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현(2004). 『철학의 주요 개념 1·2』.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pp. 255-298.
3.2. 인간학적 가치관의 대립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 윤리 정립과 윤리적 가치로서 선 개념은 종교적 신앙 위에서만 유효하다. 그래서 이른바 ‘계몽된’ 이성은 인간 이성의 한계 내에서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 지식의 차원에서 윤리도 말하고 선악의 개념도 세우려 한다. 그로 인해 인간성의 두 요소, 곧 ‘이성’과 ‘감성’에서 각각 ‘선’의 출발점을 보는 (이성)법칙주의와 감성주의가 성립하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칸트(I. Kant, 1724-1804)의 인격주의 이론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공리주의 이론이다.
1) 법칙주의의 선 개념과 윤리
그 자체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
이 세계에서 또는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Kant,『전집』 IV-393 :「윤리형이상학 정초」)
칸트는 이렇게 단언한다. 여기서 ‘선의지’는 옳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택하는 의지를 말한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연스런 마음의 경향성에 따라 옳은 행위를 지향하는 의지가 아니라, 단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 행위를 택하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이 의지 작용에는 어떤 것이 ‘옳다’, 무엇이 ‘선하다’는 판단이 선행해야 하고, ‘옳음’과 ‘선함’은 결코 경험으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순수 이성의 이념이므로, 선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다름 아닌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 곧 ‘순수 실천 이성’이다.(Kant, IV-412 :「윤리형이상학 정초」 참조)
그러나 선의지는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에게 자연적[선천적] 소질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의지가 인간의 자연적 소질이라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선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뜻이고, 이러하다면 우리 인간에게 더 이상 악행이라든지 ‘당위’의 문제는 없다. 도덕의 문제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선하게도 만들고 악하게도 만들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선하게 혹은 보다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자기 작용이 필요하다”(Kant, VI-44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고 전제되어야 한다. 자연의 사물들은, 그리고 자연의 사물들 가운데 하나인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운동 변화한다. 그러나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자발성의 표상인 선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래서 칸트는 자연사(自然史)가 “신의 작품”이라면, 인간사(人間史)는 “자유의 역사”로서 “인간의 작품”(Kant, VIII-115 :「인간 역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의지는 그러니까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이념의 실천이 이성적 존재자의 ‘의무’라고 납득하는 데서 생긴다. 도덕은 당위이므로 ‘~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나며,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에 준거해서 행위해야만 하는 필연적 실천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령은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실천 법칙’이다. ‘법칙’ ― 즉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규범이다.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 함은, 결국 ‘의무로부터’의 행위만이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가지며(Kant, IV-399 :「윤리형이상학 정초」 참조), 의무로부터의 행위란 도덕적 실천 법칙을 그 행위의 표준으로, 준칙(準則)으로, 다시 말하면 “욕구의 원리”(Kant, IV-400)로 삼는 행위를 말한다.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같은 곳)이며, 도덕의 가치는 곧 이런 “의지의 원리” 안에 있다. “최고의 무조건적 선”, “우리가 도덕적이라고 부르는, 탁월한 선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법칙의 표상 자체이며, 이 법칙의 표상은, 예견되는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이 법칙의 표상 자신이 의지의 규정 근거라는 점에서, 확실히 오직 이성적 존재자에게서만 생긴다.” 그러므로 “탁월한 선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하는 인격 자체에 이미 현재하는 것이며, 결과로부터 비로소 기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Kant, IV-401) 선은 이미 그리고 오로지 행위의 동기 가운데 있는 것으로 행위의 결과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수한 이론적 원칙들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순수한 실천 법칙들을 의식할 수 있다.”(Kant, V-30 :『실천이성비판』) 선의 이념을 가진 이성적 존재자는 선험적으로 도덕 법칙을 의식하며, 이런 도덕 법칙들의 최고 원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Kant, V-30 :『실천이성비판』, §7)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Kant, IV-421 :「윤리형이상학 정초」)
동일한 도덕 이념을 담고 있는 이 명령들이야말로, 이성이 선을 지향하는 의지에게 부여하는 모든 도덕 법칙들이 기초해야 할 원칙이다.
