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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 4.4. 인문 · 사회과학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602 목록 댓글 0

장상호(2000). 『학문과 교육(하):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4장 교육적 인식론의 적용범위와 사례


4.4. 인문 · 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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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인문 · 사회과학

                                              

  4.4.1. 학문의 세계와 그 인식대상이 되는 세계의 차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의 논의를 자연과학에서 인문 · 사회과학의 분야로 돌려보자. 앞 절에서 우리는 그동안 인문 ·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알려졌던 해석학이 방법상 그것과 대조를 이루어 왔던 자연과학을 포섭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밝혔다. 따라서 본 절에서 다시 인문 ·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재론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고, 다만 이 분야에서 교육적 인식론을 정착시키는 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몇 가지 특수한 측면들을 다루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이 분야에서 학문의 세계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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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세계의 경계가 모호한 것에서 비롯하는 문제, 그것의 해결방안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과 우리의 교육적 인식론 간의 차이, 발생적 인식론을 주제로 이루어진 교육적 이해의 사례, 그리고 교육적 검증방법을 교육학과 교육에 적용할 필요성 등을 다루고자 한다.

  서로 분야가 다른 학문을 놓고 그 발전의 정도를 비교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발전의 규모나 속도에 있어서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 자연과학보다 다소 뒤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을 상당한 수준에서 설명하고 예언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단의 지식체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위세 역시 당당하다. 오늘날 대학에서 새로운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고 외부의 지원이 있다고 할 때 수혜의 대상은 대부분 자연과학 분야이다. 이에 비해서 자연과학을 제외한 여타의 학문에서는 학문활동이 그렇게 활발하지 못하다. 이런 추세는 역사상 인문 · 사회과학 분야가 주도하던 대학에 자연과학이 진입한 이래 지속되고 있다.

  인문 · 사회과학 분야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한 반성에서 한동안 주목을 받아 왔던 것이 그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 분야는 방법의 면에서 크게 두 가지 길을 가고 있다. 하나는 앞에서 블룸(1987)이 지적했듯이 자연과학적 방법을 추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나름의 고유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전자는 학문적인 경합에서 자연과학이 유리했던 것은 그 방법에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는 듯하며, 후자는 그런 방법에 의해서는 인문 · 사회적 현상이 제대로 포착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경향의 이면에는 모두 그 나름의 착오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앞에서 흔히 인과에 관한 설명, 그리고 그것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실험과 관찰을 내세우는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사실은 교육적 검증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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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맞는 것이라면 인문 · 사회과학 분야가 전통적인 자연과학의 방법적 모형을 따른다고 해서 지금의 학문적인 정체성을 쉽게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 후진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인문 · 사회과학 분야가 그들의 방법적 고유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학문 자체와 그 인식대상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비롯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하에서는 여기에 어떤 범주착오가 내포하고 있는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교육적 방법을 활성화할 필요성을 검토하기로 한다.

  흔히 학문의 진리를 판명하는 가정 공정한 방법은 자연과학적인 객관주의였다. 인문 · 사회과학도들이 방법을 택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대상도 자연과학적 사실과 다름이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방법과 인식대상은 너무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포착되는 인식대상의 양상이 변한다. 자연과학을 따르는 방법적 선택은 결국 인문 · 사회적 사실을 사물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령 인간에게는 물리적인 측면이 있고 그만큼 자연과학적 방법이 그것을 해명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자연적 사실 이상의 것이 있고, 그것들은 단지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까지 자연과학자들이 주장해 왔던 이른바 객관적인 방법에 대한 신뢰가 따지고 보면 무근거한 것임을 충분히 지적해왔다. 그 근거 역시 자연과학과 그 탐구의 대상이 되는 자연현상의 차이를 지적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여기서 그 점을 다시 상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다만 자연과 우리의 인식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 검증할 어떤 방도도 없다는 점을 상기하는 정도로 지나갈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이 사회과학보다 더 분명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전자가 모종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문제의 근원을 이제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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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 · 사회과학은 탐구대상의 속성이 자연적 사실과 다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제까지 방법적 특수성을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그 대상의 성질이 어떤 것이냐를 먼저 밝히고 그것에 대한 방법론을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절차이다. 이들 분야에는 대상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자연과학적인 인과적 설명이 적용되기 어렵거나 부적절한 면이 있다. 그 점에서 자연과학의 인과적 모델과 인문 · 사회과학의 해석적 모델을 대비시키는 논의는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인문 · 사회과학의 고유한 탐구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자연과학에서 그래왔듯이 탐구 자체의 영역과 그 인식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문 · 사회과학의 방법론자들 가운데에는 과학의 특성과 그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예컨대, 윈치(P. Winch, 1958)는 사회과학의 독특한 방법론으로서 일상언어의 분석을 든 바 있다. 그는 사회적 현상을 규칙의 체계로 보고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써 비트겐슈타인(1953)의 후기적 언어관, 즉 일상의 언어는 일종의 게임규칙으로서 사회구성원의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원용하고자 한다. 윈치에 따르면, 성공적인 사회학자는 연구하려는 사회의 이상적인 정보제공자가 그에게 알려주는 모든 상식과 통념들을 단순히 다시 습득하면 된다. 이런 방법론의 저변에는 사실상 사회과학적 지식(sociological knowledge)과 사회적인 지식(social knowledge)을 같은 것으로 보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특정 사회의 상식을 습득하는 것이 사회과학적인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이라면 사회과학도가 별도로 존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만약 특정한 사회의 상식을 이해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임무라면 그 지식을 판정하는 기준은 사회적인 동의(social consensus)일 것이다.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사회과학자의 지식이 일치하는 정도에 의해서 후자의 타당성을 판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 방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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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적용된다면 문화의 이질성에 따라 대중의 사회적인 동의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기준의 내용도 그때그때마다 바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지식내용을 학문적인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지역과 시간의 제약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사회공동체의 특수한 상식들을 집대성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특수한 시공적 맥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는 것인가? 만약 대중이 피상적인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을 견제할 인식체계는 어디에서 누가 마련할 것인가? 이런 제반 문제가 사회과학도의 심각한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윈치와 같은 사회과학적 방법은 사회과학을 학문으로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으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인문 · 사회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원인이 방법의 차이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문제의식에서 모색된 방법론이 인식대상과 학문적 인식 자체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사회구성원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된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그들은 인식의 면에서 상식과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그 결과적 산물이 바로 사회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사회학적 지식과 구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치의 노선을 따르는 방법론자들은 그것들의 이질성을 확연하게 구획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과학이 많은 경우 그 대상인 사회의 영향을 너무 직접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사회적 사실 속에는 상식, 이데올로기, 교조 등과 같은 특수한 사회적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식들로서 학문이 추구하는 진리탐구라는 범주와는 다른 관심과 기능에 의해서 형성되고 유지되고 파기된다. 그 때문에 만약 사회과학이 학문의 본령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런 사회적 지식이 내면화되는 방식과는 다른 접근방식을 택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양자를 혼동하는 경향은 자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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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이것을 경계하고 초월하려고 함으로써 얻은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대체로 사회과학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의 변화에 훨씬 민감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전과학시대의 종교적, 철학적 이데올로기들과 더욱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다. 모든 사회는 자기의 고유한 현실관을 가지며, 대중적인 합의나 혹은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그것을 전체적인 진리라고 간주하고 기타의 모든 세계관을 오류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혁신적인 사회사상이나 이론들이 이들과 상충하는 경우 기존세력의 저항을 받았으며, 결정적인 입증이 어려운 경우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성숙을 기다려야 하거나 저항의 정도가 더욱 강해서 심지어 정치적인 혁명을 요청한 경우조차 있었다.

  이런 사실을 주목하고 최근의 지식 사회학은 사회적 존재가 사유를 결정한다는 식의 흥미 있는 가설과 주장을 내놓고 있다(Mannheim, 1929; Stark, 1958). 사회적 결정성이 물질적인 것이냐, 계급적인 것이냐 혹은 보편적인 사회적 환경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 내부에 다소의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의 조건과는 무관한 것임에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학문적인 태도를 견지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행동에 대한 설명들은 불가피하게 사회적 상황이나 설명하는 사람의 관점에 의해서, 자연적 사실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기가 쉽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에 대한 연구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그들이 연구하는 것이 인간의 행동이다. 그들의 연구는 사람들의 신념체계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다시 그 연구대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그 주장 자체가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처럼 지식의 사회적 결정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어떤 사회적 존재를 반영하는 허수아비들인가?

  자연에 관한 지식과 사회에 관한 지식을 구분할 때 후자에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개재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은 당연하다. 학자라는 집단도 자기 시대의 사회적 환경에서 생활하는 구성원의 일원이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그들이 소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 실제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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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사회이론가들 사이의 갈등은 그들이 소속한 집단과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을 내포하며, 과장과 비본질적인 논쟁을 유도할 수도 있다.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에 비해서 자립적인 학문적 성격을 얻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런 데에서 연유한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사회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시민계급의 등장과 더불어 생긴 학문이고 그만큼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서구의 영향권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체계가 한 시대의 특수한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마치 영구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위험성은 이미 정치학, 경제학, 법학, 역사학 등에 상당한 정도로 침투해 있다. 전병재(1985)는 사회학 분야에서 서구 사회학과 마르크스 사회학을 구분하고 그들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상대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상이 (1) 허위성, (2), 계급성, (3) 의도적 조작성의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규정하면서 서구 사회학이 더 이데올로기적인지 아니면 마르크스 사회학이 더 이데올로기적인지를 따져 본다면 마르크스 사회학이 계급적 이익성과 의도적 조작성을 더 분명히 띤다는 점에서 더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p.23).


  위의 언명은 놀랍게도 현존하는 사회과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수도계의 하나로서 학문의 면모는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학이 그 사회적 사실에 동화되는 정도의 차이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변화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의 변화 그리고 의식의 변화가 동반할 때 수락된다. 이 때문에 사회과학자들은 그가 속한 사회구성원의 영향을 의식해서 그들의 이론을 구성하기가 쉽고 그로 인해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기 쉽다. 특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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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을 궁극적으로는 혁명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보는 일부의 ‘학자’들은 그들의 혁명가적인 정열을 학문적 활동범주 속으로 끌어 들여서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혼동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사회이론 자체를 자신의 특정 이데올로기의 방향으로 유도하면서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방식으로 파행화되고 있는 것이다. [각주 53: 이 점은 얼른 보기에 사람의 변화를 유도해 그 인식내용의 타당성을 검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교육적 인식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방법상의 큰 차이가 있다. 이 문제는 사회화와 교육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논의에서 곧 해명이 이루어질 사항이다.]

