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교육철학

[스크랩]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작성자권선비|작성시간08.05.13|조회수1,597 목록 댓글 0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이야기




아테네에서 꽃핀 철학 _ 서양 철학의 거인들


  철학은 자연과 세계를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곧 인간의 문제로 옮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이후 철학의 중심은 아테네로 이동하여 지중해 세계 여기저기서 모여든 현자(賢者)들이 각광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을 철학의 중심으로 삼는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철학은 단순한 변론술(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성공적인 공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실용적 기술,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나, 정치 집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 꼭 필요하였다. 소피스트들은 모여들어 이러한 변론술을 가르치며 살았다.)로 축소되고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사상적 혼란이 따르게 됩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나타나 철학의 방향을 진리의 탐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후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서양 철학의 두 거인들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만들었으며, 사상 최초로 철학 학교를 세웁니다. 이로써 철학은 올바른 가치와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되고 그 전통은 서양의 모든 역사를 지배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대에 서양의 문명은 그들의 영원한 스승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모든 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와 주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철학의 역사는 반플라톤주의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플라톤의 철학과 최초의 반플라톤주의 철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그들에게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든 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두 거인에게로 끝없이 돌아가는 역사인 것입니다.

※ 아테네에서 피어난 서양철학에 대하여는 우선 이 포스트에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만을 기록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별개의 포스트에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소피스트 _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


  BC 5세기 초 수차례 페르시아의 거대한 침략을 주도적으로 물리친 그리스의 아테네는 지중해유역의 학문의 중심지로 번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테네는 풍요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부와 사치에 이어서 이제는 고도의 교양을 쌓고자 하는 욕망도 또한 팽배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밖에도 또 나라의 민주적 헌법은 웅변술이 지니는 의미를 더욱 고양시켜 줌으로써 국민의회나 재판소에서도 자기의 논지를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도 못지않은 유창한 형식으로 공표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출세를 꿈꾸는 사람(물론 시민 누구에게나 원칙적으로 입신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을 참고)이면 누구나가 정치가며 동시에 웅변가로서 철저한 훈련을 쌓아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욕구에 부응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소피스트(Sophist)”였습니다. 어원적으로 보면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이들이 지식이나 논리적 표현들을 오로지 상대방을 설득하고 속이려는 목적으로 이용하면서 그들의 대화가 말꼬리를 무는 언쟁이 되어가고 본래의 의미마저 왜곡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플라톤은 소피스트(전통적으로나 또는 현재에 있어서나 보통 비난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수사학적 허식, 지적 천박성, 심지어는 도덕적 불성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옛 문구가 단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좋지 않은 이론을 좀 더 좋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을 대체적으로 소피스트라고 부른다.)를 ‘궤변가(궤변론자)’로 평가 절하하고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적으로 여겼습니다.


  플라톤은 “부유하고 뛰어난 젊은 사람들을 돈을 받고 낚는 사냥꾼”, 아리스토텔레스는 “피상적인 지혜를 농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으나, 소피스트들은 지자(知者)라고 자처하면서 오만을 부리기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자기들은 훌륭한 태도, 사회적 성공의 기술, 웅변에 의해서 집회를 좌우하는 방법,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데 필요한 술책 등을 가르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이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주, 통일성, 차이점 등 위대한 질문에 관심을 가졌다면, 소피스트는 인간 그 자체와 행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위대한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하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소피스트는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내게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며, 나아가 사회적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법마저 거부(법이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강자의 도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사람의 주관적 의지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만일 어떤 것이 좋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에게 좋아야 하며 아름다움마저도 내가 끌릴 때 비로소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제 눈에 안경’식의 이러한 철학적 태도를 ‘상대주의(Relativism)’ 라고 하며, 대표적인 사람인 프로타고라스는 ‘그 여자는 아름답다.’라는 문장은 항상 참이 아니며 심지어는 거짓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평소에 아름다웠다고 할지라도 어떤 다른 상황에서는 아주 미워 보일 수 있으며, 보는 이의 미에 대한 취향이 쉽게 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으로 언제든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은 제한된 부분만을 알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능력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입장을 고르기아스는 다음 세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회의론을 절정에 이르게 합니다.


