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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 반자연으로서의 예술 /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김경식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14|조회수58 목록 댓글 0

계간 문학동네 1998년 겨울/제5권 제4호/통권17호/세계문학


“친애하는 데놔예 씨, 선생은 그 소책자를 위해 저에게 시들을, 자연에 관한 시들을 부탁하시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숲들과 큰 떡갈나무들과 푸른 풀들과 벌레들에 관한, ……아마도 태양에 관한 시들을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식물들에 감동될 수 없고, 정신적인 존재 모두에게 언제나 충격적인 그 무엇을 지니는 듯 보이는 그 별난 새로운 종교를 제 영혼이 거부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선생도 잘 알고 계시지요. ‘신들의 영혼이 식물들 속에 살고 있다’고 저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며, 설사 그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저는 별로 관심이 없어 신성화된 채소들의 영혼보다는 제 영혼을 사뭇 더 값진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번창하고 되젊어진 자연 속에는 뭔가 뻔뻔스럽고 괴롭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마저도 저는 늘 해왔습니다.

아무래도 계획의 빠듯한 요구에 맞추어 선생을 충분히 만족시켜드릴 수는 없는 처지지만, 어스름한 시간에 저를 엄습한 몽상 모두를 그려낸 두 편의 시를 보내드립니다. 숲 복판에서, 성기실(聖器室)이나 성당들의 천장과도 닮은 그 천장들 밑에 갇힌 저는 우리의 놀라운 도시들을 생각합니다. 그러자 꼭대기에 감도는 불가사의한 음악이 제게는 인간적 비탄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2)


보들레르의 이 편지는 1853년 말이나 혹은 1854년 초에 씌어졌다. 낭만주의의 자연관에 대한 거부가 여기에서보다 더 도발적으로 표명된 적은 별로 없었다. 또한 현대의 예술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을 반(反)-자연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가 여기에서처럼 단호하게 밝혀진 적도 거의 없었다. 이 편지는 순전히 사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설문에 대한, 다시 말해 드느쿠르(Denecourt)의 기념 문집을 위한 원고 청탁에 대한 답장이다.(드느쿠르는 자칭 숲의 수호자이자 『퐁텐블로 숲의 여행객을 위한 안내서』의 저자이며, 오늘날에는 잊혀져버린 생태 운동의 선구자쯤 되는 사람이다.) 이름난 작가들이 50여 명 이상 참가한 그 기념 문집은, 가난하게 된 그 인류의 은인을 자연을 찬양하는 글들을 통해 돕겠다는 생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이 일은, 만약 주목만 되었더라면, 하나의 자그마한 문학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보들레르의 편지는 미적 경험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전환점은 당시 다른 글에서도, 가령 여행을 묘사한 글들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자연은 더이상 미적 대상의 전형일 수 없게 되! 었으며 또, 일찍이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지리학자, 수학자)가 생각했지만 이제는 사라진 코스모스의 내적으로 충만한 전체를 지각하는 관찰자에 대한 풍경으로서 되불러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기념 문집에 실린 글 가운데 적어도 반어적으로 씌어진 세 편의 글은 범신론적인 자연 애호의 그 진부한 ‘별난 종교’에 반항하고 있다. 카스티유(Castille)는 숲을 시인과 자살자가 선호하는 장소로 찬양하고 있으며, 샹플뢰리(Champfleury:프랑스 소설가이자 언론인)는 소풍 도중 멋진 케이크를 도둑맞는 파리 소풍객의 광경을 그리고 있다. 고티에(Th. Gautier)는 하이네 풍으로 드느쿠르를 신들의 황혼기에 나타나는 숲의 도깨비로 노래하고 있으며, 바부(Babou)의 평문은 진부한 자연개념 자체를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연은 분명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옛날 사람들이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라 불렀던 것, 그리고 오늘날 ‘브르타뉴 본래의 언어와 풍속을 지닌 브르타뉴 주민’에 견줄 만한 것을 사람들은 조심해야 할 성싶다. 나는 애국심의 견지에서는 단지 프랑스화된 브르타뉴 주민만을, 문학적 취미의 견지에서는 인간화된 자연만을 사랑한다.” 격식에 매이지 않은 보들레르의 비평은 한층 더 깊이 파고든다. 낭만주의 미학에 대한 거부, 자아와 자연의 교감에 대한 거부가 다름아닌 유기적 ? 悶Э?대한 거부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그 비평은 보여준다. ‘신성화된 채소들’에 대한 보들레르의 조롱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푸른 자연’, 즉 영원히 되젊어지고 번창하는 생명의 혼이 불어넣어진 전체이다. 능산적 자연의 고갈되지 않는 창조력이야말로 이제는 ‘뻔뻔스럽고 괴롭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왜 그럴까? 오로지 자기 재생산에만 복무하는 자연의 작동, 종(種)들의 발전사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한 잔혹한 투쟁에 내재하는 도태(淘汰)의 맹목적 법칙을 따를 뿐인(우리가 있는 시점은 다윈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그 10년간이다!) 자연의 작동은, 더이상 창조적인 것의 총괄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 듯하다. 보들레르는 다른 곳에서 “자연은 상상력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부터 현대적인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자연에 따라서 혹은 자연처럼 창출할 수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이전에 낭만주의자는 숲의 복판을 자연의 천장과 성당으로 느꼈으며 그 숲의 나무들의 살랑이는 소리에서 신비스러운 산스크리트의 음조들을 듣는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현대적인 시인은 그러한 숲의 한가운데서 도시의 한층 더! 놀라운 시를 생각하게 된다. 그 때문에 보들레르는 도발적으로 두 편의 산 문시 「아침 어스름」과 「저녁 어스름」을 그 편지에 동봉해 보냈던 것이다. 현대적 풍경의 인공미―「낭만파의 지는 해」 이후의 풍경, 다시 말해서 「파리의 풍경」에 나오는 대도시 풍경―를 발견하려는 그 시들에서 ‘자연이라는 거창한 말’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여기서 처음 표명된 생각은 5년 뒤에 그 유명한 연작시(『악의 꽃들』) 중 가장 대담한 작품인 「파리의 꿈」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은 시로 구현된, 유기적 자연의 탈권능화의 비전이다. 그 시는 자연에 대한 평가 가 근본적으로 바뀜으로써 생겨난 현대의 서정시 및 미학에 있어서 최초의 도발적인 정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먼저 보들레르 이래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이 거부했던 것과 통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마지막 미적 형태로 존재하는 자연의 이상성, 다시 말해 숭고 함으로 드러나는 자연미의 소멸 단계에 있는 자연의 이상성에 대한 그들의 거부. 둘째, 자연과 문명의 루소적 반립명제, 즉 인간은 본래 선한데 사회화로 인해 타락해버렸다는 신념의 배척. 셋째, 주체와 자연, 감각적 경험과 초감각적 경험의 낭만적·감상적인 교감의 포기 등이다.

