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선언』을 이제야 읽어보았습니다. 무지하게도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을 처음으로 만들면서 선언한 문서로만 알고 전혀 읽어보지 않다가, 박맹수 교수의 저서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을 보던 중에 『한살림선언』이야말로 동학사상을 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탁월한 문서라는 감탄사를 듣고 나서야 『한살림선언』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 허허, 1989년에 나온 것인데, 너무 늦었지요? 부끄럽네요.
다행히 책장에 십 수 년간 꽂혀 있던 것을 꺼내어 찬찬히 읽어보니, 과연 동학사상을 이 시대의 환경 위기에서 탈출할 생명사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더군요. 물론 저 역시 동학에서 생명사상을 발견하고 ‘동학, 그 에코토피아의 길’이라는 문패를 내걸었지요...
동학은 밖으로는 서구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이라는 위기상황, 안으로는 조선왕조 말기의 세도정권의 모순과 수탈로 민중의 고통이 극한에 달한 위기상황이라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아래에서 등장한 사상이요, 운동입니다. 조선왕조의 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일찍부터 기울여 왔습니다. 지식인층의 실학사상운동은 조선조를 지탱해준 성리학이 더 이상 실제적 효용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한계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서학(천주학, 서양문명)에 대한 탐구는 동아시아의 한계를 벗어나 외래문물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입니다.
조선후기 민중들도 양반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모색을 많이 해왔습니다. 이씨조선이 끝나고 정씨왕조가 들어선다는 정감록사상, 미륵부처님이 도래하여 용화세계를 이룩한다는 미륵신앙 등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동학은 이러한 조선조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민중들의 역사의식이 최종적으로 발견해낸 것으로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 사상으로 5만년 선천세계의 폭력적 본질을 꿰뚫고 생명을 살리는 후천개벽 사상을 창도해 냈습니다.
그에 비하면, 『한살림선언』은 더 거시적이고 보편화된 지구적 위기상황이라는 의식 아래서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은 근현대 산업문명의 위기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로서, 즉 자연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멸종의 위기와, 그 죽임의 문명 아래,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 문명과 우주 사이의 분열과 분단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깊이 통찰하면서 새로운 우주생명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살림선언』은 창조적 진화의 전일적 생명관이라는 신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동양 전통 궁극의 실재관인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관의 재발견하고 있으며, 또한 한국의 한 사상 및 동학사상으로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역사적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문명운동으로서 ‘한살림운동(생명운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살림선언』을 논의 작성한 분들은 장일순, 박재일, 최혜성, 김지하 선생 등이며, 대표 집필은 최혜성 선생이 하셨습니다.
아래에 『한살림선언』을 요약해 두었습니다. 천천히 음미하시면서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생협 ‘한살림’ 매장에 나가서 문의해보니, 이미 책자는 절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마침 ‘모심과 살림연구소’에 PDF파일로 있더군요. 링크해 둡니다.
http://www.mosim.or.kr/pages/page_58.php?sn=34048 (분명히 pdf파일을 보았는데, 못찾고 '한살림선언'-다시 읽기를 링크합니다.)
『한살림선언』 - 생명의 지평을 바라보면서
요약 정리 : 남궁효
산업문명이 온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생명을 파괴하는 죽임의 현실에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기 위한 모임으로 <한살림모임> 구성하고 (창립 1989.10.29.) <한살림선언> 발표함.
1. 산업문명의 위기
기술의 진보는 자연의 지배를 확대 강화하여 노동을 합리화 기계화함으로써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을 이룩하고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낭비적 소비가 미덕이 될 정도로 물질적 성장과 풍요를 성취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일찍이 자연의 주인으로 자처하고 자연을 지배해 왔으나 기계와 기술에 사로잡혀 하나의 부품이나 단위로 전락해 버려, 인간은 삶의 진정한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기계의 지배에 조종되는 대상일 뿐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생각, 느낌, 활동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소유하고 소비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과 육체, 지식과 노동을 상품으로 파는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였다.
기술관료체제는 물질, 에너지, 정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인간의식을 조작.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대중매체는 사회적 의식, 태도뿐만 아니라 개인의 욕구, 희망, 기호까지도 결정하는 지배문화가 되었다.
