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4장 응용학문
4.1. 순수학문과 응용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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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응용학문
본 저서는 세계는 다원적이라는 관점에서 학문을 논하는 입장을 택하고 있다. 우리는 종류가 다른 여러 세계가 교차하는 영역에서 생활하고 있다. 각각의 세계는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누대에 걸친 독특한 체험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는 앞(1.2.1.)에서 굿맨(N. Goodman, 1978)의 ‘세계창조(worldmaking)’라는 용어를 인용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우리 모두는 세계창조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그때그때 다양한 세계에 종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차이가 있는 그 각각의 세계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특유한 관심과 태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전환할 때 그 상이성은 너무도 커서 슈츠(A. Schutz, 1973)의 말대로 우리는 가끔 그것을 ‘충격’으로 느낀다.
논의의 편의상 우리는 그 상이한 세계들을 세속계, 수도계 그리고 교육계로 구분하는 방식을 취했다. 각 세계의 공동체는 그들의 실천적인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고유한 세계유관적 범주를 만들고, 거기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실재를 구성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상이한 세계들은 각각 그들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추구하고 각각의 가치척도로 그 세계를 측정하고 평가하면서 자율적인 세계로 발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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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따라서 각각의 세계가 추구하는 독특한 가치를 인정해야 하며, 그것 가운데 어떤 것을 다른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흔히 발견되는 시도나 경향은 불허해야 한다.
세계를 체험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내재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외재적 접근이다. 이는 체험해야 할 특정한 세계를 어떻게 선택하고 평가하며, 그에 참여하느냐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가령 학문계에로 접근하는 길을 택했다고 가정할 때 학문을 그 내부에서 보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내재적 접근이 되며, 학문 외적인 세계와의 관련을 통해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외재적 접근이 된다. 그러니까 내재적 세계와 외재적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에서의 이론적인 연구와 탐구대상의 실재를 구분하여 전자는 내재적이고 후자는 외재적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입장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문을 본위로 세계를 체험하는 특별한 입장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체험하는 데에는 학문본위의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속계 중의 하나로서 경제를 주된 체험의 세계로 택한다면, 학문계는 그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외재적인 것이 된다. 또한 수도계의 하나인 예술의 입장에서 볼 때도 역시 학문은 외재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다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각 세계의 내부적 관점을 존중할 필요가 있으며, 서로 다른 가치들을 하나로 환원시켜서도 안 된다. 그런 다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본 저서는 학문을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길을 택했다. 학문은 하나의 실천 영역이라는 점이 이제까지 강조되었다. 그것은 어떤 고유한 인식대상에 대한 적절한 인식체계를 구성하는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독특한 가치, 즉 진리탐구라는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 이것은 예컨대,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또 하나의 실천영역과 구분된다. 학문계와 경제계는 그 자체의 입장에서 존중되어야 할 이질적인 세계이지만, 우리는 경제보다는 학문을 본위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학문을 본위로 할 때, 경제계는 그것이 아무리 우리의 생활에서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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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내재성에 관해서는 앞(2.2.)에서 학문 그 자체를 내부에서 추적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면서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입장은 본 저서에서 시종 견지될 것이다. 학문을 학문 내부의 속성으로 해명하지 않고 그것이 다른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부분을 주로 논의한다면, 고려해야 할 요인들의 수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학문 자체의 속성에 대한 해명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이다. 우리의 논의는 계속해서 학문 자체의 순수한 속성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될 것이다. 제 3장에서 다룬 분과학문과 그들 간의 관계라고 하는 논의도 개별적인 분과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있지만, 그들이 속한 더 큰 범주인 학문 전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 학문내재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장은 예외이다. 이제 학문본위의 관점에서 약간 비켜서서 학문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온 순수한 의미의 학문을 여타의 세계와 관련지워 보는 것이다. 이 세계의 다양한 세계는 체험의 면에서는 순수화가 가능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생활세계 내에서 부단히 상호작용하면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순수성만을 강조하는 논의는 현실감이 떨어진다. 학문은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만약 학문 밖에서 주로 생활하는 독자가 있다면, 지금쯤 이 소리가 무엇인가 의아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문은 진리를 목표로 하는 사심없는 탐구활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고 그 본질에 부합한다. 대학에서의 최첨단 연구를 통해서 호기심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결한 경험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소개한 학문에 대한 묘사, 그리고 제 3장에서 소개한 각종의 분과학문은 이처럼 세속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순수한 인간적인 관심에 의해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동기는 반드시 내재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금의 대학이나 학문계는 너무도 세속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내재적인 동기나 가치만으로는 그것들이 유지되기 어렵다. 그것들은 어떻든 여타의 세계와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가끔 그것은 여타의 세계와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학문이 여타의 세계와 관련을 맺는 양상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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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앞으로 우리는 ‘응용학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학문에 대한 지원은 그 체계 밖에서 주어지고 있다. 오늘날 대학 혹은 연구기관에 큰 경비를 투자하는 지원세력의 동기는 분명히 세속적인 것이다. 대학에 대한 재정적 지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은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육성되고 유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만약 기초연구나 순수연구를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에, 그것은 연구가 가져올 현실적인 이익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모한다는 의도를 더 크게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환언하면, 현대문명에서의 과학은 진리추구라는 내재적 만족보다는 오히려 실용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연구는 과학자 집단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수행하는 실천활동이 되기가 어려운 처지와 상황에 이미 와 있다. 연구는 국가나 산업, 혹은 사회 전체의 주요한 조직으로부터 커다란 보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며, 최종적으로 그 성과가 보조기관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학문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강조해 왔다. 학문은 오랜 투쟁을 거쳐서 많은 적으로부터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강조가 자칫 학문은 여타의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면, 그리고 학문이 세속과 별개의 왕국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식의 인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 학문과 여타의 세계 간의 거래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양상이 이제 학문 전체의 문제보다도 훨씬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태의 진전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에 기초한 현실적인 대응이 학문 자체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도 불가결한 요소가 되고 있다.