  인식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가 갖는 특징은 그 내용이 진리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식의 사회적인 기능을 중시하며 많은 경우에 사실을 밝히기보다는 사실을 신비화, 은폐, 위장시킨다. 그런데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지식과 이데올로기가 분리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분리의 노력보다는 사회과학이 사회적 실천의 목표에 종속하기를 주장하기도 한다(Riley, 1974). 그러나 이런 식의 체념은 사회과학의 학문성을 위협하는 일대 위기로 보인다. 만약 지식을 평가하는 기준을 사회적인 기능이나 효용성에서 찾는다면 그 지식은 기존세력의 이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구성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정의를 다룰 때 논의된 바와 같이 효용성의 차원은 다양하며 모호하다. 대체로 지배세력의 이익이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 때문에 사회과학은 현저하게 기존질서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렇다면 불평등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서 해방된 지식은 누가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특정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는 지식을 제공하면서 스스로 사회과학도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용인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도 학문의 발전지표와 관련하여 사회과학이 반성해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인문 · 사회과학이 어떻게 세속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함정과 질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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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빠져나와 진정 진리탐구의 내규 속에 들어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과제이다. 학문은 모름지기 일반인이 견지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속박과 일반적으로 내재하는 선이해로부터, 그리고 사람이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숙달되어 있는 폐쇄적인 이해의 지평으로부터 해방하도록 돕는 세력이 될지언정 결코 그것을 강화하는 세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소한 인문 · 사회과학이 은폐된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비판적인 세력의 하나가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있어서 독특한 입장을 가지고 근래에 주목을 받고 있는 학자가 하버마스(J. Habermas)이다. 그는 학문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학자는 그들의 분리를 주장하기보다는 학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세속적인 문제를 특정한 세속적 입장에서 푼다는 전략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다소나마 그 인식 밖의 사회경제적 요인들의 제약을 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이른바 ‘해방적 관심’이라고 하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 관심을 충족시키는 입장을 택한다. 그는 인식에 개재하는 억압적인 상태와 불균등한 권력의 분배를 주목하고 그것을 배제하거나 혹은 폭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을 제안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주로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된 텍스트나 전승되어 오는 의미 혹은 전통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연관 속에서 형성되고, 또한 계급적 지배관계를 통해서 각인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해석학에서 가다머가 택한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대비시킨다. 그는 특히 가다머의 해석학에 개재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위험성을 우려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Habermas, 1970, 1977). 하버마스에 따르면, 가다머가 이해를 의미에 관한 합의로 본 점에서는 옳았지만, 그런 합의가 체계적으로 왜곡될 가능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말하는 일정한 시기의 전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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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형성하는 합의는 제약 없는 토론의 산물이나 상호이해의 표현이 아니라 폭력이나 강제력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각주 54: 이에 대한 가다머(1960)의 대응은 이런 것이다. 그는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계몽주의적 합리성도 하나의 선입견이며, 하버마스가 우려하는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은폐도 지속적인 대화에 의한 학습 자체에 의해서 드러날 수 있다고 대응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논쟁에 끼어들 여유가 없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경우처럼 전통의 우월성을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대신 그 속에 은폐되거나 과장된 것을 폭로하는 것이 해석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 부류의 해석학이 이른바 그의 ‘비판적 해석학(critical hermeneutics)'이다. 인간의 소통과정은 인간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 장애요소로 인해서 사이비 의사소통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문제시한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관점을 원용하여 사회집단의 자기반성을 촉구하고 사회적 행위자가 기만적인 합의에서 벗어나 참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을 해석학에 도입하고자 한다. 그 구체적인 제안의 형식이 ‘보편적 화용론(universal pragmatics)'이다.

  그러나 교육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보면 하버마스의 해결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역시 학문의 세계에서 해석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와 분리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윈치가 범했던 오류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학문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분리불가능성을 애초부터 인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가 논의한 교육적 인식론은 그런 맹점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으로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의 진로를 더욱 착실하게 다져나가는 인식론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상의 세계에서 생활한다는 것과 그것을 이론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활동이다. 학자는 통속의 삶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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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학문을 할 때, 그 통속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이론적인 세계를 구성해 나가야 한다. 진리탐구는 바로 이론적인 실재를 찾아가는 길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식의 경합에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학자들은 그 배후의 진실을 밝혀 폭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절대적 신념에 귀의하여 매달릴 때, 학자는 그 내용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그것을 다른 기준에 의해서 새롭게 평가하고 수정해 나가야 한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학문계를 세속계가 아닌 수도계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해 왔다. 사회과학의 대상은 많은 부분 세속계와 겹치는 반면, 사회과학 자체는 수도계의 하나로서 그것을 인식한다는 입장을 우리는 시종 견지해 왔다. 학자집단은 일단 그가 소속한 세속계적 구성원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주 55: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따지면, “학자가 세속계에 속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학자는 바로 학문공동체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계급적 이해관계보다는 진리의 탐구가 우선하는 것이다. 예컨대, 머튼(Merton, 1973)은 과학공동체의 규범문제를 다루면서 여기에 보편성 · 공유성 · 무사공정성 · 조직화된 회의주의를 강조하였다. 또한 장상호(1993)는 학문공동체의 특징으로 진리에 대한 열정, 비학문적인 요소의 종속성, 창조적인 분위기, 자유로운 정보교환, 치열한 지적 경합, 교육적인 과정의 활성화 등을 지적했다.

  우리는 학문적인 지식이 상식, 이데올로기, 교조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할 성질의 것으로 본다(장상호, 1997a, pp.312-324).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상당한 정도의 이설과 정의상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이데올로기는 대충 서로 경합하는 특정한 집단, 정파 혹은 계급의 권력적 지위와 이해관계에 봉사하기 위해서 유지되는 신념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 신념체계의 진위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의 범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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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학문적 지식은 진리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학문은 자연이나 사회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것의 배후에 있는 실상을 드러내려는 데 그 존립의 목적을 둔다.

  상식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교조는 진리다움을 내세우고 겉으로 표방하지만, 그것은 수정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학문적인 지식과 구별된다. 학문적인 지식은 결코 어느 단계에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원하는 것은 완료될 수 없는 지식의 탐구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식은 영구적인 것이 될 수 없고 끊임없이 부정되고 재건될 숙명에 놓인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진리체험’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효용의 목적은 이 안에서 용납될 수 없다. 상식이나 이데올로기 자체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될 경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학문은 탐구과정에서 얻는 지식들 가운데 이전의 것을 파기하고 이후의 것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재고정리를 해 나간다. 각각의 지식은 현 상태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자체의 가정을 초월하거나 파기하면서 경계를 점점 원심적으로 확장한다. 새롭고 혁명적인 이론은 당시의 학문공동체의 수준을 초월하는 상구의 소산이며, 따라서 그 만큼의 전문적인 수련이 없이는 그것을 정당하게 판단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선진적인 지식은 대개 학문공동체가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대중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교육적 시숙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양쪽의 패러다임 사이에서 이전의 지식체계를 오류로 인식하고 새로운 인식체계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식별할 만한 학자들의 인구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적 지식과 상식 혹은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공유되거나 입증되는 방법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모든 신념체계는 서로 공유됨으로써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다. 그런데 학문적 지식과 상식(혹은 이데올로기)은 동기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공유의 방법 또한 다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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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로 전자는 교육의 내재율에 의해서 공유된다. 우리가 여기서 내세우는 교육이라는 것도 아직 실체가 분명하고 충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육이 예컨대 사회화, 문화화, 조건화, 교조화와 같은 행동통제의 방법과는 구분될 수 있는 것으로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후자들 각각은 과정적 특징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국적으로 결과 자체에서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비해서, 전자는 과정적 절차와 규칙을 존중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최소한 독자가 교육이 고유한 구조와 내재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진리체험은 결코 사회적인 동의를 토대로 규정될 수 없다. 교육적 인식론의 강점은 교육이 사회화나 문화화와 구분되는 방식으로 개념화된다는 데 있다. 교육은 사회적 동조, 불안의 회피, 신비화, 세뇌, 혹은 세속적인 강제가 아니라 주체적인 체험의 누적에 의해서 단계별로 더 높은 실재에 접하고 그것에 심열성복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세속계적인 관심이나 지위는 일체 무효화되어야 한다. 만약 권력, 부, 사회적 지위가 여기에 개재된다면 애초의 의도는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자가당착을 가져오는 요소들은 교육적 이해에서 원천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의 속성 때문에 교육을 토대로 하는 방법론은 학문계로 하여금 세속적인 이해관계나 상식을 초극하여 진리를 추구하도록 도울 수 있다. 사회과학도는 자신들이 소속한 사회화나 문화화에 저항하고 대신 교육에 의존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적인 창의성과 가능성을 개발하면서 더욱 보편타당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상식이나 이데올로기의 목적과 기능은 특정한 사회구조와 이해관계의 유지에 있기 때문에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회생활에서 다수의 행위자들의 개별적인 인식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모든 조직체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이다. 사회적으로 명백하게 규정된 규칙과 표준에 상호주관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중요하며,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동료들이 동일한 규칙과 표준에 따를 때, 그 규칙과 표준은 소임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수의 개인들 사이에 사회적 갈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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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 외적 강제라는 통제수단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강요된 화해는 그것이 아무리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하버마스는 보편적 화용론에서 강요 자체의 배제를 강조하지만, 그것 역시 사회적 해방의 관점에 서 있는 것이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의 논점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본 절의 출발을 자연과학과 인문 · 사회과학 사이에 학문적인 발전의 불균형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 원인에 관한 논의를 추정해 왔다. 그 가운데 한 관점은 전자는 객관적 준거가 있음에 비해서 후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을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는 지식이 무엇이며 그것을 구성할 때에 어떤 태도와 검증의 방식을 따르느냐에 차이가 있었다. 자연과학은 비교적 처음부터 세속적인 관심과는 달리 수도계적인 도정을 밟을 수 있었다. 자연과학은 처음부터 전반성적이고 상호주관적이며 직접 체험된 생활세계에 토대를 둔 상식과 통속적인 지혜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에 대해 보편적인 지식을 창출해내려고 노력하였고, 결국 일상어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적인 지식체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최근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은 일반 대중에게는 하나의 허구처럼 보일 정도로 놀라운 변모를 할 수 있었다. 학문이 성립되기 시작한 희랍시대의 철학자들이 오늘날의 지식을 접한다면 환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지식은 그것을 허구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입증하기 어렵다. 허구 자체는 실증될 수 없다.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고 입증하려면 그 지식을 실감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그들이 걸어와야만 하였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일상적 상식에서 최근의 과학적 지식에까지는 오랜 도정이 있다. 그 도정의 단계를 생략하고 일반인이 최근의 지식을 실감할 수는 없다. 이처럼 오늘날 자연과학의 지식은 너무도 고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재로 하는 체계적인 교육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는 더 이상 접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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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어려운 상황에 돌입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과학은 인식대상의 세계와 그것을 탐구하는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사회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대상의 실천적 관심에 종속시키고 진리다움을 그 실천의 효과에 비추어 평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로 인해서 대상 자체에 대한 인식의 깊이는 일반상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의 경우 인식대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변명이 있지만, 그 변명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의 불철저함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은 이론을 정당화하는 방법 역시 교육보다는 다분히 사회화에 의존하였다. 말하자면 이론의 깊이보다는 그것이 얼마나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에 더 큰 관심이 있었고, 국가체계나 지배적인 세력의 비호 아래, 예컨대 학교라는 기관을 통해서 그것들을 무조건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주입하기에만 급급했다. 사회과학 혹은 인문과학은 이 점에서 아직까지 방법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서 제안한 교육의 방법이 많은 부분에서 그 결격된 방법을 보완할 여지가 있다. 만약 인문 · 사회과학자들이 그들의 대상세계인 세속계와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학문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학문적인 지식을 교육을 통해서 탐구하고 입증하려고 한다면, 사회과학도 자연과학에 못지않은 학문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우리는 예측하고 기대한다.