도덕적 명령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져야만 한다. 어떤 것이 보편적이려면 언제 누구에게나 타당해야 하며, 필연적이려면 무조건적으로 타당해야만 한다. 이 명령은 실천 행위로 나아가려는 이성이 자신에게 선험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부과하는 규범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성의 “자율”로서 단정적인 “정언적 명령”(Kant, IV-421 :「윤리형이상학 정초」)이다. 이 명령 내용이 선을 지향하는 모든 실천 행위들이 준수해야 할 도덕 법칙의 ‘형식’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짐은 자명하다는 뜻에서 칸트는 이것을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이라고 부르고, 또한 “순수한 이성의 유일한 사실”(Kant, V-31)이라고도 부른다.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을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성에게 모순율과 같은 형식 논리의 원칙 ― 칸트 용어대로 표현하면, 순수 이론 이성의 분석적 원칙 ― 이 자명하듯이, 그것이 실천 이성에게는 자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명한 사실’이란 보편타당하고 필수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항상 인지된다거나, 모든 사람이 언제나 ― 인식에서든 행위에서든 ― 그것을 준수함을 함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형식적 인식에서 그것의 ‘참[眞]’의 원리로서 모순율이 기능하고 있지만 모순율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듯이, 모든 실천 행위에서 그것의 ‘참[善]’됨의 원리로서 저 원칙이 기능하지만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논리적 원칙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 예컨대 논리학자라고 해서 항상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아니듯이 실천 이성의 원칙을 ‘사실’로서 납득하고 있는 사람, 예컨대 윤리학자가 항상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사실’은 사람들의 그것에 대한 인지나 준수와 상관없이 자신의 자명성으로 인하여 자명한 것이다.
그 자신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증명되지 않는 이성의 사실로서의 모순율에 모든 형식적 인식들이 기초함으로써 그것의 진리성을 보증 받듯이, 모든 실천 행위는 이성의 사실로서의 이 ‘실천 이성의 원칙’에 준거해서만 그것의 ‘선함’을 평가받을 수 있다. 이 실천 이성의 원칙은 바로 ‘선’이라는 개념의 근거점이다. 선의 개념은 “도덕 법칙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도덕 법칙에[의] 따라서[뒤에] 그리고 도덕 법칙에 의해서”(Kant, V-63)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의 개념 자체이기도 한 이 실천 이성의 원칙은 모든 도덕 법칙이 갖추어야 할 보편적 형식이다. 그것이 ‘형식’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덕적 규정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형식’이기 때문에 모든 도덕의 ‘내용[실질]’을 규정한다. 형식이란 다름 아닌 내용의 틀이다.
구체적인 행위를 예로 들어 이 실천 원칙이 선의 형식으로, 즉 척도로 어떻게 기능하는가 살펴보자.
칸트 자신이 들고 있는 한 예로, 어떤 사람이 재판에서 위증을 하면 옆 사람이 죽고 위증을 안 하면 그 자신이 죽도록 되어 있을 때, 그 사람이 ‘사형을 당하더라도 위증하지는 않겠다’고 의욕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우리는 그를 의(義)롭다 하고 선하다고 평한다.(Kant, V-30 참조) 무슨 근거에서인가?
또 다른 예로, 가령 10명의 서로 낯선 사람들이 함께 조난당해 열흘을 굶주렸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밥 한 그릇을 발견했고 나머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것을 혼자서 먹을 수도 있는 여건을 가졌으며 다시 언제 먹을 만한 것을 발견하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밥을 발견한 사람은 그 자신도 이미 죽을 것같이 배고팠고 그래서 생리적 욕구대로라면 그 밥을 남모르게 혼자서 조금씩 먹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음식은 저 아홉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실천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성적 존재자만이 할 수 있는 이 선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런 예들에서, 위증은 하지 않았으되 그 까닭이, 어차피 위증해봐야 언젠가는 발각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위증하지 않았다거나, 독식(獨食)하지 않은 심리적 배경에, 만약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필시 굶어 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몹시 겁이 나서거나 혹은 만약 다른 사람이 먹을 것을 발견했을 때, 자기가 그렇게 했을 것처럼, 자기에게 나눠 주지 않을 경우엔 낭패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현명한’ 사려가 있어서 밥을 나눠 먹은 것이라면, 이런 행위들은, 칸트에 따르면, 선행은 아니다. 선행은 어떤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자연적인 마음의 쏠림 혹은 결과적인 이해(利害)의 타산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도덕의 이념 그 자체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행위이다.