결국 자본주의는 자연의 정복에 활용하였던 과학과 기술을 가지고 인간심리를 지배조작하여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사회의 원심력을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산업기술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제와 지배의 형태로 등장한다. 산업사회 초기의 소중한 가치였던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생산과 능률을 앞세우는 기술 이데올로기 앞에 굴복하여 인간은 기계 기술 체제에 종속되어 버렸다. 선진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산업문명은 생명을 기계로, 존재를 소유로, 주체를 객체로, 주인을 노예로, 지식을 기술로, 자유를 동조로, 노동을 상품으로, 낭비를 필요로, 파괴를 생산으로, 가격을 가치로 바꾸어 놓아 전도된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산업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을 분열시켜서 서로 대립 투쟁 갈등하는 세계이다. 산업문명은 우리 민족과 한반도를 분단시켰고 서로 다른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적대하도록 만들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산업문명은 개인, 사회, 경제, 정치 영역에서 그리고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영역에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물질적, 제도적, 지적, 윤리적, 정신적 위기이며 인류사상 유례없는 규모와 긴박성을 지닌 위기로, 전인류와 지구상의 전생명이 파멸될 수도 있는 위기이다. 다음은 위기의 증후들이다.
1) 핵위협과 공포
2) 자연환경의 파괴
3) 자연고갈과 인구폭발
4)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
5)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
6) 중앙집권적 기술관료체제의 통제와 지배
7)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
2.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산업문명의 위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의 계몽주의, 실증철학, 산업혁명, 시민혁명에 의해 형성되어온 산물이다. 처음에는 자유, 평등, 진보를 약속하는 복음이었으나, 19세기 독점자본주의, 기술관료체제, 제국주의가 등장하면서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장치로 편성하였다. 여기에 사상적 기반과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 것은 분석적 합리철학과 실증주의 과학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 뉴톤의 물리학, 존 로크의 사회사상은 인간과 물질을 고립된 원자적 존재로 파악하고 자연, 사회, 우주를 기계론적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구의 합리주의, 실증주의, 산업주의는 직관적 지혜보다 분석적 지식을, 통일보다는 분리를, 조화보다는 대립을, 협동보다는 경쟁을 더 치중해왔다.
산업문명이 옹호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다.
1) 과학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
2) 실재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존재론
3) 물질과 우주를 기계모형으로 보는 고전역학
4) 생명현상을 유기적으로 보지 않는 요소론적 생물관
5) 인간정신을 기계모형으로 보는 영혼 없는 행동과학과 육체 없는 정신분석
6) 직선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이론
7)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반생태적 자연관
3. 전일(全一)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
오늘날 산업문명은 환경, 즉 생태계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된 기계와 흡사한 세계이다. 그런데 열역학은 고립된 체계들은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동안 존재를 분자와 원자로 쪼개서 분석하던 근대 과학 전통은 실재의 복합된 현상을 규명할 수 없게 되자, 분할된 것을 다시 통합하여 자연 전체의 본모습을 보려는 새로운 과학이 나타났다.
열역학 법칙은 우주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고, 쓸모 있는 에너지는 열의 손실로 점차 감소한다고 한다. (엔트로피 법칙) 하지만 이는 닫힌 계의 경우이고, 우주는 열린 계여서 진화의 시각에서 볼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은 질서와 조직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와 조직을 만들어낸다. 환경에서 고립된 기계적인 체계는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르게 되는 최대의 엔트로피는 완전한 평형과 정지로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은 자기 외부의 환경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동요와 진동하게 되며, 변화를 억제함으로써 기존 구조를 유지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변화를 촉진하고 증폭함으로써 낡은 구조를 버리고 새질서로 진화하는 자기 초월을 수행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모든 생명은 그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적 관계의 그물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 안에 우주적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라 할 수 있다. 곧 생동하는 우주의 진정한 모습은 모든 생명을 하나의 생명에로 아우르면서 진화하는 큰 생명의 무궁한 펼쳐짐이라 하겠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환경과 협동하여 공진화(共進化)하면서 우주의 궁극적 생명에로 합일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과 자연은 기계적인 질서 속에서 서로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으며, 그들의 참모습(생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그 본성을 억압받고 있다. 그리하여 생명에 대한 공동체적, 생태적, 우주적 각성이 더욱 요청된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각성만이 인류를 새로운 지평(문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1) 생명은 ‘자라는 것’이고 기계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2) 생명은 ‘부분’의 유기적 ‘전체’이고 기계는 부품의 획일적 ‘집합’이다.
