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5장 학문의 방법론
5.6.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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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변증법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변증법은 고대 희랍의 철학사상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참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앞서 우리가 검토한 다른 어떠한 방법보다 가장 경력이 오래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 길수록 그 의미는 다원화되기 마련이다. 그 동안에 변증법은 긴 역사를 거치면서 의미와 내용 면에서 자기 발전과 변형을 거듭해 왔다. 말하자면 변증법은 하나의 변증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념의 변증법이 있는 것이다. 다양한 변증법은 그들 나름의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일의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이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다만 철학사의 책에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다양성 가운데 주된 것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특징을 알아보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변증법은 진리탐구의 방법으로서 한 편에서는 경멸의 대상이자 다른 편에서는 기대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이다.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명 궤변술로서 진리와 무관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익에 맞추어 자기 편에 유리한 주장을 증명하려는 하나의 실용적인 기술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소크라테스에게 참다운 지식을 확립하려는 방법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플라톤의 단계에 와서는 이것은 이데아라는 존재와 인식의 근원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실재에 이르는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바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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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와 일체화된다. 이러한 상반된 변증법의 면모는 그 후에도 철학사에서 반복된다.
변증법을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긍정적으로 활용한 근래의 학자는 헤겔이다. 헤겔의 체계는 관념론이며, 그 방법은 변증법이다. 이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을 관념변증법이라고 한다. 그의 변증법은 칸트에서 시작된 독일 관념론이 피히테와 셸링을 거쳐 전개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강대석, 1988). 피히테 · 셸링 · 헤겔은 항상 칸트로 돌아가 칸트의 명제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더 완전하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칸트는 아직 기계론적인 자연과학 이외의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있어서 변증법은 다만 인식의 한계를 확정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선험적 변증론에서 형이상학에 증명과 부정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을 인정하고 인식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변증론은 바로 이러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수락해야만 하는 “가상의 논리학”에 불과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변증론적인 방법이 유일하게 참된 방법임을 가르친다. 헤겔의 사상체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방법론이 인식되는 대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헤겔의 변증법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변증법은 대상과 독립해서 존립하는 순수한 방법은 아니고, 철학체계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철학 자체와 일체화되고 있다(Taylor, 1975). 그의 철학은 만유를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실재인 정신의 발전으로 보며 이 실재의 발전과정이 곧 변증법이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체계는 실재(정신)와 방법(변증법) 그리고 체계(학문)의 삼위일체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만물을 정신 또는 이성이라는 궁극적인 실재의 변증법적인 발전으로 파악해서 서술하는 것이 학문이며, 이 학문은 그 자체가 이성의 소산이며 변증법적인 구조와 전개과정을 지닌 체계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헤겔의 철학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헤겔체계는 전시대의 산물이다. 헤겔이 도달한 방대한 철학의 체계에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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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체계를 구상하고 건설하기 위해서 그가 도입한 인식의 변증법은 아직도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앞서 검토한 제반 방법론은 거의가 모두 헤겔 이후에 나타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인식의 체계적인 변화에 관계하는 부면에서는 그들은 항상 헤겔의 변증법을 알게 모르게 그 준거점으로 삼고 있다. 많은 방법론자들에게는 헤겔은 반박당해야 마땅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어떠한 점에서 대화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위대한 적대자의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 헤겔의 변화와 진보의 논리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그의 사후에도 꾸준하게 등장한다. 본 저서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그의 변증법은 학문계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 아직도 그 어느 방법론보다도 풍부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특히, 이 논리는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는 형식논리학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방법론의 역사를 거슬러서 변증법을 우리가 마지막 단계에서 검토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우리는 여기서 방대한 헤겔의 전체 철학체계를 검토할 여유가 없다. 헤겔의 체계는 방대하고 모호하며, 많은 경우 거의 오해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가 불필요한 혼동과 신비주의적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면, 앞서의 방법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식론적 특징을 그의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헤겔 자신도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1908)>의 서설에서 말했듯이 학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달해야 할 목적이나 도달된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도정이다. 이러한 입장은 본 저서가 취해 온 것과 같은 것이다. 학문의 결과를 단순히 제시하는 것은 아직 그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 인식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길을 보여주지 못한다. 대신 이 인식방식들의 생성이 실제적인 발생으로, 즉 이미 겪은 혹은 겪을 수 있는 경험의 역사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을 생략하고 학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이해 자체가 의심스럽게 된다. 헤겔 변증법의 탁월한 점은 우리가 발전을 지향할 때 거쳐야 하는 역동적인 과정과 그 문제상황을 어느 방법론보다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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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점이다.
변증법적인 운동은 “그렇게만 될 뿐 다르게는 수행될 수 없는”, 그러한 ‘필연적인’ 규정과정이다. 헤겔은 그러한 운동에 나타나는 제반 문제점과 그 해결과정을 서술해야만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스스로의 부정을 통해서 발전하는 나선형의 운동을 계속한다. 스스로를 부정함이 없이 역사를 체험할 수 없다. 또한 체험함이 없이 역사를 내적으로 정당화할 길도 없다. 이처럼 도야와 체험에 근거한 내적 정당화라는 헤겔 변증법의 특징은 우리가 접해 온 결과에 집착하는 경직된 인식론을 해독하려고 할 때, 한번쯤 치유과정으로 거쳐야 할 참신한 처방을 제공한다. 우리는 제한된 지면에서나마 헤겔의 변증법 가운데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요령껏 이해하고, 그것이 어떠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5.6.1. 제반 특징
1. 존재의 논리
우선 헤겔의 변증법은 형식논리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은 사고의 일반적인 형식을 중시함에 비해서 헤겔의 변증법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변증법은 사고와 존재, 좁게 말하면 인식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칸트(1781)는 형식논리학이 단지 형식에 그치는 결함을 지적하고 그것을 그 나름의 인식론에 의해서 극복하려고 하였지만, 역시 결정적인 점에서 자신의 극복노력이 지니는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인식에 있어서 객관적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존재의 본질로서의 물자체와 그 현상을 분리시키고 인식을 오직 현상에 제한하였다. 그는 감성적 직관에 주어지는 현상의 잡다한 내용이 순수 오성형식, 즉 범주에 의하여 종합 · 통일된다고 보면서도 그 사용을 현상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 자체에 적용한다면,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대립하는 명제가 각각 성립해야 하는 이율배반을 피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결국, 칸트는 형식논리학의 모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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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모순을 내포하는 변증법은 “진리의 논리”가 될 수 없고 “가상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칸트에 의하면 배척된 이러한 모순이 피히테와 셸링을 거치면서 발전한 독일 관념론에 의하면, 도리어 인식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헤겔은 칸트가 말하는 오성적 인식에서 출발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보다 고차적인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이성의 부정적 그리고 긍정적인 단계를 인정하는 변증법이야말로 “진리의 논리”라고 주장하였다. 이 세상에는 불변적인 본체가 없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역사의 모든 단계는 질적으로 상이하며, 이러한 상이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헤겔은 철학적 체계에 따라 논리학 · 자연철학 · 정신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 세 부분이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에 따라 변하는 것을 단계에 따라 서술하였다. 이처럼 헤겔의 변증법은 다만 사고의 논리만이 아니라, 자연이나 정신을 포괄하는 존재의 논리라는 점을 우리는 항상 유념해 두어야 한다.
2. 존재의 모순적 구조의 용인
형식논리학이 우리의 사고에서 모순을 배제하는 무모순의 논리라면, 변증법의 논리학은 모순을 용인하는 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를 위시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모순은 진리를 발견해 나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헤겔은 모순이 있는 곳에는 진리가 없다는 식의 형식논리학의 도식을 무너뜨린다. 바로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에 이르는 ‘모순’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형식논리학의 ‘모순율’에 의하면 “A는 B인 동시에 ~B이다”라는 말은 용인되지 않는다.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두 명제가 있다면, 둘 가운데 하나는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순적인 것의 동시적인 주장을 오류의 징표가 아닌 진리의 징표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명제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유’가 ‘무’로 전화하고, 다시 ‘무’가 ‘유’로 전화하는 사물과 사고의 운동과정을 중시한 헤겔은 형식논리학적인 동일률과 모순율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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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하고 효과 없는 동어반복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그는 그러한 모순율을 한편으로 긍정하면서도 최소한 존재의 변화나 발전에 있어서 모순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미묘한 해결점을 찾는다.
변증법은 형식논리의 ‘모순율’을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큰 오해이다. 변증법에서는 “A가 ~A가 된다”라고 말하지 “A가 ~A이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A가 A이지 않다면 ~A도 존재할 수 없으며, 더구나 어떠한 존재의 모순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A가 ~A로 전화됨에 따라 생겨나는 대립은 전통적인 형식논리학에서 말하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헤겔의 변증법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속에 위치한다. 다만 변증법은 그 전화에 따르는 ‘모순’이 현실의 측면임을 직시하고, 형식논리학이 그 점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변증법은 A가 필연적으로 ~A로 전화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바로 거기에 만물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이고 유동적인 사고방식은 영원한 존재의 실재를 믿고, 이러한 실재만이 학문과 지식의 목표라고 요지부동 주장하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극히 불안정하고 애매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재의 진실을 달리 보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불안정한 것은 사실일지는 모르나 결코 애매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철학사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존재’만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보다는 “만물은 유전한다”라고 주장하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가 보다 더 전리에 가깝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이 세계는 영원한 생명 유전의 과정이며, 만물의 생성과 변화는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변증법적인 운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헤겔 역시 모든 사물은 그 자체에 있어서 모순된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모순이 나타나는 곳에는 더 이상 진리에의 길은 없다고 보는 형식논리학은 헤겔에 있어서는 이미 타당한 것이 못 된다.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제외하고는 영속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모순이 실재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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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는 배리로 여겨지는 모순의 현존 그 자체가 사물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동일성은 모순에 비하여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지만 죽은 존재의 결정이다. “A는 A일 뿐 ~A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고정시키려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대립과 구별 속에서만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실의 참된 실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모순은 모든 운동, 모든 생적인 표현의 뿌리이다. 한 사물이 운동하고, 활동하는 어떠한 경향과 충동을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모순의 정도에 따른다. 즉, 모순은 실재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모든 사물의 현실 속에 살아 있다. 그는 세계 자체가 대립물의 투쟁, 즉 모순에 의해서 운동하면서 끊임없는 생성과정을 밟는 것으로 본다. 헤겔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자연계와 정신계의 어디에도 모순이 포함되어 있고 그 모순이 사물의 진상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사고하든지 변증법은 우리의 사고가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각주 34: Hartmann(1883/1981)은 Hegel이 택한 새로운 모순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흔히 알려져 있는 저 모순율은 모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따지고 보면, Hegel의 명제는 모순의 부정에 대한 부정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Hegel의 명제는 곧 세계 내적인 모순의 회복이라고 해야 하며, 이것이 다름 아닌 모순의 실재성이다”(p.188). 이 간결한 말의 뜻은 이하의 논의에서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3. 부정
헤겔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무엇(자기)”은 “다른 것(타자)”이 되지만, 그 다른 것도 역시 그 무엇이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이 된다. 이러한 식으로 모든 것이 한없이 변할 때, ‘타자’는 ‘자기’의 부정이 된다. 고대의 희랍철학에서는 타자는 자기동일성을 나타내는 일자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헤겔은 이러한 개념을 부활시켜 타자를 일체의 있는 것 또는 특정한 존재 속에 내포되어 있는 ‘非有’로 해석하여, 그 유한성과 변화하려는 경향을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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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따지고 보면 타자는 결국 자체의 비본재인 셈이다. 어떠한 것은 언제나 타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 속에 항상 한계를 갖는다. 이 때문에 무엇이건 간에 그 속에는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모두 자기 내부에 자기모순을 가져서 그 모순의 전개가 자체의 부정성을 촉구하고, 자기가 아닌 대립하는 타자의 부정매개를 통하여 보다 구체적인 자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사실을 명제에 적용해 보기로 하자. 형식논리학에서는 어떠한 명제 p의 부정(또는 반정립) ~p라 함은, p가 참이면 ~p는 거짓, p가 위이면 ~p가 참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판단의 부정이라고 할 때, 그것은 판단의 오류라거나 혹은 배제라는 소극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하나의 명제가 진리나 허위의 어느 하나에 속할 수 없다. 헤겔에 의하면, 어떠한 명제이건 간에 그것은 다소나마 그 내부에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부정은 형식논리학의 부정과는 달리 실재적인 것이며 발전을 위한 매개로서 해석된다. 변증법은 그러한 모순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증법적 방법의 첫 단계일 뿐이다. 다음의 단계는 그것의 극복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변증법은 모순율을 거부하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모순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에게서도 오류의 징표이다. 모순은 절대화될 수 없고 모든 구체적인 모순은 조만간에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부정에 따른 모순은 그것을 해소하는 방향의 운동을 추진하는 힘이 된다. 이 부정이 지닌 위력은 사상의 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듭거듭 줄기차게 자신을 뛰어넘어 뻗어나가는 원리의 역할을 담당한다.
