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琵瑟山) 가는 길/조오현-
비슬산 굽잇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萬疊疊) 두루 적막(寂寞)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남지장사 가는 길/권 순-
흑염소 뿔에 저녁놀이 걸린다. 남자는 고시원 문을 나와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마가 붉다. 그는 염소전골 식당을 돌아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나는 언덕을 올라 산으로 든다. 절집 처마에 바람소리 차다. 공양간 툇마루에 모여 앉은 스님들 동안거에
들려는지, 바랑에 승물을 챙기며 고무신을 닦는다. 반질한 약탕기에 향 짙은 고뿔약을 달인다. 감나무 가지 끝에 마른 이파
리 몇 장이 나부낀다. 비를 머금은 바람 한 자락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허공과 집들 사이, 허공과 흑염소 사이, 앙상한 가지
들이 흔들린다. 잔가지 끝에 서넛 남은 까치밥이 붉다. 낮술에 거나해진 돌담집 할배는 텅텅대며 장대로 은행을 턴다. 지나
가던 지장보살 육환장이 나무에 걸린다. 찬 기운에 몸을 떨던 여린 것들이 그 아래 몸을 낮춘다.
-거울 속으로 난 길/김인구-
욕실 거울을 닦는데
거울 한 쪽이 닳아 있다
거울도 외로웠을까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정된 눈길을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을 내었다
아무나 볼 수 있지만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저만의 길을 내놓은 거울의 길속엔
오랜 슬픔으로 다독여진
깊은 상처가 웅크리고 있다
거울속의 길엔 볕이 들지 않는다.
응달 속,
햇볕을 담지 못한 여린 잎맥 사이로
배추흰나비 애벌레 한 마리 숨어든다
슬픔의 모퉁이만 갉아 먹고 자란 애벌레의 체액에는
한껏 슬픔을 이겨낸 쓸쓸함이 들어앉아
시간의 마디를 채워나간다
거울은 빠짐없이 그 시간의 마디를 닮은 길을
내게 보여준다
생의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정점에 닿아본 적이 있는 것들이란
가벼이 기억의 회로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듯
거울 속으로 난 길들은 모두 닮은 예각을 지니고 있다
마악 허물을 벗은 배추흰나비 한 마리
날개를 퍼덕여 거울 밖으로 날아오른다
-늙은 몸의 길/정운희-
생선 국물이 끊고 있다
매콤하게 우려낸 뼛속 길들이 풀어질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
엉뚱한 말들만 거칠게 끌어 올랐다
아직 저녁상을 차리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세월 위로 넘치고 있다
연신 끓어 넘치는 바다
헛기침하는 어머니의 빈자리
렌지 위로 흘러 빨갛게 길을 낸 식탁을 적시고
거실 바닥으로 흥건하게 스며들고 있다
이미 이생에서 바닥이 보이도록 넘쳐흘렀을
입가에 말라붙은 웃음과 빈 가죽의 울림
햇볕을 마중할 수 없는 절룩이는 걸음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지팡이로 끌어올리며
남은 길들을 한 올 한 올 꿰고 있다
냄비 속 허연 눈알이 풀리고 아가미로 삼켜진
지독한 열매와 냄새를 배설하고 있다
파란 불꽃 위에서 아버지의 바다는 무시로 졸여지고
밑바닥 타는 기침소리가 끊어진다
늦은 저녁상, 졸아붙은 냄비 속
짜디짠 아버지를 놓고 수저를 든다
-길 위/나기철-
널 안 보려니까 내가 아프다
그냥 그 길만 오고 갔다
길 위 가지만 남은 때죽나무 높고
그 위 섬광처럼 흰구름 떴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동백 잎만
수북이 내렸다
-길을 잃어야 新豊里가 보인다/정희성-
신풍리에는 돌이 많다.
성긴 구멍을 숭숭 뚫어 놓고
벌어진 앞니처럼 사람 좋아 보이게 뚫어 놓고
바람이 후후 열기를 식혀 낸 角돌이 많다
감귤꽃 휘날리는 돌담길이 많다.
신풍리에는 돌만큼 나무가 많다
무릎만 한 굴뚝을 세우고
낮은 처마에 제비를 들이기 전부터
자기들끼리 척척 땅을 갈라 잘 붙여 먹어 온
수백 년 동백나무들이 많다.
신풍리에는 나무만큼 山물이 많다
한라산 내린 물 밤 도와 달려와
한세상 먹먹한 가슴을 적실 때쯤
밥 한 끼 먹고 가자고
山물처럼 시원한 목청이 많다.
날마다 해마다 부요한 마을이라 신풍리
서귀포 성산하고도 신풍리에는
길을 잃어야 비로소 보이는
門 없는 門이 많다.
사람이 금보다 귀해
사람다운 사람들이
門마다 많다.
