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738)
어떤 통화
― 서안나
지하철 안에서 사내가 목청을 높인다.
아 환장해 불겄네. 뭣이라고요. 사기꾼이라고야.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것네. 내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착하게 살아 불고 나쁜 짓은 안 해봤는디 사기꾼이라고요. 아따 선상 아무리 세상이 각박혀다고 혀도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었기로서니 말씀이 너무 심허시오. 나도 처자가 있는 사람인디. 다음주엔 꼭 보내준다고 허지 않소. 나도 거짓말은 싫어하는 사람인디. 세상이 날 거짓부렁하게 맹근다 안 하요. 그 머시냐 문어 대가리 같은 김 사장이 부도만 안 내부렀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소. 기다려 달라고 암 생각 없이 그 말을 믿은 게, 신용 사회를 믿은 게 내 잘못이구만. 뭣이라고요. 내일까지 갚아야한다는 말이요. 아, 참말로 환장해 불겄네.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은 거요. 발가락으로 들은 거요. 이보쇼. 아 이보쇼. 긍께 내일까지는 힘들당게요. 내가 돈을 맹글러 서울까지 왔응께 다음주까지만 기다려 주라고요. 아, 이보쇼… 이보쇼…
얼굴이 시뻘겋게 목청을 높이던 사내가 한숨을 쉬며 끄는 핸드폰.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리고 있다.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누가 IT강국 아니랄까봐 하나같이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많은데 때로는 영상을 보기도 하고 뭔가 읽기도 한다. 신문기사 혹은 검색한 정보를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아직도 마치 자기 집 안방인 양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공익광고를 통해 전철 안에서의 에티켓을 알려도, 알만한 사람들까지 전화를 걸고 받으며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 별 시답잖은 통화 내용을 듣고 있으려면 짜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안나의 시 <어떤 통화>도 전철 안에서의 전화 통화 내용이다. ‘지하철 안에서 사내가 목청을 높인다’는데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전철 안에서 통화를 할 만큼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다. 내용인 즉, 상대방이 사기꾼이라고 하는 말에 자신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방은 채권자로서 내일까지 갚으라고 요구하는 모양인데 사내는 다음 주까지만 기다려 달란다. 사내 역시 채권자이지만 사내에게 채무자인 김 사장이 부도를 내는 바람에 받을 돈을 받지 못해 생긴 일이다. 그 일로 사내는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는데 그럼에도 갚으려는 책임감에 서울까지 올라온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약속 날짜에 갚지 못했다고 해도 일주일만 기다려달라는데 사기꾼이라 했으니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언쟁 끝에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모양이다. ‘아, 이보쇼… 이보쇼…’하는 사내의 목청만 크게 울리는 전철 안이다. 결국 ‘얼굴이 시뻘겋게 목청을 높이던 사내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는다. 그 다음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리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이 사내는 물론 독자들 가슴까지 찌른다.
참 듣기 싫은 말이지만,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면 ‘사기’가 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쁘다. 분명 사내는 돈을 갚지 못했으니 ‘사기’죄에 해당되지만 정작 ‘사기꾼’이란 말에는 발끈할 수밖에 없다. 흔히 사람이 속이는 게 아니라 돈이 속인다고들 한다. 채무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돈보다는 사람이 속이는 경우도 많다. 그런 나쁜 사람들, 악질적인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전철 안에서 다른 승객들이 다 듣고 있는데 큰 소리로 하소연하며 목청을 높이는 사내. 비록 자신이 받을 돈은 받지 못했지만 갚아야 할 것은 갚으려 동분서주하며 서울까지 올라와 전철을 타고 있으니 그의 경우 그가 속인 것이 아니라 돈이 속인 것이리라.
그런데 어느 독자가 물었다. 이런 것도 시가 되냐고. 된다. 사내의 통화 내용은 소설이나 담화식 수필에 나올법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사내의 목소리 그대로 그것도 사내가 구사하는 사투리 그대로 제시하고 앞뒤로 상황을 배치했다. 배치된 상황을 서술한 문장에는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독자들이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 토막, 혹은 풍경 한 장면도 시가 된다.
‘지하철이 사내 얼굴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달리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이 결정적으로, 전철 안에서 들었던 채무관계 통화 내용을 한 편의 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살림살이들이 어렵다는 요즈음, 문득 시 속 사내에게 ‘즈이집 안방인가. 거 좀 조용하쇼!’라고 핀잔을 주기 보다는 어서 빨리 재기하기를 빌고 싶다. ♣
[출처] 서안나의 <어떤 통화>|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