칸트에 따르면, 선행은 이타(利他)나 대의(大義) 혹은 공존공영을 ‘위해서’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어떤 행위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윤리 도덕은 우리 모두에게 혹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利)롭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로움이나 유용함은 한갓 감성적인 욕구 충족에 대응하는 것이다. 감성적 욕구 충족에 상응하는 명령은, 모든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이 그러하듯이, 능한 처세의 훈(訓)은 될지 모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이 되지는 못한다. 도덕은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표현이다. 선은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이 ‘선’의 관념으로부터 비로소 ‘좋음’, ‘가치’ 등의 개념이 유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법칙은 정언적 즉 단정적 명령으로 이성적 존재자에게 다가온다. 가언적인, 즉 어떤 전제 하에서 발해지는 명령은 필연성이 없다.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전제를 납득하지 않으면, 그 명령은 명령으로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웃에 도움을 청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항상 이웃에 친절하라’ 따위의 가언적 처세훈들은 도적적 선의 표현이 될 수 없다. 선은 인격적 주체의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또한 사람으로서 사람은 인격적 주체이고, 주체란 문자 그대로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될 수 없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어떤 행위가 진정으로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이 유일하고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 행위의 동기여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도덕적 동기는 의지의 자유로움에서만 가능하다. 인격적 주체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의식하기 때문에 자기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도덕 법칙이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을 자유를 자신 안에서 인식한다.”(Kant, V-30) 인간은 무엇을 하고 있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다.
“의지의 법칙에 대한 자유로운 복종의 의식은, 모든 경향성들을, 그러나 단지 자기의 이성에 의해 제어하는, 불가피한 강제와 결합돼 있는 것으로서, 무릇 법칙에 대한 존경이다.”(Kant, V-80) 이 “도덕 법칙에 따르는, 일체의 규정 근거에서 경향성을 배제하는, 객관적으로 실천적인 행위를 일컬어 의무”(같은 곳)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는 개념상 ‘실천적 강제’를 포함한다. 즉 싫어도 행위하도록 시킨다. 자연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선 아닌 다른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선을 행해야만 한다.(Kant, IV-444 :「윤리형이상학 정초」 참조) 자기 마음이 자연히 그렇게 내켜서 하는 행위라면 그것을 우리는 당위라고 하지 않는다. 당위는 강요된 행위를 말함이고 그런 뜻에서 필연적이되, 그러나 이 강제는 밖으로부터의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신의 강제 즉 ‘자기 강제’(Kant, V-83)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밖으로부터 강제된 규칙 즉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즉 자유로운 자기 강제의 규칙, 이를테면 자율(自律)이다. 이 자율의 힘에 인격성은 기반한다.
도덕은 자유로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이성에 의해 자신을 무조건적인 법칙에 묶는 존재자인 인간의 개념에 기초되어 있다. 그런 한에서 도덕은, 인간의 의무를 인식하기 위해서 인간 위에 있는 어떤 다른 존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의무를 지키기 위해 법칙 이외의 어떤 다른 동기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만약 인간이 그러한 것의 필요를 느낀다면, 적어도 그것은 그 자신의 탓이다. 그러한 필요는 그 자신 외의 무엇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자신과 그의 자유에서 솟아난 것이 아닌 어떤 것도 인간의 도덕성의 결핍을 메꿔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Kant, VI-3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인간으로 하여금 감성계의 일부로서의 자신을 넘어서게 하고, 지성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질서에 인간을 결합시키는 것은 인간의 인격성이다. 그러니까 인격성이란 “전 자연의 기계성으로부터의 독립성으로, 그러면서도 동시에 고유한, 곧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해 주어진 순수한 실천 법칙들에 복종하고 있는 존재자의 한 능력”(Kant, V-87)이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은 실천 이성이 인격적이라는 말과 같다.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도덕 법칙이 의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한다”(Kant, V-71)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칙이 어떻게 의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인간에게 어떻게 자유 의지가 가능한가는, 인간에게 손가락이 왜 하필 10개인가와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으로서는 풀 수 없는 문제”(Kant, V-72)이지만, 도덕 법칙이 직접적으로 의지를 규정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도덕성의 본질”(같은 곳)이다.
의지가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받는다 함은, 바꿔 말해, 의지가 자유롭다 함은 두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는 의지는 어떤 감성적 충동에도 영향 받음이 없으며, 도덕 법칙에 어긋나는 어떠한 자연적 경향성도 배제하고, 오로지 법칙에만 규정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배고프면 배불리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람’은 옆에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 배고파하면 먹을 것 앞에서도 자신의 배고픔을 참고, 옆에 누군가가 추워하면 난로 앞에서도 자신의 추위를 참을 수 있다. 모든 자연적인 경향성은 ― 이것의 충족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거니와 ― 이기적이고 자기추구적이다. 이기적 마음은 자기 사랑으로서, 무엇에도 우선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호의(好意)거나 자기만족이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이런 자연적이고도 도덕 법칙에 앞서서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자기 사랑이나 자기만족을 단절시키고, 이런 경향성을 도덕 법칙과 합치하도록 제한한다.
