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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25)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07|조회수54 목록 댓글 0

-아잔타* 가는 길/안영희-

 

첼로화 자귀꽃 부겐베리아
그리고 이슬 젖히는 저 이름 모를 꽃들
창 아래서 함께 했음 잠을 깬 다음에야 알고
감동한 하룻밤을 두고, 우리 실은 자동차 홀로
아우랑가바드의 첫 아침을 가를 때,
올리브 숲에서 솟는 인디아의 태양은
차마 마주 할 수 없는 자홍의 만조滿朝
지워지고 있는 서사시 읽고 가라 읽고 가라, 안타까이
시인의 이름을 부르는 이슬람 묘지의 부식하고 있는 빗돌들 흙방
문턱에 목 걸치고 염소젖을 짜는 어미
물끄러미 내다보는 먹포도 빛 눈동자
땋은 머리도 단아한 흑발의 소녀들
밀밭 첫 초록 사열하며 책을 안고 가는
아아, 시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던가요
기원전 2500년 늙은 땅이 이슬 털며
저리 부신 또 하나 후생後生으로 태어나고 있는
이 아침 세상으로
나를 마중하고 계신가요 당신?


* 아잔타는 길이600미터에 30개나 되는 불교 동굴사원으로,

그 벽화와 조각상들은 세계 불교미술의 원류라고 함

 

-물의 종점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황학주-​​

바다에도 종점이 있고

디딜 때 시큰해지는 종점은 대부분 밤에 많다

집으로 기어가는 사람이 등장하는 밤

종점이 있어 항구의 변두리가 밝다

불이 켜지지 않은 채로 불빛이 스며 나오는

내 마음에 처음 찍힌 발자국은

종점과 함께 내 사랑에 있었다

 

‘박란 슈퍼’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생수를 마시며

폭풍일 뿐인 능선을 생각한다

선박 수리소의 검은 배 하나가 바다로 가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나처럼 구옥을 유지하고 본래의 돌산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줄어간다

종점과 스칠 때처럼 나는 웃음을 흘리며 돌산 골목을 오른다

작은 노인들이 구부러진 등을 고집하며 사는 비탈엔

조개껍데기 깔린 길마다 조개껍데기 같은 별 그림자들이 많다

 

문득 가는 빗방울이 떨어져

손바닥에 받아 본다 연필을 쥐고 생각하듯

한 빗방울을 받아 쥔다 이 빗방울은 짐을 싸든 채

한없이 밤길을 내려오다 해쓱해진 것이다 한번만 그어지는 성냥불을 써버리고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잠들어버리는 시처럼

 

한 번씩 하품이 백발을 늘어뜨리며 간다

문득 하얗게 밤꽃을 뒤집어쓰고 있는 밤나무와 만난다

일생 백설을 연습한 듯 꽃을 줄줄 흘리다 고인이 될 것 같은 고목,

지상의 높은 한 종점에

흰 포말을 풀어놓은 바다가 비릿하고

잃어버린 것을 닮아 아름다워진 고목의 그늘을 지나면 집이었다

 

가족사진이 지갑에서 빠진 줄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가 있다

바다로 가는 동안

태풍도 하냥 집으로 가는 한 벗이겠다

 

 

-믿음으로 가는 길/이원숙-

길은 좁고 멀었습니다.
동굴의 명암 속으로 사라져간 흐릿한 꼬리
방향을 감지할 수 없는 끝
모리아 산의 황량한 모래바람
본토를 떠나가던 이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음영(陰影)이 내리는 길
뾰족한 돌부리가 지뢰밭처럼 낭자하게
가는 길을 막아서지만
아픈 발길을 돌이키지 않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이
순종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마지막 고비인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어디선가 거친 바람결에 쓸려
나무가 쓰러지듯 부딪칩니다.
쏴 -아 -
태초의 말씀을 읊어내는 소리
살아있는 에덴의 기억이 본능처럼 꿈틀거릴 때
몰려오는 쳇바퀴의 공포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은
인간의 한계를 뒤집어쓰고 엎드렸습니다.
뿌연 흙먼지 속에 숨어 외식(外飾)하는 무덤
회칠한 영혼은 목이 마릅니다.

말간 연무가 숲의 허리에 걸려 똬리를 틀고 있는
후퇴할 곳이 없는 외길
홍해의 심장부를 건너던 이스라엘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없었던 그들의 광야가 선합니다.
혼란이 난무했던 선민(選民)의 과거가 보여주는 증거의 길 따라
타성(惰性)으로 가득 찬 아집(我執)의 영역이
가시처럼 박혀 보이지 않는 길을
곤고함으로 가득 찬 상상마저 아끼고 갑니다.