사회와 학문의 복잡한 관계양상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것과는 판이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새롭게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방면에 특별한 관심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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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온 라베츠(J. R. Ravetz)가 <과학적 지식과 그 사회적 문제(1973)>에서 기술하고 있는 다음의 내용은 우리의 시각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유익할 듯하다.
현대의 자연과학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과 그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통제력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그 활동은 자기 자신마저도 변형시켜 왔다. 현대의 자연과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동은 자연과학이 더 이상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야기시켜 온 것이다. 현대사회는 점차 과학의 응용에 기초를 둔 산업적 생산에 의존하여 유지되고 있다. 응용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을 산출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거대하고 값비싼 산업이 되었다. 그러한 산업을 관리하고 그 생산물의 효과를 통제하는 일은 시급히 다루어져야 되는 것이면서도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지난 한 세대 동안에 너무도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새로운 사태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들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사태는 과학과 인간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나 또한 새로운 문제와 위험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적 결과의 생산을 물질적 제품의 산업적인 생산으로 비유하는 것은 일면 유용한 점도 지니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위험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적으로 조직된 활동의 산물로서 과학적 지식은 세면대의 비누와는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다. 과학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수반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차이를 무시하려 들 것이다. 또한 과학에 기초를 둔 공학의 효과를 이해하고 이를 통제하는 일은 과거의 학구적인 과학이나 현재의 산업화된 과학 양자 모두에게 그것들이 적절한 해결책이나 태도를 소유하고 있지 못해서 제대로 다룰 수 없을 난제를 던지고 있다. 자연과학은 어떤 형태의 사회적인 관여로부터도 초연한 채 순수한 형태로 독립해 있다는 환상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은 다른 생각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과학을 상업적이거나 군사적인 산업의 한 부서로 천박하게 환원시키려는 것이다. 과학 자체의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타락시키지 않으려면, 그리고 과학의 결과가 무턱대고 사용되어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재앙을 가져오지 않도록 하려면, 과학적 탐구라는 대단히 미묘하고 강력한 특별한 종류의 활동을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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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응용학문은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 학문론은 아무리 그것이 학문 내적인 관점을 대표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학문의 반쪽만을 이야기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응용학문은 학문과 타세계와의 연결을 도모하는 학문들로서 근래에 거의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학문 이외의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응용학문만이 진정한 의미의 학문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처럼 각광을 받고 있는 용용학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계기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는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응용이라는 말에 포함된 가치의 문제는 없는가? 학문의 응용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응용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 이외의 각종 다원적인 세계들과 그것에 접근하는 우리의 입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원적 세계관의 특징을 서두에서 장황하리만큼 자세히 점검했던 것은 응용학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응용하는 세계와 응용되는 세계 가운데 어느 것을 본위로 하느냐에 따라 논의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학문의 내재적인 가치를 앞세워 논의를 전개시켜 왔지만, 응용학문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외재적인 가치를 더 중시하는 것으로 입장을 전환시켜야 될 필요가 있다. 학문을 응용하려는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학문은 그 세계에 봉사하는 수단적인 위치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논할 응용학문은 바로 그러한 위치를 노골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등장한 학문의 영역인 것이다.
학문의 응용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대학에서의 직업교육의 문제이다. 오늘날은 다양한 직업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고, 그 세계에 잘 적응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문제와 학문의 영역이 서로 불가분의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학문과 직업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대학에서 직업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학자를 양성한다는 것과 여타의 직업준비를 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러한 제반 문제가 다루어질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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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울러 그러한 논의를 토대로 우리는 하나의 응용학문으로서 교육학의 성격과 문제점을 취급하게 될 것이다. 교육학과 교사교육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훌륭한 교육학자를 양성하는 일과 훌륭한 교사를 양성하는 일은 같은가?