헤겔에 의하면, 경험은 이러한 변증법적인 운동에 속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험은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헤겔이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도 이와 똑같은 뜻을 갖는다. 경험은 먼저 부정적 요소, 즉 아직 가정하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한 경험이다. 헤겔에 의하면, 경험은 항상 ‘반전(reversal)’의 구조 혹은 의식의 재구성의 구조를 갖는다. 그는 그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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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상학(1808)>에서 정신이 이러한 부정을 동반하는 경험을 단서로 하여 절대정신에 이르는 도정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 타자의 부정을 통하여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앎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는 이와 같은 과정의 경험적 반복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변증법적이라고 말한다. 한 단계의 경험이 달성되면, 그것을 수단으로 다른 단계의 목표가 설정된다. 이처럼 미완성된 상태가 긍정과 부정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역사적으로 하나의 필연적인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이 곧 헤겔이 말하는 발전이다.
4. 지양의 개념
변증법적 논리에서는 하나의 긍정이 있다가 다음에 부정이 따르며, 그것이 다시 부정된다. 형식논리를 따르면, 긍정은 부정의 부정과 같은 것으로 된다. 형식논리에서 부정의 부정은 문자 그대로 이전의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순의 종합은 형식논리의 형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변증법적인 논리는 형식적 논리의 맥락을 떠나서 이제 새롭게 재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변증법의 맥락에서는 최초의 긍정과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얻은 긍정은 결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지적했듯이 거기에는 항상 경험의 매개과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긍정은 보다 발전된 것으로 변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가들에게 있어서 이처럼 모순의 원리는 항상 생산적인 것이다.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이 다른 것에 의해서 부정될 때, 그 무엇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보존된다. 이러한 미묘한 점을 헤겔은 ‘aufheben(止揚)’이라고 칭한다. 흥미롭게도 작동적 범주로서 이 독일어의 단어는 세 가지 의미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상호 연관관계를 갖고 서로의 의미를 규정한다. 첫 번째 요소는 본래적인 부정으로 폐기 혹은 극복이다.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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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형식논리학의 오성적인 부정과 유사하지만,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부정은 다음에 소개할 다른 두 요소로부터 고립될 경우에만 無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과의 통일 속에서 부정은 변증법적 부정의 한 중요한 측면이 된다. 지양의 두 번째 요소는 보존이다. 그것은 부정 속에 남아 있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보존은 부정된 것이 지양의 결과로서 타자의 존재로 넘어가게 한다. 지양의 세 번째 요소는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 즉 고양이다. 이전의 단계보다 더 낮은 단계로 변화하거나 똑같은 수준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지양이 아니다. 그래서 헤겔에 있어서 지양한다는 것은 이처럼 ‘부정한다’는 의미와 ‘보존한다’는 의미, 즉 ‘폐지한다’, ‘지속한다’, ‘고양한다’는 의미가 동시에 상관적으로 복합되어 있다.
부정의 부정, 즉 종합은 정신 속에 사유의 정지, 또는 사물 속에 운동의 정지를 표시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의 정지에 불과하다. 종합은 차례로 새로운 종합이 극복해야 할 그 자신의 부정을 야기하고, 그러한 부정의 야기는 끊임없이 전개된다. 변증법적인 운동에서 언제나 후속하는 부분은 선행하는 부분을 지양하고, 그 다음 그 자체가 다시 후속 부분에 의해 지양된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부정의 부정에 의하여 그것이 가졌던 과거의 계기들을 보존하면서 보다 더 고차적이고 내용이 풍부한 “구체적인 전체” [각주 35: 이 개념은 모든 규정된 유한한 존재에 대하여 전체라는 이념의 우위성을 전제하며, 모든 개별적인 판단들에 대하여 전체적인 진리를 가진 체계의 우위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 의미는 이하의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에까지 발전한다. 그러니까 변증법적인 발전은 직선적인 진행이 아니라,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오는 나선형적 원환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견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온 듯한 느낌을 주지만, 항상 이전의 원환과 이후의 원환은 한 단계의 수준의 차이를 보인다.
5. 변증법적인 3단계
헤겔이 사용한 넓은 의미에서의 변증법은 “정신이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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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은 절대로 같은 것에서 같은 것으로 진행되지 않고, 같은 것에서 다른 것으로 진행된다. 정신은 분열과 종합에 의해서 스스로 발전한다. 정신은 1) 자기 자신이 타자가 되고, 2)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3)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 자극제로서 위에서 말한 모순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자체의 운동방식은 이렇다. 어떠한 것이나 자기 자신 속에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부정성에 의해서 자기는 타자가 된다. 그런데 자기는 역시 타자가 아니고 여전히 자기이므로 이 타자성을 부정하는 것(부정의 부정)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회복하게 된다.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자기 1”은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가 되는데, 이 타자가 또 다시 부정이 되어서 “자기 2”로 되돌아온다. 이 때 최초의 부정과 “부정의 부정”은 타자성을 지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1”과 “자기 2”는 같지 않다. 한마디로 그것은 이질성을 내부에서 극복한 발전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학문의 발전이라는 사실에 대입해 보자. 모든 학문은 경이에서 태어난다. 정신은 새로운 대상을 확인하고 그것을 이미 알려진 틀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 새로움이 인식을 부정하는 계기를 만든다. 사유가 발견한 것의 논리적인 극한점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그리고 최초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관점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그 대상은 다른 양태로 인식된다. 이 때 그 대상들은 같은 것들이면서 다른 것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의 것과 모순되는 명제를 세우기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 오류에 빠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 모순을 단지 용인하는 것만으로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순 자체가 환영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에게도 거슬리는 것이며 그것이 극복되었을 때만 우리는 정신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애쓰는 정신이야말로 바로 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단계적인 전개는 결코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은 3단계적인 발전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면서 마침내 진실한 전체자, 즉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정신 안에서, 그리고 사물들 안에서 일어나는 모순들의 화해가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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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하는 변증법을 구성한다. 피히테의 변증법에서 이미 나타났다가 헤겔에 의해서 완성된 변증법은 대개 3요소 혹은 3단계를 구분한다. 변증법적 과정을 구성하는 세 단계를 지금은 통상 ‘正(Thesis)’ · ‘反(Antithesis)’ · ‘合(Synthesis)’으로 부른다. [각주 36: 이 용어는 Fichte가 <모든 지식의 기초(1794)>에서 자아의 활동을 3단계로 구분하면서 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Hegel의 변증법적 단계와 다르다. Fichte의 ‘종합’에서는 앞서 살핀 Hegel的 의미의 ‘지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 자신은 습관적으로 긍정 · 부정 · 부정의 부정으로 불렀다. 혹은 ‘卽自(an sich)’ · ‘對自(fur sich)’ · ‘卽自對自(an und fur sich)’라고도 부른다. 헤겔의 철학적 체계 자체가 그러한 3단계의 설계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의 체계 속에서 그러한 계기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발견된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과정은 이처럼 정신의 자기 내면화의 진행이며, 자각의 심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변증법적인 발전의 전체로 보면, 그것은 시원으로 되돌아오는 원환운동인 것이다.
6. 양의 질로의 변화
헤겔의 <논리학(1812)>에서는 모든 구체적인 것은 양과 질의 통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변화는 이 ‘질’과 ‘양’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질’은 사물의 불변적인 요소이고, ‘양’은 가변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양이 변화하여도 질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변증법에서는 양의 계속적인 변화가 어느 한도에 도달하면, 그 연속성이 중단되고 비약적인 질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질의 범주에서 나타나는 양적 특성의 증가과정이 양의 범주에서 나타나는 질적 특성의 증가과정으로 용해된다.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자극하고, 질적 변화는 반대로 양적 변화를 자극한다. 그래서 질은 양으로 그리고 양은 질로 변하는 변증법적인 법칙이 나타난다. 눈에 띄지 않게 착실히 진행하는 양적인 변화야말로 질적인 변화를 준비하며, 또 그러한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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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헤겔은 이 사실을 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물의 온도가 증가하여 점차 100℃에 도달하면, 물의 질이 액체에서 기체로 변화한다. 또 열이 감소하여 0℃에 달하면, 물의 질이 액체에서 고체로 변화한다. 이것은 일정한 양의 증가가 이루어지다가 그 최고점에서 질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사례이다. 화학도 역시 우리에게 질적 변화를 유발하는 양적 변화를 보여준다. 물체의 성질과 그 특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비율에 의존한다. 이와 같은 질과 양의 관계에서 헤겔은 두 요소를 동등하게 파악하기도 하고, 질을 존재의 직접적인 규정성으로 파악하여 양에 대한 우위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어떠한 면에서는 질이 양에 의해서 지양되고, 어떠한 면에서는 질이 양의 범주가 발생하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헤겔은 또한 질적인 변화로 나아가지 않는 양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음도 아울러 인정했다.
7. 형식과 내용의 통일
헤겔의 논리학에는 ‘형식(Form)’이라는 범주가 대단히 중요하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에서는 ‘형식’은 ‘형상(eidos)’으로서 ‘질료’라는 범주와 상반되어 있다. 헤겔은 고대 희랍의 물질관을 계승하여, 형식과 질료를 물질에 있어서 가장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구별임과 동시에 서로 대립하는 두 측면으로 간주한다. 칸트의 인식론에서도 ‘형식’과 ‘내용’이 상반성을 이룬다. 그러나 헤겔은 이들과는 달리 본질이 형식의 요소가 된다고 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의 내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형식은 질료를 규정하고 또한 그것을 통일하는 한편, 거꾸로 질료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어서 질료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내용은 형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자체 속에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형식은 내용에 대해서 외형적인 내용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 책은 내용이 없어”라고 할 경우, 물론 이 말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묶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표지가 가죽으로 되어 있다거나 혹은 사용된 종이가 어떠한 종류라거나 하는 외적인 형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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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로 하고라도 책의 내용은 올바른 형식과 일정한 관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의 경우를 본다면, 좋은 작품은 올바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헤겔은 예술가에 대해서 그의 작품이 내용은 좋은데 올바른 형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주장한다. 올바른 형식은 바로 그 내용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겔은 변증법의 개념 속에 우리가 앞(5.5.)에서 소개한 오늘날의 ‘구조’와 유사한 범주를 이미 도입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적인 이념은 내용에 대한 무한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 무한한 형식 속에는 구조와 체계의 요소뿐만 아니라, 전체라는 요소도 포함된다. 헤겔은 ‘전체’가 체계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부분과 전체적인 발전의 연관성이라는 의미의 구조개념을 통하여 하나의 형식이 다른 형식으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형식과 내용이 서로 전화하는 것을 지적하고, 이 전화를 극히 중요한 법칙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물을 평면적으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보는 안목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위의 예를 다시 들어보면, 어떠한 책 한 권의 내용은 그 지은이의 저작 전체라는 내용에서 보면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은 고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서 서로 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인 통일은 상호조건성을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상호 간의 투쟁을 전제로 한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모순적인 투쟁을 통하여 비로소 양자 간의 변증법적인 통일이 이루어진다.
8. 전체와 부분 간의 상관
전체와 부분 간의 상관은 우선 직접적인 상관으로서 특징지워진다. 각각은 다른 것을 요구한다. 즉, 하나의 전체는 부분들과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전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부분들은 하나의 전체와의 관계에서만 부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집과 그 기둥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있다. 기둥이 집의 부분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다른 것들, 곧 창문이나 온돌이나 지붕 따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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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서 전체로서의 집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기둥이 그것만으로 문제시될 때에는 단순한 목재 기둥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둥이 단지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 기둥도 하나의 전체로서 그것 나름의 부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의 부분과 전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부분들을 세밀하게 탐구해야 한다. 여기서 필수적인 것은 그 부분을 부분이게 하는 전체에 대한 통찰이다. 이것을 빠뜨리면 부분에 대한 개념의 의미가 상실된다.
