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항해 129. 헤겔의 반성 개념
팝송 가수 빌리 프레스턴은 Nothing from from nothing 이란 노래를 불렀습니다. 즉 '아무것도 없는 데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논리학』(1812)에 담긴 반성 이론과 그 문장이 같습니다. 왜냐하면 헤겔은 그의 논리학에서“반성은 무에서 무로의 운동이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공에서 공으로의 운동이다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경전 반야심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불교의 핵심을 가장 짧게 그리고 잘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도 공 즉 텅 비어있음 혹은 없음이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더 나아가서 있음 즉 색과 없음 즉 공이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교에는 변증법이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색과 공이 같다 또는 유와 무가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헤겔의 논리학은 이런 모순 현상을 미리 말고 있으면 전체 논리의 구조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헤겔의 변증법은 색즉시공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바로 헤겔의 반성의 변증법입니다. 공을 통해서 서로 대립되는 두 명제가 통일되고 있습니다. 즉 모순의 해소입니다.
따라서 헤겔의 사상은 그 내용적으로 불교와 같습니다. 즉 보이는 것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무한 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철학을 철학에서는 관념론이라고 합니다. 불교도 관념론으로 간주됩니다.
보이는 것 즉 물질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공즉시색이라고 아주 간단히 표현했습니다. 즉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진짜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는 것들이 잘못 본 것들이다 즉 보이는 것들이 환영,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 다른 표현으로 마야라고 합니다. 마야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가 실체적이지 않고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것임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즉 눈에 보이고 감각되는 만물은 자성이 없어 공(空)하며,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지만 그 본질을 꿰뚫으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공 사상 즉 마야의 사상입니다. 여기서 자성이란 물질의 실체성 혹은 자기동일성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identity입니다. 여기서 관념론의 원칙이 선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거꾸로 공즉시색이라고 합니다.
아까본 주관적 환상 즉 마야가 이번에는 실체라고 선포됩니다. 환상과 실재가 혼동되고 뒤바뀝니다.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실재가 환상이 되고 환상이 실재가 됩니다. 서로 반대의 것이 같다고 선포됩니다. 이를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든지 반대의 일치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변증법입니다. 대립자의 일치와 상호 교류 이것이 헤겔 변증법입니다. 단 헤겔은 그 과정을 좀더 세밀하게 파헤칩니다. 그 과정은 좀 이따가 다시 보겠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내가 없다 는 무아설도 있지만 그것도 살과 뼈를 가진 존재로서의 나 즉 신체를 가진 인간이 없다는 말이지 정신 세계나 의식의 세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도 정신의 작용입니다. 보통 이런 현상은 심리적 이상이나 정신병으로 보긴 합니다. 그러나 벌쩡한 사람에게도 이런 현상이 항상 일어납니다. 즉 다 알다시피 우리는 모든 지구의 현상을 일단 눈으로 봅니다. 즉 물리적 현실이 눈동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뇌신경 속에 반영이 되고 우리는 이를 영화의 스크린이 아니라 다시 입체 현실로 봅니다. 현실에서도 변증법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통일 및 교류가 부단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3차원의 실재가 눈동자로 들어가서 망막에서는 2차원의 도형으로 바뀌고 그 2차원의 형태를 뇌가 해석하여 다시 3차원으로 형성해 냅니다. 그 결과 3차원의 현실은 그 크기 그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원근법의 형태로 즉 멀리있는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이는 현실로 재구성이 됩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물체들의 독자성을 만져봄으로써 제대로 그들을 직접 만난다는 생각 역시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물체를 만질 때나 물체와 부딪힐 때도 역시 그 촉감이 신경을 타고 뇌로 흘러 들어가고 다시 뇌의 CPU가 이를 가까운 외부에 있는 물체로 해석을 하여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관념론의 입장은 확실하고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역시 올바른 사고입니다. 혹은 물질과 정신이 같다 또는 물질과 정신이 서로 교류한다는 존재의 신비 현상입니다. 사실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어느 정도 이런 문제 해결에 기여를 합니다.
색즉시공과 연관하여 불교의 유식론은 오직 식 즉 의식만이 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 즉 색은 공입니다. 공도 진짜 공이 아니라 의식의 작용을 말합니다. 즉 눈에는 안 보이는 의식 혹은 정신이 삼라만상을 생성한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는 일심 즉 한 마음이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풍파와 사성제 즉 고집멸도 역시 모두 마음의 법이 일으킨 것입니다.