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② “비록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③ “어떤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은 전달될 수 없다.”


  이렇듯 소피스트의 주장은 잘못된 논쟁과 회의적인 인상마저 주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생각하기’의 중심을 자연에서 사람으로 옮겨 놓게 됩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더 이상 세계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외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 만물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며, 이 세계와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의 전환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피스트들은 예의 바르고 세련되고 세계주의적이었으며, 또 번영을 사랑하고 잘 사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잘 산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 즉 안락하게 또는 심지어 호화스럽게 산다는 의미와 젊잖게 또는 훌륭하게 산다는 의미와의 두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이 때로는 안락하게 사는 것이 곧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처럼 ‘나’를 문제의 중심에 놓으면서, 남에 의해서 결정된 규율과 가치를 모두 거부하는 소피스트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들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되고, 결국 절망적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무것도 객관적으로 옳거나 정당한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생각이 ‘나’라는 주관에 의해서만 주장되고 ‘너’라는 객관적 관점이 무시될 때, 우리는 합의점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말하는 법’을 배워서 보다 많은 것을 알려고 추구했던 소피스트들은 결국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회의에 빠지고, 대화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지경에 이를 때 소크라테스의 대화의 철학이 등장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소피스트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상대주의 ~ 상대주의는 주관적인 인식만이 가능하며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상대주의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상대적이며, 인식하는 주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불가지론이 되며, 윤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도덕규범이나 윤리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윤리적 상대주의로 대응하게 된다.



① 프로타고라스 -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480?~410?)는 데모크리토스가 가르치는 ‘압데라’에 있는 학교를 나왔고, 때로는 아테네에서 그리고 때로는 방랑길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 중 하나에 프로타고라스의 이름을 따서 붙이기도 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에 불가지론(不可知論; 초경험적超經驗的인 것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하는 철학 상의 입장)의 태도를 나타냈기 때문에 불경죄로 고발당하였고 그의 책은 공개적으로 태워졌으며, 결국 그는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다. 자신을 소피스트라고 최초로 명명한 그는 인간을 떠난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모든 사물을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이 없다면 모든 사물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지식이란 인간의 감각을 거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모든 사물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실용주의 성향을 지닌 프로타고라스에게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준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척도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이다. 결국 모든 지식, 하물며 진리까지도 인간을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철학의 중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놓았으며 사물과 지식 모두가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피스트들의 성향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개인주의와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 [‘트라시마코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바탕으로 조잡한 결론을 내놓았는데, “힘이 곧 정의이다.”라고 했다.]



② 고르기아스 _ 진리는 없다


  고르기아스(Gorgias: BC483?~375?)는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시대의 소피스트로서 남부 이탈리아의 ‘레온티노이’ 출신이다. 아테네에 사절로 왔다가 그곳의 학문적 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으며 프로타고라스가 인식의 중심에 인간을 놓아 모든 가치를 개인화, 상대화시켰다면, 고르기아스는 더욱 노골적인 상대주의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 학설을 펼쳤다.


  그는 진리가 개인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와는 달리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보편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더 나아가 관습까지 무시했다. 그러한 회의주의를 통해 그는 마침내 철학을 포기하고 수사학(민주정치 시대의 그리스 아테네에서 정치연설이나 변론을 효율적으로 행하기 위한 변론술에서 기원한 학문. 말과 글의 표현에 대한 것으로 문장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의 키케로에 와서 일곱 가지 교육 과정의 하나로 채택되었다.)으로 전향하여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엘레아학파는 세계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고르기아스는 공간 안에도 있지 않고 시간 안에도 있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③ 소피스트란?


  소피스트가 활동했던 시기는 아테네의 전성기이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로 불리기도 하는 이 시대에 아테네는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아테네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흔히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그들은 지식을 팔기 위해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사냥꾼으로 비난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괜히 생겨난 것은 아니다. 아테네의 세련된 문화와 발전된 제도는 철학의 중심을 자연에서 인간과 문화로 돌려놓았고, 소피스트들이 나타난 것은 이러한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와 문화의 번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사는 것 이외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한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인 것이다.