전체와 부분의 상관은 위의 경우처럼 상식적인 안목에서도 비교적 알기 쉬워서 그 한계를 망각하고 아무데나 적용하려 드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상황에 따라서 그 관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육체와 그 팔다리나 기관과의 관계를 이 범주로 파악하려고 할 경우 확실히 그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파악은 육체가 죽어 있는 경우와 살아 있는 경우에 따라 상이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죽은 경우에 부분과 부분 간의 상호작용은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경우에 그들의 관계는 유기체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육체의 경우에 이 유기적인 관계는 물리적인 범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좀더 고차원적인 범주에 의해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9. 내부와 외부 간의 상관성
이것은 내적인 필연성과 그것의 표현 간의 이중성 사이에 있는 관계이다. 우리는 흔히 내부와 외부를 순수한 것 혹은 절대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외부란 바로 내부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어서 그들을 따로 따로 떼어놓는 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이들을 서로 연관짓는 것이 서로의 의미를 보충한다. 가령, 한편으로 실재가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내부적인 상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실재가 어떠한 필연성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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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그것 자체에 외부적이라는 의미에서 순수하게 외부적인 상태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그 한편만을 들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들 간의 매개성이 무시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떠한 사람이 “나 자신은 마음속의 의도로는 도덕적이었지만 겉으로의 행동으로까지 옮기지는 못했다”라고 말하는 경우, 어느 누구도 그를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겉으로 보아 똑같이 병든 아버지를 죽인 경우가 있다고 했을 때, 유산을 노린 살인과 불치의 병마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차마 볼 수 없어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 그 내적인 동기를 무시하고 결국 마찬가지 행위라고 치부해 버리면 이 또한 우스운 일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는 항상 동일성의 연관이 있다. 그 본질이 감추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그 실재는 더욱 순수하게 외부적으로 관계된다. 이것을 헤겔은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헤겔은 “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또한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또한 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그 본질적 실재가 표현된다는 점에서 더욱 외면화된다면, 그 실재의 관계성은 더욱 증진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욱 더 내면화된다. 이것을 헤겔은 “매개된 통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음의 예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린이도 이성적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경우는 내적으로만 이성적인 것의 싹을 가지고 있을 뿐, 아직 충분히 발달된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다. 결국 이성적인 것은 부모의 의지나 선생님의 지식이라는 형태로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외적인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어린이는 교육을 통해서 내적인 것을 외화하고, 외적인 것을 내화함으로써 매개된 통일성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10. 절대자와 유한자
헤겔의 변증법은 그의 절대자에 관한 매우 특이하고 독자적인 관념을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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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정신이다. 그 절대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 역사는 절대자가 그 속에서 자기의 본질을 점차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섭리이며,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 절대정신과 역사 속에 있는 개인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절대자는 자기의 본질을 역사 속에서 실현해 나간다. 그러나 무한자로서의 그 절대자는 역사 속에 있는 구체적인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 자기동일성을 보유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전개해 나간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그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그 자신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바의 정신을 실재하는 정신과 구별한다. 환언하면, 자신들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바의 사람들을 실재하는 사람들과 구별한다.
위에서 우리는 정신의 자기 내면화와 관련하여 ‘즉자’와 ‘대자’ 간의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한 논리에 의해서 헤겔은 대자적인 정신을 즉자적인 정신과 구별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대자적인 것이 즉자적인 것과 일치하는 조건을 향해 각 단계를 지나 운동하는 것으로서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절대자는 어떻게 인식되는가? 여기서 헤겔 나름의 교묘한 해결방식이 제시된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유한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자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한자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유한자의 전체 속에 나타나는 절대자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의 각 단계는 그것이 아무리 저차원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된다. 헤겔은 각각의 개별인은 인류 역사상 정신이 발전하면서 거쳐간 단계들을 교육적으로 반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각 단계의 개인은 그의 단계에서 더 “높은 수준”을 추구함에 있어서 모순과 갈등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절대자와 유한자의 관계와 관련하여 헤겔은 ‘악무한(die Schlechte Unendlichkeit)’과 ‘진무한(die Wahrhafte Unendlichkeit)’을 구분한다. 악무한은 유한자와 대립된 의미에서 무한자를 말하며, 진무한은 유한자를 가지 속에 내포한 무한자를 의미한다. 헤겔에 의하면, 절대자를 악무한으로 파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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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절대자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무엇을 규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한계를 짓는 것을 의미하며, 무엇을 한계짓는다는 것은 그것을 유한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수긍한다면, 절대자에 대하여 어떠한 규정을 내린다는 것은, 즉 그것을 유한자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것인데 악무한으로서의 절대자는 곧 유한자와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 규정 자체가 공허하게 된다. 악무한은 유한에서 유한으로 끝없이 반복된다. 이에 비하여, 만일 절대자를 진무한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유한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무한자이므로 무규정적인 공허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왜냐하면 유한자는 절대자로 향하는 도중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유한자의 연속된 계열이 절대자가 자기 자신을 구현하는 과정이라는 파악이 가능해진다.
절대자의 섭리는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정해져 있다. 인간은 이에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절대자라고 할지라도 역사 속에서 개인의 활동이 없이는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동향을 개개인의 활동에 맡길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에서 이른바 “이성의 奸智(List der Vernunft)”라는 개념을 크게 부각시킨다(Wilkins, 1974). 그것은 절대자가 개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위하도록 하여 역사의 진로에 부합하는 자는 성공하게 하고, 반대로 그 진로에 어긋나는 자는 실패하게 하도록 조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역사상의 위인들은 세계정신의 일정한 단계를 대표하지만 그 발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이 세계의 과정은 결국 이성이 교활하게도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온갖 정열을 써서 절대자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활동하도록 농락함으로써 발전한다는 것이다.
11. 보편과 특수의 종합
절대자는 일체의 특수를 자기 속에 포괄한 보편이며, 또한 그것은 악무한에서처럼 추상적인 보편이 아니고 특수를 포괄한 보편이다. 이러한 헤겔의 사고체계에서 절대자에 대한 제 2의 규정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구체적 보편자(konkrete Allgemeinheit)”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이라는 말은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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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라틴어의 ‘Concrescer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공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여러 가지의 것이 서로 연결되어 생성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보는 것은 모두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것과 결부되어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며,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상호매개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보는 방식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사고이다. 구체적인 보편으로서 절대자는 보편이라는 것이 특수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속에서 특수를 활동시킴으로써 자기를 살리고, 거꾸로 특수 속에서 보편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환언하면, 보편과 특수는 서로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밀접한 매개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눈앞에 지금 여기에 있는 개별자를 구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그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그것들만이 보여진 것이며, 다른 것과의 관련하에서 고려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통상 ‘구체적’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추상적’인 것이다. 헤겔은 이와 관련하여 경험론과 오성적인 사고를 동시에 비판한다. 우리들에게 지각되는 것은 언제나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경험론은 이 요소들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분해한다. 그리고 그 분해는 합일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을 끄집어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주관적 작용 이외에는 아무 것도 덧붙여지지 않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지만 지각이 파악한 구체적인 것은 여기서는 단순한 여러 요소들로서 다른 것에도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있다.
진정한 인식은 지각된 낱낱의 것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것을 분석해냄으로써 가능하다. 이 점을 경험론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헤겔 이전의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성이 감각적 직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오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파악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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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그것은 이러한 규정이 어떠한 내용을 갖고 있는가를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대립하는 규정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진리이고 다른 쪽은 오류라고 매도해 버리는 일면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헤겔은 이러한 일면적인 오성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현실세계는 상호 대립하는 여러 규정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전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보편과 특수의 모든 경우에 사물의 구체적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12. 인식의 발전
헤겔에 있어서 절대자는 유한자의 변화를 통하여 자기 동일성을 보유하면서 점차 자기를 실현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절대자는 어떻게 우리에게 인식되는가? 헤겔에 의하면, 절대자는 유한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절대자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의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유한자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우리는 유한자 전체 속에 나타나는 절대자를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절대자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절대자가 발현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의 오류와 결함의 통과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유한자가 가진 저차원의 인식이 절대자의 인식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저차원의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보다 고차원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면서 절대자의 인식에 접근해 간다. 이것이 학문이 자신을 내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현실에 관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사유의 역사적인 운동과 논리적으로 결합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연역적인 형식논리로서는 기술될 수 없고, 정신 자신이 경험과 도야의 발생적 과정을 거쳐 나가는 변증법적인 논리로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는 위에서의 절대자관에 의거하여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의 의식이 우리의 감각적 확신이라는 가장 저차원적인 인식의 단계에서 지각 · 오성 · 자기의식 · 이성 · 정신으로 점차 보다 높은 의식의 형태로 나아가고, 마지막으로 의식과 대상이 완전히 일치하는 단계, 즉 대상에 대한 의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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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과의 일치라는 절대지에 도달할 때까지의 인식의 전개를 의식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각주 37: Hegel의 <정신현상학>은 그의 전체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따라서 이것을 읽기 전에 간단한 소개서를 읽어두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필자는 마땅한 참고서로서 Werner Marx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984)을 추천한다.] 이러한 식으로 현존재 속에서 자신을 도야시켜 온 정신의 왕국은 연속적인 계열을 이루는데, 이 계열에서 각 정신은 다른 정신으로 대치되고 자신에 선행했던 정신들로부터 세계의 왕국을 물려받는다.
여기에서도 그 후반부에서 변증법의 논리에 따라 역시 인식의 3단계가 적용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헤겔 이전의 인식론이 헤겔의 인식론까지 발전하는 경로와 동일한 면을 보여준다. 그의 관심은 칸트의 오성이 당면하는 모순을 초월하는 이성의 양태를 보여주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칸트에 의해서 대표되는 학문 일반의 입장에서 보면, 모순은 허위의 지표가 된다. 그래서 오성을 인식의 주체로 보는 칸트의 입장에서는 이율배반은 모순율을 위배하기 때문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서 모순이 없다면 진리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모순율에 의거하는 칸트의 “오성의 철학”을 자신의 “이성의 철학”보다 한 단계 낮은 차원의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그 단계는 인류의 사유발전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사유의 발전에서도 작용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방법의 첫 번째 요소는 추상적 혹은 오성적 단계이다. 우리는 유한적인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의 입장에 선다. 오성은 대상을 고립시켜 개별적으로 고찰하다. 이처럼 구체적인 보편성을 무시하고 단지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계는 유한적 사물에 대하여 타당한 어떠한 규정을 절대적인 것으로서 고정시킨다. 오성적인 태도는 구체적인 현실의 서로 연관되어 있는 복잡한 관계를 무시하고,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일면적인 규정을 고집하며, 다른 쪽은 오류라고 판정하는 일면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한적인 사물은 변화하기 때문에 처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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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이 고정시킨 규정은 그 절대성을 상실하게 되어, 우리의 인식은 모순과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곧 그에 대한 규정과는 모순된 새로운 규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둘째의 변증법적 이성 혹은 부정적 이성의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제 1단계에서 생각했던 규정이 그 반대의 규정에로 옮겨간다. 그 모순된 두 규정을 오성적인 입장에서 대하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회의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처음의 규정과 다음의 규정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오성적인 입장에서 유한적인 사물을 참다운 실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을 고집하는 한, 거기에서 볼 수 있는 모순적인 규정은 어디까지나 모순이며 지양될 수 없다.
그러나 오성이 취하는 추상적 개념의 비진리성을 깨닫고 우리가 생각을 바꾸어 유한적 사물이 그 속에서 변화하여 가는 전체를 볼 수 있게 된다면, 이 두 가지 규정은 실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전체 속의 계기로서 인정된다. [각주 38: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Hegel의 변증법이 Aristoteles가 말하는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Hegel의 변증법이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Hegel이 말하는 오성적 사유의 입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Hegel은 그런 사람들이 단지 사고의 어떤 단계에서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인식하는 착각을 문제시한다.] 모순에 봉착할 때 우리의 사유는 이 모순을 견딜 수 없다. 모순을 어떻게든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모색하는 해결은 모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순은 해결되고 지양되어야만 한다. 헤겔이 말하는 모순이란 거기 머무를 때에만 모순이며, 계속 앞으로 전진할 때는 모순이 아니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사변적 이성 혹은 긍정적 이성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그 모순적인 규정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고, 종합 · 통일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인식은 처음의 오성적 단계보다 더욱 고차적인 단계로 지양된다. 이성은 이제 오성이 사물을 뿔뿔이 구분하고 분해하여 포착한 것을 통일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살아 있는 전체를 분명하게 밝혀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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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리의 과도성
헤겔의 변증법은 인식을 어떠한 종착점도 없는 끊임없는 운동으로 파악한다. 적어도 절대자가 아닌 유한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하다. 고정되고 항존적인 것은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침몰한다. 변증법적인 이념에 따르면 모든 것이 지속적인 과도상태에 있다. 여기에는 진리도 포함된다. 헤겔은 그의 변증법의 논리에 일관되게 진리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진리의 이념은 사라져 버렸다고 본다. 변증법은 유한자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의 실현을 부정한다. 사유의 모순 자체가 그것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정신은 긍정→부정→긍정과 부정의 종합으로 진행해 나간다. 그것은 전체에서 다른 전체에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종합은 언제나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긍정은 그것에 모순되는 부정을 야기하고, 그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조차도 끊임없이 지치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신은 이러한 3단계적 발전을 되풀이하면서 마침내 진실한 절대자, 즉 절대자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과학적 · 철학적 이론은 따라서 세계를 설명하는 작업에 있어서 사유의 역사 가운데 있는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학문계는 그때그때의 의식형태를 규정하는 계기, 즉 진리의 형식에 비추어 지식을 평가한다. 그러나 이론은 결코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해낼 수는 없다. 역사상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오류로 판명되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진리의 탈한계적인 운동에 있어서 오늘의 진리는 내일의 오류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진리를 인식하는 자는 낡은 진리를 버려야 한다. 오류의 근원이 발견되는 과정을 통해서 더 심오한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오류도 진리의 한 단계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오류로 밝혀지기 이전에는 그것도 진리로 간주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류와 진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류는 진리는 아니지만 언제나 진리에의 입구가 된다. 이러한 사태를 우리는 변증법적이라고 한다. 한 단계의 진리는 다음 단계에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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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되지 않을 수 없다. 당대에는 그 당대의 것이 진리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후대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오류임을 알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이러한 과정의 이면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변화의 이행상태만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존재를 확인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의 불완전한 단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상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할 사항은 그 진리의 발견에는 항상 다소의 정의적인 요소가 개입된다는 사실이다. 헤겔은 이성과 열정을 이원적으로 구분한 근대 철학에 도전한다.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적이다. 헤겔은 이 점에서 이분법을 지양하고 인간생활의 합리적인 측면과 정의적인 측면의 궁극적인 유기적 합일과 조화를 중시하는 희랍적 견해에 내재된 진리관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유한자로서의 우리는 각 발전단계의 도중에서 상대적인 진리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열정이 없이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이 거의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 이러한 측면에 주목한 헤겔은 <정신현상학(/1988)>의 서설에서 이를 “박커스 祝祭에서의 도취경(bacchantische Taumel)”이라고 비유하였다(p.106).
