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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시 모음

'길'을 주제로한 시 모음 (27)

작성자돌샘이길옥|작성시간26.06.09|조회수44 목록 댓글 0

-르네상스로 가는 길/유희선-  

 

1

손바닥만한 아이 옷들이 하룻볕에 다 자란 듯

담 너머로 펄럭거린다.

 

석양은 마당가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서쪽 빨랫줄부터 매달려오는 붉은 사과들

 

초록 스웨터 여자가 아기를 업고 사과를 따고 있다.

사과를 딸 때마다 옆구리에 달린 조그만 두 발이 종처럼

흔들린다. 나무 그늘에 떠가는 동그란 빛들

 

그것은 온전한 한 컷 이미지

완벽하게 진공 포장된 순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람의 날개를 달고

일생을 아로새기는

단 몇 컷의 찰나, 바짝 마른 옷가지는 잘 개켜져

서랍 속으로 돌아간다. 어둠 속 빨랫줄에는 허공만 나부끼고

 

2

어느 화가의 정물대에서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는 어제보다 먼 길을 갔다.

양파는 그림을 버리고 내달리다 결국, 다시 양파가 되었다.

화가는 양파가 없는 양파 그림으로

불멸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르네상스에 도달한 사람,

위대한 창조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삽으로 퍼다 버려도 이 땅의 양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손으로 문지르면 지워질 것만 같은 나의 붉은 얼룩들도

결코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는다.

양파는 그림보다 걸음이 빠르다.

  

3

허공에 발을 뻗쳐본다.

양파를 먹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물렁하게 썩는 냄새 너머 르네상스로 가는 길이 있다.

 

 

-고동의 길/최영랑-


길을 허무는 방식으로 고동은 나를 허문다

 

그곳을 더듬어보면 어딘가 묻혀 있던 생활의 파편이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할퀴며 손끝에 와 닿는다
욱신거리는 순간
파도의 위안에도 통증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뒤엉켜 있는 길은 누가 누구를 의심했다는 증거, 너희가
무작정 떠난 수렁을 나도 따라가 보는데
때론 깊은 수렁이 교직 되어 있더라도 그곳을 걸어보지 않고선
그것이 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길에 우연찮게 서 있을 수도 있는 일
거기에서 한 끼의 식사를 때우고 잠시 멈춰
스스로의 발자취를 지우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면서
나선(螺線)의 길을 내면으로 소실점까지 뚫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수렁이 여전히 질척질척한 속도로 길을 붙들고 있다
그도 고집스럽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도
누군가의 빛나는 길잡이가 되었지만
그런 장소의 처음에서 보면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먼 길 가고 있는
고동의 종족(種族)들이 보인다

 

굴곡의 삶을 거느리고 출렁이는 바다는
고동의 부력으로 지상의 딱딱한 길까지도 자유롭게 한다

 

 

-용장사지 가는 길/백무산-

 

경주 남산 용장사지 가는 길

처음 갔을 땐

어둑한 길을 짐작 하나 앞세우고 지도도 없이 찾아갔다

 

두 번째부터는

못미처 계곡에서 꺾었거나 지나쳐서 모퉁이를 돌았거나

걸음이 남았거나 숨이 모자라서 헤매다 그냥 왔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더운 피가 앞선 대로 따라간 처음 사랑은 눈물도 이별도 황홀했다

이리저리 굴려본 사랑은 넘치거나 못 미쳤다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즈음에는 이미

길은 길이 아니라 통로에 불과했다

길을 가고 길을 잊어야 못 본 첫길이 두근거리며 열린다

종일 듣는 바람소리 처음 듣는 소리다

 

 

-송대 가는 길/정석균- 

    

칡꽃이 하늘로 흐드러져

사람 흔적 끊긴지 오랜

지리산 옛길 송대 가는 길

마누라 자식 데리고

칠십년도 넘었다는 무덤을 손질하던

늙은 농부는

내년에는 이 짓도 못 할지 모른다며

이 빠진 낫처럼 듬성한 이빨 사이로

주름진 웃음을 내몰았다

나무와 넝쿨이 얽힌 하늘은 저리 좁은데

가쁜 숨소리에 놀란 산비둘기 한 쌍

구구 포옹을 풀고

건너 산으로 몸을 숨긴 발그레한 한낮

사랑을 들켜버린 민망함에

바람도 저만치 비켜서서

벙긋 웃는 가을이었다

 

