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詩 (742)
아들에게
―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젠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여자는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이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족관계 속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어쩌면 일방적인 짝사랑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문정희의 시 <아들에게>에는 아들을 짝사랑하는 어머니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의 제목이 ‘아들에게’이지만 아들이 읽고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들이 읽고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시를 따라가 보자. 시인이 여자이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말로 이해하기로 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부르며 ‘너와 나 사이에는 /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신이 살고 있다니. 그 다음 연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왜 어머니는 아들을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아들의 ‘뒷모습에 대고 /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면 간절함이라든가 기도를 통해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 바로 신에게 기대어 아들을 위하는 마음을 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 어느 어머니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열 달 뱃속에 품어 이 세상에 내어 놓은 후에는 그야말로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애지중지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다만 /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셨고, 그래서 ‘사랑 한 알에도 / 우주가 녹아들곤 했’단다.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기에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에게 잘 전달되었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워만 있을 때, 배밀이를 할 때, 걸음마를 할 때 아들에게는 늘 어머니의 손이 필요했다. 그러니 어머니의 아주 조그만 사랑도 그대로 전달이 된다.
그러나 아들이 훌쩍 크고 나면 어떨까.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머니보다는 급우들과 놀기를 좋아하고 중고교에 입학하면 어머니의 사랑은 잔소리로 듣게 된다. 이때쯤이면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어머니가 하기 힘든 일도 아들이 남자로서의 힘을 써서 돕기도 한다. 이럴 때에 사람들은 ‘듬직한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또한 뿌듯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이젠 쳐다보기만 해도 /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라 부른다. 청년이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젊은 사랑’일 것이리라. 물론 어머니만의 짝사랑이겠지만. 그러니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란 말이 나오게 된다. 어릴 때에는 사소한 사랑도 그대로 온전하게 전달이 되었지만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청년이 된 지금은 아들에게 아무리 간절한 기도와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려 해도 ‘무슨 신이 한 분’이 중간에 끼었는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시의 제목은 ‘아들에게’이지만 아들들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들이 읽고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왜 그럴까. 아들은 시 속에 나타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아들이 있는 어머니들은 모두가 다 ‘내 이야기’라 할 것이다. 얼굴을 맞대다가, 손을 잡다가, 옆모습만 보다가 어느 날부터는 아들의 뒷모습만 보게 되는 이 세상의 어머니들, 그들의 사랑을 아들은 언제쯤 알 수 있을까. 훗날, 아버지가 되어서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지 않겠는가. ♣
[출처] 문정희의 <아들에게>|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