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매개와 연결
토플러 이야기
나는 기회가 되면 학생들에게 앨빈 토플러의 책을 읽어보도록 권유하곤 한다. 그의 책이 대부분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3의 물결>, <미래의 충격> <전쟁과 반전쟁> <권력이동> 등의 그의 주요 저서들은 제법 두툼하며, 그래서 학생들이 그 책을 다 읽는 것에 때론 부담을 느끼곤 하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나서는 괜히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는 않는 편이다. 시대의 첨단 경향들에 대한 이해를 기본 소재로 하고 있는 그의 책들 내용의 일부는 학생들에게 생소할 때도 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리고 토플러는 자신의 생각을 풍부한 예화를 통해서 쉽게 제시하는 훌륭한 저술가이다. 그러나 내가 토플러의 책을 권유하는 것은 그의 미래학자로서의 통찰력에 학생들이 주목하기를 바래서는 아니다. 사실 미래학이라는 것이 다소간 모호한 것이어서, 그 미래의 예측이라는 것이 그리 잘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예측된 미래가 실제와 다르다고 하여 별다르게 흠집 잡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이,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 하에서 관변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된 미래 예측서를 기억하고 있는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토플러의 예측이 다소간 빗나갈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통찰력의 부족을 그리 나무랄 것은 못된다. 그 정도라도 생각하는 것이 어디 쉬운 것인가?
사실 내가 토플러의 책을 권하는 것은 토플러가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경영자들에게도 아주 인기있는 저술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 중 한 권은 여성지의 별책 부록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하였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그의 책 대부분을 번역 출판하고 있다는 것은 토플러가 한국의 경영계에서 아주 인기있는 사람이라는 것의 한 증거라고 생각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본가, 경영자들인데, 그들에게 이렇게 인기있는 사람의 생각을 아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원활한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토플러의 책을 읽기를 권했지만, 그러나 그의 핵심적 논지들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할 것을 시사하는 편이었다.
미래 사회를 급격하게 진행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비추어볼 때, 핵심적인 힘은 물리력이나 물질적 자본이 아닌 지식이나 정보에 기초할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미래 사회는 지금의 사회에 비해서 좋을 것이라는 것을 토플러의 주장의 핵심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하는 수많은 예화들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의문들에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2000년 12월이 토플러가 기술하였던 미래의 일부에 해당된다면,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부의 척도를 지식이나 정보의 양에 의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달러에 의해 평가하는 것일까? 오늘날의 세계는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풍부한 정보를 신속하게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경제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 더 불안해하며, 공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까?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도 왜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인민의 다수를 이루지 않는가?
혁명과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난 내가 구시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교과서에 변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그게 혁명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받는 것이 불과 몇 년전의 상황임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여도 전혀 문제 없는 이 세상이 때로는 신기하다. 혁명적 상황이라고 기술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그 방책을 제시해도, 오히려 칭찬받는다. 단지 디지털이고, 정보라는 것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가 이전의 사회와 다르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겨우 4반세기 이전만 해도 집안에 전화를 한 대 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길가에서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전화를 길가에서 팔고 있는 판이다. 한 집에 한 대의 전화가 모토이었지만, 이제는 어른 한 명 당 한 대의 전화를 가지는 형편이 된 정도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4반세기 이전에 서울에서 사람들은 그 4반세기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땅아래를 통해 이곳 저곳 다니게 되었다. 땅 속에서 전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생각... 그래도 지하철 혁명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땅 속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혁명적 변화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땅 속을 돌아다닌다고 하여 사람들의 일상이나 평상이 그다지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초 A. Wilden의 『System and Structure』(1972)를 읽으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하는 강의를 들었지만, 그리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설명하면서 그 예로서 태엽 시계와 전자 시계를 대비시켰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디지털 전자 시계는 충분히 싼 것이었다. 그렇게 이미 디지털은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디지털 혁명이라니, 이 혁명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우린 그 혁명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바뀌었던 것일까? 그리고 바뀌고 있는 것일까? 그 혁명은 지하철이 우리의 삶에 가져다 준 변화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일까?
