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4장 응용학문
4.2. 응용학문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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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응용학문의 출현
4.2.1. 과학과 기술 간의 제휴
우리는 앞(3.1.)에서 순수학문의 출현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검토한 바 있다. 그 출현의 동기와 과정이 소상하게 밝혀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응용학문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들은 어떻게 출현했는가? 그 생존조건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의 차이에 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응용학문은 한마디로 그 상호 이질적인 것들 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들 간의 교류를 매개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세력을 얻었으며, 그들 간의 원활한 상호작용을 조장하는 가운데 오늘날 보는 것처럼 날로 번창하고 있다.
어떤 두 가지 사실을 관련짓기 이전에 그들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한다. 서로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 같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본 저서를 통해서 지켜 온 그 원칙에 따라 우리는 우선 과학과 기술이 대비될 수 있을 만한 상치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자. 많은 것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핵심적인 것 세 가지만 들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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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각주 2: 이에 관해서는 주로 Polanyi(1951, pp.73-76; 1958, pp.178-180)의 견해가 많이 참조되었다.]
첫째, 지식은 관념의 적극적인 변형이고, 기술은 환경의 적극적인 변형이다. 과학은 사물의 본질 속에 침투하여 일련의 법칙이나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산물이다. 이에 비해 기술에서 얻는 결과는 실용적인 고안품이나 발명품이다. 물론 그 고안물이라는 것이 반드시 유형적인 것은 아니다. 많은 문화적 고안물처럼 무형적인 것도 있다. 기술이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도구를 사용한다. 가령, 그러한 도구에 의해서 물질적인 자원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변형되어 나타난다. 기술의 영역에서는 물질의 가능성이 어떤 특정한 목적에 맞는 방식으로 유형적인 형태로 새롭게 실현되면 그만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지력이 작용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실제적인 문제사태의 인식 · 손재주 · 새로운 착상 · 시행착오 그리고 그 물체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그 성패를 좌우한다.
둘째, 과학과 기술은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활동성과를 평가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지식은 眞僞가 관건이지만, 기술적 행위는 결과상의 성공여부가 문제이다. 학문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고 그 타당성은 진리의 기준에 의해서 평가한다. 진리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지식은 더 나은 지식으로 대치되고 개선된다. 우리가 이미 검토해 온 바대로 그 진리가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진리기준에는 부합하지만 쓸모없는 지식은 얼마든지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은 어떤 알려진 이익에 봉사하는 새로운 운영원칙을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기술의 평가에 있어서 논리적인 정당화나 합리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목적(가령 더욱 싸고 효과적인 것)에 그 기술이 봉사하지 않거나 효과 면에서 보다 나은 것이 나오면, 그것은 사라지거나 대치된다. 그리고 더 나은 실용품이 이전의 것을 항상 제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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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새로운 지식은 별 제약이 없이 널리 보급되지만, 기술적인 발명은 특허로서 보호받는다. 순수 혹은 기초과학의 결과에 대해서 과학자가 지적인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자신의 연구결과가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지식은 널리 공표되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여기서 최소한의 예의라면, 그 지식을 창안자의 이름과 더불어 인용하는 정도이다. [각주 3: 최근에는 컴퓨터 통신망이 학술적 정보의 흐름에 있어 중요한 매체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적인 발명품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품화되는 경우 판매 과정을 거쳐서 배분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윤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기술에서는 이러한 세속적인 이권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에 특허와 같은 제도를 통해서 그 산물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이처럼 서로 차이가 있는 학문적인 이론과 기술의 만남은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근래에야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은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오랫동안 별도의 길을 걸어왔다. 기술이 학문의 이론적인 연구보다 앞서 발달하였다. 이론은 기술보다는 훨씬 이후에야 자체의 발전을 목적으로 축적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이들이 서로 만나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론적인 기초연구가 기술에 응용되고, 기술에 의한 지식획득이 이론적 기초의 연구에 공헌하면서 서로 상승적으로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주제인 응용학문은 한마디로 이 양자를 매개하는 과정의 산물에 해당된다.
