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길/박무웅-
달마는 가랑잎을 뗏목으로 삼아
바람 부는 강을 건넜다
하늘에서는 먹장구름이 내려오고
내가 걸어온 길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시간의 망망대해를 걸어가는 방랑자
흩어지는 허공을 걸어가는 雲水衲子
달마의 길은 마음속에 있었다
부릅뜬 눈을 사방에 두고
꽉 막힌 벽 속을 돌아다니다 돌아오는
面壁을 견뎠다 한다
바다도 벽도 모두 하나인 달마의 길은
내 마음속에서 번갯불처럼 빛을 넣어주었다
격랑의 운명처럼
가랑잎 하나 내게로 올 때
달마처럼 강을 건너 피안으로 가야 한다
내 등을 내가 등 지고
내 눈을 船頭로 삼아 파도를 건너야 한다
-길 밖에서/이문재-
네가 길이라면 나는 길
밖이다 헝겊 같은 바람 치렁거리고
마음은 한켠으로 불려다닌다
부드럽다고 중얼대며
길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푸른잎새들이 있다 햇살이
비치는 헝겊에 붙어, 말라가는
기억들 가벼워라
너는 한때 날 가로수라고
말했었다, 길가 가로수
그래, 그리하여 전군가도의 벚꽃쯤은
됐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봄날의
한나절 꽃들의 투신 앞에서
소스라치는 절망과 절망의 그 다음만 같은
화사함을 어쩌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길의 밖일 때
너는 길이었다
내가 꽃을 퍼부어대는 가로수일 때
너는 내달려가는 길, 아니
그위의 바퀴 같은 것이었으니
오히려 길밖이 넓다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넓고 넓다
-해이리 가는 길/이길원-
이제 돌아가련다. 노을이 지기 전에
빈 수례 자갈길 넘듯 덜컹거리며
때로는 술 취한 사람 휘청거리듯
길을 잃기도 하고
가는 곳 어디인지 모르며 헤매던 길
잠시 벗어나 해이리로 가련다
내게 절망이 있었다면
그만큼의 희망도 있었을 게다
절망의 깊이만큼 기어오를
傲氣 또한 있었을 게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가슴이 시리도록 고운
해이리 노을 앞에 서련다
그리곤
시간의 저편과 삶의 저편을 보리라
-길/이기철-
질경이도 피고 배암풀도 돋고 노루귀꽃도 피고 애기똥풀도 돋고
돌멩이도 구르고 나비도 날고 여치도 숨고 라일락도 피고
능금나무도 크고 모래도 구르고 구름 그림자도 내리고 앉은뱅이꽃도 피고
강아지 발자국도 찍히고 쇠똥도 마르고 멧새 울음도 들리고 도랑물도 흐르고
햇볕도 내리고 낮달도 뜨고 호박벌도 날고 비단벌레도 숨고
-아직 가지 않은 길/고 은-
이제 다 왔다고 말하지 말자
천리 만리였건만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행여 날 저물어
하룻밤 잠든 짐승으로 새우고 나면
더 멀리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동안의 친구였던 외로움일지라도
어찌 그것이 외로움뿐이었으랴
그것이야말로 세상이었고
아직 가지 않은 길
그것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세상이리라
바람이 분다
-바다로 가는 서른 세 번째 길/박용하-
굴참나무 너머 자작나무 숲이 아름다운 밤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태풍이 그 나무 속에 있다
나는 길 위에 있고 파도는 길 밑의 길까지 밀려온다
나는 태양을 향해 걷고
태양은 내가 걷지 않는 길까지도 걷는다
그것을 음악이라 이름 부르면 삶은 깊어진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단지 세 그루의 나무만 서 있다
나무에 영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영혼에도
나무 세 그루는 서 있다
이 길 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대가 이 세상 한구석에 골목처럼 접혀 있어도
구석은 이미 보석과 같다
나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밑의 사랑 위에 있다
태양의 빛이 끝나는 길 위에는 달빛의 길 또한 흐르고 있고
수평선이 하늘로 빠지는 다섯 번째 둔덕에서 부는 휘파람은 스산하다
그때 내가 읽었던 소설은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이다
소설은 내가 숲으로 가는 열한 번째 길 바깥에서
사람이 가장 나중에 사랑해야 할 것이
여자라고 씌여 있던 소설은 적요하다
길 위에서는 돌을 사랑하고 돌을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읽고
일곱 번째 바람이 부는 저녁 그 돌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돌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 강물의 창문은 하늘을 위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대를 위한 것이다
바람이 알맞게 불고 봄 저녁이었고
포구에는 배가 불빛에 지치고 있었다
자작나무 너머 사람이 아름다운 저녁이 있고
그 숲을 지나 지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있는 자전거가 아름다운 날이다
나는 바다로 가는 길 위에 있고
그대는 내가 가는 길 끝에 있다
나는 그 길을 가장 낮은 천국으로 가는 첫 번 째 길이라고 이름 불렀다
-미술관 가는 길/권은주-
동물원이 있던 자리
길엔 서로 익숙해지기로 한 나무들
제 한숨을 털어놓을 만큼
꼭 그 만큼의 그늘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스럽게 자라났을
누군가
나무 그늘을 어깨에 걸치면서 미술관에 들어섰다
빈 우리가 있었던 자리
처음엔 거친 야생의 공간
벽면에 하나씩 걸린 그림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수없이 으르렁거리고 탈출을 꿈꾸며
서성이던
푸른 눈
그것을 소재로 한
차갑고 쓸쓸한 밑바탕
그 위에 덧칠해 놓은
우아하게 웃고 있는 인물
한가한 풍경
빛의 각도
붓의 터치
색깔의 감도
서로 돕는 구도에 따른
이젠 시점이 넉넉해진 시간의 기억
동물원이 있던 자리 미술관
그녀라는 미술관
-은각사 가는 길/윤제림-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와 아직 그렇게
온통 하얗지는 않은 여자가 찻길을 건넌다.