맑은 오후, 레마가 흐르는 강가
징검다리는 띄엄띄엄 시간의 흔적을 깔고
숨어있는 만남을 그리워하며 흘러갑니다.
그리움이 비처럼 내리면 하얀 꽃잎들이 수없이 집니다.
꽃비 내리는 하얀 언덕
향기로운 꽃들이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본향을 향하는 향수가 떠나가는 다리 밑에서.

 

 

-물 위의 길/조용미-

  

바람이 일어

수로(水路위에 또 물길이 곱게 생겨난다

물 위에 일어나는

물의 길

물에는 무슨 길이 저리 많은지

물은 무슨 길들을 저렇게도 많이 숨기고 있는지

저 많은 길들을

동그랗게 하나로 모으는

사람이 오래도록 외롭게 서 있는

그 언저리

물 위로 난 길들이

사람의 길이 될 수는 없어

쓸쓸함이 멀리 번져 나가는

그 반짝이는 해질 무렵의 수많은 길들이

 

 

-왕릉 가는 길/박형권- 

 

 각진 사내 네 명이 난전에 쭈그리고 앉아 순대국밥을 먹는다 저민 인생

같은 돼지창자가 김을 피워 올리고 넙데데한 사발로 막걸리 한잔 씩 돌려

마신다 구멍 난 밀가루 자루처럼 눈이 흩날려 해작거려놓은 막걸리 사발

이 팥빙수처럼 솟는다 함부로 내돌렸던 사내들의 귀두부처럼 솟는다 오

늘 하루 일당을 반으로 깎아 내리는 눈이어서 숏타임을 뛴 것처럼 수전증

이 도진다 이렇게 폭포수로 쏟아지는 눈 속에서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차 잘 생각나지 않는다 새우젓 내가 나는 그녀들의 앙가슴은 이미 잊었

지만 순대국밥의 묽은 국물에 새우젓 털어 넣는 것은 여전히 잊지 않았다

툭툭 썬 돼지 내장이 가리전하지 않은 것처럼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

지 않는다 사내들은 아름다운 것들과는 오래 전에 이별하였고 돼지 간을

씹으며 간경화를 치유한다 사내들이 가야 파장할 터인데 눈이 이렇게 젊

은 계집들의 오줌발처럼 내리면 순대할미는 나비를 잡는지 손을 들어 허

공을 젓는다 사내들이 돼지허파의 바람 맛을 삼키는 사이 빈 그릇에 다시

하얗고 둥그스름한 무덤들이 생겨난다 이런 무덤이라면 사내들은 들어

가서 곤히 잠들고 싶다 오천 오백 원에 술 한 잔 곁들인 길 위의 휴식에게

도 하얀 무령왕릉 한 채씩 분양되는 이런 날에는 생을 있는 그대로 긍정

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바꾸어 보았지만 늘 그 자리에서 눈밥을 먹게 되

는 사내들의 왕릉 가는 길

 

 

-충남슈퍼 가는 길/박일환- 

 

동네슈퍼가 발을 동동 구른다

대형마트 때문에 죽겠다고 울상을 짓는다

덩치 큰 놈들만 먹고 살라고 할 수는 없지

나라도 동네슈퍼를 애용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충남슈퍼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자주 드나들던 단골은 아니지만

소설 쓰는 인휘 형하고

캔맥주를 사서 마시기도 하던 그곳

주인하고 싸운 것도 아니고

물건 값이 비싸서도 아니지만

다시는 찾을 일이 없기를 빌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쁜 마음으로 가야겠다

가산디지털단지 역에서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충남슈퍼 앞에서 내려달라고 해야겠다

공장 앞 컨테이너에서, 경비실 옥상에서, 포클레인 위에서

1895일 버틴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이

마침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며

승리보고대회란 걸 한다고 하니

가서 막걸릿잔이라도 함께 부딪쳐야겠다

 

언제나 막막하고 슬프고 화가 나던

충남슈퍼 가는 길

안녕, 이제는 안녕!

한껏 유치해져도 좋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자적(自適 )길이다 4 /김두환

 

도심都心 소리들에 맘이 떠나서

찾아 찾아 멀어도 산간 깊은 데

개울 가 동천洞天 잡았다. 