즉 불교에서도 마음 혹은 의식이 전부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인식작용이 투영한 현상임을 강조합니다. 즉 외부 대상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고 구성하기 때문에 세계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헤겔이 언급하는 반성 즉 reflection역시 그런 의식을 말합니다. 헤겔의 반성은 주관적인 기능이 아니라 존재론적 기능입니다. 즉 사물과 우주가 반성 작용을 통해서 구성됩니다. 그러나 헤겔이 사용하는 반성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반성 개념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반성은 보통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다, 과거의 행위를 돌아보다 등의 뜻이 있는 데 어쨌든 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다 자기를 되돌아 보다 등의 뜻이 있고 그런 면에서 복귀와 비슷한 말입니다. 헤겔의 반성 역시 이런 일상적인 의미에서 출발을 합니다.
# 본질과 가상 그리고 반성
반성에 앞서서 본질 즉 essence 라는 개념을 먼저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헤겔의 반성 개념은 본질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반성은 본질의 운동입니다. 즉 무에서 무로의 운동이 반성의 기본적 의미입니다. 여기서 무라는 말은 위에서 말한 물질 혹은 공간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공간적 세계 즉 삼차원적인 세계가 나 없이도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들 중에서 오직 철학만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세계를 믿고 사는 것이 보통의 태도입니다. 이를 흔히 자연적인 태도라고 합니다. 혹은 이를 소박실재론 즉 naive realism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나 관념론 철학들은 이런 소박실재론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식론이 말하는 식의 세계, 관념론이 말하는 이성의 세계 혹은 정신의 세계로의 진입이 일어납니다. 이를 헤겔의 논리학은 객관적 논리와 주관적 논리로 구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객관과 주관 사이에 존재하는 영역이 본질입니다. 따라서 본질 부분은 상당히 특수한 영역입니다. 본질 부분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들은 소위 반성규정 즉 reflective determination 이라고 부르는 동일성, 차이성 그리고 모순 등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질과 반성의 연관성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사실 반성 규정들이 특이한 점은 그들은 물질적, 공간적 세계에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일성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에는 동일성에 해당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가령 A와 B는 같다 라고 할 때 그 같다의 관념은 오직 우리 머리 속에만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어 A와 단어 B에 해당하는 존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같다에 해당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같다는 오직 우리 머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동일성은 파랗다 혹은 무겁다와도 다른 종류의 개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쓰는 언어 속에는 외부 세계와 매치가 안되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단어를 보자면 가령 그리고 즉 and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외부 세계 속에는 어디를 봐도 그리고 and 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크다 작다 와같은 형용사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종류의 단어들은 가령 사과, 독수리와 같은 단어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측면을 보면 외부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 순수한 사유의 조각들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헤겔은 존재의 논리와 본질의 논리를 구별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물리학적, 수학적 세계와 눈에 안 보이는 본질과 반성의 세계는 다른 논리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또 현상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칸트의 철학에서는 현상 즉 phenomena 는 본질 즉 noumena 와 대립됩니다. 칸트는 본질을 또 물자체 즉 독일어로 Ding an sich 라고 합니다. 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본질은 형상 즉 form 이라고 하고 이와 대립되는 것은 개체 혹은 질료 즉 matter입니다. 이런 철학사적인 맥락을 알아야 헤겔이 그의 역작 논리학, 거기서도 본질과 반성을 탐구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 본질은 Wesen으로, 동사 sein, 즉 (존재하다)의 과거 분사 gewesen에서 유래했습니다. 존재하다 즉 sein의 3단변화는 sein, war, gewesen입니다.
그러나 본질과 과거의 연관성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을 정의할 때, 그는 이 단어를 이미 존재했던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합니다. 본질, 즉 그리스어의 '토 티 헨 에이나이, (to ti hen einai)'는 불완전 과거 시제에 해당합니다. 이는 영어의 'what something was'에 해당하는 라틴어 '쿠오드 퀴드 에라트 에세(quod quid erat esse)'와 동등합니다. 불완전 과거 시제는 한때 존재했으나 현재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이나 개별 존재가 현존하지 않더라도 그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이 확립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오동나무가 여기에 없더라도 우리는 그 나무의 본질이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학교나 교과서에서 그림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을 불완전 과거 시제로 규정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물의 본질 추구와 철학의 반성 개념은 맥락이 연결됩니다. 또한 이런 면에서 헤겔은 반성과 본질을 연결시켰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반성은 일단 과거를 돌아본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본질과 반성의 연관은 헤겔적인 사유에서 상당히 타당합니다.
