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호(2000). 『학문과 교육(하):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2장 기초개념의 재건
2.2. 진리의 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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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리의 재정의
2.2.1. 기존의 제반 진리이론
‘진리’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많은 경우 수사적인 개념으로서 매우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론에서는 그 의미를 한정시켜 살려내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학문의 내재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가치론적 지표로서 학문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생각을 고수해 왔다. 분과학문마다 인식의 대상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이건, 사회과학이건, 또 인문과학이건 모든 학문은 진리의 탐구를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이제까지의 인식론적 논의들도 그 의미를 학문이 추구하는 이념의 것으로 국한시켜 왔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다만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이 각 인식론마다 특이한 진리기준을 내세우고 있고 그 각각이 수정되고 보완될 대상이 되고 있다. 본 절의 논의에서 우리는 그간에 인식론에서 제안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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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인 진리이론들, 즉 대응설, 정합설, 합의설, 실용설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 나름으로 그들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진리의 개념을 수정해서 다시 정의하는 순서를 밟을 것이다.
역사가 가장 깊고 또한 상식과 가장 어울리기 때문에 오랫동안 인식론의 안방을 차지해 온 대응설은 인식의 대상과 인식내용의 일치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데카르트 이래의 대부분의 인식론자들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 지성과 사실의 일치에 있을 것으로 여겨 왔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은 우리의 인식과 독립된 객관적인 실체이고, 학문은 그 객관세계에 대한 표상이나 그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명제의 진리 여부는 사실을 통해 확증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실증주의자들은 이런 간단한 도식을 따라 진리는 중립적인 관찰과 인위적인 조작으로 간단히 판명될 수 있을 것으로 치부하였다.
객관적 실재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진리의 지표라는 이런 오래된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앞 절에서 지식은 객관적인 세계와 우리들의 상호작용의 한 가지 양태라는 점이 수용되었다. 따라서 교육적 인식론은 진리를 실재와 그것에 대한 표상의 직접적인 관계로 보는 전통적인 인식론을 극복해야만 한다. 실재는 우리의 인식작용의 여과를 거쳐서만 우리에게 경험되며, 그 직접적인 접촉을 가정하는 진리의 개념은 인식작용 자체를 간과하는 것으로서 참으로 순진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는 별개로 있는 실재의 존재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인식은 그 실재를 재현하고 있지 않으며, 그 재현을 검증할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현전의 형이상학의 붕괴와 관찰의 이론의존성의 문제로 다루었다.
적어도 실증주의적인 원자주의를 벗어난 사람이라면 지식은 세계를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체계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개념, 명제, 그리고 그 전체의 의미는 그들의 산술적인 합으로 불 수 없는 전체를 구성하고 서로가 상대의 맥락을 구성하면서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인식대상과의 대응의 원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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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들 내부의 상응의 원리가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Quine, 1961). 인식대상은 요소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의 독특한 사실성은 구조에 의해서 특징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만약 대응이라면 대상의 구조와 인식의 구조가 일치하는 정도로 보아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대상의 구조는 인식의 구조에 의해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한순간에서의 대상과 그 인식은 언제나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리의 정합설은 대응설에 앞서 있다. 정합설은 지식체계 내의 내적인 통일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오우크쇼트(1933)가 말하는 경험의 정합성(coherence)은 바로 이런 기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는 “적게 경험한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이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당장 전체보다는 적은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불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p.34)”고 주장한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통일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통일성이 결여된 인식 혹은 종합성에 미치지 못하는 경험의 형태는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정합성을 성취한 정도에 따라 진리와 오류를 이렇게 규정한다.
논파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의 형태가 완전한 종합성에 미치지 못하는 오류 혹은 과실의 원칙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오류 가운데서 절반의 진리(the half-truth in the error)와 절반의 진리 가운데서 오류(the error in the half-truth)를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다(p.4).
우리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지식은 구조이다. 어떤 개념이든지 간에 그것은 언제나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어떠한 개념도 전체적인 맥락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건 간에 그것이 지식의 자격을 가질 수 있으려면 체계성을 가져야 할 것으로 논의해 왔다. 그러니까 어떤 지식이건 간에 내적인 정합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지식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된다. 우리는 실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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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대응설이 가진 문제로서 그것이 지식의 총체성을 소홀히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콰인(W. Quine, 1969)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가 세계를 대면하는 방식은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명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하나의 총체적인 구조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식을 평가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당연히 그것을 구성하는 낱낱의 명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이루는 전체의 체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합설은 지식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에 관한 규정일 뿐 그 지식체계가 얼마나 진리에 접근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세부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역사상 우리에게 알려진 이론들은 대부분 내부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역사상 각 패러다임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자연과학에서 정합설이 적용되는 상황은 항상 기존의 학설이 유리하였다. 새로운 가설은 이미 수용된 이론에 일치해야 한다는 정합성의 조건은 보다 나은 이론을 지향하기보다는 낡은 이론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다. 기존의 것과 일치하는 새로운 이론은 그것을 개선하려는 입장에서는 똑같이 불만스러운 이론이 또 하나 첨가되는 셈이다. 이는 사태를 개선한다는 의미의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잘 확립된 이론에 모순되는 가설은 다른 방법에 의해서 얻을 수 없는 증거를 얻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데 만약 이제까지 정합설을 적용했다면 오늘날의 물리학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물리학에서 일어날 당시의 역사로 돌아가 보면 초기에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오히려 더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동설은 그 구조를 정리할 만큼 안정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일부 학자들은 그 타당성을 기존하는 천동설과의 정합성에 비추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지동설은 그 점에서 진리의 반열에 들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우리는 지식의 정합성의 기준을 넘어서서 그것의 상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런 기준을 찾지 않고 자연과학의 발전을 설명할 길은 없어 보인다. 무릇 개념은 정의상 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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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언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개념은 늘 변천해 왔다. 실재는 결코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내리는 개략적인 판단으로부터 독립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더 나은 체계를 향해 발전해 왔다. 역사의 시련을 받으면서 변천하지 않은 지식이나 학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나 후설이 학문의 전형으로 염두에 둔 수학이나 논리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수학을 포함하는 모든 학문은 완전한 명증으로부터 완전한 명증으로의 진행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명증으로부터 더욱 완전한 명증으로의 진행이다.
논리적인 정합성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가 학문활동에서 매 단계마다 가지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아무리 정합적인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최종의 것이 아니라 완전한 지식의 체계로 향하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우리가 명증에 도달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명증들이 어떻게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정합성의 평가기준은 아직도 우리에게 명백한 것이 아니다. 명증이란 연구자가 한 단계의 지적인 진전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성취한 정합성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다. 이 때 연구자의 학문적인 체험수준이 항상 문제가 된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일관성 있게 명증적인 것들이 서로 경합할 때 그들의 우선순위를 가릴 기준이다.
후에 더 자세한 논의가 있겠지만 우리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개념을 부인한다. 만약 진리를 절대적 기준에 의해서 평가해야 한다면 역사상 어느 누구도 진리를 체험했다고 볼 수 없다. 오늘날 천동설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주장한 톨레미는 진리체험을 하지 못한 것인가? 만약 그가 진리를 체험했다면 그는 그것을 헛되게 체험했다고 말해야 되는가? 혹시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한 상태보다는 그것에 접근하고 있다는 진전 자체를 더욱 중요하게 본다면 천동설은 그 이전의 어떤 학설에 비추어 진전한 것이 아닌가? 다시 그 후에 등장한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발전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전자가 절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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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도달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들을 대비해서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모종의 확신을 얻는다. 그렇다면 그 진전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진리에 대한 규정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이론은 합의설이다. 여기에서 지식은 집단의 동의에 의해서 선택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 집단은 넓게는 사회구성원에서부터 좁게는 학문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주장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견해에 기준을 둔다는 데 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동의를 타당성의 준거로 삼고자 한다. 그 집단의 범위는 전문가 집단으로 더욱 좁아질 수도 있다. 이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증은 주어진 학문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해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 표준에 따른다. 예컨대, 어떤 현상이 예언(따라서 하나의 이론)을 확증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수립된 해석의 표준에 의존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자이만(J. Ziman, 1968)의 공적 지식에 대한 논의(1.3.3.)에서 드러났다. 그는 과학적 지식의 범위를 확정짓는 강력한 조건으로 합의를 강조하였다는 것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이런 합의의 개념은 해석학의 경우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해석학이 자연과학에 대비된 정신과학의 방법으로 등장할 때, 정신적 산물에 대한 해석의 객관성과 타당성의 기준으로 그것을 표현하거나 창작한 사람과의 체험적인 일치 혹은 재생을 요구했다. 또한 사회과학의 방법으로서 개념분석을 따르는 윈치(P. Winch, 1958)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개념에 일치할 때 그 사회에 대한 이해라는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올바른 이해란 ‘제 2의 사회화’를 의미한다. 이런 사회화와는 달리 좀더 세련된 종류의 일치를 모색하는 경향이 가다머(H. Gadamer, 1930)의 철학적 해석학이나 하버마스(J. Habermas, 1979)의 보편적 화용론에서 나타난다. 다만 그들 간에는 ‘참된 합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부분에서 다소간 견해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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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는 정신과학적 객관주의를 벗어나 있고 또한 완전한 일치를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해석자의 대화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감대의 형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하버마스는 사회문제의 본질이 ‘왜곡된 대화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그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어떻게 비판적 자기성찰을 동반하는 대화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해소되고 조정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합의의 개념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우선 합의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특정한 사회구성원이 신념체계나 언어적 개념에 적응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학문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이미 밝혔다. 해석하려는 세계의 신념체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학문의 전단계로서는 필요하지만 그 상태로서 곧 학자적인 임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갈등이나 문제를 합리적인 대화에 의해서 해소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역시 학문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일치하려는 특수한 목적으로서 진리는 이와는 다른 범주에서 논의해야 할 사항이다.
