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선통보 [ 朝鮮通寶 ]
15세기 세종 때 조선정부가 만든 동전.
15세기에 들어 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유통경제도 활발해지자, 정부는 지폐인 저화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동전을 만들어 함께 쓰기로 했다. 1423년(세종 5) 당나라의 개원통보 체제를 본떠 조선통보를 만들 것을 결정했으나, 필요한 수량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폐지된 각 절의 유기그릇을 수집하여 서울에 30여 개의 노를 설치하는 한편, 경기의 양평, 경상도의 창원·합포진·울산진과 김해의 사교, 전라도의 내상 등에도 주전소를 설치하여 27년에서야 겨우 동전 40만 냥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동전은 저화의 보조화폐로서 적은 양의 물품매매에만 쓰였다.
2.가승지 [ 假承旨 ]
정의
조선시대 승정원 승지의 대리 임시관직.
내용승지 6인이 모두 해임되거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승정원 업무가 정지되는 경우, 타관서의 관원을 잠시 동안 가승지로 임명하여 겸직시켰다.
1522년(중종 17) 2월에는 6승지가 모두 직위해제되어, 지중추부사 윤은필(尹殷弼)과 장례원판결사 최세절(崔世節)을 가승지로 임명하였고, 며칠 뒤 6승지를 신규임용할 때 그들은 각기 우승지와 우부승지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사소한 일로 승정원이 대간의 탄핵을 받게 되자 6승지가 모두 사직서를 내고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이세정(李世貞) 등이 잠시 가승지에 임명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중종 말기부터는 가승지를 차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3.감합무역[ 勘合貿易 ]
정의
조선시대 일본·여진 등과 행하던 무역의 한 형태.
내용
감합은 사신의 내왕에 사용되던 확인 표찰제도를 의미한다. 사행(使行)의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행을 빙자해 고의적으로 행해지는 무역을 감합무역이라 한다.
이는 14세기 말 이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의 가장 보편적인 공무역의 한 형태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404년부터 150여 년간 지속된 명나라와 일본 막부(幕府) 사이의 감합무역이다.
감합무역의 원리는 전통적인 중화 중심의 관념에 따라 중국의 주변국들이 중국의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역 형태는 외교적 의례와 결합된 것으로 보통 조공무역이라 지칭된다.
4.아동명현록 [ 我東名賢錄 ]
정의
역대 명현들에 대하여 기록한 책.
내용
1책. 필사본. 편자는 미상이고, 편찬연대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말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명현들을 신라ㆍ고려ㆍ조선시대로 나누어 소개한 것으로, 신라시대의 인물로는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 두 사람을 들었고,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안향(安珦)ㆍ이제현(李齊賢)ㆍ이곡(李穀)ㆍ백문보(白文寶)ㆍ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 등 여섯 사람을 들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길재(吉再)ㆍ권근(權近)ㆍ함부림(咸傅霖)ㆍ변계량(卞季良)ㆍ맹사성(孟思誠)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남효온(南孝溫)ㆍ조광조(趙光祖)ㆍ김안국(金安國)ㆍ이언적(李彦迪)ㆍ서경덕(徐敬德)ㆍ유희춘(柳希春)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정철(鄭澈)ㆍ곽재우(郭再祐)ㆍ심의겸(沈議謙)ㆍ김성일(金誠一)ㆍ유성룡(柳成龍)ㆍ이항복(李恒福)ㆍ이수광(李睟光)ㆍ고경명(高敬命)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ㆍ김조순(金祖淳)ㆍ이천보(李天輔) 등 254인을 열거하였다.
인물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였으나, 남효온 등 생육신(生六臣)이 마지막 부분에 다시 정리되어 있다. 인물소개는 먼저 시호 또는 호를, 이어 성명ㆍ자ㆍ본관ㆍ선대계보(先代系譜)ㆍ부(父)ㆍ생년 및 고시관계(考試關係)ㆍ관직명을 기록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인물에 따라서는 호와 성명만을 기록한 것도 있다. 이 책은 역대 명현들에 대한 인명사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5.장금사 [ 掌禁司 ]
정의
조선시대 감옥과 범죄수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형조 소속의 부서.
내용
1405년(태종 5)에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육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관제를 개혁할 때 형조 안에 장금사·장례사(掌隷司)·고율사(考律司)의 3부서를 두었으며, 이를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이 관서는 형조판서 이하 3당상(堂上 : 판서·참판·참의)의 지휘를 받으며 낭청, 즉 정랑(정5품) 1인과 좌랑(정6품) 1인이 그 사무를 관장하였다.
문화원형 으로 찾은것
교환경제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반적 교환수단 내지 일반적 유통수단.