헤겔의 본질 규명은 우선 그의 선구자 피히테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피헤테의 기본 원리가 자아 즉 I 독일어로는 Ich라는 것은 모두 들어 본 적이 있죠? 그의 철학은 자아와 비아 즉 Ich 와 Nicht-Ich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또한 피히테는 그의 저서 “지식학” 즉 (Wissenschaftslehre)』의 실천적 부분에서 순수 활동과 객관적 활동의 상호작용을 탐구합니다. 이는 때로 순수 자아와 대상적 자아로 불리워집니다. 순수 활동은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피히테는 이를 자기 반성 또는 자기 복귀 즉 Reflection-into-itself 라고 부릅니다. 반면 대상과 마주하는 활동은 자아를 제한하면서 대상의 존재를 확립합니다. 이를 객관적 활동 즉 objective activity 라고 합니다. 자기 반성 혹은 내적인 반성 즉 Reflection-into-itself은 무한하고 객관적인 활동은 유한합니다. 피히테의 철학은 자기 속으로의 반성 곧 자기 복귀를 통해서 객관성이 규정됩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의 논리적인 구조를 도출시킵니다.
이러한 선행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헤겔의 본질과 반성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반성은 본질의 활동을 묘사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의 특징은 모든 개념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합니다. 이를 헤겔은 운동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무성 즉 being, nothing & becoming 의 변증법에 있어서 유는 자체 내부의 논리에 따라 무로 이행하고 무는 다시 생성으로 이행합니다. 그리고 본질의 논리는 본질, 가상 그리고 반성 즉 essence, appearance & reflection 으로 이행합니다. 가상 즉 appearance 역시 본질에 포함이 됩니다. 반성의 논리는 가상 논리의 일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가상이란 존재 즉 물질적, 외형적, 공간적 존재들이 그런 영역의 모순 구조에 의해서 본질로 이행할 때 지금까지의 존재 영역을 하나의 가상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가상 혹은 가짜란 진짜의 반대 개념입니다, 철학적으로는 가상은 현상과 연결됩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가상 혹은 현상 즉 phenomenon으로 나타납니다. 칸트의 경우는 이런 경험적인 현상의 밑바닥에는 그 본질로서 물자체가 있다고 합니다. 본질은 noumenon라고 합니다. 존재에서 본질로 이행하는 과정의 단계가 가상이고 가상의 세부적인 모습이 반성입니다.
영어의 반성은 reflection이고 독일어도 Reflexion 인데 영어와 달리 독일어는 반성에 해당하는 동사가 있습니다. 반성하다는 동사는 독일어로 reflektieren 이라고 그 뜻은 반성하다 혹은 돌아가다 혹은 복귀하다 는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반성을 하는 기관은 굳이 말하면 의식과 이성 등입니다. 즉 반성은 주관적인 활동을 의미합니다.
헤겔이 말하는 반성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1. 정립적 반성, 2. 외적 반성 3. 규정적 반성이라는 3가지 종류의 반성이 있습니다.
1. 정립적 반성, 영어로는 positing reflection
정립적 반성은 물질적 현실과 대항하여 내부적인 의식을 내세우는 주관 개념 즉 반성을 최초로 정립하는 반성의 형태입니다. 따라서 이 반성은 물리적 현실 즉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존재에 도취한 의식 달리 말하면 유아독존과 같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헤겔이 피히테의 지식학 즉 Wissenschaftlehre의 원리에서 그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만든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의 제 1원리로서 자아는 근원적으로 단적으로 자신을 존재를 정립한다 라고 합니다. 이를 피히테는 다시 나는 존재한다 즉 Ich bin 혹은 나는 나다 즉 Ich bin ich 라고도 합니다.