디지털 시대의 아이들과 어른들
내가 가진 동산 가운데 자동차를 제외하고는 가장 값비싼 것이 컴퓨터이다. 그리고 컴퓨터를 다섯 대째 가지고 있지만, 홈페이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통계 패키지를 20년 정도 사용하였기에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컴퓨터를 비교적 잘 쓴다는 평을 듣고 있는 형편인데도, 그 수준에서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컴퓨터를 만진지 3년도 안되는 집아이가 만든 홈페이지에는 찾는 사람도 많다. 대학원까지 나온 내가 온라인으로 동창들을 만나는 것보다 초등학교 동창 밖에 없는 아이가 온라인 동문회 활동은 더 잘 하는 것같다.
그러나 온라인의 게시판에 쓰인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수준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게임의 세계에는 발을 들이기가 정말 힘들다. 아마 열심히 노력하면 게임에도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만, 현란한 그래픽은 구미를 돋우기는커녕 기를 죽인다. 그래서 스타크판 허준은 도저히 이해불능이다. 일반 채팅방은 아예 들어갈 생각도 않지만, 오래 활동한 동호회의 대화방에 들어가서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큰 자산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안다. 많은 VTR들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주로 재생의 목적으로만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휴대전화에서 전화는 단지 여러 기능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말이 애초에 깁슨의 『뉴로맨서』에서의 의미보다 더 확대되어 사용되지만, 그 속에서도 어른들의 경험은 아이들의 경험에 미치지 못하는 것같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어른들의 경험은 분산적이고 단기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아이들의 경험은 연속적이고, 장기적이며, 다면적이다. 아이들의 경험은 풍부하고 깊지만, 어른들의 체험은 빈약하고 거죽으로만 돈다. 그러나 어설픈 체험만을 겪은 어른들의 이야기는 논문이 되지만, 풍부한 경험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논문의 소재가 되기도 어렵다. 나이든 어른들이 때때로 겪는 경험은 믿을만 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아이들이 겪는 풍요롭로고 많은 경험들은 학문의 세상에서는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매개와 체계
사회과학자들이 스스로 직접 풍부한 경험을 충분하게 갖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약점은 아니었다. 직접적 체험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깊고 풍부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한 다음, 그것을 학계에, 그리고 학계를 통해 대중에게 보고한다. 도시 빈민의 생활을, 공장 노동의 현장 상황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것은 빈민과 노동자들의 직접적 육성을 통해서보다는 사회(과)학자들의 말과 글을 통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사회과학적 지식의 직접적 수용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중간층들에게 중간층의 삶의 모양을 정리하여 알려주는 사람들 역시 사회과학자들이었다. 현대 사회는 스스로에 대한 지식도 과학의 매개를 통해 얻기도 하였다. A. 기든스가 말하는 성찰적 근대에서 성찰은 흔히 학문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고, 과학자들은 그 매개의 물질적 담당자이었다.
인터넷 세상, 디지털 세상에서 이러한 매개는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박재흥이 「디지털 혁명과 정보 불평등」에서 잘 정리한 바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도 인구의 여러 범주별 정보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며, 때로 그 격차는 더 확대되기도 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정보 능력들도 확대되고 있다. 박선생이 제안하는 정보 불평등 해소 정책들에 공공적 접근 시각이 더 중시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우여곡절은 있을망정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한국의 인민들의 상당수가 자신의 생각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릴 수 있는 물질적, 기술적, 정보적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윤성이가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서 지적하는 <가능성>의 기반이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현실만 보더라도 전자민주주의는 제법 한계를 가지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이유가 “일반 국민들은.... 대부분의 문제들에서는 사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집단들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해주기를 원한다”는 윤선생의 생각과는 다를 것이라고 여긴다. 윤선생은 자신의 전반적 주장에 대한 경험적 근거를 소략한 수준에서 밝혔지만, 장차 더욱 세련된 실증적 근거와 논증이 나올 것이라는 것은 평자의 정당한 기대일 것이다.
