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글제 2. 건배사) 나달이 먹다 - 이영백

작성자청림/이영백|작성시간26.06.13|조회수4 목록 댓글 1
글제 2, 건배사

나달이 먹다

이영백

 

 동해 남부선 부산행 완행 증기기관차가 기적소리 내고 왼고개 올라가려고 지축을 울린다. 증기기관차가 하늘에 뭉게구름처럼 피어 올리느라고 온통 제 능력을 모두 발휘하고 있다. 시계 없던 시절 오포(午砲)는 소방서에서 사이렌 소리로 때맞춰 함께 울어 준다. 고향은 수채화와 같은 풍경이 감싸고 있는 형산강 상류 남천(南川) 시래(時來) 거랑 주변 새보의 농인(農人)이 모여 사는 한적한 시골 풍정이다.

 주변에 열두 집이 전부인 조그만 우리 새보 마을이지만 어머니 택호인 송계댁(松谿宅)에는 머슴이 많다. “상일꾼 상머슴은 농사 일 하는 데도 노련미를 발휘하여 해마다 세경 많이 받아 간다. 중 머슴이 있고, “곁머슴은 꼴 베는 일 등 비교적 소 풀베기로 손쉬운 일을 하기에 꼴머슴이라고도 불렀다.

 고향 새보에서 전해오던 말은 아시 논(초벌), 두불 논(두 벌) 매고, 세불 논(세 벌)까지 매면 문둥이 된다.” 하였다. 그만큼 농사짓는 데 논매기 하는 일이 힘 많이 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세불 논매고 나면 훌쩍 자란 날카로운 나락 훼기 때문으로 얼굴과 맨다리에는 칼로 베듯 피가 맺히게 된다. 농사짓는데 그만큼 맨살 다리가 따갑다.

 세불 논을 매야만 나달이(=호미씻이)”를 먹는데, 이날을 특히 머슴들 생일이라 한다. 고대의 농신제일(農神祭日)이었던 음력 칠월 백중이 오면 그동안 애썼다는 뜻에서 한바탕 크게 놀 수 있는데 이를 일러 고향에서는나달이 먹는다.”라고 한다. 머슴들 잔치하는 사이에 어린 우리들은 도련님으로 불리며, 음식 먹는 즐거움도 함께 누렸다.

 이날 집에서는 누나, 형수, 어머니를 비롯하여 조그만 동네 아낙네들까지 모두 모여서 찹쌀 갈아 기름에 지져 낸 찹쌀 노치도 만들어 낸다. 밀전병, 애호박채 썰어서 볶은 것 등 음식도 마련한다. 상일꾼에게는 대가리를 떼어내지 않은 명태 한 마리를 통째로 넘기어 주었다. 이것이 머슴 생일에 가장 큰 선물이다.

 새보에서는 나달이 먹을 때 당수 나무 그늘이 있는 삼 굿터에다 자리를 잡았다. 그곳이 동네에서 제일 넓은 광장이 되기 때문이다. 상머슴이 고집 센 황소를 거꾸로 타고 논둑 돌며 풍년을 기원하고, 당수 나무 그늘에 내려 풍물 치면 아랫동네 머슴들까지 거들어 합류한다. 자연히 이백 석지기 송계 어른은 오늘을 기다린 듯 백편, 인절미, 쑥떡, 절편 등 갖은 떡을 마련한다. 행인이나 참여하는 아래위 동민들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손국수, 이밥, 돼지고기, 동동주를 당수 나무 밑으로 가져오게 한다. 이날만큼은 일 년 농사짓느라고 고생한 상머슴 이하 먹고, 마시고, 신나게 놀 수 있도록 계속 무한 리필로 제공하는 것이다. 어린 우리들도 덩달아 먹는 데 한몫한다.

 특히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상머슴에게 어머니가 손수 짠 열석 세 삼베로 지은 하복 한 벌을 선물해 주기도 한다.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힘들게 공부하는 것보다 상머슴이나 되어서 옷 한 벌 얻어 입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땐 옷이 하도 귀해서 그랬다. 옷 한 벌이 큰 벌이었으니까.

 휘영청 달뜬 당수 나무 밑에서 횃불 밝히며 늦게까지 놀다가 어느새 우리 집 머슴방인 초당(草堂)으로 모두 집합하여 짚 세공품 만들기 내기한다. 새끼 꼬기 하며, 이어 짚신 삼기, 밧줄 만들기, 삼태기 엮기, 가마니 치기로 이어지면서 으슥한 밤이 더욱 깊게, 푸르게 찾아온다.

 이러는 사이 음식은 집마다 또 한 옹가지*1씩 가지고 찾아오는데, 술 가져오는 집, 적 부쳐오는 집, 감주 담가 가져오는 집, 장떡 만들어 오는 집, 직접 만든 국수를 삶기도 하고, 물김치를 담가 오기도 하였다. 그날 머슴들 생일날에 음식 먹을 일이 낮 이어서 밤까지도 벌어졌다.

 풍물이 쉴 새도 없이 울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 높이 남폿불 매달았다. 대회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한껏 기를 쓰며 즐기면서 내기를 만끽한다. 말할 것도 없이 참 농인이 되었기에 고달픔을 나달이 먹는 것으로 달래이었다.

 상머슴 옷 한 벌 받았다고 곁머슴 시켜 술도가를 또 달려갔다 온다. 자전거로 배달 하여온 통 말술을 마당에다 줄 세우고, 골고루 사발 잔으로 가득 부어 나누어 마신다. 이 술 마시고서는 사나흘 노는 데 허락받았으니 확실히 머슴들 생일은 좋은 날이다. 어린 우리들은 숙제하는 것도 잊고 구경하기도 왜 그리 바빴는지 모를 일이다.

 머슴살이하는 머슴은 저마다 사연이 있다. 우리 집 상머슴은 삼 형제 중 막내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고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두 형이 나 몰라라 하였으니 고용살이 길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이를 미리 알고 평소 예의도 바르고, 신용도 있어서 상머슴으로 모두 맡긴 것이다. “중 머슴은 우리 동네 제일 위 바지 살았는데 이 사람도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 약속 시간보다 늦은 해가 지고 늦은 저녁 시간에 들어왔다. 늦게 온 이유가 하필 머슴살이 떠나려는데 중 머슴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다. 집에 오는 그날 제일 필요한 것이 밥이었다. 사흘째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하고 온 것이다. 그 후 우리 집에 온 후로는 밥 굶지 아니하였다. “곁머슴은 나보다 한 살 아래로 내 소 꼴 친구가 되었다. 부산 아이인데 엄마도 없이 아버지와 나이 차가 있는 누이 등 가족 셋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상머슴과 중 머슴은 우리 집에서 같이 기거하였고, 곁머슴은 저녁 먹고, 늦은 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막걸리 흰 사발에 노란 달이 떠 있다. 또 가득 부은 하얀 막걸리 속에는 시집가고 싶어 하는 동네 자야 얼굴이 빠진 채로 잔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말, 세벌 논맬 때 나락 훼기에 피부가 긁혀서 따가운데도, 일자 무학 한데 저절로 입에서 단체로 단합하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위하여라고 소리쳤다.

(20160311.) (20260613. 1차 퇴고)

--------------

*옹가지 : ‘옹자배기’의 방언(강원, 경북)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청림/이영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3 오래 전의 글을 다시 퇴고 하여 올립니다.
    한비수필학교장.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