둘째로, 도덕 법칙에 의한 의지 규정은 적극적 의미를 또한 갖는다. 자유의 형식으로서의 도덕 법칙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에 대항하여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나 자기만족을 제어하며, 그럼으로써 ‘존경의 대상’이 된다. 도덕 법칙의 의지 규정, 그것은 도덕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곧 선의지이다.
의지가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 생명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이 배려해 준 여러 소질들을, 풍운(風雲)이나 화초(花草)나 금수(禽獸)에서는 볼 수 없는, 악(惡)의 방향으로 사용 할 수도 있지만, ― 칸트는 심지어 사람들이 도덕 법칙을 의식하면서도 빈번히 이 도덕 법칙에 어긋나게 행위함을 염두에 두고서, 인간은 “본성상 악하다[악질이다]”(IV-32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XIX-202, 조각글 6906 참조)고 말한 것이다 ― , 동시에 이 의지의 자유는 “도덕 법칙의 존재 근거”(Kant, V-4)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적 사물의 질서를 넘어서게 하는 이 도덕 법칙은 그 자체로 ‘신성하다’. 그러니까 “인간은 비록 충분히 신성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격에서 인간성은 그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 법칙이 자유로부터의 법칙 즉 자율성인 한 이 도덕 법칙의 주체인 인간 즉 인격도 신성하다. 그래서 이 자율성이야말로 “인간과 이성적 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Kant, IV-436 :「윤리형이상학 정초」)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은,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이다.(Kant, V-87) 인간은 이런저런 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인정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물건’ 즉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인격’ 즉 ‘목적’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Kant, IV-428 :「윤리형이상학 정초」 참조) 칸트에 따르면, 그러므로,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실천 명령이 나온다.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Kant, IV-429 :「윤리형이상학 정초」)
자연 사물을 규정하는 존재 범주들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실체’이듯이, 인간의 실천 행위를 규정하는 “자유의 범주들”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것은 ‘인격’이다. 인간의 실천적 행위 즉 도덕적 행위는 기본적으로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인격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한, ‘나’의 ‘너’에 대한 행위는 언제나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격적 행위만이 도덕적 즉 당위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이 도달해야만 할 이성의 필연적 요구[要請]이다. 어떤 사람이 행위할 때 ‘마음 내키는 바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면, 그를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부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천 행위 “의지의 도덕 법칙과의 완전한 부합은 신성성(神聖性)”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고, 감성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이런 신성성에 ‘현실적으로’ 도달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부합을 향한 무한한 전진” 가운데에서 우리는 인격성을 본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신적 존재자라면, 그의 행위는 항상 의지의 자율에 따를 터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당위가, 따라서 도덕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감성적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시공상의 존재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에게는 당위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제적으로라도 부과하는 정언적 명령이, 도덕 법칙이 있는 것이다.(Kant, IV-454 :「윤리형이상학 정초」 참조) 이것이 도덕 법칙이 그리고 자율의 원인성이 인간의 행위에서 가능한 이유이고, ‘인간’에게서 갖는 의의이다. 인간은 항상 ‘도덕 법칙을 따르는’ 존재자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도덕 법칙 아래에’ 세움으로써 인간이 되고 인격적 존재자가 된다.(Kant, V-448 이하 :「판단력비판」 참조)
행위란 책임성의 규칙 아래에서 수행되는 행동을 말하며, 그러므로 행위의 주체는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동하는 자이다. 행위자는 그러한 행동을 통하여 그 행동의 결과를 ‘일으킨 자’로 간주되며, 그 결과는 그 행위자가 책임져야 한다. 아무런 책임 능력이 없는 사물을 물건이라고 한다면,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인격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인격성은 다름 아닌 도덕 법칙들 아래에 있는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성)이며, 인격(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제시한 그 법칙들에 복종하는 자이다.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율적으로 도덕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그러니까 인격이 된다.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그러므로 도덕 법칙의 명령 내용을 그의 의무로 가지며, 그의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선하다.