만약 일치가 진리탐구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학문적인 체험의 결과로서 얻은 지식의 타당성을 어떻게 상호주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일단 더 깊이 있게 추궁해 볼 만한 문제로 떠오른다. 앞서의 논의 가운데 자이만과 가다머의 경우 관심은 여기에 있었다. 진리는 어차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서 확인되어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검증에 참여하는 사람들 상호 간의 합의를 본다는 것은 우선 불일치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관심을 줄여 놓고 볼 때 우리가 더욱 자세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그런 합의가 이루어지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의 방법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준칙은 참여자들의 평등과 다수성에 호소하여 진리를 입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대중에 기준을 두는 사회적 합의는 일상성을 초월하려는 수도계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익명의 무책임한 다수가 진리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런 진리관은 예외 없이 당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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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정상적인 담론을 영속화시키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어떤 주장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진리의 증명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더욱 좁게는 그 집단이 과학공동체일 경우도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절차에서 집단의 동의는 결국 현존하는 지식과의 일치에 의해서 보장되기 때문에, 그런 규약을 따른다면 혁신적이고 새로운 지식은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
진리는 군중의 흥정에 의해서 결정될 일이 아니다. 군중은 개인을 뉘우칠 줄 모르게 하고, 책임질 줄 모르게 만들고, 혹은 적어도 책임을 분산시킴으로써 개인의 책임감을 약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많은 학자들이 희생의 제물이 된 역사의 사례가 많다. 키에르케고르(1859/1980)가 우리 모두가 외톨이로서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는 “만약 그들이 진리를 투표로 결정한다면 그 때에는 비진리가 존재한다(p.131)”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진리의 전달자는 오로지 외톨이뿐이다. 그리고 오로지 외톨이에게만 전달될 수 없다(p.138)”고도 말한다.
익명의 무책임한 다수가 진리를 대표할 수는 없다. 군중에의 호소는 정치적인 해결이다. 진리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 수의 다과, 즉 군중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과학의 과정을 살피면 진리의 합의설은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과학의 중요한 발견과 결론은 이미 알려진 어떤 것과 일치되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이들은 이미 알려진 것에 동화되기보다는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수정을 가함으로써 학문의 진전에 공헌하였다. 각종의 수도계에서 품위의 위계는 피라미드형으로서 높은 품위일수록 소유자가 적어진다. 학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사실은 기존의 합의설에 더 많은 조건의 부여와 수정을 요구한다.
진리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합의 자체가 아니라 합의의 방향이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낮은 수준의 품위에서 높은 수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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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로 가는 흐름과 운동이 중요하다. 이 점은 과학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과학은 합의가 아니라, ‘불완전성’을 추구하면서 발전하였다. 그 핵심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정상과학’이 연역된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있다. 그 후에 혁명과학이 그것을 대체한다. 옳은 지식에 대한 표준 자체도 탐구의 과정에서 자기수정의 과정을 거치며, 이 때 학문적 탐구가 지향하는 목표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가다머(1960)의 해석학적 합의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과거의 인간 속에 들어가는 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현존하는 우리는 역사를 현재의 상태에서 탐구하며, 과거의 역사 그 자체로서 연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현재를 설명하기 위한 빛을 찾으며, 이를 위해 우리의 주장을 개선하고 의미를 확대하는 일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당시의 행위자들이 모르고 있던 역사의 통찰을 얻는 데 있다.
우리가 합의설을 받아들일 때 따져야 할 다른 부대조건은 합의의 방법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준에 비추어 한마디로 소수의 선진에 대한 다수의 자발적인 합의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방법적 조건을 달지 않는다면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의 명분은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문적 지식은 상식이나 교조, 그리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해결에서 합의를 강조한 하버마스(1979)의 경우조차도 합의의 방법에 있어서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부여하였다. 하버마스(1977)의 비판적 해석학은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권위에 큰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그 보수성을 우려했다. 그는 언어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으로서 이데올로기의 매체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별다른 반성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치와 합의는 대부분 의사소통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제도적 강제와 체계적인 왜곡에 의한 기만적인 합의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강제와 왜곡을 비판적인 반성을 통하여 제거하기 위해서는 전혀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과 이상적인 대화의 형식이 필요한 것으로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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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의 의사소통 이론에서 진리의 이념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서 산출되는 참된 합의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왜곡된 의사소통에서 일탈한 이상적인 대화상황의 내적 구조를 형성하는 화용적 조건들과 규칙들을 재구성했다.
합의설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 우선 천동설의 주창자인 톨레미와 지동설의 주창자인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코페르니쿠스가 톨레미의 이론에 일치할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때 똑같이 진리의 체험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그 방향은 어느 쪽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 경우 우리는 톨레미가 코페르니쿠스에 합의할 때에 더욱 진리에 체험했으리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 이유는, 최종적인 결과는 이해에서 찾아야겠지만, 톨레미 편에서 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학문적인 수준의 성숙이 없이 그 이해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인 체계에서 천동설이 지동설에 비추어 다수의 의견이었고 사회적인 강제력이 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역사의 안목에서 후자는 전자를 이겨냈다. 이는 학문에서 강제가 진리의 규명과 무관하거나 별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 요인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교육적 인식론은 이 점을 더 분명하게 규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는 진리의 실용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도구주의(instrumentalism)나 실용주의(pragmatism)의 관점에서는 과학적 이론을 어떤 다른 것에 대한 도구나 기구로 본다. 전통적인 인식론에 환명을 느낀 듀이(1922)는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으로부터 ‘인간에게 유익한 지식’으로. ‘소묘성’으로부터 ‘문제해결 가능성’으로 관점을 전환시켰다. 말하자면 그는 지식의 가치를 모종의 구체적인 성과와 결부시키고자 하였다. 그 성과는 예측과 통제의 수단에서 넓게는 여타의 세계에 대한 공헌 등 다양하다. 신실용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로티(R. Rorty, 1982/1996)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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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추구란 단지 행복추구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인간존재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줄 신념의 추구이기 때문이다(p.10).
실용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법칙은 해당 영역에서 자연과 교제할 때의 실용적인 처방에 불과하다. 학문적 지식을 그 효과에 의해서 평가할 수도 있다. 이 효과라는 말은 학문 밖의 다양한 세계의 가치기준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이 진리설은 가장 이해하기 쉽고 또한 설득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근래에 등장한 구성주의도 근본적으로 도구설의 지지세력이 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인식활동이란 객체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식은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얻어진 특수한 적응양식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결국 그 기능의 적응성에 의해서 평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은 유기체인 우리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서로 어울리는 최적의 형태로 구조적인 접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 때문에 “더 잘 적응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 대신 보다 직접적으로 “적응한 것이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는 말이 선호된다. 이런 이유에서 글래서스펠트(E. Glasersfeld, 1995)는 실재에 대한 정확한 재현이라는 의미의 ‘진리’개념을 포기하고, 그것을 이른바 ‘생존능력(viability)’이라는 개념으로 대치할 것을 제안한다.
급진적 구성주의는 주저함이 없이 도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독립된 실재의 참된 표상으로서) ‘진리(truth)’의 개념을 주체의 경험계 내에서의 ‘생존능력’의 개념으로 대치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공약들을 거부하고 우리가 알게 되는 세계, 우리가 살아 있는 주체로서 구성하는 세계에 관해서만 사고하는 하나의 가능한 사고의 모델 이상의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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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효용설에 비추어 볼 때 인지현상도 세계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적응방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기준은 학문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정당한 이해의 과제를 연기하거나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상의 효과성만을 부각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학문적 지식은 내재적 가치와 더불어 외재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그만큼 이런 관점이 전적으로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용이라는 척도는 그 실용을 목표로 삼는 응용학문의 경우에 더욱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응용의 척도는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바로 응용되는 세계의 다양한 가치들로 연결될 것이다.
적용되는 세계가 다양한 것만큼 효과의 개념도 확장된다. 효용성의 기준은 이미 알려져 있는 영역 내의 합목적성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그 척도를 학문 외적인 세계의 수단으로 규정해야 한다. 따라서 그 기준은 외재적일 뿐만 아니라 외적 세계의 선택에 따라서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각 세계들마다 학문적 지식을 자신들의 가치를 실현시키는 도구로 삼을 것이다. 그 의미는 참으로 분야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가치판단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미로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서 학문적 지식의 가치가 가져오는 성과나 효과를 어떤 세계에 비추어 보느냐 하는 문제에 들어갈 때 이런 방식의 규정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외재적 가치들은 많은 경우 모순과 갈등을 포함한다. 가령, 경제적으로 긍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성과를 가져오는 것이 문화적으로 치명적으로 나쁜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도덕적으로 보더라도 지식은 항상 선용되거나 악용될 수 있다. 학문은 질병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고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결과에 의해서 지식을 평가하려는 실용주의자들은 그 모순된 것들 모두를 진리의 척도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그들의 개념이 사실상 아무 것도 한정시켜 말해주는 것이 없을 정도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구성주의자들은 진리개념을 포기하고 일종의 생물학적 메타포를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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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유기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하는 한, 생존가능성을 갖는다. 급진적 구성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개념이나 모형, 이론은 활동의 목적에 비추어 적합하다면 생존가능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 활동의 목적은 문제의 해결일 수도 있고, 그 밖의 시간의 절약, 경제성, 편리성, 일관성, 우아함, 내재적 만족 중 어느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며 사후의 정당화 수단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 것에는 학문계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무수한 이유들이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특수한 적응성을 모두 열거할 수도 없다. 그 효과의 종류는 무한대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준이 경우에 따라 학문발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종국적으로 고유한 형태로서의 학문계의 발전에 반드시 기여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그처럼 다양한 기준을 적용할 때 학문은 기준을 상실하고 외재적 목표의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위험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학적 이론이 참이냐 혹은 거짓이냐 하는 질문은 그들에게는 무의미하다. 다만 그 이론이 여타의 것을 위해서 효율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만이 문제가 된다.