 

개울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꽃들 웃음 소리와

나뭇가지들 합종하는 소리소리 뒷소리들

맘들어 맘놓여 절로 점점 틀수해진다

도심 소리는 칼을 휘둘렀는데

산간 소리는 거문고 뜯어 댄다 

 

도심 소리엔 불을 받았는데

산간 소리엔 안태 슬그미 드솟는다

정도 각각 흉 각각이라더니 들리며

부침하는 대로 여러 맑고 은은한

정가情歌 정玎 움실거리다 감아 대는데

건너편 먹바위도 알고도 내색 없지만

스스로 몸닦달에 더 몰두하느라고

하늘땅 신령 앞에 기도하고 있고

곱다란 무지개는 길게 치렁치렁 입고

목청 한껏 높여 춤곡曲 뽑아 뽑다

안가랑도 돌리다 달마 혼령도 불러낸다

사방 모두는 마뜩이 선정禪定 속이다

드디어 나한테 회두리야 아마도

남은 방귀까지 뀌고 나서

진지하게 조용히 오롯이

속맘을 우선 도시는 일만인갑다 

 

*동천洞天: 산천 경치가 좋게 둘러싼 곳.

정玎: 옥玉이 울리는 소리.

 

 

-자적(自適 )길이다 5/김두환- 

 
저수지라지만 하도 넓고 깊어서
눈길은 가물가물 끝을 찾지 못하고
더듬더듬 수평선 따라가며 좇다가
너머로 스르르 사라지니 빠지니
호수 아닌가 발리듯이 헤쳐본다

 

하늘이 들앉아 생긋 눈웃음에
손짓 쳐들고 돌리며 무얼 가르친다

 

달 별들도 둘러앉아 말 없이
묵상 하는지 점지해 주는지 막는지
꼿꼿하지만 이따금 끄덕거린다

 

눈가량 앞에 수면엔 얼비치는데
내 머리빡 흔들리면서 자맥질한다
뒤론 잉어인가 붕어인가 착착 부닐면서
눈빛을 앞에다 밝히고 아직 더 꾸준히
‘이것저것’ 씻어내라고 채근한다

 

아아, 조마경(照魔鏡)이다 맞다
숨김 없이 다 털어놓아야 한다
뒤집어서도 재앙쳐야 한다 그때야
조민하거나 조바심하지 않고 더구나
발매놀지 않고도 보기 좋게 당당히
그 길 통과할 수 있는 거다

 

 

-자적(自適 )길이다 6 /김두환

 

삼각산三角山 말바위 딛고 서 있는

노송老松은 스스로 나이도 잊고서

지키고 있는가

굽어보고 있는가

썰레놓고 있는가

 

심지心地 그 심지心志 그 심지深旨

그 심지深智 해 거듭할수록 깊어졌는지

웬만큼 해낙낙해졌는지 더 말이 없이

꼬장꼬장해져 절대경 속 꼬치꼬치

눈빛만 넓게 잡아 먼장질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잊지 않고 끊어지지 않게

망궐례 올리는 일 챙기기도 하니

 

얼핏 보긴

암암暗暗하지만 암암黯黯하지만

때론 꾹 감고 귓구멍엔 안테나 높이고

바깥일 이전투구 암암 하게 눌러듣다가

잘 삭이고 가려내는 데 좌떠 붙이는

풍미風味 그 풍미 味는 암암巖巖하여

되레 깊숙이 풀어내서 덕음까지 받아

그참에 무장 거늑하게 쓸리지 않게

넌출진다 더디 야스락거린다 수수꾼다

 

*덕음德音: 좋은 평판.

 

 

-환한 길 하나/김병호- 

 

홍제동 봄산부인과 병원 앞
수줍은 아내와 난감한 나는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는데

 

아이가 먼저 닿아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산기슭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호랑이를 맨발로 안으셨고
처제는 무지개 환한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깨물었다고 하고
시골의 처외할머니는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꽃뱀 한 마리를 치마에 담으셨단다

 

호랑이로 복숭아로 꽃뱀으로
깜깜한 길을 내달은 아이를
홍제동 비탈길 검은 가지의 감꽃들이
환히 비춘다

 

내가 잠시 우주의 저녁이었을 때
한 숨 한 숨
거닐었던 숨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고
내가 다시 바다의 새벽이었을 때
한 눈 한 눈
몸 비벼 만든 종소리들이 아침을 이끌었듯이

 

슬그머니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면
아내의 오월 한복판엔 잎 푸른 감나무가 자라
지극한 우주가 감씨마냥 잠기고

 

손끝에 타오르는 환한 길 하나

 

 

-범부채가 길을 가는 법/안상학-

 

범부채는 한 해에 한 걸음씩 길을 간다

 