2) 공리주의의 선 개념과 윤리
감각 경험주의자인 흄(D. Hume, 1711-1776)은 “도덕은 이성에서 도출되는가 아니면 감정에서 도출되는가, 우리는 도덕에 관한 지식을 일련의 논변과 귀납을 통해 얻는가, 아니면 직접적인 느낌이나 섬세한 내감(內感)에 의해서 얻는가, 진위(眞僞)에 대한 모든 건전한 판단처럼 도덕은 모든 이성적 지성적 존재자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미추(美醜)에 대한 지각처럼 도덕은 전적으로 인간의 특수한 구조와 체질에 의존되어 있는가”(Hume,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ed. Tom L. Beauchamp, Oxford/N. Y. 1998, p.73 이하)를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한 흄 자신의 답변에 따르면, 이성은 사실의 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역시 인간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성은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는 있다. 가령 폭넓은 친교가 미래의 인생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일러 주며, 이런 유의 유용성을 발견하는 데 우리를 도와준다. 그러나 이성은 무엇이 그 자체로 선한가, 선 자체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 바꿔 말해, 이성이 제시해 주는 영원 불변적인 도덕 법칙은 없다.
도덕의 바탕은 이성적 도덕 법칙이 아니라 사람들의 도덕적 감정이다. 실천 생활에 있어서는 정감적 성질이 이성에 대하여 우위를 갖는다. 흄은 심지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오로지 노예여야 하며, 정념에 종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직분도 결코 가질 수 없다.”(Hume, Treatise, II, 3, 3(p.415))고까지 말한다. 사람들의 정념이 물론 언제나 옳은 행위의 안내자는 아니며, 정념에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가 언제나 서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덕은 보는 이에게 기쁘게 시인하는 감정을 주는 심리적 행위 내지 성질이며, 악은 그 반대다”(Hume, Enquiry, p.160)고 정의할 수 있을 때, 이기심은 언제나 보는 이를 불쾌하고 만들고, 사회 일반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은 어디서나 폭넓은 시인을 얻는다는 사실로부터, 사람들의 도덕 감정은 공통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흄의 생각이다. 일련의 감정들은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Hume, Treatise, III, 3, 1(p.576))는 것이다.
흄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마음씨만 가지고서도 도덕의 원리를 설명해내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인류의 일반적인 견해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얼마간의 권위를 갖는다. 그러나 이 도덕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이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원리들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다.”(같은 책, III, 2, 9(p.552))고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의 관념과 척도를 사람의 정서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흄 사상의 맥락을 잇는다. 벤담(J. Bentham, 1748-1832)과 밀(J. S. Mill, 1806-1873)의 생각에서 발원하는 오늘날 여러 형태의 공리주의는 모두 ‘선 = 좋음 =쾌락 = 이익’의 등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말이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아래에 두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과 쾌락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이 왕좌에 결부되어 있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가 말하는 모든 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종속을 떨쳐버리려고 제 아무리 애써 봐도, 그것은 이와 같은 종속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로는 이와 같은 제국을 내던져버린 체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이 제국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공리성의 원리는 이와 같은 종속을 승인한다.(Bentham,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I, I)
여기서 이 ‘공리성의 원리’란 다름아니라 “최대 행복의 원리 또는 지복(至福)의 원리”(Bentham, 같은 곳, 주)를 말한다.
공리성의 원리란 그 이익이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가, 또는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 경향에 따라서, 혹은 똑같은 얘기를 바꿔 표현하면, 행복을 촉진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또는 행복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가에 따라서 모든 행위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Bentham, Principles, I, II)
공리성 또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받아들이는 신조는 행위들은 행복을 증진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옳으며, 행복의 반대를 산출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르다고 주장한다. 행복이란 쾌락을,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며, 불행이란 고통을, 그리고 쾌락의 결여를 의미한다.(J. S. Mill, Utilitarianism, ch. 2)
공리성이란 어떤 대상의 성질로서, 이에 의해서 그 대상이, 그의 이익이 고려되는 당사자에게 유익·유리·쾌락·선(good) 또는 행복을 ― 이것들은 현재의 경우 모두 동일한 것이 되는데 ― 낳으며, 또는 ― 이 역시 동일한 것인데 ― 해악·고통·사악 또는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경향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당사자가 공동체 전체인 경우에는 공동체의 행복인 것이며, 특정 개인인 경우에는 그 개인의 행복을 말한다.(Bentham, Principles, I, III)
“한편에서는 모든 쾌락을 다른 편에서는 모든 고통을 합산한다. 대조해 보아 만약 그 차량(差量)이 쾌락 쪽이 많으면, 그 개인의 이익의 관점에서 그 행위에 전체로 좋은[선한, good] 경향을 줄 것이며, 그 차량이 고통 쪽이 많으면, 그것은 전체로 나쁜 [악한, bad] 경향을 줄 것이다.
