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독解讀의 해독害毒>
- 시 : 돌샘/이길옥 -
후배 시인이 찾아왔다.
요즘 잘 나가는 중견 시인의 시 한 편을 들고
금으로 새긴 이름표를 단 평론가의 극찬으로
TV에 나오고 신문에도 대문 달았다는데
자기는 가방끈이 짧아 解讀 불가라며
그래도 이런 시를 한 편 쓰고 죽어야지 않겠냐며
시 한 편을 내민다.
잘 썼다.
후배 시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가 봐도 참 잘 썼다.
독자의 관심을 데려다 고개 끄덕이게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않나 싶다.
그래 최소한 이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후배 시인의 심사가 훤히 보인다.
가져온 시를 읽으며
복효근 시인의 시 ‘난해 시 사랑’을 떠올린다.
어려운 낱말을 조립하는 기막힌 기술
엉뚱한 문장을 잘도 끼워맞추는 독보적인 재주
출처 불명의 신조어들을 귀신같이 꿰매는 장인의 솜씨에
접근이 쉽지 않아 문이 열리지 않는 시
후배 시인의 타는 속의 불씨가 내게 옮겨온다.
이런 시를 解讀하려다 害毒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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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解讀)의 권력과 난해성의 함정 ― 이길옥의 「해독解讀의 해독害毒」
이길옥의 「해독解讀의 해독害毒」은 최근 한국 시단의 오래된 논쟁 가운데 하나인 ‘난해시(難解詩)’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난해한 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해독(解讀)이라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으며, 문학이 독자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이 작품은 "해독(解讀)"과 "해독(害毒)"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중첩시켜 해석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시는 매우 현실적인 장면에서 출발한다.
"후배 시인이 찾아왔다.
요즘 잘 나가는 중견 시인의 시 한 편을 들고"
여기에는 오늘날 문단의 풍경이 압축되어 있다. 유명 평론가의 극찬, 방송 출연, 신문 지면의 조명 등은 작품 자체보다 작품을 둘러싼 권위 체계를 먼저 보여준다. 독자는 시를 읽기 전에 이미 '좋은 시'라는 평가를 강요받는다.
특히 다음 구절은 문단 권력의 구조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금으로 새긴 이름표를 단 평론가의 극찬으로"
여기서 "금으로 새긴 이름표"는 단순한 수식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를 상징한다. 시의 가치가 작품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이름에 의해 인증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시 속 후배 시인은 난해한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는 가방끈이 짧아 解讀 불가라며"
이 표현은 자조적이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 독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시를 읽고 이해하지 못했을 때 독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의심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전환을 시도한다.
"잘 썼다.
후배 시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가 봐도 참 잘 썼다."
이 대목은 의외다. 시인은 난해시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인정한다. 따라서 이 시의 비판 대상은 난해함 그 자체가 아니라 난해함이 문학적 가치의 절대 기준처럼 소비되는 현상이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은 작품의 핵심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독자의 관심을 데려다 고개 끄덕이게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않나 싶다."
여기서 시인은 시의 본질을 독자와의 소통에 둔다. 물론 현대시는 반드시 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가 완전히 배제된 채 언어의 실험만 남을 때 시는 자기만족의 성채가 될 위험이 있다.
후반부에서 시는 더욱 노골적인 풍자성을 띤다.
"어려운 낱말을 조립하는 기막힌 기술
엉뚱한 문장을 잘도 끼워맞추는 독보적인 재주"
여기서 시인은 난해시의 창작 방식을 마치 공예 기술처럼 묘사한다. 기술은 뛰어나지만 감동은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출처 불명의 신조어들을 귀신같이 꿰매는 장인의 솜씨"
라는 표현은 특히 인상적이다. 장인의 솜씨는 인정하지만, 그 솜씨가 독자와의 만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역설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복효근 시인의 「난해 시 사랑」을 떠올리는 대목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한국 현대시 내부에서 지속되어 온 난해성과 소통성 논쟁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장치다. 시인은 개인적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담론의 한복판에 서 있다.
결국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두 행에 있다.
"이런 시를 解讀하려다
害毒될까 두렵다."
여기서 "해독"은 더 이상 이해의 행위가 아니다. 지나친 해석과 난해함의 숭배가 오히려 독이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시인은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다가 오히려 문학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는 역설을 경계한다.
이길옥의 「해독解讀의 해독害毒」은 난해시를 단순히 공격하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묻는 시다. 시인은 언어 실험과 예술적 난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독자를 배제하는 순간, 시는 해독의 대상이 아니라 해독(害毒)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시단은 종종 "이해되지 않음"을 깊이의 증거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깊이는 난해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깊은 우물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어야 하며, 깊은 시는 독자의 영혼과 만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난해시 비판을 넘어 문학의 공공성과 소통의 윤리를 성찰하게 하는 메타시(meta-poem)로 읽힌다.
이 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시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의 한국 시단이 가장 진지하게 답해야 할 물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