인식으로서의 진리는 하나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발전된 진리로 나아가는 방식 혹은 형식이 결국 진리의 내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는 자기 확정의 과정이다. 이로써 헤겔은 진리라는 관념 자체의 발전을 암시한다. 헤겔은 진리라는 관념의 역사적인 발전을 변증법적인 3요소에 부합하여 소개한 바 있다. 진리에 대한 첫 번째 관념은 우리가 가진 개념이 인식대상에 일치하는 데 있다. 이것은 진리의 가장 낮고 미성숙한 오성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의 보다 발전된 진리의 관념은 반대로 대상이 개념에 일치될 때 참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진리개념은 과도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진리가 아니라 단순히 무모순 혹은 ‘정합성(Richtigkeit)’으로 나아가는 오성적인 개념들이다. 그가 말하는 세 번째의 가장 발전되고 높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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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관념은 정신적인 내용이 스스로의 것에 일치하는 데 있다. 헤겔에 있어서 참된 의미에서의 진리는 대상이 스스로의 개념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헤겔의 관념론적인 철학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결국 스스로를 반영하는 정신의 무한성은 스스로를 확정하며 모든 인식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14. 절대적 관념론 [각주 39: Hegel이 구체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을 물질에 대립하는 ‘관념론’의 부류에 넣는 것이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Bernstein(1971)은 Hegel이 Descartes에 의해서 전통적으로 분리된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지양하고 있다고 본다(pp.29-34).]
변증법은 세계의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사고의 존재방식 자체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의 도구가 아니라 동시에 하나의 세계관인 것이다. 칸트에서 시작하여 피히테와 셸링을 관통하는 독일의 관념론을 더욱 철저하게 규명하여 나가는 가운데 헤겔은 모든 세계를 절대정신의 변증법적인 자기전개로서 파악하였다. 헤겔은 존재의 본질을 사유로 보고 세계 및 인식의 발전법칙인 변증법을 관념론적인 입장에서 관념적인 것의 자기운동과 자기발전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법칙으로서의 변증법을 신의 이념,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의 하나님의 설계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신은 자연을 창조한 다음에 인간, 즉 정신을 창조하는데, 그것은 정신이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이념이 자기 자신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을 헤겔은 정신이 자기 안으로 귀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전에도 철학 내부에는 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 하여 그 속에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汎神論的인 입장이 있었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는 절대자를 한갓 무차별적인 동일자로 파악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현실의 차별상으로 분열시키고 발전시키는 자기활동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물은 모두 그 내부에 자기모순을 갖는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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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정신의 내부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타자의 존재는 무엇인가? 여기서 정신이라는 주체의 타자로서 자연이 상정된다. 헤겔에 있어서 이념이 일단 자기를 부정하고 밖으로 나아간 것이 ‘자연’이며, 자연에서 다시 자기로 돌아온 것이 ‘정신’이다.
변증법은 주체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타자성을 통합하여 주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전략이다. 이와 관련된 개념이 이른바 ‘자기소외(Entfremdung seiner selbst)’이다. 이것은 어떠한 존재가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본질적인 것을 바깥으로 끌어내서 외화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타자로 삼아 자기와 대립하는 남처럼 서먹서먹하게 대하며, 자기와 거리가 멀고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이념이 정신에까지 발전하기 위한 한 계단이며 결국 이념의 ‘자기소외’에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실재로서의 정신이나 이념은 내부모순의 발현에 의하여 그와는 정반대의 자연으로 되어 본래의 자기를 잃고 자연의 내부에 모습을 달리하면서 헤매게 된다.
그러나 정신은 점차 그의 소외된 형태로서의 타자인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밟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정신의 운동 혹은 정신의 자기전개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정신의 생명력은 타자인 자연 속에 있는 자기를 인정하고, 그 소외된 자신을 자신의 세계의 것이 될 수 있도록 경험의 폭을 넓혀 나간다. 그 최후의 단계에 이르면 정신과 자연은 일치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자연에 대한 사고와 그 사고의 대상인 자연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주로 다룬 것이 헤겔의 자연철학이다. 다시금 이 절대자가 자신을 자연으로 외화하고, 그 타자에서 자기로 돌아오는 존재양식을 다룬 것이 그의 정신철학이다. 절대정신의 관점(헤겔에 의하면 그것은 예술 · 종교 · 학문이 된다)에서는 정신이 단지 주관정신으로만 파악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객관정신으로만 파악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 · 객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논리 · 자연 · 정신에 그의 변증법의 구조가 적용된 것이 바로 헤겔 철학체계의 방대한 내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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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 비판적 전개
1. 인식대상과 사유의 혼동
헤겔의 방법론은 그 전체의 체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 앞에서 지적되었다. 그만큼 그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 역시 그 전체체계에 대한 비판을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다는 점이 우선 인정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 전체체계에 관한 거창한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방법으로서의 변증법의 특수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순서를 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비판은 위에서 변증법의 특징으로 제시한 것들을 소급해 나가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위에서 결론삼아 지적했듯이 헤겔 철학의 본질을 극히 간단하게 특징짓는다면, 만물을 정신의 발전으로 보고 일원적으로 해석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모든 실재가 사유의 질서 속에 있다고 본다. 관념론은 물질을 거부하고 정신만을 받아들인다. 헤겔은 사물 자체는 사유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가 흔히 객관이라고 부르는 실재도 관념이 외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관념이라고 보았던 사유의 과정이 그것의 외적 현상에 해당되는 실재의 창조자인 것이다. 헤겔의 체계에서 발전의 최후의 단계에서는 지식과 대상사유와 존재가 떨어질 수 없이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헤겔체계에서 자연은 절대정신이 외적인 형태로 자기를 외화한 것으로서 정신으로 높여져야 할 필연성을 갖는다. 그 과정은 개념의 3단계에 대응하여 역학 · 물리학 · 유기체의 차례로 높여지면서 발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변증법적인 대상이 정신뿐만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사물 속에서도 진행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헤겔에 의하면 유기적 생명이나 무기적 물질, 역사나 사회, 관념이나 정신 등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와 같은 점이 헤겔의 변증법을 난해한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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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사카 마코토(소판진)는 그의 <헤겔의 논리학 입문(/1983)>이라는 저서에서 시종 이 점을 문제시한다.
헤겔에 있어서의 이처럼 사고의 진행은 곧 현실의 진행이고, 현실의 진행은 곧 사고의 진행이다. 마치 돛을 접으면 뱃머리가 되고, 뱃머리를 접으면 돛이 되는 종이배처럼 이 점이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원인이다. 무릇 현실과 그것을 파악하는 사고(인식), 이 두 가지의 각 진행은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나, 그것들을 동일시한 헤겔은 때로는 앞의 것을 뒤의 것으로 바꿔치고 때로는 뒤의 것을 앞의 것으로 바꾸어놓아 그의 변증법을 엄청나게 불합리한 신비주의의 에테르로 적셔버린 것이다. … 헤겔의 근본적인 결함은 현실의 진행을 사고의 진행과 동일시한 점에 있는데, 오히려 바로 거기에서 헤겔 변증법의 핵심을 찾는 엉뚱한 바보들이 아직도 적잖이 있다고 한다(pp.152-153).
사물과 그것에 대한 사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고의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과정을 반영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고의 과정이 현실의 과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 사유의 진행과 현실의 진행은 독자적인 것으로서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될 대상이다. 사유의 발전이 없이도 현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변전한다. 이 점을 인정하고 우리는 그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길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를 논박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물변증법의 입장까지 여기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질과 정신 가운데 어떠한 것이 다른 것의 주인이라는 말은 우리의 논의의 초점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그들 간의 결정적인 관계나 상호작용을 논하기에 앞서 그들이 별개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현상과 그것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자연은 주어진 것이고 자연과학은 그것에 대한 관념을 구성해 나가는 실천의 한 양상이다. 자연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생성된다. 또한 자연과학도 변한다. 이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단지 변할 뿐, 발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연에 대해서 모순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여름이 겨울의 반대라거나 병아리가 달걀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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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은 말의 오용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게 그것이 오류니 혹은 진리니 하는 평가를 할 수 없다. 오류인 자연이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오류가 그것에 대한 사유에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또한 자연에 대한 개념에서 우리는 겨울이 여름의 반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자연과학은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의 원리에 따라 이전의 지식체계가 새로운 지식체계로 지양되며 발전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문, 그 중에서 자연과학이 급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증거를 입증하는 많은 이론들을 예시하였다. 그러나 자연이 그처럼 단기간에 급속도로 변했다는 단서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도 헤겔의 반대편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학문활동에 의해서 우리의 인식내용으로 편입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역사이며, 자연사는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일원성보다는 다원성을 믿는다. 자연계 · 세속계 · 수도계 등이 있고, 그들 내부에도 하위의 자율적인 세계가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인과적 관계의 궁극성에 비추어 그들 간의 종속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이질적인 세계를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선 인정하는 것이다. 제반 세계의 현실적인 운동법칙과 그것에 대한 인식의 운동법칙 모두가 변증법의 원리를 따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이나 모든 세계가 변증법적으로 운동한다는 말을 보류한다. 우리는 변증법이 적용되는 영역을 수도계에 한정한다. 우리는 수도계의 경우 반드시 발전되어야만 그 동일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로 보며, 학문은 그 수도계의 하나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세계에 대한 인식의 발달을 목표로 하는 학문계는 역사적으로 꾸준하게 발전해 왔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그리고 이 경우 헤겔의 변증법이 다른 방법과 더불어 그럴 듯한 설명방식의 하나임을 인정한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학문적 사유의 운동일 수는 있으나, 반드시 그 사유대상의 운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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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도계의 종류와 수준의 혼동
헤겔은 그의 변증법을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예증하면서 역사를 해석하고 설명하며 이해한다. 헤겔은 세계를 하나의 것으로 총체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가능한 한, 다양한 현상을 하나의 것으로 환원시키는 단순화의 과정을 선호했다. 정신은 오직 하나의 줄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신은 오직 하나의 사다리를 통하는 길을 걷기 때문에 헤겔에 있어서는 항상 정→반→합의 일련성이 있을 뿐이다. “진리는 전체이다”라는 표어하에 모든 것을 종국적으로는 하나의 관념으로 일원화시키는 헤겔에서는 그것들이 주종의 위계관계로 인식된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결국 변증법의 3단계의 형식을 적합하지 않은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헤겔의 이론체계에서 예술과 종교와 철학은 절대정신의 자기표현의 형식이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러서 표현양식의 적절성에 있어서 서로 위계가 있는 세 가지 형식을 갖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예술 · 종교 · 철학은 모두 절대자를 그 내용으로 삼는데 이것들 역시 변증법의 3단계에 대응하여 발전한다. 우선 예술은 절대자를 감성적 직관의 형태로 나타내고, 이것이 종교에 있어서는 다시 내면화되어 표상으로서 의식이 되고, 철학은 이것을 다시 그의 본래의 요소인 개념의 형태에서 인식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일원적인 발전에서 결국 철학이 최고도의 완전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확실히 제멋대로라는 인상을 준다. 일찍이 신헤겔주의를 표방했던 크로체(B. Croce)도 헤겔이 이 관계를 상호 독립적인 상이한 정신적 형식들의 연관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정 · 반 · 합의 관계로 규정하는 것이 큰 오류임을 지적하였다(Rod, /1985, pp.100-101).
