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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보석 찾기

[철학]정의론을 넘어선 정의론

작성자김동석|작성시간08.11.06|조회수102 목록 댓글 0

 정의론을 넘어선 정의론


 롤즈에 대한 비판지점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것은 물론 사회 정의에 관한 분야에 있어서 롤즈가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심대하며 그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사회정의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다양한 비판 그 자체가 아니라 비판의 지점이 어디냐 하는 것이다. 노직은 철저한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롤즈를 비판한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권리야 말로 가장 중요한 권리이며 이는 절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논쟁을 초월한 전제여야 한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는 롤즈의 정의론이 바로 이것을 무시하고 있다.1) 이와 반대의 방향에서 맥퍼슨은 맑스의 착취 관점을 전제하고서 롤즈를 비판한다.
롤즈의 정의관을 규정하는 두 원리가 동시에 만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부의 집중은 평등한 자유를 위협할 것이므로 부유층으로부터 빈곤층으로 경제적 양도가 없는 한 자유의 원리는 만족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적 불평등이 최소 수혜자에게 이득이 되는 한에서만 허용된다면 분배적 정의의 원리는 이러한 양도에 심각한 한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맥퍼슨은 롤즈를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자유 민주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복지국가’를 정당화하는 수정자유주의자라 해석하고 그의 입장 속에 깃든 자본주의적 측면을 비판한다.2) 필자는 노직 보다는 맥퍼슨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노직에 비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롤즈 역시 수정자유주의자일 뿐이라고 간주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간단히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근대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비롯된 자유주의 사상이 전근대의 몇몇 문제들을 극복한 것은 사실이다. 기존에 국가나 공동체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주체 스스로의 자유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개인의 자유를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의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모든 개인에게 무한정한 자유가 허용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사회는 마치 홉스가 말한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 것이며 이렇게 불안한 사회상황 하에서 개인의 자유는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3)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에 의하면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행위만으로는 완전성과 이행성, 파레토원칙, 제3의 자원배분과 독립성이라는 3가지 원칙, 다시 말하자면 안정적 사회질서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4) 결국 자유주의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프리드먼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문제이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면서 유일한 기업의 책임은 주주를 위해 이윤을 극대화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것이 최소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데 법이라는 것이 결국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결과물이고 그 구체적 내용에 독점, 환경 등에 대한 규제가 들어있다라고 본다면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논리 틀 안에서도 사회에서 개인의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한 하나의 가설적 상태에 불과하다. 물론 센은 자유와 평등이 결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어쨌든 결국 문제는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이냐 내지는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필자가 보기에 『정의론』이 보여주는 가장 큰 문제는 롤즈가 너무나 쉽게 시장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는 시장이 없는 사회경제체제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어떠한 롤즈에 대한 비판도 그가 시장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비하면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체제는 일반적으로 시장을 이용해서 실제로 생산된 소비품을 공급하게 될 것이다. 어떤 다른 방도는 관리상 난점이 있으며 특수한 경우에서만 배급이나 다른 방편에 의거하게 될 것이다."(p.363)

  "그래서 시장 제도는 사유 재산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에 공통된 것임을 인정하고 가격이 갖는 할당적 기능과 분배적 기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p.367)


  정치철학자로서 시장의 존재 자체를 필수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는 경제학의 일부 영역을 받아들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정의에 관한 그의 이론에 약점을 만든다. 일반 이론으로 만들고자 했던 자신의 이론이 일반 이론과 멀어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진정 역사를 초월하는 이론이라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수한 상태를 배제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정치적 자유주의자라 칭한 정치철학자인 그가 시장을 받아들이면서 발생하게 되는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시장이라는 것이 어떠한 사회경제체제에도 내재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그는 시장이 어떠한 경제체제에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대적 존재라고 가정한다. 물론 사회주의 체제 역시 이러한 가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시장 제도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비록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만을 두고 봤을 때는 그것이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한 국가들과 거리를 두고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국가 자본주의 혁명 내지 자본주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하는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들(비국가 코뮌론을 내세우는 알튀세르주의, 고르터의 평의회와 당 공산주의, 륄레의 평의회 공산주의, 네그리/하트의 독립좌파 등)은 롤즈의 입장으로는 비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5)


