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화 변호사님의 사법시험 합격수기입니다.
회계카페에서 보았는데, 방송대를 졸업하셨길래
학우님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보신분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우리도 화이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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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試界 2008/1
■■■ 合格記 [제49회 사법시험]
내일은 해가 뜬다 !!
梁 仙 花
∙1975年 8月 25日 生
∙(대전)신일여자상업고등학교졸업(1994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2000년)
∙제49회 사법시험 합격(2007년)
Ⅰ. 들어가며
저도 수험생활 동안 합격기를 많이 읽으며 정말로 꼭 합격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이는 제가 합격기 자체를 쓰고 싶다 기 보다 그 전제로써 합격을 하고 싶었다는 얘기입니다. 드디어 합격을 하게 되었지만, 누가보아도 여러모로 부족한 제게 합격기를 써 달라고 할까하고 합격기를 쓸 기회는 오 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뜻하지도 않 은 합격기를 써달라는 月刊 『考試界』 의 부탁을 받고 막상 쓰려고 하니 막막 하기도 합니다. 공부방법론은 저보다도 훌륭하신 다른 분들의 합격기가 더 도움이 되시리라 생 각하여 저는 저의 생활과 수험기간동안의 마음가짐을 중심으로 써보려 합니다.
Ⅱ. 철없던 유년시절,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제가 2살 때 대전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 위로 오빠 둘이 있고요. 어릴적의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못한 상황이었 습니다. 그래서 단칸방에서 저희 다섯 식구가 쪼르록 잠을 잤고, 모든 생활을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부대끼며 생 활했습니다.
오빠 둘은 초등학교시절부터 아침에 신문배달을 했는데, 하루는 제가 초등학 교 4학년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떡복이가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이 것은 선화 네 것이니 어서 먹으라고 했 고, 옆에 작은 오빠도 있었는데 저만 먹 으라고 해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빠 가 우리는 이미 먹었으니 어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먹었는데, 그때 엄 마, 아빠께서 작은오빠 신문배달을 좀 도와주면 안되겠냐고 하시더라구요. 그 떡복이의 역할이었던 거죠. 그래서 그때 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오빠와 함께 신문을 돌렸습니다. 그땐 또 겨울이었는 데, 무지 춥기도 했고, 오빠랑 저랑은 나 이가 어려서 오토바이나 자전거도 없이 오로지 걸어다니며 신문을 배달해야만 했었는데, 하루는 오빠가 눈이 오는 날 미끄러져서 하수도에 빠진적이 있었습니 다. 무지 추운 겨울날 새벽에 바람까지 부는데, 오빠는 바지와 신발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신문도 다 흘리고, 그래서 우리는 신문사한테 혼날 것을 걱정하며 울었습니다.
전 그때 결심했습니다.내 반드시 성 공하여 신문배달을 한 이 길을 다시 걸 으리라!!! (실제로 제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비록 성 공은 못하였지만 그 길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 동네가 개발이 되어서 길이 없어져 버렸더군 요) 단칸방에서 잠을 잘 때 제 옆에 작은 오빠가 누웠는데, 그때 우리는 이런 얘 기를 했었습니다. “선화 네가 갖고 싶은 것 있으면 오빠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 서 꼭 사줄게. ”그때 전 새우깡 한 박스 라고 했고, 저 또한 오빠에게 갖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했더니 신발이라고 해서 제 첫월급날 오빠한테 신발을 사주었지요.(먼 훗날 오빠가 군대에 가서 제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 다. “신이 내게로 와서 선화 네가 평생 행복해 지는 대신 내가 불행하게 된다고 하면 나는 어 서 그러라고 할꺼야~~” 라고요. 고마움에 눈 물을 흘렸습니다. )
또 하루는 초등학교 3학년인 제가 집 에 있는데 밖에서 오빠가 수박 두 쪽을 들고 와서 한쪽을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어디에서 난거냐고 옆에 있던 엄마가 묻 자 오빠는 옆집의 아주머니가 수박을 주 셨기에 가져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 그 때 저를 생각해주는 오빠에게 고마웠습니 다. 저를 위해 수박을 가져오지 않았더라 면 그 자리에서 더 많은 수박을 오빠는 먹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저도 그때 부터 먹을 것이 생기면 오빠들과 같이 나 누어 먹곤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걸스카우트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걸스카웃 애들이 입은 유니폼이 무척이나 예뻐 보였고,부 러웠죠. 그래서 엄마에게 나도 걸스카웃 하고 싶다고 하자 엄마는 “선화야. 그거 하면 돈이 많이 드는데, 지금은 돈이 없 거든. 나중에 하자” 고 말씀하셨지요. 그때 이후로 전 갖고 싶은 것 (특히 인 형),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엄마한테 사 달라고 정말 조르고는 싶었지만 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지금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생활을 통하여 저희 3 남매는 더욱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습니 다. 부모님께 갖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조 르지 않는 저희들만의 부모님에 대한 배 려심을 배웠고,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누어 먹었기에 지금 오빠들과의 우애 가 참으로 좋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결코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Ⅲ. 힘든 사회생활. 그러나 내 삶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순간
