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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 (3) 지식의 형식

작성자남영욱|작성시간06.11.16|조회수1,545 목록 댓글 0
이홍우(1997). 지식의 형식. 김종서 외. 『교육과정과 교육평가』 (pp. 305-345). 서울: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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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知識의 形式


  앞 장의 마지막에 제기된 질문 ― 교과로서의 학문은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가 ― 을 염두에 두면서, 앞의 두 장에서 고찰한 내용을 잠깐 돌이켜 보자. 형식도야 이론의 골자는, 교과는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부소능력을 도야하는 수단이 되며 교과에 의하여 도야된 부소능력은 교과 이외의 생활 사태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생활적응 교육은 일반적인 부소능력에 의한 전이를 부정 또는 불신하고 일상생활의 문제사태를 직접 교육의 내용으로 삼았다. 지식의 구조는 생활적응 교육에서 생활의 문제사태에 밀려난 교과를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으면서 그 교과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교과로서의 학문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 것은 이 대목에서였다.

  형식도야 이론이 부소능력의 도야와 일반적 전이 등의 설명을 통하여 대답하려고 한 질문은 근본적으로 교과의 가치에 관한 질문 ― 교과는 왜 배워야 하는가, 교과를 배우는 것의 의미와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 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형식도야 이론의 대답은 결국 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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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교과는 국가 통치와 지방 행정, 무역과 장사에서 시작하여 일상의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 백사를 유능하게 처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 ― 에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훌륭한 인격을 함양한다’는 누구나 하는 대답이면서도 아무도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대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대답에 관한 한, 생활적응 교육은 형식도야 이론과 다르지 않다. 어느 편인가 하면 생활적응 교육은 형식도야 이론의 대답을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밀고 나가서 유용성을 교육의 목적 ― 교과는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 ― 의 정면에 내세웠다. 교과의 가치 문제에 대한 「교육의 과정」의 대답은 분명하지 않다. 이 책에는 이따금 교과를 배우는 데서 오는 만족, 희열 등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형식도야 이론이나 생활적응 교육에서 내세우는 유용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지식의 구조라는 개념은 교과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에 보다는 교과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

  교육의 가치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인 설명이 형식도야 이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또 그 설명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 문제에 관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는 것은 쉽게 납득될 수 있다. 교과의 가치에 관한 설명은 그 문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주어진다. (교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의 가치에 관한 설명은 그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형태로 주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자면 그 설명은 자연 ‘교과는 이러이러한 쓸모가 있다’는 식이 될 것이다. 여기서 ‘쓸모’라는 것은 주로 교과를 배우는 사태 바깥에서의 쓸모를 뜻한다. 만약 교과의 쓸모가 오직 교과를 더 배우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교과가 쓸모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교과의 가치는 생활 사태에서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요지의 ‘유용성’에 의하여 설명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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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이 설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와 같이 유용성에 의한 설명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중에도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유용성이 교과의 가치를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타당하지 않거나 적어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현대에 와서 생활적응 교육이 빚어낸 폐단을 목격한 사람들은 유용성이 교육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열렬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대체로 신념이나 때로는 감정의 표현이었을 뿐, 피터즈의 「윤리학과 교육」 [각주 1: R. S. Peters, Ethics and Education, George Allen and Unwin, 1966, 李烘雨(역), 「倫理學과 敎育」, 교육과학사, 1980.] 에 나타난 것과 같은 체계적인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윤리학과 교육」은 그 주제 중의 하나로 직접 ‘교과의 가치’ 문제를 다루면서(제5장), 교과의 가치를 유용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교과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지식의 형식’(forms of knowledge, 정확하게는 ‘지식의 여러 형식들’) [각주 2: 「윤리학과 교육」에는 ‘지식의 형식’과 동의어로 ‘사고와 행위의 형식’, ‘이해의 형식’, ‘탐구의 형식’, ‘활동의 형식’, ‘의식의 양식’(modes of consciousness)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지식의 형식’이 이 모든 표현을 대표하는 것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피터즈의 동료, P. H. Hirst의 유명한 논문, ‘Liberal Education and the Nature of Knowledge’, R. D. Archambault(ed.), Philosophical Analysis and Educati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5, pp. 113-38과 Hirst와 Peters의 공저, The Logic of Educati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0에 그 용어가 사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위의 여러 표현을 참고해 볼 때, ‘지식의 형식’은 ‘앎의 형식’(즉, 인간의 행위로서의 앎이 여러 가지 형식으로 표현된다고 할 때의 그 앎의 형식)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하 3절 참조.] 이다. (‘지식의 구조’가 인식론적인 면에서 교과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라면, ‘지식의 형식’은 윤리학적인 면에서 교과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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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장에서는 피터즈의 설명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배경으로서 교육내용의 두 유형에 관하여 고찰한 뒤에 「윤리학과 교육」에 제시된 피터즈의 설명을 소개하겠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에서는 그의 설명이 삶에 관한 우리의 생각에 어떤 빛을 던져 주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 1절 보는 知識과 하는 知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를 분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손쉬운 것으로는 현재 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과목 편제에 따라 국어, 수학 등등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분류 방식의 하나로 여기서는 교육의 내용을, 그것이 가지는 가치 또는 중요성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하고 그 분류가 의미있게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분류에서 모종의 중요한 결론이 따라 나오는지를 생각해 보겠다. 그러나 이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교육내용의 분류는 또한 교육방법의 분류와 긴밀한 대응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교육내용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육방법 또한 그것을 분류하는 방식이 다양하겠지만(예컨대, 강의법, 토론법, 개별화 수업, 자동화 수업 등등), 여기서는 앞의 교육내용의 분류에 상응하는, 교육방법의 두 가지 유형을 고찰하고, [각주 3: 이하에 제시되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유형에 관해서는 李烘雨, 「敎育의 槪念」, 문음사, 1991, 제3장, 「知識의 構造와 敎科」, 교육과학사, 1978, 제5장, 「敎育의 目的과 難點」, 교육과학사, 1987, 제6장, 제8장, 「增補 敎育課程 探究」, 박영사, 1992, 제9장 참조.]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결합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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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드러나는 삶의 두 차원을 드러내어 보겠다. 이 모든 고찰은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는 교육의 측면이 어떤 것인가를 예고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1. 교육내용의 두 유형