 “오히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완전한 선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나 혹은 서로 상충하는 요구도 없으며 모든 사람의 욕구가 강제 없이도 서로 일치되어 조화로운 활동 계획을 형성하게 되는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정의를 초월한 사회이다.”(p.376)


 그러나 시장이 없는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그의 역사적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굳이 등가교환이 아닌 소모의 경제가 일반경제라고 주장한 바타이유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원시공산주의 사회나 포틀래치의 사례를 통해서도 시장이라는 것이 꼭 절대적으로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단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롤즈가 시장을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첫 번째 문제는 그가 차등의 원칙을 통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의 존재기반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훼손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노력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분배원칙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면 문제의 핵심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기반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에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다양한 능력은 똑같은 기회의 균등 하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6) 롤즈는 이 중 자연적 우연성에 기반을 둔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차등의 원칙을 제시한다. 사회의 기초재를 최소수혜자에게 최대로 분배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등의 원칙까지 충족된 이후에 발생하는 불평등은 그가 보기에 정의로운 것이다.


“부의 불평등한 상속은 지능의 불평등한 상속보다 본질적으로 더 부정의한 것은 아니다. …상속은 결과적으로 생겨나는 불평등이 가장 불운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고 자유 및 기회 균등과 양립할 수 있는 경우에 허용될 수가 있다.”(p.372)


 그러나 이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가 말하는 기초재에는 기본적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력, 소득과 부, 자존감이 속한다. 간단히 소득과 부에 대해서만 생각해봐도 그것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나 행동을 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부의 축적이 기본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해보면 이타적 행동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고 삶의 목적이 그것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차등의 원칙에 의해 부여받은 기초재를 곧바로 다른 누군가에게 증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디스트들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써 오히려 쾌락을 느끼고 아나키스트들은 자신이 어떠한 권력을 가지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이는 롤즈가 생각하는 기초재를 모든 사람들에게-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꼴이 되고 만다. 결국 정치적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그가 시장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주체에 따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자유인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고 훼손하고 마는 모순적 결과를 가져오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마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 역시 차등의 원칙에서 비롯된다. 일단 위에서의 지적은 배제하고 다시 차등의 원칙을 좀 더 밀고나가 보자. 현실적으로 동일한 생산재 내지는 기초재 묶음이 각 개인들에게 주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동일한 기반 하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달성하는 결과까지도 동일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성취수준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7) 그러나 그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 역시 유전적 요인 등에 의한 자연적 우연이라고 본다면, 또한 우연에 의한 차이가 배제되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그러한 차이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롤즈는 이러한 문제의식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능력에 의한 불평등의 심화를 방조한다.

 세 번째로 위에서 언급했던 상속의 문제를 조금 더 계급적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롤즈가 그토록 해결하고자 했던 무임승차의 문제는 사실 바로 이 계급으로 인한 무임승차를 짚고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으로 인한 문제에 집착하면서도 가장 심각하게 불평등을 야기하는 우연인 상속의 문제를 용인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에게 계급으로 인한 착취의 문제를 지적하길 바라는 것은 허황된 욕심이다. 물론 그가 착취의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맑스적인 착취는 재산 관계의 어떤 구조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완전경쟁과 양립할 수 있다.”(p.408)


 자본주의적인 노동시장의 완전경쟁 상태하에서도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으로 충분히 공정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가능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맑스의 착취 개념이 시장의 등가교환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의 노동력 매매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롤즈는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계급의 문제를 아예 자신의 논리전개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본질을 회피해버렸다.


“사람들이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착취당하는 의미는 아주 특수한 의미로서, 즉 기여의 신조가 지켜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이는 가격 체계가 더 이상 효율적인 것이 아니어서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방금 우리가 보았듯이 이러한 신조는 부차적인 여러 기준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실제로 중요한 것은 전체 체제의 운용이며 이들 결함들이 다른 곳에서 보완되어지는지의 여부이다. 나아가서 충족되어지지 않은 것은 본질상 효율성의 원칙이므로 전체 사회가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착취라는 개념은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배경적 체제 내의 심각한 부정의를 의미하며 시장의 비효율성과는 별로 관계없는 것이다.”(p.408~409)