그 이익에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수효를 계산하여 각자에 대하여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그 행위가 전체로 좋은 경향인 각 개인에 대하여, 그 행위가 갖는 좋은 경향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효를 합산한다. 그 행위가 전체로 좋은 경향인 각 개인에 대하여 이를 반복한다. 또 그 행위가 전체로 나쁜 경향인 각 개인에 대하여 동일한 방법을 다시금 반복한다. 그리고 대조해 봐 만약 그 차량이 쾌락 쪽이 많으면, 그 행위는 관련된 개인들의 전체 내지는 공동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좋은 경향을 가지며, 고통 쪽이 많으면 그 행위는 같은 공동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나쁜 경향을 가질 것이다.”(같은 책, IV, V, 5-6)
동일한 과정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 어떠한 명칭으로 구별되든, 모든 쾌락과 고통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쾌락에 관해서는 그것이 선[좋음] ― 이것은 적절하게 말해 쾌락의 원인 내지 도구다 ― 또는 이윤 ― 이것은 먼 장래의 쾌락이거나 혹은 먼 장래의 쾌락의 원인 내지 도구다 ― 또는 편리 또는 유리·유익·이득[보수]·행복 등등 무엇이라고 불리든, 또 고통에 관해서는 그것이 사악 ― 이것은 선에 대응한다 ― 또는 해악 또는 불편 또는 불리 또는 손해[손실] 또는 불행 등등이라고 불리든 동일한 과정이 적용되는 것이다.(같은 책, IV, VII)
물론 공리주의자들이 쾌락을 단순히 양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다거나 쾌락의 양에 따라서만 사람들이 행위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쾌락 또는 행복에도 이른바 질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짐승의 쾌락을 듬뿍 허용한다는 약속이 있다고 해서 어떤 하등 동물로 변하는 것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록 바보들이나 천치들, 또는 악한 자들이 그들보다 자신의 운명에 더 만족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지성을 가진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무지렁이가 되고, 감정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기적이고 비천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Mill, Utilitarianism, ch. 2)
고상한 성격은 그 고상함으로 인해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행복한가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며 세상 일반은 그것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공리주의는 고상한 성격을 널리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의 고상함에서 유익함을 얻을 뿐이고, 자기 자신은 ― 행복에 관한 한 ― 그 유익함으로부터 얻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같은 책, ch. 2)
그럼에도 공리주의는 사람의 행위는 무엇이나 근본에서는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얼핏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마침내는 쾌락 추구나 고통 회피로 환원된다는 전형적인 쾌락주의다. 이런 공리성의 원리에 항상 반대되는 것은 “금욕주의(asceticism)의 원리”(Bentham, Principles, II, II)다. 그런데 공리주의자들은 ‘금욕주의’조차도 쾌락주의의 일종으로 본다.
금욕주의 원리를 받아들여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 부류는 도덕가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종교가들이다. […] 희망, 즉 쾌락의 예상이 전자를 북돋은 것으로 보인다. 그 희망은 철학적 자부심의 양식이고, 사람들로부터 영예와 명성이 주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다. 공포, 즉 고통의 예상이 후자를 북돋은 것으로 보인다. 그 공포는 미신적인 환상의 기원이자, 까다롭고 복수심 가득 찬 신의 손에 의한 미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다.(Bentham, Principles, II, V)
금욕주의는 원래 일을 조급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론(空論)인 듯하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쾌락이 어떤 상황에서 생기는 경우에 길게 보면 그것을 상회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을 인지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여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비난하는 입장에 빠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더 멀리까지 나아가 탈출할 지점을 잊어버리고 계속 돌진하여, 고통을 사랑하는 것을 훌륭한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조차 그 근저에서는 잘못 적용된 공리성의 원리임을 안다.(같은 책, II, IX)
실제로 욕구되고 있는 것은 행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에 대한, 즉 궁극적으로 행복에 대한 수단 이외에 욕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행복의 일부로서 욕구되는 것이며, 그것이 행복의 일부가 되지 않는 한 그 자체를 위해 욕구되지는 않는다.(Mill, Utilitarianism, ch. 4)
사람들은 금욕을 추구할 때조차도 실은 일시적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더 큰 쾌락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경우에나 사람은 쾌락과 고통에 이끌려 행위하며, 공리주의자에게서 이것은 선악에 이끌려 행위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또 같은 말이지만 공리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이익만이 선이고 손해만이 악이다.