숨가쁘게 가속화되는 산업혁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미적 예술들의 템포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기술과 자연과학의 개선 행렬에 직면하여, 미학에서도 자연적인 것의 철저한 평가절하가 일어나며 동시에 상대적으로 인공적인 것의 평가절상이 이루어진다.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을 극복할 수 있는 현대적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자연을 단순한 질료로 여겼다. 그는 그 질료를 가공하여 자기 자신의 작품으로서 제2의 자연을 창조했으며, 또한 당시에 이미 자기 노동의 산물을 ‘산업 예술’로 고양시키기 시작했다. 산업 생산의 산물을 흉내내고 자연에 대한 미학의 지진(遲進)한 관계를 수정하려는 것이 시대에 부합하는 예술들의 도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러한 수정이 진보 신앙의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곧장 합류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지배라는 유토피아적 목표 자체를 다시 문제 삼았던 점이 바로 보들레르의 현대성 미학이 지니는 대단한 업적인 것이다. 그의 미학의 핵심 부분인 「파리의 꿈」은 자기를 재생산하는 자연의 마력에서 해방된 꿈의 세계, 전적으로 시적 건축사의 의지에 따라 구상된 꿈의 세계에 대한 시적 비전이! 자, 또한 그것이 ‘자연의 피안’에 대한 불안으로 급변하고, 그럼으로써 마지막에 자기 권능화(Selbsterm둩htigung)를 이룰 때 치르게 될, 생각지도 못했던 값비싼 대가를 시사하는 무시무시하고도 탁월한 비전이다.


파리의 꿈


I


인간이 일찍이 본 일도 없는,

그 무서운 경치의,

어렴풋하고 먼 이미지가, 오늘 아침에도 나를 호린다.


잠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지!

어떤 별난 변덕을 부려,

나는 그 구경거리들로부터

너저분한 식물을 몰아내고는,


내 천재를 뽐내는 화가인 나는,

금속의, 대리석의, 그리고 물의

도취하게 하는 단조로움을

내 그림 속에서 맛보고 있었다.


계단들과 아케이드들의 바벨탑,

그것은 광 없거나 광나는 황금 속으로

떨어지는 분수와 폭포들로 가득 찬,

하나의 끝없는 궁전이었으니;


수정의 커튼들처럼,

육중한 폭포들이,

금속의 절벽들에,

눈부시게 걸려들 있었다.


거인 같은 물요정들이,

여자들처럼 제 모습 비춰보는,

잠든 연못들은 나무들 아닌

줄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퍼런 물의 널따란 띠들이,

장밋빛과 초록빛 강둑 사이로,

이 세상 끝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수천만 리에 걸쳐;


그것은 엄청난 보석들이었고

마술의 물결들이었다;그것은

제가 반사하는 모든 것들로

눈부신 거창한 거울들이었으니!


