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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감춘 보석 3

일본대중문화리포트 - 우 키 요 에의 발자취

작성자김동석|작성시간05.05.01|조회수33 목록 댓글 1
우 키 요 에의 발자취


제출자 : 김동석

1. 서 론
일본을 여행하고 기념품을 사오게 되면, 그 기념품에 화려하고 약간은 외설적이기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작은 술잔, 부채, 달력, 액자 등등에서 일본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나 남녀의 은밀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그림 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전통 음식점을 가거나, 일본어를 배우는 학원 같은 곳에서 걸려있는 일본인을 그린 그림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는 일본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것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그 그림은 일본 전통의 그림이라고만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이 그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초기 발생 배경이 되는 에도시대와 우키요에의 정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서 대표적 우키요에시의 표현 양식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또 한 우키요에시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당 시대 인물들의 실생활, 에도(도쿄)를 중심으로 도시 풍경, 토속적 특징 즉 우키요에가 서민들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자포니즘을 중심으로 서양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2. 본 론

1. 우키요에란 무엇인가
(1)우키요에가 나타나게 된 배경
초창기의 우키요에는 에도에(江戸絵)라고 불리었다. 각 지방에서 에도에 온 사람들은 기념품으로 우키요에를 사가면서, 곧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키요에는 에도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에도’ 하면 우키요에를 선뜻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에도는 오사카와 교토와 함께 일본의 3대 도시였고 에도는 특히 이 둘과는 달리 짧은 역사를 가진 도시이어서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로운 미술 장르인 우키요에가 발전을 할 수 있었을 듯하다. 또한 다색으로 찍어내는 판화 기술의 발달로 강렬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주는 우키요에의 인기가 더욱 드높아 질 수 있었다.
에도 시대는 ‘사공농상’ 의 엄한 신분 제도가 있었고 상업이 번창하여 유통 경제가 발달하였는데, 상공인 들이 힘을 갖게 되고 그 들은 三都나 城下町에 모여 살았다. 이 때의 지배 계급인 무사의 문화와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닌 도시 상공인 들을 쵸닌(町人)이라 하는데, 그들만의 문화인 쵸닌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쵸닌 들은 이 세상이 ‘덧 없는 곳’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쵸닌 문화에는 소설, 하이카이, 가부키, 우키요에 등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표현하는 것이 생겨났다. 특히 우키요에시, 즉 우키요에를 그린 화가 들은 주로 민간의 화가 들이었으며, 당시의 첨단을 걷는 풍속이나 화재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있었다. 새롭고 신선하며 기발한 표현 방법을 연구하고 전개했다. 에도 시대에는 기녀 들이 모여 있는 곳과 가부키 극장이 밀집된 지역인 ‘악소(惡所)’ 라는 거리가 있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높고 낮은 신분관계에 상관하지않고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미의식을 추구하고 행동 할 수 있었다.

(2) 우키요에 용어에 대한 설명
17세기 후반, 에도 시대에 ‘이하라 사이카쿠’라는 작가가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 ‘우키요조시(浮世草子)’ 를 발표해 큰 인기를 누렸다. 우키요에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유행을 하였다. ‘우키요’ 라는 말은 근세 이전에는 ‘憂世’라 표시하였다. 그 시절의 염세주의 적인 불교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이 세상은 근심 걱정이 가득 차 있는 허무한 세상이다’ 는 뜻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자 보통 사람 들은 ‘성불하기도 어렵고 어차피 세상은 뜬 세상이니까 짧은 인생을 들뜬 기분(浮き)으로 신명 나게 세상(世)을 즐기며 살아가자’ 라는 밝은 느낌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의 풍속이나 사고 방식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당시의 시대적 기운에 편승하여, 우키요란 당대의 좋은 것, 앞서가는 생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 되었다.

