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세상 이야기

[스크랩] 콘트랄토 (Contralto,) 캐슬린 페리어 (Kathleen Ferrier) 의 생애와 그녀의 노래 5곡

작성자새벽|작성시간20.09.01|조회수33 목록 댓글 0

 

 


 

 

 

Contralto,  Kathleen Ferrier

 

 



 Contralto Kathleen Ferrier. An die Musik. Schubert.



 

 

 "Ombra mai fù" | George F. Handel, Serse

 

Kathleen Ferrier, Contralto

Sir Malcolm Sargent,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Kathleen Ferrier; "What is life to me without you?";

ORFEO ED EURIDICE; Christoph Willibald Gluck


 

 

 

Schumann: Widmung, Op.25, No.1

 

 

   

 

Kathleen Ferrier "Pur dicesti"

 (A Lotti - 'Pur dicesti, o bocca bella : 아름다운 입술이여)

 

 

 

 

 


캐슬린 페리어 (Kathleen Ferrier : 1912 - 1953)

 

 

영국 태생의 세계적인 콘트랄토 가수.

캐슬린 페리어는 밝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했던 콘트랄토로서,해맑은 가을 하늘과 같은

서정적 표현과 아련하고 상냥한 감정이 따뜻하게 번져나오는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높은 지성의 뒷받침을 받아서 한층 시적(詩的)인 깊이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노래를 10 년이나 앞당겨 불렀다 할 수 있다.

 

늦은 나이에 성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려한 꽃으로 만개하였다.

하지만 운명의 神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고,젊디 젊은 그녀에게 유방암이라고 하는

너무나 가혹한 운명을 던졌다.  그녀는 1953년 2월,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첫 날 공연은 무사히 마쳤으나, 둘째 날 공연시 뼛속까지 번진 암세포는 결국 무대에서

공연중인 그녀의 다리뼈를 부러트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가 부러진가운데에서도 공연을 끝까지 마쳤고,무대 막이 내린 뒤 들것에 실려나갔다.
연극이나 영화가 아닌 실제 상황으로 그녀는 드라마같은 인생의 막을 내린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무대였고 겨우 41세의 나이로 불꽃같이 산화하였다.

 

 

페리어는 1912년 4월22일,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서 지방의 블랙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피아노를 배웠고,프랑스 워커라는 선생님에게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13살 때는 지방 콩쿠르에서 2등을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고 학교생활에도 열심이었는데

각종 스포츠와 합창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재미있는 것은 학교에서 합창을 하면서 약간 허스키였던 캐서린의 목소리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아 그녀에게 입만 벌리게 했다고 한다.


페리어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14살 때였는데,그녀의 오빠가 캐나다로 떠났기 때문에 가족이

생활비를 송금해야 했다.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었고,그녀도 피아노 교습비를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전화교환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페리어는 언어 감각을 키우는 등 일을 하면서도 늘 무언가 얻고자 노력했다.
16살 때 페리어는 전국 규모의 콩쿠르에 참가하여 본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패자부활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피아노를 부상으로 받고 런던에서 열리는 결선에도 참가한다.


결선 결과 입상은 못했지만 지역 BBC 방송에서 연주하는 기회를 얻으면서 반주자로도

활동을 시작했고, 합창단 활동도 계속했다.  1935년,그녀는 은행원이었던 버트 윌슨(Bert Wilson)과

결혼하여 영국 북부의 칼라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는데,당시 그곳 노래경연대회에서

노래와 피아노 두 부분에서 우승하였다.

이로인하여 노래하는 것이 그녀의 인생 전부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차대전 초기에 대영국 예술위원회에서 콘서트를 개최한 계기로 당시 지휘자였던

말콤 사전트의 권유로 후에 그녀의 가수 생활의 중심이된 런던으로 갔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으며

종국에 가서는 이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뉴 캐슬에서 허친슨(Dr Hutchinson)에게,영국에서는 왕년의 바리톤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던 로이 헨더슨(Roy Henderson)에게 사사하였다.

그녀의 독특한 음색은 의학적으로 다른이들과는 사뭇달랐는데,그것은 목구멍이

예외적으로 굉장히 넓은데서 기인하였다.

페리어는 1941년 12월,알프레드 바커가 지휘하는 헨델 메시아 연주회에 독창자로 무대에

올랐고 지휘자 바커는 페리어의 연주를 눈여겨보고 선배 지휘자 말콤 서전트에게 보기 드문

가수가 있다고 연락하였다.  사전트의 오디션을 거쳐 3주 뒤에는 미라 헤스가 전쟁 동안 주관했던

‘한 낮의 연주회’에서 브람스와 슈베르트 등의 가곡을 불렀다. 