  그들은 풍부한 경험과 식견으로 젊은이들의 스승이 되었고, 그들에게 문화적, 정치적 활동에 대해 가르쳤다. 문제는 그들이 돈을 받고 지식을 팔았다는 사실(당시 그리스에서는 원래 수입을 올리기 위한 노력 제공은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이다. 또 그들의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개인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적인 타락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번영의 시기에 이어 아테네는 가치의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피스트들이 그러한 분위기를 앞장서 만들었던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했건 간에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아테네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였고, 새로운 스승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스승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대항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옹호하였고, 땅에 떨어진 윤리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그를 통해 비로소 그리스의 사상적 혼란기는 극복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이 인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들에 공헌을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활동으로 문법과 수사학이 발전하였으며, 교육과 정치의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위 두 사람 이외에 히파이스(Hippies; BC 420년경 활약, 엘리스 출신, 기억술 발명), 프로디코스(Prodikos; BC 420년경 활약, 케오스 출신),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 BC 420년경 활약, 칼케돈 출신), 이소크라테스(Isokrates; BC 436~338, 아테네 출신, 유일하게 저서가 현존) 등이 있다. [소피스트 사상을 철학사적 의의에서 볼 때 첫째, 자연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인간의 문제로 전화시켰다는 점이고, 둘째, 사유 자체가 곧 사유의 대상으로 등장함으로써 다름 아닌 인식의 조건과 가능성,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셋째, 윤리적인 가치 척도까지도 전적으로 합리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윤리학 자체를 과학적으로 고구(考究; 자세히 살펴 연구함)하면서 동시에 이를 논리정연하게 철학적 체계 속에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제시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들의 활동이 희랍의 철학 발전에 있어서 지대하고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소크라테스 _ 대화로 길을 찾아가는 철학자



무지를 통해 찾아가는 진리의 길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이나 못생긴 사람(당시에는 유명한 인물을 흔히 신에 비유하곤 했는데, 플라톤은 아폴론에 비유했으나 소크라테스는 대단한 추남신인 ‘실레노스’에 비유했다고 한다. 남성의 용모에 대하여 중요하게 평가했던 그 시절 소크라테스는 못 생긴 용모 때문에 큰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을 극복했다.)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천하의 악처로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의 아테네는 에게 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세계사포스트 참조]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중기까지의 내용은 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사상만을 기록했는지, 아니면 제자인 플라톤의 생각이나 미화가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대화편의 후기에서는 주로 플라톤의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다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놓는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실제 수많은 제자와 시민들로부터 스승으로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단순히 ‘대화’라는 독특한 철학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겸손, 청렴, 솔직한 성격과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한 성품으로 ‘대화’를 통해 상대를 공격(당시의 소피스트)하기보다는 자신의 좌우명이었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처럼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무지에 대한 자각’으로 보다 더 나은 지식과 지혜를 도출하였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탁(올림포스 산에 있는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는 신의 뜻을 물어 그 응답을 받는 신탁信託이 행해졌다.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왕들도 이 신탁에 의존하여 정치적 결단이나 큰 전쟁의 승패에 대해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을 계기로 자신의 길을 찾습니다. 어느 날 ‘카에로폰’ 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무지에 대한 자각)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식한 인간이 악한 짓을 한다고 보았다.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 절대로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이 곧 미덕이며, 악의 으뜸 원인은 단연코 무지라는 생각은 기독교적 윤리학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또, 그는 자신을 게으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성가신 존재로 여겼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 것이 없다는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 때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동의할 만한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 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집요합니다. 그는 피상적인 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 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강인한 육체를 타고난 용맹함으로 펠로폰네소스전쟁터에서 몇 차례 두각을 나타냈던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비만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는 일이 없었고, 70세에 젖먹이 아이를 가질 만큼 강한 정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검소한 옷차림에 언제나 맨발로 시장바닥에서 사람들과 논쟁하기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경건한 것과 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 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 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 자체가 무엇인지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 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 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 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반어법이란 먼저 상대방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던져서 그의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 후에 상대방에게 스스로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음을 수용하고 이것을 인정하게 한다. 반어법의 특징은 잘못 알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게 한다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한 충격적인 부정을 하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빠져 나갈 길이 없는 혼란스러움을 일시적으로 겪게 한다. 그런 연후에 스스로 새로운 길을 통해 올바른 지식(진리)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며, 잘못된 지식은 바른 지식으로 교정된다. 이렇게 반어법을 통해 스스로 바른 지식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그의 어머니의 직업을 본 따 ‘산파술’이라고 한다.]