3) 생명은 ‘유연한’ 질서이고 기계는 ‘경직된’ 통제이다.
4) 생명은 ‘자율적’으로 진화하고 기계는 ‘타율적’으로 운동한다.
5) 생명은 ‘개방된’ 체계이고 기계는 ‘폐쇄된’ 체계이다.
6) 생명은 순환적인 ‘되먹임고리(feedback)’에 따라 활동하고 기계는 직선적인 ‘인과연쇄’에 따라 작동한다.
7) 생명은 ‘정신’이다.
정신은 인간과 생명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모든 실재에 내재하는 생명의 근원적 활동이다. 아원자입자에서 은하계에 이르는 물질세계, 원시 세포에서 인간에 이르는 생물 세계, 생식과 대사작용에서 자기의식에 이르는 인간정신 세계는 모두가 ‘우주정신의 자기조직화’, 즉 우주진화의 역동적 표현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약 5만년 전에 거의 완성되었고 그 뒤로는 사회문화적 진화를 해왔다고 한다. 이미 인간은 의식, 사고, 언어의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생물학적 진화에서 정신의 진화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는 인간 정신은 자기보다 큰 생명체인 공동체와 생태계의 질서에 참여하고 지구정신에 통합되며 종국에는 거룩한 우주의 마음과 합일하게 된다. 이와 같이 생명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는 그 이상으로 자기한계를 초극하여 진화함으로써 창조의 기쁨을 느끼는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우주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 담겨져 있고, 이 거룩한 생명이 바로 한울님이다. 한울님은 초월자나 절대자가 아니다. 자기실현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 그 자체이다. 인간정신은 자기 안에 거룩한 우주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4.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동양 전통의 직관적 지혜는 우주 궁극의 실재를 창조하고 계시하는 초월적 신으로 보지 않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활동 속에 자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보편적(普遍的) 일자(一者) 즉 우주 생명으로 파악해왔다.
힌두교 최고신 브라만은 생명, 운동, 성장, 진행을 의미한다. 브라만은 때로는 생성과 소멸의 시바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힌두교는 우주를 유기적으로 성장하며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고립되고 고정된 것들은 모두 마야[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했다.
불교도 세상 만물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보는 역동적 세계관을 지닌다. 모든 것은 생겼다 사라지고[제행무상(諸行無常)], 유전하고 변화하는 것이 우주와 생명의 근원적 모습이라고 한다. 인간의 번뇌는 이렇게 변화하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된 현상과 관념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난다고 가르치고 있다.
중국의 역사상(易思想), 노장사상(老莊思想)도 모든 실재를 유동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았고, 그 궁극 원리를 ‘도(道=길)’라고 표현하였다. 도의 참모습은 음양의 순환적 활동의 주기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음과 양은 우주의 궁극적 생명인 태극(太極)의 양극이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음과 양의 순환적 파동으로서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우리 민족은 우주 근원적 생명을 ‘한’이라고 표현했다. ‘한’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체로서의 하나‘이다. 한은 ’원심적 확산’과 ‘구심적 수렴’을 뜻하기도 한다. ‘한’은 ‘한울’을 말한다. ‘한’사상은 고조선 이래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으로 면면히 이어왔다. 최치원의 풍류도가 바로 ‘한’의 사상이다. 풍류도는 진화하는 우주 생명의 전일성, 즉 ‘한’에 이르는 지극히 그윽한 길[현묘(玄妙)지도]이다. 우주 생명인 ‘한’에서 하늘과 사람과 땅이 생겨나고[일석삼극] 하늘과 땅과 사람이 각각 생명을 지니면서 하나의 우주생명에 합일되어 간다.[대삼합]
‘한’사상은 19세기 후반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다시 그 위대한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 민족 마음에 수 천 년간 형성되어 맥락을 이어온 한울님 상(像)이 민족의 암울한 전환기에 성(誠).경(敬).신(信)으로 모셔야할 한울님으로 다시 현현하게 되었다. 한울님은 ‘한’, ‘도(道)’, 태극, 기(氣)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삼라만상에 충만해 있는 우주 궁극적 실재이기에 결코 관념화하지 않았다. 동학은 이러한 한울님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동학사상은 하늘과 사람과 물건이 다같이 ‘한생명’이라는 우주적 자각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시천(侍天)], 키워 살림으로써[양천(養天)],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체천(體天)의 도를 설파하였다.
