평생교육의 실천가로서 우리 앞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만약 그가 오늘날의 시대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교육에 몰입하고, 그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았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주자학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또 그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가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나이나 제도에 구속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할 때 보상을 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교육은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다. 우리는 그러한 교육을 우리의 삶 속에서 되살려 내야 한다.

  퇴계 선생은 주자학이라고 하는 동양적인 수도계에 몰두하는 삶을 살았다. 물론 주자학이 수도계의 하나인 한, 그것을 소재로 우리는 상구하고 하화하는 교육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용어상의 문제로 인하여 혼동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주자학은 이 저서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서양에서 발원한 ‘science’나 ‘Wissenschaft’와는 전혀 다른 수도계이다. 이것은 앞에서 논의했듯이 동양식으로 말한다면, ‘서학’ 혹은 ‘신학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퇴계가 추구한 주자학과는 내용과 성격 면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신학문’을 두고 학문을 논할 때, ‘학자’로서의 퇴계 선생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신학문이 우리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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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되기 이전의 시대에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의 수도계 전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을 소재로 하는 교육적인 삶의 자체는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감이 될 만하다. 여기에 퇴계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우리의 취지가 담겨 있다. ‘신학문’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으로 극히 최근에 속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 우리의 상황은 그 불리함에 있어서 퇴계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학문은 서양문화권에서 발원했지만 오늘날 세계 각 지역에서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그 번영의 정도에 있어서도 발원지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더 빠른 발전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도입의 시기가 늦은 문화권은 그렇지 않은 문화권에 비해서 그 전통을 몸에 내면화하는 데 다소의 장애가 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의 유망한 가설은 비록 우리의 문화권이 학문의 경우에는 늦은 출발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수도계, 이를테면, 유가 · 선가 · 도가의 측면에서 서양보다 더 빠른 출발을 했으며, 또 그러한 것을 소재로 오래 전부터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학문의 발전 면에서도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오늘날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면, 신학문의 면에서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어떠했을까? 그가 결코 학문의 면에서도 서양의 다른 학자에 비하여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우리의 두 번째 가설이다. 그 가설의 타당성은 이제 증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 가설을 실현시키고 입증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선생은 당시에 주자학을 교육하면서 그것이 발원한 중국을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퇴계의 사상이 그렇게 평가받듯이 유학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발전되고 부흥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와 대비되는 ‘서학’ 역시 우리나라의 것으로 흡수할 수도 있다. 오늘날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 있는 우리가 선생의 경험과 전통을 계승한다면, 장차에는 우리나라도 국제적으로 일류의 학문적 선진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 자신이 개입된 문제이다. 본 저서는 그 가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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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내려는 노력의 하나이다.

  역사가 긴 나라로서 우리나라는 수많은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는 훌륭한 것이 많지만, 특정한 세계를 그것 자체로 가치 있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어떠한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유풍도 남아 있다. 예컨대, 유학은 유학 자체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부귀공명과 연관지으려한다면, 그러한 연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퇴계 선생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선택의 문제가 남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유학을 오로지 본질보다는 세속계를 위한 수단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가 생활 속에서 퇴색하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서 “세속계를 위한 유학”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서양의 학문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또한 교육적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반성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한마디로 교육을 추진할 힘이 사람들 자체에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교육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개념적 혼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그것의 바람직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세속계를 위한 교육”도 있을 수 있고, “수도계를 위한 교육”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교육을 오로지 다른 어떠한 것을 위한 수단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자체의 내재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효과도 변질되게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교육을 그 자체의 보람 있는 삶의 양태로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삶의 질의 다양화에 공헌할 것이고, 그로 인해서 수도계로서의 학문도 발전하고 세속계인 경제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의미의 교육관을 가지고 우리가 가진 특별한 문화유산인 ‘교육열’을 향도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21세기를 지향하는 가장 모범적인 “교육의 유토피아(edutopia)”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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