-눈 먼 노파에게 길을 묻다/박홍점-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밤낮으로 뒤집어져 궁리하다가
길을 알려준다는 눈 먼 늙은 노파를 찾아 간다
그녀는 나에게 꼭 시집만한 빈 공책 두 권을 건네며 돌아가란다
답을 얻으러 갔다가
질문만 받아 온 셈
도대체 뭐라는 거야?
석 달 열흘 누워 생각하다가
햇빛 쨍한 봄날 날 잡아 다시 갔더니
이번에는 손잡이가 있는 막대기 하나 건네며 돌아가란다
어쩌라고 도대체?
그때 느닷없이 마른 하늘에 빗방울이 두 두 두 둑
횡단보도 앞 애꿎은 한련화 수북한 화분을 내리쳤는데
글쎄 막대기가 활짝 펴져 우산인 것이다
한 손에 우산 들고
한 손에 펼쳐보지도 못한 공책 두 권 감싸 안고
이제 우산이 펜이 될 차례인가?
공책과 공책을 잇는 다리가 될까?
교환 일기를 쓰듯 너와 나를 잇는 사랑이 될까?
묻고 또 묻는 사이
손톱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밤낮으로 올빼미가 째각거린다 나는 여전히 살고 있는 중이다
-먼 길/박 철-
갈 길 멀다 해도 혼자 가는 길은 없다 가뭇없는 외줄기 찬바람만 인다 해도 누군가 앞서가고 꼭 누군가 뒤따라온다 우지 마
라 언젠가 마주칠 테니 함께 가는 길도 없다 피로 나눈 언약이어도 바람이 틈을 만들어 갈라놓거나 저녁 어스름 노을 타는
향기가 스며들어 우리를 시기한다 부여잡고 부여잡아도 손끝은 멀어져가고 다시 이 몸 앞서고 너는 뒤따라와야 하니 인생
이란 참으로 멀고도 길구나 바람소리 사울거려 눈빛 부신 새벽녘 나는 길 위에 서고 마주할 이 없어 미소짓는 저녁 여기 먼
길 바라보며 너를 향해 걷는다 나 말했던가 지상에 없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림자 없으므로 더욱 아쉬운 우리들의 한낮 지상
에 없으므로 어디에도 살아오고 하늘 날지 않아도 하늘 깊은 줄 아는 천둥벌거숭이 오늘도 당신 없이 꿈을 꾸는 이 길 갈 길
멀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영원히 돌아갈 곳 없는 우리이기에
-바다로 가는 먼 길/강상윤-
주상 절리를 보러 간다
뜬밭 흙길에 먼지가 풀풀 날린다
다리 아프신 어머니 모시고
쉬엄쉬엄 걷다 보니 흙먼지 속에
봄 햇살이 따갑다
바닷가로 이어진 언덕,
소나무 아래에는 관광객들이
예전의 무장대처럼 모여 쉬고 있다
저 언덕길을 넘어서면 아름다운
중문리 해안이 나올까
돌기둥들이 켜켜로 세워지고
태평양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을까
저 언덕길을 넘어서면
어머니 한숨도 트여질까
언덕길 넘어서면
관광객들의 마음도 시원하게 뚫릴까
예전의 무장대들은 어땠을까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자꾸 뒤쳐지면서
해안으로 가는 길이 자꾸만
멀어지기를 바란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트여지고
뚫어질 것 같지 않기에 그냥 어머님이
하시자는 대로 한다
바다로 가는 먼 길
인생길이므로.
-수도원에서 길을 잃다/이애정-
갈 수 없는 곳을 가고자
한다.
세월을 계단 삼아 떠나 볼까
돌아오고 싶지 않아서
길을 나선다.
중년의 여자
떠난 빈 자리는
엊저녁 써놓은
엽서 한 장
뒤돌아 본 길은
사막도, 길도
끝이 없는데
어디서는 태어나고
어디서는 죽고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
박혀있는 시간들을 외면한 채
입구도 출구도 없는
수도원에서
길을 잃었다.
-山經 가는 길/송찬호-
저 행복한 동물원 가족들
귀여운 토끼 귀, 쫑긋과
앙증맞은 여우 신발, 사뿐히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동백꽃 보러 간다
아빠, 동백은 어떻게 생겼어요,
곰 아저씨처럼 무서워요?