한편 윤선생은 사이버 공간에서 숙의(deliberation)의 가능성이 낮음에 대해 주목하지만, 그 공간에서는 여러 사회적 경험의 직접적 체험자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별도의 권위적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도 이야기할 수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때로 이들의 전문적 지식은 제도권에서 인증받은 사람들, 흔히 학자들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은 바, 그들은 흔히 매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에게 있어 사이버 공간은 자유의 공간이며, 도전의 공간이며, 그리고 나눔의 공간이다. 홍성태가 「디지털 혁명과 자본주의의 정보적 확장」에서 인터넷의 초기를 가상공동체로 인식하였을 때는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 양식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선생이 지적하듯이 이제 인터넷은 전자상거래의 장이 되어 가고 있으며, 그래서 현실 정보사회는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임을 새삼 느낀다. 홍선생이 그것을 지적재산권이라는 매개를 통해 파악하면서, 그와 관련된 논의들을 정리한 것은 지적 재산권 문제가 법적인 문제인 것으로만 생각하였던 평자의 모자람을 질책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포유류 생명 복제와 같은 현상마저도 상업적 행위로 인식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의 정당한 근거가 자본주의 체제와도 연결될 수 있음을 홍선생의 글에서 읽을 수 있지만, 명쾌한 연결의 고리를 홍선생을 통해 쉽게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현상은 대중적 현상으로, 대중적으로 관찰되고, 대중적으로 체험되며, 대중적으로 보고된다.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현상은 무매개적으로 넘쳐 흐른다. 그 풍부함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의의를 가지지만, 그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연결하는 작업은 여전히 요구된다. 그 작업이 반드시 제도권의 아카데미의 고유한 작업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제도로서의 아카데미가 갖는 장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여전한 기대이다. 글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자리로서의 심포지움은 그래서 여전히 단순한 의례 이상이다.
토플러 이야기
나는 기회가 되면 학생들에게 앨빈 토플러의 책을 읽어보도록 권유하곤 한다. 그의 책이 대부분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3의 물결>, <미래의 충격> <전쟁과 반전쟁> <권력이동> 등의 그의 주요 저서들은 제법 두툼하며, 그래서 학생들이 그 책을 다 읽는 것에 때론 부담을 느끼곤 하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나서는 괜히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는 않는 편이다. 시대의 첨단 경향들에 대한 이해를 기본 소재로 하고 있는 그의 책들 내용의 일부는 학생들에게 생소할 때도 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리고 토플러는 자신의 생각을 풍부한 예화를 통해서 쉽게 제시하는 훌륭한 저술가이다. 그러나 내가 토플러의 책을 권유하는 것은 그의 미래학자로서의 통찰력에 학생들이 주목하기를 바래서는 아니다. 사실 미래학이라는 것이 다소간 모호한 것이어서, 그 미래의 예측이라는 것이 그리 잘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예측된 미래가 실제와 다르다고 하여 별다르게 흠집 잡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이,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 하에서 관변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된 미래 예측서를 기억하고 있는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토플러의 예측이 다소간 빗나갈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통찰력의 부족을 그리 나무랄 것은 못된다. 그 정도라도 생각하는 것이 어디 쉬운 것인가?
사실 내가 토플러의 책을 권하는 것은 토플러가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경영자들에게도 아주 인기있는 저술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 중 한 권은 여성지의 별책 부록으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하였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그의 책 대부분을 번역 출판하고 있다는 것은 토플러가 한국의 경영계에서 아주 인기있는 사람이라는 것의 한 증거라고 생각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본가, 경영자들인데, 그들에게 이렇게 인기있는 사람의 생각을 아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원활한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토플러의 책을 읽기를 권했지만, 그러나 그의 핵심적 논지들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할 것을 시사하는 편이었다.