‘기술’이라는 용어는 통상 공업생산물 · 기계 · 자동차 · 공장 등 모든 인류문화의 기술적인 활동 전체를 대략적으로 표현하는 선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새로운 설계의 기법, 공정과 같은 무형의 기술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기술이 결합된 것으로서의 과학기술을 보고 있지만, 원래 기술은 실험과 이론적인 연구의 영역 밖에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였다. 기술은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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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자연을 이용하는 기술은 인류가 지상에 출현할 때부터 발전하였다. 고대에서부터 인류의 문화의 각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인정되고 있는 돌 · 청동과 철의 사용은 과학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기술분야에서 얻은 성과였다. 불 · 도자기 · 베틀 · 바퀴 · 선박 · 인쇄술 · 동력 · 재료 · 작업기계의 향상이 이루어짐으로써 생활에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도 사실상 기술의 논리에 의존한 것이다. 그 과정에 개입되는 원리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이전에도 기술자들은 많은 고안물들을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적인 진보는 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낮은 계층의 장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은 과학자라고 하는 일군의 특수한 동호인 집단에 의해서 추구된 세계로서 자연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을 추구했다. 16 · 17세기의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자연계를 설명할 수 있는 상당한 정도의 지식체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과학과 기술은 그들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별개의 세계로 진행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3대 발명이라고 할 수 있는 증기기관 · 면직기 · 선반 등의 발명에도 당시의 과학이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 이 기간동안에 기초과학은 대개 여유 있는 계층이 생활수단과는 무관하게 사회적인 대우를 받으며 연구하는 소수의 아마추어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 사실은 앞(3.2.4.)에서 학문공동체의 형성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언급된 바 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이처럼 그 역사와 특성에 있어서 서로 구분된다.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 관계의 긴밀성 때문에 실제로는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며 쌍방의 특징이 연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기술 정보의 전체가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과학이 기술에서 도출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 쪽의 끝에는 고에너지 물리학이나 분자생물학, 다른 쪽의 끝에는 기계공학이나 농업기술을 거론할 수 있는 양극적인 사례를 생각한다면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지식과 기술 사이에는 이질성을 바탕으로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호혜적 특성이 있음이 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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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게 되었다. 한쪽 끝과 다른 한쪽 끝을 이어주는 온갖 매개적 과정이 있으며,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응용학문이다. 응용학문이 그 양쪽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온갖 연구의 주제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방향이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임상의학은 실제적인 기술이었지만, 여기에서부터 건강과 질병에 관한 많은 원리들이 도출되었고, 이 과정에서 해부학 · 병리학이라는 기초과학이 발전하였다. 모든 기술은 어느 쪽이나 과학의 새로운 분야로 발전하려고 한다.
과학과 기술 간의 제휴가 가져오는 또 하나의 필연적인 장점은 서로가 다른 것의 생존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공생이라는 것이 하나의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요즘의 연구는 라베츠(1973)의 지적대로 점차 대규모화되고 있다.
연구 자체는 이제 자본의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의미 있는 한 편의 작업도 개인으로서의 과학자가 그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쓸 수 있는 경비를 훨씬 초과하는 비용을 요구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의 일 년분 수입보다 더 많은 경비를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문제를 자유롭게 탐구하는 하나의 독립된 주체가 아니다. 또한 그가 그의 모든 필요에 부응하는 것을 마련해 주는 사적인 후원자와의 개인적인 접촉을 갖는 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연구라는 것을 하기로 작정했으면, 그는 그 목적을 위해서 자금을 대줄 기관이나 대행사에 우선 응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그 프로젝트에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만이 그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p.44).
아카데미즘을 신봉하는 순수과학자는 이전처럼 필요한 장치를 개인의 재산이나 소속기관의 예산을 통해서 구입하는 정도로는 연구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첨단의 연구를 수행하는 데에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연구비가 투자되어야 할 만큼 연구 자체가 대규모화되어 가고 있다. 소립자의 가속기 · 연구용 원자로 · 우주탐사선 · 전파망원경 · 대양탐사선 등 과학의 거대한 장치는 그것들을 구입하고 유지하는 데 엄청난 경비가 든다. 여기에는 많은 기술직이 필요하며, 한번에 수많은 과학자가 그것을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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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질자원이 충분하지 않으면 연구의 활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과학자는 컴퓨터를 비롯한 많은 장치가 들어차 있는 작업장이나 도서실 또는 비서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에서 생활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자본의 투자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 현실을 타개하는 방식은 바로 그러한 여건을 조성해 줄 지원기관을 구하는 것이다. 그 영역은 물론 과학 외적인 세계에 있다. 그들은 과학적인 지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응용력을 원한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예비적 후원자에게 자신의 연구가 지니고 있을 응용력의 가능성을 시위하거나 혹은 구체적인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조건을 얻게 된다.