1. 여상에 들어가서
오빠 둘은 이미 인문계에 진학을 한 상태였고, 큰오빠는 대학에 수석입학을 하여 4년간 계속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 생활을 하였고, 작은오빠는 커피숖, 호 텔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학비 를 충당했습니다. 전 고교시절 여름과 겨울방학 때마다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 를 해서 첫 수입으로는 엄마반지를 해드 렸고, 수학여행비, 등록금을 보탰습니 다.
저는 초등학교 때는 꽤 공부를 잘했었 습니다 (쑥쓰 ^^). 그런데 3학년때 남자 짝꿍이 수업시간에 얘기를 걸어와서 얘 기를 했는데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습니 다. 그 후로 노는 것이 공부보다 더 쉽다 고 생각해서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 되었 는데 전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 인문계 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공부에서 해방이 되고 싶어서 여상을 택하게 되었죠. 재미있는 것은 제 생각에 여상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지 않는 것으로 만 생각하고 여상에 지원했던 것인데 입 학을 하고서 교과서를 받는 날 제 눈앞 에 펼쳐진 국, 영, 수 책을 보고 하늘이 깜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정방문이 있어서 담임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오셨는데 그때 선생님이 제가 저희반 전체 50명 중 49등으로 입학을 했다고 어머니께 하시는 말씀을 제가 듣 게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무 리 공부를 못한다 하더라도 꼴찌에서 2 등이라니!!그래서 별달리 공부를 한 것 은 아니었지만 복습만 했었는데 기말고 사에서 9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 는 이것이 제가 공부를 한 그 노력의 댓 가라 여기지 않고 학교가 상업계라 쉬워 서 그런거라고 치부해 버렸습니다. 만일 노력의 댓가라 여겼다면 공부에 흥미를 붙였을 거라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2. 첫 사회생활
실업계 고교졸업 후 저는 서울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여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족은 대전에 있고 저만 서울로 올라왔는데 작은 아버지 집 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지요.
변호사님은 제게 너무도 엄하셨습니 다. 분명 아침에 나오자마자 사무실 청 소를 했음에도 손님들이 계신 자리에 저 를 큰소리로 불러서 먼지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쓸은 데 또 쓸고, 닦은 데 또 닦으라고 하셨고, 모든 업무는 자리에 앉아서 하지 말고 손님들께 바쁘게 일하 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일어서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 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오늘 아파서 못나가겠다고 하자 변호사님께서는 결코 결근은 허용할 수 없으니 나오라고 하셨 습니다. 그래서 전 아픈 몸을 이끌고 나 갔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님은 ‘왜 네 마음대로 아프냐. . . 넌 내가 월급을 주고 데리고 있는 것이니 네 마음대로 아플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서러웠 습니다. 또 울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제가 수험공부를 하면서 고마움을 느끼는 부분으로 변했습니다. 저 또한 시험을 보는 그 하루를 위해 몇 달 전부터 체력관리 등을 통해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제 자신 을 발견하며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내가 내 일에는 이토록 신경을 쓰는데, 그때 당시에는 남의 일이라고 해서 내몸하나 관리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구나. 그때는 내가 책임감이 없었구나.’ 하는 것을 느 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면 정말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 을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책 임감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해보며 지금 이 순간 고시생의 신분으로써 책임을 다 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밖에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사무실에 나오자마자 변호사 님은 제게 지금 급하게 검찰청에 들어갈 서류가 있으니 그 서류가 완성될 때까지 전화도 받지 말고, 손님들께 차도 내드 리지 말고 오로지 빨리 타이핑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2시간정도 걸려서 타이핑을 끝낸 후에 손님들께 차를 대접 했는데, 사무장님 한분 (사무장님이 네 분 정도 계셨음) 이 출근하시는 것을 제가 못 봐서 그분께는 차를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만은 자신의 방이 있었기 때문). 그 런데 점심시간에 변호사님과 모든 직원 과 손님들이 식사를 하시러 나가시고 저 만 사무실에 혼자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무장님 방문이 활짝 열리며 저보고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전 그때서야 그 사무장님이 와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사무장님은 대단 히 화가 나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다른 사람한테는 차를 주고, 왜 나한테 는 안주느냐’며 제 뺨을 세게 4차례나 때 리셨습니다. 또 울었습니다. 그러자 울 지 말라고 호통을 치셔서 울면 또 맞을 까 두려워 나오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 습니다. 서러웠습니다.
