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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사회에서 지상의 가치로 여겨졌던 효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지 오래다. 젊은 세대에게 효란 듣기 싫은 도덕 훈화의 진부한 레퍼토리 이상이 못 된다. 더 넓게는 생물학적인 나이 자체에 대한 공경의 풍토도 없어져버렸다. 효의 위기는 그것을 둘러싼 많은 가치관과 사회현실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자진해서 주고받는 정의로서의 효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노령사회로 급속히 진입중인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고민해봄직한 문제다. |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孝)를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이 좀 당돌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시효가 소멸된 관념 같은가 하면, 결코 실효(失效)해서는 안 될 관념 같기도 하다. 그만큼 착잡하다.
우리 시대의 한국문화는 돌연변이를 하고 있다. ‘종(種)의 진화’가 아닌, ‘종의 비약’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아’, ‘자기’, 그리고 ‘자아증명’ 같은 관념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의식’은 치열해도 ‘존재론’은 희박한 듯 보인다. 농촌의 향리가 퇴락하고 있다. 사당, 재실(齋室)이 폐허가 되다시피 하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선영의 벌초를 노임을 주고 남들에게 맡기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선영의 벌초를 노임을 주고 남들에게 맡기고 있는 집안도 더러는 있는 모양이다. 명절이면 봉제사(奉祭祀)를 관광지 호텔 방에서 올리는 광경이 보도되고 있다. 집에서 올린다 해도 ‘맞춤 제수(祭需)’를 사다가 제상 차림을 하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이것들은 효를 지탱하여 온 기반이 무너지고 있음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지만, 이 무너짐을 핵가족화와 그에 따른 자식과 부모의 별거가 더한층 부추기고 있다. 그 결과 고의적인 부모의 유기(遺棄)는 이젠 드물지 않게 되고 있다. 심지어 시부(弑父), 시모도 간혹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다. 부분적이긴 해도 터전이 무너지고 실행이 실종되고 있다. 효가 국지적으로나마 실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스레 효를 되새겨도 괜찮을 것인가? 의심을 품지 말자하면서도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날 효(孝) 말하기의 어려움
한데도 이에서 묘한 현상이 착안하게 된다. 그것은 정당, 기업, 공공단체 등에서 카리스마는 더한층 득세하고 실권을 누리고 있는 딱한 몰골이다. 이들에서 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람의 카리스마가 지난날 가부장제 아래서 부권(父權)이 누리던 바로 그 카리스마의 대통(大統)을 이어서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큰 잘못 같지는 않다. 이것은 효의 적통(嫡通)이 아닌 ‘서통(庶統)’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기에 오늘날 효를 말한ㄴ 것은 더욱더 착종(錯綜)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집안의 부상(父像)’은 기울고 ‘사회의 부상’은 상승일로를 겪고 있는 이 현상은 이중의 ‘시대착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기업이나 관공서나 정치가 아닌, 거리의 사회에서는 ‘어른’이 거의 실종되고 있다. 심지어 각급학교의 교실에서조차 ‘어른의 노쇠(老衰)’는 더욱 현저하다. 그러니까 단체나 체제 안의 어른과 거리의 어른은 전혀 다른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렇듯 효의 전통적인 터전, 효의 전형적인 배경은 기울고 있고 덩달아서 효도 시대적인 실효를 거듭하고 있다. 잇따라서 상품이 득실대는 거리, 소비와 쾌락이 술렁대고 있는 거리에서 ‘어른’은 어림도 없는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50대만 되면 물러나야 하는 직장에서도 어른은 고아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 기업 등 제도며 단체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카리스마가 어제의 어른 부러울 게 없는 특전을 누리고 있다. 뒤죽박죽이다.
효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
효의 기틀과 둥지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효의 이웃들도 수난을 겪고 있다. 충(忠)과 제(悌), 그리고 순(順)과 신(信)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너무나 짙고 어둡다. 애국심이 보편화되고 신봉되어 있다고 쳐도 그것은 충과는 다를 것이다. 가구당 자식의 수가 1.5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독자(獨子)’만이 자라는 집안에 제(悌)는 발붙일 데가 없다. 친형제가 없으니 종형제는 아예 그 개념자체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 기약하기 어렵다. 순(順)은 ‘민주’를 위한 악덕으로 치부되고 신(信)은 신용금고에 답보로 잡혀 있다.