4.1. 순수학문과 응용학문
4.1.1. 학문계의 안과 밖의 관심
학문계 혹은 그것이 산출해내는 학문적 지식의 가치는 두 가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 하나는 내재적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외재적 가치이다. 내재적 가치란 진리기준을 말하며, 외재적 가치란 세속계적인 것을 포함하는 온갖 이질적인 가치기준을 말한다. 학문의 총체적인 가치는 그 고유가치인 진리와 그것의 외재적 가치의 總和가 될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측면을 더 강조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취급해 온 ‘순수학문(pure sciences)’과 앞으로 이 절에서 다룰 ‘응용학문(applied sciences)’의 구획기준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순수학문이고,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응용학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학자들도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활동을 진리의 기준에 의해서 정당화하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학문 이외의 세계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을 주로 내세우려고 한다.
학문 외적인 세계는 물론 허다하다. 그 중 우선 학문의 대상세계가 있다. 자연계는 자연과학의 대상이지만 자연과학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의 하나이다. 우리의 분류를 적용해 볼 때, 세속계 · 학문 이외의 여타의 수도계 그리고 교육계가 또한 학문의 대상세계가 된다. 응용학문은 그 여타의 세계의 관점에서 그것이 지니는 가치를 평가받고자 하는 학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분야는 순수학문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학문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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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的인 양상으로 보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 이외의 세계와 가교를 맺으면서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는 필요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의 수단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됨으로써 학문의 순수성과 고유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는 아직도 상존한다.
순수학문을 지향하는 학자들은 학문 외적인 제반 세계가 학문 자체를 규정하는 데 불가결한 요건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처음부터 그것들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학문의 가치를 이론적인 가치에 국한시키고 있는 학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들이 실생활에 도움을 주느냐 혹은 주지 않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가치추구를 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한 삶의 양태는 세속적인 삶의 실질적인 연관을 떠나 별의 운행에 대한 법칙을 찾으려고 하는 천문학자들의 행위 혹은 수학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증명하고자 하는 수학자들의 행위에서 나타난다. 그처럼 앎 자체가 가치있기 때문에 학문활동을 한다는 식으로 순수학문을 정당화하는 논변에 의해서 ‘상아탑’을 대학의 이념으로 표방하던 시절도 있었다.
순수를 사랑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학문의 최고목표는 진리탐구이다. 이는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급의 수도계적인 가치로서 그 자체를 위해서 자유롭게 추구되어야 한다. 학문의 본질이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면, 지식의 용도가 학자의 일차적인 관심이 될 수 없다.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진리에 대한 사랑 자체에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활동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 활동이 어떤 이유에서건 제약을 받는다면, 경우에 따라 진리를 위해서 자신의 물질적 · 사회적 생활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변 환경의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순수학문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역사적으로 학문계에서 중요한 발견과 참된 지식이 획득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에서 나오는 저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학문의 유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세계나 활동도 그것 자체를 위해서 봉사하는 내재적 측면 못지않게 외재적 측면도 지니게 마련이며, 이 점에서는 학문도 예외가 아니다. 학문을 통해서 얻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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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지식 자체의 탐구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며, 일종의 부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순수학문을 지향하는 학자들의 고집이다. 여기서 부차적이라는 말은 그 용도가 학문의 내재적인 가치에 우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용도에 더 큰 비중을 둔 학문활동의 문제는 학문이 그 용도적 가치를 제외하고도 자체로서 종사할 만한 충분한 수도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만약 용도가 학문을 하는 동기라고 한다면, 그 용도를 충족시키는 다른 수단이 발견되는 상황에서 학문활동은 쉽게 중단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용도라는 것도 사실은 그러한 고유가치가 존중될 때, 비로소 생산될 수 있다. 따라서 학문의 참된 면모를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은 순수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문을 그 고유성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순수주의자들이 가끔 학문의 응용적인 측면을 일부러 외도로서 격하시키려는 경향조차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다원적인 실재”라는 개념을 도입한 슈츠(1973)는 “학문적인 세계”와 “일의 세계”를 특별히 구분한다. 그는 학문적인 이론화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사용되며, 어떤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pp.245-259). 이러한 관점은 사실상 학문의 발전사에 비추어 보거나 또 대중이 이해하고 있는 학문에 대한 인식에 비추어 보면, 얼른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겠지만 학문의 독자성을 지적할 때 꼭 거론되는 사항이다. 이에 대해서 학문 밖의 세계에서 종사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자연과학은 우주의 힘을 지배하기 위해서 고안되지 않았는가? 사회과학은 사람을 질서있게 통제하기 위해서 고안되었고, 의학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닌가? 예상되는 이러한 반론에 대한 슈츠의 대답은 이렇다.