이는 또 더 거슬러 올라가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원리로 소급됩니다. 간단히 말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의식입니다. 데카르트의 ego cogito sum을 피히테는 그의 철학의 제 1원리로 만들었고 헤겔은 이를 좀 다른 각도 즉 반성 사건의 기초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즉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에서 피히테 철학의 제 1원리가 나오고 그리고 이를 다시 헤겔은 정립적 반성으로 만든 것입니다.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철학은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즉 헤겔 논리학의 본질 장에 나오는 반성 혹은 정립적 반성 개념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의식이 가장 확실하다는 그런 관점을 정립적 반성이라는 다소 어려운 개념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피히테가 “자기를 스스로 정립하는 자아”라는 개념을 설정한 바가 있습니다.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의 제 1원리로서의 “자기를 스스로 정립하는 자아”는 다시 자기 반성 또는 그 자체로의 반성이라고도 부릅니다.
피히테에게 그 자체로의 반성, 영어로 reflection into itself 은 또한 순수 활동이라 불리며, 이는 무한합니다.
순수 활동의 반대는 객관적 활동으로, 이는 유한합니다. 주체는 무한하고, 대상은 유한합니다. 이게 피히테 철학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입니다.
이런 반성의 자기 활동을 통해서 규정 즉 규칙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반성이고 우선 정립적인 반성입니다.
이런 철학적인 태도를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현실적으로 연약하기는 하지만 인식의 측면에서는 강합니다. 그것은 바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go cogito sum에서 금방 확인이 됩니다. 나의 사고와 생각은 가장 확실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어려운 지식과 상식을 다 안다는 말은 아니고 바깥 세계가 아무리 크고 힘들어도 결국 그것은 나의 대상이고 나는 세상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데카르트로부터 칸트, 피히테 그리고 헤겔에 이르는 관념론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히테의 내적 반성 또는 자기로의 복귀 즉 reflection into itself를 헤겔은 '정립적 반성’ 이라고 합니다. 헤겔의 논리학 본문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결국 본질 속에서 생성되어 간다는 것, 즉 본질의 반성적 운동이란 오직 무에서 무로 가는 운동이며,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에로 복귀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헤겔, 대논리학 (II) 본질론 임석진 번역 32쪽)
무(無)에서 무(無)로의 운동은 완전한 무(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대상의 부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반성이라는 운동입니다. 위의 예문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실은 그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많이 숨기고 있습니다. 즉 동일성, 차이성 그리고 모순 등입니다. 이런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반성의 작용입니다.
거기다가 크다 작다는 형용사들 그리고 각종 접속사들은 거기에 해당하는 실재 reality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에서 무로의 운동은 정신의 작용이고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런 반성의 운동은 또한 자기자신으로 복귀하는 운동입니다.
이런 작용의 산물들이 반성적 규정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유식불교의 지식 사상이나 원효의 일심 사상도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는 이런 일심 즉 한 마음의 작용과 그 행적을 하나 하나 추적합니다. 헤겔의 반성 즉 반성 운동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이란 무와 같습니다.
영어로 색즉시공은 Matter is emptiness 라고 합니다.
공즉시색은 Emptiness is matter 이라고 합니다. 즉 색즉시공의 뜻은 물질은 공허하다 혹은 보이는 것은 공허하다 입니다. 정리하면 색즉시공은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공임을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또 역으로 공은 단순한 공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공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무가 아니라 의식 혹은 마음입니다. 공이란 물질적인 측면 즉 감각적인 측면에서는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숨어있는 정신적 실체들 즉 반성 규정들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규정의 다른 예를 들어 보면 시간과 공간 이라는 개념들입니다. 이런 선천적인 규정들이 사물들을 결합하고 비교하고 또 분리시킵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공즉시색이 되는지는 그 논리적 구조는 밝히지 않습니다. 즉 하나의 마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고집멸도가 생성되는지 하는 논리적인 과정을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전통에 뿌리는 내린 헤겔은 이런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런 과정이 변증법 즉 모순의 통일 논리에 의거합니다. 이 점이 헤겔의 변증법적인 철학의 위대한 점입니다. 즉 무에서 무로의 운동인 반성 개념에서 논리학의 기본 개념들인 동일성, 차이성, 모순 개념이 도출이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근거와 실존성 마지막으로는 주관성, 객관성 그리고 이념으로까지 전진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헤겔의 논리학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우선 반성은 무로부터 출발하여 무를 향하는 운동이므로 오직 이것은 자기자신과 합일되어 있는 부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와의 합일성은 이를테면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 즉 직접성을 뜻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이러한 합일성은 결코 부정이 자기의 외타적 존재로서 본 자기와의 동등성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성이 이행을 지양한다는 뜻에서의 이행일 뿐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이제 부정적인 것과 자기자신과의 직접적인 합치를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헤겔, 대논리학 (II) 본질론 임석진 번역 33쪽)