  4.4.2.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과 교육적 인식론의 차이


  역사적으로 인문 · 사회과학 분야에서 어떻게 연구의 질 관리가 이루어져 왔는가? 어떻게 우수한 지식과 열등한 지식의 변별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무조건 자연과학적 객관주의가 성행하던 시절의 방어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다행히 이런 문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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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상황은 역전되어 자연과학이 인문 · 사회과학에 속한 해석학적 방법에 거는 기대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현재로서 그 가능성이 엿보이는 전면의 한편에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노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철학적 해석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하버마스의 ‘비판적 해석학’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인식론은 그들과 어떻게 다른 것이며, 또 어떻게 차별된 입장에서 인문 · 사회과학의 새로운 발전을 약속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앞(1.4.2.)에서 간간이 철학적 해석학과 교육적 인식론의 인척 관계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중첩을 말하는 것으로서 다른 곳(2.3.2.)에서 그들과의 차이가 있음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이제 특히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비판적 해석학’을 언급한 이상 그것과 우리의 교육적 인식론의 차별화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점을 이어서 검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점을 밝히면서 아울러 이제까지 이루어진 다양한 종류의 해석학적 조류에 ‘교육적 해석학’이라는 새로운 입장을 추가하고 싶다.

  인문 · 사회과학 분야가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각별하게 취약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천명하고 들어가는 하버마스가 할 수 있는 몫은 다소 분명해진다. 하버마스가 강조하려는 것은 대화와 의사소통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사회적 장벽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우려대로 해석의 과정에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게 하는 장애가 개입하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정신병리학적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합의를 낳을 수도 있다. 비판적 해석학의 목적은 일상적 이해에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하버마스(1976/1979)는 이른바 ‘보편적 화용론’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일상언어의 영역으로부터 외부적인 억압과 지배의 요인을 가급적 배제하고, 합리적인 원리를 첨가시킨 무제약적이고 이상적인 소통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서로가 강제되고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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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지 않은 대화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절차적 합리성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처방한다. 의사소통 행위는 일종의 이해지향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유형이다. 만약 여기에 어떤 규범적인 요소를 추가한다면 우리는 일상적인 사회에 내재된 구조적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담화행위의 수행에서 보편적인 타당성을 주장해야 하며, 그 주장이 논박되거나 혹은 보완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합의도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을 위해 어떠한 종류의 강제와 억압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참여자가 자유로운 조건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보편적이고 타당한 견해를 주장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이상적 담론상황’이 요구하는 최우선의 선행조건은 의사소통의 능력을 가진 자율적인 개인과 억압 없는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것 속에는 선택의 기회가 균형적으로 이루어지고, 언어행위가 왜곡 없이 실행되는 민주주의적인 의사소통 체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장치되어 있다.

  합의적 타당성에 근거한 하버마스의 검증방법은 지배와 종속이라는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대화 당사자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당파들이 합리적이고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하에 동등한 위치에서 동일한 기회를 갖도록 보장하는 공적 영역이 제도적으로 확보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된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참여자들이 이데올로기가 잠재된 일상언어의 대화적 구조에서 용이하게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소통의 이상적 조건 가운데에는 수긍할 만한 점이 많다. 그 가운데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은 특히 교육적 인식론의 경우에도 적용되어야 할 조건임을 우리는 강조해 왔다. 지식의 합의적 타당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기만과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는 자신의 당사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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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떳떳하게 주장하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바람직한 변화에 의해서 더 나은 의견을 가진 상대의 견해에 동조할 수 있는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교육적 인식론의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논점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많은 난점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세속계와 수도계의 차이에 관한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듯하다. 우리는 세속계적인 것과 수도계적인 것은 관심과 목표, 체험의 성질, 그리고 체험의 합의를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우리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하버마스의 해석학적 관심의 비중은 다분히 세속적인 관심과 문제의 해결에 기울어 있다. 이런 점은 고대의 희랍적인 전통에서부터 이어지는 철학의 경향으로서 오늘날의 다원적인 세계에서는 일종의 범주착오로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이 우리의 삶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대화적 공동체는 진정한 상호참여가 이루어지고, 또 상호 간의 간청과 설득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그 대화적 관계에서 한결같이 평등한 대화와 그에 따른 인간적 연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플라톤의 관점을 검토하는 곳(4.2.4.)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다원성에 비해 위험할 정도로 일원적이고 일반적인 규정에 속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인간적인 유대감과 공동체적인 삶의 정서는 해당되는 특수한 세계의 유형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고 그것이 유지되는 조건도 달라진다. [각주 56: 본서에서 누차 강조되어 온 것이지만 철학에서 대화에 의한 해결을 시도할 때 수도계와 세속계의 영역이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 근래에 로티(1989)가 자아의 창조와 관련하여 사적인 영역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공적인 영역을 구분한 것은 이 점에서 거의 예외적이라고 할 만하다.]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에서 우선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대화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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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동등성에 대한 선험적 가정이다. 여기서는 타자가 합리적이고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당위적 전제로 받아들인다. 그 전제는 정치적으로 볼 때 일면 평등적인 공동체를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오늘날의 시대사조와 일치한다. 세속계적인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차별적인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조건이다. 이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누구에게는 편파적으로 이롭고 누구에게는 불리한 부, 지위, 권력의 배분이 인정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점에서 고대 희랍식의 민주적인 공동체 또는 폴리스를 선호하는 경향을 나무랄 수는 없다.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조건에서는 어떻든 합의가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상호논쟁과 설득은 서로 평등하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세속계적인 이념이 수도계적인 이념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도계에서는 위계적 질서가 강조되며, 그것은 세속계에서의 평등적 질서와 결코 양립될 수 없다. 여기서는 세속계적인 관심이 정지되고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는 곳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품위의 위계적 차이이다. 수도계의 선진과 후진은 평등하게 수도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품위와 그에 따른 가치규정은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수도계의 입장에서 볼 때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무질서의 범주에 든다. 오히려 이 곳에서는 품위의 차이에 따른 차별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

  특히 대화의 상대방을 자신과 동등한 타자로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수도계의 선진과 후진이라는 위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가정되거나 확정된 교육적 상황에는 부적합하며 낭비적이다. 물론 교육의 주체는 언제나 자율적인 것으로 상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승과 제자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은 상호주관적인 경험의 이행을 추진함에 있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버마스의 처방에 따라 선진과 후진이 각각 현재의 품위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비판한다면 교육적인 합의에 도달하기 어렵고, 많은 경우 시간만 낭비하는 무모한 논쟁으로 비화할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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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이 있다. 학문의 역사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이론적 논쟁은 상호 간의 몰이해를 증거하는 기록이라고 할 만큼 비경제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논쟁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상대가 자신의 체험구조와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내재적인 해명만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 선진과 후진의 구분은 불가능하며, 서로의 갈등만 증폭된다.