오늘날의 인류는 진화냐 파멸이냐 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 문명의 전환기는 인간에게 새로운 각성과 결단으로써 잃어버린 생명과 정신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인류의 문화유산에서 인류의 진로를 결정할 지혜를 찾아내 활용해야 한다. 특히 동학사상은 우리에게 지혜와 희망을 줄 것이다.
1) 사람은 물건과 더불어 다같이 공경해야할 한울이다. - 한울이 우주 생명이다.
2) 사람은 자기 안에 한울을 모시고 있다. -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
3) 사람은 마땅히 한울을 길러야 한다. - 양천론, 이천식천론
4) ‘한 그릇의 밥’은 우주의 열매요, 자연의 젖이다. - 밥을 먹는 일은 우주생명과의 합일.
만사지(萬事知) 식일완(食一碗)이라고 진리의 깨달음은 밥 한 그릇 먹는 이치를 앎이다.
‘밥을 먹는 일은 성스러운 우주생명에 바치는 제사이다’ ‘향아설위(向我設位)’=매일매일의 식사를 성스러운 제사로 그 본래의 의미를 찾게함. ‘지금 여기’ 우주생명을 모셔 기르는 산 사람 앞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밥을 ‘공양(供養)’해야 한다. (절에서는 음식 먹는 일을 꼭 공양한다고 한다. 부처님께 음식물 올리는 것도 공양이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해월 선사의 풀이대로 밥을 먹는 일은 우주생명을 먹는(이천식천)의 거룩한 행위이며, 하루하루 일상적 제사행위가 되므로 향아설위(제사 때 멧밥과 위패를 피안에 놓지말고 산 사람 즉 차안에 놓아두라는 논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5) 사람은 한울을 체현해야 한다.
사람은 시천과 양천을 통해 한울의 질서를 이 세상에 구현해야할 사회. 윤리적 책임을 지고 있다.[체천(體天)] 선천세계=현존 세계는 죽임과 억압, 소외와 분열의 세계다. 따라서 이 세상을 다시 한울의 세계, 생명의 질서로 개벽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죽임과 억압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싸움[도전(道戰)], 소외와 분열에 대한 사회. 경제적 투쟁[재전(財戰)], 이는 모든 이를 살리는 싸움,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위한 싸움이며 밥 한그릇의 싸움이다. 말의 싸움[언전(言戰)]은 사람과 물건이 다같은 한울님이라는 우주적 각성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일이다.
체천의 소극적 표현으로 십무천(十毋天)이 있다. ①생명을 속이지 않는다 ②생명 앞에 오만하지 않는다. ③생명에 상처 입히지 않는다. ④생명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⑤생명을 일찍 죽이지 않는다. ⑥생명을 더럽히지 않는다. ⑦생명을 굶기지 않는다. ⑧생명을 파괴하지 않는다. ⑨생명을 혐오하지 않는다. ⑩생명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6) 개벽(開闢)은 창조적 진화이다.
수운과 해월이 말한 선천세계는 생명을 가두고 소외시키고 분열시킴으로써 생며을 죽이는 질서라고 할 것이다. 생명이 생명답게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바로 후천(後天)개벽이다. 그러나 개벽은 결코 인위적으로 성취되지 않고,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되어 가는 것이다. 낡은 것이 새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진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는 무위이화라는 우주의 자연스런 진화과정이면서 동시에 시천(侍天)하는 인간의 각성과 실천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곧 우주의 생명과 마음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인간이 능동적 창조적 참여를 통하여 이룩된다. 우주와 인간은 협력하고 동역함으로써 창조적 진화를 이루어나간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우주와 인간이 통일되어 간다.