결국 이 사무실에서는 1년간을 근무 하고 다른 변호사 사무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긴 사무실은 가족적인 분위기였습 니다. 제게 잘해주시고,챙겨주시고,이때 사법시험에 대한 호기심과 나도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변호사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법시 험에 붙을 수 있는 거냐고. 진짜 막연 한 질문이었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서점에 가면 사법시 험을 위한 가이드 책이 있으니 그것을 보라고 하셨고 그 책을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 때마침 뉴스에서는 로스쿨이 거 의 확정화 되다시피 보도가 되어서 로스 쿨에 대해 알아보니 4년제 정규대학을 나와야지만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간대학은 등록 금이 저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주간대 학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지하철 광고란에서 방 송통신대학을 우연하게 알게 되었습니 다. 전화를 걸어 등록금이 얼마냐고 물 어보자 그때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26 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1996년에 방송 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 다. 변호사님께서는 제가 방송통신대학 에 들어가려고 하자 시간적인 배려를 해 줄 테니 부담 없이 공부하라고 하셨고, 실제로 사무실에서 시간이 되면 제 자리 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장학 금을 한번 꼭 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서 작은 목표를 두었지요. 2학년 1학기 에 처음으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러 자 이제는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저는 기말고사 준비를 D-50 일로 하여 계속 공부했습니다. 전체 8학 기 중 5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 다.
이때부터 사법시험에 대한 정보를 알 아보았는데 당시 1차 시험에 어학과목이 8과목 중 택일이었습니다. 제가 영어를 못했기에 저는 일본어를 선택하여 퇴근 후에는 강남에 있는 어학원에서 일본어 를 배웠습니다. 그때 저와 같은 반에서 일본어 수업을 듣는 교복을 입은 고등학 생들도 여럿이 있었습니다. 그 고등학생 이 부러웠습니다. 아무런 돈 걱정 없이 하루 종일 공부만을 할 수 있다는 자체 가 부러웠습니다.
그 후 방송통신대학을 4년만에 졸업 을 하고 사법시험에 대한 제 의지는 더 욱 굳혀졌었습니다. 그래서 1년을 더 근 무한 후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드 디어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수 있었습니 다.
Ⅳ. 6년간의 수험생활
1. 제44회 1차시험준비
제아무리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마음 을 먹었지만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무작 정 신림동 고시촌에 갔습니다. 그때 신 림동 고시촌에는 학원만이 있고 독서실 이라는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 래서 처음 1년간은 학원수업만 듣고 곧 바로 버스타고 집으로 가서 공부를 했습 니다. 그리고 고시생은 밥만 먹고 공부 만을 하는 줄 알고 일요일도 공부를 했 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제가 그토록 원 하는 하루 종일 공부만을 할 수가 있어 서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8월까지 기본 3법 기본강의를 들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아무것도 이해 된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다 시 차근히 책을 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있 었는데 같이 학원수업을 들었던 친구가 9월부터 시작되는 진도별 모의고사반을 따라가야 합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문제를 풀을 실력이 되지 않 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야만 합격할 수 있다는 말에 무조건 모의고사반에 들 어갔습니다. 이때부터 학원에서 칠판닦 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수업료는 면 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의고사를 보 면 매일매일 통계표가 나오는데 제 백분 율은 98%이었습니다. 완전 꼴찌였지요. 그런데도 전 전혀 창피하지 않았습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때 강사님께서는 저희들에게 40%는 가능선 이고, 20%는 안정선이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러면서 지금 현재 40%안에 들 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전 바로 그 말씀이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 여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98%짜리가 참으로 무모한 생각을 한 것 이었는데 그래도 그러한 무모함이 지금 의 저를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1차 시험을 보았습니 다. 민법과 헌법이 각각 55점이었습니 다. 평균은 71점정도. 당연히 낙방이지 만 그래도 저는 1년간 공부해서 71점이 올랐구나라고 받아들였습니다.
