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제 1. 아지트 |
젊은 날 에너지 충전소
안병호
아지트란 숙제를 안고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나온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내가 태어나 살던 고향 영주의 산골 마을은 1960년대에서 생활 환경이란 그저 먹고 살아 가는 것도 빠듯한 여건이었다. 그러나 저절로 우리들끼리 모이는 장소로 만들었던 시절이다. 그것이 요즘 말로 “아지트”인 것이다.
배움의 혜택도 받지 못해 출생 신고도 제대로 제때 하지 않아서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나올 때 보면 동갑내기가 아니고 나이 차이가 많아 형님 벌 되는 사람과 동급생이 된다. 출생 신고하려면 행정구역 면사무소 가서 호적계에 접수 하여야 하는데 거리도 멀고, 또 형편상 직접 가지도 못한다. 무학자는 가서도 신고할 수 없는 상태이다.
마을 일 보는 사람을 “구장 혹은 이장”이라 하였는데 구장한테 부탁해서 대신 출생 신고를 하여야 한다. 구장 수고비는 모곡(募穀)이라 하여 일 년에 정해진 양을 나락으로 모아서 준다. 구장도 농사짓는 사람이라 먼 거리를 걸어서 가야 한다. 마을 사람의 부탁을 취합해서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면사무소에 가곤 하였다. 마을 사람 부탁을 구두로 전달받아서 가다 보니 출생 연도와 출생 아이의 이름도 잊어 버리고 적당히 신고하고 오면 몇 년의 세월이 지나야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정확하지 못하고 오류가 빈번히 생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동급생의 나이가 세 살 많은 한 동네 형벌 친구와 한 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남녀 동급생이 일곱 명이었는데 나이 많은 친구가 대장 행세를 한다. 등ㆍ하굣길 책을 싼 책보자기도 대신 메고 가야 하고, 누구라고 지적하면 시키는 대로 비서처럼 시중을 들어 주어야 하였다. 그러한 학창 시절도 유수처럼 지나가고 상급학교 진학하는 친구는 한 마을에 한두 명이다. 그 시절에는 타지에 나가서 생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못 되었다. 모두 부모님 밑에서 농사일 보조하고 낮이 되면 꼴망태에 소먹이가 되는 꼴(풀)을 가득 담아서 오는 게 일상이었다.
싸리나무로 엮어 만든 둥근 모양은 다래끼이며, 짚으로 엮어 만든 것은 망태기라고 하였다. 이 모두가 어깨에 메고 다니는 운반 도구이다. 팔 다래끼 꼴망태라 나는 이를 모두 사용하였다. 이를 어깨에 겯고 아지트에 늘 모이었다.
내가 살던 그 시절 농촌에서는 참외 농사를 지어서 판매하는 사람이 가까운 이웃 마을에 있었다. 참외가 익어서 수확할 때가 되면 밭 주인이 원두막을 높다랗게 지어 놓고 경비를 주야로 한다. 봄보리를 수확해서 햇곡이 나오기 시작하면 부모님이 몇 됫박 가져가 참외를 사 와서 집에 있는 가족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참외 맛을 보기 시작하면 남자 친구들만 밤에 모여서 작당한다. 초저녁 마을 동구 우리들 아지트에 모인다. 주인 몰래 참외를 서리해 먹기로 수작질한다. 그 방법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다. “참외 서리”, “수박 서리”라고 하여 그것이 마치 무슨 놀이처럼 대대로 전수 되어 왔다. 밤중에 참외밭에 가서 게릴라전처럼 주인 몰래 가져오다 보니 참외가 익었는지, 설익었는지도 확인할 겨를이 없다. 우리의 아지트인 동구에 도착해 잘 익은 것은 골라√먹고, 설익은 것은 멀리 던져 버린다. 이것이 무서운 증거인멸 방법이다. 지금 생각하니 깔깔대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생각난다. 여자아이들은 서리를 안 하니까 각자 집에서 부모님 몰래 쌀을 조금씩 가져와서 하얀 쌀밥을 밤 야식으로 해 먹으면서 즐거웠던 젊은 날의 시절 추억한다.
고향 마을 동네 중간쯤 골목 옆에 오래된 돌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익으면 연노란색으로 주먹 만 한 것이 매년 많이 열린다. 먹어 보면 맛도 좋다. 나 보다 두 살 많은 친구가 나무를 잘 타서 별명이 다람쥐이다. 돌배가 익을 무렵 우리는 초저녁 동구 아지트에 모여 네 명이 속닥속닥 모의를 한다. 그 친구는 나무에 올라가고, 우리는 몸을 숨긴 채 망을 보기로 작전하였다. 나무의 다람쥐인 친구가 배나무에 올라가 먹을 만큼 돌배 따서 내려오려는데 그 순간 돌배나무 주인이 밤에 소변보러 나왔다가 그만 이 현장을 보고 말았다.
그 배나무집 어른이 고향 동네 전임 구장을 하던 분인데 저녁 초승달 희미한 달빛에도 배나무에 애들이 있는 것을 직감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만 조심해서 내려와라.” 하였다. 그 소리에 망보던 우리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우리는 동구 아지트에 와서 기다려도 그 친구는 오지를 않았다. 다음날 물어보았다. 배 딴 것은 다 주고, 몇 개만 가져와서 혼자 모두 먹어버렸다 한다.
내가 살던 그 시절 농촌에서는 아이들이 군것질할 간식거리도 없었고, 배가 고파서 농산물 조금씩 가져가 먹는 것은 크게 꾸짖지도 않았다. 내 자식, 남의 자식 할 것 없이 모두가 사춘기 겪으면서 지나가는 의례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많은 양이 아니고 간식거리로 가져가니까 농촌에서는 풍습처럼 내려오는 전통 놀이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정도이었다.
농촌 생활에서 문화 혜택이 빈약하던 시절 지방 행정관청인 영주군청 공보실에서 각 면 단위마다 야간에 흑백영화 “장화홍련”, “춘향전” 같은 순회 이동 영화를 무료로 상영하였다. 천막도 없이 면사무소 마당에서 영사기만 돌린다. 그 시절에는 무성영화라서 동시 녹음 안 되니까 변사(辯士)가 화면이 바뀔 때마다 울고 웃으면서 목소리로 연기를 한다. 신기하기도 하여 구경꾼들은 모두 넋이 나갈 정도이었다. 그러한 문화 혜택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이다.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그날은 그 면내의 동네 젊은이는 모두 마을을 나간다.
영화 구경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모처럼 마을 처녀ㆍ총각이 함께 모이었다. 소재지 작은 가게에서 알사탕, 건빵, 비가 과자 등 간식 사 가지고 밤길 걷는다. 앞산을 넘어올 때 느릿느릿 걸으면서 왁자지껄하고, 중구난방의 주제 없는 대화로 산골짜기가 울릴 정도이었다. 한밤중 마을에 도착하니 헤어지기 아쉬웠다. 부친이 안 계시는 섭이네 집으로 모두 모인다. 우리 아지트인 그곳에서 밤늦도록 수다를 떤다.
고향의 산, 숫돌백이 산의 정기 받아 태어나 천륜 같은 인연으로 맺어진 고행 친구들, 생각 없이 모이던 그 장소 그 아지트는 우리 모두에게 활력 에너지 충전소이었다.
(2026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