4.2.2. 자연과학의 응응영역으로서의 공학
과학은 기술을 매개로 사회와 결합하고 일상생활에 흘러들어 온다. 산업혁명을 거친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자연과학과 기술 간의 상호작용과 상승작용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Manson, 1962; 석동호, 1984). 산업혁명의 시기에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인적인 교류가 특히 영국에서 과학 공동체를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로써 이전까지의 장인과 과학자라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는 점차 해소되었다. 기술자들은 순수한 과학적 발견이나 추상적인 이론을 기술에 직접 적용하기보다는 과학에서 이룩한 합리적이고 실험적인 정리 · 분석 연구의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학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공학’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이 과학에 대해 이론적으로 연구할 대상을 제공하였고, 전기 및 화학 분야 등 특정한 분야에서는 직접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응용과학이라는 분야가 학문계에 새롭게 등장하였다.
응용과학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차이보다는 그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생활상의 편의와 이득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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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인류역사상 획기적인 기술의 성취를 이룬 분야가 인조광선이다. 그것은 긴 역사를 통해서 점차적인 개선의 과정을 거쳤다. 원시적인 불빛은 초 · 횃불 · 기름 램프에 의존하였다. 지난 세기의 후반에 파라핀 램프가 나왔을 때, 괴테는 그것을 “그 불빛이 눈부시다”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하루의 반을 어둠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석탄가스에 의한 불빛이 나왔다. 그리고 나서 에디슨(1847~1931)의 고안에 의해서 전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기는 사람에 의해 다루어질 수 있고 조명과 난방에 사용되며, 인간을 즐겁게 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양초보다도 훨씬 환한 불빛을 아주 값싸게 우리생활에 제공하였다. 그것은 낮과 밤의 차이를 해소해 주었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기술과 응용과학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응용학문의 학자와 기술자도 구분되어야 한다. 전구를 발명한 사람은 전기의 이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해명한 학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모르는 기술자에 의해서 가능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패러데이(1791~1867)는 기술자들이 전등을 발명하기 이전에 이미 전자유도현상을 발견했지만, 그 자신은 전등을 발명할 수 없었다. 이에 비해 에디슨은 전기의 원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백열전구를 발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드디어 응용과학이 한 몫을 하게 된다. 응용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발명가 에디슨과 업턴(Upton) 간의 일화로 설명될 수 있다(Agassi, 1985). 에디슨은 전등을 발명하고 길거리의 가스등을 전기등으로 바꿀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전기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동료인 업턴에게 그것을 경제적으로 가능하게 할 기술적인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종용한다. 업턴은 이를 옴의 법칙을 이용하여 해결해 준다. 용도가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등의 기술적 발명과는 무관하게 발전되었던 전기에 관한 이론이 업턴과 같은 매개적인 인물에 의해서 인조광선의 개발로 이어져 일상생활의 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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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예에서 패러데이, 업턴 그리고 에디슨 가운데 어떤 인물이 응용과학자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업턴이다. 패러데이와 에디슨은 응용과학자라기보다는 각각 순수과학자와 기술자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응용과학은 이처럼 서로 그 형태와 목적이 다른 기초과학과 기술 사이에서 기초과학을 기술화하고 기술에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연구는 직접 기술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대체로 그 사이에 “연구와 개발(Research & Development)”의 단계가 끼어든다. 즉, 기초연구의 결과를 우선 참고하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시험하며, 그 가운데서 가장 효율적인 것을 선택하는 절차가 사용된다. 흔히 R & D라 불리는 연구와 개발의 모형은 기초연구→응용연구→원형의 개발→원형의 대량생산→그것들의 보급이라는 일직선적인 과정을 가정하는 것으로서, 그 방면의 연구는 특히 산업계와 군수기관 등에서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연구와 개발의 성과가 산업체에 이익을 가져다주고, 다시 산업체의 자금이 연구에 투입됨으로써 양자 간에는 서로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산후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기술이 과학으로 접근하는 경로가 먼저 이루어졌다. 기술자들은 과학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종국적으로는 그것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기술이 과학의 발전을 촉진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기술은 새로운 사실을 검증하는 실험적 수단이 되었다. 기술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가능성을 높이는 데도 공헌하였다. 예컨대, 새로운 물리학은 고온 · 고진공 · 고전압 등의 특수한 자연조건을 인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급속하게 발달했던 전기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19세기 말에 현미경이 제작될 수 없었다면, 세포내의 원형질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지체되었을 것이다. 원심분리기와 전자현미경 등 발달된 물리적 · 화학적 기기를 사용하는 연구에 의해서 세포내부의 구조에 대한 인식이 급속하게 심화되었다. 오늘날 거대가속기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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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자물리학은 실험적으로 검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기술의 진전은 기초학문이 그 자체로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할 만한 새로운 사실을 계속 드러내는 역할도 아울러 하고 있다.