대단하게 난해한 위의 본문은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즉 우선 무로부터 출발하여 무를 향하는 운동이라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자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자아입니다. 즉 외부 세계의 실재성과 또 문화적인 이론과 심지어는 신학 등도 믿지 못하는 자아의 모습입니다. 오직 생각하는 나만을 참다운 존재로 믿는 주관적인 자아의 모습입니다.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의심, 불신하고 그 대신 생각하는 나만을 믿는 태도가 또한 반성 즉 정립적 반성의 태도입니다. 이를 헤겔은 무에서 출발하여 무로 행하는 운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초지일관 무라는 것입니다. 무 즉 없는 것이란 실재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아니고 외부적으로 즉 나 밖에서 나에게 주어진 존재란 모두 틀린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런 외부적인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반성은 그 나름대로의 본질을 가집니다. 인간 사회에서 비유를 하자면 회의주의적 태도입니다. 혹은 올바른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 등의 부정적인 인생관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기 외에는 모든 것들을 초지일관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가 곧 정립적 반성의 태도입니다. 혹은 다른 경우를 말하자면 어떤 사람 김씨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사랑할 할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하도 입맛이 까다로워 그는 A도 싫다 B도 싫다 C도 싫다 라고 합니다. 그러데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어떤 대안이나 정답도 없이 모든 것을 싫어 하는 사람이 바로 정립적 반성의 인간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능력은 무한하나 긍정하는 일이 없는 그런 정신의 상태가 정립적 반성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신의 능력은 신뢰합니다. 이처럼 타자는 무조건 부정하고 그런 자신의 부정적인 능력을 신뢰하는 하나의 인간형이 정립적인 반성의 본질입니다. 단 여기서 타자란 위에서 언급한 불교의 색즉시공의 정신을 말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 물질적이고 공간적인 이 우주를 하나부터 열까지 부정하는 정신입니다. 다시 이를 부연설명하면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나의 판단은 옳다는 인생관입니다. 위의 번역은 잘못이 좀 있으나 그냥 그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즉 A는 이 여자도 싫다 저 여자도 싫다 라고 하면서도 그 때의 A는 그 자신의 능력과 그 대상인 이 여자, 저 여자와는 다르게 설정합니다. 즉 판단과 판단의 대상을 다른 차원에서 봅니다. 여기서 판단의 대상이 존재의 영역이고 판단하는 능력은 본질의 영역입니다.
이런 부정적 능력의 자기 동일성을 헤겔은 또한 내적인 반성 즉 Reflection in sich라고 합니다. 혹은 이를 자기로의 복귀 즉 독일어로 Rückkehr-in-sich 라고도 합니다. 이런 상태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을 “자기와의 합일”이라고도 합니다.
객관적 현실을 항상 부정하면서도 우리는 반성하고, 회상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반성은 현실의 반대입니다. 따라서 헤겔은 반성을 부정과 연관시킵니다. 즉, 반성은 현실과 대상의 부정입니다.
여기서의 부정은 타자의 지양 즉 (sublation)입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사고처럼 세계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자아의 사고입니다. 세계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자아는 그 부정성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 확증을 얻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했듯, 의심하는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의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자아의 확증이 바로 헤겔이 '무로부터 출발하여 무를 향하는 운동'이라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하나의 문제는 주관과 객관입니다. 흔히 근대철학은 주관과 객관을 분열시켰다 는 등의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소위 실존철학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는 주관과 객관이 분열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은 서로 교류합니다. 주관이 객관이 되고 객관이 다시 주관이 되는 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입니다. 그 예가 위의 인용된 문장에서 나타나 있었습니다. 즉 정립적 반성은 일종의 주관성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관성은 자기 밖의 타자는 완전히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내부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반성은 무에서 무로의 운동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아마 주관성의 최고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유아독존과 완전히 똑같은 의식의 구조입니다. 세계란 없고 오직 나 홀로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정립적 반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세계관을 철학에서는 무 우주론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Non-Cosmism 즉 무우주론(無宇宙論)은 우주 자체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외부 세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의식이나 마음 속에서만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불교 유식학에서는 모든 존재가 마음의 작용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하며, ‘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인식론적 입장을 취합니다. 이는 물질적 세계보다 의식의 근원을 중시하는 철학적 관점입니다.