미래 사회를 급격하게 진행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비추어볼 때, 핵심적인 힘은 물리력이나 물질적 자본이 아닌 지식이나 정보에 기초할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미래 사회는 지금의 사회에 비해서 좋을 것이라는 것을 토플러의 주장의 핵심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하는 수많은 예화들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의문들에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2000년 12월이 토플러가 기술하였던 미래의 일부에 해당된다면,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부의 척도를 지식이나 정보의 양에 의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달러에 의해 평가하는 것일까? 오늘날의 세계는 예전에 비해 훨씬 많은, 풍부한 정보를 신속하게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경제적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 더 불안해하며, 공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까?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도 왜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인민의 다수를 이루지 않는가?
혁명과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난 내가 구시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교과서에 변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그게 혁명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받는 것이 불과 몇 년전의 상황임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여도 전혀 문제 없는 이 세상이 때로는 신기하다. 혁명적 상황이라고 기술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그 방책을 제시해도, 오히려 칭찬받는다. 단지 디지털이고, 정보라는 것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가 이전의 사회와 다르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겨우 4반세기 이전만 해도 집안에 전화를 한 대 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길가에서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전화를 길가에서 팔고 있는 판이다. 한 집에 한 대의 전화가 모토이었지만, 이제는 어른 한 명 당 한 대의 전화를 가지는 형편이 된 정도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4반세기 이전에 서울에서 사람들은 그 4반세기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땅아래를 통해 이곳 저곳 다니게 되었다. 땅 속에서 전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생각... 그래도 지하철 혁명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땅 속을 돌아다닌다는 것이 혁명적 변화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땅 속을 돌아다닌다고 하여 사람들의 일상이나 평상이 그다지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초 A. Wilden의 『System and Structure』(1972)를 읽으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하는 강의를 들었지만, 그리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설명하면서 그 예로서 태엽 시계와 전자 시계를 대비시켰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디지털 전자 시계는 충분히 싼 것이었다. 그렇게 이미 디지털은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디지털 혁명이라니, 이 혁명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 우린 그 혁명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바뀌었던 것일까? 그리고 바뀌고 있는 것일까? 그 혁명은 지하철이 우리의 삶에 가져다 준 변화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일까?
디지털 시대의 아이들과 어른들
내가 가진 동산 가운데 자동차를 제외하고는 가장 값비싼 것이 컴퓨터이다. 그리고 컴퓨터를 다섯 대째 가지고 있지만, 홈페이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통계 패키지를 20년 정도 사용하였기에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컴퓨터를 비교적 잘 쓴다는 평을 듣고 있는 형편인데도, 그 수준에서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 이에 비하면 컴퓨터를 만진지 3년도 안되는 집아이가 만든 홈페이지에는 찾는 사람도 많다. 대학원까지 나온 내가 온라인으로 동창들을 만나는 것보다 초등학교 동창 밖에 없는 아이가 온라인 동문회 활동은 더 잘 하는 것같다.
그러나 온라인의 게시판에 쓰인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수준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게임의 세계에는 발을 들이기가 정말 힘들다. 아마 열심히 노력하면 게임에도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만, 현란한 그래픽은 구미를 돋우기는커녕 기를 죽인다. 그래서 스타크판 허준은 도저히 이해불능이다. 일반 채팅방은 아예 들어갈 생각도 않지만, 오래 활동한 동호회의 대화방에 들어가서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큰 자산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안다. 많은 VTR들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주로 재생의 목적으로만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휴대전화에서 전화는 단지 여러 기능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말이 애초에 깁슨의 『뉴로맨서』에서의 의미보다 더 확대되어 사용되지만, 그 속에서도 어른들의 경험은 아이들의 경험에 미치지 못하는 것같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어른들의 경험은 분산적이고 단기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아이들의 경험은 연속적이고, 장기적이며, 다면적이다. 아이들의 경험은 풍부하고 깊지만, 어른들의 체험은 빈약하고 거죽으로만 돈다. 그러나 어설픈 체험만을 겪은 어른들의 이야기는 논문이 되지만, 풍부한 경험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논문의 소재가 되기도 어렵다. 나이든 어른들이 때때로 겪는 경험은 믿을만 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아이들이 겪는 풍요롭로고 많은 경험들은 학문의 세상에서는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매개와 체계
사회과학자들이 스스로 직접 풍부한 경험을 충분하게 갖지 못하는 것이 커다란 약점은 아니었다. 직접적 체험이 대상에 대한 지식을 깊고 풍부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한 다음, 그것을 학계에, 그리고 학계를 통해 대중에게 보고한다. 도시 빈민의 생활을, 공장 노동의 현장 상황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것은 빈민과 노동자들의 직접적 육성을 통해서보다는 사회(과)학자들의 말과 글을 통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사회과학적 지식의 직접적 수용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중간층들에게 중간층의 삶의 모양을 정리하여 알려주는 사람들 역시 사회과학자들이었다. 현대 사회는 스스로에 대한 지식도 과학의 매개를 통해 얻기도 하였다. A. 기든스가 말하는 성찰적 근대에서 성찰은 흔히 학문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고, 과학자들은 그 매개의 물질적 담당자이었다.