크로체의 비판은 우리의 관점에서도 옳다. 우리는 수도계 내에서도 서로 환원되어서는 안 될 이종의 하위세계가 있음을 가정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 · 종교 · 철학의 영역은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수도계로서 서로 모순됨이 없이 공존할 수 있다. 그들 간의 변증법적인 모순은 있을 수 없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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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 학문과 예술은 모두 수도계에 속하지만 서로 그 우위를 따질 수 없는 독자적인 구조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추구하는 목표나 그것을 체험하는 우리 자신의 구조면에서 서로 다른 수도계에 속한다. 그들 각각은 그들 나름의 변증법을 따라서 발전해 왔다. 이처럼 서로 횡적으로 분리되어야 할 영역이나 세계가 헤겔의 논의에서는 마치 종적인 상대성을 가진 것으로 제멋대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각주 40: 최근에 <헤겔미학(/1996)>을 번역하면서 두행숙이 시도한 다음과 같은 Hegel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의 비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헤겔의 미학사상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헤겔은 절대정신의 영역을 예술 · 종교 · 철학의 세 단계로 나누고 거기에서 예술을 최하위의 단계로 놓으면서 ― 적어도 현대에 와서 ― 예술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또한 예술형식과 장르들을 역사적인 발전이라는 도식 속에서 너무도 의도적으로 구분하면서 그들 사이에도 우열을 가리고 있다. 이것은 예술을 철학이나 종교와 똑같이 독자적으로 무한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로 규명하는 데 과연 충분할까?”(pp.ⅹⅲ-ⅹⅳ)]
헤겔은 거의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의 단일한 총체성을 가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택해 온 다원적 세계관과 충돌한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절대지라는 최종적인 일점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가깝다. 그러한 거대한 규모의 전체성은 현실적으로 상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어떠한 규모로든 여럿으로 분화와 독립의 경과를 거치며, 또 그러한 다양성을 중심으로 서로 상관관계를 맺는다. 최근에 알튀세르(Althusser & Balibar, 1968)는 마르크스가 헤겔과는 달리 다원적인 전체성을 인정한 것으로 보고, 그 가운데 경제 · 정치 ·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론적 실천의 전체성을 인정한 것은 변증법의 진일보한 면모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들 각각의 심급의 실천영역에서는 서로 다른 변증법이 작용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리듬과 템포를 가지며, 그들 내부의 모순은 역사적으로 다른 시점에서 활성화된다. 우리는 서로 독립된 세계구분에 동의하면서 그 복수성을 하위의 다른 세부적인 세계까지 확장시켜 왔다. 세계는 크게 보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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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만 작게 보면 여럿일 수 있으며, 우리는 그 후자의 수준에서부터 시작하는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해 온 것이다.
일원론적 전체주의가 오늘날에까지 통용될 수 있는 어수룩한 공간은 없어 보인다. 이 점에서 최근에 비판적 합리주의의 입장을 택하고 있는 포퍼에게 헤겔이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다. 포퍼(K. R. Popper, 1957)는 헤겔이 말하는 ‘전체’라는 말의 모호성과 그것에 토대를 둔 사회적 정책이 갖는 독소를 경계한다. 헤겔은 세계사를 조직화된 구조로 보고, 역사의 과정에 포함된 모든 것의 총체를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필연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로서 포퍼는 그러한 가설 자체가 하나의 검증될 수 없는 형이상학이라 본다. 포퍼는 우리가 세계의 전부분 혹은 자연의 전부분을 관찰하거나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헤겔과 같은 예언은 충분한 경험적인 증거도 없이 미래를 예견하는 하나의 환상이나 미신에 불과한 역사주의자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역사는 우리의 창의성과 함수관계에 있기 때문에 항상 개방되어 있다. 이 점을 들어 포퍼(1966)는 헤겔식의 역사에 대한 예언을 “열린 사회의 적”으로 지목한다. 우리는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장래의 어떠한 것을 예측할 수 있지만, 역사의 종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한 유의 예언에 토대를 둔 유토피아는 실패할 공산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포퍼는 우리가 항상 현실을 중심으로 제한된 예측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당면하는 문제들의 부분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전체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 사회공학보다 유리한 전략이라 본다.
한편, 인식론의 입장에서 포퍼(1963)는 우선 헤겔의 변증법이 이론의 발전과 그 이론에 토대를 둔 사회적인 운동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pp.312-3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헤겔의 변증법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포퍼는 인식의 발전이 헤겔의 주장대로 정→반→합과 같은 일련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고 본다. 대신 그는 “시행착오의 방법(the method of trial and error)”이 역사적으로 지식의 발달을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포퍼는 역사의 한 단계에서 서로 경합하는 이론은 하나 이상의 다양한 선택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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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러 가지의 이론이 서로 독립해서 동시에 시험대 위에 오르고 그 가운데 오류가 있는 것들이 제거되는 방식으로 진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3. 무한정한 낙관주의
인간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형성해 왔다. 헤겔은 인류진보의 거대한 법칙을 알려고 하였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성에 의한 진보에 큰 신뢰를 보였던 그가 처한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당시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시대사조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보다 고차적인 자유를 향한 점진적인 도정으로 보게 되었다. 헤겔은 우리의 사유가 본질적으로 자신의 지양을 노리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유가 ‘진리’를 구하려고 하고 자신의 대상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정신은 스스로 발전한다. 그러한 설명은 모순의 계열화라고 하는 역사의 동태적 운동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사가 이러한 변증법적인 필연성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역사는 우리가 그것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 결정된다.
역사를 끊임없는 시련과 좌절의 연속을 통해서 어떠한 거대한 종합으로 나아가는 상승적 운동이라고 본 헤겔의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는 아도르노(T. W. Adorno)에 의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근대의 이성이 도구화됨으로써 결국 일차원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고 현대를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 충격의 여파는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Negative Dialectics(1966)>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헤겔식으로 절대정신이 스스로에 대한 완전한 자의식에 도달함으로써 역사의 과정이 궁극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본 것은 변증법에 대한 오독이라고 주장한다. 대신 그의 부정적 변증법은 종합에서 正과 反이 승화될 수 있는 여지를 영원히 거부하고, 끊임없는 反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부정적 사유의 자취가 그래도 잘 보존된 부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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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영역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자신의 부정적 변증법은 근대사회에 편재해 있는 일차원성을 잠시나마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최근의 ‘탈근대’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만약 역사가 주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발전한다면, 그 주체는 무엇이고, 그 실천은 어떠한 것인가? 헤겔의 변증법은 이 문제를 애매한 상태로 접어두고, 인식의 발전을 단지 사유가 가진 내재적 속성으로 보는 철학적 사변을 늘어놓는다. 이처럼 간단한 도식에 고정됨으로써 관념론적인 변증법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고 일종의 신비주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변화와 발전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변화가 발전의 양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발전하는 영역의 역사도 그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구체적인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피히테는 칸트가 인식주관에 부여한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서 “자아의 활동”을 상정했다. 유물변증법을 발전시킨 마르크스는 비록 현실의 경제 · 사회 · 정치적 상황을 분석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실천”을 강조했다. 그들은 단지 세계를 관망하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작업에 가담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성이 결여된 형태의 변증법은 일종의 사변적 구성에 머무를 것이다. 실존변증법을 주장한 키에르케고르의 눈에도 이러한 헤겔이 수수방관적 낙관론자로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는 큰 규모의 변화보다는 개인의 현존재의 상황에서 변증법을 다루면서 단독자의 무한의 정열, 주체적 활동과 행위, 내면의 노동 그리고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는 특히 실천적 활동과의 관련하에서만 그 발전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다. 수도계의 발전은 반드시 역사의 흐름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수도계의 하나인 학문의 경우도 결코 자연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유는 많은 경우에 자신이 도달한 상태를 최종적인 진리의 상태라고 착각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인지활동은 도중에서 중지되고 정체의 늪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인지의 중지나 퇴행과 인지의 계속적인 발전을 가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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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어떠한 경우에 인지는 모순에 봉착하는가? 여기에는 인식주체 혹은 자아의 보다 구체적인 활동이 요구된다. 즉, 인간이라는 주체의 실천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떠한 활동이 우리에게 요구되는가?
4. 역사적 주체의 모호성
인식론에서 헤겔이 이룩한 커다란 공적의 하나는 주체적인 자아가 변화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고 파악한 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단순한 생명체에서부터 우리 자신의 발전에 대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체계에 있는 주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당장 당혹감을 느낀다. 헤겔이 말하는 ‘주체(Subjekt)’는 인간적인 혹은 개별적인 인식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연의 여러 형태와 법칙 속에서 반영되는 질서이기도 하고 또 질서를 부여하는 인륜적 · 객관적 정신일 뿐만 아니라, 예술 · 종교 · 과학 등 질서 지워진 형성물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절대정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다. 하나의 주체가 매 단계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즉, 그는 “과정이 주체를 지니고 있는 한에서의 하나의 주체인 과정 그 차체”를 논하였다.
헤겔의 체계에서는 목적론적 인간주체가 삭제되고 목적론적 절대주체 혹은 궁극적인 주체가 등장한다. 세계를 인간의 활동이나 세계 자체로서가 아니라 이를 초월한 신으로부터 설명하려는 비합리적인 태도가 헤겔을 사로잡고 있다. 세계의 운동을 정신의 운동으로 대치하여 세계발전을 마치 신의 활동이기나 한 것처럼 그려내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변에 빠져 있다. 헤겔에 있어서 역사는 살아 있는 인간주체가 없는 소외의 과정이다. 그의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주체와 인간의 관계를 연결짓는 교묘한 수단으로 쓰인다. 인간의 실천과 노동활동을 단순히 절대자인 신이 자기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조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존재방식과 끊임없이 기존의 현실을 극복하여 변혁해 가는 인간의 창조적인 발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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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합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윌킨스(B. T. Wilkins)는 <헤겔의 역사철학(1974)>에서 헤겔체계에는 주체의 개념이 모호함을 지적한다. 그의 체계에는 절대정신과 그것의 간지에 의해서 농락당하는 개체가 있다. 세계사적인 위인들 혹은 영웅들은 세계정신의 일정한 단계를 대표하지만, 그들도 발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위인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행위는 사실에 있어서는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성의 간지에 의해서 농락당하고 있다. 그들이 이성의 보편적 관심을 발전시키려는 의지와 열정을 갖지만, 그들이 이성의 보편적 관심을 이해하는 정도에 대한 헤겔의 취급은 애매하다. 그는 위인들을 보다 고차의 보편적인 관심을 포착하고 이를 그들의 목적으로 삼는 선각자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그러한 이념을 의식하지 않은 실천적 · 정치적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헤겔 자신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그 역시 시대의 대변자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가 아는 역사 속에는 헤겔의 절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가 말하는 유한자에 속하는 것이다. 이 점은 이후의 변증론자들에게 기정의 사실로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특히 그 가운데서도 변증법을 실존적인 과제에 적용하려는 키에르케고르 · 하이데거 그리고 샤르트르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주체는 출생과 죽음이 있는, 그러나 일생 동안 다소간의 자유를 가진 개인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모순 대립하는 것이 종합으로 나아가는 것을 파악하는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성을 헤겔에서 배웠다(표재명, 1992). 그러나 그는 헤겔 철학에서 내세우는 체계적인 사고나 범논리적인 ‘순수사유’가 인간 실존의 현실을 추상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헤겔로 인해서 실존과 추상 사이에 있는 질적인 대립의 소실, 더 나아가 실존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양식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로부터 존재들의 변증법에 관한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존재를 절대자로 보지 않는다. 그가 문제시하는 존재는 무한한 자아를 실현시킬 책임이 주어진 실존적인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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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속에서 자신의 미래와 미래의 존재를 택한다. 우리 각자는 적게는 자신의 역사를, 크게는 인류의 역사를 창조하고 만드는 책임감 앞에 실존적으로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자아실현을 통해서 자기형성의 자유로운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러한 개인들이 어떻게 일생 동안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실존적인 체험과 결단을 수행해야만 하는지에 주목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 그리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도 모두 헤겔적 변증법이 전제되어 있지만, 그 주체는 모두 개인이 역사에 참여하는 실존적 존재로 나타난다.