물론 세계를 개선하려는 욕망은 과학을 취급하는 가장 큰 인간의 동기 가운데에 하나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이론의 적용은 세계의 지배를 위한 기술적인 고안물의 발명과 물론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나 혹은 과학을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과학적 이론화 자체의 과정에서 하나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과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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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이론화 작업과 일의 세계에서 그 과학을 취급하는 방식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pp.245-246).
그러나 이러한 학문관이 지니는 문제는 그 학문계를 지원하고 있는 일반 사람들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초래하는 데 있다. 실제로 학문의 고유 가치를 실감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문 외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들은 학문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을 때 비로소 학문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지원할 용의도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학문공동체의 대표적인 기관이라고 알려진 대학에도 오늘날에는 순수학문보다는 응용학문을 하는 인구가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볼 때 순수학문적인 이념은 시대에 역행하는 고루한 고집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학문은 여타의 세계와 관련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세계 속에 존재한다. 순수학문을 고수하려는 입장에서도 그 세태와 여건의 변화를 고려해야만 시대의 흐름에 대처할 수 있다. 개념적으로 볼 때는, 체계의 구성부분만을 고려해도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이 충족될 수 있다. 이러한 연고로 순수주의자들은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며, 그 영향을 고려한다면 학문의 자율성에 침해가 오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는 우려를 하기 쉽다. 그러나 바로 그 우려 자체가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다. 학문은 자율적인 세계임에 틀림없지만, 그 자율성 자체만을 부각시키는 입장이나 논의는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격리시킬 우려가 있다. 학문의 독자성을 부각시키는 것과 그것과 다른 세계와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세상의 어떤 하위세계도 다른 것과의 관련 속에서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학문은 항상 어느 정도는 학문 외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과제는 어떻게 학문계가 주변의 여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학문계와 세속계가 공존하는 데에는 피하기 힘든 긴장이 있다. 한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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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그 탐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제도적 · 물질적인 지원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속계는 그들의 권력유지나 부의 축적 등과 같은 의도를 관철시키는 데 필요한 기능을 그 대가로 요구한다. 그러한 상보적인 관련 속에서 학문, 그 가운데서도 자연과학과 그에 따른 기술은 오늘날 정치 · 경제 · 사회체제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진행되고 있다. 과학은 이제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직장을 주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제도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규모가 점차 거대화되고 있다. 연이은 과학의 급속한 발전은 이른바 ‘과학기술혁명’을 가져왔고, 그것은 생활에 큰 변혁을 초래하고 있다. 이제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영향이 광범해짐에 따라 인간은 그가 만들어낸 괴물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조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입장에서도 우리는 학문과 다른 분야와의 공존양상과 갈등을 예상해야 하고, 그 해결책을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학문본위의 세계관을 처음부터 표방한 본 저서는 학문이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계라는 관점을 견지해 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제 3장에서 분과학문을 논하면서도 우리는 ‘순수학문’만을 다루고, ‘응용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분과학문에 관한 것은 배제하였다. 사실 독자들의 다수는 그러한 외재적인 관점이 이 저서에서 생략되고 있는 점에 대해서 은근히 불만을 가져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분들은 이제까지의 논의가 학문을 세상일과 너무 동떨어진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 묘사가 너무 순진한 공리공론적 가공이라는 인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것 자체가 학문계에 가해지는 최근의 외부적 세력의 증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택하고 있는 입장은 세상일을 순진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문계를 학문계답게 순진하게 보려는 입장을 취해 온 것이다. 우리는 세상일이 학문처럼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의 의도는 독자에게 이제까지의 학문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현실감이 없다거나 혹은 세상일에 대해서 순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면, 그것을 모면할 수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제까지의 고답적인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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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떠나서 허락된 지면의 범위에서나마 현실과 학문이 관련을 맺는 복잡한 양상에 대한 좀더 실감나는 주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4.1.2. 구분의 두 가지 기준
오늘날 학문은 대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거의 모든 분과학문이 대학의 교육과정과 관련되어 구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은 설립된 초기에는 주로 순수학문을 표방하다가 그 후 점차 사회변화와 대학 주변의 현실적인 여건들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변천해 왔다. 그 변천의 두드러진 특징은 각종 응용학문의 수용과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직업교육의 등장이다. 다양한 목적을 가진 각종의 학과가 저마다 분과학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