14세기 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단순한 성씨의 교체가 아닌, 고려의 불교를 대신하여 주자학적 유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는 시기로서 사회 제부분에 변동을 가져왔다.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안고 있는 대내적인 모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실천윤리로서 주자가례에 바탕을 둔 유교적 상장의 시행과 가묘설립과 같은 예제의 보급을 통해 국가의식의 변천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서도 상장의례와 제례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시되었던 상장과 제례는 너무나 비생산적으로 세분화되고, 절차 또한 매우 복잡하여 위로는 왕실에서 아래로는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실행하기가 어려워 여러 차례 개정·보완되었고 일상 행동에 많은 제약을 가져왔다.
화폐
우리 나라는 고대 이전에는 주로 물물교환 등의 물품화폐가 교역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삼한시대의 경우 철이 생산되면서 널리 왜인과도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금속을 소재로한 평량화폐 내지 물품화폐가 유통되었으며, 특히 동옥저에서는 금, 은 무문전이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물품화폐가 보편화되었다.
삼국의 경우 교환의 매개물, 즉 물품화폐로서는 쌀 · 포백(布帛) · 철이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연금술을 비롯하여 수공업 기술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신라시대 고분에서 많은 금 세공품이 출토된 사실만 보더라도 금의 유통량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금, 은이 칭량화폐의 기능을 다하였던 것이지만, 그것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보편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는 돈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려시대 주전(鑄錢)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성종(成宗) 15년인 996년에 주철전(鑄鐵錢)과 방원적용(方圓適用)이 있으나 실제 전문(錢文)에 대하여는 알수없다. 1910년 개성부근의 고려고분에서 무문철전(無文鐵錢)과 건원중보(乾元重寶) 철전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무문철전은 방공원형의 형태을 갖추었지만 조잡한 타조전(打造錢)으로 보아 관조전이라 여기기 어렵지만 주조전인 건원중보는(背 '東國'字) 관주전이라 여겨진다.건원중보(乾元重寶)는 중국의 당 숙종 건원 2년(759)부터 주조된 것인데, 이 전문을 모방하니 중국전과 고려전의 구별이 어려운 관계로 뒷면의 '東國'자를 앞면으로 내어 '東國重寶'를 만들었지 않았나 추즉되어진다. 이는 거자(巨字) 동국중보의 서체와 모양이 거의 건원중보 背'東國' 錢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숙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東國通寶), 해동원보(海東元寶),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등 전명(錢名)별로만 8종이 주조되었다.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2727&mode=content&query=%C1%B6%BC%B1%C5%EB%BA%B8&dircode=0
조선시대의 묘제
조선시대의 분묘는 크게 왕릉과 민묘로 구분할 수 있으며, 민묘는 다시 내부구조에 따라 널무덤과 회곽분(灰槨墳)으로 분류된다.
회곽분은 광을 파서 목관을 안치한 다음 석탄과 황토, 가는 모래를 3:1:1의 비율로 느릅나무 껍질[유피(楡皮)]을 달인 물에 섞어서 광과 광 사이를 메우고 다져 만든 후 봉토를 한 무덤을 말한다. 광 사이를 회격으로 다져 만든다 하여 회격묘(灰隔墓)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묘제에 있어 또 하나의 특징은 고려시대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명기(明器)와 묘지석(墓誌石)을 부장하는 것이다. 명기란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는 식기, 악기, 집기, 무기 등의 기물을 말하는데 신명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묘지석은 죽은 사람의 성명, 신분, 행적 등의 기록을 돌이나 사기, 흙 등을 다져 새기거나 써서 무덤 앞이나 관 위에 묻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행해졌던 묘제로는 회곽분, 널무덤 이외에도 초분(草墳)으로 해두었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 육탈되면 유골을 수습하여 장사지내는 이중장도 행해졌다. 한편 불교에 종사한 스님 같은 경우에는 화장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상례문화
특히 상제례는 사회질서의 유지 명분과 교화의 수단으로 작용하여 조선초의 예제 운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소위 무불식 상장과 같은 전래의 전통적 상장과 외래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유교식 상장이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조선시대의 상장의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다 보니 왕실과 사대부는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한 유교식 상장을, 일반 백성들은 고려조의 무불이 습합된 무불식 상장을 고수하여 이원화된 상장제가 혼재되어 시행되었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왕실에서 행하면 자연적으로 일반 백성들이 따르고 외방도 자연히 행할 것이라 하여 그 시행도 서인보다는 사대부가, 외방보다는 경중이 더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국가차원의 강력한 제재와 사대부 중심의 가례 시행과는 달리 일반 서인들은 상장에 향도(香徒)를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가무 등과 같은 고려시대의 불교와 민간신앙적 요소가 습합된 무불식 상장의 유풍을 행하였다.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1333&mode=title&query=%C1%B6%BC%B1&dircode=100000000004