7) 불연(不然)기연(其然)은 창조적 진화의 논리이다.
수운은 독특한 개념인 ‘불연기연(不然其然:아니다 그렇다)’으로 천지개벽과 인간진화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동서양 전통의 존재론에 대한 진화론적 극복이라 하겠다. 수운은 생성 진화하는 천고의 만물들이 그 현상으로 보면(所見而論之則) 그렇고 그런 것 같이(其然:그렇다) 보이지만, 그 생성으로 보면(所自而度之則) 그렇지 않다(不然)고 하였다. 여기서 생성하는 것을 변하지 않고 고정된 틀, 즉 ‘존재’의 구조로 보면 ‘그렇다’와 ‘아니다’의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긍정과 부정의 이원론은 ‘생성’을 ‘존재’로 보는데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수운은 그 해결책으로, 모든 실재는 생성과 진화에서 보면 스스로 진화하는 궁극적 실재, 즉 한울과 합일되어 있기에 ‘그렇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아니다(不然)’라고 보는 것은 생각이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其然)’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우주는 물질과 반물질간의 대칭성의 파괴로 인한 태초의 폭발(Big Bang)로부터 시작되어 맥동치면서 진화해왔으며, 지금도 진화하면서 원자 분자 같은 물질의 미시적 수준, 생물과 인간 같은 생명의 거시적 수준, 생태계와 우주와 같은 초거시적 수준 등으로 중층(重層) 질서(秩序)를 형성해 왔다고 한다. 여기서 진화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가 ‘많은 것’으로, 복잡 혼돈의 무질서가 질서화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진화는 ‘복잡화’와 ‘질서화’의 두 경향을 통합하는 순환적 역동과정이다. 그리고 진화는 모든 수준의 생명이 그 존재의 한계를 넘어 멀리 뻗어나가는 것, 즉 ‘자기초월’이다. 그와 동시에 진화는 모든 수준의 생명이 요동을 통해 자기를 새로운 질서로 조직하는 것, 즉 ‘자기조직화’인 것이다. 따라서 진화는 낡은 질서의 초월과 새 질서의 조직을 그 과정에서 통일하고 있다.
또한 진화는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계획을 창조적으로 통합하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묶어 시공연속체로 통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주는 모든 수준의 생명이 상호연관의 그물에 이어져 미시계와 거시계가 공진화함으로써 무궁한 시공(時空)으로 펼쳐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통합하면서 진화하는 우주가 인간 정신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인간정신은 과거 정보와 경험에 관한 유전기능, 생태계와 에너지 교환하는 대사기능, 우주진화와 자기자신을 의식하는 자기의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 의식 안에 무궁히 진화하는 우주, 즉 한울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수운은 이를 시천(侍天)이라고 했다. 시천은 정태적 상태에서 초월적 신을 섬기는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생성·진화하는 우주를 지님으로써 한울과 더불어 진화하는 인간의 정신을 의미한다.