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
그런 부리부리한 동백들이
앞발을 번쩍 들고
이만큼 높이에서 피어 있단다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
집을 찢고
아버지를 찢고
나뭇가지를 찢고 나와
이렇게
불끈, 모두 산경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와온(臥溫) 가는 길/곽재구-
보라색의 눈물을 뒤집어쓴 한 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궁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닷가 마을의 언덕에는 한 뙈기의 홍화꽃밭이 있다
눈먼 늙은 쪽물쟁이가 우두커니 서 있던 갯벌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워진 호수가 나온다
-길을 가며/유석우-
그가 떠난 후
나도 길을 나선다
사방 도시 길에서도
길은 없다
그가 비껴간 그날부터
넓은 천지에도
가질 게 없는데
우린 서로 너무 가지려 했다
가슴속 피 한방울이면
족할 사랑을
온 생애로 다 가지려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그 바람 따라가면
길이 있겠지
그러면 비껴가던
그 작은 어깨에 얹힌 슬픔도
볼 수 있겠지
-길을 가다 서있는 나무에게/정공량-
길을 가다 서 있는 나무에게 묻는다.
길의 상처를 달래 주는 몇 그루 나무에게 묻는다.
상처는 달고,달기 전에 쓰고
쓰기 전에 매웁다고
모든 그리움은 쉽게 그러나 더욱 아쉽게
끝나고 마는 세월 속의 이야기라고.
길을 가다 서 있는 나무에게 묻는다.
내 상처 내 마음의 흔적을
아직 빛나는 어느 날의 기억을,
지울 수 없어 세월에게 묻는다.
길은 길며,
내일은 멀고,
오늘은 짧으며
나를,
세월은 기다리지 않는다고.
-적천사 가는 길/서규정-
수경아 산천은 온통 푸르름이다
淸道에 내려 소싸움 터를 혼자 어슬렁거리다
묻고 물어 적천사 가는 길
수도 없이 기차를 잡아먹는
뱀굴 같은 터널을 옆구리에 끼고,
사천왕의 입술보다 붉은 표지판을 따라가면
직각이었다
뱀굴에서 설익어 나온 기차가 악을 쓰며 벌겋게 벗겨져 가는
건널목에 서서 우리 삶이 빛나는 건
누구에겐가 제대로 먹혔을 때가 아닐까 생각했다
직각의 모퉁이에 기댄 어깨야
언젠가는 돌고 돌아 둥그런 마을도 만들 테지만
산다는 것의 배려란 가령 이런 것이리
내 몸은 불볕에 타도 옆 사람 타지 않게
양산을 바쳐주듯
내 몸을 그림자에게 주고
훌훌히 떠나는 모습을, 이 땅에 누가 다시 복사하는가
뜨겁다, 저 이발소 그늘 밑에 모여 노는 노인들의
쭈글쭈글한 껍질이 몸에서 제일로 멀 듯, 헐렁한 껍질은 아득타
질기고 질긴 가죽에 대한 예의 같은
예리한 면도솜씨와 땀과 피와 눈물
맨 나중엔 다 방울의 것인, 방울 속을 들켜서 살아간다
우린 모두 들켜야 산다
다음 세상을 기약하는 모퉁이의 지혜와
땡볕을 지탱해주던 그림자의 서슬에 기대어
어느 각도에 서건
마음 편편한 자리 한곳을 버섯처럼 돌고 돌 수 있다면
물 그친 적천사 계곡을 따라
푸른 산 빛을 조금만 들추면
비로소 생의 발원을 다시 잡을 것 같다, 이슬
수경아 우리는 서로를 흐르고 있다
-몽골초원 스냅-테렐지* 가는 길/차영호-
외줄기 선로를 베고 누워
기일게 하품하는
지평선
석양은
덥수룩한 종마의 갈기 너머
갈치조림처럼 보글거리고
나는
내가 기착해야 할 저녁을
손차양하고 내다보고 있었지
저녁참으로 말젖을 끓이다 말고
해끗해끗 눈시울 훔치며 웃는
두메양귀비
내 귓바퀴 좁쌀알 매만지며 속닥이더군
초원에는 애당초 길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 새삼스럽게 잃어버릴 길 따윈 없는 거지
*Terelji : 몽골의 국립공원 이름. 수도 올란바트로 북동쪽 80km 지점 헨티산맥 기슭에 있음.
-길 위의 행려(行旅)/도순태-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과속으로 달려온 눈앞의 길이
모니터 속으로 더 빠르게 사라졌다
경계의 속단추를 촘촘하게 채운 길은
멈추고 싶은, 내리고 싶은
곡경(曲徑)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사라진 길에서 길을 찾는다
예던 길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 많던 길은 어디로 가버렸나?
새로 생긴 고가도로가 수상하다?
산속으로 달아나는 저 길이 수상하다?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인공위성처럼
새로운 은하계에 빠르게 진입한 모양이다
내 안의 길은 이미 삭제됐다
눈으로 추억하는 기억의 순례는 끝났다
나는 좌표를 잃은 길 위의 행려(行旅)일 뿐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U턴을 해도 그 길도 이미 낮선 길이다
이미 이 길 위의 길 잃은 이방인이다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