이와 비슷한 인식의 관점이 또한 정립적 반성의 형태입니다.
우선 반성은 무로부터 출발하여 무를 향하는 운동이므로 오직 이것은 자기자신과 합일되어 있는 부정이다 라고 한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무에서 무로 향하는 운동은 자신과 합일하는 부정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의식이 우주를 부정한다고 해도 나 자신은 부정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은 실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를 헤겔은 무를 통해서 자기자신과 합일된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철학적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가 없고 타자들이 없다고 해도 나는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외부 세계를 부정하고 즉 외부 세계를 환영이라고 부정하면서 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겔 철학의 하나의 특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즉 인간 영혼의 본질은 바로 부정성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Negativity 독일어로 Negativität입니다. 즉 정신의 본질이 부정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또한 변증법의 본질입니다. 즉 존재의 본질이 부정 혹은 부정성이라는 것입니다.
부정성이 자기 자신과 합일되어 있다 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상은 실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부정은 결코 어떤 것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를 논리학에서는 모순률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머리 좋은 애의 부정은 머리가 좋지 않은 애이고 양자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반대의 통일 혹은 역의 합일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런 것을 모순으로 보지않고 오히려 진리로 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어떤 특수한 경우에서만 일어 납니다. 바로 위애서 인용한 자기자신과 합일되어 있는 부정이다 는 문장에서 그런 일이 즉 모순이 일어납니다. 즉 자기 자신과 합일된 부정성에서 모순의 타당성이 선포됩니다. 아까 헤겔이 직접 말한 것처럼 샤프 밑줄쫙 왜냐하면 반성은 이제 부정적인 것과 자기자신과의 직접적인 합치를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는 문장에서 다시 보면 부정과 자기자신의 직접적인 합치가 일어 난다고 합니다. 즉 부정성이 바로 자기자신입니다. 이 말은 물론 현실에서 좋게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부정성, 현실의 나를 부정하는 정신 그것이 바로 나이다 라는 사상은 건전한 태도이며 처세술입니다. 즉 부정을 긍정하는 철학은 발전과 변화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시 철학으로 돌아갑시다. 샤프 철학
보통은 위의 머리 좋은 애의 부정 혹은 반대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사물에 부정이나 반대가 붙으면 그 사물의 반대로 이행합니다.
그러나 가령 정신의 경우에서는 부정이나 반대의 행위가 도리어 정신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줍니다. 즉 정신은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자기자신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획득합니다. 이런 사상이 헤겔이 그 저서 논리학에서 아주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스스로 자기와 관계하는 부정성입니다. 위에서 말한 정신이나 영혼을 제거해 버리고 마치 부정성 자체가 스스로 돌아다니는 듯한 상황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이런 상황이 바로 스스로 자기와 관계하는 부정성입니다. 즉 어떤 것의 부정이 아니라 부정성 그 자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정은 입시부정, 선거부정 혹은 문장 부정 즉 부정문 등의 부정일뿐만 아니라 부정이란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해서 공즉시색입니다. 부정이 곧 긍정입니다.
부정이 그 자체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이를 밝히는 것이 변증법의 논리입니다. 부정은 반대와도 같은 말입니다. 부정이 자기 자신과 합치한다는 것은 반대의 반대은 아닙니다. 즉 너는 바보다에서 너는 바보가 아니다 로 바뀌는 것이 부정의 자기합치는 아닙니다. 헤겔은 사람들이 부정의 자기 동일성 개념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집에 간다의 부정은 집에 가지 않는다 이고 이를 또 부정하면 다시 집에 간다가 나옵니다. 이런 부정의 부정 혹은 반대의 반대가 아니라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를 저 안재오의 표현으로는 부정의 실체화라고 했습니다.