수운의 불연기연론은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로 진화의 진상을 규명하고 있다. 정태적 구조 안에서 거시적인 실재를 인식하려고 하면 다 파악할 수 없어서 ‘그렇다 아니다’로 나뉘지만, 거시적 차원의 실재는 경험과 분석적인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직관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다. 직관(直觀)은 문자 그대로 ‘내부에서 배우는 것(intuition)’을 의미한다. 직관은 구조적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지식이며 진화하는 우주의 전일적 과정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侍天)의 각성(覺醒:깨달음)이다. 인간이 생명의 궁극적 실재인 한울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아니다’가 ‘그렇다’로 전환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과 우주,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물질과 정신, 불연과 기연이 통일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연과 인간을 존재가 아니라 생성으로 보려는 시도가 19세기 유럽에서 있었다. 근대화 주변부인 독일의 낭만주의 정신은 당시 현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면서 변증법적 사고를 촉진시켜나갔다. 변증법(dialectic)은 헤겔의 관념론적이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이든 모순을 용인하는 특징이 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대립의 통일’을 모든 사물의 본질이요, 역사진보의 원동력이면서 사고의 법칙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사물의 변화를 ‘양의 점진적 질적 변화’로 보고 그 원리를 ‘부정의 부정’의 논리로 보았다. 변증법은 레닌에 와서 대립의 통일보다는 ‘대립의 투쟁’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변증법은 대립적인 것이 모순이라는 것보다 상보적(相補的)이라는 점을 놓침으로써 존재의 이원론적 구조를 벗어나는데 실패하였고, 생성과 변화를 단순히 ‘양의 질로의 변화’로 이해함으로써 기계론적 틀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헤겔의 ‘구체적(具體的) 전체성(全體性)’은 개체와 전체가 전일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획일적 전체성’으로 오해됨으로써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수운의 ‘불연기연론’은 인간 오성을 해방시키려다가 좌초한 변증법적(辨證法的) 이성(理性)의 실패를 극복하고 인간, 자연, 우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창조적 진화의 문법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5. 한 살림
모든 문명은 발생, 성장, 쇠퇴, 소멸의 길을 걸어왔다. 이는 우주의 역동적 순환과정의 일환이다. 산업문명은 1970년대 들어와서 그 정점에 도달하였고 바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생명의 원리인 유연성(柔軟性)에 반하면서 경직된 기계의 질서는 이제 생존이냐 파멸이냐 하는 절망적 위기의 벼랑에 서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위기저변에서 변화의 조짐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사회, 경제, 정치 모든 영역에서 지배권력이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경제를 지배해오던 미국 경제는 70년대를 고비로 국제수지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세계 최대의 부채국 미국의 달러가 전세계 화폐로 통용되는 기현상, 국경을 넘는 다국적기업들이 국가의 주권과 세계경제를 주무르게 되었다.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붕괴되고 서서히 민주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변화의 조짐은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더 이상 경제성장을 환경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사상과 이념에서도 새로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 그동안 세계를 양분해 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그 정책과 사상에서 현실성을 잃고 있다. 세계인류는 계급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류의 공동선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수렴화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오늘날 세계문명과 인류문화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상황을 돌아보자. 우리 민족의 근대사는 외압에 줄기찬 항전의 발자취였다. 근대 민족으로서 자각이 움트기 전에 서구 제국주의가 동점(東漸)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 밖으로부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그 폭력과 야만적 수탈 앞에 민중은 생존기반을 잃고 민족적 본성을 박탈당한 채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고 투쟁하였다. 하지만 독립과 해방을 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해방을 쟁취하지 못하였다.
2차대전 이후 미소 냉전체제는 세력균형이라는 미명 아래 한민족을 분단시켜 놓았다. 결국 남과 북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지금까지 타율적 이데올로기와 체제하에서 서로 적대하고 있다. 북은 주체사상이라는 낡은 스탈린주의의 토착화에 열중하면서 인민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폐쇄된 전체주의사회를 구축하고 있고, 남은 경제성장의 신화를 일구고 정치적 민주화의 꿈까지 달성했으나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영향 아래 빈익빈부익부의 경제양극화로 고통을 받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간 남북은 대화와 상호 방문, 개성공단운영, 금강산 여행등을 통하여 잠시나마 남북화해와 통일의 꿈을 꾸었으나, 최근 이명박, 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대화의 문을 닫은 채 긴 침묵에 빠진 상태이다.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인 우리 민족을 기계적 힘으로 분단시켜 적대토록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 그대로의 한반도를 기하학적인 선으로 절단하여 그 생명의 기(氣)를 끊어 놓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류와 세계를 분열시킨 억압적 기계문명인 것이다.
진정한 통일운동은 무엇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진화를 가로막고 있는가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기계적 산업문명이 인류진화 과정상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서 통일의 문턱은 발견된다.