봄내 다리를 키우고

여름내 꽃을 베어 물고

가으내 씨를 여물게 한다

겨울이면 마침내 수의를 입고 벌판에 선다

겨우내

숱한 칼바람에 걸음을 익히고

씨방을 열어 꽃씨를 얼린다

때로 눈을 뒤집어쓴 채 까만 눈망울들 굳세게 한다

 

그리하여 입춘 지나 우수 어디쯤

비에 젖으며 바람에 일렁이며

발목에 힘 빼고 몸 풀어

쓰러진다 온몸으로 쓰러진다

키만큼 한 걸음 옮긴 곳에 머리 풀고 씨를 묻는다

 

발 달린 짐승이라 해서 인간이라 해서

이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범부채의 일생, 꼭 그럴 것이다

 

범부채는 한 해에 딱 한 걸음씩 길을 간다

 

 

-물골 찾아가는 길 1/배인환- 


진악산 어딘가에 물골이 있다는데
어딘지 몰라
그저 신화에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신화의 물골을
기어이 찾고 싶은 것일까?

 

비가 안 와
가뭄이 계속되면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들,
읍내 사람들, 심지어 면에서 온 사람들조차
몰골에 뫼를 써서 그렇다고
뫼를 파내야 된다고
몰골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야 된다고
법석을 떨었다.

 

기우제야 사람이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에
세계 도처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이상하게 비가 내렸다.
가물던 하늘이 쨍하고 깨져
소나기가 억수로 내려
덩실덩실 춤을 춘다.

 

소나기에 묻어오는 흙 향기
비를 기다리던 농부들만이 맡을 수 있는 경지
누가 감히 넘보겠느냐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이 희한한 현상에
그만 어리벙벙해졌다

 

 

-나, 가는 길/장이엽-

 

폭설이 잦았던 겨우내
詩人과 是認사이에서
애간장을 태우다가
며칠 동안 血便을 보고 말았다
처음부터 꼼수 따위는 없었다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곰이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견뎠다는 신화가 떠올랐던 건
詩集食口로 살려거든
눈 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 입 다물고 삼 년
엎드려 정진하라는 말씀이었던 것.

오감은 깨어 있었으되
온 마음으로 더듬지 못했던 것인데

입이 성하면
손이 게을러지고
눈이 밝으면
귀가 어두워지기 마련

동굴에서 살아남는 물고기가 되기 위해
눈을 찌르리라
허공을 가르는 새가 되기 위해
뼈를 비우리라

나가는 길은 없다
오직
나, 가는 길이 있을 뿐!

 

 

-내 몸 밖의 길/이나명- 

 

손금 같은 길을 내며

지렁이 한 마리 죽어라 배밀이하고 있다

 

길은 아직 한참인가

기다리다 지친 내 몸이 오그렸다 펴놓은

펴놓은 만큼 길어진 길바닥 위

바람의 손목을 잡고 막무가내 뛰쳐나온

내 몸 밖의 길

있는 힘껏 몸 늘여 기어가는 지렁이 붉은 몸을 본다

 

지금껏 걸어온 내 삶의 끈적한 자국을 본다

저 뜨거운 몸의 길

 

 

-나무들이 길을 지운다/이나명- 

 

땀을  닦으며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산 벼랑 밑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슬한 벼랑 밑으로 새끼줄 같은 오솔길들이 여럿

갈라져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때 내가 갔던 오솔길은 어디쯤인지

나무들은 두 손 높이 들어 무어라 무어라 소리치고

발 빠른 계절은 발소리도 없이 내 앞을 지나갔다

힘에 부친 내가 큰 곰바위에 등 기대고 쉬는 사이

속이 타는지 산은 마른기침 컹컹대고

나무들은 이미 등짐을 풀어놓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수북수북 내 발등을 덮고 사방 길들이

메워지고 있었다

오솔길은 지워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지워진 길들이 내 발목을 휘청거리게 했다

나는 그곳에 오르기 위하여 나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무들이 애써 지워놓은 길을, 내가 다시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황동규- 

 
1
오래 벼른 일,
만보(萬步)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
추억 엮기도 아닌
혼자 그냥 걷기!

오랜만에 냄새나는 집들을 벗어나니
길이 어눌해지고
이른 가을 풀들이 내 머리칼처럼
붉은 흙의 취혼(醉魂)을 반쯤 벗기고 있구나.
흙의 혼만을 골라 밟고 간다.
길이 속삭인다.
계속 가요,
길은 가고 있어요.
보이는 길은 가는 길이 멈춘 자리일 뿐
가는 것 안 보이게 길은 가고 있어요.