  설명의 편의상, 먼저 교육내용의 두 유형에 속하는 예를 각각 하나씩 들고 그 중요성을 비교해 보겠다. 한 유형에 속하는 예로서는 ‘빛은 곧게 나간다’는 원리(빛의 직진)를 들 수 있고 다른 유형에 속하는 예로는 ‘퓨즈 갈아 끼우기’(퓨즈 교환)를 들 수 있다. 빛의 직진과 퓨즈 교환은 어디까지나 ‘예’이기 때문에 그것은 각각의 유형에 속하는 수많은 교육내용의 한 가지에 불과하다. (또한, 이하의 설명으로 그 두 유형이 정확하게 이해된다면 그 밖의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빛의 직진과 퓨즈 교환은 ‘교육내용’의 예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는 모두, 그것과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수많은 다른 내용과 함께,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교과)에 포함되거나 적어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빛의 직진과 퓨즈 교환의 교육내용으로서의 중요성을 비교해 보겠다. 가령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교육내용으로 가르쳐야 하는 형편이라면 그 중의 어느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 여기에 대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두 가지를 배우지 못했을 때 각각 어떤 불편이 생기는지를 생각해 보는 방법일 것이다. 퓨즈를 갈아 끼울 줄 몰라서 불편을 겪는 경우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예컨대 지금 텔레비전에서 한창 월드컵 축구 시합을 중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이 경우에는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옆집을 본 즉, 옆집에는 불이 들어와 있다. 틀림없이 퓨즈가 끊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퓨즈를 갈아 끼울 줄 모른다. 이 때의 답답한 심정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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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다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작 퓨즈 갈아 끼우는 방법을 배워놓는 건데…’ 등등. (이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점은 퓨즈 교환 뿐 아니라 그것과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모든 교육내용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요컨대 퓨즈 교환의 경우에는 생활을 하다가 보면 그것을 배우지 않아서 불편을 겪는 사태, 진작 그것을 배웠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게 되는 사태에 저절로 부딪치게 되어 있다. 생활적응 교육에서 말하는 ‘문제사태’라는 것은 아마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을 보는 도중에 퓨즈가 끊어지는 것은 문제사태의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문제해결’이라는 것은 퓨즈를 갈아 끼워서 다시 텔레비전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생활적응 교육에서 퓨즈 교환은 중요한 교육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빛의 직진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이 경우에는 생활을 해 나가는 동안에 저절로, 빛이 어떻게 나가는지 몰라서 불편을 겪는다든가 진작 그것을 배우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사태에 부딪치게 되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예컨대, ‘아, 이럴 때 빛이 어떻게 나가는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해야 할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의 직진이라는 교육내용이 성격상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은 어떻게 나가는가’라는 문제(또는, 질문)는 생활해 나가다가 보면 저절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문제로 삼을 때 비로소 문제로 제기된다. ‘빛은 어떻게 나가는가’가 문제로 제기되는 사태도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사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경우의 문제사태는 ‘퓨즈는 어떻게 갈아 끼워야 하는가’가 문제로 제기되는 사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퓨즈 교환의 경우에 문제사태는 저절로 부딪치는 반면에, 빛의 직진의 경우에 문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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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는 억지로 만들어야 한다.

  ‘문제해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퓨즈 교환의 경우에 문제해결이라는 것은 끊어진 퓨즈가 다시 연결되어 전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빛의 직진의 경우에는 이런 의미에서의 문제해결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빛은 어떻게 나가는가’라는 문제(질문)에 대하여 ‘빛은 곧게 나간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억지로 말하자면 ‘문제해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경우의 문제해결은 앞의 경우와 동일하지 않다. ‘빛은 곧게 나간다’는 ‘해결’은 ‘빛은 어떻게 나가는가’라는 질문과 별도로, 또는 질문 다음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동시에 주어지며, 그 질문의 의미는 그 ‘해결’을 떠나서는 파악될 수 없다. (이 점은 이하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이런 뜻에서, 빛의 직진의 경우에 문제해결은 차라리 ‘문제 발견’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두 가지 교육내용에 관하여 설명을 하기 전에, 처음에 제기한 질문 ― 두 가지 교육내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두 가지 교육내용 중에서 딱 한 가지만 가르쳐야 하는 형편이라면 어느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 ― 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순전히 위에서 말한 것만으로 판단한다면 그 대답은 명약관화하다. 퓨즈 교환의 경우에는 그것을 배우지 못했을 때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겪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따라서 그 유용성이나 쓸모가 쉽게 납득되는 반면에 빛의 직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만약 중요하다는 것을 유용하다든가 쓸모있다는 것과 동일한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 두 가지 중에서 중요한 것은 명백히 빛의 직진이 아닌 퓨즈 교환이며, 또한 그 두 가지 중에서 오직 한 가지만 가르쳐야 할 경우에 선택되어야 할 것도 이쪽이다.

  사실상, 이것이 형식도야 이론과 생활적응 교육, 그리고 다소간은 지식의 구조에 공통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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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것은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들은 중요하다는 것과 유용하다는 것을 동일한 뜻으로 해석하고 교육내용의 중요성을 오직 이 기준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만약 빛의 직진이 교육내용으로 중요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퓨즈 교환이 중요한 것과 동일한 점에서(즉, 유용하다는 점에서) 중요해야 하며, 만약 이 면에서의 중요성이 부정되거나 의심스러워지면 그것은 바로 교육내용으로서의 빛의 직진, 그리고 그것과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학교 교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육내용의 중요성이 부정되거나 의심스러운 것으로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어김없는 사실은 세계의 어느 학교에서든지 빛의 직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교육내용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학교는 모두 중요하지 않은 내용, 엉뚱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가? 만약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빛의 직진에는 퓨즈 교환이 나타내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유용성이 없다면, 거기에는 하등의 중요성도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빛의 직진은 퓨즈 갈아 끼우는 것이 유용하다고 할 때와 동일한 의미에서 유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육내용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빛의 직진과 퓨즈 교환 사이에 있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차이를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혜택의 범위와 실현 경로에 있어서의 차이이다. ‘퓨즈 갈아 끼울 줄 아는 것’의 혜택은 나 혼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며, 그 혜택은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실현될 수 있다. 누가 퓨즈를 갈아 끼우든지 간에 전기는 들어오며, 일단 전기가 들어오면 그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축구 중계를 다시 시청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은 직진한다는 것을 아는 것’의 경우에는, 만약 거기서도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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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 혜택이 생긴다면, 또는 만약 그것도 혜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혜택은 오직 나에게만 미치며 또 오직 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하여 빛의 직진을 대신 알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빛의 직진을 아는 것은 오직 나에게 좋을 뿐이다.

  방금 위에서 말한 이 차이는 퓨즈 교환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말해 주며, 그와 동시에 빛의 직진에도 비록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성 또는 유용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퓨즈 교환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한 마디로 말하여 외적(外的) 사태의 변화에 있다. 누가 퓨즈를 갈아 끼우든지 간에 외적 변화를 초래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든가, 그 변화는 그것을 일으킨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사태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미친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해 준다. 여기에 비하여 빛의 직진은 그것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빛이라는 현상을 이때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보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앞의 외적 사태의 변화와 대비시켜 말하자면, 빛의 직진의 목적은 내적(內的) 안목의 변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하여 빛의 직진을 알아줄 수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의 눈을 대신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하여 만약 빛의 직진을 아는 것에 무엇인가 중요성이나 유용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내적 안목’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이나 유용성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만약 내적 안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거나 유용하다면 빛의 직진이 중요하거나 유용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며, 그 반대로 빛의 직진에 퓨즈 교환의 경우와 동일한 종류의 유용성이 없다고 하여 그 중요성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내적 안목’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이상의 설명은 빛의 직진과 퓨즈 교환을 각각의 예로 하는 교육내용의 두 유형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어 준다. 보통의 용어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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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을 ‘지식’과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빛은 직진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든지 ‘퓨즈를 갈아 끼울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두 가지는 모두 ‘아는 것’ 즉 ‘지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새는 ‘인지적 기술’(認知的 技術, cognitive skill)과 같이 순전히 수공적(手工的)인 것이 아닌 지적(知的)인 것에도 ‘기술’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하는 지식’과 ‘보는 지식’으로 부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외적 사태의 변화를 초래하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데 사용되는 지식을 뜻하며, ‘보는 지식’이라는 것은 그런 조치와는 무관하게 사물과 현상을 ‘보는’ 데에 사용되는 지식을 뜻한다. [각주 4: 보는 지식과 하는 지식은 서양 철학에서 빌어 온 용어인 ‘이론적(理論的) 지식’과 ‘실제적(實際的) 지식’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이론과 실제라는 말에는 쓰는 사람에 따라 위의 본문에서 말한 것 이외의 의미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교육내용의 두 유형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맨 처음의 질문 ― 그 두 가지 교육내용 중에서 오직 한 가지만 가르쳐야 한다고 할 때 어느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 ― 에 대한 대답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제 와서 그 대답은 앞에서 애벌로 한 대답처럼 명약관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대답은 완전히 거꾸로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몇 사람만 배워도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내용과 당사자 자신이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내용 ― 누구나 배울 필요가 없는 내용과 누구나 배워야 하는 내용 ―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꼭 가르쳐야 하는가?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생활 사태의 유용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빛의 직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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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교육방법의 두 유형


  위에서 설명한 교육내용의 두 유형은 그 속에 이미 교육방법의 유형을 암시하고 있다. 교육방법을 분류하는 관점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근래에 와서 교육철학자들은 교과를 가르칠 때 교사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교육방법을 분류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즉, 교사는 단순히 학생으로 하여금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둘 수도 있고, 그와는 달리, 그것을 따르는 것 그 자체보다는 학생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입각하여 그것을 따르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둘 수도 있다. ‘학생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입각하여 그것을 따르도록 한다’는 말에 이미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교사라면 누구든지 학생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의도가 없이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누군가가 이 의도가 없이 가르친다고 말한다면 그는 교사가 아니다.