기술이 과학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다른 하나의 공헌은 기술발전으로 얻어진 세속적 이득이 순수연구를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연구는 그 규모가 커져서 막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요구하기 때문에 학문은 그 자체로서 자립을 하기에 벅찬 형편에 있다. 20세기 중반부터는 관찰과 실험방법이 정교화되었고 고가의 측정장치가 없이는 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기초학문도 사회의 지원이 없이는 수행될 수 없을 만큼 대규모화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응용학문을 통해서 기술의 혁신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트임으로써 기술의 혁신에 매력을 느낀 대중과 세속계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초연구를 위한 지원세력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비단 과학을 진흥하려는 정치적인 결단과 더불어 막대한 연구비 제공이 포함된다.
그 반대급부로서 기초학문이 기술의 발전에 공헌하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생래적인 인식이나 상식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는 실재를 투시할 수 있는 기초학문의 능력이다. 학문적인 사실 혹은 대상은 일상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발견된다. 학자들은 진리라는 기준에 의해서 그들 나름의 학문적인 체험을 구축하고 개선해 나가는 가운데 새로운 인식의 대상과 만나며, 그것이 무수한 기술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 계기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순수학자들이 발견한 물질적인 대상의 소재와 행동의 원리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상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좋은 예는 물리학에서 발전된 원자력 기술이다. 원자의 융합과 분열은 상식이나 생래적인 눈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것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학문계에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물리학에서 물질구조가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20세기에는 전자가 발견되었으며, 이것이 음전하를 가진 원자구성의 입자임이 드러났다. 그 후 우라늄 원소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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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방출한다는 사실과 중성자가 있다는 사실이 이울러 발견되고, 중성자를 여러 원소에 쏘아 많은 인공 방사성원소를 얻게 된다. 드디어 물리학자들은 우라늄을 중성자에 접촉시켰을 때, 원자핵과 연속으로 핵분열을 일으켜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분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기술적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단지 과학적인 지식만이 아니다. 지식은 그 총체적인 조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 조건을 추가시키는 것이 응용학문의 몫이다. 여기에는 핵에 대한 지식 이외에도 허다한 변인들이 포함되며, 그것을 종합하여 특수한 고안물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원자력 기술이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원자탄이라고 하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무기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공학적인 기술이 처음부터 군사목적에 쓰일 수 있게 된 것은 후에 우리가 검토할 악용과 선용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기술의 혁신을 이룩할 수도 있고, 또 기술의 진전이 간접적으로 과학의 지원세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밀접한 관계는 각자의 특성을 살릴 때 증대되며, 한 쪽이 다른 편의 수단으로 종속될 때 그 관계는 유지되기 어려워진다. 순수과학은 세속적인 요구에 단기적으로 적응하는 길보다는 다른 경로에 의해서 추진되어야 할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긴 안목으로 볼 때, 응용학문은 순수학문의 건전한 발전이라는 토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응용연구는 순수연구의 희생하에서 이루어지기보다 서로의 긴밀한 유대라는 전제 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과학정책의 중요한 고려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순수연구와 응용연구 그리고 기술 간에 성립되는 상보적인 관계는 거의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연구는 그러한 것들이 원활히 협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연구의 주체로서는 대학 · 정부 · 출연연구소 · 국공립연구소 및 기업연구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대학은 상대적으로 교육을 통한 학문의 전승이라는 전통 때문에 주로 기초연구를 하고, 여타의 연구소는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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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연구를 