  수평적 평등의 조건은 수도계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예거한 인류의 위인들인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아인슈타인,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등에게 하버마스가 강조한 대화의 평등조건을 강조해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들과 접촉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적인 해방적 범주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수도계적인 범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척해 온 품위의 면에서 탁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세속계적인 평등이나 이해관계는 일단 접어두고 해당 수도계의 측면에서 선진과 후진의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전환은 학자와 일반 사람들 간에도 성립하지만 보어와 슈뢰딩거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과 같은 학자와 학자 간에도 성립한다. 가령 다수의 합의라는 힘을 빌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논쟁에서 일시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이것을 진정 수도계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교육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론의 상대적인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는 해당하는 높은 수준의 이론들을 일단 이해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진과 후진은 주어진 교육소재와 관련하여 애초부터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품위에 대해서 상호주관성을 전제할 수 없다. 그들은 상호주관성을 확보하기 이전의 상태에 있으며, 그것을 확보하는 과정이 바로 교육에 해당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동등성의 요구를 교육에 적용하는 경우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빠진다. 이 점에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 가깝다. 가다머는 하버마스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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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권위에 대한 개방을 너무 성급하게 전통에 대한 맹목적이고 독선적인 굴종과 동일시한다고 반박한다. 참된 권위에 대한 복종은 맹목적인 것도 노예적인 것도 아니고, 권위는 그것이 자유롭게 인정되거나 수용될 때에만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보편적 화용론은 합의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감에 있어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특정 사안에 대해서 모든 것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가령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재판과정을 떠올릴 수 있다. 당대의 사람은 그 문제에 있어서 모종의 합의된 결정을 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계적인 삶에서는 그런 합의가 중요하지 않고 더 나은 것에 대한 추구가 절실한 과제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진리의 합의설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에게는 하버마스보다 가다머의 통찰이 수도계와 교육계의 범주에 가까워 보인다. 가다머에 있어서 합의는 합의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망들이 사상에 관한 보다 높고 깊은 이해에 통합되는 이른바 ‘지평의 융합’을 의미한다. 재판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대중적 합의에 불만을 품고 수도계적인 추구를 아쉬워한 것도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교육적 인식론은 일치보다는 불일치를 전제하며 그로부터 체험의 상향적 흐름을 유지하고 보장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니까 합의 자체가 진리를 규정할 수는 없고 합의의 방향과 과정이 중요하다. 수도계에서의 상호주관적 실천, 세계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아래의 품위에서 위쪽의 품위에로의 흐름을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구성원 모두에게 수도계적인 삶의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육적 관계에서는 특정한 품위에의 일치가 아니라 매 단계의 성실한 교육 자체가 존중된다.

  낮은 품위에서 높은 품위로 진행하는 데 필요한 실천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 있어서 교육적 인식론은 하버마스는 물론 가다머의 입장과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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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을 택한다. 철학자들은 언어에 의한 대화를 매우 신뢰하고 있다. 언어는 장기간의 집단적인 세련화를 거친 것으로서 개인적인 차원을 능가한다. 철학자들은 은연중에 언어가 그것을 사용하는 재량과는 분명히 독립된 채 서로를 내포하며 지지해 주는 의미들의 형식체계라고 전제한다. 따라서 그들은 언어 속에 집단적 지혜가 포함되어 있고 언어를 통해서 집단의 지혜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버마스는 논거를 제시하면서 서로의 진리주장을 정당화하려는 형식을 談論(Diskurs)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이것은 언어에 의해서 품위의 내용이 곧바로 전달된다는 의미론적인 측면보다는 언어의 화용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강조하는 언어적인 소통을 곧바로 ‘언어주의적 폐단’과 연결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각주 57: 교육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나의 경우도 화용론적 측면에서 ‘교육어’를 제안해 놓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장상호, 1998).]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주어진 담론에서 말해진 모든 것은 서로 간에 공약가능하다는, 다분히 언어주의적인 편의가 은연중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버마스 유의 ‘토론을 통합 합의’는 수도계에서의 선진과 후진 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선진과 후진의 언어게임의 비통약성과 이질성을 무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부분은 언어적 소통은 말로 주고받는 사람이 체험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식에 있어서 언어의 효능을 말하는 입장은 언어가 전제하는 것을 충족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어가 그 전제한 것을 충족시켜줄 것으로 문제를 전도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 철학적 인식론의 문제는 이런 맹점에서 비롯한다.

  언어는 오랫동안의 집단적 세련화를 거친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학문어가 전형적인 예이다. 학문적 언어는 피상적이고 제도화된 일상언어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학자들이 치열한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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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서 얻은 고급한 인식내용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용어가 서로 수준이 다른 학문적인 체험과 인식내용을 대표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태반을 이룬다. 이 때문에 일상어와는 달리 학문어는 수직적 편차가 크다. 말하자면 동일한 용어가 헤겔이 말하는 논리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자연과학의 경우 뉴턴 체계에서의 ‘중력’과 상대성 이론에서의 ‘중력’은 서로 그 수준이 다른 맥락적 의미를 지닌다. 철학에서 ‘현상’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어떤 전제를 가지느냐에 따라 언어표현에 대하여 상반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번역이 가능하다. 그 중 어떤 번역이 옳은가에 대한 물음은 언어에 대한 물음이 아니고, 번역자가 번역작업에 지니고 들어가는 세계에 대한 인식체계의 성격에 대한 물음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적 의미의 차이는 우리가 세계를 어떠한 것으로 보느냐 하는 전체적인 인식체계상의 차이인 것이다. 학문에서 선진과 후진은 비대칭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학문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시대의 지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공통기반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진행된 품위의 발전을 동일한 용어로 수평화시켜 간주하면 심각한 논리적인 모순(형식논리의 의미에서)이 일어난다.

  선진과 후진은 대화 이전에 서로 이해가 가능한 체험적 공감대를 결여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후진의 체험내용의 개선이 없이 언어적인 교환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들은 사실상 서로의 품위에 의해 여과된 말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사소통의 내용은 당사자의 순수한 상호이해의 동기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현상을 고압제와 저압제라는 개념으로 포착하려고 하였다. 물론 귀를 기울이면 후진의 말이 선진에게는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이런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아인슈타인은 어느 날 저녁 사교모임에 초대받았을 때 어느 귀부인이 상대성원리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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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인지를 설명해 달라는 간청을 받았다. 그 때 그는 눈이 먼 친구와 산보 도중에 일어난 일로 화제를 돌림으로써 그 어려움을 암시하였다고 한다.

  흔히 수준이 비슷비슷한 학자들끼리의 논쟁이 주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학문이 더 풍부하게 된다는 가정은 아직 충분히 검증된 것이 못 된다. 이들은 누가 선진이고 후진이라는 사전의 양해내용이 없이 자신의 품위를 반영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 상대의 동의를 요구한다. 이 경우 서로를 향해서 무슨 말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사실상 독백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서로의 형평성을 유지하려는 학문적인 논쟁은 다분히 폐쇄적인 그러나 조리 있는 말놀이 차원에 머무를 위험이 많다. 자연과학의 경우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보어와 슈뢰딩거의 사례가 이것을 대변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적인 대화의 전통보다는 동양의 성현인 공자와 석가가 추천한 솔선수범과 시범 그리고 실행의 측면이 더 많은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

  요컨대, 하버마스의 비판적 해석학과 교육적 인식론은 관심의 범주에 있어서 평행선을 가고 있다.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에 의한 자유주의의 실현에 관심이 있는 하버마스는 철학의 과제를 합리와 자유를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합의를 달성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자아창조나 자아실현과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동격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화용론은 철학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희랍철학에서 시작된 대화법의 현대판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비해서 교육적 인식론은 그런 이상적인 상황이 현실 속에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언어가 품위로서의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진리됨을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의 경우처럼 단순히 평등을 가정해서는 논쟁이나 오해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대신 우리는 일정한 교육적인 내규와 교섭에 따라서 문제에 포함된 당사자 가운데 후진이 자신의 합리성을 포기하는 절차를 도입해야만 한다. 교육에서 스승의 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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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에게 증명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지식을 언어로 전달하거나 혹은 담론의 형식으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입증되기까지 교육적 과정을 단계별로 제자에게 재생시키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철학적 해석학’ 혹은 ‘비판적 해석학’에 대비되는 ‘교육적 해석학’을 새로운 해석학의 영역으로 제안하겠다는 시사를 한 바 있다. 학자의 논문과 예술가의 작품 혹은 도덕가의 삶의 발자취나 행적은 수도계적인 표현체이며, 그 표현체는 종적인 상대성을 가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해석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것들은 단순히 공통의 선이해를 전제하고 권력의 불평등을 배제하여 소통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의미가 전달되고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대한 학자의 저서를 그 분야의 초보자가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해석학적 비결도 있을 수 없다. 창조자와 독자 사이에는 언제나 다소간의 품위차이가 개재되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의 이해, 즉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교육적 이해는 언어적 상호작용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 표현체를 옳게 해석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체험의 구성이라는 과제가 포함된다. 선진의 표현체를 이해할 정도의 체험이 후진에게 형성되기 위해서는 양자 사이에 교육적 관계를 맺고 오랫동안 실습과 시범을 포함하는 교육적인 도제관계가 필요하다. 교육적 이해는 참여자의 합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진이 선진의 품위에 일치해 가는 체험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자면 당사자들은 서로 품차를 가정하고 후진의 편에서 존현하는 자세로 상구적 이해를 꾀하고, 선진의 편에서 존우하는 자세로 하화적 이해를 구해야 한다. 여기서 창조적인 불협화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점차 품위의 차이를 연결짓는 단계별 진전이 전제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쌍방의 접근이 일정한 교육적 시숙의 기간을 거쳐 서로 일치하는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필요 없는 품위상의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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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3. 발생적 인식론의 검증에 적용된 교육적 이해


  인식론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 인식론 자체가 어떻게 검증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경험주의 인식론은 경험주의적으로 검증되었는가? 합리주의는 합리적으로 검증되었는가? 이율배반의 사례를 들어 형이상학을 참된 지식에서 배제한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을 참된 지식의 범주에 넣었는가?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어떻게 확실한 것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 분석철학은 그것이 의미 있는 명제로 분류한 기준에 의해서 그 자체를 대상으로 분석한 일이 있는가? 현상학의 본질은 현상학적 환원의 대상이 되었는가? 나는 이런 질문과 관련하여 제반 인식론자들이 사실은 자신의 인식론적 처방보다는 결국 많은 부분에서 교육적 이해에 근거해 자체를 입증하였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가지고 있다.

  그 한 사례로서 나는 피아제가 제안한 인식론의 경우를 살펴 보고자 한다. 피아제는 인식의 문제가 철학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고 보고 ‘발생적 인식론(1937, 1970b)’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창출해 냈다. 이는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학문으로서 당시까지의 다양한 이론을 나름의 특색있는 관점에 의해서 종합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그는 기존의 어느 학설로도 환원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지식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인식론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새로운 지식체계를 어떻게 입증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주로 프랑스어로 발표된 피아제의 연구결과와 아이디어는 새롭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물론 앞 절에서 다룬 상식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다. 또한 기존의 인식론과는 전혀 다르다. 피아제가 새롭게 도입한 이론적 용어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심리학자나 교육학자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린다. 그의 후기 저작은 그가 관심을 가진 지적 구조를 상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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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수학과 관련하여 진술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욱 난해하다. 그의 이론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고 각각의 요소는 서로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이론적 맥락에 대한 관점의 확립이 없이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그의 체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지속적인 작업에 의해서 많은 부분 확장되고 심화되었다.

