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7-1강 테아이테토스 : 경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플라톤의 대화 Theaetetus는 많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론” , 헤라클레이투스의 “만물 유전 이론”(flux theory, panta rhei),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 존재”(immovable being), “새장의 비유”(the allegory of aviary), 다양한 지식의 단계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테아이테토스 대화를 당대의 유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이름하에 경험주의와 상대주의를 반박하고 극복하기 위한 플라톤의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이 책은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비판, 상대주의 비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테아이테토스는 플라톤이 형이상학의 기초로서의 절대적 지식(absolute knowledge)을 준비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 절대 지식이란 그냥 “보편타당한(allgemein gültig)” 지식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 지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수학 혹은 과학적 지식들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하려는 플라톤의 노력은 먼저 인식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시도입니다. 그 질문이란 “도대체 지식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러나 인식론적 노력은 아무 성과도 없습니다. 지식의 본성에 도달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은 논리적 난관 봉착합니다, 이를 흔히 아포리에라고 하지요. Aporie
제 생각에는 “지식이 무엇인지? What is knowledge?”에 대한 해답은 이데아 이론으로서 Republic (국가)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테아이테투스는 “국가”를 위한 준비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말한다면, 인간 인식의 기능을 분석하고 제한하는 칸트의 '순수 이성의 비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는 지식의 단계적인 발전을 논한다. 즉 지각, 의견, 추론을 연속적으로 검토하는 3단계로서 이는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까지 진행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지식의 (잘못된) 개념과 특정한 종류의 지식의 혼란을 제거한다. (벤자민 조웨트) Proceeding from the lower to the higher by three stages, in which perception, opinion, reasoning are successively examined, we first get rid of the confusion of the idea of knowledge and specific kinds of knowledge. (Benjamin Jowett)
그의 견해에서 조웨트는 테아이테토스를 변증법(Dialectic)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대화와 문답 통해서 지식이 점차 발전하는 이야기입니다 : 탐구의 과정에서 낮은 단계의 지식은 폐지되고, 그 대신 높은 단계의 지식이 나타납니다. 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에서와 같이 낮은 단계의 진리는 높은 단계에서 다시 보존됩니다. 즉 낮은 단계의 지식은 일단 부정되지만 높은 단계에서 제한적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테아이테투스”는 원래 수학자입니다. 그는 무리수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코린트 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했으나 전쟁에서 부상당하여 귀국합니다. “테아이테투스”는 그가 죽기 얼마 전 예전 어린 시절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기억하여 이를 서술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투스”의 서사 구조입니다.
Theaetetus에서 지식의 초기 형태는 지각-지식입니다. 눈 앞에 사과가 있다 는 경우입니다. 이는 상식이요 자명한 사실입니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요 동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젊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지식의 본질을 묻습니다. 이에 대해 테아이테토스는 지식은 감각적 지각(sensible perception) 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각-지식은 버클리의 경험주의: 존재는 지각이다. esse est percipi 에세 에스트 페르키피와도 연관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즉시 지식 문제를 프로토고라스의 상대주의와 다음과 같이 결부시킵니다.
"음, 그대는 지식에 관한 아주 중요한 교리를 스스로 말하고 있구나. 그것은 바로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인데 그는 이를 달리 표현하였다. 즉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즉 있는 것은 있는 대로의 또 없는 것은 없는 대로의 척도라고 그는 말한다.
"(151e~152a)
“Well, you have delivered yourself of a very important doctrine about knowledge; it is indeed the opinion of Protagoras, who has another way of expressing it. Man, he says,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of the existence of things that are, and of the non-existence of things that are not”. (151e~152a)
그러므로 프로토고라스의 “인간 척도 명제”(Man-Measure Statement) 는 사물의 존재와 비존재와 관련을 가지게 됩니다: 지각-지식 이론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 명제와 동일하게 선언됩니다.
※ 만물 유전 명제 : 만물은 흐른다 라고 하는 주장. 즉 만물은 강물처럼 끝없이 변하고 따라서 그 인식도 불가능하다 는 뜻이 숨어 있다. 같은 강물이라도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과 다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라고도 합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더욱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와 헤라클리투스의 “만물 유전 이론”(flux theory, panta rhei)과도 관련을 가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상대주의나 주관주의는 다른 철학, 즉 헤라클리투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들과 연결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 즉 테아이테토스에서는 헤라클리투스의 “만물 유전 이론”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 즉 “부동적인 존재”(immovable being), 철학보다 더 비중있게 나타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지각-지식으로서의 상대주의는 헤라클리투스의 “만물유전 명제”의 기초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인 존재”(immovable being)는 “만물유전 명제”에 대립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전의 테아이테토스 논평가들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사상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는 소피스트 이론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플라톤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서 지식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 헤라클리토스 엠페도클레스, 즉 상대주의, 경험주의, “만물유전 명제”의 이야기와 더불어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인 존재”(immovable being)“와 형상(form)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지만 자세히 논하지는 않습니다. 존재(being)와 형상(form)의 연결은 ”국가“ 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프로타고라스: 인간의
만물의 척도이다
헬라클리투스: 모든 것이
흐른다, 정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움직임과 변화 그리고 혼합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모든 사물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생성되고 있다. 생성은 부정확하게도 존재라고 불리어 지는데 실은 생성이다. 어떤 것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생성되고 있다. 모든 철학자들을 불러보아라, 즉 프로타고라스, 헬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나머지 모두 하나씩 차례로 불러 보아라. 오직 파르메니데스만 예외적으로 하자. 그러면 그들은 “모든 것이 생성이다” 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152d)
플라톤의 해석에 따르면 프로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이 손을 잡는다. “만물유전 명제” 의 옹호자로서 그들은 모두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인 존재”(immovable being)에 반대한다. 호머도 flux theory, “만물유전 명제” 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은 지식인의 대다수가 헤라클리투스의 “만물 유전 이론”(flux theory, panta rhei)을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대의 지적, 정신적인 풍조를 반영한 것 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전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파르메니데스만이 그 당시의 모든 통념에 반하여 움직이지 않는 존재를 말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부동적인 존재의 강조는 나중에 국가(Republic)에서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감각적 지각은 내 눈앞에 있는 존재들의 확실성을 보장해 줍니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 것은 나의 지각 판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보통은 있다는 말은 무엇이 눈앞에 있다 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각이 지식이다” 라는 말이 나온 거지요.