한반도는 산업문명의 비극적 운명이 집약적으로 연출되는 무대이며 우리 민족의 현존은 소외된 인간실존의 응축된 상징인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비극적 운명은 방황하는 인류를 대신하여 과감한 창조적 진화를 감행하는 추진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이 생명의 씨앗을 전인류, 전세계에 퍼뜨리고 인류의 진화에 앞장서서 나선다면 우리 민족은 통일을 성취할뿐만 아니라 인류진화의 대약진을 알리게 될 것이다. 그때 한반도는 우주생명, 즉 한울님의 제단이 될 것이다. 곧, 진정한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전인류, 전생태계, 전우주생명광과의 통일을 지향하는 생명운동이다.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은 모든 개인, 모든 민족, 전 인류, 전 생태계가 한울님, 즉 우주생명의 태 속에서 태어나 한울의 젖을 빨고 자라는 한 형제, 한 동포라는 우주적, 생태적, 공동체적 각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한살림>은 물질·생명·정신이 역동적인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우주생명에 통합되어 가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인간·자연·우주 모두가 동요를 통해 새로운 질서로 자기 조직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감지하는 새로운 과학에서 이론적 전거(典據)를 찾고 있다.
<한살림>은 한민족의 오랜 전통과 맥을 이어오고 있는 동학(東學)의 생명사상에서 그 사회적, 윤리적, 생태적 가치관을 발견하고 있다. 동학은 물질과 사람이 다 같이 우주생명인 한울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거룩한 생명임을 깨닫고 이들을 ‘님’으로 섬기면서[시(侍)] 키우는[양(養)] 사회적 윤리적 실천을 수행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자기 안에 통일하면서 모든 생명과 공진화해가는 한울을 이 세상에서 체현시켜야 할 책임이 바로 시천(侍天)과 양천(養天)의 주체인 인간에게 있음을 동학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1) <한살림>은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覺醒=깨달음)이다.
2) <한살림>은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다.
생태계로서의 지구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이며 가이아(Gaia)로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다. 수 십 억년의 진화 과정을 겪으면서 인류가 나왔듯이 지구 또한 화학적 열역학적 비평형의 동요에도 자기를 유지해왔고 생태적 질서를 창조해왔다. 오늘날 새로운 과학은 분자 수준의 물질에도 생명과 정신 현상이 있다는 놀라운 혁명적 물질관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자연-지구는 함께 공진화해 왔다.
3) <한살림>은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이다.
‘사회는 살아있는 인간의 사회이며, 그 본래의 모습은 진화하는 생명이다.’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자연과 생태적 균형을 이루면서 환경의 변화와 진화에 유연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다.’ ‘해월은 사람이 사람을 한울로서 대접하면 세상을 기화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사회가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 진보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사회가 용시(用時), 용활(用活)하지 못하면, 즉 시대의 진화에 응하지 못하면 죽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인간은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낭비보다는 검약, 경쟁보다는 협력, 물질적 성장보다는 정신적 성숙, 이기(利己)보다는 공생(共生), 자기주장보다는 사회정의, 분열보다는 통일을 지향하는 참다운 공동체적 각성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다.’
4) <한살림>은 새로운 인식, 가치, 양식을 지향하는 ‘생활문화운동’이다.
오늘날 인간은 매우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생명인 것 같이 보이나 그 본성에 있어서 지혜롭고 성스러움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계문명은 인간을 그 본성에서 소외된 채 살도록 억압해 왔다.
인류와 생태계 멸절의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외된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모셔진 우주적 생명을 깨닫는 일이다. 즉, 인간이 자기 안에서 ‘우주생명과 합일됨’을 깨닫는 일이다. 여기서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린다. 참된 인간회복과 인간해방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제 삶의 인식, 가치, 양식에 대한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5) <한살림>은 생명의 질서를 실천하는 ‘사회실천활동’이다.
