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740)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흔히 전생에 부부는 원수였고 남매는 친구였다고들 한다. 물론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점쟁이가 한 말인데 현실 속에 남매 사이가 좋은 경우를 볼 때 하는 말이다. 앞의 것은 잘 모르겠지만 내 딸과 아들을 보면 뒤에 말은 진실처럼 느껴진다. 자라면서도 늘 그랬는데 성인이 된 지금도 딸과 아들은 만나기만 하면 얼싸 안는다. 남매 혹은 오누이란 말보다 마치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만 같다.
김사인의 시 <오누이>에도 이렇게 다정한 남매가 등장한다. 시 속 화자가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만난 오누이 이야기이다. ‘여섯 살쯤 됐을까’ 싶은 계집아이와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이다. 둘이 버스를 타는데 오빠로 보이는 머스마가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동생을 데리고 어딘가 가는 모양인데 버스에 오를 때도 그렇고 올라타서도 여동생을 보살피는 오빠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빠는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는데 동생도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하다. 그러니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고 하지 않는가. 어린 아이들이니 둘이 충분히 앉을 수 있을 것이지만 오빠는 ‘됐어’ 하고 그대로 서 있다. 그러면서도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나도 잘 할 수 있어’란 말이 들어 있다.
여동생을 보살피는 오빠의 마음, 오빠를 챙겨주려는 여동생의 마음 - 참으로 보기 좋은 오누이의 모습이다. 화자는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 하, 그 모양 이뻐’ 보인다. 그런데 화자는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시에서 ‘채아무개’가 실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영안실이 아니라 죽은 지 몇 주기에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할 만큼 화자는 ‘채아무개’와 가까운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문득 화자는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가 된다. 그러니 ‘내내 멀쩡하던 눈에 / 그것들 보니 / 눈물 핑 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장례식이 아니라 추도식에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 - ‘채아무개’의 어린 남매도 그렇지 않았겠는가. 오빠는 동생을 걱정하고, 동생은 오빠를 챙기려는, 저런 아이들을 두고 떠난 ‘채아무개’를 생각하면 시인은 그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득 화자는 아니 시인은 아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도 죽고 없는 아비의 시선이다. 그러니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내내 멀쩡하던 시인의 눈에 왜 눈물이 고였을까? 죽은 이에 대한 서러움일까? 돌봐주는 이 없이 살아가는 어린 자식을 향한 서글픔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하나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어린 오누이는 지금 살아 있고, 그 살아 있음만으로도 시인은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 어느 평자의 말인데 시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다.
결국 버스에 탄 오누이를 바라보는 사람은 화자가 아니라 ‘채아무개’이다. 첫 연은 종종 볼 수 있는 오누이의 다정한 모습이지만, 둘째 연 때문에 화자의 눈을 빈 아버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오누이의 모습이 된다. 살아 있다면 저렇게 다정하게 커가는 오누이를 보며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런 생각에 화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죽은 ‘채아무개’를 불러내어 살아 있는 ‘오누이’를 연결시켜 시로 승화시킨 것이다. ♣
[출처] 김사인의 <오누이>|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