우리의 과제는 학문 자체의 내재성에 비추어 진리를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진리의 규정은 오직 학문 내적인 특성과 필연성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진리이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는 것과 쓸모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지식을 효용성의 차원에서 보는 도구주의나 실용주의의 설명은 역사상 학자들이 학문을 추구했던 원래의 동기와 의미를 퇴색시킨다. 물론 타당한 지식은 다방면에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상의 문제이고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학자들이 학문활동에 몰입하고 분투해 왔던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에서의 중요한 발견과 발전은 거의 정치적인 권력, 금전적인 이익이나 사회적 명예 등을 추구하는 것과 무관하였다. 그것은 학자들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자신과 싸움한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효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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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진리탐구에 후속하는 것에 불과했다.
지식의 가치를 단지 효용에서만 찾는 것은 잘못이다. 지식을 오직 어떤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만 추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참된 것을 믿고 있지만, 지신의 이익을 위해 또는 사회적으로 처신하거나 보신하기 위해서 그것을 발표하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상황에 따라 겉을 꾸며 언동을 다르게 할 것이다(Broad & Wade, 1983). 이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으로서 지식 고유의 기능이 아니다. 품위로서의 학문적 지식은 기능성과 효율성을 초월하는 평가의 대상이다. 이것은 학문계 밖에서 생활하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효과 이상의 자기수련적 요소를 항상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그것을 위해서 학문 외적인 가치나 대중들이 말하는 가치를 거절하고 외면하였다. 교육적 인식론은 지식의 형성과정과 그것의 효용성은 별개일 수 있으며, 단지 후자에 의해서 전자를 평가하는 방식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도구주의 혹은 실용주의에는 일면 외재적인 목표만이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될 측면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교육적 인식론이 그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논의하는 가치에는 우리가 주장하려는 품위의 내재적 가치로 해석할 만한 국면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런 부분은 실용주의자들이 어떤 활동의 수단을 그 자체에 적용하는 경우를 논하는 방식에서 드물게나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만약 어떤 활동이 그 자체를 위한 수단이라면 그런 측면은 분명 그 활동 자체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곧바로 우리가 말하는 ‘내재적 가치’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효용이라는 범주의 모호함에 따르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국면은 겉으로만 외재적인 의미를 품고 있을 뿐 사실상 그 활동에서만 유래하는 내재적 가치를 지칭하는 것으로 수용해도 별 무리가 없다.
이런 부분은 실용주의 학자들의 논조에서 그때그때 문맥에 따라 나타나지만, 특히 듀이(1916)가 성장의 개념을 도입할 때 뚜렷해진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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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성장에서 목적의 궁극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목적은 목적인 동시에 그것이 달성되는 순간 다음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성장에서의 목적과 수단이란 성장의 계열에서 동일한 것이 상이한 지평에서 가늠되는 양면일 뿐이다. 일련의 성장의 과정을 그것이 달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예견한다면 목적이 될 것이고, 그것이 실현된 단계에서 그 자체를 보면 그것은 다음 단계로 진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적인 품위라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각 품위는 그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목표의 가치를 가지며, 그것이 달성되는 순간 다음의 단계로의 전진을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특수한 의미의 실용주의적인 관점은 이하의 논의에서 우리가 도입하려는 새로운 의미의 진리관과 조화를 이룬다.
2.2.2. 추구의 대상으로서의 진리
우리는 현존하는 진리설 가운데 네 가지를 검토하였다. 대응설은 실재와 관념의 분리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의 지식은 애초부터 가정할 수 없다. 정합설은 지식이 구조라는 점에 비추어 최소한의 요건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으니 지식의 수준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합의설은 합의의 방향과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실용설은 기본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학문의 외재성을 강조하는 편이기 때문에 학문적 지식 고유의 가치판단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혼돈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교육적 인식론이 택할 진리규정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전의 진리관을 지양하여 좀더 현실적이고 고차원의 진리관으로 끌어 올려놓는 것이다.
교육적 인식론이 택하고자 하는 진리관은 무엇보다도 지식의 구체적인 역사적 발생사건에 부합해야 한다. 이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먼저 배제해야 할 기준은 절대주의적 혹은 정초주의적 진리관이다. 정초주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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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특징은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진리의 문제를 이항대립식으로 보고, 진리로 인정될 수 있는 것과 진리로 인정될 수 없는 것에 엄격한 경계선을 긋는다. 모든 지식은 오류이거나 진리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한다. 절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진리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으며, 그래야만 학문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학문활동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공허한 활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실현될 수 없는 기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는 절대주의자들이 스스로의 최면으로 만들어 놓은 사상누각이다. 그들이 말했던 진리는 사실은 영원성의 개념에 안주하고 싶은 그들의 경향성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자명한 것들을 따로 떼내어 놓고 그것을 원래부터 불변하는 영원한 것인 양 치장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절대적인 진리에의 희망이나 신성화된 찬양은 참으로 위험하다. 거기에는 논자들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절대화하려는 독단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 이외의 어떤 유의 변화나 개선도 거부하는 경향이 숨어 있다.
절대적 의미의 지식, 혹은 ‘정답’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없다. 그것을 가정한 진리의 개념은 독단이다. 역사 속의 학문적 지식을 보면 당장 그것의 비현실성이 드러난다. 학문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한동안 진리로 입증되었던 것은 거의 예외 없이 후에 얼마간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진리를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식대상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적응해야 한다. 말하자면 과학의 발전은 끊임없이 확대되는 경험적 사실에 우리 사고를 적응시키는 과정으로서 그 종점을 현재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학문적인 활동은 항상 도상에 있으며 우리는 그 근원을 밝혀주는 아르키메데스적인 기점을 가정하지 않는 진리의 개념을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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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자들의 오만하고 과대한 생각과는 달리 많은 학자들이 학문하는 목적을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로 향해 나감에 두어 왔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대문자의 진리를 미리 규정하는 것은 자기당착이다. 대신 우리는 그 곳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소문자의 진리들을 체험하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속한 각 단계의 발전을 나타내는 이정표로서 그때그때마다 당분간 진리의 몫을 하지만 그것이 극복되었을 때 허구로 들어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진리를 우리의 궁극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지향의 개념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모든 지적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리는 하나의 규제이념이다. 우리는 굳이 인식론에서 영원한 진리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탐구’라는 우리들의 학문활동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큰 비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것이 실현된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지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학문은 진리의 탐구를 목표로 한다. 최종적인 진리는 아직 밝혀진 것도 실현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목표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을 알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진리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그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는 실재와의 대결을 인도자로 삼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최소한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나 확인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우리의 지적인 행위를 규제한다.
진리를 움직임의 방향으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양극단의 절대주의와 회의주의 모두를 벗어날 수 있다. 진리의 탐구는 아직 그 정상에 한번도 등정한 일이 없는 높은 산을 어둠 속에서 오르는 데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가장 높은 산이 정확히 얼마나 높은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곳에 오르는 일을 진행시킬 수 있고, 또 언젠가는 정상에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매 단계에서 점검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목적지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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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끈질기게 전진하며 가끔 장애물에 부딪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충격이 이끄는 바에 따라서 우리의 방향을 새로이 설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도달할 종점에 관해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 곳으로 향하는 방향은 감지할 수 있다. 그 방향은 우리가 되도록 오류에서 빠져 나와 더 나은 인식체계로 전향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여하한 판단도 나중에 가서는 수정될 소지를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그 자신의 차례에 가서는 지양된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체험한 것이며,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인식론에 도입하느냐만 남아 있다. 적어도 추세를 볼 때 이러한 인식론의 방향전환이 칸트의 인식론에서 해결에 이르는 경로 그리고 최근의 과학철학자들의 과학사에 대한 현실을 근거로 서서히 수용되고 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진리를 판정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논리에서 말하는 배중률을 진리의 판정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배중률은 모순율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하나의 사물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없으며 그 중간이나 혹은 제 3의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진리이거나 허위인 것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역시 진리와 거짓을 오직 정도상의 차이로 보는 것이다. 지식들 간에는 허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진리에 있어서도 다양한 정도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진리판단에 있어서 배중률의 변증화가 불가피하다. 모든 단계의 지식은 얼마만큼 진리와 오류를 가지고 있다. 완전히 잘못된 오류도 없듯이 완전히 참된 진리도 없다. 발전하는 세계로서 학문계는 완전한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학문은 어떤 정지하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풍부한 내용으로 채워진 고차원적 지평으로 한걸음 한걸음 접근하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진리가 이 세계에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든 지식은 완전한 오류와 완전한 진리의 중간영역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에는 얼마만큼의 옳음이 있고 얼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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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의 그름이 있으며, 다만 그 진리성은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이 지식이 참이거나 오류라고 하지 않고 이것에 비해 저것이 더 참이라거나 혹은 저것이 이것에 비해 더 오류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1808)>에서 진리는 인식에 대한 재인식의 과정을 거쳐서 최종의 것에 이르리라는 이념을 드러냈다. 비록 헤겔은 최종의 것을 기대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시대적 한계를 지닌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이르는 중간의 단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향으로서의 진리의 개념에 부합한다. 변증법적 사고는 논리학, 수학적 방법론, 실험적 수단 등에서 타당하다고 인식되는 진리의 개념을 포기하고 진리를 운동의 형태로 규정하려고 하였다. 헤겔은 물론 절대적 진리를 인정했지만 그의 개념도식에서 그것은 오직 절대자의 것에 속한다. 변증법의 탁월한 점은 유한자인 우리가 최종적인 지식이라거나 절대적인 지식을 알지 못하고도 학문의 발전을 평가하는 방법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현상의 한 가지로서 학문에 적용될 수 있는 헤겔의 논리는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에는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징이 있다. 그것은 중간적인 진리를 허용하는 것이다. 영원한 현상으로서 지식체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은 대신 진리가 매 단계에서 체험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런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완결될 수 없는 발전에 대한 철저한 긍정 위에 기초한 상대적인 진리관에 부합한다. 변증법적인 논리에 의하면, 진리와 오류는 결코 절대적인 대립이 아니다. 절대자가 최종적인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지점을 가정한 헤겔의 변증법은 키에르케고르에 의해서 유한자인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되었다. 유한자인 인간은 그 과정의 체험만이 허용된다. 독자들은 키에르케고르(/1941)가 그의 진리관을 밝히는 데 인용한 레싱(G. lessing: 1729~1781)의 글귀를 기억할 것이다. 그것을 상기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초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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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느님께서 바로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숨겨 가지시고, 그 왼손에는 진리를 향한 끝없는 갈망을 ─ 그것이 비록 나를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미혹한다는 조건부로 ─ 숨겨 가지시고 나에게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겸허하게 그의 왼손을 향해 무릎 꿇고 부르짖겠노라. 신이여 이것을 나에게 주옵소서. 순수한 진리 그 자체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p.92).