변증법 ~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방법론은 다름 아닌 질문과 대답이었다. 스스로 진리의 산파로 여긴 그는 논리와 반어법을 써서 상대로부터 차츰차츰 진실을 유도해 냈다. 제임스 조이스의 추측에 따르면, 그에게 이처럼 유익한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 크산티페(Xanthippe)였다고 한다.



윤리를 실천한 철학자 _ “음미되지 않은 인생은 살 보람이 없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윤리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여기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순전히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은 곧 라고 주장합니다. ‘아는 것’ 과 ‘선한 것’ 은 같다는 말입니다. 결국 올바른 행동이란 올바른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는 ‘옳다’ 고 하는 어떤 보편적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 지식은 소피스트들이 믿는 것처럼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아닌 이성입니다. [소피스트와 달리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끊임없는 사색과 반성을 통해 인간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것을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무엇인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소크라테스에게는 모든 경우에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이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로 인해 윤리 문제를 탐구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그가 지칠 줄 모르고 천착(穿鑿;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하던 대상이 도덕, 정의와 진실 그리고 선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그를 만인의 스승으로 섬기게 합니다. 그는 신에 대해 불경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서나 젊은이는 타락하기 쉬운 존재이다.)시켰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법정에 기소되었습니다. [그의 철학에 대한 가르침은 당시의 잘못된 편견과 지식으로 변화를 거부하고, 권위적 태도로써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하였던 지식인들과 기성세대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복종보다는 대화를, 권위보다는 자기비판적인 실천을 요구하게 되어 사회 시스템상의 하나의 버그(bug)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도망가지 않고 아테네에 남아 500여 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습니다. 그의 변호는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활동이 정당하다는 훌륭한 논리적 설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기소가 부당함을 설명하는 한편,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것은 기소가 아닌 공식적인 환대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많은 배심원들에게 모욕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훌륭한 변론의 대가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형이라는 극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충분히 아테네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도시국가였기 때문에 국외 경계선이 가까워 망명하기가 용이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간곡히 탈출을 권유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크리톤’의 간청을 뿌리치고 순순히 그의 생명을 끊는 독배를 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법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가르쳤던 것들을 스스로 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법률과 법적 결정에 대해 순응함으로써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미덕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알고 있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그가 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태연히 독배를 들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이 빚진 닭 한 마리를 갚아 달라는 말을 크리톤에게 남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인간의 선함과 진리를 믿었고, 아테네를 타락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거리를 떠돌며 말을 걸어 왔던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는 이렇게 자신의 정의를 지키며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자신이 아닌, 장군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회고록)과 그 유명한 제자인 플라톤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외의 많은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사후 낙향하거나 타지로 이주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이들을 ‘소크라테스학파(그 대표적인 사람은 아리스티포스와 키레네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다.)’라 부른다.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던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태도는 국법에 대한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죽음으로 실천하며 지키려 했던 위대한 용기로써 그를 역사에서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그는 영혼의 불멸이나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코 죽음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 것이다.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는 “철학이란 죽음에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의 대화에 열중한 철학자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그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집으로 그를 찾아간다면 그보다는 잔뜩 화가 나 있는 그의 아내 크산티페를 만나는 당황스러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크산티페가 악처였다는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그녀를 가리켜, ‘소크라테스에게 꼭 필요한 아내’라고 말했다. 그가 집안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여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진정한 철학자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과연 원래 악처였던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남다른 행동을 참다못해 악처가 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크산티페는 가사를 돌보지 않고 수다만 떨러 다니는 소크라테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댔고 머리에 더러운 물을 끼얹기도 했으며, 겉옷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수다쟁이 거지라고 불리었는데, 그는 노예조차도 도망칠 것 같은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가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철학을 모르는 크산티페의 입장세서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악처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소크라테스는 친구들과 토론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고, 크산티페는 더더욱 그것을 참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처럼 돈을 받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크산티페의 눈에는 그저 게으른 한량의 객설 정도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편안한 집이 아닌 거리에서 철학을 논했던 이유는 아내인 크산티페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악처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숙한 아내로 묘사되고 소크라테스와의 사이도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크산티페의 악명은 소크라테스라는 현자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과장되고 가공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철학자의 아내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재판