  피아제의 이론은 이전의 인식론과는 전혀 상이한 체계로서 항상 예비적인 단계에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발표하였다. 피아제의 글쓰기 스타일은 명백하지 않다. 그의 이론은 192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진 바 있지만, 1960년대의 구조주의 운동과 교육분야에 대한 미국의 혁신운동과 관련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학설이 널리 인용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제기된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생각하고 발표하는 이론이 끊임없이 곡해되고, 오해와 오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오해는 피아제 이론을 비판하는 편만 아니라 그의 이론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편에서조차도 발생하였다. 피아제와 오랫동안 같은 연구의 길을 밟았던 인헬더(Barbel Inhelder)는 피아제를 소개하는 책(Ginsburg & Opper, 1969)의 서문을 쓰면서 “피아제에 관한 책을 읽을 때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로 기분을 상하지 않은 것은 흔하지 않은 기쁨이다(ⅶ)”고 말할 정도이다.

  영미계열의 심리학자들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극히 일부를 편의에 따라 인용하고, 그 오해를 토대로 맹목적으로 피아제의 관점을 추종하거나 혹은 비판하였다. 최근에 급진적 구성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글래서스펠트(1995)는 피아제를 연구하면서 미국의 문헌에서 발견한 피아제에 관한 오해를 이렇게 묘사한다.


  오직 영어만을 읽을 수 있는 학생들에게 피아제에 관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번역물로부터 피아제의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이 설사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알게 되었다. 몇몇의 극히 예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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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예컨대, Wolfe Mays 혹은 Eleanor Duckworth) [각주 58: 이들은 피아제가 제네바에 설립한 발생적 인식론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Genetic Epistemology)에서 연구한 학자들이다.] 을 제외하고 번역자들은 일종의 순박한 지식론(즉 순박한 실재론자의 입장)을 가지고 피아제가 저술한 원본에서 읽은 것을 그들의 세계관에 맞도록 무의식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역량의 미흡함에 의해서 그들의 번역물들은 흔히 피아제의 이론과는 맞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념들을 전달한다(p.12).


  피아제는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저자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프랑스어로 저술하였다. 더구나 그의 사상은 구조주의를 근간으로 삼기 때문에 경험주의의 전통을 지켜온 영미계열의 심리학자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번역되고 해석되었다. 이것은 앞 절에서 논의했던 바와 같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었다. 피아제는 특히 어린이의 세계와 성인적인 지능의 질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는 행동주의자들 사이에서 특히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 피아제의 지식의 구조를 탐색하려고 할 때 그들은 요소적 단위에 대한 경험주의적 통계에 의존하였다. 그들은 발달을 외부적인 자극의 조작에 의한 일단의 학습현상으로 환원시켰다.

  뿐만 아니라 피아제 이론은 영미의 학자들에게 그들이 선호하는 경험주의의 검증원리에 의해서 검토되었다. 피아제의 구조주의적 관점이 개별적인 단위로 세분되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경험주의의 내규 안에서 판정되었던 것이다. 그런 연구결과는 다분히 부정적인 것이거나 피아제의 입장에서는 오해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사실이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이론 자체의 이해가 어려운 형편에서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이라는 것은 후차의 문제가 된다. 필요한 것은 제시되는 자료가 아니라 그 자료를 해석하는 관점의 전환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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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래서 피아제가 그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도를 취해야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이론을 오해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들과 공동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남들이 하는 실험 혹은 시범을 단지 보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것에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바로 그런 방식에 의해서 그를 반대하는 대열의 선봉에 섰었던 학자들이 결국 피아제의 이론에 동화되는 새로운 경로가 열렸다. 예컨대, 그의 연구 초기에 언어와 사고의 문제에 있어서 처음에는 극히 비판적이었던 싱클레어(Hermine Sinclair)는 이런 동화과정을 거쳐서 이후에 항상 피아제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피아제가 그의 동료연구자를 얻는 방법은 거의 그런 특이한 경로에 의존하였다.

  이런 사례는 바로 과학적 검증은 관찰자료나 문헌의 해석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고, 결국 교육적인 과정을 통한 관점의 전환이 선결되어야 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사고구조의 변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피아제는 학자들을 초청하고 협동연구에 참여하도록 하여 경험적인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고, 그 연구를 재생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의 이론의 오해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책략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른다. 그는 1955년에 록펠러 재단의 도움으로 제네바에 발생적 인식론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Genetic Epistemology)를 조직하였다. 기관의 목적은 매년 세계 곳곳의 다양한 분과학문의 연구자들, 예컨대 생물학자, 심리학자, 수학자, 언어학자 등이 모여서 어떤 주어진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피아제 계열의 학자들과 더불어 제한된 주제를 가지고 적어도 일년 이상을 함께 연구하고 최종적으로 연구결과를 검토받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오해가 풀리고 드디어 애초에는 피아제의 이론을 비판했던 학자들이 결국 동조하는 세력으로 변화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피아제는 1971년 교수활동에서 은퇴하고 나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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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망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하면서 센터의 매주 모임을 주재하였다. 토론의 주제들은 주로 피아제의 이론과 관련된 논쟁점에 관한 것이다. 각자는 그 문제를 그의 전공영역의 관점에서 취급하고 그 결과를 논의하고 발표하는 기회를 갖는다. 세미나는 피아제의 주재하에 그의 제자와 동료들과 더불어 주어진 주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장면에는 피아제의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섞여서 서로 다른 견해를 활발하게 교환한다. 이런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피아제의 이론이 갖는 장점에 점차 익숙하게 되고 결국 그의 입장에 동조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런 절차는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인식론에 가장 부합하는 해결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실천의 중심에 있었던 피아제 자신은 그 절차상의 비결을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이렇다. 피아제 이론의 동조자이든 비판자이든 간에 그들은 연구소에 초청받기 전에는 피아제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오해는 바로 거기에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피아제 계열의 학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연구소에서 그 수준에 이르는 관점의 변화를 촉구했을 것이다. 적어도 일년 이상을 연구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초청자인 피아제가 선진으로서 하화하고 초청받은 학자들이 후진으로서 상구하는 형식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교육적 시숙이 이루어지기에 일년이 충분한 시간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단지 연구보고서의 교환에 의한 설득이나 공개적인 논쟁의 방법보다는 이 방법이 더 큰 효과를 가져 왔을 것이고, 그 결과 초청된 학자는 피아제 계열의 측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각주 59: 여기서 피아제의 이론이 완벽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경험주의적 학습이나 발달의 관점보다는 우세하다는 뜻이다. 최근의 연구에 비추어 피아제의 이론이 비판받고 있는 부분은 보든(M. Boden, 1994)을 참조할 것.]

  피아제가 주도했다는 세미나에서는 어떤 종류의 활동이 있었는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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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참여한 학자들 중 미국의 심리학자 엘킨드(D. Elkind, 1976)가 있다. 그가 1965년 일년 동안 이 센터의 세미나에 참여했던 경험의 일단을 서술한 것을 인용해 보자.


  초청된 학자들을 위한 센터의 모임에는 초청자들이 주로 말을 하고 학생들은 대개 정숙하게 앉아 있는 편이다. 나는 어떤 특수한 세미나 모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피아제는 연구의 어떤 것을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불쑥 악역을 맡아 개입하였다. 도대체 ‘동화(assimilation)’와 ‘조절(accommodation)’이란 단어를 쓰는 것을 왜 그렇게 고집하는가를 나는 따졌다. 결국 미국적인 용어인 ‘자극(stimulus)’과 ‘반응(response)’이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지는 않는가? 그 질문은 순간적으로 그 집단을 침묵시켰다. 대부분은 아연한 채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피아제는 거의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눈을 반짝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엘킨드(Elkind), 당신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말을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사실들을 진정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당신이 동화와 조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제안하고 싶소.”(p.69).


  이런 충고를 하는 피아제는 당시 인간의 앎에 대한 그의 혁명적 이론이 경험주의적 이론이 지배하는 학문풍토에서 생활하는 엘킨드에게 동화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위에서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맞은 맥락에서 적절한 코멘트를 하면서 엘킨드의 사고구조에 변화가 오도록 서서히 유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비교적 긴 교육적 상호작용과 시숙을 통해서 엘킨드는 차츰 미국의 행동주의와 피아제의 구조주의적 발달론 사이의 수준에 있는 큰 차이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결국 피아제의 하화에 의한 타증에 심열성복하였고, 그 뒤 미국에 돌아가서 결국 피아제 이론을 전파하는 충실한 겹제자가 되었다. 엘킨드(1976)의 변모된 입장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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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심리학 안에서는 학습이 경험의 결과로서 사고와 행동의 수정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학습의 정의는 역시 너무도 협소하다. 아동의 사고나 행위는 경험에 의해서 변화될 뿐만 아니라 경험 자체가 아동의 성숙하는 정신적 조작과 협응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변한다. … 요컨대, 여기에는 불가피하게 하나의 상호작용이 있다. 아동이 학습한 것은 항상 경험의 결과이고, 그 경험 자체는 그의 인지적 발달의 수준에 의해서 조건화되어 있다(p.112).