(3)우키요에의 용도와 주제
다색으로 찍어내는 판화 기술의 발달로 강렬하고 화려한 우키요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게 유곽의 기녀 들과 가부키 배우들, 스모 선수들, 미인과 미남의 초상, 그 밖의 인물들이다. 또한 인물 말고도 풍경, 새 , 풍속을 담은 우키요에도 있다. 배우들과 기녀들, 특히 미인화에는 주로 기녀 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또, 가부키 배우 그림은 야쿠샤에라 하였다. 가부키 배우 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거나, 제일 감동적인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시간이 지나 에도 시대의 중기에는 인물 이외에도 유곽의 풍속이나, 초닌과 무사의 일상의 풍속화 등등이 늘어난다. 또한 남녀의 뜨거운 사랑 장면 (일본의 기념품 중 그릇이나 컵 등에 많이 그려지는 그림 들), 춘화, 특정한 장소, 명소, 역의 풍경, 산의 풍경 등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우키요에가 단순히 회화를 감상하는 기쁨 뿐만이 아니라 시사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도 하였다. 특히 사진이나 비디오 등의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에, 명소의 특색과 현실을 잘 반영하여 제작한 우키요에는 그 지방 특색을 잘 알려주는 뉴스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또 한 유명인이 죽은 직후 초상을 그려 , 생전의 업적이나 임종 때 지어서 남긴 와카나 하이쿠를 기재하여 추도의 뜻을 표현하는 우키요에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적 영웅을 소재로 하는 우키요에도 제작되었다.

(4)우키요에의 제작 과정
에도는 18세기 중엽 천연색 목판화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하여 괄목할 만한 문화의 자율성을 갖추게 된다. 판화가 에도에서 생산되던 유일한 미술 형태는 아니었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이 판화였다. 우키요에는 판화 형식으로 제작되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대량생산 과정을 거친다. 우키요에는 우스개 이야기 집인 게사쿠 (에作)나 그림 책인 에혼(絵本) 등의 오락 서적으로 출판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물로 기획되므로 총 기획을 담당하는 발행인과 판화를 제작하는 에시(絵師), 호리시(彫し), 스리시(摺師) 등이 참여한다. 에시는 화가로서 판화의 그림을 담당하고, 호리시는 그림을 목판에 붙이고 칼로 목판을 파는 일을 담당하고, 스리시는 목판에 먹과 물감을 칠하여 종이를 덮어 그림을 찍어내는 일을 담당한다. 판화의 작업 중에 에시는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끝나고 그 이상은 간섭하지 않는다. 우키요에 판화 작품에 발행인과 에시의 이름은 명기되어 있지만 호리시나 스리시의 이름은 거의 명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판화를 완성하는 데 분담하는 역할에는 큰 차이가 없이 모두가 중요한 것이다.
(일본 전통 문화론-박전열, 이영 p 233~234)
(일본 전통 문화론-박전열, 이영 p 225, 230~232)
(에도 시대의 일본 미술 – 크리스틴 구스 p 124~125)
(일본의 문화와 예술- p 198 구정호)
(일본 전통 문화론-박전열, 이영 p 224)
(알기 쉬운 일본사-경성 대학교 출판부 p 69, 72, 76~77)

2. 우키요에의 유명한 화가들

(1) 가쓰시카 호쿠사이
에도 시대 중기부터 후기 사이에 활약한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는 미국의 시사 월간지 <라이프> 에서 지난 천 년간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로도 뽑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1804년 경부터 여러 해에 걸쳐 일정한 테마에 의한 시리즈 작품을 발표하면서 요미혼 삽화를 그리는 대신 일종의 그림 교습서인 에테혼의 간행에 관심을 갖는다. 에테혼의 대표적 예로는 전체 3000여 장의 그림이 실려 있는<호쿠사이 만가>를 들 수 있다. 호쿠사이 만가는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화해내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 동식물이나 인간의 표정과 동세를 주로 다룬 작품이다. 그 안에 있는 자유로운 몸짓의 인물들은 만화의 한 컷을 잘라 놓은 듯 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는 도카이도의 풍경을 판화 시리즈로 만들었는데 그 중 걸작으로 후지산을 소재로 한 <후가쿠 36경>을 들 수 있다. 이 판화집 중에서 <붉은 후지산>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 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판화이며 작품에 쓰인 색이 청색과 적색, 녹색과 약간의 황색 등 단순한 색조가 적당히 어울려져 그 묘미가 남 다르다.