효의 터전 붕괴와 때를 같이해서 그것과 상조 상보(相補)할 이웃들이 없어지고 있다. 효의 퇴조에 겹친 그 기이한 착종, 즉 ‘서통’이라고 명명된 그 기이한 카리스마의 횡행은 차라리 역사적 필연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이 기이한 혼돈과 모순 속에서 오늘 우리는 예전처럼 효를 말할 수는 없다. 크게는 동아시아적인 가치관, 윤리관이 뿌리째 흔들리는 한편, 서구적인 윤리관, 그나마 시민사회, 그리고 대중사회를 위해서 유효할 저들의 윤리관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있다. 승리의 방편만이 설쳐대고 상거래가 인간거래의 네트워크로 대체되는 게 오늘의 인간관계다. ‘우리와 남’, ‘나와 남’의 극단적인 이분론(二分論)적 대립이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속에 오늘날 우리의 인간관계가 있다.
이런 모든 조건이 오늘날 효를 말하기를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다. 이 점을 별달리 강조해두고 싶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꼭 덧붙여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누구도 효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아무도 효를 싫어한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이 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효를 마음만큼 실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파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특히 최근에 어느 일간신문에서 “소양댐이 지난여름 홍수피해를 막아주는 ‘효자호수’ 노릇을 했다.”고 보도한 것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자동차가 수출부진을 타개하는 ‘효자상품’이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신문에서 보게 된다. 상품과 호수에 효자가 있는 것만큼 인간 효자가 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다. 이같이 효를 당당하게 머뭇댐이 없이 말할 처지가 아닌 것이 자못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이 글에서는 효를 말하되 과거지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만 글을 이끌고 나가기는 바라지 않는다.
소아(小我)와 대아(大我)의 효
신선이 그 무엇이라 못내 부러워하던고.
무군(無君)에 불충(不忠)이요 무부(無父)에 불효(不孝)로다.
어즈버 진한(秦漢)의 방사(方士)를 허망하다 하노라.
신선(神仙), 방사(方士), 그리고 선경(仙境)은 신라의 최치원 이후 조선조를 지나기까지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았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은 못내 삶의 지상이념이기도 했다. 한데도 이 무명작가의 시는 그걸 허망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충도 없고 효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조는 충과 더불어서 효를 인간의 지상가치로 모셔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다운 삶의 보람으로 받들고 있다. 효는 의무, 의리만은 아니다. 도리만도 아니다. 우리는 효가 무엇보다 생의 보람이라는 것을 이 시조에서 배워야 한다.
효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경전인 《효경(孝經)》에서는 효를 ‘예지시야(禮之始也)’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다해서 마땅한 의례, 예의범절의 으뜸이 곧 효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기(禮記)》라는 중국고전에서는 효는 ‘문지본(文之本)’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 경우 문은 학문만이 아니고 법도며 예악의 질서이고 선(善)이자 미(美)이기도 할진대, 효는 그 모든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문의 근본이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논어(論語)》에서는 효를 ‘인지본(仁之本)’이라 하되, 그 앞에서도 도(道)와 그 바탕인 본(本,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공자는 인(仁)만이 아니고 도와 본의 근본으로서도 효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처럼 효는 온갖 인간미덕과 문물의 질서와 의례의 시작이고 근원이라고 믿어져 왔다. 근본의 본이고 예(禮)의 예(禮)이고 인(仁)의 인(仁)인 것이 다름 아닌 효라고 생각된 것이다. 요즘 식으로 고쳐 말하자면 인문(人文)과 교양이며 인품이며 사랑과 에티겟의 근원이 곧 효였던 셈이다.