  그러나 또한, 학생이 교사의 가르침을 따를 때 그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입각하는 정도, 또는 그와 마찬가지로 교사가 학생으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할 때 학생 자신의 능력과 판단을 존중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보통의 교육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교사의 이 두 가지 의도 ―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겠다는 의도와 학생 자신의 능력과 판단을 존중해 주려는 의도 ― 는 교과를 가르치는 사태에 동시에 들어 있지만,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는 이 후자의 의도(또는 전자의 의도)가 중요시되는 정도에 따라 하나의 연속선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연속선을 반으로 자르면 우리는 교육방법의 두 가지 유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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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수 있다. 즉, 한쪽 유형에서는 교사가 학생으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반면에 다른 쪽 유형에서 교사는 그것보다는 학생 자신의 능력과 판단을 존중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위의 두 유형의 구분은 자연적인 연속선을 반으로 잘라 억지로 만들어낸, 순전히 임의적인 것이요 따라서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잘 가르친다’는 말의 의미가 두 유형에서 완전히 다르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구의 자전을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지구의 자전은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이르기까지 ‘나선형’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교사는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해가 동쪽으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지구가 한 번씩 서에서 동으로 자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수업이 끝난 뒤에 학생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교사는 잘못 가르친 것인가? 첫째 유형에 의하면 교사는 분명히 잘못 가르친 것이다. 그 교사는 학생으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둘째 유형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학생이 지구 자전에 관한 교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근거에는 ‘해가 동쪽으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天動說) 대신에 지동설(地動說)을 택하였을 때의 고려 사항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준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앞에 든, 가장 유치한 것으로 보이는 근거조차도 지구 자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근본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초등학교 학생이 실지로 그것을 근거로 하여 교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학생은 명백히 천재이며, 그 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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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그 교사 또한 천재이다. (1+1=2를 가르친 교사에게 찰흙 뭉치 두 개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보이면서 ‘1+1이 어째서 1이 아니고 2냐’고 대들었다는 에디슨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에디슨의 그 ‘바보같은’ 질문은 1+1=2라는 수학적 지식의 기본 가정에 관련된다. 에디슨을 퇴학시킨 교사는 분명히 학생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은 교사이다.) 어쨌든, 학생이 교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은 첫째 유형에 의해서는 교사가 잘못 가르쳤다는 어김없는 증거가 되지만, 둘째 유형에서는, 만약 그것이 학생 자신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또 만약 그 판단이 교사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교사로서의 가장 찬란한 성공을 의미한다. 물론, 이 찬란한 성공은 아무나 쉽게, 또 자주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교육방법의 두 유형을 편의상 ‘설득(說得)을 위한 교육’과 ‘이해(理解)를 위한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설명에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여기서 ‘설득’이라는 것은 ‘이해를 통한 설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설득 그 자체, 또는 이해와 무관한 설득을 가리킨다. (우리는 여전히 ‘정도의 차이’를 ‘종류의 차이’로 바꾸어 생각하고 있다.) 근래 교육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온 ‘수업’(授業, instruction)과 ‘교화’(敎化, indoctrination)의 구분은 위의 두 유형의 구분과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교화’는 그것에 대비되는 ‘수업’과 마찬가지로 지식과 신념을 그 내용으로 하며, 여기에 대하여 행동과 기술을 내용으로 할 경우에는 ‘조건화’(條件化, conditioning)나 ‘훈련’(訓練, training)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 수업과 교화,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훈련, 조건화 등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기서 자세하게 다룰 수 없는 복잡한 논의가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수업은 학생 자신의 사고와 판단, 이유와 근거를 존중하는 교육방법을 가리키는 반면에 교화는 특히 종교나 도덕 분야에서 학생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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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특정한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교육방법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육이 될 수 없다는 뜻에서 ‘교화’는 ‘교육’과 대비되기도 한다. 어째서 그것이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육이 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그것은 ‘학생을 존중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이하 설명 참조.)

  결국, 설득을 위한 교육과 이해를 위한 교육이라고 부른 교육방법의 두 유형의 차이는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학생의 반응 그 자체 ― 이러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든지 이러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 에 관심을 두는 것과 학생 마음 속에 일어나는 변화에 관심을 두는 것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두 측면을 때로 ‘결과와 과정’ 또는 ‘내용과 방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표현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두 유형의 기저에는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학생을 보는 교사의 상이한 관점, 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하여 교사의 상이한 ‘인간관’(人間觀)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설득을 위한 교육을 할 때 교사의 관심은 학생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옳은 것으로 믿게 되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가에 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학생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고 저렇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학생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존재이며, 학생이 그것을 따라 할 수 있게 되면 그것으로 그의 관심은 끝난다. 이런 뜻에서 그는 학생을 ‘수단’으로 본다고 말할 수 있으며, 가르치는 일에 관한 한, 그는 ‘수단적(手段的)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이해를 위한 교육에서 교사의 관심은 학생의 내면적 변화 ― 그는 어떤 인간이 되는가, 인간으로서의 그는 어떤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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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는가 ― 에 있다. 교사가 학생의 ‘인격적 성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경우이다. 이 때 교사는 학생을 ‘목적’으로 보며, 가르치는 일에 관한 한, 그는 ‘목적적(目的的)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때로 교화가 교육과 대비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은 학생의 인격적 성숙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 점이 교육방법의 두 유형과 교육내용의 두 유형 사이의 관련을 암시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는 지식’의 중요성은 외적 사태의 변화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는 지식의 경우에는 설득을 위한 교육이 정당한 방법이 된다. 끊어진 퓨즈를 갈아 넣는 것이 목적인 경우에는 학생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되며, 그것을 하는 동안에 학생의 인간됨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보는 지식’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보는 지식의 중요성은 내적 안목의 변화에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설득을 위한 교육은 전혀 부적절하다. 보는 지식이 그 성격에 맞게 가르쳐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학생의 반응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렇게 될 경우에 그것은 학생의 안목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학생의 인간됨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육 사태에서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 사이의 이 관련이 올바르게 존중되지 못하고, 보는 지식을, 설득을 위한 교육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경우, 그리하여 보는 지식을 하는 지식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교육철학자들이 수업과 교화의 구분을 중요시하는 것은 아마 이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는 데에 그 참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교육과 삶의 두 측면