(2) 도슈사이 샤라쿠
그는 1794년 어느 날 다음해에 공연 될 가부키에 등장한 배우들과 당시의 스모 선수들의 모습을 제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던 우키요에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누구에게 그림을배웠는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등 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일본에서도 샤라쿠의 정체에 대해서 수년 간 연구가 계속 되고 있지만 아직도이런 저런 설이 분분하다. 최근에는 이영희 (한일 비교문화 연구소장)에 의해 샤라쿠는 조선의 풍속 화가 김홍도가 잠시 일본에 가서 활동했다는 등의 설이 관심을 끌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확연한 증거를 찾지 못한 상태이다. 샤라쿠는 18세기말 에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부키 주연 배우들의 초상화, 그리고 그들의 브로마이드로 여겨지는 야쿠샤에 제작에 힘썼다. 특히 < 3대 얏코에도베 역을 맡은 오타니 오노지노>는 샤라쿠의 대표작으로 , 상대역의 돈을 빼앗으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벌겋게 달 아 오른 눈에 치켜든 눈을 한 인물의 표정은 상황의 긴박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해학적 미를 엿 볼수 있다. 이처럼 샤라쿠의 그림에 나타나는 얼굴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인물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엿보게 해준다. 그의 작품은 예리한 시선으로 그 속내를 포착한 리얼리즘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얼굴 모양을 대담하게 재구성하여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3) 우타카와 히로시게
안도 히로시게로도 불리우는 우타카와 히로시게(1797~1858) 는 에도에서 세습적인 직업이었던 일종의 소방수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하급무사 계급의 가문 출신으로서 가노파 그림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 양식에도 정통했다. 그의 작품은 마루야마-시조파, 문인화파 그리고 서양의 회화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히로시게의 작품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는 <명소에도 백경>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1856~1859년 까지 연작으로 제작되었으며 유명한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맥락으로 표현한 메이쇼에의 전통을 활용하여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 한 특이한 원근법과 계절에 대한 암시 그리고 다양한 색채를 이용하여 에도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하는 지형적 성격이 짙은 판화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풍부하게 변화하는 상황 설정으로 개성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었으며, 판화 뿐만 아니라 육필화와 다이묘의 의뢰를 받아 호화로운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4) 히시카와 모노로부
히시카와 모노로부는 에도 시대 초창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히시카와파의 시조이다.
그는 자신의 가문 직업을 떠나 에도의 가노파와 도사파에서 그림 훈련을 받았으며 또 한 도사파 계통을 기초로 중국의 판화도 흡수하여 히기카와요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동적이고 생기 있으면서도 우아함과 세련된 선 묘사하며, 적절한 구도를 지닌 풍속적 특징을 지닌다.
<모기장의 여인>이라는 작품에서는 고전문학에 대한 감정적 ,계절적 연상을 배경으로 성행위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히시카와 모노로부의 대표적 작품 <뒤돌아 보는 미인도>는 여인이 길을 가다가 살짝 고개를 젖힌 듯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그녀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까 하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별히 아름다움이 있는 얼굴을 표현하기 보다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 잡는 매혹적인 자태에서 그 내부에서 잠재해 있는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3.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우키요에