현재 대학에 있는 어떤 특정한 분과학문을 두고 그것을 순수학문이나 응용학문의 하나로 정확하게 분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경계’라고 하는 것은 항상 모호하게 마련이다. 흔히 응용학문으로 분류되고 있는 분과학문 내에서도 학문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학자들이 있고, 순수학문을 분류되고 있는 분과학문 내에서도 주로 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산출한 지식은 언제나 얼마만큼의 진리기준과 응용의 기준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고 있다. 만약 순수와 응용의 기준을 굳이 적용하고자 한다면, 순수와 응용의 스펙트럼을 가상하고 순수는 진리탐구를 지향하고 있고, 응용은 기술의 개발 쪽을 지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학문을 두고 그들을 양분하는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좀더 원칙적인 점에서 그들을 분류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을 찾을 필요가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근대 학문의 성립(3.1.)을 논할 때 그 사례로 든 바 있는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수학 · 심리학 · 경제학 · 사회학 · 언어학 · 철학 등이 순수학문의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대체로 학문적인 것들로서 실용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은 지식체계들이다. 그러나 대학에는 이러한 것들 이외에도 허다히 많은 분과학문들이 있다. 이공계열의 경우, 건축학 · 기계공학 · 원자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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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 · 컴퓨터 공학 · 농공학 · 섬유학 등 기술개발을 지향하는 학문들이 있다. 이들을 통칭하여 ‘공학(engineering sciences)’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특정한 직업과 관련된 학문들, 가정학 · 농림축산학 · 의학 · 약학 · 법학 · 경영학 등이 있다. 이들은 실생활에 직접 관련이 있는 지식체계를 지칭하는 것들로서 학문의 순수한 형태라기보다는 순수학문과 기술의 중간적인 형태를 취한다. 이들은 학문과 여타의 세계와의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는 영역들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더욱 실감나게 수용되는 면을 갖고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무엇을 위해 학문을 하느냐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순수와 응용의 구분이 이루어질 수 있다. 동기와 목표,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지식의 평가기준이나 가치기준들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순수학문은 학문의 내재성을 강조하면서 유지된다. 순수학문은 무엇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무엇은 대상을 의미하며, 대상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양한 분과학문이 구분된다. 이 분야에서는 대상을 궁극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식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서 지적인 만족을 얻는다. 이 분야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지식이 대상세계에 관한 보편적인 설명이나 이해력을 확장시키고, 진리의 기준에 비추어서 타당한 것이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연구를 한다. 그들에게는 실제적인 효용이나 일반대중의 인정이 아니라, 동료 학자들의 인정이 더 중시된다.
이에 비해 응용학문은 안다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앎의 쓰임새에 목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 분야에서 무엇을 알아야 한다면, 그것은 앎 자체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응용학문은 이미 순수학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모종의 특수한 현실상황에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의 실용에 봉사하지 않는 응용연구는 존재가치가 없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학문적 지식의 가치는 특정한 실용적 목적을 달성하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 극단의 경우 이론이 없이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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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일반인들은 학문보다는 그 편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응용학문은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학문의 범위 내에서 외재하는 세계에 공헌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응용학문은 자신의 학문적인 공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론이 있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써 실용적 목적이 더 효율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노력한다.
지식의 응용여부만을 두고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을 구분한다면,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게 된다. 모든 지식은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문이 오로지 진리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얻게 된 지식은 종국적으로는 얼마만큼의 효용성을 갖게 마련이다. 오히려 내용상으로 순수학문의 것이 응용학문의 것보다 더욱 일반적이어서 적용범위가 더 넓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엄밀히 따져 보면 응용학문이 순수학문을 응용한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이미 순수학문의 응용성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기와 가치의 측면 이외의 어떤 다른 구분의 기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으로서 우리는 지식의 형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은 지식의 형태 면에서 비교적 쉽게 식별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지식에 포함된 변인들의 관계양상과 동원된 변인의 수에 있어서의 차이이다. 순수과학자는 가능한 한 소수의 변인을 고려하여 자체의 자율적인 지식체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그 특정한 변인들은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 인식대상의 고유한 속성을 드러내면 그만이다. 여기서 우리는 배타적인 태도가 작용함을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외재적이거나 혹은 비본질적인 요인은 가급적 제외된다. 이에 비해서 응용과학은 이론세계와 그것이 응용될 실제 간의 교량 역할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순수한 이론으로부터 그것을 응용하려는 실제에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목표라는 일방적인 인과관계를 중요시한다. 또한 실제의 특수한 맥락과 현상적 상황에 접근하기 위해서 더 복잡한 많은 요인들을 동시에 그 지식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여기에는 순수학문에서 어떤 특정한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변인만을 고집할 수 없다. 하나의 구체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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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문제를 놓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건 간에 통합적으로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응용학문에 동원되는 지식은 대개 잡다한 변인이나 개념을 포함하는 學際的인 형식을 띠게 된다.
