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739)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꽃이 지는 모습을 보는 마음은 어떠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선은 ‘꽃비’란 말에서 보듯이 아름다울 것이요, 한 생명이 지는 것으로 본다면 안타까움을 넘어 서럽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시인들이 꽃이 지는 모습 - ‘낙화(洛花)’를 노래했다. 운명의 실타래 한 매듭이 끊지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요, 혹자는 열매를 맺기 위한 진통으로 보기도 했다. 그런데 조지훈의 시 <낙화>에서는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은 물론 이를 통해 달관의 경지까지 읽게 된다.
시는 전체 아홉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보면 한 단락이 세 개의 연씩 크게 세 단락이다. 첫 단락부터 보자. 뜰에 핀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 - 바람을 탓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꽃이 지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무엇을 탓해야 할까. 시 속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방 안에서 내다 본 뜰, 바로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있다고 한다. 즉 꽃이 짐과 함께 어둠이 진다. 여기에 더해 ‘귀촉도 울음 뒤에 / 머언 산이 다가서’고 있다. 방에서 내다 본 뜰은 지는 꽃과 함께 스러지는 별이 있고 먼 산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촛불을 꺼야하리 / 꽃이 지는데’는 도치로 읽힌다. 꽃이 지기에 촛불을 꺼야 되겠다는 뜻이다. 방 안이 어두워야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있는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만이 아니다. 별빛에 혹은 달빛에 꽃 지는 모습이 ‘하이얀 미닫이’에 비친다. 밤이니 미닫이에 비친 그림자는 흑백일 것이다. 시인은 이를 ‘우련 붉어라’고 한다. 정말 미닫이에 붉게 비쳤을까. 아니다, ‘우련하다’는 형태가 약간 나타나 보일 정도로 희미하다는 뜻이다. 즉, 붉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느낌에 그저 붉은 빛이 희미하게 도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여기서 시인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한다.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어하노니’라고. 시인은 지금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살고 있다. 이름하여 은자(隱者)이다. 자연 속에 홀로 사는 그에게 꽃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으리라. 그런데 꽃이 진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에 가득한 외로움을 다시 느끼지 않겠는가. 어쩌면 먼 옛날 선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선비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목숨의 덧없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시인…… 그러니 혹 알까 싶어 염려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할 것이리라. 그래서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고 한다.
결국 세 단락은 ‘뜰 → 방안 → 마음’으로 시상이 옮겨지며 그러한 공간의 이동에 따라 ‘낙화 → 낙화의 아름다움 → 은자의 고운 마음’으로 귀착된다. 여기에 ‘지기로소니’, ‘탓하랴’, ‘스러지고’, ‘저어하노니’ 등의 예스런 어휘들이 은자의 이미지와 어우러진다. 꽃이 지는 모습에 울고 싶다고 한 시인 - 이는 단순한 슬픔의 울음만은 아닐 것이다. ‘울고 싶어라’는 어쩌면 지는 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낙화’는 언젠가 닥칠 자신의 운명이요 그런 삶을 내어다보며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리라.
자연의 순환에 따라 꽃은 지는 것이다.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열매를 맺고……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니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알고 있는 은자의 독백이다. 여기에 자신의 삶까지 꽃으로 보고 있으니 ‘꽃이 지는 아침은’ 당연히 ‘울고 싶어라’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운명을 거역하겠다는 혹은 지금은 아니라는 반항이 없다. 오히려 시인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달관의 경지까지 나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