쾌락은 그 자체로 선이다. 그것은 고통을 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선이다. 그리고 고통은 그 자체로 사악이며, 정말이지 예외 없이 유일한 사악이다. 선과 사악이라는 낱말은 이 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종류의 고통, 모든 종류의 쾌락에 대해서 똑같이 진리다. 그러므로 이상 말한 바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의 없이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 : 그 자체가 악한 것으로 생각되는 어떤 종류의 동기도 없다.(Bentham, Principles, X, §2, X)
동기가 선 또는 악이라 하는 것은 오로지 그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쾌락을 낳거나 고통을 막아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선인 것이고, 고통을 낳거나 쾌락을 막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악인 것이다.(같은 책, X, §2, XII)
어떤 동기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이란 없으며, 따라서 동기치고 그 자체 절대적으로 좋은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그 동기의 결과와 관련해서 그것은 어떤 때는 나쁘게, 어떤 때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게, 또 어떤 때는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정은 모든 종류의 동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동기가 그 결과에서 선 또는 악이라는 것은 개개의 경우와 개개의 동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모든 종류의 동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동기가 그 결과를 고려할 때 나쁜 동기라고 적절하게 단정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오로지 일정 기간 동안 그 동기가 선악 두 종류에 대해 가짐직한 모든 결과, 곧 그것의 가장 보편적인 경향을 비교 계산해 낸 차량(差量)을 제시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같은 책, X, §3, XXIX)
공리주의는 공리성의 원리에 최대한의 공공 이익, 곧 사회적 공리성, 곧 “정의”의 원칙이 당연히 포섭되며, 사람들은 이 원칙에 따라 행위할 것으로 본다.
사회적 연대가 강해지고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게 되면, 각 개인은 누구나 타인의 복지를 실천적으로 고려하는 데에 점점 더 강렬한 개인적 관심을 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은 갈수록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의 선[이익]과 동일시하게 되거나 또는 최소한 그것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고려하게 된다.(Mill, Utilitarianism, ch. 3)
이와 같은 주의 주장을 골자로 하는 공리주의는 ‘양적’ 행복이니 ‘질적’ 행복이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니 ‘최소수의 최소 불리(不利)’를 따지면서 여러 가지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 현대인들의 가치관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인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각광을 받고 있고,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윤리 의식 형성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색깔의 옷으로 바꿔 입던지 간에 공리주의는 결국 행복과 이익을 한 가지로 본다거나 ‘이익’과 ‘선함’을 혼동하고 동일시함으로써 도덕적 가치인 ‘선(善)’을 상대화하고, 이것은 마침내 인간 사회 문화에서 윤리 질서 자체를 무효로 만든다.
공리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사람들은 ‘이익’과 ‘선함’을 교환 가능한 가치로 간주한다. 가령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영어 개념 ‘good’은 ‘선’이자 ‘좋음’, ‘이익’이며, ‘public[common] good’은 공익(公益)이자 공공선(公共善)이다. 그래서 ‘좋음’ 내지 ‘이익’ 일반은 ‘선’ 일반과 동일시되고, ‘선’은 한낱 ‘좋음’이나 ‘이익’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진(眞)·선(善)·미(美)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해왔다. ‘최고의 가치’란 문자 그대로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그러니까 궁극의 가치를 말한다. 우리는 진리를 왜 추구하는가? 그 이유는, 오로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선을 추구하는가? 그 이유는, 오로지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제,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진리가 인간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기 때문이라거나, 우리가 선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 인간 생활에 질서를 주어 다수의 행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진리와 선의 가치는 더 이상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윤택한 생활’이나 ‘다수의 행복’에 종속하는, 그것들을 위한 수단이 되는 가치일 따름이다. 이렇게 되면 선의 상위에 ‘이(利)’라는 가치가 있는 셈이 되고, 그래서 이 ‘이’가 최상의 가치가 된다. 그러면 본디 선악의 가치 문제여야 할 윤리 도덕의 문제는 결국은 이해(利害) 관계의 문제로 환원되고 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회 윤리의 문제를 사회 정의의 문제로 바꿔 생각하고, ‘사회 정의’는 이익의 공정한 배분에 있는 것처럼 여기며, 심지어 ‘윤리적 경영이 장기적으로는 기업에 보다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서 이른바 ‘윤리적 경영’을 권고하는데 이것은 은연중에 공리주의적 성향이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좌다. 