  그런데 수업과 교화에 관한 교육철학자들의 논의에서 한 가지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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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점은, 그들의 논의에서는 교사(또는 일반적으로 교육을 하는 사람)가 어째서 교화를 하는가 하는, 교화를 이해하는 데는 필수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교화가 ‘나쁜’ 교육방법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은 왜 교화를 하는가? 교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화가 ‘나쁜’ 교육방법인 줄 몰라서 그렇게 한다든지, 만약 그들도 교육철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나면 당장이라도 교화를 그만둘 수 있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교화를 하는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질문을 일단 이런 식으로 제기해 놓고 보면 그 대답을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는 교화(또는 설득을 위한 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끊임없이 대두된다는 것이다. 이 사태는 당장 모종의 행동이나 조치를 요구하며, 그 행동이나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학생(또는 피교육자) 편에 특정한 신념과 행동을, 맹목적으로라도, 받아들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한 교육철학자가 든 교화의 보기는 이 점을 설명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그에 의하면, 밤 열 시가 되어도 자러 가지 않는 여섯 살 짜리 아이에게 아버지가 ‘네가 자러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 아닌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며 그 점에서 ‘교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교화이든 아니든 간에,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 경우에는 어떤 아버지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잠자리에 들여 보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철저하게 ‘교육적인’(그러나 분명히 ‘정신나간’) 아버지가 있어서 이 사태를 수업(또는 이해를 위한 교육)의 사태로 생각하고, ‘아버지가 자식에게 잠자리에 들도록 명령하는 것’에 관하여 아들 자신의 이해나 인간됨을 바꿀 목적으로 ‘참인 내용’을 말한다고 하자.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흘러 열한 시, 열두 시, 새벽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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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되도록 아이는 자러갈 수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재 우리  나라에서 입시 준비는 때로 ‘지식’(또는 보는 지식)을 ‘교화’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는 외부적인 반응 그 자체가 끊임없이 요구된다는 것, 그리고 설득을 위한 교육은 우리 삶에 엄연히 존재하는 삶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를 위한 교육이라고 하여 삶을 떠나서, 삶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 또한 삶의 또 하나의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교육내용의 두 유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의 삶은 문제사태의 연속이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의 삶은 ‘하는 지식’의 힘을 빌어야 할 외적 사태의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하는 것’과 ‘보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으며 또 거의 언제나 동시에 하고 있다. 우리는 외적 사태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무슨 일인가를 하며 또 그와 동시에 그 사태와 관련된 현상을 보기도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는 것과 보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그 두 가지 일이 성격상 판이해서 서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것과 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때로 보는 지식과 하는 지식이 수단(手段)과 목적(目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오해되고 따라서 이 두 가지가 각각 삶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낸다는 점이 올바르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모든 교과는 궁극적으로 ‘하는 지식’으로서의 유용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나오게 된다.)

  퓨즈 갈아 끼우는 것을 보기로 하여 이 점을 설명해 보겠다. 퓨즈 갈아 끼우는 사태와 관련해서도 성격상 빛의 직진에 해당하는 ‘보는 지식’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컨대 전동기의 원리(‘왼손 법칙’과 ‘오른손 법칙’)나 옴의 법칙이 그것이다. 퓨즈를 갈아 끼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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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에 이런 것들에 관하여 생각하면서 그런 원리에 들어 있는 눈으로 전기라는 현상을 볼 수는 있지만, 그런 원리에 관한 지식이 퓨즈 갈아 끼우는 것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즉, 전기라는 현상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퓨즈를 갈아 끼울 수 없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요, 그것을 알고 모르고는 결과적으로 불이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빛의 직진은 이 점을 훨씬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빛의 직진이라는 ‘보는 지식’이 역사상 언제 생겼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아마 서양 중세), 적어도 그것이 수단이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예컨대 커튼으로 이웃의 눈을 가리는 것, 여름날 나무 그늘에 앉는 것 등등) 보다 훨씬 늦게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빛의 직진을 다루는 교과서에는 반드시 태양과 막대기의 그림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이 나와 있지만(태양 광선은 거의 언제나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빛은 곧게 나간다’라는 명제나 ‘빛은 어떻게 나가는가’라는 질문은 모두 그 그림과 함께 생겼다. 그 그림이 생기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빛은 어떻게 나가는가’라는 질문은 전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 그림과 그 명제와 그 질문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빛’을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빛의 직진은 문제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빛이라는 현상을 보는 ‘수단’으로 생겼음을 말해 준다. (이 후자의 ‘수단’이라는 용어는 이하 2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정확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위의 다소 지루한 설명은 결국 보는 지식과 이해를 위한 교육, 그리고 하는 지식과 설득을 위한 교육이라는,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의 결합은 삶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 두 가지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위한 수단이 되는 그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두 가지 대등한 측면이다. 이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지식의 형식’이라는 용어에 나타난 피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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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교과관은 교육의 의미를 그 두 가지 측면 중의 어느 한 가지로 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삶에서의 교육의 위치를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제 2절 敎科로서의 ‘知識의 形式’


  피터즈의 「윤리학과 교육」에는 브루너의 「교육의 과정」에서와 같은 극적인 배경은 없다. 그 책에서 피터즈는 자유, 평등, 인간존중 등 윤리학의 근본 원리를 정당화(正當化)하는 논의 형식 ― 이것을 피터즈는 ‘선험적(先驗的) 정당화 논의’라고 부른다 ― 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교육에 적용하는 동안에, 그 한 부분으로 학교의 교육과정에 등장하는 이론적 교과(즉, ‘주지교과’)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당화한다. 그의 책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 다음으로 손꼽힐 만큼 중요한 저작으로서 그의 주장에 찬성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논의되고 널리 영향을 미쳐 왔다. 다소간은 피터즈 자신이 의도한 바였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주장은 고대 희랍 이후 서양의 중요한 교육 전통으로 계승되어 온 ‘자유교육’(自由敎育, liberal education)의 정신을 현대의 상황에서 되살려내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교과를 실용적 가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현대에 와서 점점 강해지는 경향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교과의 ‘내재적 가치’(內在的 價値)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교과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내재적 가치와, 둘째로 그 가치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의 선험적 정당화 논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절에서는 먼저 이 두 가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그의 교과관을 알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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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재적 가치


  ‘무엇무엇은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 또는 ‘무엇무엇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가장 흔하고 손쉬운 방법은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가,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달성될 수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방법일 것이다. 이하에서 설명할 바와 같이, 이 대답이 만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조건이 갖추어져서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것으로 판명되면, 그 ‘무엇무엇’에 해당하는 것은 ‘수단으로서의 가치’ 또는 ‘수단적 가치’(instrumental value)를 가진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수단-목적의 관계에 의하여 어떤 것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을 ‘수단적 정당화’ 또는 ‘외재적 정당화’(外在的 正當化, extrinsic justification)라고 부른다. (‘정당화’라는 것은 반드시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가령 이 절의 첫머리에서, 「윤리학과 교육」에서 피터즈는 자유, 평등 등의 윤리학적 원리를 정당화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자유나 평등이라는 원리로 기술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가치 ― 어째서 그런 행위를 해야 하는가, 그런 행위는 어째서 올바른가 ― 를 설명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목하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교과의 정당화라는 것도 교과에 관하여 우리가 하는 행위, 즉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 ― 또는 한 마디로, 교육하는 행위 ― 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과의 정당화’가 때로 ‘교육의 정당화’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점에서 매우 당연하다.)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와 ‘내재적 정당화’(intrinsic justification)는 ‘수단적 가치’와 ‘외재적 정당화’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가치의 성격과 가치의 설명 방식이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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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과 대비되는 수단적 가치를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단적 가치는 수단-목적의 관계에 의하여 설명되는 가치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수단-목적의 관계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가, 수단-목적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조건이 무엇인가, 그리고 수단-목적의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로 가치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있다. 수단-목적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조건에 관한 이하의 설명은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번거롭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은 복잡할 것도 번거로울 것도 없고, 우리가 보통 수단과 목적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미를 드러내어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단-목적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아마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수단과 목적은 ‘개념상(槪念上) 무관한’ 것, 또는 의미상 별개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부하는 것과 책 읽는 것 사이의 관계를 ‘책 읽는 것은 공부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단-목적의 관계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책 읽는 것은, 공부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공부하는 것의 의미의 한 부분이며 이 점에서 그 두 가지는 개념상 관련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이 A와 B가 개념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A가 B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말은 의미있게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낚시질을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삼는다’라는 말은 의미있게 성립한다. 낚시질 속에 생계유지가 의미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 가지는 개념상 무관한 것, 또는 의미상 별개의 것이다.