2. 제45회 1차시험준비
처음은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강사님 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선생님~~ 저 떨어졌어요” 라고 말을 하며 다시금 공 부했습니다. 이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 를 했습니다. 여전히 학원은 칠판 아르 바이트를 하며 제가 원하는 수업을 마음 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녁 에 학원수업을 듣고 오전, 오후를 복습 을 했는데 이때는 기본서를 읽을 때 편 안함을 느꼈습니다. 작년에는 생판 모르 는 단어들의 집합체에 불과했었는데 말 이죠. 그러면서 점점 공부가 재미있어졌 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속으로 교수님 과 대화를 하면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마치 퍼즐게임과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모의고사 성적은 꾸준히 조금씩 올라갔 습니다.
두 번째로 본 1차시험 결과는 민법 90 점, 헌법 87. 5점으로 작년에 비해 월등 히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평균 81점으 로 컷트라인 보다 1점이 모자라 또다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 생각은 그래도 1년간 내가 공부를 하긴 했구나. 점수가 올랐으니 말이다. 남들은 제게 아쉽게 떨어졌다 고 위로해 주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컷트라인이라는 것은 합격 자중의 꼴찌점수인데 전 그 꼴찌보다도 못해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의 실력부족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전화위복으로 삼기로 하고 다 시 한번 하면 꼭 붙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3. 제46회 1차시험 준비
이때부터는 모든 어학과목이 없어지 고 영어시험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영 어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토 익, 토플, 텝스 중 토익이 가장 쉽다고 해서 무조건 영어강의를 들었는데 도무 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정말 로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스 트레스만 쌓여서 집에서 혼자 십자수 (제 유일한 취미생활)를 놓으며 이런저런 생각 을 했습니다. 그때 문득 “그래. 헌법 , 민 법, 형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야. 왜? 한 국어쟎아? 한국어로 돼있는데 외우면 되 는 거지. 그렇다면 영어도 학문이 아니 라 언어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주일 학원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혼자 서점에서 중학교 1학년 영어참고서 와 맨투맨 기초를 구입해서 한달간 공부 했습니다. 이를 공부하면서 의문문으로 고쳐보기에 따라서 한번 고쳐본 후 해답을 보고 맞으면 너무 기뻤습니다. “와~~ 내 가 영작도 하네~~!” 하면서요. 한달간 혼자 영어공부를 하고 다시 영어학원을 다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로 본 토익시험 에서 710점을 받았습니다.
7월부터 다시 1차시험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이때는 자 신감도 들고,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습니 다. 모의고사 성적도 계속 저를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공부가 너무 잘되는 날이 면 집에 가기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버 스가 끊기므로 하는 수 없이 11시면 독 서실을 나와야 했고, 이럴때면 신림동에 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습니 다. 아침에 5실에 일어나면 뛰어서 독서 실에 가고 싶을 정도로 너무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로 본 1차시험에서 평 균 87점으로 컷트라인보다 4점을 상회 하여 처음 1차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4. 제46회 2차(초시) 낙방 ‧ 제47회 2차 (재시) 준비
예비순환 강의를 들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왜 그다지도 어려운지,정말 막막 했습니다. 강의는 들었지만 아무것도 모 르겠더라고요. 그렇게 예비순환 강의가 끝나자 바로 2차시험일 이었습니다. 처 음 2차 시험장을 갈 때 기분은 좋았습니 다. 전 한 과목에 답안지가 1장이 나오 는 줄 알고 있었는데 웬걸!!2장을 주더 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7과목 모두 1장씩만 쓰고 나왔습니다. 결과는 ALL과락이었습니다. 점수는 민소법 6점, 형소법 4점, 헌법과 상법은 각각 14점, 제일 잘한 것은 민법 32. 5 점이었습니다.