그러면 나의 지각은 나에게 진실되고, 나의 존재와 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대로 나는 나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재판관이 된다.
비록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헤라클리티스와 다른 사상가의 만물유전 이론을 불러내지만, 상대주의에 대한 성공적인 반박은 다른 방식으로 일어 납니다: 지식이 누군가의 감각적 지식일 때, 그는 항상 옳습니다. “봤어”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런 지식을 배울 수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감각 지각에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나의) 감각에 대해 나만큼 확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실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즉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사과가 있는 것을 보고 또 “사과가 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점에서는 똑 같습니다.
진리가 단지 감각일 뿐이고, 어떤 사람도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감각을 더 잘 분별할 수 없거나, 자기 의견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우월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몇 번이나 반복했듯이, 각각은 자기 자신의 유일한 재판관이고, 그가 판단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고 옳다면, 왜, 내 친구인 프로타고라스는 이 진리와 가르침의 장소(=나의 감각)보다 더 선호되어야 하는가? 왜 그는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가난한 무식쟁이들은 각각이 자신의 지혜의 척도라고 하면서도 그에게로 가서 배워야 하는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프로토고라스의 약점을 간결하게 말한다: 내 판단이 항상 옳고 나 자신이 지혜와 가르침의 장소라면, 나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혜와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즉 감각적 지각의 단계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대학교수나 차이가 없습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는 아마 교육사업의 광고로서 “모든 사람이 옳다”거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의 "사람"은 소피스트의 상담이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고객이나 손님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 상당한 보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소피스트들은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인간 척도 명제는 그 자체로 볼 때는 모순적입니다.
플라톤의 새장의 비유 : 지식은 마음이라는 새장에서 어떤 새를 잡는 것과 같다.
# 새장의 비유 : 지식은 마음이라는 새장에서 어떤 새를 잡는 것과 같다.
“지식이란 감각적 지각이다” 라는 상대주의적 철학이 실패한 다음에 지식은 판단이다(Knowkedge is judgment) 라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합니다. 판단은 문장과 같은 말입니다. 가령 “A is B” 같은 경우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플라톤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드는데 새장의 비유(the allegory of aviary)만을 다루어 봅니다.
인간의 마음을 새장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지식 혹은 인식은 주인이 새장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새를 잡는 일에 비유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장을 만들고 그 속에 온갖 종류의 새들을 기른다고 가정하자.
어떤 새들은 다른 새들과 어울리지 않고, 어떤 새들은 무리를 이루고, 어떤 새들은 혼자 어디론지 마음대로 날아가기도 한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이 새장은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이 새들은 곧 지식으로 대치하여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지식을 소유하고 그 울타리 속에 넣어두기만 한다면, 그 지식의 대상으로서 이미 있었던 사물을 그는 습득하였거나 혹은 발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아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단으로서의 지식의 관점에 서면 때로 실수나 오류가 발생할 수 있고 또 모르는 것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지식은 이제 학습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은 감각적 지각이다” 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지양(止揚)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또 지각-지식 모델에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지식의 오류 문제도 해소가 됩니다.
감각적 지각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있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봤어” 하면 끝입니다. 더 이상의 증명이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항상 오류나 실수 등이 있습니다.
새장 모델에서는 오류와 학습 등이 다 설명됩니다. 즉 오류란 닭을 잡으려는 사람이 꿩을 잡은 경우입니다. 학습은 위의 인용문이 말하는 것처럼 새를 잡아서 새장에 넣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새장 모델 역시 난관에 봉착합니다. 문제는 새들 중에는 거짓말이나 가짜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에 해당하는 새들이 역시 새장 속에서 날아다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짓과 진리를 구별하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는 엄청난 지식과 방법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아직 절대 지식 즉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이 담보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국가”에서 비로소 일어납니다.
이 글 유튜브 강의 소개
“the voyage of philosophy 철학의 항해“
Lecture 7-1 테아이테토스 : 플라톤의 상대주의 비판
https://youtu.be/wHbD2rIin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