  이런 사례의 보고는 단지 엘킨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런 경로에 의해서 피아제의 이론을 수긍하게 되었다. 피아제가 사망할 시점에, 학문적 지식의 면에서 개인의 발달과 과학의 발전의 유사성을 찾는 연구에서 그와 공동작업 [각주 60: 그 공동연구의 결과는 피아제가 사망한 후에 <심리적 발생과 과학의 역사(Piaget & Garcia, 1983)>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을 한 물리학자 가르시아(R. Garcia)의 경우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의 경험은 그와 피아제가 어느 TV 교양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주고받은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제가 처음 피아제의 작업을 접했을 때 저는 전적으로 그것을 진부한 것으로 거부했습니다. 제가 그 문제에 빠지기 시작해서 피아제의 설명이 논리적 경험주의에 의해 제공되는 그 어떤 설명보다 앞서 나갔다고 본 것은 피아제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저의 아내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점검하고 제네바에 갈 차비를 하였습니다. 피아제는 저를 인식론 센터의 회합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경험이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신 [각주 61: TV 대담 프로그램에 동석해 있는 피아제를 지칭한 것이다.] 은 전적으로 저의 생활을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저의 사고방식 그리고 세계에 관한 관점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제기했던 문제의 많은 것을 해결했습니다(Bringuier, 1980,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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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들의 인지적 성장도 그의 감각체계에 부딪치는 외부적 사건을 복사하거나 혹은 그것을 단지 수동적으로 반사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은 그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부단히 재구성하는 활동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것이 피아제가 표방한 발생적 인식론의 논지이다. 일류학자들이 학문적 지식을 얻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점에서 피아제는 그의 인식론을 자체의 내규에 따라 검증하려고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발생적 인식론은 인위적인 행위보다는 다분히 장기간의 성숙과 자연적 과정을 중시하고 있다. 이 점에 비추어 앞에서 소개된 피아제의 인식론의 검증에 동원된 방법은 단순히 발생적 인식에 의존했다기보다는 교육적 인식론에 의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에 대한 동의나 합의는 발생적 인식론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시간의 성숙만을 기다리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실천과 개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지식의 습득을 우연에 맡기지 않고 비교적 신속하게 이룩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렇다면 피아제는 발생적 인식론을 표방했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데는 결국 최종적으로 교육적 실천에 의존했다는 흥미 있는 결론을 우리는 얻게 된다.


  4.4.4. 교육학과 교육의 교육적 검증


  우리는 천문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고도의 조직화된 학문의 발전과정에도 교육적 과정이 개재함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인문 · 사회과학 분야도 교육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더 탐구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 논의되었다. 인문 · 사회과학 분야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라야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분야에서 문제의 근원은 자기의 본령을 떠나서 대상세계와 자체의 관심과 가치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의 저변에 흔히 말하는 객관주의적 방법보다는 교육적 진화가 현저하게 작용했다면, 인문 · 사회과학은 당연히 실증주의적인 방법보다는 교육적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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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육학과 교육의 분야에 교육적 검증의 방법을 적용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서에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교육학이 새로운 전통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았다(장상호, 1997a, 2000). 그런 교육학이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이라는 더 큰 규모의 학문의 범주 가운데 정확히 어디 속할지는 아직 모른다. 교육학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분야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의미의 새로운 교육학의 발전이 교육적 인식론의 논리에 따라 검증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교육학의 발전은 바로 교육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 관계는 흔히 일반사람들이나 교육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교육학과 교육의 관계에서 나는 전자가 후자의 본질을 파악하여 나간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그 본질규정이 우리가 개선해야 할 대상에 대한 관심의 전환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그것이 교육을 개선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면, 교육은 그 자체의 메타교육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 분야의 발전과 관련하여 제안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또한 이렇게 이루어지는 교육의 발전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다시 환류되어 교육학의 발전에도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교육학은 학교라는 사회적 제도를 교육이라고 보는 특정한 시대정신 속에서 임시방편적으로 탄생하였다는 점은 <학문과 교육(중)>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는 부제를 가지고 충분히 논의되었다. 교육학은 자체의 자율적인 개념체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기존하는 타학문의 지식을 선망하고 추종하는 데에 몰두해 왔다. 그런 관행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학교가 교육하는 곳이고,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교육학이라는 오래된 전통과 관습, 그리고 사고의 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화 기관의 하나로서 학교체제는 그 곳에 의무적으로 다니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학교가 곧 교육기관이라는 사회적 지식과 관념을 주입했고, 교육학이 그것을 이론적으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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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이 무너지고 타성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사태가 온다면 교육학의 학적 토대 역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 위기는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현존하는 교육학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정당화가 상실될 논거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현존하는 학교상태가 진정 교육인지에 관한 일반인의 의구심은 날로 팽배해가고 있다. 다만 이론적인 해명만이 아쉬운 상태이다. 교육학자들이 이른바 ‘母學問’으로 삼고 있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행정학 등이 하나의 학문으로 통합될 가능성은 없다. 또한 그런 기적이 설사 학제간 연구 [각주 62: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학제간 연구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이런 연구의 필요성과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학교에 관한 연구이며, 교육학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택해 왔다.] 의 명분으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육을 해명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교육학의 현상유지론자들만을 제외하고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기초적인 사실이다(장상호, 2000). 이처럼 학문의 기본틀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학자들은 사태의 오도된 진전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초기의 임시방편적인 전통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이제까지 그 안이한 태도가 위기의식으로 연결되는 대전환을 앞당기고 촉진하려고 노력해 왔다. 문제해결의 첫 단계는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사태는 본격적인 교육학이 시작도 해 보기 전에 대학이나 학문공동체로부터 경원의 대상이 되어 퇴출당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퇴출당해야 마땅한 교육학과 학문공동체의 일원으로 앞으로 모색되어야 할 교육학을 ‘제 1기 교육학’에 대한 ‘제 2기 교육학’으로 구분해 왔다. 이제는 전자의 관점과 인식의 가치를 포기하고 후자의 관점과 인식의 가치를 취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교육학이 더 이상 대학이라는 학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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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체에 적응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제 2기 교육학은 소규모의 수도계의 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그것이 신생학문임을 인정한다. 그 미래는 아직 분명한 것이 아니고 그 앞에는 수많은 미지수와 뛰어 넘어가야 할 장애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교육학의 개념체계에 근거해서 이제까지 제시된 교육적 인식론도 그 발전의 내실과 속도에 비례하여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에는 물론 아직도 검토해야 할 중요한 가정들이 들어 있고 그것들은 또한 그 나름의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 더욱 보충되어야 할 내용도 너무나 많다. 충분한 성숙의 기간이 필요한 것만큼 새로움을 추구하는 핵심적인 혁명집단과 주변의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제 2기 교육학을 표방하는 우리는 그러한 취약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1기의 교육학적 체계를 부인하고 새로운 교육학적 체계를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는 아직도 구체계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학자들에게는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제 2기 교육학은 기존의 이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선택적 우위를 주장하기 때문에 제 1기 교육학자들의 거부감을 일으킬 것은 당연하다. 또한 설사 구체계의 문제점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시인하는 것 자체가 곧 제 1기 교육학의 자기붕괴를 의미한다. 만약 내가 말하는 제 1기적 용병학문이 여기서 논의한 교육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용병학문’ [각주 63: 이 용어는 제 1기 교육학이 외래의 학문을 모학문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편의상 내가 도입한 것이다.] 의 보완이 아니라 패배와 퇴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 1기 교육학의 저항은 불가피하고, 예상컨대 그것과 제 2기 교육학의 논증은 쉽게 종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소수 학자들의 주장이 전 체계를 일시에 소멸시키기에는 제 1기 교육학의 토대가 매우 깊고 넓다. 적어도 역사의 면에서 그 교육학은 수십 년이 걸렸고, 또 그 체계에 익숙한 학자들의 수도 엄청나다. 새로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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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 교육학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기존 학자들이 그들의 오랜 전통과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변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앞(4.4.1.)에서 우리는 사회적 상식이나 제도가 학문적 탐구를 흡수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것이 인문 · 사회과학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런데 학교제도를 근거로 하는 허구적인 대중적 상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제 2기 교육학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학교당국(그 배경에는 국가가 있다)은 이제까지 해 왔던 방식대로 학교만이 교육하는 곳이라는 허위의식을 자체의 제도적 통로와 권위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젊은이와 일반인들에게 재생산할 것이고, 교육학자들은 그런 상식에 힘입어 지금의 오도된 학문적인 위기를 호도하고 현상유지를 도모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현존의 학교체제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학이 규정하는 좁은 의미의 잘못된 교육을 좀더 넓은 생활세계 전반으로까지 확장시키려는 데에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지식이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감식할 만한 능력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그들이 가진 지식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지식을 판단하는 데 참여한다. 이 때 일반인들이 변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대에 앞선 지식을 승인하도록 계속 요구한다면 그 진의는 오도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틀에 박힌 생각으로는 그 지식을 수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제 2기 교육학도 시대적으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교육현상은 아니라는 자각과 학교 밖의 교육이 제도의 영역을 벗어나 만연되는 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설사 오랜 기간이 걸리더라도 오히려 일반사람들이 이런 관점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편에 서서 헌신하는 생활을 하도록 하는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학의 진정한 발전은 그것에 침투해 들어온 외래학문, 즉 용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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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자각적인 해체 혹은 모학문에로의 복귀에 의해서 지금의 체계가 와해되고 자생적인 교육학 집단들에 의해서 그 자리가 대치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앞에서 우리는 사회과학의 변화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의 변화 그리고 의식의 변화가 동반할 때 수락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인 기반이 보장되어 있는 한 그것을 전제하는 현존의 교육학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미구에 그런 오도된 교육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시점이 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공간의 중요성을 일반인이 재인식하게 되고 그 활성화에 가담함에 따라 학교에 의한 교육의 독점에 관한 편협한 의식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교의 울타리를 중심으로 교육과 비교육을 구분하는 원시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도 예상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소멸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호한 시간의 경과와 우연적 과정에 의존하여 단지 긴 세월의 경과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하나의 분과학문이 자율성을 가지려면 그에 합당한 강력한 방법론적인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검토한 교육적인 방법은 제 2기 교육학이 새로운 출발을 촉진하는 한 가지 유리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교육적 인식론은 교육학이 그 영역 속에서 장차 새롭게 다루어야 할 여러 가지 하위주제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것은 교육학 자체의 발전에도 유용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 2기 교육학은 아직 그 세계관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만큼 혁신적이다. 따라서 특히 초기단계에서 교육적 인식론이 절실히 필요하다. 만약 그런 변화를 주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교육학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도입한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는 의외로 가까울 수도 있다.