(1) 서양의 우키요에의 등장
로코코 시대는 루이 15세가 통치한 1723년에서 1774년 동안으로 파리에서 로코코라는 미술 사조가 성행했던 시기였다. 로코코 시대의 귀족의 부인들이 베르사유의 궁정 예절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중국의 문화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그 들은 단번에 중국 문화에 도취되었고 유럽피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중국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귀족 들이 중국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공예품 등에 관심을 가졌지만 19세기 중엽에 중국풍을 잠 재운 것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일본 문화이다. 한 편 18세기 후반까지 황금기를 누린 ‘우키요에’ 는 일본에서는 점점 공급이 많아지게 되면서 식상해져 갔으며, 서구의 미술이 도입 됨으로써 퇴색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67년에 파리에서 만국박람회에서 는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 들이 그들의 특산물이나 공산품을 전시하였다. 일본이 많은 칠기와 도자기 등의 공예품을 파리로 들여올 때 포장을 했던 포장지가 바로 우키요에 였다. 그 시절 우키요에는 공급이 많아 일본에서는 흔해빠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은 지금의 신문지처럼, 우키요에로 포장해가지고 들여온 것이다. 하지만 박람회 덕에 우키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신비스러운 동양의 우키요에에 열광하는 프랑스 인들은 우키요에를 수집하는 등의 열정을 보이게 되었다.


(2)자 포 니 즘
자포니즘’ 이라는 용어는 “Japonism” , 프랑스어로 ‘일본 주의’ 라는 뜻이다. 영어로 하면 japanism이 되는 격이다. 자포니즘은 그 동안 보수적이었던 미술계에 강한 반감을 갖은 인상파 화가 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인상주의자 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 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 된 인물, 명암 대조 법등을 거부해왔다. 그 들의 주요 관심은 ‘인상’, 즉 짧은 순간에 화가가 시각적으로 처음 지각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인상 파 화가 들인 드가, 마네, 캐사트, 휘슬러, 고갱 같은 화가 들이 일본 판화 기법에 영향을 받았는데 우키요에가 비서구권 미술로서 유럽 미술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최초의 예이다. 그들은 평면적이고 밝은 채색 법, 윤곽이 뚜렷한 형체, 표현 적이고 때때로 대조적인 선적 문양 등을 모방하였다. 인상 주의자 들은 또한 판화에 나타난 경치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듯한 특이한 시점과 소실점을 중심으로 하는 원근법이 결여된 점, 중앙을 벗어난 구도 등을 본 받았다. 이러한 새로운 제작 태도는 르네상스와 고전 주의 적 회화 전통의 퇴조와 인상주의의 중흥기를 가져다주었다.

3. 결 론
기나긴 귀족 정치 시대와 무사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 와서 문화의 향유 계급이 지배 계급에서 서민 계급으로 바뀌었다. 특히 우키요에는 역사 적 가치로 볼 때는 에도 시대의 서민 들의 풍속과 에도 라는 도시의 당시 상황을 간접 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예술적 가치로 볼 때는 그 전까지의 귀족들 만이 향유하던 문화 예술을 서민 들도 즐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시절의 뛰어난 화가 들은 수 백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들이 그 당시에 보여주었던 미술은 매체가 발달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는 지금에 보아도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작품이 많다. 또한 그 들이 서양에 끼쳤던 영향이 참으로 크다 할수 있다.

우키요에를 살펴 보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화가들에 의해 남겨진 풍속화, 유명한 민화들도 우키요에처럼 서양에 전달되어 참된 한국 미를 뽐낼 수 있었을 텐데 외국에 잘 알려지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그 시절 우리의 예술 작품 들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지금은 외국에 한류 열풍이 분다고 하지만 서도 아직은 우리나라에 대해 모르는 나라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우키요에를 조사하며 흥미를 갖듯이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고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으면 하
는 소망이 생긴다.

(클릭, 서양 미술사-캐롤 스트릭랜드 p 190, 204~206)
(내가 만난 일본 미술 이야기-안혜경 p18~19 )
(학술 논문 2004 / 강미경 /경남 대학교 -프랑스 나비파(Nabis)와 자포니즘(Japonisme)의 상관관계(相關關係)
(학술 논문 2003 / 김혜정 /한국 복식 학회 - 19세기 인상주의 회화 작품 속에 표현된 쟈포니즘으로서의 일본 복식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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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동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9.15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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