  이것이 수단-목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조건이기는 하지만, 실지로 어떤 것의 가치를 수단적 가치로 설명할 때에는 이 조건은 이미 갖추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왜냐하면 이런이런 것이 어디에 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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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어디에 유용한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이 아닌 다른 것, 그것과 개념상 무관한 것을 찾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수단적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 ‘개념상 무관한 것’을 찾는다는 뜻이다. ‘수단적 가치’를 ‘외재적 가치’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것에 의한 정당화를 ‘외재적 정당화’라고 부를 때 그 ‘외재’(바깥)라는 말은 곧 목적이 수단의 ‘바깥’에 있다는 것, 목적이 수단과 개념상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단과 목적이 개념상 무관하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단과 목적의 ‘관계’라는 말이 이미 암시하듯이, 만약 그 사이에 어떤 종류의 관련도 없다면 그것은 수단과 목적으로 맺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개념상으로(또는 의미상으로)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도 그 사이에 관련이 성립할 때 이 관련을 사실상(事實上)의 관련, 또는 인과적(因果的) 관련이라고 부른다. 사실적, 인과적 관련은 과학이 추구하는 관련이다. 예컨대 기체의 부피와 압력은 그 각각의 의미 속에 반대쪽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보일은 그 사이에 사실적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수단과 목적 사이에 있는 이런 종류의 관련을 ‘외재적 관련’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수단과 목적 사이의 관련이 개념적 관련이 아닌 ‘외재적 관련’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원칙상으로 말하여,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항간에 회자되는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속담은 수단-목적의 관계의 이러한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또한, 수단과 목적은 동떨어져서는 안되며 그 사이에는 반드시 관련이 있어야 한다. 외재적 정당화와의 관련에서 보면, 이것은 그 수단을 쓰면 틀림없이 그 목적이 달성된다는, 이른바 수단의 효율성에 관계된다. 이 수단의 효율성 또한 수단-목적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한 가지 조건이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수단이 수단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그것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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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하여 달성되는 목적의 가치에 의존한다. 만약 목적이 가지는 가치가 의심스러우면 수단이 가지는 가치도 따라서 의심스러워진다. 이 점 또한 어떤 것의 가치를 수단-목적의 관계로 설명할 때에는 이미 가정되어 있다. 외재적 정당화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만한 목적을 들어 목하 문제되는 것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수단이 된다고 말하고 듣는 사람도 대체로 그 설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가령 A가 B의 수단이 된다고 할 때 B의 가치가 의심스러워질 경우에는(‘B는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 다시 B를 수단으로 하여 달성되는 그보다 높은 수준의 C라는 목적을 든다. 이와 같이 수단과 목적은 그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의 수단에 대해서는 목적인 것이 그 위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된다는 식으로 그 위치가 달라진다. 다시 말하면 수단-목적의 관계는 ‘연쇄’를 이루고 있다. 이 연쇄는 이론상으로는 끝이 없이 나아갈 수 있지만, 실지 사태에서는 피차 설명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연쇄의 어느 지점에서도 수단과 목적의 위치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수단은 반드시 목적보다 시간상으로 먼저 와야 한다.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수단을 강구했다는 뜻이며, 따라서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에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수단과 목적은 개념상 별개의 것이므로 수단을 강구하기 전에 그것과는 무관하게 목적을 설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목적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적, 또는 ‘예견된 목적’이다.)

  외재적 정당화의 핵심이 되는 수단-목적의 관계를 가능한 한 자세하게 규정하자면 이상과 같다. 내재적 가치는 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는 가치이다. 흔히 수단적 가치는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로 규정되는 데에 비하여 내재적 가치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라는 용어로 규정된다. 그러나 어떤 것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이 말은 내재적 가치를 전혀 그릇되게 규정한다고 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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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을지 모르나 그 말만으로 내재적 가치를 충분히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여기서 말하는 내재적 가치와는 다른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수단-목적 관계의 연쇄에서 가상적으로 상정되는 맨 마지막 목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즉, A와 B, B와 C 등등으로 연쇄가 진행되다가 맨 마지막 Z에서는 그 이상의 목적을 물을 수 없는 사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Z의 가치는 ‘궁극적 가치’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내재적 가치는 아니다. 그 Z는 수단-목적 연쇄의 맨 마지막에 있기는 하지만, 그 가치는 여전히 외재적 정당화 방식에 속하며 그것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내재적 가치는 외재적 정당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로,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어떤 행위나 활동이 주는 심리적 만족, 즐거움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 가치든 아니든 간에,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진다면 거기서 모종의 심리적 만족이 반드시 따라온다고 볼 수는 있지만, 심리적 만족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특히 교과의 경우에, 교과 공부가 즐거움을 주는 경우가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경우에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즐거움을 내재적 가치의 의미로 삼는다면 교과 공부는 이 사람, 이 경우에는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만 다른 사람, 다른 경우에는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수단적 가치에 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내재적 가치에 관한 말로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의 두 가지 의미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서,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그 가치를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설명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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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면 모르되, 원칙상 설명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가치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적어도 피터즈에 의하면, 내재적 가치는 설명될 수 없는 것도 아니요 설명될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설명을 들은 사람이 그것을 납득하는가 않는가(그에게 심리적 만족을 주는가 않는가)와는 상관 없이 내재적 가치는 설명될 수 있으며 또 설명되어야 한다. 다만 그 설명이 수단적 가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져야할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말이 내재적 가치를 잘못 규정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내재적 정당화의 관심이 목하 문제되는 행위나 활동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며, 이 점에서 그것은 내재적 가치의 한 중요한 측면을 드러내어 준다. 사실상, 이 점은 앞에서 다소 번거롭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한 외재적 정당화의 특징에 이미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외재적 정당화가 한 행위의 가치를 그것의 바깥에 있는, 그것과 개념상 무관한 어떤 것의 가치로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안적인 설명 방식으로서의 내재적 정당화는 한 행위의 가치를 그 안에서, 그것과 개념상으로 관련된 것(즉, 그것의 ‘의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외재적 정당화가 눈을 바깥 쪽으로 돌린다면, 내재적 정당화는 눈을 안 쪽으로 돌려 목하 문제되는 행위 그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고 거기에 무엇인가 가치롭게 여길 만한 것이 없는가를 찾으려고 한다.

  여기에 특히 교과를 내재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수단-목적의 관계에서 수단의 가치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된다는 바로 그 점에 있으며,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효율성을 발휘하는 한, 그 수단은 어떤 것이 되든지 상관 없다. 가령 교과를 그것과는 다른 (외재적)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정당화할 경우에는 교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교과가 교과 아닌 것으로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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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이 있다. 교과의 내재적 정당화는 우리의 관심을 교과 그 자체에 돌림으로써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의미가 살아나도록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것은 곧 교육의 의미를 올바르게 살려내는 길이 되기도 한다.