효는 인성이나 윤리면으로, 또 문화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어 온 몇 가지 미덕과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미 지적한 예, 인, 문 외에도 도(道)며 의(義)와도 역시 상호 보완관계를 지속해 왔다. 가령 충효라고 나란히 짝지어서 일컬어지기는 했지만, 충과는 달리 효는 도를 더불어서 ‘효도(孝道)’라고 따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충도(忠道)’란 말은 쓰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효가 가정이나 혈통 안에서만이 아니라 널리 인간관계며 사회적인 윤리도덕의 규범 안에서도 논란되어 왔음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여러 인간미덕을 말하는 관념들과 단순히 수평적인 보완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수직적인 상하관계 또는 뿌리와 가지의 관계를 지속하였으되, 효가 최상층에 또는 가장 깊은 근저(根底)에 자라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논어》가 ‘들어서는 효(孝), 나가서는 제(悌)’라고 말할 때, 혹은 ‘불효(不孝) 불제(不第)’란 말이 관용적으로 사용될 경우, 이웃이며 남에 대한 친절 또는 공경은 효의 연장이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남들과의 관계를 최선으로 유지하는 근본으로, 사회적인 윤리가 지탱될 근원으로서 효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오늘날 효를 말하는 사람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점을 현대사회를 위한 ‘효론(孝論)’의 대전제로 삼고자 한다. 이처럼 효는 자식과 부모사이의 개인적인 관계 또는 가정 내의 일로 끝나지 않으며, 또 다른 큰 사회성이 있다. 이것은 사뭇 거시적인 효관념이다.
효는 우선 집안에서 몇 가지의 봉친(奉親)을 해야 한다. 봉양(奉養), 곧 섬기는 것, 그리고 친친(親親), 곧 친부모를 친애하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더 나아가서 공경과 순종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와는 차원이 다른 좀더 큰 규모의 효가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즉, ‘양명(揚名) 현친(顯親)’을 다름 아닌 ‘지효(至孝)’라고 한 그 차원의 효를 말하여야 한다. 양명은 자식이 이름을 세상에 떨치는 일이다. 현친이란 부친의 이름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양명 현친’은 자식이 먼저 사회적으로 큰 공헌을 함으로써 명예를 얻게 되고, 그 결과 부친의 성함이 빛나고 가문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일이다.
사회적인 봉사와 사회를 위한 헌신에 따르는 자식의 자기성취가 부모에게 바치는 지효 곧 으뜸가는 효라는 것을 ‘양명 현친’은 일러주고 있다. 자식이 부모 슬하를 떠나 세상에 나아가서 자식 스스로 간직한,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봉사적인 큰 뜻을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고향에 계신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때 자식은 부모만을 위한 알뜰한 ‘개인적인 자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자식’으로 승화한 것이다. 한데도 우리는 그 동안 줄곧 효를 가정 안에 국한시키고 부모 자식 사이의 개인적인 일로 국한하여 왔다. 언제나 어느 경우에나 다 그러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효를 말하고 실천하는 대세가 그런 식으로 내적이고 미시적인 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아(小我)의 효’는 물론 ‘대아(大我)의 효’라는 관점으로 효를 되짚어보고 싶다. 자신을 살리는 길,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 그리고 부모에 효도하는 길, 이 세 가지 길이 결국은 하나로 통한다고 말한 옛 사람들의 생각을 새삼 존중하고 싶다. 효의 사회성을 살림으로써 무너져 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도덕성과 윤리를 되살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효에 의무감, 책무감의 무게만 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효(孝)라는 글자는 워낙 ‘노(老) + 자(子)’다. 자식이 나이든 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게 짐 지기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자진해서 주고받는 정, 서로 나서서 주고받는 애정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
부(父)는 교(敎), 곧 가르침과 의(義), 곧 올바름과 신(信), 곧 신뢰의 표상이었다. 그 아버지의 교와 의와 신을 자식이 또한 짐 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이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사는 효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를 본으로 삼아서 자식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내내 효자일 것이다.
‘대아(大我)의 효’, ‘자진한 상호 애정의 주고받음’, 그리고 어버이를 본으로 삼아서 성취할 자식의 자기완성, 이 셋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효가 이룩되어야 할 것이다.
■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전통적 효의 개념을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가?
2. 효도가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인 노인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