이때의 제 생각은 4점, 6점, 14점이 라도 점수를 주신 채점교수님들께 감사 했습니다. 전 정말 제 답안지는 읽어보 시지도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 읽어주시고 거기에 점수까지 주신다는 점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만, 처음으 로 받아본 최악의 점수이기에 내 인생에 있어서 다시는 이런 점수는 받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기득권이 있었기에 1순환부터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에는 필기노트 아르바이 이트를 하면서 학원수업료를 면제받았습 니다. 그리고 제가 쓴 필기노트가 비디 오 영상반에 제공이 되었는데 반응이 좋 아서 책도 내게 되었습니다. 민소법(최평 오), 상법(김혁붕), 행정법(성봉근), 형법 (송헌철) 총 4권의 서브노트가 책자 형태 로 나왔는데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치 출판기념회를 여는 작가처럼. . . ㅋㅋ 해가 바뀌고 2차 시험일을 2~3개월 앞두고 있는데 제 실력이 나아지지 않았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 고 내년 동차를 다시 노릴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 . 갑자기 이것은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전시험은 전쟁인 데 내가 전쟁터에 나가서 “ 아~ 이번전 쟁은 포기하고 다음 전쟁에서 이겨야 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인 데 전쟁에서 포기함은 바로 죽음을 뜻하 기에 다음 전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 니다.
두 번째로 본 2차시험의 결과는 면과 락 이었습니다. 그러나 저공비행을 하여 낙방을 하였습니다. 합격자 발표일 이후 의 제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그래도 1년간 내가 공부를 하긴 했구 나. . . ALL 과락에서 과락을 면했으니. . . ”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 . 세 상은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만 시련을 주 는 거야. . . 그러니 나는 세상으로부터 채택된 사람이야. . . 이 시련을 이기 자!!”
그래서 다시 한번만 도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대신에 다시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무언가 새로운 각오가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 각오는 “합 격할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만나지 말 자! 오로지 공부만 하자!” 였습니다.
5. 제48회 1차 준비
10월 14일에 있었던 발표일까지 토익 700점을 획득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다 시 영어공부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1월 한달간은 하루종일 영어에만 매달 렸습니다. 독서실 책상위에 영어책을 꽃 아 두는 것이 창피하기도 해서 이 책을 돌려서 꽃아 둘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차라리 창피함을 당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창피함을 당해야 빨리 영어 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아주 당당하게 독서실에서 영어책을 보았습니다. 11월 시험결과가 12월 18일 오후 9시 이후에야 나오고 또 그날은 오전에 마지막 12월 토익시험 을 보는 날이라 12월에 들어서서도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월 18일 오후 9시가 되어서 두근거리는 마 음으로 독서실 1층에 있는 컴퓨터에서 성적조회를 해보니 725점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총무실에 찾아가 “저 영어 됐어요!!” 라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12월 19일부터 본격적인 1차 공부에 돌입하였습니다. 시간은 촉박하 였지만 자신감은 잃지 않았습니다. 나름 대로 계획을 세웠을 때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약 2개월간 잠, 식사시간을 최대한 줄 여가며 오로지 합격에 대한 열정 하나만 을 가지고 버텼습니다. 체력적으로 힘 이 들었지만, 그래서 죽을 것 같다는 생 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차라리 공부하다 죽어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 소원은 공부하다 지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네 번째로 본 1차 시험에 컷트라인 보다 3점을 상회하여 합격을 하였습니 다. 이때는 합격하여 다행이라는 생각뿐 이었습니다.