수행한다는 분업이 이루어져 왔는데, 그 구분은 오늘날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대학에서의 연구는 점차 응용연구의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대학 역시 사회나 국가의 지원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용연구가 더욱 중시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대학 밖의 연구주체 예컨대, 기업연구소에서도 응용을 위한 기초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따라서 종전처럼 그것을 대학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술혁신에 필수적인 기초연구를 모색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그리고 특정한 기술이 가져다주는 매력에는 약간의 불균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에디슨은 자신의 무수한 발명품과 특허의 결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과를 전기를 연구한 학자들은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만약 세속적인 성공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업턴은 에디슨을 선망하게 될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오늘날 순수학문보다는 응용학문에 매력을 느끼고 있고, 많은 능력있는 학도가 그 분야를 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쪽을 선망하는 이유는 진정 옳은 것인가? 만약 어떤 과학도가 응용학문을 선망하지 않고 순수학문을 택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보상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새롭게 검토해야 할 시점에 서 있고, 이에 대한 해답은 이 저서의 곳곳에 암시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풍조와 과정에서 학문계에 이전에 없었던 다양한 응용학문의 영역이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공학만을 주로 다루어 왔다. 공학은 기본적으로 연구대상에서 자연과학과는 본질상 구분된다. 자연과학의 대상이 자연 그 자체인 데 반해서 공학은 인위적인 자연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소광희 외, 1994, pp.255-288). 여기서 인위적이라는 말은 문화라는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물에 속한다. 공학은 자연법칙을 탐구하면서도 동시에 생산적인 실천의 규칙을 추구한다. 이로써 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되어 갔다. 동력 · 전기 · 교통 · 통신 · 인쇄사진 · 화공 · 재료 · 원자력 · 전자 계산기 · 자동차 기술 분야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제반 공학은 결국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킴으로써 과학과 기술을 계획적으로 결합시킨다면,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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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요즘에는 여기에 더하여 이른바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이라는 영역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등장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생물의 행동과 발달을 규정하는 변인은 대체로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대별되며 전자는 유전, 후자는 환경에 해당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요즘에는 생물학자와 유전학자들이 DNA와 RNA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하여 유전의 구조와 정보를 과학자들이 읽을 수 있게 됨에 따라서 그러한 구분이 모호하게 되었다. 분자생물학, 특히 유전자 연구의 발달과 함께 유전공학이라는 분야가 등장하여 생물의 유전구조를 변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유전정보의 새로운 배합을 기술공학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인간이 새로운 생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이전에 있어 왔던 품종개량이 과학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 자체도 포함된다(Lederberg, 1973). 이것이 더 발전하면 우리는 조만간에 우리 자신을 주문에 의해서 조립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어디까지 진전될지는 지금으로서 예측하기 어렵다. 예컨대,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같은 미래학자는 <미래의 충격(1971)>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0년 후, 즉 21세기가 되면 수백만의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평민들은 미래와 갑작스럽게 충돌하는 사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나라에서 사는 서민들은 우리들의 시대를 특징짓는 변화에 대한 끝없는 요구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 점증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너무도 조급하게 찾아올 것이다(p.9).