   2. 교과의 선험적 정당화


  피터즈가 교과의 내재적 가치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한 논의 방식인 ‘선험적 정당화’(先驗的 正當化, transcendental justification)에 관하여 알아보기 전에, 그가 교과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형식’(‘지식의 여러 형식들’)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알아 보겠다. 그는 허스트와의 공저(앞의 주 2 참조)에서 지식의 형식을 1) 논리학과 수학, 2) 자연과학, 3) 인간과학, 4) 역사, 5) 종교, 6) 문학과 예술, 7) 철학, 8) 도덕적 지식의 여덟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 분류가 타당한가, 이 분류가 지식의 형식을 망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각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분류이며 예컨대 그와 같이 분류될 수 있는 ‘지식의 형식’이라는 것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당장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위의 목록은 학문을 그 성격이 비슷한 것끼리 묶어 놓은 것이다. (이 점에서 지식의 형식은 앞 절에서 말한 ‘보는 지식’, 그리고 브루너가 그 구조적 성격에 비추어 파악하고자 한 학문과 동일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성격이 비슷한 것끼리 묶는다’고 할 때의 ‘성격’이라는 용어는 의미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한 학문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그것에 사용되는 주요 개념과 탐구 방법(또는 진위를 판별하는 방법)이며, 따라서 위의 목록은 학문을 그 주요 개념과 탐구 방법이 유사한 것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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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해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윤리학과 교육」의 앞 부분(제2장)에서 피터즈는 ‘지식의 형식’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즉, ‘공적(公的) 언어에 담겨 있는 공적 전통’, ‘공적 유산’, ‘분화된 개념 구조’ 등이 그것이다. 이들 표현은 지식의 형식의 의미에 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시사를 준다. 첫째로, 지식의 형식은 인간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누적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다. 둘째로,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분화된 개념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과 ‘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비례한다’는 말이 상이한 종류의 지식(상이한 ‘지식의 형식’)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분화된 개념 구조는 인간 경험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이 누적적으로 발전시켜 온 공적 전통, 또는 공적 유산이다. ‘지식의 형식’이 나타내는 이 모든 의미는 우리가 ‘학문’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교과로서 ‘지식의 형식’ 또는 ‘학문’을 배울 때, 우리는 인간의 그 공적 전통에 ‘입문’(入門)하여 거기에 참여한다.

  ‘교과가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이 ‘지식의 형식’이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터즈가 그의 ‘선험적 정당화 논의’로 밝히려고 하는 것은 이 지식의 형식이 수단-목적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만약 피터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교육내용으로서의 지식의 가치를 수단-목적 관계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확립하는 한 가지 관점을 가지게 된다.

  ‘선험적 정당화’에서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그 말 자체로는 ‘경험을 초월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선험적 정당화는 개인의 의식적인 사고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는가 아닌가와는 무관하게 성립하는 그런 정당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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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험적 정당화의 내용은 개인이 심리적으로 그것을 납득하든지 않든지 간에, ‘논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스로 모순이나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터즈는 그의 논의의 형식을, ‘선험적’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철학에서 빌어왔다고 말한다(p. 99). [각주 5: 이하 본문의 페이지 수는 「倫理學과 敎育」 번역판의 페이지를 가리킨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과 프랑스 혁명에서 강한 감명을 받고, 도대체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인간의 사고나 지성에 관하여 무엇을 논리적으로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여기서 ‘논리적 가정’(論理的 假定)이라는 것은 어떤 말이나 행위가 의미를 가지려면(개인이 원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 전제로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명제나 입장을 가리킨다. 예컨대 ‘어제 밤 영화 구경은 재미있었다’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영화 구경이 실지로 재미있었건 없었건 관계 없이) 어제 밤에 영화 구경하러 갔다는 것을 논리적 가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앞의 말을 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뭉게어 버리는 셈이 된다. (이것이 ‘모순’(矛盾, 창과 방패)의 가장 정확한 의미이다. 그리고 이 나중의 논리적 가정은 앞의 말과 개념상으로 관련된, 그 말의 의미의 한 부분을 이룬다.)

  피터즈의 선험적 정당화 논의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교과는, 자유, 평등 등의 윤리학적 원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정당화 요구 그 자체의 논리적 가정에 의하여 정당화된다’는 식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pp. 100-2). (이 점에서 선험적 정당화는 때로 ‘논리적 가정에 의한 정당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피터즈 자신은 이 논의를 ‘평등’의 원리에 먼저 적용하지만(제4장), 여기서는 직접 교과(즉,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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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형식’)를 대상으로 하여 거기에 위의 논의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생각해 보겠다.

  이제 어떤 사람이 ‘지식의 형식은 어째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고 하자. (이것이 ‘지식의 형식에 대한 정당화 요구’이다.) 그는 이 질문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애써 그 대답을 알아내려고 한다. 한 가지 어김없는 사실은, 그의 이 질문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특정한 맥락에서 제기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질문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만큼, 그는 이미 이 맥락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그 질문을 한다. 그 맥락이라는 것은 ‘공적인 언어 속에 담긴 분화된 개념구조’가 사용되는 맥락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맥락, 지식의 형식을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맥락이다. 그의 질문은 이 맥락에서 생겨나며 이 맥락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면 그는 지식의 형식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개념구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개념구조 이외에는 달리 의존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의 질문은 지식의 형식이 가치있다는 논리적 가정에 입각해서만 의미있게 성립하며 따라서 그가 자신의 질문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는 원칙상 또는 논리적으로 ― 즉, 의식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관계없이 ― 그 논리적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피터즈의 선험적 정당화의 골자를 될 수 있는 한 쉽게 풀이하자면 이상과 같다. 피터즈 자신의 글 속에서 위의 의미가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구절을 찾는다면 아마 다음의 구절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피터즈의 글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친절하지’ 않다.)


  누구든지 일상적인 생활에서 한 발자욱 물러서서 ‘왜 이렇게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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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해야 하는가’[또는, 이 경우에는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자신의 의식 속에 진리에 관한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사태에 관하여, 또 그 대답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사실에 관하여 스스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이론적 탐구[즉, 지식의 형식]는 그와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인간 경험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한다는 것은, 아무리 초보적인 수준에서라고 하더라도, 그 질문을 하게 하는 실재(實在) 세계의 다양한 측면에 관한 심각한 관심, 즉 이론적 탐구에의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p. 163).


  위의 설명을 읽은 독자 중에는, 피터즈의 「윤리학과 교육」을 읽은 세계의 허다한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형식의 가치’에 관하여 무엇인가 설명된 것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치롭다’는 느낌이 들 만한 내용은 아무 것도 없으며, 기껏해야 지식의 형식의 가치는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 (또는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터즈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의 형식은 우리 삶을 받쳐주고 있는 궁극적 기반이라는 것이다. 지식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적 의무’이며, 지식의 형식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왜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행위 그 자체를 포함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피터즈의 설명에서 무엇인가 가치롭다는 느낌을 줄 만한 말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시 그 ‘가치’라는 것을 오로지 ‘수단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한다. 물론, 피터즈는 수단적 가치를 말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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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신상에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수단적 가치만을 가치로 인정할지 모르지만,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재적 가치’라는 것은, 심지어 ‘수단적 가치’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인가를 포함하여, 삶 그 자체의 의미가 달려 있는 가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피터즈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육’(내재적으로 가치있는 내용을 전수하는 일)은 오직 한 개인의 관심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교육은 지식의 형식이라는 공적 전통 또는 공적 유산에 사람들을 입문시킴으로써 그 전통과 유산이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져 나가도록 하는, 종족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영위이다. 교육은 ‘문명된 삶의 형식에로의 성년식(成年式)’(제2장)이라는 말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3. 지식과 마음과 실재