6. 제48회 2차 (3시) 낙방 ‧ 제49회 2차 (4시) 준비
1차 시험이 끝나고 긴장을 풀지 말았 어야 하는데 그만 긴장을 풀어버리고 말 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공부에 등한히 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스터디 제의가 들어와서 동차반에 들어가지 않고 스터 디를 하게 되었는데 약 1달간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는데 도중에 다른 멤버가 스 터디를 그만두는 바람에 스터디를 못하 게 되어 약간의 혼란도 겪었습니다. 또 한 동차니까 다음에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는 안이한 생각이 한몫을 더하여 저 를 더욱 헤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본 2차시험에서 낙 방을 하였습니다. 이때는 제 불합격을 미리 예상을 했었기에 슬프지도 않았는 데 다만 합격자 발표일에 “반드시 내년 시험에는 꼭 붙을꺼야!!” 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금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2순환부터는 모의고사반에 들어가서 매 일 모의고사를 치렀습니다. 그러면서 드 는 생각은 “아! 그동안 나는 떨어질 실력 이었구나!” 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왜 떨어졌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서 작년에 떨어진 것에 대해 고마웠습니 다.
마지막으로 하는 공부여서 그런지 정 말 재미있게 공부를 했고, 시험일 2개월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시 험일이 닥치면 2개월만 더 있으면 좋으 련만... 이라는 생각을 나또한 매번 하 지 않았던가!!바로 지금이 그때 그 당시 에 내가 그토록 원하던 2개월이다! 그러 니 지금 이 순간을 후회없이 보내자!!” 고요. 그렇지만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 것은 어절 수 없었습니다. 누가 때린것 도 아닌데 괜스레 눈물이 나고, 식사시 간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벽을 바라보며 혼자 식사를 하는 제 자신을 볼때 서럽 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은 섬뜩한 생각을 했는데요. 어차피 공부하다 지쳐 죽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제 목숨은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목숨을 담보로 공부를 하면 안되고 엄마의 목숨 을 담보로 잡기로 했습니다. 제 자신에 게 “선화 네가 만약 이번 시험에 합격을 못하면 엄마의 목숨을 가져간다” 이런 생각을 하니 공부를 안 할 수 없었습니 다. 꼭 제게는 엄마를 살려야 하는 이유 가 분명했습니다.
드디어 4일간 치러지는 시험일이 왔 습니다. 살은 빠질대로 다 빠져 있었습 니다. 식사를 하는 것이 제게는 고문이 었습니다. 차라리 안먹으면 좋으련만 뇌 의 작용을 위해 먹어야만 하는 고문이었 습니다. 시험을 보는 4일동안에도 제 자 신이 거울을 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 을 만큼 살은 계속 빠졌습니다. 점심시 간에 김밥을 들고 밖으로 나가 혼자 김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합격을 한 어느 민소법 강사님께서는 다시 2차 수 험기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진다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고. 그 이 유는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하는 이야기 를 들었습니다. 동감했습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소화도 되지 않는 김밥을 조금씩 천천히 계속 먹었습 니다. 마지막 4일째 시험을 끝내고 시험 장을 나설 때는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 는 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도 저절로 베어 나오는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7. 제49회 최종합격
10월 18일에 있었던 합격자 발표일이 되었습니다. 2차 시험을 끝내고 전과 같 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계 속 토익공부를 해서 그런지 합격자 발표 일이 다가옴에 대해서 떨리지는 않았습 니다. 그러나 막상 발표일 당일만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되었습니다. 오후 3시에 드디어 명단이 발표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저는 차마 명단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서실에서 기다리 며 조용히 휴대폰 전원을 켜보았습니다. 문자메세지가 20개가 들어와 있어서 확 인을 해보니 축하한다는 메시지였습니 다.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 로 1층으로 내려가 제 눈으로 명단을 확 인해보니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게 꿈이 아닌지... 정말 믿기지가 않았습니 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 다! 정말 감사합니다!
Ⅴ. 마치며
제가 글재주가 없어서 두서없는 글을 썼습니다. 부디 읽으시는 분들의 너그러 운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희망은 싫어하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고, 반겨주는 자에게 찾아온다고 합니 다.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글귀는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는 것은 물 의 힘이 아니라, 계속하여 떨어지는 꾸 준함 때문이리라"는 것입니다. 전 6년간의 수험기간동안 이 글귀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공부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과 희망, 그리고 반드시 나는 합격한다는 자신감 인 것 같습니다.
이 공부를 하시는 분들 은 모두 저보다 백배 훌륭하신 분들이므 로 분명 합격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제게 도움을 주시고 아껴주신 분들께 머리를 깊이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합격의 길로 인도 해 주신 분들의 은혜를 제 평생 마음속 에 간직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 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