이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는 합니다. 부정이 그 자체로 존립한다는 것, 그런 것이 무엇인지는 상상이 안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 헤겔 철학의 비밀이 놓여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 즉 모순의 통일은 사실 여기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즉 부정성이 실체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헤겔의 세계에서는 비단 정신이나 영혼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핵심이 바로 자기와 관계하는 부정성입니다. 실체로서의 부정입니다.
독일어로는 sich auf sich beziehende Negativiät 입니다. 이것은 또한 위에서 언급한 무에서 무로의 운동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부정의 자기동일성이란 말로도 표현됩니다.
즉 헤겔은 부정을 단순히 물체의 성질이나 판단으로 보지 않고 부정성을 실체화합니다. 샤프 밑줄쫙 부정성이란 어떤 물체가 아니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공이 실체입니다. 무가 실체입니다.
또 공으로서의 실체, 무로서의 실체가 바로 인간의 영혼의 핵심입니다. 원효대사가 말하는 한마음 즉 일심이 공이고 무입니다. 그리고 공은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논리적인 본질은 부정성입니다. 이런 부정성을 가진 마음을 헤겔은 반성이라고 부릅니다. 반성은 마음의 한 형태입니다.
이런 변증법의 핵심을 헤겔은 좀 다른 표현으로 나타냅니다. 위의 인용문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즉 부정의 자기 자신과의 합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동등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지금의 이 합치는, 첫째 자기와의 동등성이거나 혹은 직접성이기는 하지만, 또한 두 번째로 이러한 직접성은 오직 부정적인 것의 자기와의 동등성인 까닭에 모름지기 이것은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동등성인 셈이다. (헤겔, 대논리학 (II) 본질론 임석진 번역 33쪽)
헤겔은 부정성 자체가 자기정체성을 가진다 고 한뒤 다시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동등성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어쨌든 인간의 정신 속에는 부정이 긍정이 되고 긍정이 부정이되는 그런 프로세스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두 가지 반대의 것들이 우리 머리 속에는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맞다와 아니다 혹은 같다와 다르다 라는 두 가지 대립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는 것은 이런 변증법적 구조가 머리 속에 있기 때문이고 이를 철학적으로 밝힌 사람이 헤겔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부연살명하는 것은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직접성 즉 독일어로 Unmittelbarkeit 라는 개념입니다. 보통 우리는 직접과 간접을 개념쌍으로 이해합니다. 직접은 나와 대상의 만남이고 간접은 제 3자의 매개를 통해서 내가 대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그의 저서 논리학에서는 직접성이란 말을 그냥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씁니다. 혹은 규정되어진 것, 한정되어진 것 혹은 객관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어진 것 등의 뜻이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직접성은 자기와의 동등성 즉 정체성 영어로 identity를 의미합니다.
2. 외적 반성, external reflection
외적 반성은 보통은 경험적 인식과 같은 말입니다. 즉 저기 세상도 있고 그것을 인식하는 나도 있다는 자연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상태를 자기의 논리학에서 반성의 자기 운동 이론을 통해서 도출합니다.
위에서 정립적 반성은 부정성을 자기의 본질로 보는 그런 반성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부정성이 스스로 실체화되는 과정을 밟긴 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나는 생각한다'는 진리로 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된 것은 정립적 반성이 스스로를 확신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했습니다. 즉 정립적 반성은 자신을 직접성으로 정립한 다음 이제는 그 직접성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전제 즉 주어진 전제를 자신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대상을 외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이 전제된 존재는 이제 독립된 사물로 선언되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유형의 반성, 즉 외적 반성이 탄생합니다. 보통 우리가 쓰는 반성 개념은 이 외적 반성과 같습니다.
즉 어떤 대상이 이미 있고 우리의 반성은 그 대상의 보편적인 규정성을 찾는 그런 반성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헤겔의 외적 반성은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은 특수가 주어진 상태에서 판단력이 그것에 해당하는 보편을 찾아나서야 하는 경우의 판단력입니다.