하늘나라의 갠지스 강들이,

걱정도 없이 소리도 없이,

그 항아리의 보석을

금강석 구렁들에 쏟고 있었다.


내 꿈나라의 건축사인 나는,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보석들의 터널 아래로

길든 바다가 지나가게 했었다;


그래서 모두가, 검정색마저도,

윤나고 밝아 무지갯빛 같았고;

액체는 제 영광을 수정 같은

광선 속에 아로새기고 있었다.


사사로운 불빛으로 반짝이던,

그 기적들을 밝게 비춰줄,

딴 어떤 별도, 태양의 어떤 자취도

없었다, 심지어는 하늘 저 끝에도!


또 그 움직이며 바뀌는 불가사의들 위엔

영원한 고요가 감돌고 있었으니

(무시무시한 새로움! 모두가 눈요기!

귀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구나!)


II


불꽃 들어찬 내 눈을 다시 뜨자

보인 것은 끔찍스레 지저분한 내 방,

제정신 들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저주받은 시름들의 톡 쏘는 맛;


불길한 소리 내는 벽시계가

느닷없이 정오를 치고 있었고,

마비된 서글픈 누리 위로

하늘이 어둠을 뿌리고 있었다.


‘파리의 꿈’이라는 제목은, 도시에서 꾸는 도시의 꿈을, ‘19세기의 수도’인 그 파리에서만 가능했던 마술 환등(Phantasmagorie)의 꿈을 예고한다. 그 꿈은 현대적인 시학의 원칙, 즉 ‘의지적인 꿈꾸기’라는 보들레르 특유의 역설에서 생겨났다. 그 때문에 시의 창작은 ‘너저분한 식물’, 다시 말해서 모든 유기적 자연을 꿈의 풍경에서 몰아내는 독특한 마음 상태의 조건을 따라야 한다. 이로써 그 시에서 추방되는 것은 법칙적이고 경제적인 자연이 아니라 무정부적이고 낭비적인 자연, 노동과 기술과 과학의 객체로서의 질료가 아니라 헤겔이 ‘정신의 타자’라 불렀던 것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살아 있는 전체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미학적 평가 변경으로 인해, 그 영역의 전통적인 위계 질서가 뒤집힌다. 이 시가 나오기 직전 어느 동시대인이 요구한 바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물로서의 시는 생명에 대한 전도된 관계 속에서 미를 실현함으로써 신의 창조물을 진척시켜야 한다고 되어 있다.


자연 연구자는 자연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즉 맨 처음에 동물의 세계, 그 다음에 식물의 세계, 마지막에 무기물의 세계를 배치하는 식으로 정리한다. 그는 생명의 질서를 따른다. 시인은 맨 처음에 무기물의 세계, 그 다음에 식물의 세계, 마지막으로 동물의 세계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미의 질서를 따른다.