산업문명의 정치는 그 권력을 소수 기술관료에게 집중시키면서 대다수 국민을 억압하여 소외시키고 사회의 분열과 경제의 불균형을 조장하고 있고, 관료들의 부조리, 부패, 무능을 양산해 내고 있다. 대기업에 의해 장악된 경제는 자본과 기술을 더더욱 집중함으로써 실업과 주기적 불황을 유발하고 있고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함으로 생태적 균형을 파괴하고 있으며 부를 독점함으로써 사회의 불균형과 분열을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우주의 큰 생명을 자각한 창조적 인간은 반생태적, 반공동체적 정치권력, 기술관료, 대기업들에 대한 생명의 투쟁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민족과 인류가 다함께 살자는 이 싸움은 사랑의 투쟁이며 평화의 투쟁이고 생명의 투쟁이다. 그리고 생명의 투쟁은 인류진화의 길에서 새로운 문명을 준비하는 창조적 활동이며 후천(後天)개벽(開闢)이다.
6) <한살림>은 자아실현을 위한 ‘생활수양운동’이다.
생명의 세계관, 가치관의 실천은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모든 생명이 모두 우주생명에 합일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수운은 한울을 모시는 일은 자기의 마음을 닦고 몸의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수심(修心)정기(正氣)] 시천(侍天)은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닦는 일이다. 수운은 공경을 다하여 믿고 한울을 섬기며 수심정기(守心正氣)하면 누구나 무극대도(無極大道)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만약 사람이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거룩한 생명이라면, 자기와 이웃 그리고 자연 안에 있는 한울도 키워야할 윤리적 책임이 따른다. 양천(養天)은 인간이 자기와 이웃과 자연 안에 내재해 있는 우주생명을 키움으로써 ‘자아’와 ‘공동체’와 ‘생태계’의 공진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시천이라는 우주적 각성과 자기 마음을 닦는 수양은 생명을 기르는 현실 생활에서 이루어진다, 생활(生活)은 인간이 살아 활동하기 위해 자신과 뭇 생명에게 ‘밥’이라는 생명에너지를 먹여 키우는 일이다.
7) <한살림>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 활동’이다.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이다. 분단의 고통은 진주조개의 창조적 고통이다. 우리 민족의 역할은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창조의 원동력으로 전환시켜 인류진화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한살림>은 기계문명이 분할, 단절, 폐쇄시킨 모든 것을 다시 통일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통일을 성취시키고자 한다. 수운의 시천사상은 통일의 대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거룩한 우주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므로 누구나 진화하는 우주의 창조적 대통일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 억압, 분열, 소외시키는 산업문명을 선천세계라고 부르고 이를 개벽하는 일이 창조적 진화이다. 개벽은 한울과 인간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운은 인간에 내재해 있는 우주생명은 바로 인간의 옮길 수 없는 본성이다. [各知不移者也] 소외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이다. 시천의 각성이 전 인류의 영혼에서 일어날 때 자연과 인간, 개인과 사회, 민족과 인류가 하나의 우주생명으로 동귀일체(同歸一體)되는 생명의 궁극적 통일이 성취될 수 있다.
지난 이천년 이상 예수와 붓다 공자에 의해서 ‘사랑’, ‘자비’, ‘인(仁)’의 등불은 인류를 어둠에서 인도해왔다. 그러나 산업문명시대에 그 빛이 희미하게 되었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인간해방과 혁명의 깃발을 높이 올린 이래로 억압 소외된 나라와 민족의 길잡이가 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우주 속의 인간’, ‘인간 안의 우주’라는 새로운 각성이요, 생명인 빵의 의미와 창조적 진화의 의미를 깨닫는 시천의 각성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을 펼친다.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내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수운(水雲)]
이 선언문은 한 살림 운동의 이념과 실천방향을 확립하기 위해 가진 공부모임과 토론회에서 합의된 내용을 장일순 선생님, 박재일, 최혜성, 김지하가 정리하고, 최혜성이 대표집필하여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것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광철 작성시간 14.10.07 고맙습니다.
저희 학교 책모임에서 한 번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이 절판되었다구요?
링크 걸어주신 데에서 다른 책으로 대체해 읽어야 하나요? -
작성자남궁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0.10 글쎄요, 나온 지가 오래 되어서 한살림 매장에서 모르더군요. 구매가 되면 초록회원님들께 한 부씩 배포할까도 생각했었지요.
아무래도 <한살림선언-다시읽기>를 모심과 살림측에서 구입하셔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본은 일반인이 읽기 어려울 듯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