윤리는 어디까지나 ‘인간다움[人格]’의 표상인 선 자체의 가치 실현에 있는 것이지 한낱 공정한 이익 분배나 다수의 ‘행복’ 증진 또는 장기적 안목에서의 이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서나 이해의 충돌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그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당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최대 다수에게 최대로 좋은 것 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Bentham, Principles, I, XIII, 주)의 원리를 내세우는 공리주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그래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때 ‘최대 다수’와 ‘최대 이익’을 어떻게 어떤 항목을 가지고 누구를 중심으로 측량할 것이며, 그 측량의 시점을 언제로 잡을 것이냐는 사실 난제 중의 난제다. 오늘 우리 가족 모두에게 좋은 것이 후손 10대 모두에게는 나쁜 것일 수 있고, 지금 다수의 서울 사람에게 좋은 것이 같은 시각 여타 지방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칠 수 있고, 오늘날 다수 한국 사람에게 좋은 것이 내일의 다수 일본 사람에게는 나쁜 것일 수 있고, 오늘의 미국 사람들에게 나쁜 것이 10년 후의 남미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 한 예로, 전통적 경제학(economy)과 최근 자주 거론되는 생태학(ecology)의 주의 주장의 차이도 일견 본질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양자는 똑같이 공리주의를 그 정당화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으로, 그 차이는 이익 계산의 범위와 시점에서 비롯한 것일 따름이다. ― 이런 문제점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공리주의가 사람들의 이해 갈등을 조정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인 방식을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사회 윤리를 정립하는 데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있는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리주의가 종국적으로는 선의 가치를 이익의 가치에 종속시켜 도덕의 문제를 이익 분배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게다가 가치 상대주의를 일반화시켜 도덕 상대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야말로 공리주의 풍조가 물리주의와 더불어 오늘날 도덕의 문제를 유야무야로 만드는 주요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일찍이 공자는 “군자는 무엇이 의로운가에 마음쓰고, 소인은 무엇이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에 마음쓴다”(『論語』, 里仁 十六)고 지적하면서 이익과는 다른 의로움을 말했고, 맹자 역시 양(梁)나라 혜왕을 만났을 때 “왕은 하필 이익을 말합니까? 오로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孟子』, 梁惠王上 一)라고 말하면서 이익 대신에 선의 가치를 추구할 것을 촉구하고, “의로움이란 곧 이익이다(義利也)”(『墨子』, 經編 上)는 묵가류의 가치관을 배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이라 해서 공리주의적 원칙이 어떠한 사회 윤리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4. 행위의 절대적 가치로서 ‘선’
언제 어디서나 자신과 타인을 목적 곧 그 자체 가치 있는 것으로 대하는 행위 중에 선은 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나 타인을 수단 곧 무엇엔가에 대한 쓸모에 따라 대하는 행위는 사악하다. 설령 그 행위를 통해 그 자신이나 타인이 쾌락을 얻고 행복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선·악은 행위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위의 지향 중에 있다. ― 이런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행위자의 지향 내용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서 대개의 경우 선·악의 판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설혹 행위 지향이 ‘선하다’ 하더라도, 그 행위의 결과는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 또는 불행을 야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다. 선·악은 기본적으로는 내적인 가치로서 그 여부는 ‘양심’의 법정에서만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갖가지 위선(僞善)이 횡행하는 것이다. 또한 현실 세계에서의 선함과 행복의 불일치는 왕왕 발견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내막을 유한한 인간의 지력으로 어찌 모두 알겠는가. 분명한 것은 ‘선함’이 반드시 행복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해서, 그러니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만이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선의 가치를 밝히는 윤리학은 행복론이 아니다.
또한, 선·악은 행위 가치이지 이론 가치가 아니다. 다시 말해 선·악은 행위 중에 있으며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선한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 ‘착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실제로 선행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착한 사람이다. 누가 논리적 규칙을 승인한다 해서 그것만으로는 그를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실제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치와 같다.
‘실재와 일치하는 인식’이라는 진리 규정에 맞는 진리를 우리가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없다고 해서, 저 진리 규정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듯이,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행위는 선하다’는 규정에 딱맞는 행위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다 해서 이 선의 규정이 무의미한 것이다. ‘진리’나 ‘선’은 인간의 지식이나 행위가 마침내 실현해야 할 절대적 가치 이념이지 사실 설명어가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