혼자임이 환해질 때가 있다.

 

2
바람 잘 통하는 한적한 곳이
하늘과 가깝다고는 얘기 않겠다.

 

3
등성이 오르다가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을 지나친다.
이름을 모르다니?
산수유겠지.
산수유, 저 나무의 황홀한 보석들,
저걸 어떻게 다 꿰지?
꿰서 어디 걸지?
보석 탐하며 걷다 미끄러져
사람의 삶 한 토막이 길 위에 눕는다.
삶의 토막들이 줄지어 누워 있어도
연결되지 않고 서로 부를 때가 있지.
누운 김에 다음 토막을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옷의 흙의 털며 일어난다.
 
4
늙었다고 생각하면 길이 덜 미끄러워진다, 조심조심.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향해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방금 빨간 열매를 쪼러 온 허름한 새의 흰 꽁지에는
열매를 쪼는 기쁨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젊은 삶이라는 헛꿈이 사라지면
달리 늙음과 죽음이란 없다.
소리꾼에겐 마지막 소리가
대목(大木)에겐 마지막 집이 잡혀 있을 뿐.
사람은 길을 가거나 길 위에 넘어져
거기가 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머리 위 나뭇가지들이 레이스 친 둥근 하늘을 만들고
돌고래 구름이 헤엄쳐 가고
마음속이 아기자기해진다.
사람 하나가 어느샌가 뒤로 와 스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바쁜 사람,
메뚜기들이 바지에 달라붙는다.

샘이 잦아들고 있는 밭귀에서 발을 멈춘다.
물이 흐르지못하고
땅에 잦아드는 것을 보면
주위가 온통 젖다 마는 것을 보면
누군가 가다 말고 주저앉는 모습,
가지 못하면 자지러드는 것이다.
주위를 한참 적시고 마는 것이다.
 
5
길 위에 멈추지 말라.
사람들의 눈을 적시지 말라.
그냥 길이 아닌
가는 길이 되라.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
임제는 이 길만큼 좁은 호타(?) 물가에서
길이 되라고 할하고
채 못 되었다고 할하고
그만 길이 다 되었다고 할했다.
임제여 임제여,
그대와, 내가 읽는 『임제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둘 다 같다는 손쉬운 답은 말라.
땅이 만드는 풀의 열기
나뭇가지의 싱싱한 냄새
살아 있는 잎들의 서로 무늬 다른 살랑거림.
시인과 그의 시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어느 것이 진품인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 한편에 가볍게 걸려
빙그레 웃는 낮달.
공들여 빚은 것과 빚은 사람 다 진품이라.
시인은 시가 타는 심지,
허나 촛농이 없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
어느 순간 한 삶의 초가 일시에 촛농이 된다면?
할하라,
할하라, 아직 꺼지지 않은 심지를 향해.
 
6
무너진 사당 앞
나뭇가지에서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와
그 옆 나무 둥치 구멍에 숨어 있는
나무 결 빼어닮은 올빼미를 만난다.
올빼미는 눈을 감고 있지만
곤두세운 촉각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들에게 고개 끄덕이며 사람의말로 인사한다.
'안녕하신가?'
다람쥐는 움직이던 목젖을 순간 멈추어 인사를 받고
올빼미는 몸을 조금 숙였다 편다.
다람쥐도 올빼미도
팽팽한 삶 속에 탱탱히 가고 있는 자들.

조금 걷다 뒤돌아보니
다람쥐의 목젖도 올빼미의 촉각도 다 그대로 있다.
내 삶이 어느 날 그만 손놓고 막을 내린다해도
탱탱히 제 길 가고 있을 촉각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7
이제 길이
다시 집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양돈장이 나타나고
버려둔 밭이 나타나고
메마른 검은 사내가 나타나고
서로 인사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고 있는 길에 물든 눈으로
도시 상공에 한창 타고 있는 저녁놀을 본다.
잠깐, 그 무엇보다도 더 진하고 간절한,
보면 볼수록 안공(眼孔) 속이 깊어지는.
다리를 건너다 한 사내에게
무심결에 인사를 한다.
얼떨김에 그가 인사를 받는다.
모르면서 서로 주고받는 삶의 빛,
가다 보면 그 누군가 마음 슬그머니 가벼워지는 순간 있으리,
없는 빛도 탕감받는.
길의 암전(暗轉), 한 줄기 빛!
서서히 동굴 벽이 밝아지고
그림 하나가 부활한다.
한 손엔 횃불, 또 한 손엔 붓을 든 사람 하나가
큰 대(大)자로 취해 노래, 노래 부른다.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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