  이제까지 신과학철학자, 예컨대 쿤은 종종 ‘정상과학’에서 ‘위기의 과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상이 비정상으로 되고 그 비정상이 다시 정상으로 인정받게 되는 과정에 어떤 규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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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가? 우리는 그 대안으로 교육적 이해에 의한 합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 때문에 제 2기 교육학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 도입되는 교육은 교육적 인식론 자체의 자기처방에 대한 검증의 기회도 된다. 제 1기 교육학자와 제 2기 교육학자가 교육적 교류를 통하여 비공감 영역을 공감영역으로 전환해 나가면서 현존하는 교육학 안에서의 세속적인 주도권 싸움보다는 상호 간의 교육적 이해를 통한 점진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제 2기 교육학은 성공적으로 입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학자들은 교육적 인식론을 주장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먼저 교육적 인식론의 내재율을 그들의 학문에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육학의 학문공동체는 어느 학문분야에서보다도 교육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교육학의 발전은 역사적인 우연성보다는 체계적인 ‘교육공간’의 구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앞서의 제반 사례분석에서 교육적 진화가 학문의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사실이었음을 지적했다. 교육학은 그것이 탐구하는 교육의 특성을 살려서 방법적 우위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면에서 지금까지 교육학도가 더 모범적이었다는 증거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육학의 학문공동체는 이 점에서 반성의 여지가 가장 많은 분야의 하나이다(Torbert, 1981; Eisner, 1985, 제 15장).

  제 2기 교육학은 아직도 많은 수정을 거쳐 발전되어야만 할 새로운 분야이다. 우리가 <학문과 교육(중)>에서 시도한 ‘교육본위론’과 그것에 근거한 본서의 ‘교육적 인식론’은 현재로서 하나의 작업적 공간과 틀을 확보한 것에 불과하다. 이 작업은 출발의 문턱에 서 있을 뿐 앞으로 많은 탐구가 요구되는 영역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교육학의 맥락을 더욱 세분화하고 더 정교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교육적인 인식론 자체가 그 핵을 이루는 교육이라는 내재율을 이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은 존재론적인 완성을 가정하지 않는다. 모든 결론은 과정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고도의 체계를 성취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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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한계는 있다. 제 2기 교육학도는, 한편으로는 상구활동으로 교육학적인 맥락을 새롭게 발전시키면서 그 발전을 스스로 자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타인들의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교육에 대한 개념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확장과 수정과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더욱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이론이 이전의 것보다 더 발전된 것임을 입증하여야 한다.

  새로운 이론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것 못지않은 것은 새로움의 관리와 타증이다. 새로움은 기존의 지적 소유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며, 따라서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새로움이 별다른 모호함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그것은 새로움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다소 모욕감을 느낄 제 1기 교육학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교육관은 이전의 교육관을 버리는 스스로의 노력이 없이는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그것에 대한 오해가 있다면 하화를 통해서 많은 타증의 기회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교육학도가 우리가 모색하고 제안하는 교육학의 개념을 수락하는 데는 수년간의 수련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추정은 나 자신이 제 1기 교육학에서 제 2기 교육학으로 전향하는 데 필요했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각주 64: 필자도 한동안 용병학문의 대표격인 정통파 교육심리학자였다는 점을 여기서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그 전환은 점차적인 단계를 거쳐서 충분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서서히 그러나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교육학이 미구에 발전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교육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제 2기 교육학은 제 1기 교육학과 전혀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다. 제 1기 교육학자들은 응용학문이라는 가치 아래 마치 교육의 개선이 자체의 목표인 양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제 2기 교육학자들은 그런 과장되고 허황한 목표를 갖지 않는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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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을 하는 것과 교육을 하는 것은 목표나 방법이 다르다. 교육학의 일차적인 목표는 교육을 개선하는 데 있지 않고 교육학을 개선하는 데 있다. 생활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은 모든 사람의 과제이며 그들에 의해서 개선되고 향유되어야 할 세계이다. 전자가 후자를 책임질 수 있는 어떤 자격이나 능력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제 2기 교육학이 그 동안 제 1기 교육학이 이제까지 교육을 위해서 할 수 없었던 매우 결정적이고 불가결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무엇이 교육인지를 이론적으로 건실하게 해명하지 않고 교육을 개선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교육의 개선은 결국 그 개선의 주체가 가진 교육의 개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사람들이 교육에 관해서 말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교육으로 보는지를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교사가 “이렇게 해 가지고는 교육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현실을 개탄할 때 그 사람이 교육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교교육과 관련하여 정부, 학부모, 교사, 학생들이 가진 교육에 대한 개념의 갈등은 심각하다. 여기서 교육학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일반인이 그 현상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식의 체제를 지원하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교육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이해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학문적으로 교육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에 관한 심층적인 이론을 갖는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많은 부분 검토되지 않은 관행적 상식을 토대로 생활한다. 학교가 교육하는 곳이라는 생각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학자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그 허위성을 폭로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만큼 교육의 개선을 위한 교육학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책임의 수락과 역할에 있어서 제 1기 교육학자와 제 2기 교육학자는 전혀 다른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대비는 ‘학교교육’에 대한 교육학적 공헌의 방식을 대입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 양상은 어떻게 다를까? 이를 개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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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나마 짐작하기 위해서 우선 편의상 우리나라의 학교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상황을 기술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당장 이러한 학교상황의 기술에서 용어의 선택에 어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식적인 교육관에 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용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학교의 상황을 기술하는 방편을 쓸 것이다.


  오늘날 학교는 동일한 교과목을 동일한 일정과 계획 속에 가르치고 배운다. 과거에 콩나물시루로 비유되던 60~70명의 학급들이 요즘에는 30~45명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관행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학급 안에서 학생들의 이해수준과 진도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학생 각각의 사정을 고려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활동의 측면에서 볼 때 대개 교사는 적극적이고 학생들은 수동적이다. 학생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용기이고 교사는 그가 아는 지식을 그 용기에 집어넣는다. 일방적인 하달체제에서 교사와 학생의 의미 있는 상호작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통일된 커리큘럼의 일정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에서 학생의 활동과 발언은 수업의 진도를 늦추는 방해물로 간주된다. 학생들의 대화는 거의 금지되고 수업시간 내내 엄숙하게 교사의 언어적 전달에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수업은 일부 능력있는 학생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교육활동의 핵심에서 소외된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자주 본다. 그 결과에 의해서 인간의 서열이 매겨지며, 더 나아가 출세의 경쟁에서 성공하거나 낙오된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평가의 공정성이 큰 문제가 된다. 모든 평가는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때문에 정답은 교과서를 근거로 규정된다. 평가의 혼란을 줄이고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정답은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 다양성은 엄격히 배제된다. 교과서에 담긴 것만이 지식이다. 또한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대부분 평가는 교과서의 내용을 얼마나 암기하고 정확히 기억해 내는가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머리 속에 교과서의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복사해 두어야 한다. 학생들은 매 단계마다 그가 처한 위치에서 새로운 앎을 접하고 재창조하는 활동의 보람을 찾을 수 없다.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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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에서 낮은 점수가 나온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학생에게 있다.


  짧은 글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학교의 실제상황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위의 기술은 실상과 크게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하 우리의 의도는 이런 상황에서 교육관과 교육의 관계에 국한된 문제를 다루려는 데 있다. 위의 상황기술에서 ‘교과서’, ‘교사가 가르친다’, ‘학생이 배운다’, ‘교육평가가 이루어진다’ 등에 동원된 개념과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제 1기 교육학자들은 일반대중과 동일한 입장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학교에서는 그 말 그대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육학자와 일반인들 사이의 교육관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이런 ‘교육을 받는’ 절박한 목적에 있어서 일반인과 교육학자 간에는 큰 차이가 보이는 듯하다.

  일반인들은 학교에서 높은 시험점수를 올리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 점수 올리기 경쟁에서 유리한 방법을 더욱 치열하게 활용하는 것을 교육의 개선으로 보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교육학자들은 이들보다는 초연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교육의 개선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이른바 ‘잘못된 교육’으로 치부한다.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제 1기 교육학자들 간에 많은 분파작용이 일어난다. 이 때 그들의 이질적인 모학문적 사실과 관심이 등장한다. 교육철학자들은 ‘항존주의’냐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냐 하는 식으로 논쟁을 일으킬 것이다. 교육심리학자들은 다분히 경험주의적인 학습과 교수이론을 끌어들일 것이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심리치료’나 ‘카운셀링’을 받아야 한다고 처방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교육사회학자들은 그런 처방이 너무 미시적이고 거기에는 사회구조의 문제가 있다고 대응할 것이다. 또한 교육행정가는 대폭적인 제도의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제 1기 교육학자들이 주장하는 학교교육은 막상 교육이 아니라 외래적 사실들이다. 학교가 삶의 공간인 이상 복합적인 사실들을 동시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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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일은 못 된다. 그러나 그 많은 논의 가운데 정작 부재한 것은 교육에 대한 고유한 관점이다. 현존하는 제 1기 교육학은 그들 간의 대립을 분리해 낼 수 있는 개념체계가 없다. 이것은 학교생활 자체를 교육으로 뭉뚱그려 생각한다. 학교 안의 모든 이질적인 문제들이나 사실들이 이들의 관여에 의해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제 1기 교육학은 한편으로 ‘잘못된 교육’을 소리높여 비난하면서도 개념적 혼란에서 한치도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제 1기 교육학자들에게 있어서 학교를 떠나는 것은 자신을 성립시킨 조건을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 2기 교육학의 ‘학교교육’에 대한 관점이나 공헌의 전략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동서고금의 교육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육현상들에 균형있는 관심을 갖는다. 교육은 학교의 울타리와는 아무 관련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을 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세계로 보고, 그 모든 생활세계 내에 일어나는 전반적인 교육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학교는 젊은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육의 공간이 될 소지가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학교를 교육학적으로 보고 개선점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아직 충분히 성숙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단계에서 보더라도 현존하는 학교는 새로운 교육의 관점에서 문제시하고 개선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생활세계의 하나로 판단된다.