최종적인 지식 대신 지향점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갈망으로 충분하다. 인식에 있어서 이러한 한계개념은 엄격성을 앞세운 과학철학에서도 포퍼를 시발점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독자도 기억하다시피 포퍼(K. Popper, 1963)가 ‘반증주의’를 택할 때 그는 진리의 발견보다는 오류의 점진적인 제거라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가 <객관적 지식(1972)>이라는 저서에서 쿤의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항하여 제시한 개념은 ‘근사치(verisimilitude)’이었다. 그는 지식이 결코 완벽한 형태로 실현될 수 없고 다만 어떤 곳을 향해서 접근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도 역시 우리가 말하는 규제이념으로서 진리의 개념을 택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하나의 진술에 대해서 절대성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다른 진술에 비해서 좀더 진리롭다고 말하는 편을 택함으로써 그 거룩함에 대한 겸손의 태도를 갖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래서 제반 진술들이 진리이냐 혹은 허위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여 지나치게 정확성을 따져서 까다롭고 꼼꼼하게 해결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각주 5: 이를 ‘정확한 오류’라고 부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 능력과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로서 진리이냐 혹은 허위이냐를 양단논법으로 따지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다. 과학자들이나 일반시민,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간에 그런 불경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명제의 진위가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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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규명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선언하고 있는 굿맨(N. Goodman, 1978)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다.
과학적 법칙들에 대한 그런 불경한 견해는 가끔 그들이 암묵적으로 단지 진리에 접근(approximation)하는 진술에 불과하다는 근거에 의해서 저항을 받는다. 가령 ‘v=p · t’라는 공식에서 ‘=’은 ‘같다’는 것으로 읽히기보다는 ‘대충 같다’로 읽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거룩함과 탁월함은 보존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정도의 법칙에 대해서 진리에 대한 접근(an approximation to the truth)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참된 접근(a true approximations)이라고 할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접근들이 진리들 혹은 더욱 정확한 진리들이라고 간주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점이다(p.121).
이 발언에는 키에르케고르의 겸손과 포퍼의 근사치의 개념이 적절하고 조화롭게 반영되어 있어 보인다. 진리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최종적인 계시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분명히 오류의 편에 가깝다. 우리에게는 최종적인 근원을 제시할 아르키메데스의 기점이 없기 때문에 진리의 척도는 하나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차선의 우회로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 우회의 길은 어떤 관념의 진리성을 절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진리와 허위라는 이분법은 다분히 인식론적인 논의를 단순화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사실은 그 사이에는 거의 무한대의 상대적 수준이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시간 가운데서 언제나 도상에 있고 운동 속에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경로를 거쳐야 하는 우리에게 특이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진리의 체험’이라고 해 두자. 소규모의 진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런 주관적인 경험은 볼노오(O. Bollnow)의 <진리의 양면성(1975)>의 개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정초주의적인 인식론과 구분하여 ‘인식의 철학(/1993)’이라는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그는 절대적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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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해명할 절대적 기준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확고부동한 기반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은 실현불가능한 것임이 명백하다. 우리가 확고부동한 기반을 찾고자 할수록 한층 더 심오한 심연이 나타나, 우리는 결국 전진할 수 없는 심연이 훨씬 더 깊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p.48).
그는 진리가 우리의 경험이 더욱 풍부하게 진행되는 운동과 관련하여 규정되기를 제안하면서 진리는 서로 모순되는 지양불가능한 양면적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볼노오(/1994)가 말하는 이른바 ‘진리의 양면’으로서, 철학적 논의에서 낙관주의와 염세주의의 대비로서 자주 등장했음을 이렇게 지적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입장, 즉 낙천주의적 세계관과 염세주의적 세계관이 서로 대립하여 있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후자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잔인한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전자는 위로하고 담지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양자는 서로가 모순된다. 사람은 이 양자 사이에서 어느 한 방식으로든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양자의 ‘진리’ 중 어떤 것이 참 진리인가? 진리의 두 측면 중 어느 것이 옳은 측면인가?(p.133)
이렇게 질문을 제기해 놓고 볼노오는 자신의 해답을 그 양자의 긴장에서 찾는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냉혹하고 잔인한 진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하고 담지하는 진리, 다시 말하면 의미를 실현하는 세계의 진리가 존재한다. 이처럼 진리의 얼굴은 영원히 불안정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최종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의 진리에 안주하면 그 진리는 비진리로 변종되어 버린다. 또한 혼란 속에서 어떤 의미도 주지 않는 진리 역시 무의미하다. 이러한 양면적인 얼굴로서의 지양될 수 없는 모순은 살아 있는 진리가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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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며, 이에 반해 모순을 여러 가지 측면에 따라서 결정하거나 혹은 그러한 모순을 적당히 화해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이미 비진리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진리는 그것이 가진 모순을 끊임없이 지속시켜 나가야만 하는 숙명을 떠맡는다.
이런 볼노오의 관점이 갖는 새로움은 그것을 체험하는 인간의 편에서 진리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볼노오는 선이해와 새로운 것의 경험이 서로 물고 물리는 순환관계에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진리의 위치를 찾는다. 이는 진리를 체험하는 방식을 절묘하게 지적한 것으로 본다. 진리는 인지적 체험의 부단한 진전의 운동과 같은 형태로 체험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안주로서 체험되며, 다른 한편으로 그 안주의 올가미를 박차고 나오는 불신과 초탈의 것으로 체험된다. 우리의 진리탐구는 언제나 그 중간지대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 모든 회의를 추구하고 인간정신의 모든 진술을 진지성에 의해서 묻고자하고, 다른 한편으로 현상의 풍부성에 몰두하여 그러한 현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 양면성은 인간의 삶 속에 있기 때문에 어느 것도 버릴 수 없다.
진리의 탐구과정에서 자신의 지식에 대한 회의와 풍부성에 대한 몰두가 서로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진리를 체험하며,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경험을 주는 관념들을 선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각 단계에서 더 많은 풍부성을 가진 경험을 선택하면서 진리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그 풍부성은 인간 자신이 성장하는 가운데 힘찬 욕구와 능력을 개발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산출하는 생산에 관계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명제가 될 수도 있고, 이념으로 될 수도 있다.
이런 입장은 문제가 되고 있는 대응설적인 진리의 개념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성주의적 입장과 거의 같은 맥락에 넣을 수 있다. 우리는 사실을 직접 만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내용이 외부적인 실재를 직접적으로 표상한다는 의미의 지식을 거부하였다. 인지내용은 언제나 구성된 것이며, 그것은 실재의 직접적인 그림이 아니다. 이처럼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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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실재론을 거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원했던 방식까지도 거부하는 셈이다. 실재론은 인지내용이 실재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의해서 그것의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선행된 실재를 직접 대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 밖의 사실은 우리의 인식내용에 대해 계속 압력을 넣거나 저항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체를 직접 대면하거나 기술할 수는 없고, 우리의 내면상태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압력과 저항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인식내용을 바꾸는 가운데 이전보다 더 풍부한 느낌을 주는 지식에 접하게 된다. 즉 하나의 실재에 대하여 두 가지 이상의 선택적인 경험의 거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식체계와 세계 사이의 일대일 비교나 대응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려는 비현실적인 접근을 포기하고, 대신 그 세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서로 다른 인식들을 비교함으로써 새롭게 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실재에 대하여 선택의 여지가 있는 대안적 지식을 확보함으로써 그들이 주는 경험의 풍부성에 비추어 지식들의 상대적인 우열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이런 비유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건물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오직 창을 통해서 외부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창문의 유리를 통해서 여과된 세계이다. 목하 우리의 인식론적인 문제는 그 창문이 진정 실재의 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가의 여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에 있다. 건물 안에만 갇혀 있는 그로서는 외부의 세계와 유리창의 관계를 직접 알아 볼 도리가 없다. 이 한계를 벗어나는 가용한 방법은 그 유리창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와 유리창의 비교(이것은 불가능하다)보다는 유리창과 유리창들의 비교에 의해서 그 중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좋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기준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 여기에 금강산을 직접 오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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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두 개의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정하자. 그는 금강산에 직접 가보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것을 바라보는 두 개의 망원경 사이의 우열을 판정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멀리서 두 망원경으로 금강산을 번갈아 바라봄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들의 대비에 의해서 그 중 어떤 것이 그에게 이전에 보이지 않거나 혹은 의문시되었던 것 혹은 체험하지 못한 것을 해결해 준다면, 즉 더 새로운 경험내용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서 더 훌륭한 망원경이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다.