인터넷 세상, 디지털 세상에서 이러한 매개는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박재흥이 「디지털 혁명과 정보 불평등」에서 잘 정리한 바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도 인구의 여러 범주별 정보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며, 때로 그 격차는 더 확대되기도 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정보 능력들도 확대되고 있다. 박선생이 제안하는 정보 불평등 해소 정책들에 공공적 접근 시각이 더 중시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우여곡절은 있을망정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한국의 인민들의 상당수가 자신의 생각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릴 수 있는 물질적, 기술적, 정보적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윤성이가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서 지적하는 <가능성>의 기반이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현실만 보더라도 전자민주주의는 제법 한계를 가지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이유가 “일반 국민들은.... 대부분의 문제들에서는 사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집단들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해주기를 원한다”는 윤선생의 생각과는 다를 것이라고 여긴다. 윤선생은 자신의 전반적 주장에 대한 경험적 근거를 소략한 수준에서 밝혔지만, 장차 더욱 세련된 실증적 근거와 논증이 나올 것이라는 것은 평자의 정당한 기대일 것이다.
한편 윤선생은 사이버 공간에서 숙의(deliberation)의 가능성이 낮음에 대해 주목하지만, 그 공간에서는 여러 사회적 경험의 직접적 체험자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별도의 권위적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도 이야기할 수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때로 이들의 전문적 지식은 제도권에서 인증받은 사람들, 흔히 학자들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은 바, 그들은 흔히 매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에게 있어 사이버 공간은 자유의 공간이며, 도전의 공간이며, 그리고 나눔의 공간이다. 홍성태가 「디지털 혁명과 자본주의의 정보적 확장」에서 인터넷의 초기를 가상공동체로 인식하였을 때는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 양식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선생이 지적하듯이 이제 인터넷은 전자상거래의 장이 되어 가고 있으며, 그래서 현실 정보사회는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임을 새삼 느낀다. 홍선생이 그것을 지적재산권이라는 매개를 통해 파악하면서, 그와 관련된 논의들을 정리한 것은 지적 재산권 문제가 법적인 문제인 것으로만 생각하였던 평자의 모자람을 질책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포유류 생명 복제와 같은 현상마저도 상업적 행위로 인식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의 정당한 근거가 자본주의 체제와도 연결될 수 있음을 홍선생의 글에서 읽을 수 있지만, 명쾌한 연결의 고리를 홍선생을 통해 쉽게 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현상은 대중적 현상으로, 대중적으로 관찰되고, 대중적으로 체험되며, 대중적으로 보고된다.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현상은 무매개적으로 넘쳐 흐른다. 그 풍부함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의의를 가지지만, 그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연결하는 작업은 여전히 요구된다. 그 작업이 반드시 제도권의 아카데미의 고유한 작업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제도로서의 아카데미가 갖는 장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여전한 기대이다. 글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자리로서의 심포지움은 그래서 여전히 단순한 의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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