『악의 꽃들』의 시인은 마치 그가 유기적 생명과 추상화하는 미의 이러한 전도를 검증하려는 듯이, 금속과 대리석과 돌로 된, 여태 아무도 보지 못했던 자신의 풍경을 설계한다. 그 풍경의 ‘도취하게 하는 단조로움’으로 인해 낭만주의적인 ‘자연의 음악’은 사라지게 된다. 유기적인 생명이 없는 반낭만주의적 풍경의 꿈이 형태를 갖출 수 있기 위해서 모든 것이 제거되어야만 하는데, 특히 시에서 그것들은 부정되는 기대의 지평 속에서 환기되었다가 제거된다. 가령 ‘나무들 대신 오로지 줄기둥만’ 있고, 마치 앞에서 폭포들이 수정의 커튼들로 되듯이 수면도 번쩍거리는 거울로 된다. 자연의 강과 그 운행은 다채롭게 변해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되며, 바다는 보석들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색채들은 그 대상적 정체성을 상실해버려서 검은색조차 환하게 빛을 낼 수 있다. 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태양의 흔적도 전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인공적 풍경의 재료는 스스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지막의 무시무시한 새로움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이 모든 것들 위엔 영원한 침묵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눈을 ! 위한 것이지 귀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시구는, 일찍이 피타고라스의 천구화음설(天球和音說)의 기저에 놓여 있던 아주 오랜 기대감, 즉 운동이란 대체로 소리없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보들레르 스스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덧붙였다. “갈라놓고 분해하는 꿈이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절대적인 고요의 섬뜩함은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끔찍한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무시무시한 새로움’은 첫번째 시행의 ‘무서운 경치’를 다시 지니게 되는바, 맨 처음에는 ‘이 호사스러운 풍경’이 이를 대변했었다. 깨어나는 자는 필연적으로―우리는 이 변이(變移)에 릴케의 유명한 시구로 주석을 달 수 있는데―이러한 미(美)라는 것이 ‘끔찍한 것의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로지 비유기체적인 요소들로써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몽환극의 건축사’로서 꿈꾸는 주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성장한 풍경으로서의 자연―낭만주의적 자연 경험의 기초―을 분해시키고 있는지가 해석의 첫 단계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물어야 할 점은 그 환상의 건축술이 어떠한 지평을 되가리키고 있는지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금속, 대리석, 물로 만들어진 반대 세계는 다름아닌 그 ‘무시무시한 새로움’으로 역설적이게도 한층 이전의 아주 오래 된 전범, 즉 악몽과 같은 양상을 띤, 신화적 혹은 묵시록적인 세계 형상들의 전범을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꿈」은 인공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또한 인간의 작품을 신의 창조에 도전하는 마술 환등처럼 제시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마술 환등의 파괴적 전통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있다. 이에 선행했던 예로는, 미로 같은 정원의 인공낙원이 그려져 있는 에드가 앨런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 현대적인 바벨탑에 대한 환상들을 어둡게 그리고 있는 존 마틴(John Martin:영국 낭만주의 화가)의 그림, 『클레오파트라의 하룻밤』? 【?테오필 고티에가 행하는 궁정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의 항구> 혹은 나무나 식물이 전혀 없는 돌로 된 미로가 그려져 있는 <감 옥>의 작자인 피라네시(Piranesi:이탈리아의 판화가, 건축가, 예술이론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들레르의 꿈 풍경은 미로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이전 예술가들과는 달리 보冗뭏@?꿈 풍경은 주관성을 스스로 구축(構築)한 미로 속에 감금하지 않는다. 미의 반대 세계를 스스로 구축해내기 위해 우리의 눈앞에서 부단히 스스로를 넘어서는 동작들로 자연을 분해하고 있는 자아가 자기 자신의 한계까지도 부숴버리는 것, 바로 이것이 꿈으로 묘사되고 있다. ‘계단들과 아케이드들의 바벨탑’, 그리고 이 세상 끝을 향해 흐르는 물결들, 그 다음에는 항아리째로 붓듯이 보석들을 금강석의 구렁에 쏟아붓고 있는 하늘나라의 거대한 강물, 그것을 거슬러서 보석의 터널로 흘러들어가게 만들어진 바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환영으로서 빛을 발하는 검정색, 그리고―‘도취하게 하는 단조로움’을 완성하면서―자기가 구축한 세계의 광대 무변한 전체 위에 감도는 영원한 고요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보들레르의 반대 세계는 그것의 가장 오래 된 전범, 즉 요한 묵시록(21/22장:“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과 흡사해진다. 거기서 새로운 것, 결코 보여진 적이 없었던 것은 「파리의 꿈」에서처럼 낡은 유기적 자연의 피안에 있는 도시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 성곽은 벽옥(碧玉)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묵시록)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그 도시는 더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어린 양이 그 도시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 도시를―수정처럼 맑게(!)―흘러 지나가는 강의 양편에는 사원 대신에 생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나무들에는―자연을 능가하여―매달마다 열매가 열린다. 또한 새로운 예루살렘에서는 더이상 낮과 밤이 교체되지 않는다. 영원히 밝은 빛 속에 있는 그 도시는 “해나 달의 비춤이 쓸데없으니 그 까닭은 하느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묵시록) 마치 성경을 개작한 것처럼 보이는 보들레르의 시는 그러나 신앙의 신적 계시를 제거한다. 그것은 오로지 시의 세속적 계시만을 구축할 뿐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반대 세계의 인공미가 항구적으로 유? 層?수 없다는 것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부정된 자연은 생소한 힘을 띠고 억압된 자연으로서 복귀하며, 그 자연은 ‘숭고의 부정적 쾌감’(칸트)에 의해서도 더이상 포착될 수 없는 자연으로 나타난다. 꿈의 끝은 ‘이 무한한 공간들의 영원한 침묵’ 앞에서 파스칼이 느꼈던 전율을 복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구원자에 대한 희망이 없다. 환희에서 깨어나면서 대도시의 현실은 탈주술화되고, 이와 동시에 대도시 특유의 시적 경험(이것의 발견이 바로 「파리의 풍경」의 테마였다)은 부정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파리의 꿈」은 도시와 시골, 문명과 자연의 반립명제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 결국 보들레르의 자연 적대적인 현대성의 미학은―게오르크 마악(Georg Maag)의 테제에 따르면―산업적 진보의 낙관적 상태가 새로운 불안들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자기 자신의 부정을 내포하고 미의 유토피아와 아울러 이러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한 경악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는 데에 바로 보들레르의 저항적 구상의 특수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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