특정한 지식의 품위 자체는 얼마만큼의 오류와 진리성을 가진 것으로서 현재의 품위는 형식논리로 볼 때 진리의 한쪽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과 다른 품위의 대비가 없이는 그 부분성을 충분하게 드러낼 수가 없다. 평가는 항상 비교를 하는 작업이다. 좀더 조작적인 수준에서 문제를 던진다면 “이 지식은 타당한 것이냐 혹은 타당한 것이 아니냐?”라거나 혹은 “이 지식은 진인가 혹은 위인가?”라는 형식은 해답의 작업을 불가능하게 한다. 보다 현실적인 질문은 어떤 주어진 지식들을 놓고 “이 지식은 다른 가능한 대안과 비교하여 더 타당한 것인가?”라는 형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하나의 지식체계에 대한 반박이나 비평은 단독으로 내부에서 발견되기가 어렵다. 그것은 마치 명료한 빛 아래에서 밝음을 판단하기 어렵고 깜깜한 밤에 어둠을 판단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밝음과 어둠에 대한 판단은 밝음과 어둠의 어느 한편에서 판단하기보다는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이른 새벽이나 해질 무렵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진정한 체험은 오류에서 진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한 체계의 진위는 그 자체의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방안과 대조함으로써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각 시대의 지식은 당분간이나마 정합설적인 맥락에서 진리의 위치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부정의 요소에 의해서 다음 단계의 것으로 발전하였다. 어떤 지식체계 T1이 성립되고, 그것을 부정할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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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순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그 모순을 지양하는 새로운 지식체계 T2가 형성된다는 것이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의 발전이다. 이 때 비교되는 지식체계는 시점 T1에서의 것과 시점 T2의 것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인식체계의 비교에서 실재에 대해 더 풍부한 정보내용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개념은 툴민(S. Toulmin, 1961)의 안경을 썼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경우의 대비와, 라카토스(L. Lakatos, 1970)의 연구 프로그램의 대비의 개념에 잘 반영되어 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진리는 완결되고 폐쇄된 체계의 미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명증성의 토대 위에 더 나은 지식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참된 것으로서의 진리 자체가 아니라, 참인 것으로 확증하는 발생적 작용과 과정이다. 진리는 직접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허위와 오류를 매개로 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허위나 오류는 진리추구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한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는 그 이론과 대립하는 대안적 이론의 도움을 얻어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 1975)는 반박에 의해서 전통적 이론의 신용이 이미 떨어졌을 때에만 이것을 대신할 다른 이론이 등장한다는 포퍼의 관점은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이론이 잘못 되어서 부정되는 법은 없고, 그것보다 더 나은 이론이 출현하여 그것과 대비됨으로써 비로소 부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후향운동(backward movement)’이라는 특수한 말로 지칭한다(p.171).
방법적 체계에 있어서 그때그때의 진리의 타당성은 진리의 기초가 되는 공리의 타당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정합설의 취지이다. 그러나 매 단계의 진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합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그것을 매 단계에서 성취한 최종적인 결과물로 본다면 엄청난 지적인 혼란이 일어난다. 진리를 발생적 운동과 이념으로 파악하려는 우리의 인식론적 입장은 그런 혼란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지식의 발전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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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 단계의 수준이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부정을 거쳐 또 한 단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이처럼 진리를 단계의 상승적인 과정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각 단계의 수직적인 위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장 활력 있고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한 단계의 지식을 이전의 낮은 단계의 것과 비교하면 진리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반면에 그 인식내용을 그 후에 획득한 높은 수준의 것과 대비하면 오류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모든 지식의 타당성은 항상 진리로 향하는 도상에서 검증받는다. 더 높은 수준의 진리성을 가진 이론들이 제안되고 그것들이 앞서의 것과 비교하여 더 높은 수준의 것임이 입증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계속된다. 이처럼 끝없이 더 새롭고 심원하고 일반적인 문제들을 발견해 나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잠정적인 해답들을 계속 갱신하고 더욱 더 엄격한 검사에 회부한다. 이것이 교육적 인식론이 택할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이 진리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에 의해서 이전의 것과 대조된다. 하나는 최종의 진리를 가정하지 않고 다만 재해석이 등장할 때마다 인식주체가 갖는 경험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허위의 신념에서 진리에로 옮겨가는 방향에서 생겨난다. 이 점에서 진리의 문제는 특정한 결과로서 해결되기 어렵다. 다른 하나의 특징은 어떤 수준의 지식이건 그것은 진리탐구의 길과 그 과정상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오류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얼마만큼의 진리와 오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보다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오류일지 모르나 그보다 수준이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은 진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각 개인이 기존의 지식에서 얼마만큼의 진리를 발견하고 얼마만큼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 때문에 학문의 역사에서 나타난 모든 수준의 지식이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전적으로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없는 지식은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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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인식주체의 변형에 의한 진리의 확인
진리는 그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무관하게 규정될 수 없다. 우리가 학문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진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진리는 아마도 우리가 이를 자각하건 자각하지 않건 간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시인들이건 현대인이건 진리가 있는 곳에서 살아 왔고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경험함이 없는 진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설사 진리를 특정한 인식주체와 무관하게 외부적으로 규명해 버리는 수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을 그 주체의 입장에서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각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객관적인 진리라는 개념에서 진리의 주관적 체험에 대한 관심의 전환은 데카르트와 후설의 계열,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의 계열을 거치는 동안 점차 확보되어 나왔다. 이들은 인식하는 자의 관점과 단절된 진리가 존재한다는 객관주의적인 지식관을 부인한다. 데카르트는 명석하고 판명한 생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방법서설(/1983)>에서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아주 판명하게 마음속에 품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참되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pp.30-31)”라고 언명한다. 후설은 순수내면성의 세계를 절대적 진리의 근원적 가능근거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는 그 절대적인 주체성의 인간적인 제한을 인정함으로써 데카르트와 후설의 견해를 보충하였다. 말하자면 전자는 후자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범위 내에서 진리확인의 주관적 요소를 수용하고자 한 것이다.
진리가 우리와 외부세계의 대응성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법칙을 알아가는 우리 자신의 체험적 변화의 문제로 바뀌고 있는 전환점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이다. 그 주제가 ‘주체성이 진리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후서(/1941)>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내면성이다. 객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진리는 개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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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점유화(personal appropriation)에 있다(p.71)”고 선언한다. 그의 말대로 진리는 우리가 체험해야 할 가치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것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인식되고 확인되지 않는 한 그 가치는 우리에게 실현된 것이 아니다. 그는 ‘당사자적 진리(truth for me)’라는 개념으로 실존하는 단독자가 그의 주체적 사고를 통하여 자신의 실존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진리를 실현하는 일을 하나의 과제로 제시한다.
이 입장은 진리를 수도계적 가치의 하나로 보려는 우리의 관점과 같은 맥락에 있다. 진실로 진리가 인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치라면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진실로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기준만이 진리의 기준이다. 그런데 진리가 주관성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진리체험이 단지 임의적인 것으로 그 취지가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그를 가장 폭넓게 연구한 바 있는 테일러(M. Taylor, 1975)는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을 종전의 객관적 진리의 개념이 지니고 있는 무의미성에 대한 해독이라는 입장에서 해명한다.
진리가 객관적으로 추구된다고 할 때 관심은 그 ‘무엇’이나 혹은 탐구의 대상에 있다. 그 목적은 하나의 지식, 즉 사고(관념)와 탐구를 수행하는 특수한 인식자와는 독립된 존재(대상) 간의 대응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 주관성이나 흥미는 이런 의도를 오직 방해할 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진리에 대한 접근을 비판한다. 우선, 객관적 진리의 이념에는 직접적으로 하나의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객관적 접근은 주관성이 될 수 있는 한 배제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이상은 대상이 정확하게 알려질 수 있도록 완전히 제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제거됨을 의미하고, 따라서 인지과정의 종말을 의미한다(pp.39-40).
위의 해석은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을 목하 우리의 인식론적인 맥락에 정확하게 위치시켜 놓고 있다. 인식활동은 대상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사고를 한다는 것은 주관의 개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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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 주관을 배제하여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사고 자체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당장 모순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런 모순되고 부정적인 태도를 버려야만 하며, 이런 입장은 근래에 대응설이 해체되는 논리와 전적으로 부합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주관적 판단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논점과 일치한다. 그는 이런 입장을 레싱의 말을 끌어들여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그가 밝히려고 한 것은 절대적인 진리는 인간으로서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것에의 접근은 가능하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의미의 진리는 그 끝에서 완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접근하는 과정의 경험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의 발전에서 찾아진다. 즉 하나의 사고가 다른 사고의 바탕이 되고 그들의 대비가 곧 진리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의 사고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사고를 발전시키면서 우리들 자신의 가능성의 실현과 더불어 사후적으로 그 효과를 확인해 나간다. 이 점도 테일러(1975)에 의해서 다시 이렇게 재해석된다.
따라서 진리는 이제 그 시작이 절대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하나의 접근(Approximeren)이 된다(p.41).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진리는 즉 우리가 부단히 정진하는 정열인 것이다.
교육적 인식론은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는 진리의 규정이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택한다. 기존의 어떤 객관적 기준에 일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인식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진리는 어떻든 간에 인식주체의 체험적인 내증에 의해서 확인되어야 한다. 그것은 내적인 체험이므로 논증이나 객관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다. 객관적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의문일 뿐만 아니라,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우리의 해석에 의해서 결정된다. 진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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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리를 마치 외부의 것인 양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최근에 밝혀진 인식론적 관점에서 얻어낼 수 있다.