하지만 페리어는 유명한 바리톤 로이 헨더슨과 더 공부하기로 하는데 왕립

아카데미에서 성악을 가르쳤던 헨더슨은 그녀를 4년 동안 가르쳤다.


페리어는 2차 대전의 와중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 출발점이 1943년 5월 1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레지널드 자크의 지휘로 연주된 메시아 공연이었다.

역시 무명이었던 피터 피어스와 함께 연주했는데 이 두 신인의 연주는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작곡가 벤쟈만 브리튼과 평론가 네빌 카더스 등을 만나게 되었는데,특히

브리튼,피터 피어스와의 관계는 오랜 기간 이어졌고,네빌 카더스는 페리어에게

많은 공연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한편 제럴드 무어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페리어의 목소리와 인간성에 매료된 무어는

가곡 레퍼토리를 넓히는데 도움을 주었고 오랜 기간 교분을 나눴다.

무어는 페리어에 대해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 영리하고,독단적이지 않으면서 자신감이

있고,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재치를 지녔다.”라고 할 정도로 인간적인 매력에 끌렸다.
이렇게 그녀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방세를 내기 위해 한 달에

29번이나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과로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는 등 많은 고통도 겪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페리어에게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다.
영국 음악계는 1946년에 열린 글라인드본 페스티벌로 활기를 되찾는데,페리어는

벤쟈민 브리튼의 <루크레티아의 능욕>을 공연하면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많은 연주자에게도 이름이 알려졌다.




 


또한 최정상의 지휘자들(브루노 발터,존 바비롤리,말콤 사전트,클레멘스 크라우스,카라얀,

벤자민 브리튼)과, 유명 가수(이조벨 베일리,슈바르츠코프,피터 피어스)와 함께 무대에 섰다.

특히 브루노 발터와의 인연은 그녀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고 발터 역시 그녀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발터와 그녀사이에 존재하는 믿음은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면 여실히 나타난다. 
    - 1947년 초,거장 브루노 발터는 제1회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연주할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부를 성악가를 찾기 위해 런던에 왔다.

 

말러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페리어가 발터 앞에 섰다.
그녀의 타고난 음악성은 말러의 그 어려운 요구들을 뛰어넘어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이 여인에게 위대한 성악가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음악가로서 내 생애 가장 행복한 교류가 시작되었다."...발터의 회상이다.

발터는 이후 자신이 평생 동안 만난 음악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두 사람으로 항상 말러와 페리어를 꼽았다.
마침내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열렸고,페리어는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빈 필을 뒤로한 채 <대지의 노래>를 불렀다.

당시만 해도 영국인에게 말러란 작곡가는 아주 생소한 이름이었다.

영국인의 감성으로선 지나치게 짙은 감정 영역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감정이 북받쳐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eig'(영원히)란 단어를 다 맺지

못하고 눈물로 대신해야 했다.  공연이 끝난후,페리어는 고개를 수그린 채 발터에게 사과했다.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점,죄송합니다."...

그러자 발터가 말했다
..."아니오,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와 오케스트라입니다.

진정 이 곡에 빠져들었다면
우리도 모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에딘버러 페스티벌 이후 말러의 <대지의 노래>는 페리어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고,

그녀는 20회 넘게 이 곡을 연주했지만 언제나 끝부분에 이르면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발터와의 말러 연주 이후,페리어는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발터를 통해 알게 된 말러의 작품들과 영국과 독일의 가곡들이 주요 레퍼토리였는데,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추가되면서 그녀의 명성은 끝없이 올라갔다.

그리고 1940년대 초 이혼의 아픔을 겪었던 페리어는 1948년,다시 사랑에 빠졌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연주활동에 몰입하였다.


연주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고,초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늘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나 바쁜 스케줄로 그녀의 몸은 점점 약해졌고,자주 병원신세도 지곤 했다.
1951년에는 유방암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 수술을 받았는데 경과가 나쁘지 않아 활동을 재개했고,

대지의 노래를 비롯한 많은 녹음을 하였다.
그리고 1953년 2월에 존 바르비롤리와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연주하게 되었다.
첫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3일 뒤에 열린 두 번째 공연의 후반부로 갈수록 몸 상태는 악화됐다.


하지만 페리어는 공연을 마무리했고 공연이 끝나자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 공연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되었다.
그해 7월 두 번째 수술을 받았고 경과는 전 같지 않았지만 그녀는 늘 밝은 표정으로

문병 온 사람들을 대하면서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페리어는 1953년 10월8일,41살의 짧았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콘트랄로 가수였던 페리어는 이렇게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제럴드 무어는 그녀의 음악 세계에 대해 "페리어의 연주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말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진정 들을 줄 아는 연주자죠."라고 말했다. (옮긴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