 롤즈가 계급의 문제를 피해간 것은 그가 보기에 시장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시장사회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당연히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이론은 사회정의를 위해 사회불평등을 용인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착취 문제에 대한 회피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본주의 하에서 상속으로 인한 불평등까지도 허용할 수 있다고 보는 그를 어떻게 친자본주의적이라 비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의 이론은 다른 자유주의와의 차이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네그리가 지적한 대로 그저 하나의 복지국가의 이념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8)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가 바로 시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곧 부정의인 것이다. 시장은 사유재산권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시장의 성립기반인 사유재산권은 롤즈가 말하는 우연성의 문제에 가장 심각하게 개입한다. 이것이 바로 롤즈가 자신의 이론이 체제를 뛰어넘어 적용되는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그의 차등의 원칙이 사유재산을 전제하지 않고는 적용되지 못하는 모순을 내포하게 되는 지점이다.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만드는 힘은 사실 부르주아지의 단결이 아니라 바로 사유재산제도가 기반이 되어야 성립 가능한 자본에 대한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은 화폐의 물신화로 인해 부채질된다. 시장경제하에서 모든 행동주체는 어떠한 상품과도 교환 가능한 화폐를 욕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의 가치증식을 꿈꾼다. 프롤레타리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9)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바로 그 동력을 발생시키는 기반인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 때문에 동시에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 비정의의 문제가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놀라운 것은 롤즈가 자신의 책에서 경제체제가 무엇이건 중요하지 않다면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명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 암암리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의 태도는 시장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맹목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시장경제가 어떤 의미에서 최선의 체제라는 관념은 소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 의해 가장 주의 깊게 탐구되었는데, 이러한 관계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도 그 자체가 그러한 체제의 이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상의 우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이점 중의 하나는 효율성이다. … 일반적인 균형 이론은 적합한 조건이 주어졌을 경우 가격에 의해 제공된 정보로 인해 경제 주체가 결국 이러한 결과를 성취하도록 행위하게 되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완전한 경쟁이 효율성에 비추어볼 때 완전한 절차가 된다.…시장 체제가 갖는 그 이상의 보다 중요한 이점은 필요한 배경적 제도가 있을 경우 그것이 평등한 자유와 기회 균등과도 부합한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직업과 직장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동에 대한 강제적인 중앙 통제를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시장이 진정으로 경쟁적인 경우에는 기업들은 가격 전쟁이나 시장세를 잡기 위한 다른 경쟁에 가담하지 않는다. 민주적으로 도달된 정치적 결정에 부합해서 정부는 전체적인 투자량, 이윤율, 통화량 등 그의 통제 속에 있는 어떤 요소들을 조정함으로써 경제 풍토를 규제하게 된다. 전체적인 직접적 계획을 할 필요성은 없다. 개개의 가계들이나 기업들은 경제의 일반적 조건에 의거해서 독립적으로 그들의 결정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p 365~366)


 롤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도덕철학자로서 스스로를 ‘정치적’자유주의자라 칭하면서도 경제학이 그 이론의 전개를 위해 전제한 경제인 가정, 즉 인간은 합리적 판단 하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아가서 정의론은 사회적이고 이타적인 동기의 강도에 명확한 한계를 가정한다. 그것은 개인들이나 단체들이 서로 상충하는 요구를 내세우며 그들이 정의롭게 행위하려고는 하지만 그들의 이익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p. 376)

 

 바로 이 지점에서 롤즈가 경제학을 받아들이면서 나타나는 마지막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시작된다. 사실 나는 『정의론』에 대한 메타텍스트들을 읽으면서 롤즈가 인간을 이기적이라고 전제했다거나 경제학의 기본가정을 받아들였다는 식의 이야기를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과연 저 문장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저 문장은 이타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경제적 이익에 대한 추구가 행동의 주요한 동기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 비판지점을 발생시킨다.


 우선 과연 정치철학자가 이러한 경제적 가정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냐는 문제이다. 물론 경제학이 이러한 몇 가지 가정들을 통해서 과학적 엄밀성을 확보하고 학문의 발전을 촉진시킨 점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부분이겠지만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경제학의 영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벨상에 경제학상이 우여곡절 끝에 포함되게 된 이유가 결국 인류의 평화에 공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이는 다시 말해 경제학은 경제학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사회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센이 지적하는 것처럼 경제학이 윤리의 문제를 경제학에서 배제시키면서 스스로를 과학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사회의 문제, 윤리의 문제를 함께 끌어안고 가야만 하며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을 끌어안음으로써 경제학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10) 그런데 경제학 내부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나오고 있는 마당에 경제학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이기적 인간에 대한 가정을 롤즈가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는 인간의 다양한 가치관을 허용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던가?