우리는 실재가 우리의 구성적 작업과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진리의 대응설은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한다. 그것은 진리의 출현이 인식자 자신의 정화와 변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지가 실재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한 이상 그 기대를 전제한 타당성 검증의 원리 역시 더 이상 현실적인 것이 못된다. 그 하나의 대안은 개선을 꾀하기 이전의 인식과 개선을 꾀한 이후의 인식을 대비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인식론은 이 사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앞에서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해답은 경험의 흐름 내에서 여러 겹의 실재를 구성하고 그것들 간의 비교우위를 확인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검증원리는 혹자에게 이전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참으로 크다. 지금까지 어떤 특정대상에 대한 이론은 각각 그에 대응하는 실재의 자료를 얻고 그들 간의 대응성을 따져 자신들의 이론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기실 그 자료는 어떻든 이미 그 이론에 의해서 여과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성은 그 이론이 몸담고 있는 패러다임 내에서 거부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론적 대안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많은 경험내용을 가지고 있느냐를 비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거기에서 우열의 판단이 결정되면,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선택된 이론은 또 다른 경합하는 이론과의 비교에 의해서 재평가받도록 되어 있다.
추구로서의 진리의 체험은 품위의 개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하나 이상의 대조되는 이론을 습득해야만 한다. 즉 진리의 체험은 자신의 변화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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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품위의 개선은 교육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 점에서 진리의 입증은 그 입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교육적 노력을 전제한다. 여기에는 지금까지의 안전성에 대한 포기와 새롭게 거듭나려는 결단과 응분의 고통이 동반된다. 진리에는 불노오의 지적대로 모든 기만을 폭로하는 혹독한 냉혹함이 있다. 이런 진리의 고통을 외면하고 값싼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혹에 저항하며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냉혹함이 필요하다. 진리는 우리의 추측을 항시 수정하도록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편안하게 느끼고 있던 환상을 잔인할 정도로 파괴한다.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사실의 저항이다.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언제나 새롭게 접근하도록 요구한다.
그것이 우리가 앞서 지적한 수도계의 특징이고 하나의 수도계로서의 학문이 위치할 곳이다. 수도계에서 품위 혹은 지식에 대한 평가는 ‘진리’ 혹은 ‘허위’라는 두 가지 범주에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에서 계속적으로 대안들이 나올 때마다 평가가 계속된다. 이 때문에 진리는 말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없고, 만약 전달이라는 말을 쓴다면 전달받는 사람이 점진적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변형을 거치면서 그들 나름의 진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은 언제나 그 과정 중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변경하고 형성하는 경로의 하나로 존재한다. 교육은 진리의 절대적 궁극성을 부정한다. 다만 지식의 상대적 우열을 인정하고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이동하는 활동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우리의 입장은 교화의 철학들을 검토하면서 이미 충분히 시사되었다. 비록 그들에게서 교육에 대한 체계적인 관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관된 합의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식론은 우리 자신의 변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중 몇 가지 이론만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헤겔에 따르면 진리는 실체일 뿐만 아니라 인식 주관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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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된다. 그에 의하면 어떠한 진리도 그것이 특정한 시대에 몸담고 있는 주체에 의해 창조되고 이해된 것에 있어서만 진리라는 사실로 인정받아야 한다. 인식 주관과 독립된 물질적 또는 정신적 실체로서의 진리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진리는 살아 있고 성장하며 그리고 변화한다. 곧 진리는 인간 정신의 역사 속에서 모든 철학을 통하여 수많은 세기를 거쳐 변증법적으로 전개된 바와 같은 그러한 인간정신이다. 말하자면 진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인식주체가 기나긴 여정 속에서 변화해 온 과정의 각 단계마다 입증된다. 학문의 전 역사가 각 단계의 발전을 통과했듯이 개인의 정신적 발전 역시 그것과 평행관계가 있다는 이념이 헤겔이 밝히고자 한 점이다.
경험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헤겔의 노선을 추구한 듀이는 <철학의 재건(1948)>에서 이전의 철학자들이 써 왔던 고정적인 진리라는 개념을 이렇게 비판한다.
옛 개념은 실제적으로 진리를 권위적인 독단과 동일시하는 일을 하였다. 주로 서열을 존중하고, 성장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변화를 불안한 것으로 아는 사회는 그 사회가 의존해야 할 일단의 고정되고 우월한 진리들을 불가피하게 찾는다. 그 사회를 뒤돌아보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진리의 원천과 승인을 찾는다. 그 사회는 그 어떤 선행한, 이전의(prior), 원래의(original), 선험적인(a priori) 것으로 후퇴하여 의존하면서 확신을 얻으려고 한다. 종국적인 것을 향하여, 결과를 향하여 앞을 내다본다는 생각은 불안과 공포를 일으킨다. 그런 생각은 이미 존재해 있는 고정적 진리(fixed Truth)라는 관념에 근거한 안도감을 동요시킨다. 그 생각은 탐색과 불요불굴한 관찰과 신중한 가설형성과 철저한 검증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p.159).
듀이는 불안감 때문에 고정된 과거의 어느 것으로 뒤돌아 가는 진리의 개념을 이제 그 반대의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에 있어서 진리는 퇴행적인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것이다. 진리는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를 옳은 방향으로 진실하게 인도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미래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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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은 행로의 방향을 확인시켜 주는 기준으로서 진리가 더욱 중요하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탐구의 어느 단계에서나 경험이 재구성되면서 확인된다. 이 때문에 그는 진리의 본질을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나 명사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서 실감하는 동적 과정을 수식하는 부사로서의 역할에서 찾고자 한다. 즉 “우리를 진실하게 인도해 주는 것은 진실하다. 부사인 진실하게(truly)’가 형용사인 ‘진실한(true)’ 혹은 명사인 ‘진리(truth)’보다 더 근본적이다(p.148)”고 하였는데, 이렇게 듀이가 진리의 의미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지향하는 발전방향으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지표로 전환시키려고 할 때 흔히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연상되는 실용주의적인 의미는 사라진다. 여기서 더욱 참된 것은 개인적인 만족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참된 반응이다. 사실 그는 이런 특수한 맥락에서 진리를 어떤 외재적인 것에 대한 효용성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판한다.
진리를 효용성으로 정의할 때 흔히 순수하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유용성, 특수한 개인이 마음에 두고 있는 효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진리를 사적인 야심과 호사함의 하찮은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진리에 대한 개념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개념이 정신이 바로 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인즉, 효용성으로서의 진리는 관념이나 이론이 주장하는 바로 그 경험의 재구성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p.157).
앞에서 진리의 실용설이 갖는 문제를 지적할 때 실용에 대한 의미에 있어서 내재적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듀이의 이 발언은 바로 그 대목에 해당한다. 듀이는 진리의 쓰임새를 말하면서 그 쓰임새가 경험의 재구성을 위한 수단의 의미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경험의 재구성은 경험 자체의 발전적 변형을 의미하고, 그것은 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것 자체를 위한 내재적인 목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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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와 가다머도 그들의 해석학에서 종전의 진리개념을 경험의 발전과 관련하여 재정의하는 방식을 취했다. 하이데거의 비은폐에로의 방향전환은 기념비적인 것으로서 존재자에 대한 방법적인 지식의 획득이라는 종전의 차원보다는 더욱 근원적인 경험의 차원을 열어 놓았다. 인식하는 자의 관점과 단절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객관 세계를 직접적으로 대면할 방도가 없다. 그런 것을 전제한 진리규명은 이미 현실적인 것이 못된다. 그 객관 세계에 대한 이해는 불가불 그것에 대한 인간적인 체험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제 그 체험의 수준이 바로 진리의 개념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열쇠로 등장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알레테이아(aletheia)’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그 전까지는 은폐되어 왔던 세계, 삶, 텍스트 등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을 말한다. 진리란 이제 은폐된 것의 드러남으로 정의된다.
이 발상은 한마디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밝음의 개념을 복권시킨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즉 지혜는 이 세상 너머에 있다. 구체적인 대상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계,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의 노예가 되어버린 세계, 그 너머의 것을 보는 데서 비로소 지혜가 생겨난다. 좀더 높은 본질, 또는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지각하는 사물 속에 부분적으로 들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내적 진리추구과정을 통해서 이데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국가(/1997)>에서 암시했던 것처럼 인식자 자신이 존재의 밝음 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동굴로부터 빛으로 기어오르는 일이 더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알레테이아는 직관적인 진실파악의 순간 또는 내적 베일을 벗기는 순간이다. 이것은 감각적 지각의 모든 형태를 초월하는 이성을 행사함으로써 영혼이 새겨지는 그런 순간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취지도 바로 이런 진리가 그의 제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있었다.
실재 세계의 어떤 사태에 대응하는 명제로 보는 실증주의적인 진리개념과 대조를 이루는 하이데거의 진리개념은 가다머에 의해서 지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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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으로서의 진리의 가능성으로 더욱 발전되었다. 가다머(/1976)는 지평의 융합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지평은 어떤 지점으로부터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시야의 범위(p.269).” 지평은 움직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변화한다. 그는 이해는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변화에 있음을 강조한다. 인식활동에 있어서 서로의 발전적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가다머는 또한 헤겔의 공적을 인정했다. 그는 경험의 진리는 항상 진리는 항상 새로운 경험과의 연관을 포함한다고 보고, 그런 범위 안에서 해석학과 변증법을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이 융합은 원저자나 원전의 지평과 그들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자들의 지평과의 융합이다. 그 어느 것이건 개별적인 지평들은 항상 부분적이기 마련이다. 우리의 역사를 정지시킨다거나 한 문화적 현상의 최초의 의미를 복원해 낸다든가 하는 일들은 모두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진리는 과거 ‘그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전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것이고, 원전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는 항상 더 나은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가다머(/1976)는 하이데거의 취지를 이어받아 재인식(recogni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재인식을 단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 즉 우리가 친숙한 것을 그대로 다시 인식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의 가장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재인식의 즐거움은 차라리 이미 알려진 것 이상의 뭔가를 알게 되는 데 있다. 재인식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조명을 통하는 것처럼 그것을 조건화시키고 있는 모든 우연성과 다양한 상황들로부터 벗어나서 새롭게 출현하고 그 본질이 파악된다(p.102).