외적 반성은 주체와 객체 모두를 긍정하는 반성입니다. 이 점에서 외적 반성은 자신의 타당성을 진리의 절대적 근거로 인정하는 정립적 반성과 다릅니다. 헤겔의 표현대로 외적 반성은 독립된 사물과 분리된 상태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 의식과 세계에 비유됩니다. 외적 반성에 대한 본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나 외적 내지 실재적 반성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지양된 것으로서, 즉 자기의 부정자로서 정립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반성은 이제 이중적인 것이 되는바, 즉 한편으로는 전제된 것으로서의 반성, 혹은 그 자체가 직접적인 것에 버금가는 자체적인 반성이지만, 또한 이것이 두 번째로는 부정적으로 자기와 관계하는 반성인 셈이다. 즉 이것은, 오직 앞에서와 같은 자기의 비존재로서의 자기에게 관계하는 반성이라는 것이다. (헤겔, 대논리학 (II) 본질론 임석진 번역 37쪽)
결국 이 외적인 반성은 직접적인 것과 자체적인 반성이라는 양극이 다 같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추론인 셈이다. (38쪽)
위에서 헤겔은 외적 반성은 다른 말로 실제적 반성이라고 합니다. 즉 반성의 대상이 이성 자신이 아니라 실재하는 사물 즉 의식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칸트의 반성적인 판단력처럼 주어진 작품이나 생물 등을 대할 때 필요한 판단력입니다. 예를 들어서 생물학 시간에 나비 표본을 관찰하다가, 나비 날개의 색깔과 무늬가 나뭇잎이나 나무껍질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나비의 날개 무늬는 포식자로부터 숨기 위한 목적 즉 (보호색) 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과학적 법칙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규준적 원리입니다.
칸트의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은 주어진 보편적 법칙이나 개념을 바탕으로 개별 사례를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즉, 이미 정립된 원리를 적용해 구체적 현상을 판정하는 인식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에서 경험적 현상을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규정적 판단력은 이성의 보편적 원리로부터 출발해 구체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편에서 특수로 향하는 연역적 판단입니다. 이에 반해 반성적 판단력은 개별적 현상에서 보편적 원리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대조됩니다.
이처럼 특수한 개별적인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반성적인 판단력입니다. 이런 목적론적인 원리를 찾는 것이 반성적 판단력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반성의 원리를 반성 개념 자체의 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정립적 반성 즉 부정성의 본질에서 출발한 헤겔은 외적 반성 즉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자기 방식으로 외적 반성이라고 새로운 이름은 붙힌 후에 다시 이를 최초의 반성 즉 정립적 반성에서 논리적으로 연역되어 나옴을 보여줍니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외적 반성은 정립적 반성이 자신 속에 있던 부정의 실체화, 대상화 작용을 잊어버리고 그 실체와 그 대상이 반성 이전에 주어진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타자가 되고 다시 이를 규정하는 반성 즉 자기복귀로 간주합니다. 여기서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 일어 납니다. 이런 상태의 반성이 또한 칸트가 말하는 반성적 판단력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헤겔은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을 더욱 기본적인 뿌리로부터 연역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헤겔의 의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3. 규정적 반성 determining reflection
외적 반성은 타자를 자기 자신의 부정으로 설정합니다. 타자는 반성 외부에 존재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성과 그 대상인 타자를 종합할 수 있습니다. 외재성 또는 초월성은 영혼, 정신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제3의 반성 유형, 즉 규정적 반성이 등장합니다. 이 반성은 타자를 자신의 속성으로 수용합니다. 달리 말해 타자의 내재적 구조가 드러납니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성(reflection)의 규정, (determination)은 그 타자성을 다시 자신 안으로 흡수했다.”라고 합니다.
규정적 반성은 정립적 반성과 외적 반성의 통합입니다. 즉 외적 반성에 의해서 나타난 전제된 직접성을 다시 자기 자신의 산물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규정적 반성은 사물의 객관적 측면을 추출합니다. 그러나 그 객관성, 보편성은 실은 그 자신의 활동입니다. 객관성이란 바로 자기 안으로의 타자를 포섭하는 반성입니다. 의식은 자기 안으로 회귀함으로써 대상의 객관성을 확립하는데, 헤겔은 이를 '규정 즉 determ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규정은 독일어로는 Bestimmung입니다. 규정적 반성이란 즉 determining reflection 이란 이는 대립적 범주들 (예: 양극과 음극, 원인과 결과)이 서로를 통해 자신의 의미와 정체성을 획득하는 변증법적 단계를 가리킵니다.
헤겔의 '규정적 반성'은 대립들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사고의 필수 단계입니다. 규정적 반성은 반성 규정들인 동일성, 차이성 그리고 모순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