  앞의 1장 마지막 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교과의 두 측면 ― ‘마음’이라는 주관적 측면과 ‘실재’(實在)라는 객관적 측면 ― 과 관련하여 피터즈의 교과관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 마음의 개념에 관한 피터즈의 견해는 형식도야 이론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 피터즈에 의하면 마음은 ‘부소능력’이라는 형태로 처음부터 개인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공적(公的) 언어에 담긴 분화된 개념구조에 입문함에 따라 점차로 획득된다. 이 점에서 마음의 개념에 관한 피터즈의 견해는 존 듀이의 견해와 유사하다. 만약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존 듀이에 있어서 마음은 사회적 상황에서의 유목적적 활동(문제해결 활동)을 통하여 획득되는 반면에 피터즈에 있어서 마음은 공적 개념구조(즉, 지식의 형식)에 입문됨으로써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느 정도로 중요한가하는 것은 장차의 연구에 의하여 좀더 철저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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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의 자율성과 독창성에 대한 존중을 그 이론의 한 부분으로 명백히 내세우는 존 듀이의 경우와는 달리, 피터즈의 경우에는 공적 개념구조에 학생들을 입문시키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자율성과 독창성이 억압되거나 무시된다는 우려를 자아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한편으로 개인의 마음과 또 한편으로 공적 개념구조를 서로 대립된 것으로 보고 공적 개념구조를 개인의 마음에 대하여 이질적으로 보는 데서 빚어진다. 그러나 사실상 공적 개념구조는 개인의 마음 바깥에서 개인의 마음을 구속하는 족쇄가 아니라, 개인의 마음을 채우는 내용물이다. 공적 개념구조에 입문되기 전에는 개인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공적 개념구조에 입문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person)이라고 부르는 의식(意識)의 구심점(求心點)을 형성한다. 개인의 자율성과 독창성은 공적 개념구조에 입문된 뒤에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발휘된다. 그리고 그 기반은 자율성과 독창성이 발휘될 여지를 얼마든지 넓게 확보해 두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그 마음을 획득하기 위하여 입문해야 하는 공적 개념구조(지식의 형식)와 ‘실재’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피터즈는 아마 그가 따르는 철학 사조(분석철학) 때문이겠지만,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개념으로서의 ‘실재’를 가정하기를 기피한다.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의 실재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 또는 ‘형식’(Form) [각주 6: 근래에 와서 철학자들은 희랍어의 영어 표기인 Idea가 주관적인 의미로 잘못 이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그 대신에 Form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과 같이 진리와 가치의 궁극적 기준을 뜻한다. 피터즈는 응당 ‘실재’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경우에 그것을 ‘경험’이라는 용어로 대치한다. 예컨대 공적 개념구조인 지식의 형식에 관하여 말할 때 피터즈는, 지식의 형식은 ‘실재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대신에 ‘인간 경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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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한 측면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각주 7: 앞에 인용된 「윤리학과 교육」, p. 163 참조. 피터즈의 동료인 Hirst는 지식의 형식을 설명한 그의 유명한 논문(주 2)에서 이 입장을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이하에서 설명할 바와 같이, 지식의 형식을 규정하는 데에 ‘실재’라는 용어를 쓰는가 ‘경험’이라는 용어를 쓰는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철학 사조 여하를 막론하고 오늘날 철학자로서, 플라톤의 저작을 순전히 언설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때로 생각하듯이, 영원불변의 궁극적 기준으로서의 실재라는 것이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별도로 존재한다든지, 그와 같이 존재하는 실재를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직접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실재라는 것이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진리와 가치의 궁극적 원천이 되는 실재는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실재를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의 존재는 피터즈가 교과의 내재적 가치를 밝히는 데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논의형식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 즉,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식을 추구하고 경험을 획득하는 우리의 노력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논리적 가정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은 반드시 그 무엇에 관한 지식이요 경험이며, 그 무엇을 드러내려는 노력이다.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고 획득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려고 하는 그 무엇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지식의 추구와 경험의 획득 그 자체를 무효화하는 셈이 된다.

  지식의 형식이 실재와 관련을 맺지 못할 때, 지식의 형식에 입문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노력은 그것이 가질 수 있고 당연히 가져야 하는 궁극적인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교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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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불변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한다는 가장 고귀한 역할을 망각하게 된다. 피터즈의 훌륭한 논의가 ‘실재’를 ‘경험’으로 대치하는 한, 그에게 있어서 그 고귀한 역할은 기껏해야 공적 또는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에 도달하고 그 합의를 전수해 준다는 것으로 축소될 것이 분명하다. 피터즈의 교과관은 장차 이면에서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보완은 피터즈가 아닌 다른 학자의 논의에 기대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각주 8: 예컨대 M. Oakeshott, Experience and Its Mod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3은 이 방면에 좋은 길잡이가 된다.]


제3절 삶의 理想으로서의 自由敎育


  ‘지식의 형식’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피터즈의 교과관은 우리의 삶에 들어 있는, 우리가 명백히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대체로는 따르고 잇는 삶의 이상을 드러내어 준다. 그 삶의 이상은 우리가 명백히 의식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부정되거나 망각될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현대 사회의 특징은 그 가능성을 더욱 촉진한다. 그 삶의 이상이라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따금 시의(猜疑)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랫동안 교육의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온 ‘자유교육’의 정신을 가리킨다. 그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교육에는 언제나 문제점이 있었으며, 교육이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교육의 정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구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교육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사실 그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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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교육의 빛나는 성과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피터즈는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지식의 형식을 교육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또 한편 명백하게 수단적 가치를 가지는 실용적, 직업적 기술을 전수하는 일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그 성격이 명백하게 구분되는 이 두 가지 일을 혼동하는 데에 반대한다. (이 성격상의 구분은 앞의 첫 절에서 설명한 ‘보는 지식’과 ‘하는 지식’, 그리고 그 각각에 상응하는 방법상의 원리로서의 ‘이해’와 ‘설득’에 의하여 다소간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피터즈는 한정된 세부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업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훈련’(訓練, training)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교육’(敎育, education)과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pp. 26-9). 이와 같이 ‘훈련’과 구별되는 ‘교육’은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p. 39). 그러므로 이 장에서의 설명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자유교육은 지식의 형식(또는 보는 지식)이 그 원래의 성격에 가장 충실한 형태로 전수될 때의 교육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하 본 절에서는 자유교육의 정신에 의하여 드러나는 삶의 이상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오해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은 그 용어가 생겨난 기원으로 말하자면 고대 희랍에서와 같이 사회적 신분과 역할이 노예와 자유민으로 구분되어 있던 상황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민을 위한 교육을 뜻하였다. 희랍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이른바 ‘생산적인’ 활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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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예들이 담당하였다. (이 점에서 희랍의 노예를 예컨대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의 노예와 동일한 부류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인 활동은 자유민의 신분과 역할에 맞지 않는 ‘비천한’ 활동으로 간주되었으며, 자유민은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餘暇)에 합당한 일을 하게 되어 있었다. ‘여가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은 앞(1장 2절)에서 말한 7자유학과와 같은 ‘자유학과’(liberal studies)를 공부하는 것이었으며, 피터즈의 용어로는 ‘인간 경험(또는 실재)의 상이한 측면을 드러내는 지식의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자유교육의 정신과 현대에 와서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고의 혼란은 모두 위의 ‘여가’라는 단어 하나에 압축되어 있다. 자유교육이 드러내고자 하는 삶의 이상은 위에 사용된 뜻으로서의 여가에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 자유교육의 정신을 올바르게 살려내는 길 또한 위에 사용된 여가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

  애당초 불행은 위에서 ‘여가’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 ‘스콜레’(schole, 라틴어 스콜라 schola)가 오늘날 ‘여가’(leisure)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었다. [각주 9: ‘여가’의 개념, 그리고 그것과 자유교육의 이념의 관계에 관해서는 金承昊, ‘自由敎育의 理念과 現代社會’, 「敎育理論」(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제 7, 8권 합본, 199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특별히 원래의 희랍적 개념으로서의 ‘여가’의 의미를 강조해서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때로 ‘스콜레’라는 희랍어 단어를 사용하겠다.) 오늘날의 용어로서의 ‘여가’는 일(생산적 활동)을 주축으로 하여 ‘일을 그치고 쉬는 상태’, 즉 ‘무노동’(無勞動)을 뜻하지만, ‘스콜레’에서는 형편이 반대로 되어 ‘여가’가 주축이 되고 일은 ‘무여가’(無餘暇), 즉 ‘여가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단어로 표현되었다. 희랍어에서 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스콜레’의 부정형인 ‘아스콜리아’(ascholia)이며, 라틴어에서도 그와 마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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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일은 ‘여가(otium) 없는 상태’(neg-otium)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곧 고대 서양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여가’(즉, 스콜레)는 삶의 주축이요 기본이요 원래의 모습이며,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핵심적 요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노예가 아닌 자유민의 삶이 삶의 원래의 모습, 삶의 이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콜레 또는 스콜라는 ‘여가’ 이외에도, 여가의 목적인 ‘학문적 논의’, 그리고 학문적 논의를 하는 장소로서의 ‘학교’를 뜻하였다. 오늘날 ‘학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school은 여기서 파생되었다.)