무언가 그 세계 혹은 대상의 본질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충실하고도 새롭게 인식되는 경험이 진리에 부합된다. 여기서 가다머는 변증법적으로 확보된 더 넓은 이해공간이라는 생각과 은폐된 것의 드러냄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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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진리개념을 조화롭게 연관시키고 있다. 타자와의 변증법적 교섭이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진리를 향한 운동을 촉진한다.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나와 너를 모두 새롭게 만드는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는 이처럼 ‘지평의 융합’을 통해서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각자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진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모든 정신현상과 마찬가지로 지식은 단편적인 정보들의 가산적 총화가 아니다. 우리는 지식을 하나의 구조로 파악하였고, 지식의 변화는 바로 그런 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 정합설의 맥락에서 설명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합성에서 다른 하나의 정합성에로의 진전을 의미한다. 진리의 체험은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정신의 형태변화와 동시적 사건이다. 그것은 참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 거짓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 잠정적인 것으로 역전되는 과정이다. 실존론적으로 볼 때 진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존재의 고양된 순간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진리의 검증은 그 검증에 참여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점이다. 어떤 관념의 진리성은 그 관념을 구성하는 인식주체의 자각에 의해서 확인된다. 인간의 사고체계가 수준상의 진보를 이루는 가운데 상이한 두 시점에서의 인식내용을 서로 대비하여 비교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체험의 흐름은 우리 안에서 그 외경심에서 터져 나오는 ‘오!’라는 부르짖음이나 ‘아하!’라는 외침으로 경험된다. 이 경험을 일찍이 윌리엄 제임스(W. James, 1907)는 놀랍게도 ‘되돌아 오는 빛(backward light)’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우리가 오늘 얻을 수 있는 진리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내일에는 그것을 허위라고 부를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톨레미의 천문학, 유클리드 공간,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 스콜라적 형이상학은 수세기 동안 당분간의 방편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그런 한계를 넘어서서 이들을 오직 상대적으로 참되거나 혹은 그런 경험의 울타리 내에서 참된 것으로 부른다. ‘절대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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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면’, 그들은 허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들의 한계가 우연적인 것이며 현재의 학자들에게서 그랬듯이 과거의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있었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이 과거의 시제를 사용하여 회고적인 판단들에 이를 때, 판단들이 나타낸 것은 어떤 과거의 사상가들도 설령 그 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하다라도 참된 것이었다. 한 덴마크의 사상가 [각주 6: 이것은 추측건대 키에르케고르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가 말했듯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되돌아 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재는 세계의 이전의 과정에 대해서 되돌아 보는 빛을 던진다. 그것들은 그들 안에 있는 행위자들에게 진리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이야기의 내용을 나중에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pp.26-27).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확인된다. 제임스가 말하는 ‘되돌아 보는 빛’은 이전에 진리로 생각되었던 것이 허위로 회고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폴라니(1959)는 인식상의 전환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의미했을 때, 즉 우리의 이해를 재구성하거나 그것이 지칭하는 사실들과 더불어 하나의 진술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그 손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 더 나은 지적인 통제를 찾는 암묵적인 힘을 행사한다. 우리는 다소간 문제가 있다고 느끼던 상태에서 그것보다는 좀더 만족스러운 상태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떠한 지식을 참된 것이라고 판결하게 되는 경로에 해당한다(p.26).
우리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진리체험은 각각의 수준에서 그 품위상의 상승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각각의 품위는 다소간 결핍과 풍요, 과거와 미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갖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개인은 한동안 그가 가진 품위가 허용하는 현상의 풍부성에 몰두하여 세상에 대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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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해를 궁극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구활동을 요청한다. 한 품위는 다음의 품의에 비추어 항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상구활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 경험적 조직의 양태에 따라 이전의 품위와 이후의 품위 간에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이나 깊이에 차이가 일어난다. 인식주체로서 우리는 그 차이를 단서로 자신의 인식상의 성숙과 발전을 스스로 담지하고 깨닫게 된다. 그것은 결코 절대적인 의미의 진리는 아니지만 그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추구의 의미로서의 소문자의 진리에 대한 체험이다. 이처럼 각 품위는 교육의 진행과정에서 아래의 품위와의 비교에 의해서 항상 그 정당성이 입증된다. 이 부분이 곧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자증’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타증’은 그 자증의 내용과 과정을 타인을 통해서 재생하는 것이다.
2.2.4. 내재적 가치기준의 성숙
인식체계의 성숙은 불가피하게 감정과 태도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를 동반한다. 이 점에서 교육적 인식론은 학문계를 단지 지성과 관련짓는 철학적 인식론과는 다른 궤를 달린다. 철학자들은 감정을 지성의 방해요소로 가정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물론 지식을 오직 감정에 호소하여 획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감정이 없이는 어떠한 진리도 부화되지 않는다. 감정의 요소를 배제한 학문론은 후자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지식의 발전에는 감정이 크게 작용하며, 그것은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오류의 자각에 따른 갈등과 좌절감, 모순과의 조우, 더 나은 길을 모색하는 열정, 동기화와 가치의식, 그리고 해답을 얻었을 때의 순간적인 감동, 흥분, 희열 등의 감정과 정조들이 우리 자신의 발전방향을 향도하고 학문활동을 추진하는 중요한 동력의 기능을 한다.
자연과학과 같은 가장 엄격한 학문에 있어서도 감동이나 감정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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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태동한 경우는 드물다. 자신의 발견에 흥분하지 않은 천재적인 학자가 있었는가? 카프라(J. Capra, /1989)가 심리학자 랭(R. Laing)과 인터뷰하면서 감지한 다음과 같은 감정적인 반응은 일류급 학자들에게서 늘 발견된다.
요점을 강조할 때면 으레 열변을 토했고, 말을 하면서도 혐오, 질책, 경멸 어린 냉소, 매력, 미학적 즐거움, 아련하고 미묘한 모든 감정들이 그의 얼굴과 몸짓으로 남김없이 연출되었다(p.133).
경험의 과정 자체가 이전의 지식체계로는 설명할 수 새로운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패와 좌절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해명하려는 강한 열망과 애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적인 반성은 맹목적으로 발산할 위험이 있는 욕구나 충동에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목하 논의하고 있는 진리체험도 감정과 유리될 수 없다. 학문은 마치 감정과 유리된 것이며, 감정이 포함된 학문은 자의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역사 속에 실재했던 학자들의 생애 속에는 진리로 인한 희열을 배제할 수 없었다. 사실상 우리가 말하는 가치는 감정을 배제하고 정의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론을 구성했을 때 학자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바로 그것 때문에 학문을 지속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체험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후천적으로 연마된 감정이다.
예견적인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 그 결과를 얻음으로써 진리는 확인된다. 기대된 결과의 확인은 우리에게 우선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그런 결과와 만족은 어떤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떠나 그 자체의 내재성을 갖는다. 진리탐구는 용도보다는 전인적 인격완성과 관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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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지식은 바로 그런 맥락의 인간적인 요소라고 볼 때 그것에 대한 추구의 의미가 한층 더 분명해진다. 이 점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진리에 대한 충족감을 실용주의적인 필요의 충족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식의 실용적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학문적 탐구의 목적은 다른 것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될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듀이가 진리를 만족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인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결과 느끼는 만족이며, 그 유용성은 바로 경험의 재구성에 공헌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외재적 조건이나 다른 기준도 개재되어 있지 않다. 듀이(1934)는 하나의 경험이 완성되는 순간 고양된 충만감과 희열감을 인정하면서, “전체적으로 통합된 경험의 내재적 가치에 매료되고 그로부터 보상받지 못한다면 어떤 사상가도 자신의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p.44)”고까지 주장한다. 인식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이런 감정적인 요소는 교육적인 인식론에 의해서 복권될 필요가 있다. 듀이는 인간 자신이 성장하는 가운데 계속 새로운 욕구, 흥미, 관심, 능력을 개발하여 인간적 가능성을 부단하게 생산해 내는 것으로 진리를 규정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말은 그와 관련하여 흔히 오해되는 자연적인 행복 혹은 쾌락과 대조된다. 실존적 결핍을 메우는 과정의 결과로서 오는 이런 강렬한 행복과 만족은 결핍을 메우려는 노력이 없이 단지 주어진 것에서 만족을 느낄 뿐인 ‘즐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듀이(1934)를 이해할 때 그 점을 놓친다.
쾌락은 우연한 접촉이나 자극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으며, 그러한 쾌락도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는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기쁨은 그와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상황과 전존재를 조화시킴으로써 마침내 존재의 심연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오는 것이다(p.23).
진리를 경험한다는 말을 심리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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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스럽다’, ‘기분이 좋다’, 혹은 여타의 심리적인 조건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그런 속단을 내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심리적인 사실이라고 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새롭게 정립된 듀이의 가치론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Tiles, 1992). 그에게 있어서 첫째, 가치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한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새롭게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둘째,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미리 처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사태의 발생과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되고 발전한다. 그것은 개인들의 일시적인 변덕 이상의 방향성을 갖는다. 이것은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는 아픔과 노력을 동반하는 방향감각의 성숙을 의미한다.