5. 절대자의 상정
유한자는 절대자를 자신의 현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헤겔이 제안한 변증법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절대자를 상정하고 있는 헤겔은 유한자의 범주에서 예외로 인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유한자가 절대자를 기술하는 것이 오류라면, 그리고 헤겔 자신도 유한자임이 사실이라면, 그의 변증법 역시 오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입장에 있는 유한자로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절대자를 규정하기보다는 개방적이고 미지의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점에서 역사란 현실적인 우리에게 확정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그의 학적 체계를 구성함에 있어서 스스로 역사의 종착점을 미리 상정하고, 그 기지의 점에서부터 발생적 과정을 역으로 소급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우리는 구조주의를 논의하는 자리(5.3.)에서 절대적인 주체는 부인하되, 절대를 향해가는 상대적인 주체를 인정하고 그 자발성을 복 돋는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헤겔의 변증법은 진리가 경험의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점을 들어 헤겔적인 이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경험은 항상 부정성(negativity)을 포함한다. 숨겨져 있던 것이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진리로 향하는 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헤겔이 경험을 종결하고 완성하는 절대지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유한자로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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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한계를 벗어난 발언으로 보고 경계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가다머(1960)가 그의 해석학에서 헤겔과 일면으로 동조하면서도 그를 비판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가다머는 진리와 역사성을 강력하게 연결시키면서 해석과 이해들 간의 간극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한다는 면을 고려할 때 헤겔과의 밀접한 관계를 찾아내려는 면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전체로서 역사를 관류하는 절대적이며 이성적인 로고스라는 헤겔의 개념을 거부한다. 가다머는 인간경험의 유한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의 학문에 내포된 전지전능성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가 강조하는 이해와 해석의 무한성은 완결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관점에서는 ‘악무한’으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의 과정에서 가다머는 전지성의 위험한 종결보다는 차라리 악무한을 택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그는 경험의 변증법은 항상 새로운 것과의 관계를 포함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가다머(/1982)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경험의 변증법은 경험의 고유한 완성을 어떠한 폐쇄적이고 궁극적인 지에서 갖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위한 개방성 속에서 갖는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을 통해 경험은 그 자체가 자유롭게 놀이하는 것이다”(p.319).
역사에 참여하는 개별적인 주체의 역량을 다양하다. 위로는 비범한 천재에서 아래로는 평범한 개인들이 있다. 이 양자를 구분해 놓고 전자를 헤겔의 절대자라는 위치에 넣어 역사를 해석할 수는 없는가?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문화적 산물을 창조한 위대한 세계사적인 위인들은 보통 사람들의 경험영역을 훨씬 벗어난 높고 높은 경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수인 그들의 ‘간지’가 결국 역사를 대표할 수는 없는가? 혹은 보통 사람들은 헤겔의 유한자의 경우처럼 자기가 아닌 그 위대한 타인들의 소외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유추 속에서 흔히 가정하는 구조적 사실은 평범한 주체의 형성이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타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타자에의 종속, 즉 소외를 전제로 해서 성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은 ‘주체’라는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법 역시 헤겔이 범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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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를 상정하기보다는 언제나 그 과정의 한 단계에 처한 구체적인 주체로서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은 자기 나름으로 창의적인 주체로서 생활하고 있다. 그 창의력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사상이나 이론을 만든다는 엄청난 창의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창조성은 남이 이미 성취한 것을 재생하는 일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창조된 문화에 대한 개인의 진정한 이해는 그것을 재창조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우리의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저차원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바깥에 있는 세계를 기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산체계의 구체적인 활동의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독일 관념론의 시원인 칸트에서 시작하여 피아제를 거쳐 최근에는 구성주의 [각주 41: 최근에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이 사조는 하등동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자율적인 체계라는 전제하에 인식의 문제를 다룬다. 이에 대한 것은 Schmidt(1987)를 참조하시오.] 에 이르면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선각자와 보통 사람들의 제반 수준의 차이에 개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활동이나 정열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발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거의 누구나 자아실현을 위해서 그에 합당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달성하고자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그것은 많은 경우 단순히 강요나 외적인 보상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것을 헤겔의 논리 속에서 찾아볼 수는 없는가? 헤겔은 교묘하게 유한한 인간의 정열을 이용하는 범신론적인 이성의 간지를 상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세계정신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기만을 통해서 사물을 산출하고 인간의 정열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황당한 의미의 설명보다 더 현실적인 설명은 없는가?
결국 의식과 관련하여 타당성을 갖는 서로 다른 사유의 규정들이 그때그때의 ‘진리’로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저단계에 있는 사람과 고단계에 있는 사람 간의 열정 있는 교섭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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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아는 유한자로 규정하였다. 그러한 유한자적인 변증법은 지혜와 무지를 대결시키고, 거기에서 ‘진리’를 끌어내는 수법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논쟁은 마치 헤겔이 말한 “이성의 간지”를 연상시킨다. 그는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고, 약한 입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언제나 빈틈없이 교활한 수단으로 논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여기에는 설득을 위한 기본적인 의지가 있다. 이러한 방식은 헤겔과 같은 무한자 혹은 절대자를 상정함이 없이도 얼마든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폴라니(1958)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설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발전의 수준이 다른 구체적인 개인들 간에 개재하는 특이한 열정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유한한 상대적인 주체 사이에 서로 발견하고 설득시키려는 주체적인 열정이다. 이 가정은 본 저서에서 교육적 인식론을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되고 있다.
6. 역사적 체험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성
헤겔은 역사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역사철학자들은 역사를 자신들이 택하고 있는 이념으로 윤색한다. 즉, 그들은 역사를 마치 자신들이 추구하는 철학처럼 사변화하고 관념화시킨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오직 인간성의 진보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하여 그 역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고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그러한 전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헤겔에 있어서 역사는 어떠한 사슬의 고리처럼 여러 사건들이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져 전개된다. 그것은 절대의 상태를 지향해가는 의식의 진행이다. 절대자는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서 자기를 전개한다. 만약 유한자의 진행이 절대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악무한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참다운 역사의 진행이 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인류사적으로 볼 때 역사의 구성원은 단순히 본능에 따르지도 이성적인 세계시민처럼 행동하지도 않는다. 또한 헤겔 자신을 제외하고 역사의 최종적인 귀일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헤겔의 정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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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체험과 동떨어져 있다.
역사를 전체적으로 해명하려는 헤겔의 거대한 체계적 시도는 이제 더 이상 믿기 어렵게 되었다. 역사 전체라고 하는 것은 양적인 의미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의 총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결코 이 총체성의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 완전치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 역사는 미래에 대하여 열려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매순간 새로운 역사적 사건으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헤겔을 포함하여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사항이다. 그러한 내용을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에서 마치 그가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듯이 제멋대로 설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생각 자체를 아무런 제약도 없이 여러 역사적인 사례에 적용함으로써 그 자체를 수정하거나 발전시킨다기보다는 특정한 교조주의적인 성질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 자체의 의미도 모호한 용어와 법칙을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반증할 길이 없다. 이를 포퍼(1963)는 “강화된 교조주의”로 규정하였다(p.327).
헤겔 이후 역사철학과 구분되는 방식으로 역사학이 등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Schnadelbach, 1974). 근대적 의미에서 역사학의 토대를 구축한 랑케(L. von Ranke: 1795~1886)는 헤겔처럼 역사의 최종목표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학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탐구해야 할 과제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으로서 역사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철학적 사변보다도 오히려 자료 · 문헌을 기초로 하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서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한자의 하나인 역사가들이 역사에 있어서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역사적인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역사에 대한 기술은 헤겔적인 특권이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가들도 구체적인 개인들이고 그의 인식활동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다양한 각도에서 역사를 통관하고 그 단편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헤겔 사후에 곧 일어났다. 1870년대를 전후하여 헤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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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사변적 · 형이상학적 성격까지 배격하면서 인식론적인 색채가 농후한 칸트의 비판적 관념론을 재건하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그것이 이른바 신칸트학파이다. 그 결과 우리가 앞(5.4.)에서 검토한 “정신과학적 방법”으로서 해석학의 전통이 수립된다. 여기서 헤겔과는 일면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의 논리를 수용하는 방법론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설명과 이해를 방법적으로 구분하여 자연과학과 역사학을 구분한다. 이 때 정신과학의 대상은 역사적 자료로 제시되는 표현들로서 헤겔의 객관정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역사적 총체성은 헤겔의 절대정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유한자들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순수사유의 전개보다는 우주의 표현 또는 거울로서의 개체를 고려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계열을 따르면서 정신과학의 방법을 정초한 일련의 운동이 갖는 공통점은 변증법적 원리가 각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역사와 이해의 문제로 환원될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은 역사적 자료로서 제시되는 표현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 속에 투사되어 동일한 내적 과정을 요구한다는 데서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 헤겔의 사유방법이 역사주의자이며 실증주의자인 딜타이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그의 <역사이성비판>의 계획은 칸트가 ‘이성’의 역사성을 무시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미 헤겔의 패러다임을 기초로 설정된 것이었다. 그는 우선 우리의 인식능력에 대한 선험성을 가정한 칸트를 비판한다. 칸트에 있어서는 자연과학적 방법의 한계와 학문적 방법의 한계는 일치한다. 그러나 헤겔은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딜타이는 우리의 본질의 총체성으로부터 출발한 발전사만이 역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봄으로써 헤겔의 철학에 동조한다. 사실상 딜타이가 내세운 ‘정신과학’이라는 학문에서 ‘정신’의 개념은 사변적 내용을 가진 헤겔의 개념에 가깝다. [각주 42: Dilthey가 처음에 쓰던 ‘삶’의 개념 대신에 ‘정신’의 개념을 쓰게 된 것은 바로 Hegel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Makreel, 1975, p.305).] 그러나 딜타이(1927)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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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역사이성이 형이상학적 도식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비판함으로써 헤겔의 절대정신이 형이상학적 사변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표명하였다(p.285). 그의 정신 개념은 생철학적인 관점을 도입하여 변용된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은 체험과 생에 대한 우회로를 통하여 이해된 반성적 생을 의미한다.
딜타이는 해석학을 살아 있는 정신의 역사적 표현형식들에 스스로 한정시켰다. 그는 현실적인 이해의 과정으로서 유한한 인간들에서 출발한다. 유한한 이해의 객체로서의 표현형태들은 인식하는 자가 그것들을 “삶의 객관화”로 파악함으로써 정신과학적 대상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객관정신’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 · 표현 · 이해의 연관에 기반을 둔 그의 해석학이 출현한다. 경험은 그 자체가 변증법적인 것이다. 확정된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이 생기고, 그것이 이전의 것을 전도시켜 보다 새롭고 높은 단계의 경험을 위한 토대가 된다. 딜타이는 이해와 체험은 이처럼 과거의 것과 미래에 대한 예기에 의해서 서로 나선형의 구조로 수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의 형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가 말하는 해석학은, 우리가 앞(5.4.)에서 검토했듯이, 바로 이러한 실재하는 표현의 역사적인 형식들을 추체험을 통해서 구체적인 주체가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해석학은 초월적 영역에로의 이월을 일체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석의 순환운동의 종점을 가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해석학적 과정을 거쳐서 개체는 더 많은 인간들, 정신적 창조물들, 공동체들에까지 미치면서 개별적인 삶의 지평을 확장하고 인간의 보편성에 이르는 통로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존재로서 우리들의 현존재 상태의 사실성의 문제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판명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 해결의 길 가운데 하나는 하이데거와 가다머가 택한 철학적 해석학이 지향하는 방향에서 발견한다. 그들에 의해서 역사주의의 모든 전통은 철학적으로 검토를 받게 된다. 그들은 자연과학에서처럼 객관적인 이상을 실현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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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학의 잘못된 방법적 해결을 비판하고, 새로운 의미의 진리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텍스트의 저자가 취한 의도에 대한 일치보다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비은폐성을 찾는 것이다. 탐구적 이해는 그 자체로서 역사라고 하는 보편적 이해와 연관된다. 우리가 좀더 높은 수준의 자기인식에 도달하려면, 결국 인간의 자기해석에 대한 철저한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의미의 이해는 해결해야 할 과제를 다만 단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며, 이는 역사적 방법이 탐구적인 이해라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 여기서 역사적 인식은 결국 인간의 자기 인식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가다머도 헤겔의 변증법을 중시하고 있지만, 변화에 대한 변증법적인 경험을 뛰어넘어 대상이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완전히 인식되는 절대지로 나아가려고 시도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비판한다. 가다머가 변증법적인 경험을 수용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우리 각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일면성을 인정하고 부단하게 좀더 포괄적인 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지양’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가다머(/1982)는 “경험의 진리는 항상 새로운 경험과의 관계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p.320). 이어서 그는 “진정으로 경험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 시간이나 미래의 주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며, 경험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른바 “지평의 융합”에 의한 합의를 강조했지만, 합의는 단순히 한 가지 지식에서 다른 지식에 이른다거나 혹은 여러 지식이 어떠한 최종적인 지점에서 종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합의는 계속해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의 일면에 불과하다. 이 점에 있어서 헤겔과 가다머의 차이는 전자가 지양의 최종적인 도착점, 즉 더 이상의 화해나 변형이 필요하지 않은 절대지를 인정한 것에 비해서 후자는 지속적인 발전 자체에 이성의 힘을 부여하는 데 있다. 가다머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입장이란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보고, “정신적인 도야”라는 면에서 역사성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자신은 헤겔이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비판한 ‘악무한’의 옹호자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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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까지 선언한다.