어린 오누이처럼 손을 꼭 붙잡고,
남은 팔은 하늘 향해 치켜들고.
느릿느릿 햇살의 여울을 건너는
은어 두 마리.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더 예쁠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더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가는 길/허형만-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실성했다 해도
허파에 바람 들었다 해도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내 가는 길
훤히 트이어 잘 보이므로
-길을 길들이는 법/심언주-
함께 걷던 `거리'가 있다
함께였는데 `거리'를 둔다
징글벨이 우리는 `거리'
벚꽃이 혼자 피는 `거리'
넘어올 수 있는 `길'
넘어가지 못하는 `길'
`길'들을 한데 모아
점선을 따라 접는다
실선을 따라 오린다
잘게 자른다
뿌린다
수북이
꽃잎이 지고
두근거림도 수건거림도
낙엽으로 쌓여 썩은
땅 위에
꽃씨들이 풀씨들이
자라
발목을 뒤덮고
허리를 휘감고
마침내는
머리맡까지 우거질 때까지
-검고 딱딱한 길 위를 건너가던 중이었다/안이삭-
사람이 신기한 듯 내려다본다
나도 잠깐 발을 멈추고 눈을 마주친다
지나가던 구름도 무슨 일인가 기웃거린다
정지한 풍경 속으로 달짝지근한 냄새가 스민다
누가 나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깊이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그의 몸은 하나의 거대한 물기둥이다
조금만 더 허리를 굽히면
출렁거리다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나는 가던 길을 간다
내가 가는 곳은
보라색 봄까치꽃 사이로 열린 둥글고 말랑말랑한 세계
그도 몇 발짝 망설이다가
가던 길을 간다
물웅덩이에 종아리까지 담그고 해찰하던 그림자가
얼른 쫓아간다
사람의 길과 도마뱀의 길이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순간이다
-돌아오는 길/나태주-
점심 모임을 갖고 돌아오면서
짬짬이 시간
돌아오는 길에 들러본 집이 좋았고
만난 사람은 더 좋았다
혼자서 오래 산 사람
오래 살았지만 외로움을 잘 챙겼고
그러므로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
마주 앉아 마신 향기로운 차가 좋았고
서로 웃으며 나눈 이야기는 더욱 좋았다
우리네 일생도 그렇게
끝자락이 더 좋았다고 향기로웠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가을이 가는 길에/김형범-
이른 아침
배롱나무 조화가 놓여있다
가을 길섶 들국화
어린 미망인의 울음을 달랜다
목 빼고 먼 동구 밖 길만 바라보던
해바라기 고개 떨구고
아카시나무 가지 끝에 홀로 앉아 있는 비둘기
멍하니 빈집만 바라본다
오동나무는 밤새 쓴 연서 둘둘 말아 우체통에 넣고
주저리주저리 움켜만 쥐고 있던 굴참나무도
산 다람쥐에게 보시를 한다
떠난다는 건 모든 걸 버리는 것인가
검은 그림자만 가져가고
빈 가슴에
가을빛을 당겨 안아본다
시퍼런 가을 하늘이 섬뜩하다
-꿈길에서도 길은 어긋나고/박남준-
오랜 길가에 서면 간절하게 밀려오는 사람
비가 내려야 온몸 젖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 떠나온 많은 날에도 잠들지 않고
천천히 아주 깊어져서 숲은 잠겨가고
취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
길 끝에서 돌아오면 산중 가득 눕지 않고 서성이는
어둠들의 그 수목 같은 목 긴 기다림
쓰러지며 내게 안겨 무너져올 파도 같은 울음
차마 볼 수 없어서
서둘러 불 밝힐 수 없어서 발길 돌리면
길은 다시 정처없고
참 아득하다 별들
낡을 대로 이미 바랜 꿈 하나
아름답다 그대만이 나의 그리움이던 목숨이던 날들
갈 곳 없는데 이제 지쳐 돌아갈 수 없는데
왜 나는 아직껏 버리지 못하는 것이냐
비틀거리며 끌어안고
흔들리는 것이냐
<돌샘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