  제 2기 교육학은 학교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전반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학교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하루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요한 생활세계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곳은 생활상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며, 오직 교육만 일어나는 곳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의 개선과 교육의 개선을 분리시켜야 한다. 학교의 목표는 다양하며, 이와 관련하여 정부, 일반시민, 학부모, 교육학자, 그리고 온갖 이해집단 등의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학교를 개선한다고 할 때, 학교의 기능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누가 주도세력이 되느냐에 따라서 개선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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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 달라진다. 거기에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학교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갈등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학교의 기능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 기능들이 교육의 기능과 어떻게 다르고, 상충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결국 무엇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판별하는 것은 이론적인 개념이다. 무엇을 본위로 학교를 운영하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공립학교는 정치적으로 국민국가의 출현과 경제적으로 대량생산체계의 등장과 더불어 생긴 19세기적 산물이다. 이 때문에 학교현상은 다방면의 분과학문적 조명을 필요로 한다. 그야말로 제 1기 교육학이 모학문으로 삼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이외의 조명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율성의 결여라는 교육학의 학문적인 성격 때문에 이제까지 학교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교육 내재적인 관점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제 2기 교육학은 그 부족한 교육적 측면을 새롭게 조명하여 학교 안에 명실상부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제 2기 교육학은 우선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비교육과 교육을 구분짓는 데 한몫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나라의 학교는 세속계적인 관심과 수도계적인 관심의 예리한 대립에서 현실적으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형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나 일반인에게 있어서 전자는 실질이며, 후자는 명분에 불과한 것처럼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오늘날의 학교는 중세의 상황과 유사하다. 이미 알려져 있는 교과서의 내용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성경처럼 외우고 재생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의 학교체계는 세속계적인 관심 이외에 중세 서구사회가 그러했듯이 상당한 정도로 종교적인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방법의 면에서도 학교는 세속적 사회화와 수도계적인 교육의 이질성이 예리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그들 간의 갈등과 조화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있어서도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교는 교육소재의 면에서 관련 교과영역의 성과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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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차 확인만을 중시하고 그것에 대한 학생들의 이차 확인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무조건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일치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그 성공을 보장하는 온갖 방법들이 도입된다. 이로써 교육의 단계별 진전, 체험의 구축을 위한 실습과 시범, 심열성복 등 교육적 내재율의 준수는 시간을 낭비하는 구차한 절차들로 치부된다. 대신 외재적 보상을 약속하는 조건화,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교조화, 언어적 암기, 그리고 심한 경우는 세뇌의 방법까지 정당화된다. 그 결과는 교육적 인식론이 강조하는 證得이 아니라 체험이 배제된 언어적 모방, 즉 우리가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知得이다. 그러나 실증주의적 평가방법은 증득과 지득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는 후자의 형식성만이 득세하고 있다.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에서의 실천은 바뀌어야 한다. 학교의 실천은 대부분 외래적 관점, 특히 인식론에서 더 이상 시효가 상실된 19세기적 실증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제 그것을 극복하고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인식론으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학교의 여건 탓으로 돌리는 폐단을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이제 무엇이 교육인지를 따지고 그것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앞으로 더 자세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앞서 잠깐 이루어진 우리의 논의만을 참조하더라도 그 개선점은 눈에 띠게 많다. 학교는 각종 수도계의 교육적 진화를 촉진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그 생활의 일부는 교육적인 내재율에 부합하도록 재조정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은 교육소재의 하나이다. 따라서 학교교육이 오로지 학문을 소재로 할 필요는 없다. 뿐만 아니라 학문을 소재로 하는 경우에도 그 소재는 학생의 수준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최근의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계 위주의 고압제도 문제이다. 선진과 후진, 그리고 각자에 맞는 수준의 소재를 중심으로 하는 단계별 교육이 일어나야 한다. 교사의 활동만큼 학생들의 활동도 적극성을 띠어야 할 것이다. 교사가 스승이 되고 학생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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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타파되어야 할 신화이다. 교사가 상구자가 되고 학생이 하화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학생들끼리의 교육적인 관계도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육평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학교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주체로서 자주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학자나 학교 당국의 일차 확인에 대한 학생들의 이차 확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도계적인 품위의 평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무의식 중에 뱉어내는 “교과서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인가? 학급사태를 정확하게 묘사한다면 교과서를 사이에 두고 저자의 생각, 교사의 교과서에 대한 해석, 그리고 개별학생의 관점이 충돌하는 사태이다. 이들 관점은 각각 그들의 품위수준에서 모두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여러 수준의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낮은 수준의 것이 높은 것으로 전환해 나가도록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교사의 정답이 학생의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그 가정은 학생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그들의 지식을 꺼내 놓고 그것을 합당한 근거에 의해서 해체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데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가 무엇인가를 진정 배웠다면 이는 곧 그것에 대한 평가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학생들에게 타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학생들은 결국 교사의 정답에 동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지금과 같은 경직된 객관적 검사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학생들이 교사의 정답에 동조할 수 없다면 교사의 타증은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길게 논의되었듯이 적어도 교육적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있던 방법적인 이질성은 무너진다. 모든 분과학문이 수도계로서의 성격과 교육의 속성 간의 만남에 의해서 공동의 기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과학과 인문 · 사회과학에서 교육적 인식론의 적용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살펴보았듯이 각각의 영역에서 특별히 개선되어야 할 독특한 측면들이 있었다. 우선 자연과학을 소재로 하는 교육에서 자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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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자연과학을 분리하는 일이 중요할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자연과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때문에 단순히 사물들을 지각할 기회를 주거나 그것들을 그림이나 필름으로 시청각화하여 제시하면, 혹은 교사를 포함하는 타인이 그것을 조작하는 활동을 관찰하게 하면, 그것이 학생들의 직접적인 실습과 동일한 효과가 있으리라는 예상은 큰 착각이다. 그것이 아무리 구체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외부적 사물의 변형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아동 내에서의 새로운 인지구조를 형성함에 있어서 적극적 조작의 중요성은 언제나 남아 있고, 그 조작의 수준에서 선진과 후진의 체험의 간극은 특히 과학교육에서 주된 고려의 항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문 · 사회과학을 소재로 하는 교육에도 문제가 많다. 인문 · 사회교육은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배제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학교 안에는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지배적이다(Apple, 1979; Giroux, 1981). 이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로서 학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정당화시키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조작하기 위해 학교생활을 설계한다는 것은 천진난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화의 영역에 속한다.

  인문 · 사회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는 이 분야가 지식과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회 혹은 윤리적 가치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이나 이념의 복합체를 마치 학문적 지식인 양 위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존의 사회질서와 타협하도록 유도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일수록 그 주장의 내용이나 입장이 가질 수 있는 오류가능성을 배제하려는 치밀한 은폐가 도사리고 있다. 또한 위장된 이데올로기의 주입은 국가기구를 등에 업은 학교기관을 통해서 강요되거나 세뇌된다. 만약 그런 허점에 대한 자성과 학교와 같은 형식교육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확보할 수 있다면 사회과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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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이 자연과학에 비해 지체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어떤 지식이건 오류가 있음을 겸허하게 시인하고 그 오류로부터 서로 배우고 가르칠 용의를 갖는다면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학문적 이해는 자연과학에 못지않은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학교를 포함하는 모든 생활세계에서 교육과 관련하여 간과되고 있으나 매우 중요한 측면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교육을 통한 교육계의 확인과 검증의 과정이다. 이것을 제 2기 교육학은 교육을 소재로 하는 교육, 즉 ‘메타교육’의 측면에서 교육이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내적 장치로 보고 있다. 나는 “교육은 결국 교육에 의해서 구제되어야 할 것(장상호, 1994)”으로 본다. 그 이유와 방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참다운 교육은 그 고유한 실재와 가치를 스스로 입증한다고 믿는다. 교육은 마치 고상한 게임이나 취미와 같아서 한번 그 맛을 알게 되면 자주 그것을 하고 싶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에서 향유할 수 있는 활동이다. 모르면 배우고 알면 가르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우리 선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어떤 대가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내재적인 가치를 음미하면서 생활하였다. 예컨대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는 교육적인 삶 자체를 즐겼고, 또 그것을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할 용의조차 보였다. 그러한 가치의 인식은 참된 교육이 진행될 때 가능해 진다.

  어떤 세계이든 간에 그것의 실재가 창출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입증되는 데에는 긴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우리가 교육을 방법론적으로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특정한 순간의 교육이론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교육 자체의 역사적 진화이다. 우리 선인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교육을 실천하면서 그것보다 더 나은 실천을 지향했을 것이고, 교육의 수도계적 품계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수도계적인 품위를 향상시킨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교육적 활동 자체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교육은 이처럼 그것에 가담하는 주체가 교육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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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치를 ‘충분한 이유들’로 체험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온전하게 번창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기구를 등에 업은 학교제도가 전 세계에 갑자기 도입되면서 교육적 삶의 고유한 측면이 망실되었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은 명분상 교육과 연관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온갖 비리나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부정적인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학교를 거친 일반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이미지가 오도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점에서 학교는 잘못된 교육관을 재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제 2기 교육학은 그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고 오랫동안 망각되고 망실된 교육을 우리의 삶에서 복권하고 증대시키는 데 한몫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학교의 경험이 교육의 이미지에 준 상처는 깊고 그 기간 역시 길다. 그만큼 치유의 기간도 길어질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교육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한 후에 비로소 인정받는 경우를 예상했다. 교육은 많은 경우에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감식능력을 요구한다. 일반인은 그들이 가진 부정적인 학교경험을 기준으로 교육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의 교육을 판단할 것이다. 제 2기 교육학은 그런 교육관을 불식시키기를 원하며 그들이 참된 교육을 인식하고 경험함으로써 교육의 편에 서서 헌신하는 생활을 하도록 하는 확실한 방법으로서 메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명하다. 우리가 되도록 교육의 내재율에 충실한 생활을 하면서 그것의 가치를 감식할 수 있도록 서로 협조하는 것이다. 교육에 성공적으로 참여하거나 모범적인 교육을 보는 것은 참된 의미의 교육 자체를 강화한다. 우리는 참다운 교육을 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에 관해서 상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후진에게 그것을 하화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교육의 실재성과 그 나름의 품계가 확인되면 이제까지 교육을 단지 수단의 의미로만 부각시켜 왔던 우리생활의 폐습과 관례가 좀더 단기간에 교정되고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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