 경제학의 가정을 받아들인다고 치더라도 과연 그러한 가정이 올바른 것이냐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제학과 정치학 내지는 윤리학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받아들여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가정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동기만을 가지고 행동하는 지극히 단순한 모습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르다. 당장 내 경우만 생각해보아도 반례는 무궁무진하다. 여자친구에게 쓰는 돈은 이상하리만치 아깝지 않으며 군대에서는 병장시절, 계급(기수)에 의한 차별을 해소시켜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욕을 얻어먹어 가면서 청소를 했다. 지난주에는 시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친구의 부탁이라는 이유로 무보수로 밤을 새 가며 인터넷 쇼핑몰을 제작해 주기도 했다.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과는 거리가 먼 선택을 했던 이러한 예는 누구에게나 많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행동 유인에는 물론 개인의 이익이라는 요소도 영향을 끼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들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유라는 것이 이렇듯 다양한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라면 그 자유를 이기적 동기에 안에 가두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방법상의 수단의 자유만을 허용할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선택에 대한 자유까지도 끌어안아야만 한다.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는 길일 것이다.


 롤즈가 사회정의에 관한 연구에 엄청난 기여를 했고 그 업적에 비례해서 다양한 지점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또 일정부분 그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롤즈가 특히 시장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부분, 그리고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가정을 받아들인 부분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경제학을 받아들인 부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정의론』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의 논리전개는 분명히 꽤 탄탄하며 그의 논리 내부에서 결정적 비판지점을 찾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행위동기가 보다 다양할 수 있다는 것,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전제만 받아들여도 훨씬 그 내용이 풍부해 질 수 있으며 심지어 맑스주의자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그가 원했던 진정한 일반 이론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갤브레이스의 말처럼 경제학은 언제나 그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발전해 왔다. 중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국부론』이 나왔듯이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한 대항으로 『자본』이 나왔고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일반이론』을 만들었다.11) 레이건과 대처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출현은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나서서 스스로를 탈근대주의자라고 하지 않는데도 왠지 모르게 근대성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지식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드는 탈근대의 시대인 것이 사실이고 이로 인해 변증법의 종말을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근대의 대표적 인물인 맑스를 다시 꺼내려는 것은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하의 어떠한 형태에서도 그 체제는 언제나 노동력을 착취해 왔으며 노동이 사회적 생산 장소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2)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경제학 내지 새로운 체제는 타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 구조적 차별이 발생할 수 없는 모든 주체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경제학이다. 나는 그러한 경제학의 성립 가능성을 바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차이의 철학에서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내용 중 한켠을 채워줄 선물 경제학-인간의 이기심이 아닌 오히려 이타심에 기반한-을 이야기하는 모스와 바타이유에 주목해야 함은 물론이다.


1) http://en.wikipedia.org/wiki/Anarchy,_State,_and_Utopia
2) Macpherson, Rawls's models of man and society, Philosophy of the society science 3, 1973, 341~347(http://pos.sagepub.com/cgi/reprint/3/1/341)
3) 이상호, 센의 능력과 사회정의, 사회경제평론17, 2001 
4) http://en.wikipedia.org/wiki/Social_Choice_and_Individual_Values
5) 박병섭, 마르크스의 자본과 롤즈의 정의론 사이의 대조․비교, 범한철학 28, 2003 
6) 사회정의와 정치경제학, 박순성․이상호, 사회경제평론 11, 1998
7) Ibid 
8) 네그리&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2, 갈무리, 1997 
9) 이진경, 미래의 맑스주의, 그린비, 2006 
10) Sen, Commodities and Capabilities, North-Holland, Amasterdam&NewYork&Oxford, 1985(이상호, 센의 능력과 사회정의, 사회경제평론 17, 2001에서 재인용)
11) 갤브레이스, 경제학의 역사, 책벌레, 2002
12) 네그리&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2, 갈무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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