7. 주체내의 모순과 타자 간의 모순
헤겔은 낮은 단계의 인지수준에서 높은 수준의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명제를 성립시키고 있다. 예컨대, 인식의 변증법은 오성적인 단계의 인식에서 그 내적인 모순을 체험하지 아니하고 이성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각 인지 발전단계 사이의 합리적인 소통이 사실상 어려움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순은 그것이 한 주체 내에서 일어나느냐 혹은 서로 다른 주체 간에 일어나느냐에 따라 그것의 해소방식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주체 내에서의 모순은 다만 부정과 부정의 부정에 의한 지양 자체에 모종의 어려운 실천이 개재할 뿐, 일단 지양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모순은 쉽게 해소된다. 지양된 것은 지양한 것에 쉽게 승복한다. 그러나 타자 간에는 모순의 위계가 내부적으로 결정될 길이 없다. 외관적으로 보아서는 그 위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문제를 “자기의식과 타자의 자기의식 사이의 상호침투”라는 주제로 다룬다. 그러나 그 설명은 실제로 그 과정에 포함된 난점을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
수도계에서 선진의 인식과 후진의 인식은 서로 수평적으로 볼 때 분명히 모순된다. 그러나 그것이 외부에 쉽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타자들도 자신의 수준일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타자 간에는 서로 내면을 투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수준은 외관의 단서나 다양한 표현수단에 의해서 외화될 것이다. 학자는 이론을 언술의 형태로,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표현할 것이다. 여기서 해석의 문제가 별도로 제기된다. 서로 지양의 단계가 다른 모순이 표현될 때, 표현된 내용은 상대에게 자신의 수준에서 해석된다. 정상적인 소통은 서로가 동등한 수준일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선진과 후진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오해는 불가피하다. 예컨대, 엄밀하게 말한다면, 후진에게 모순인 것이 선진에게는 이미 모순이 아니다. 이러한 미묘한 사실이 헤겔의 변증법이 가정하는 탁월한 측면이다. 하나는 모순으로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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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다른 하나는 모순으로 보지 않는 또 하나의 모순이 여기서 발생할 수도 있다. 선진과 후진의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그들 사이의 모순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지양되어야 한다. 그 지양에는 단순한 논리 이상의 상호작용적 실천이 요망된다. 그것은 타자를 내부에 수용하고 그것에 의해서 서로 다른 모순의 수준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후진이 선진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이전에는 대립적인 것들이 종합되고 통일된다. 타자 간에 개재하는 모순과 소통의 난점은 그것을 해소함에 있어서 주체 내부의 것과 다른 처방을 요구한다. 우리는 해석학을 다루는 자리에서 이 문제가 인식론의 중요한 국면임을 지적한 바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규모가 큰 역사 전반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가공적이고 모호한 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서 구체적 개인들이 당면하는 실존적 상황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이 문제를 전면에서 내세워 다루고 있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변증법이다. 그는 변증법을 인류의 역사에 적용한 헤겔과는 달리 변증법을 한 인간의 실존적인 운동에 적용하였다(표재명, 1992). 인류의 역사는 광범할 뿐만 아니라 그 서술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변증법을 보다 구체적인 개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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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변증법에 대한 설명에 있다. 각각의 단계에 있는 개인은 한층 고차적인 실존의 단계로 옮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된 당위에 속한다. 개인은 각각의 단계에서 모순과 역설에 부딪친다. 각 단계에서 그 단계의 부조리가 폭로되고 주체성의 정열을 고수하면서 다음 단계의 비약을 꾀한다. 이러한 과정을 그는 진리탐구의 길로 규정하였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자신의 존재를 비약적으로 변모시킴으로써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나 그 역사의 전 단계를 대표하고 있는 개인들 간에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서로 발달 단계가 다른 상태에 놓인 유한자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문제가 대두된다. 학문계에서 “좀더 낮은 수준의 정신”과 “좀더 높은 수준의 정신” 사이의 관계가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후자는 전자가 통과하지 않은 수많은 단계를 거쳤다고 가정하자. 어떠한 단계의 지식도 그 단계의 입장에서는 진리이다. 다만 그 단계 밖에서 볼 때 비로소 비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 간에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하나의 해법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것은 가르침을 통해서 후진을 선진의 수준에까지 올려놓는 것이다. 높은 단계에 있는 선진의 수준에 그보다 훨씬 낮은 단계에 있는 후진이 단번에 오를 방도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내려주는 것이다. 선진은 후진에게 자신이 거쳐 온 길만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오면 자신의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때 저단계에 있는 개인과 고단계에 있는 사람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갈등과 협동이라는 주제에 포함된 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개의 단계를 생략하는 비약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용어를 쓴다면 후진은 선진이 거쳐간 단계를 차근차근 거쳐가야만 한다. 그리고 선진은 그것을 돕기 위해서 후진이 처하고 있는 단계를 고려하고 자신으로 올라올 수 있는 사다리를 내려주는 식의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때 후진은 선진에게 자신을 맡기는 신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며, 선진은 후진이 처한 현재의 위치를 고려하여 그를 높은 단계로 인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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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화적 방법
낮은 편의 정신을 높은 편의 정신으로 도야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의 경우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은 개념 자체이다. 거기에 더 추가적인 것을 든다면 부정성 · 지양 · 매개라는 개념 정도일 것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구체적인 실천이나 활동에 대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더 구체적인 어떠한 활동을 찾으려면 헤겔 이전의 전통적인 변증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철학의 전통에 비추어 변증법의 실천적인 측면은 주로 대화와 결부되어 있다. 희랍어의 ‘dialogos’에서 유래한 변증법(dialektik)은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말, 즉 대화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의 변증법은 논쟁을 수행하고 한 입장을 다른 입장에 대해 옹호하는 기술이다.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대립하게 되면 대화는 논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논쟁은 언어에 의한 일종의 대립이고 투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술은 변론술 또는 논쟁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논쟁술은 상대방의 말 속에서 모순을 들추어냄으로써 그의 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그의 주장을 논박하는 기술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방법은 애초에 실용주의적인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활용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이 방법에 의해서 정치적 생활에서 성공을 거두고 권력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단계에서는 변증법이란 세속적 출세의 수단에 가까웠다. 이러한 의미의 변증술은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그럼으로써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겉보기에는 논리적인 그의 논증이 그에게 진실이라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는 또한 진리탐구의 방법일 수 있다. 대화는 독백과는 달라서 직선적 또는 연역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로 움직여 나가는 사고의 운동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주장과 반대의 대립이 나타나며 따라서 모순에 넓은 영역을 제공하게 된다. 다른 사고의 계열이 전경에 등장하며 긍정적이고 일의적인 결론을 대신하여 이의적이고 지양적인 결론이 생긴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서 대화로서의 변증법이 궤변 이상의 진정한 진리의 탐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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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제안된다. 대화를 통해서 보편타당한 것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 최초의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그의 대화술의 특징을 산파술, 곧 참된 것의 탄생을 돕는 기술이라고 했다.
한편, 언어적 상호작용은 항상 권력의 요소가 가미되어 반드시 공정하다고 볼 수 없는 제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앞서 해석학적 방법을 다루는 자리에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는 하버마스의 비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근래에는 아펠과 하버마스를 필두로 하는 비판이론가들이 의사소통의 과정에 “규제적인 원리”를 설정하여 언어적 해석과정에서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소지를 봉쇄하는 방식을 모색했는데, 그 해결의 터전은 역시 대화의 변증성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아펠(K. Apel, 1972)은 “언어의 초월적 화용론(a transcendental pragmatics of language)”이라는 주제하에, 그리고 하버마스는 “보편적 화용론(universal pragmatics)”이라는 주제하에 서로 논쟁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이상적인 언어의 규칙에 의해서 합의에 도달하거나 혹은 논쟁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그들은 진정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토론 공동체 속에는 그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덕적 규범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모든 참가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에 답변하고자 하는 개방성을 가지고 토론에 임해야 한다. 참가자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속일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금기나 특권적 불가침권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해석학을 살피면서 우리는 가다머도 진리의 탐구과정에서 대화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해석의 과정에서 대화의 참여자들이 서로 대립되는 선입견을 제시하는 가운데 올바른 통찰과 잘못된 통찰이 가려지고, 최초의 입장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을 거쳐서 모종의 “지평의 융합”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해결방식 역시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변증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어떠한 주제에 대한 논의에서 단지 전통적인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기보다는 해석자의 이해를 다양한 상황에 적용해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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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과정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입장이 보수적이라는 비평을 불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다머는 다시 헤겔적인 의미의 의견일치에서 전통의 단순한 수용을 포함하는 의미로 후퇴하는 인상을 준다는 비평을 받는다(Warnke, 1987).
변증법을 대화라는 실천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헤겔의 사변성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화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 그 형식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대화가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펠이나 하버마스가 대화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진보에 가깝다. 이들은 모두 진보를 위한 실천이지만, 엄밀하게 보면,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다. 그리고 그 형식 역시 다를 수 있다. 예컨대, 보다 자유로운 사회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해방적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대화에서 정치적인 권력의 공정한 배분이라는 세속계적인 측면을 중시한다. 그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을 의식해서 원칙적으로 두 사람의 대화자에게 합리성의 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학문과 같은 수도계에서 선진과 후진의 합리성은 평등할 수가 없다. 평등성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수도계의 속성에 위배된다. 선진과 후진은 서로 수준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화에서 그러한 평등성을 전제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 된다. 만약 소크라테스와 제자 간의 대화에서 품위의 평등성이 규제의 원리로 작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 간의 대화는 오해에서 출발해서 오해로 진전될 위험이 있다. 그 우려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결국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사실화되었다. 이미 선진과 후진의 위상이 밝혀진 경우 바람직한 대화는 후진의 합리성이 선진의 합리성으로 수렴되거나 대체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야만 한다. 가다머가 추천하는 대화는 일면 저자와 해석자가 다 함께 참여하는 권리를 인정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전자의 완전성에 대한 예기를 통해서 후자가 학습의 기회를 갖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가다머의 도식은 그것이 보수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수도계에서의 선진과 후진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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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을 다소나마 인정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 간접전달
변증법적인 원리는 언어의 변증법에 기초를 두고 있고 따라서 그 구조에 있어서 역설적인 언어현상에 의존한다. 현실의 사고에 있어 언어가 변증법적인 것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논리학의 안목으로 보면 이러한 사고는 더욱 참된 사고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궤변에 대한 논문에서, 그리고 칸트는 2000년 후에 그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변증법에 나타나는 사고의 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평가절하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의 진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고능력을 가지려면 불가피하게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그런데 이 때 언어는 불가피하게 역설의 현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대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없다. 지양은 언술적인 수단 이상의 조건을 필요로 하며, 그 조건을 실현시키는 것은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인 운동이다.
이 점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변증법”이다. 그는 한 개인의 실존적인 운동을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그리고 종교적 단계로 나누고 그들 간에 모순과 역설이 있음을 밝혔다. 키에르케고르는 앞선 단계의 선진이 후진에게 자기가 터득한 진리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의 고심은 어떻게 각각의 단계에 있는 실존의 모순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인정된 변증법적인 대화에 의해서 가능한가? 그는 직접적인 대화에 의해서 그러한 모순이 지양될 수 있을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는 상호 간의 충돌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다. 수도계에서 선진과 후진의 수준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이 때문에 그는 절대적인 의미의 진리는 논리적인 합리성을 내세워 언술에 의해서 직접 전달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주체성 · 내면성과 같은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객관적 지식의 경우와는 달리 직접적인 전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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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간접전달’이라는 방법을 처방하였다(표재명, 1994). 간접전달은 한 사람이 자신의 높은 수준을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언어로 직접 전달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취하는 가르침의 방식이다. 표현은 객관적이며, 그것은 언제나 상대의 수준에 의해서 왜곡된다. 높은 수준의 삶의 양태나 지식은 각자가 스스로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낮은 수준의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의 형태는 그가 자신의 수준에서 높은 수준을 실현시켜 나가도록 자극과 격려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그가 스스로 높은 수준에 이르면 그제서야 비로소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간접적 의사소통의 개념은 바로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방법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변증법은 근본적으로 “진리의 간접적인 전달방식”에 불과하다. 그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생각하고 있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교육을 뜻한다. 이것은 그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 시사 받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담은 메시지라기보다는 무지를 촉구하는 말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달할 내용과 대상만을 의식해서 이루어지는 강의의 형태가 아니라 전달하는 자가 전달받는 자의 능력을 내부로부터 유도해내는 과정과 결부되어 있다. 전달하는 자는 전달받는 자가 스스로 자신의 진리를 터득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달자는 자신의 자연적인 의지를 거슬리면서까지 자신을 감추는 가면의 아이러니를 감수한다. 간접전달의 개념은 우리가 하권 제 6장에서 교육의 한 가지 과정으로 논의할 하화의 과정과 거의 전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0. 변증법의 난해성
변증법은 학문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소개서는 대개 그것을 고대 희랍에서 기원한 것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특수한 학자들을 거명해 가며 설명하는 절차를 취한다. 그러나 그들 간의 공통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 가지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 의미의 현란한 변화이다.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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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변증법이 가정하는 존재의 한 가지 특징이기 때문에 그 점만은 변증법이 스스로를 입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 현대에 이르러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헤겔의 것을 주로 소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헤겔에 이르면 모순이 되는 것들이 명백하게 양립되며, 따라서 전통적인 변증법과 정반대의 변증법이 나타난다.