조선왕조실록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이다. 전체 1,893권 888책으로 필사본이다. 『고종실록』과 『순조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강제로 편찬되어 왜곡이 많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정족산본(鼎足山本)과 태백산본(太白山本) 등은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이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왕 재위시의 사관(史官)들이 각각 써 놓았던 사초(史草)와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한 문서를 연월일 순으로 정리해 작성한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 『승정원일기』·『의정부등록』 등 정부 주요 기관의 기록, 개인 문집 등의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관의 사초인데, 예문관의 봉교(奉敎, 정7품) 2인, 대교(待敎, 정8품) 2인, 검열(檢閱, 정9품) 4인이 이를 작성하였다. 이 사관은 청요직(淸要職)으로 그 선발에 신중을 기하였고, 사관들은 매일의 사건을 직필주의(直筆主義)에 입각하여 작성하였는데, 만약에 사초의 개서(改書), 삭제 등을 행하였을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실록은 원래 1왕이 1실록으로 편찬되어야 했으나. 조선후기 당쟁이 심화되면서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다시 편찬하였으니, 『선조수정실록』·『현종개수실록』·『경종개수실록』이 바로 그 예이다.
실록이 완성되면 완성본인 정초(正草)를 제외하고 비밀 유지 및 종이 재생을 위해 초초(初草)와 중초(中草)는 물로 씻어내는 세초(洗草)를 시행한다. 정초본은 춘추관·충주·전주·성주 등의 사고(史庫)에 각기 1부씩 봉안하여 보관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만이 병화(兵火)를 벗어나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이 실록은 1950년대 중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48책으로 축소 영인해 전문가들이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68년 이후 국역을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95년에 서울시스템에서 CD-ROM으로 만들어 대중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비록 지배층 위주의 관찬(官撰) 기록이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조선시대의 불교[朝鮮時代]
고려말엽에 일기 시작한 유학자들의 배불운동은 드디어 왕조가 바뀌자 정치적 지배법칙과 그 역학적인과(力學的因果)에 따라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의 등극이 비록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시긴 하였어도 그 정치적 권력의 배경은 고려왕실과 구귀족의 몰락을 위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이다.
인도스님 지공(指空), 태고보우(太古普愚), 혜근나옹(慧勤懶翁)등의 명승이 나타났으나 정도전, 조준 등의 정치적 공세로 인하여 태종, 예종(1469년), 성종(1470-1494), 연산군(1495-1506), 중종(1507-1544), 인종(1545)대에 이르기까지 암흑기였다. 함허득통(1368∼1433)의 불교 · 유교의 인의예지와 불교의 인간완성이 같다는 계몽도 있었고, 세조때는 일시적으로의 비호시책이 있었으나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수난의 불교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5백년의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찬란한 신라와 고려의 불교전통을 오늘날까지 계승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명종대의 섭정 문정왕후에 의해서였다.
1546년 왕후는 섭정이 되자 설악산의 백담사(百潭寺)의 승 보우(普雨)를 중용, 그의 의견을 들어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근거로 삼고 보우와 수진(守眞)을 각각 양사의 주지로 삼았다.
이것이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불교재건이다.
보우는 선사(禪師)로 간주되었지만, 특히 화엄의 도리에 밝고, 그 원칙아래 다양한 불교의 흐름을 일관적으로 이해하는 탁월한 사상가이자 행정가였으나 유생의 미움을 받아 비명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느낀점: 숙제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냥 아 귀찮다 만 생각을 했는데 숙제를 하다보니 느끼는점이 많았다
먼저 가장크게 느낀점은 사전을 찾다보니 아는단어가 1개있으면 모르는 단어는 20개씩정도는 기본으로
있었다.. 물론 몰라도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알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숙제도 나쁘지 않게 생각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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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영심 작성시간 12.12.15 해인군, 소감 아래 네이버 지식백과 배너는 무엇을 의마하나요? 혹시 소감을 거기서 가져 온 것은 아니겠지요?
시간을 쪼개 숙제를 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본문이라는 것 까지 가져와서 복사한 형태 그대로 올린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래 여러 학생들 같이 읽기 좋은 형태로 편집하면 좋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20223임해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12.16 지식 백과 배너는 그저 처음에한 숙제가 아쉬워서 유지 시키고 숙제를 다시 한것인데 처음에한 숙제의 저작권 문제 때문에 출처를 계시해놓은 것입니다. 수정은 진행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