4.2.3. 사회과학의 응용사례
과학기술의 발전은 주로 자연과학분야에서 혁혁한 공훈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응용학문이 오로지 이공계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지적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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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그 응용의 분야를 여기서 모두 포괄적으로 소개할 지면은 없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하나를 지적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현대 자본주의는 ‘경영학’이라는 특수한 응용분야를 탄생시켰다. 자본재 생산에서는 이윤획득과 자본의 축적이 생산의 동기이다. 따라서 보다 높은 이윤의 획득을 위해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이 추구된다. 그러나 자본이 증대하고 생산규모가 커지면서 주먹구구식으로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처리해 나가는 재래식의 경영으로는 더 이상 적응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제 원자재 · 생산수단 · 노동 등 생산요소의 상호관계를 적절히 유지하는 경영정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미국에서 경영학이 출범하였다. 경영이라는 것이 결국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효과적인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때, 그 운영에 필요한 지식이 요구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경영학은 19세기 말엽 테일러(F. W. Taylor: 1856~1915)가 과학적 관리법을 제창함으로써 발전했다. 그는 작업능률과 방법을 향상시켜 생산성 증강을 목표로 공장을 관리하는 이론과 방법을 찾았다. 체계적인 방식에 의한 작업활동의 설계 · 작업량의 할당 · 차별적인 성과급제도 등이 제안되었다. 이는 제 1차 세계대전중 생산증대의 요청에 따라 활용되었으며, 1920년대의 경영 전반에 이용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역사상 일찍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과학자 · 기술자 그리고 과학기술이 대규모로 전쟁목적에 동원되었다. 각종의 획기적인 병기가 개발된 것은 물론이고, 전쟁에서의 병기사용 · 유효한 수송수단의 편성 · 군사작전 등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 산업기관에서도 활용되고 있는 ‘작전연구(Operations Research)’이다. 이러한 취지와 제반 연구의 기법을 토대로 오늘날 경영학이 발전하였고, 그 응용적 위치는 이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 경영학은 인간행위에 관한 정교한 지식체계를 얻기 위해서 심리학과 행동과학의 도움을 받게 된다. 행동과학은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취지에서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에 속하는 심리학 · 사회학 · 인류학 등 여러 학문을 통합하려는 취지를 가진 학문영역이다. 조직은 복잡한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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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의 인간행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취지의 행동과학이 적절하게 응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중에 군대에서 발전된 작전연구가 戰後 기업에 도입됨으로써 관리과학이 성립되어 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경영학은 한 차원 높은 분야로 발전하였다. 경영학은 심리학이나 행동과학과 같은 기초학문으로 환원되기보다는 그 토대 위에서 생산관리 · 마케팅 관리 · 재무관리 · 인사관리 등 경영에 필요한 그들 나름의 하위연구영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과학과 기술의 관계를 마무리함에 있어서 지적되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의존이다. 오늘날의 생활이 과학기술의 지원이 없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매사를 과학과 기술에 의존하려는 현대인의 심리는 경계되어야 한다. 그것은 일면적인 생각이고 과학의 허울을 쓴 비과학적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과학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과학의 도움을 받아 과학화된 기술들(예컨대, 야금술)이 있고, 과학의 직접적인 산물로서 출현하게 된 기술들(예컨대 반도체기술 · 원자력기술)도 있지만 아직 과학화되지 않은 기술들(예컨대, 동양의술)이 있다. 우리는 자연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다주는 고안품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은 과학과 기술이 미칠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그러한 자연스러운 삶이 오히려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삶보다 더욱 안전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있어야만 우리의 생활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하기 위하여 언어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트겐슈타인(/1951)이 말했듯이, “인간은 각 단어가 어떻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의미가 표현될 수 있는 언어를 구성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pp.61-63).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루어진 진화의 산물로 인간이 획득하거나 자연스럽게 학습한 동작은 의도적인 지식이나 기술의 수준을 훨씬 능가한다. 식물에 대한 화학적 지식이나 생물학적인 지식이 없이도 식사를 할 수 있고, 해부학이나 생리학에 대한 연구가 없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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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과학기술화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술과 관련하여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을 위한 기술”의 영역이다. 우리는 특정한 기술을 그것이 가져다주는 성과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주기 때문에 연마하는 경우가 있다. 자동차가 없어서 마라톤 경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헬리콥터가 없어서 등산술을 익히는 것도 아니다. 마땅한 무기가 없어서 평생 동안 검도를 연마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앞(1.2.2.)에서 살펴본 수도계라는 영역에서 연마하는 ‘品位’는 다분히 비기능적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부면을 동일한 결과나 성과를 가져다준다는 이유 때문에 공학으로 대체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