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제 3. 갈증 |
신라 경주 분황사
이영백
자리끼 물을 마신 이야기로는 단연 신라 원효대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경주가 고향이고, 경주고교를 다니면서 토요일마다 분황사 법회에 친구 따라다녔다. 불교의 교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금강삼매경을 외우던 같은 반 그 친구의 대단함에 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서울 D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분황사(芬皇寺)는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당나라 태종이 모란 그림과 씨앗 서 되를 보내어 선덕여왕을 시험하였다. 그림에는 나비가 없었고, 짝 없는 여왕을 우롱하였다. 이를 알고 서기 634년 선덕여왕 3년에 “분황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분황사는 “향기 나는 황제”를 의미하여, 신라 여왕으로도 손색없음을 항변하였다.
아버지는 열 자식 중에 막내로 나를 낳았음에도 초교만 다니게 하고 전 근대식 학교인 마을 서당에 다니게 하였다. 아버지 철학은 전 근대 농경시대로 살아가라는 듯 “천지 문리가 탁 트인다는 한문을 배우라.”고 하였다. 그래도 밥 먹고 살 수 있으며, 결혼하고 자식 건사하면 살 수 있다고 여기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혜안 가지고 큰형을 공부시키었다. 시골에서도 가문 이루어 남에게 글 빌리러 가지 말라고 열여섯 살까지 서당 공부를 시켰다. 일제 침략기 시대 2년제 덕동간이학교를 마치었는데 일본어를 썩 잘하였다. 교장 따라 도일하려다가 아버지에게 답삭 붙잡혀 열여덟에 본동 처녀와 결혼하였다.
나는 초교 전에 천자문 배우다가 졸업하자마자 나를 다시 서당에 다니게 하였다. 큰형과 내가 두 띠동갑으로 뒤를 이어 우리 가문을 돌보라는 깊은 유지가 든 주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찌 그리도 동기들 교복 입고 다니는 것이 좋아 보이던지 무척 부러워하였다. 그래도 어린 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항변 없이 따랐다. 나는 차마 어쩔 수 없어서 서당은 건성건성 다니고, 대신에 강의록을 사서 보았다. 영어, 수학을 배우는데 독학으로라도 재미가 나서 2년 동안에 3년 과정을 마치고 다니던 서당을 그만두었다. 집에서 몰래 출사표(出師表) 쓰고 나가 아르바이트하면서 중학교 마치고, 고교 가서도 쌍코피 터지게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간접적으로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나를 중ㆍ고교 공부 마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늦깎이로 공부하였으니 남자인 나에게도 군대 영장이 나왔다. 선택의 길은 교육대학과 RNTC 지원뿐이다. 대학 학자금 조로 논 두 마지기 팔아 반만 받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일 년 벌이하는 동안 아버지는 더 기다려 주지 못하고 돌아가시었다. 주자 십훈에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이었다.
무척이나 시간이 급하다고 조르는 어머니의 담금으로 인하여 못 이기는 척 중매 혼인을 하였다. 그래도 공부가 고파서 교사 꽃자리 8년, 아름다운 시골 생활 결혼 일곱 해째 되는 즈음에 편입하고 공부하였다. 시골에서 통학 거리가 너무 멀어 교사직 “의원면직”하였다. 134:2 비율의 전문대학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큰 공부 마치니 더 큰 공부에 욕심이 동나서 중등교사를 안 나가고, 국어 전공으로 교육학 학위를 받았다.
나이 들어 중등교사가 되느니 차라리 도회지에서 교육 행정가로 높은 급료 받고, 자식 키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또 후배들을 위하여 정년 삼 년 남기고 “의원 명퇴”로 놀고먹는 “화백(화려한 백수)”이 되었다. 지방 잡지에 투고하여 수필가로 등단하였더니 새로이 글 쓰는 데 빠졌다. 은퇴 8년 만에 전직에서 50년사 편찬위원으로 불리어 가서 늙어 막에 재취업으로 도끼의 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게 근무하였다.