동기와 지식의 형태, 이 두 가지 기준을 우리는, 한편으로 순수학문과 그 인식의 대상세계 간의 차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를 인과적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검토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택해 보기로 하자. 가령 천문학과 천문현상을 생각해도 좋고, 경제학과 경제현상을 생각해도 좋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 인식하는 세계와 인식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세계 자체의 속성에 비추어 보면, 이들 간에는 天壤之差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질성의 정도를 말한다면, 천문학과 천문현상 혹은 경제학과 경제현상의 차이가 경제학과 천문학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학의 목표와 경제계의 고유 목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전자는 진리를 추구하고, 후자는 경제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적 가치실현을 위한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가끔 모독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다. 사실 경제적 가치는 경제학이 있기 이전에도 경제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충분하게 실현되어 온 가치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점에서는 경제인이 경제학자보다 우위에 선다. 따라서 경제학의 의의를 오직 경제적 가치의 극대화에서 찾는 경제학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을 경제인의 수단적 위치로 종속시키는 수모를 참아야만 한다. 경제학자는 그러한 본위의 도착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경제현상을 통해서 진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점에서 경제학자는 경제인보다는 천문학자들과 업무상 더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문의 대상세계와 학문적 인식의 틀도 다르다는 사실이 다시 지적될 필요가 있다. 하늘의 별과 경제현상은 학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인식활동을 전개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로 가정될 수 있다. 우리의 학문활동은 그 대상의 존재에 대해서 지적인 안목을 점유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대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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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점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 우리는 호수에 있는 물고기와 그것을 포착하는 그물망의 비유를 들 수 있다. 호수에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가 잡힌다. 그런데 학문적인 지식은 물고기라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포착하는 그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물이라는 지식망을 요리해서 고기의 맛을 보거나 혹은 허기를 면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대상과 그에 대한 지식은 다시 떡과 떡을 그린 그림에 비유할 수도 있다. 또한 점유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영토와 지도라는 비유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지도는 아무리 잘 만들어 졌어도 실제의 영토 자체는 아니다. 영토에 대한 지도를 읽는 것과 땅을 자기 발로 직접 밟아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또한 영토의 점유자와 그에 대한 지도의 점유자는 점유권의 범위와 한계에 큰 차이가 있다.
땅을 점유하고 있는 지주와 그것에 관한 지도를 점유하고 있는 사람을 비교할 때, 그 땅의 처분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에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만큼 학문의 대상과 그 대상을 탐구하는 학문이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는 제한적인 것이다. [각주 1: 우리는 이런 문제를 앞(2.3.2)에서 학문적 지식과 여타 세계의 지식을 구분하는 자리에서 취급한 바 있다.] 천체현상을 잘 이해하면 그것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경제학을 알면 경제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그만큼 인문 · 사회과학은 그 대상세계와 혼동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상 어느 정도의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현상을 잘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경제현상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 점을 흔히 간과하고, 어떤 특정한 학문을 이해하면 곧 바로 그 대상현상과 손쉽게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실증주의라는 편견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실증주의는 현대판 착각의 한 유형을 이루고 있다.
순수학문이 활용될 수 있는 직접적인 범위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수학문이 인식의 대상세계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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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임받는다면, 그것은 어떤 몫을 할 수 있는가? 가장 분명한 공헌은 통제되어야 할 대상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는 그 대상을 통제하는 하나의 요인은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학자들에 의해서 구축되어 왔다. 천문학자들은 주로 별의 운행을 설명하는 일단의 지식을 산출하였으며, 그 지식의 개선이라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 천문적인 사실에 관한 지식은 엄청나게 증대되어 왔지만, 그것들이 천체를 통제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 것일지는 아직도 미지수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도 그 동안 경제적인 현실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학적 체계를 구축해 왔고 그 발전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경제현상 자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반 인과적 요인을 고려하여 학문적인 이해를 특정한 맥락 속에 있는 현실생활의 문제해결 과정까지 연결하는 일은 응용학문이 수행해야 할 과제로 넘겨진다. 응용학문은 순수학문의 지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고, 주어진 특수한 목적에 맞도록 그것을 재조정해야만 한다. 땅에 대한 여러 가지 지도, 예컨대 산업용 · 군사용 · 여행용 · 기상용 지도는 유관한 특수한 정보의 선택과 추가의 방략에 의해서 사용자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영토에 대한 안내를 한다. 이처럼 존재의 여러 특수성에 따라 그것이 공헌해야 될 특정한 세계의 목표에 맞도록 지식을 재조정함으로써 응용학문은 순수학문의 외재적 가치를 높일 방도를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상세계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문의 외재적 가치는 예상대로만 생성되지 않는다. 예상할 수 없는 온갖 변수가 돌발적으로 추가됨에 따라서 다수의 상황 변인이 통합적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가령, 지구나 달의 궤도에 우주선을 하나 올려놓는다거나 어떤 특정한 경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단 천문학이나 경제학의 변인만을 고려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응용연구는 순수연구보다 훨씬 많은 요인들을 동시에 그 지식 속에 포함하게 된다. 그러한 양상은 점차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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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계속되는 논의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부각될 것이다.