헤겔의 변증법은 인식에 대한 엄청난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헤겔 이후의 변증법 옹호자들을 살펴볼 때, 그 누구도 헤겔보다는 더 구체적인 다른 변증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뢰트(W. Rod, /1985)는 신헤겔주의자들의 변증법을 검토하고 “그들 중의 누구도 신기원을 이룩하기는커녕 하나의 학파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p.130). 근본 이유의 하나는 분명히 그 이론의 난해함과 번잡함에 있다. 헤겔은 변증법을 독자에게 쉽게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훌륭하고 정곡을 찌르는 인식론적인 공헌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이전의 단순한 인식론으로 퇴행하거나 그들의 낮은 기준에 의해서 오히려 비판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 잘못의 책임은 정확히 말해서 헤겔에게 있다기보다는 그를 낮은 수준에서 바라보는 독자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모종의 변증법적인 교화를 기대했다면 잘못일까?
헤겔의 변증법이 발전되려면 일단 그것이 이해되고 지양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 자체가 높은 수준의 해석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논리에 의하면 오성적인 단계에서의 ‘모순’은 이성적 단계에서는 이미 ‘모순’이 아니다. 한 단계에서의 ‘문제’가 다른 단계의 ‘문제’는 아니다. 한 단계의 ‘진리’가 다른 단계에서 ‘진리’가 될 수 없다. 한 단계는 그 단계로서는 진리이지만 그보다 윗 단계의 입장에서는 오류이다. 따라서 같은 용어라 할지라도 각 단계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론의 역사에서 몇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 고급스러운 인식론이다. 이 때문에 그것을 그 수준에 알맞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논리와 칸트적인 오성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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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은 흔히 그러한 인식론 발전의 변증법적인 단계를 거치고 나서 이루어지기보다는 그 이전의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변증법을 오성적 단계에서 비판하는 경우가 가끔 엿보인다. 최근 과학철학의 입장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고 있는 포퍼(1963)의 경우도 이 범주에 든다. 그는 헤겔이 논리적인 모순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변증법이 그가 주장하는 이른바 비판적 합리주의의 논리로 수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pp.312-335).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어느 면 칸트적인 수준에서 본 헤겔에 대한 오해라는 인상이 짙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헤겔은 논리적인 모순을 인정한다기보다는 존재의 모순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헤겔의 변증법은 언술의 형태로 진술되며, 일반 독자는 그의 변증법에 대한 언술을 주로 형식논리에 의존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검토했듯이 사유의 운동을 기술하는 헤겔은 전혀 다른 차원의 논리, 즉 변증법에 의존하여 그의 변증법을 설명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전통적인 형식논리학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활동성이라는 특유한 성격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 인식론의 선진으로서 헤겔과 후진으로서의 일반 독자 간에 오해가 생긴다. 형식논리의 일관성에 익숙해 있는 독자는 헤겔의 저서가 비논리적이고 반논리적인 사유의 방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이러한 잘못된 인상을 피하는 방법은 그것이 주장하는 바를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그 이해는 단지 언술적인 제시 이상의 실천을 거쳐 체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헤겔의 변증법을 일반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키에르케고르가 제안한 간접전달의 방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변증법이 헤겔의 것은 물론 대화에 의한 직접전달을 논의하는 후속의 변증법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1. 변증법의 지양
헤겔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모든 진리가 잠정적인 것임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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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했다. 이제까지 많은 방법론을 다루어 왔지만 이러한 헤겔적 결론이야말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같은 관점을 방법론 자체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방법과 방법론을 분리시키고 후자의 문제를 이제까지 다루어 왔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방법론에서 완전하고 체계적인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은 이전의 것을 토대로 그것을 지양하면서 꾸준하게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우리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논리이다. 우리가 변증법을 방법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룬 것은 그것이 가진 이러한 진보성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검토한 제반 방법론에서 변증법적인 요소를 제거한다면, 그것은 방법론으로서는 허구에 그칠 것이다. 사실상 각각의 방법론은 항상 그 안에 모종의 변증법적인 발전을 함축하고 있다. 변증법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발전의 여지는 많다. 헤겔의 변증법 속에는 학문의 방법으로서 유효한 것들이 풍부하게 묻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이전의 인식론과 구별되는 점은 인식의 운동 · 변화 · 유동성 · 적응력 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식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의 인식은 그것이 완성된 것이 아닌 이상 모순과 역설을 포함하고 있고, 그러한 불안정한 상태를 지양하면서 자신을 뛰어넘어 줄기차게 발전한다. 그러한 논리는 적어도 개념과 이론의 이행을 설명함에 있어서 불가피한 가정이다. 이 부분은 개념이 고정되고 정지해 있을 것을 요구하는 형식논리의 내규로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획기적인 새로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변증법은 유한자의 진리탐구는 항상 그 진행에서 의의를 찾아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모든 발전단계를 거쳐서 절대이념에 도달하는 것이 학문의 목표라면 학문의 목표는 자기 패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종말의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학문은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이 그러한 높이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확실히 의심스럽다. 우리는 절대이념에 도달되기까지의 이념의 점진적인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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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변증법은 지식의 체계가 발전하는 양상에 주목하며, 변증법의 각 단계의 타당성은 그 이전의 단계에 의존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단계에서 볼 때 이전의 단계가 부적절하고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통찰하게 하고,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오르고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변증법적인 흐름과 운동의 준거가 된다. 즉, 높은 단계의 형성물은 낮은 단계의 형성물의 진리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종합을 향한 추진력과 전체에 의해 주도되는 상승의 역동성도 끊임없이 거론된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발전적인 측면은 진리를 발견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고 보는 점이다. 가다머(/1982)는 헤겔이 방법론에 ‘도야(Bildung)’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그를 높이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pp.10-19). 이 점은 헤겔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 보인다. 유한한 정신은 절대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는 전자가 후자에 접근하려는 도야의 과정이 필요하다. 도야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을 교육시킨다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와 의무감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을 계발하여 외재의 지식을 자신의 품성으로 소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외부의 지식을 기술공학적으로 내면화시켜 언어능력 정도를 향상시키는 과정과는 구분된다. 헤겔의 체계에서 진리의 입증은 그 입증에 참여하는 사람이 스스로 도야의 과정을 밟아야만 가능하다.
변증법이 발전의 논리라면 변증법 자체도 그러한 요구로부터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변증법은 그것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아직 완성된 인식론이라고 할 수 없다. 인식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인식론 자체가 계속 변전하면서 발전해야 한다. 그것만큼 헤겔의 주장은 변증법은 물론 인식론 전반에 걸쳐 타당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인식론이나 방법론의 성취는 아직도 요원한 단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변증법은 그의 체계 안에 놓여 있는 헤겔 자신의 절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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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입장으로 인하여 자신의 주장과 배리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헤겔은 절대정신을 가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상태가 아직 그것에 이르지 못함을 입증하고, 또 그 과정에서 어떠한 논리가 필요한지를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당대의 것이 최후의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각주 43: 이런 도그마는 특히 변증법으로 사회적 발전을 설명할 때 흔하게 일어난다. Hegel은 세계사의 완성을 그가 위치한 19세기 전반의 프로이센에 두었다. 그의 변증법을 원용한 Marx는 세계사의 완성을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공산주의 사회에 두었다. 그러나 Hegel의 체계를 최후의 실패로 보고 그들 자신의 실패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물변증법도 변증법의 본질적 원리를 위배하는 오류를 범했다.]
참다운 진리는 쉽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점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서 우리의 무지는 날로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헤겔이 말하는 전체지 혹은 절대지라는 것은 적어도 인간에 있어서는 실현된다고 보기 어렵다. 만약 그를 따르는 변증론자들이 그들 자신들의 이론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하르트만(/1991)이 잘 지적했듯이 “역사적으로 객관화된 인류의 사상에 비한다면, 그것이 절대자의 영원한 사상인 한 헤겔의 사유는 부족한 것이다. 그는 시간적으로 자신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바로 그 테두리 안에서 말하고 해석할 뿐이며, 또한 그가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시대에 대한 것일 뿐이다”(p.44). 우리는 헤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헤겔의 존재론은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시대의 제약을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변증법은 그러한 인식론의 윤곽만 드러내고 있을 뿐, 아직 분명하게 제시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헤겔의 변증법은 변화와 발전의 도식적인 형식을 보여줄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대상이 지닌 충실하고도 풍부한 내용과의 접촉을 망각한다면, 헤겔이 비난한 형식적 논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합리적인 전체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의 언저리에 있는 신비주의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헤겔의 영향하에 브래들리(Bradley)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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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영국의 신관념론의 전통을 확립한 맥타가르트(J. E. Mctaggart, 1964)는 변증법에서 부정이 차지하는 몫이 점차적으로 감소하는 것 같은 매우 근본적인 현상에 대해 어떠한 상세한 설명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그에게 전적으로 동감한다. 의문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헤겔의 종합의 구조는 어떠한 것인가? 만약 변증법적 개념이 보다 고차적인 형성물로 바뀌어 간다고 한다면, 변증법적 개념 속에는 무엇이 생겨나는가? 변증법적인 개념은 어떻게 자기 내면에서 모순적 계기를 통합하는가? 모순을 지양한 경우와 지양하지 못한 경우는 어떻게 인식주체에게 식별되는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처리방식을 지나치게 비난할 수는 없다. 인식론 혹은 방법론 자체를 한 사람이 완성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현 단계에서 변증법이 단지 역사적인 유물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그것은 이전의 것보다는 더 발전된 면모를 보여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이루어 놓은 발전에서 후퇴하지 않고 그를 토대로 더욱 발전적인 인식론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후속의 관심 속에는 그 발전의 싹이 보이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 헤겔은 역사가 필연적으로 발전한다는 논리를 전개시켰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의 경우 하나의 당위적인 명제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공시키는 구체적인 실천행위에 대한 처방은 미흡하다. 이에 대한 이후의 대안적인 인식론이 아직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변증법을 실천으로 환원시키는 절차를 처방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인식론이 새로운 지평에 이르도록 하는 독특한 인식론을 제안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권 제 7장에서 다룰 교육적 인식론이다.
비록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헤겔은 이와 관련하여 그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시사를 준 바 있다. 그것은 경험과 도야라고 하는 매개의 과정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도야되지 않은 자연적인 의식을 학문의 세계로 안내해서 학의 존재를 입증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를 밝힌다. 변증법적 사유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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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고 있는 필연성은 추론적 사유 혹은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사유의 필연성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경험적 필연성이다. 헤겔이 말하는 종합 속에는 정립이나 반정립 속에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경험과 도야이다. 사실상 우리가 경험에 의해 알고 있는 세계 밖에 그것과는 다른 어떠한 실재가 있는지를 알 도리는 없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의 인식의 범위에 포함시킨다. 경험과 도야의 도움이 없이는 변증법적인 과정의 설득력을 스스로에게 펼쳐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부분에 대한 보완이 헤겔의 인식론을 더욱 발전시키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으로 그 도야가 어떠한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의식 자신이 각 단계에서 봉착하는 모순을 지적하고 그것이 변증법이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고 있다는 서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헤겔은 여기에 이성의 간지가 작용한다고 쉽게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성의 절대자가 아닌 개별적인 주체는 이 때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어떻게 그 문제들을 타개해 나가는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실천적 활동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로 헤겔의 이러한 모호한 점을 교육적 인식론을 통해서 해명해 나갈 것이다. 그와 우리의 관점 사이의 차이는 주체를 역전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한다면, 헤겔에 있어서는 주체가 절대지이며 절대지의 일반정신이 개인의 도야에서 자기반성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론에서는 그 주체가 구체적인 개인이다. 즉, 구체적인 주체가 자신의 개별정신을 변증법의 과정을 거쳐 일반정신으로 점차 도야하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르트르에 이르는 실존의 변증법, 그리고 딜타이에서 가다머에 이르는 해석학이 택한 현실적인 진로이다. 또한 헤겔에서 시작된 도야의 개념은 독자적인 맥락을 가진 교육의 개념에 의해서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우리의 교육에 대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인간 개개인이 세속적인 일상성을 벗어나서 자신의 인간성을 좀더 높은 수준에 올려놓는 일에 공환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인간성의 발전은 그 발전에 스스로 참여함으로써만 확인될 수 있다. 인간성은 높이 고양될 가능성이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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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이에 따라 수직적인 위계가 생겨나서, 자칫 그들 간에 모순과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교육은 그 자율적 과정에 의해서 그러한 모순을 화해시킨다. 이러한 교육의 실재가 수도계의 하나인 학문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이러한 논의는 하권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