나는 어찌하여 초등 교사직에서 앞날이 훤한 길 두고 “의원면직” 하였는가? 2급 정교사로 문교부 지정 농촌형 시범 급식학교 연구 주임 교사 자리를 버리고 교직 8년을 버리고 편입하여 공부하려 하였든가? 초등에서 눌러앉아서도 앞날이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는데 갈림길에서 선택의 고민을 많이 하였다. 그 시절 단순 생각으로 중등교사 자격을 받아서 높은 학문으로 살아가고자 희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빠른 승진에서 세상사를 미리 안 것이 탈이었다. 늘 그리워하였던 목마름이 공부 더하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초등교사의 직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결과이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직장에서 현실 만족을 찾지 못한 이유도 있다. 그 시절 방송통신대학은 2년제에서 5년제로 변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를 선택하느냐? 사범대를 선택하느냐에 놓이었다. 그래도 최종 결정은 사범대를 편입한 것이다.
낮의 시간은 초등학교 교사요, 대구까지 세 시간 통학하여 야간 대학교의 공부 시간 맞추기가 너무 어려웠다. 처음 두 달을 통학하다가, 집도 대구 반야월로 옮기고 비포장길 하루 여섯 시간 버스 타고 공부하고, 새벽에 근무지로 나서고 하니까 건강은 피골이 상접 하고, 뒤죽박죽이 되었다. 모든 것 눈 딱 감고 초등학교 교사직을 의원면직한 것이다.
반야월에서 신암동으로 옮기고 직장도 대학으로 옮기었다. 모든 것이 쉬 돌아 가는 것처럼 느끼었다. 여섯 시 퇴근하고 대명시장에 들러 밥을 10분 만에 먹고 야간 대학에 다니었다. 저녁 먹고부터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거북하였다. 밥 먹은 후 강의 들으면 잠이 저절로 자장가가 되기 때문이다. 그 후 알아차리고 저녁을 굶었다. 늦은 시간 밤 열한 시 넘어 귀가하여 야식 먹었다. 건강을 이 년 동안 골똘히 길들이었다. 나는 무엇을 되려고 야간 대학 공부하였는가? 졸업과 동시에 또 시골로 가기 싫어 발령을 포기하고 대학원을 진학하였다. 그렇게 햇수가 지나 서른다섯의 발령 데드라인에 걸리어 중ㆍ고 교사 발령을 포기하고 도회지 대학에서 안주하고 말았다.
마치 나의 인생살이가 허무하다. 마치 “향기 나는 황제”의 절이지마는 몽고 병란과 임진왜란 난입으로 훼손당한 것이나 심지어 신라 유일 모전석탑 9층이 무너지고, 3층만 남은 것과도 흡사하다.
원효대사는 과부 요석(瑤石)공주와 잠자리로 실계(失械)하면서 얻은 석학 총지 “설총”을 낳았다. 분황사에 소성거사(小性居士) “원효(元曉)”가 머무르다 돌아가심에 유해로 상을 만들어 봉안해 놓고 아들이 나가려 하였는데 나가는 것을 돌아보듯 움직이었다고 전한다. 혹시 원효가 다시 목이 말랐을까? 다시 시간 내어 분황사 법당에 들러 보아야 할까?
(20160318.) (20260620. 1차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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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7대 선덕여왕의 3가지 지혜
① 중국 당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으로 그림 모란 그림과 그 씨앗 서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다. 그리고 씨앗을 뜰에 심었더니 그 꽃이 피어서 떨어질 때까지 향기가 없었다. ->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짝 없는 여왕을 우롱하였다.
② 엄동설한 겨울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 떼가 사나흘을 울어대었다. 문무 대신들이 여왕께 여쭈니 왕은 각각 알천, 필탄 등의 장수에게 명 내려 정예 2천 명을 뽑아 서라벌 서쪽으로 급히 가라 하였다. 여근곡(女根谷) 주변 탐문 하여 반드시 적병을 덮치라고 하였다. 백제 군사 500여 명이 숨어 있어서 일망타진하였다. -> “여자는 음이고, 그 색은 희다. 흰색은 서쪽이다. 남자 성기가 여자 성기 속에 오래 있으니 죽는다.” 하였다.
③ 선덕여왕이 건강할 때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내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 가운데 장사 지내라 하였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낭산이라 하였다. 나중에 붕어하시기에 유언대로 장사 지냈다. ->그 후 십여 년 후에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