4.1.3. 대중적 관심의 불균형
이 정도로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순수학문과 이제부터 우리가 더 검토해 볼 응용학문의 차이가 대략적으로 이해되었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의 균형에 관한 문제를 언급해 두고자 한다. 최근에 등장한 응용학문은 순수학문에서 거두어들인 지적인 수확을 여타의 세계의 이익을 위해서 환원시킨다는 취지에서 일반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응용학문은 그 동안 삶의 개선과 특정한 목표의 달성이라는 면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혁혁한 공훈을 쌓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미묘한 불균형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학문의 가치를 오직 그것의 수단적인 측면에서만 인정하려는 풍조이다. 오늘날 학문은 그 자체로서 자생력을 갖기는 어렵고 대중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학문의 가치를 실제 생활에서의 용도에 의해서만 평가하고, 그 기준에 비추어 지원하려고 하는 데서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검토했듯이 순수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훌륭한 이론들이 직접적인 실용의 면에서는 당장 전등 하나의 가치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또한 이 점에서 에디슨을 능가하는 평가를 받을 만한 학자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사회가 순수학문의 진흥보다는 목적의 이익을 보장하는 응용학문에 많은 지원을 하는 경향은 학문의 고유한 측면이 간과되거나 경시되는 풍조를 낳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학문의 고유한 가치를 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이제 지식 자체를 추구한다는 명분을 가진 학문은 퇴조하고 있다. 대중은 그러한 학문은 비현실적인 공리공론이요, 무용지물이라고 평가하고 물질적인 지원을 중단함은 물론 비생산성을 비난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대중이나 정부는 단기적인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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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를 가져오지 않는 이론적인 연구들보다는 실제적인 연구들을 선호한다. 이른바 ‘첨단기술들’이라고 부르는 지식이 최고의 인기순위에 있다. 상아탑의 이념을 표방했던 대학도 이제는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고, 또한 대중의 지원 속에서 운영될 형편에 있기 때문에 소극적인 침묵을 지키거나 대중적인 평가에 휩쓸리고 있다. 특히 서양의 학문을 ‘東道西器’의 관점에서 수용하고 있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그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예견되는 제반 여건과 결과를 고려할 때 유감스러운 경향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의 내재적 가치를 배제한 외재적 평가는 학문계의 발전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만약 학문을 평가함에 있어서 외재적 기준이 내재적 기준을 앞선다면 학문적 특성은 유지되기 어렵다. 가령, 세속계는 각각 별도의 활동과 그 활동의 성과를 평가하는 별도의 절차를 요구한다. 세속계는 권력 · 물질 · 지위와 명예라는 목표를 추구하며, 그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치열한 경쟁에 의해서 배분된다. 여기에서는 강자와 약자 · 부자와 빈자 ·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역사를 통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전자가 후자보다는, 적어도 세속계의 입장에서는, 윤택한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학문적 지식의 가치를 세속계적인 가치에 의해서만 평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명백하다.
오늘날 막대한 재정적인 힘을 가진 정부나 기업은 어떤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이론적인 연구들보다는 실제적인 연구들을 더 선호한다. 그들은 정부의 목표나 기업의 목표에 부합한다고 판단되는 어떤 형태들, 즉 우리가 흔히 ‘첨단기술들’이라고 부르는 기술의 형태들을 연구가 제공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기술적인 영역에 투자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구체적인 ‘결과물들’을 가져다준다. 그에 비해서 순수과학을 지원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도 같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학문에 대한 지원은 오늘날 진정 불필요한 것으로 보아도 되는가?
학문을 수단의 측면에서만 평가하고 권장하는 것은 현대라고 하는 특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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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산물로서 이는 학문을 보는 일면적인 편견이고 단견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우선 서양의 학문을 수도계적으로 보지 않고 오직 도구적인 효능의 측면에서만 보는 견해에는 큰 오해와 착오가 있다. 물론 동양인이 서양의 학문을 접할 때 학문은 엄청난 제국주의적 위력으로 나타났으며, 따라서 동양의 우리들에게 서양학문의 도구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도구성의 이면에는 학문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학자들의 노력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초과학은 응용과학의 직접적인 기반이 된다. 더욱이 학문 외재적인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기초과학에서의 자유로운 사고의 탐험은 뜻하지 않은 실재의 발견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이 자유는 단기간의 대가를 바라는 사회의 요구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존중되어야 한다.