우리가 결국 성장한다는 것은 많은 경험을 통해서 가치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고급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대단하게 보였던 것이 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거나 혹은 이전에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 이제 비합리적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학문에서는 그런 가치관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고는 어떤 지식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할 수 없다.
진리라고 하는 것도 학문에서 경험하는 주관적 경험의 질을 나타낸다. 진리체험은 점차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탐색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체험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 과정에서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환희와 같은 유쾌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내재적 동기의 연구분야에서 밝혀진 ‘흐름(flow)’이란 경험의 한 유형에 비유될 수도 있다. 근래에 칙첸미할리(M. Csikszentmihaly & C. Csikszentmihaly, 1988)는 화가가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고 그 일을 끝내자마자 곧 다시 시작하는 흥미있는 현상을 추궁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더 복잡한 도전이 기다라고 있는 일에는 그 자체의 가치와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처럼 경험이 점차 성장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영역에는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떠나서 그 활동 자체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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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요가 하는 사람, 아마추어 체육인, 장기를 두는 장인, 암벽을 타는 등산가, 무용가, 화가, 작곡가 등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었다. 이는 그 흐름의 경험이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적 가치의 추구와 관련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수도계적 가치의 하나로서 진리체험을 논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그것이 바로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의 향상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진리가치에 대한 표준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탐구의 연속적 과정에서 재평가되고 개선된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기준이 소망되고, 그것을 통해 해결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실제로 소망스러운 것이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제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에 적용된 가치기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그 문제를 풀어낸 지식을 토대로 하는 가치기준이 유효하게 된다. 여기에 어떤 최종적인 것이나 고정된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학문의 세계에서의 각 품위는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학문적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사실은 듀이의 논의에서도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는 궁극적인 의미의 진리를 포기하고 완성되고 성숙하며, 세련되는 지속적인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 경험의 질적인 변화가 그가 말한 성장의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진리는 성장의 매 단계마다 새롭게 갱신되는 것이다. 듀이(1948)가 말했듯이 “옛 진리는 그것이 새 진리의 탐색에 도움이 되는 데에 주된 가치가 있다(p.34).” 이처럼 진리의 기준도 그리고 가치관도 끊임없이 변한다. 또한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의해서 구성되고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발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무지와 오류를 토대로 무엇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을 해 가는 가운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진정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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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흥미, 소망, 관심 혹은 바람직함은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발전적 가치와는 무관하다. 이 말은 각 품위의 변화는 흥미, 소망, 관심, 호기심 등의 정의적인 요인들의 변화를 동반함을 의미한다.
이런 관심과 호기심의 바람직성에 대한 판단기준의 변화는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비고츠키(L. Vygotsky, 1978)가 근접발달 영역을 놀이와 관련시켜 논의하는 자리에서 했던 다음의 언급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아직 우리의 이론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아동의 발달을 그의 지적인 기능의 발달로 기술한다. 개개의 아동이 높거나 낮은 수준의 지적 발달의 특징을 가지고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움직이는 하나의 이론가로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 아동의 필요나 그가 행위하도록 하는 데 효과적인 유인가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그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에로의 진전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진전은 동기, 경향성, 그리고 유인가에 있어서 두드러진 변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아의 흥미를 사로잡았던 것들이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이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끌 수 없게 된다(p.92).
흥미나 호기심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적이고 고립된 특성이 아니다. 현존하는 품위로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이 생동하여 사물을 변화시키며, 이 사물의 변화가 다른 사물들과 수많은 관련을 맺게 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호기심이다. 호기심이라는 것은 이런 관련을 좀더 두드러지게 파악하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때 어떤 대상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가 그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인지구조를 얻게 되는 순간부터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는다. 위에서 비고츠키는 호기심이 아동의 발달단계마다 전환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학문이 품위의 위계를 타고 오름에 따라 인식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그로부터 얻어진 지식에 대한 만족과 평가기준도 아울러 발전한다.
이 점을 과학의 역사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라우든(L. Laudan,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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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이미 검토한 바 있다. 그는 과학사에서 서로 논쟁하거나 대립하는 학설이 하나의 합의나 일치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서로 선호하는 평가기준의 차이에 있음을 주목하였다. 우리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그것은 발전의 수준이 다른 선진과 후진이 서로 자신의 목표와 평가기준을 상대에게 적용하는 사태인 것이다. 그 결과는 갈등이고 대립이다. 그러나 만약 논쟁하는 학자들이 이러한 사태의 원인을 이해하고, 덜 세련된 기준에서 더 세련된 기준으로의 이행을 시도한다면 그들은 좀더 용이하게 하나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는 듀이의 주장대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가치관의 변화도 단계의 존중이라는 원칙에 부응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교육적 인식론이 택한 새로운 진리의 개념을 검토하였다. 그것을 결론 삼아 요약의 형식으로 정리해 보자.
첫째, 진리는 철학의 어원적 의미가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인 것처럼 추구의 대상이다. 진리의 탐구는 언제나 중간자의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항연(/1987)>에서는 지식을 완전한 소유한 상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지상태도 아닌 그런 상황에서 지식을 사랑하는 상태로서 에로스를 찬양한다. 에로스는 원래 풍요의 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 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서 진리를 출산하려는 사람의 욕망을 나타내는 개념이 되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관심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것이냐에 있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자족하거나 혹은 퇴행하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아무리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오류가능성을 우려하고 더 나은 것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바로 앞서의 사람보다 진리의 기준에 더 충실하게 생활하는 사람이다.
둘째, 진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체험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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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절대적 진리는 우리가 부단히 획득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그 실현이 좌절되는 단순한 이념 또는 근사치의 의미가 있는 이상으로 계속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종적인 진리를 알거나 소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본래적인 자기존재가 고조된 순간에 일시적으로 진리로 향하는 강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두 가지 지식들의 차이를 대비하여 더욱 풍부한 경험내용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진리의 규명은 인식주체가 시차를 두고 새로운 인식내용을 획득함으로써 이전의 인식내용에 대한 회고와 새롭게 얻어낸 인식내용을 비교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신념체계에 대한 확신은 그것 자체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전의 신념체계와의 대비에서 나온다.
셋째, 학문적인 지식은 언제나 발전의 도상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최종적인 진리를 발견하기보다는 그것에 접근하는 과정적 경험을 중시한다면, 그리고 그런 활동에서 진리를 찾는 보람을 얻는다면 학문은 유한한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언제나 그리고 어느 수준에서나 보람을 줄 수 있는 세계이다. 진리체험은 일회에 그치지 않고 지식의 성장과정에서 매 단계마다 반복된다. 그리고 상구가 끝난 곳에서 계속 시작한다. 그런 반전의 역사가 바로 학문적 탐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진리는 고정된 결과에 의해서 판단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계통발생적으로 희랍의 시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체발생적으로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반복해서 체험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는 차이는 항상 있지만 그 추구로서의 경험 자체는 동일하다. 이것이 근원적인 진리에 도달하려는 희망으로 독단의 수렁에 빠지는 위험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계속 추구하면서 그 과정적 경험을 가치로운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넷째, 다양한 개체들의 삶의 조건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인식이 병존할 수밖에 없다. 진리추구에 있어서 선진과 후진의 차이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선진과 후진은 진리를 체험하는 품위가 서로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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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선진은 후진이 진리체험을 할 수 있는 품위를 이미 극복하고 그보다 몇 단계 앞서 있다. 후진의 품위는 선진에게 이제 오류인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 근원성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선진은 후진의 품위가 갖는 진리체험의 근거지움을 부인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는 가치기준의 세련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참되다’ 또는 ‘허위이다’는 판단이외에 ‘흥미롭다’ 또는 ‘진부하다’, ‘바람직하다’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 ‘쉽다’ 또는 ‘어렵다’, ‘길다’ 또는 ‘짧다’라는 평가에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선진과 후진이 지식내용의 보편성에 진리의 기준을 둘 때 서로 그 기준을 두고 갈등할 수 있다.
다섯째, 진리체험은 최소한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에 국한된 진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언제나 부당하다. 그 때문에 그 진리를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각주 7: 이것이 대충 풀라니(1958)가 말하는 ‘공환성(conviviality)’의 개념과 로티(1989)의 ‘연대성(solidarity)’ 개념에 해당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2.3.5.)에 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주관성은 어디까지나 순수주관적인 영역에 머물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한 상호주관적인 동의를 얻을 수 없는 한 관념의 객관성을 인정받기가 어렵다. 우리의 진리체험은 우리의 주관과 우리 밖에 존재하는 객관세계의 일치에서가 아니라 서로 수준이 다른 여러 주관이 낮은 편에서 높은 편으로의 혼연일치가 가능한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진리탐구에 있어서 선진과 후진이 가치의 공감대를 이루고 향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진리와 허위는 차이의 검증에 의해서 판명되며, 서로 다른 품위의 수준에 있는 선진과 후진은 그들이 가진 진리체험의 불균형과 불일치의 거리를 좁히는 방식에 의해서 그들의 품위차이를 해소하고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치공감은 선진과 후진의 교육적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진리를 가진 사람만이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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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학문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진리추구의 체험을 구성원의 내부에 장치하는 것이다. 경험의 가치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결과를 제시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그것을 얻는 과정을 유도하는 것이 상대에게 더욱 의미가 있다. 품위의 차이는 바로 선진과 후진의 교육적 상호작용이 가능한 영역이다. 품위를 재구성하는 것이 성장이고, 교육은 그 성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후진은 성장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함으로써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으로서의 진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상구에 의한 진리의 자증에 해당한다. 선진은 후진에게 계속적인 성장의 욕구를 창출하고, 그것이 사실상 그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다양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이 부분은 바로 하화에 의한 진리의 타증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하에서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