  역사의 진전에 따라 고대 희랍에서의 자유민과 노예의 구분은 귀족과 평민의 구분으로 대치되고 마침내 현대에 와서는 이 구분마저 철폐되었다.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고대 사회에서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과 스콜레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이 사회 계층에서 구별되어 있었던 것에 비하여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희랍에서의 자유민과 노예의 역할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희랍의 노예들이 하던 것과 본질상 동일한 종류의 ‘비천한’ 활동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구나 …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누구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누구나 ‘여가를 즐겨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때의 ‘여가’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쨌든 현대에 와서 일과 여가가 동일한 사람의 역할 속에 결합되면서, 또 거기에 ‘스콜레’라는 단어의 번역에 관한 언어적인 불행까지 가세하여, ‘여가’의 개념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주와 사회의 질서를 관조하면서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향하여 발돋움한다는 스콜레의 원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 채, 이제 여가는 중세의 귀족들이 누리거나 즐기던,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의미상의 변화는 ‘여가는 삶의 이상이다’라는 말과 ‘스콜레는 삶의 이상이다’라는 말의 의미상의 차이에 의하여 쉽게 확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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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독자는 희랍의 상황을 기술한 이 절의 첫 문단을 읽으면서, 생산적 활동은 노예들에게 맡기고 여기에 비하여 자유민은 ‘여가를 즐기며…’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에…’라고 말한 데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물론, 여기서의 ‘여가’는 오늘날의 ‘여가’가 아닌 ‘스콜레’를 가리킨다. 희랍의 자유민이 여가를 즐겼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의 여가로 그들의 스콜레를 해석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들에게 스콜레는, 마치 노예에게 생산적 활동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부과된 의무요 제약이었다. 누구나 직업을 가지고 그야말로 일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아무런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것은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스콜레 이외에는 다른 사회적 역할이 없는 당시의 자유민의 입장을 실지 그대로 상상해 본다면, 그것은 즐길 만한 특권이라기 보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한 평생의 업으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잠깐 동안 지식의 형식을 배워야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것을 일종의 형벌로 생각하고 되도록 빨리 그것에서 벗어나서 어른들이 하는 생산적 활동에 종사하고 싶어하는 근래의 경향은 희랍 자유민의 스콜레가 결코 즐길 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에게 가까운 조선시대 양반(兩班)의 경우를 생각해 보는 것이 혹시 상상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오늘날 양반이 비난을 받는 것은, 아마 극도로 타락한 양반을 소설이나 사극(史劇)의 등장 인물로 내세운 작가들의 꼬득임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당시의 양반이 부당한 신분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비난은 그 열도 속에 선망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양반이 누렸다는 그 신분상의 특권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상의 제약이 될 수도 있었다. 양반은 희랍의 자유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분상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비천한’ 생산적 활동에는 종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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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라도 그런 비천한 활동과 관련되는 활동(예컨대 저고리를 벗어던진다든지 소매를 걷어붙이는 따위)은 양반의 지체상 용납되지 않았다. 양반의 지체에 맞는 일은 오직 ‘글공부’ 뿐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양반들이 이른 봄날 삽과 괭이를 들고 맨발로 밭의 부드러운 흙을 밟아보고 싶어했는지 상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에게 명백히 즐길 만한 것으로 보이는 양반의 특권을 부정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그 특권이 어떤 삶의 이상을 대표하였는가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은 희랍의 ‘스콜레’를 오늘날의 ‘여가’(leisure)로 바꾸면서 삶과 교육의 이상으로서의 스콜레를 부정한 대표적인 저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듀이에 의하면 유용한 생산 활동과 관련을 맺지 않는 ‘이론적 교과’는 옛날 귀족들의 ‘한가한 여가 활동’에나 적합한 것이다. 듀이가 ‘참으로 민주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유용한 봉사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이 가치있는 여가를 즐기는 그런 사회’(번역판, p. 397)를 가리킨다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하는 ‘가치있는 여가’라는 것이 희랍의 스콜레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가 보기에 스콜레는 유용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한가하게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별개의 계층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회상을 반영하며 그 점에서 민주주의의 이념에 위배된다. 그에게 있어서 스콜레(즉, ‘여가’로 번역된 ‘스콜레’)는 다음의 인용문에 나오는 ‘빈둥빈둥 노는 일’과 거의 동일한 것을 뜻한다.


  특히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고등교육을 보면 그것은 대학 교수와 전문 연구원을 위한 직업교육이다. 누가 보더라도 빈둥빈둥 노는 일, 문필업, 지도자의 자리를 위한 준비를 시켜주는 일을 주로 하는 교육이 비직업적(非職業的) 교육이요, 심지어 특이하게 교양적인 교육이라고 생각되어 왔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묘한 미신이다. 책이건 신문 사설이건 잡지 기사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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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활동에 간접적으로 적합한 문학 훈련은 특히 이 미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수많은 교사와 저자가 전문화된 실제적[실용적] 교육의 침범을 경계하고, 문화적, 인간적[인문적] 교육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주장을 펴고 하면서도 자신이 자유교육이라고 부르는, 자신이 받은 교육이 주로 현재 그가 종사하고 있는 그 직업을 위한 훈련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번역판, p. 474).


  결국, 듀이는 자유교육과 직업교육(또는 직업훈련)의 전통적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그 전통적 구분이 부정될 때 교육은 진정한 자유교육의 모습을 띨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스콜레와 ‘비천한’ 활동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원래의 자유교육이 드러내고자 했던 삶의 이상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분명히 말하여,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유민이며, 누구나 자유민으로서의 삶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하여야 한다.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구분, 스콜레와 ‘비천한’ 활동의 구분을 없앰으로써 자유교육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유민의 이상을 낮추어서 누구나 다소간 노예로 살도록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누구나 자유민인 현대 사회에서 자유교육을 실현하는 길은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구분을 뭉게어 버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교육의 이념을 더욱 확고하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그 이념을 따라 살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유교육은 누구나 일에 종사해야 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일이 삶의 핵심적 관심사로 된 상황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콜레의 정신 ― 즉, 지식의 형식을 ‘그 자체의 가치’로 추구하는 것을 삶의 이상으로 삼는 정신 ― 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이 어려운 과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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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직 우리에게는 그 영어 단어(스쿨)에 스콜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학교’가 있는 것이다. 학교는 거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희랍의 자유민에게 부과되었던 바로 그 삶의 이상을 따라 살도록 특별히 마련된 기관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그 삶의 이상을 맛보면서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강하게 그 영향을 받고, 나중에 나가서 유용한 활동에 종사하게 되었을 때에도 학교가 심어주려고 한 이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식의 형식과 그 내재적 가치에 관한 피터즈의 논의는 현대 사회에서 교육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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