각 분야는 그 분야 자체의 내재율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학문적인 욕구를 비학문적인 수단에 의해서 충족시킨다거나 여타의 것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은 양편의 어느 쪽을 위해서도 지지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들 간의 협동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면, 우선 그들의 독자성부터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차례 강조해서 지적했듯이 학문은 다른 여타의 세계로 환원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의 세계와 그것이 사용되는 실제의 세계는 분리되어야 한다. 또 그 평가방법도 서로 독립되어야 한다. 세속적인 가치는 세속의 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에 비추어 학문을 평가하는 것은 학문의 독자성이 세속계적인 관점에 의해서 희생되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순수학문의 입장이 학문의 외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치이건 그것이 가치롭다면 그만큼 좋은 것이고, 이 점에서 학문의 외재적 가치는 학문의 부가가치로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價値倒錯의 경우를 경계하는 것이다. 지식의 결과를 기술로 전환시키는 것이 학문의 주된 활동이 된다거나 혹은 학문의 평가기준이 된다면 학문의 순수성은 지켜지기가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의 경계를 더욱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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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획할 필요가 있다. 진리롭기 때문에 효용이 있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효용이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생각은 순수학문의 입장에서는 수락하기 어려운 기준이다. 학문의 내재적인 기준에 비추어 보면, 응용학문은 학문의 목록에서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학문계에서 진리와 같은 수도계적인 가치가 추구되어야 할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학문은 그 자체로서 추구할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서 학문이 세속계적인 수단의 일부로 인식될 때, 학문의 발전은 물론 학문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잃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징후가 날로 점증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세속계적인 잣대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그러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수도계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때 우리는 같은 정도의 낙관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과학은 출범의 초기에 그것 자체를 추구하는 아마추어적인 열정에 의해서 추구되었고, 그 결과 그것이 세속계적인 풍요를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말하자면, 학문의 수도계적인 속성과 세속계적인 속성 간에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균형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학문은 세속계적인 지원하에서만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세속계적인 삶의 수단으로만 가치를 인정받게 됨으로써, 학문생활이 원래 가지고 올 수 있었던 정신적인 삶의 자취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대신에 우리는 물질지상주의라는 새로운 야만, 과학지상주의라는 새로운 문맹, 정신적인 황폐화라는 새로운 가난과 궁핍을 경험하고 있다.
학문의 수도계적 가치가 존중되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로부터 얻은 지식이 다른 세계의 목적을 위해서 널리 활용될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은 모든 과학적 지식이 잠재적으로 기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재적 가치의 실현은 학문적인 지식 자체가 먼저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순수학문의 지식은 분명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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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전자기학의 법칙에 관한 자신들의 기초적인 업적이 오늘날과 같은 전기 · 전자의 산업으로 연결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오직 전등과 같은 기술적인 효과만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활을 오로지 세속계적인 공동선이나 공리적인 목적에 종속시켰다면, 그러한 이론적 탐구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진리탐구는 사회적인 용도나 목적의식에서 해방된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학문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변의 제도와 여건을 검토하고 개선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응용학문이 세속과 학문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오직 응용학문의 세속적인 매력에 의존해서 학문을 유지하려는 정책에는 근시안적인 한계가 있다. 만약 학문 외적인 현실에 대한 유관성(relevance)만을 따져서 지원세력인 국가나 그 밖의 공공기관 혹은 특정한 산업체가 오직 그들의 목적과 이득에 부합할 때에만 학문계를 지원한다면 많은 부작용이 생겨날 것이다. 순수연구는 반드시 실용화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실용화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긴 안목의 장기적인 투자가 요망된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학문을 하다가 보면, 그 지식의 결과가 다른 여타의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응용만을 위해서 학문을 지원하다 보면 우선 응용되어야 할 지식이 바닥날 것이고, 기초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학자들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간에 이제 아마추어의 신분으로 순수학문을 하기에는 그 학문적 시련이 너무도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학문공동체 · 국가 그리고 일반대중의 적절한 분업적 협조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폴라니(M. Polanyi)는 참으로 그럴 듯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그는 과학의 발전단계에서 그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학문공동체는 사회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오직 진리탐구에만 열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하권의 제 9장에서 학문공동체의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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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를 논할 때 더 상세한 지적이 있겠지만, 학문공동체는 오로지 진리라는 기준에 복종하면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견해와 활동을 평가하는 전통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대중은 그것을 진흥시킬 수 있는 지원을 하되, 결코 그 목적과 내용에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와 대중은 학문의 진흥에 봉사하면서 동시에 학문으로부터 그들에게 유용한 지식을 공급받는 이상적인 분업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시대와 장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현실의 학문적인 낙후성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