  그의 고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죄상이 열거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기묘한 신령 따위를 도입하려고 한 죄를 범하였고, 또 그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사형을 구형한다. 고소인은 ‘메레토스’라는 젊은 시인인데, 그를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아뉴스’라는 부유한 상인으로 보수적인 정치가였다. 이 고소에 의해 재판이 진행되었고, 재판정에서 소크라테스는 고소는 모두 사실무근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 때의 진술은 플라톤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변명에 대해 재판을 담당한 501명의 배심원은 281대 220으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형벌에 대해서는 361표라는 다수의 찬성을 얻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재판을 둘러싸고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해왔는데, 이들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이것은 잘못된 판결이며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것은 아테네인의 역사에 남는 오점이라고 하는 견해이다.


※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장면

  독이 든 잔을 받아든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간수에게 물었다. “여보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내게 가르쳐 주게.” 그러자 그 간수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 약을 다 마시고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걷다가 그 다음에 누우시면 됩니다.” 그러자 그는 침착하게 독이 든 잔을 비웠다. 제자들이 울기 시작하자, 그들을 달래면서 감옥 안을 거닐기 시작했고, 이윽고 다리가 무거워지자 누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크리톤, 부탁이 있네. 나는 아스클레파우스한테 닭을 한 마리 빚졌다네. 잊지 말고 내 대신 갚아 주게나.”


※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의 저서로 BC 399년 소크라테스가 국가의 신들을 부정하는 등 당시 그리스 청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혐의로 고발되었을 때 법정에서 한 변론 내용을 담고 있다.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플라톤이 스승의 생애와 인격을 밝히기 위하여 쓴 것으로 소크라테스의 철학 활동, 사상과 플라톤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이다.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고발되었으나, 그는 이에 대하여 당당한 변론을 시도하였다.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진수(眞髓)로서, 또한 소크라테스의 고발 · 판결 · 사형의 관련을 밝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에 의한 소크라테스 문학은 때로 작자의 창작이 섞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저작의 주요 부분은 역사적으로도 충실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문체로서는 플라톤의 작품 중 백미(白眉)에 속하고, 예로부터 그리스 문학사상 산문문학의 주옥편으로 중히 여겨왔다.


※ 크리톤

  플라톤의 저서로, 소크라테스가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친구인 ‘크리톤’이 그에게 탈출을 권유하나 소크라테스는 그를 힐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아테네 시민과 신들에게 한 약속을 어기고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는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선책이었음을 볼 수 있다.



※ 파이돈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對話篇)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 ‘파이돈’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숭고한 죽음의 과정을 보여 준다. 영혼의 불사와 이데아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하고 있다. 아테네의 감옥에서 죽음에 직면하여 소일하던 소크라테스의 나날을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영혼불사(靈魂不死)의 증명을 주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본래의 목적은 필로소피아란 죽음의 훈련이며, 무덤으로서의 육체에 대한 초극이라는 입장에서 항상 영원한 실재(實在)를 생각하면서 사(死)와 생(生)에 관한 사색을 깊이 해갈 것을 권장하는 데 있다.



※ 청소년을 위한 서양 철학사(박해용), 서양 철학사(서용순), 서양 철학사(램프레히트), 친절한 철학 쉽게 읽는 철학사(리처드 오스본), 서양 철학사(버트란트 러셀), 철학과 사상(박정옥), 알기 쉬운 철학의 세계(조정옥), 철학의 문제들(버트란트 러셀), 철학 삶을 만나다(강신주), 철학이란 무엇인가(오창환), 서양철학사 100장면(김형석) 등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지혜롭게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