 

-서진암 가는 길/권경업-

 

산에 길 있네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어디인지도 모를

 

허상(虛像)의 내가

허상뿐인 나를 찾아 헤매이던 길

 

잘게 분해된 시간

빛바랜 햇살로 증발하는 오후의

느릅나무 숲, 으름 덩굴 사이로 열려 있네

 

털어버려, 그냥

훌훌 털어버리라는 허허로운 바람의 길

 

시월이 멈추어 선 산자락

내 젊은 날이 중년(中年)의 내 어깨에 손 얹으면

야윈 오솔길은 제 혼자 두런거리며 간다

아득한 그리움 지나 더 아득한 그리움으로

산 넘어 산, 그 넘어 산으로

 

백장암 뒤란 대숲을 건너, 저 - 편

잊혀진 어느 가을의 모퉁이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사람아

만남과 이별,

어제와 내일이 윤회(輪廻)할 그 길 위

네 눈빛만큼이나 한없이 투명한 하늘

아쉬운 날들의 사랑 같은 노을이 진다

 

*서진암, 백장암: 지리산 실상사 건너편에 있는 암자

 

 

-옷에 이르는 길/김옥전-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걷는 그녀는 미싱사

갈 곳은 없으나 갈 길은 멀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미싱기계 돌리면

한 땀 한 땀 발자국 따라 길이 열린다

그 길을 어린 동생들이 성큼성큼 걸어 가고

초행의 인생도 훌쩍 달려 나갔다

애꿎은 사랑이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너무 빨라 따라잡을 수 없었던 세월이

발바닥에 굳은살로 박히고

내력의 지도 같은 실금이 생겼다

실금 사이로 벌어진 틈을

허방 짚어 위태로울 때마다

반듯한 바늘 길과 일탈의 유혹 사이에서

능숙하게 보폭을 맞추던 그녀는 이제

세상 어디든

눈 감고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출발지도 종착지도 항상 그 자리

온르도 다리 부르트도록 페달을 밟는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다니고 싶던

한 자락 미련도 꼼꼼하게 밀어넣고

젊은시절, 망쳐버린 절망도 아귀 맞춰 드르륵 드르륵

박음질된 촘촘한 길을 가는 그녀

폼 나는 한 벌 옷이 코 앞이다

밀실 한 번 더 힘주어 감는다

 

 

-도솔암 가는 길/김선우- 

 

이상하다 이 길은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구부러져 있다

길을 따라 내 몸도 구부러져

두 다리에서 네 발로

온몸으로 길 위에 눕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비늘, 날랜 짐승 하나가

내 허리를 감치며 수풀로 사라지고

 

꿈이었을까

직립하던 슬픔은

 

스물아홉에 출가한 불혹의 누이가

내 전신을 스치며

동안거 든다 

 

 

-/남유정-

당신이 지나가셨다기에 흘리고 간 것이 있을까 눈여겨보며

걸었습니다 이렇게 둘레를 걸으면 언젠가 중심으로 향한다는

것을 믿었지요 나뭇잎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새들의 날갯짓

구절초 향기를 따라 숲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이 이 길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셨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어깨에 가만히 내려

앉은 단풍잎 한 장, 당신도 마침내 붉게 물든 마음 한 잎을

보여준 거라 믿어요 당신이 귀를 씻으며 지났을 물소리

해질녘 당신이 마음을 뉘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바위

어느 생을 당신이 또 바람처럼 걸어가신다면 나는 붉디붉은

한 장 나뭇잎으로 바람소리를 담을 수밖에 없겠지요

 

 

-길/이준규-

 

  이 길은 사라지는 길이다. 그래야 한다. 나는 이 길을 갔다가 돌아올 것이다. 그래야 했다. 영영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길의 모퉁이에서 당신을 만나기도 했다. 당신은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 더는 다른 곳을 찾지 말라

고 했다. 나는 조금 웃었다. 내가 조금 웃을 때 당신은 조금 울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누워 묽은 죽만 먹었다. 입맛이 없다

고 했다. 당신은 저 바위에서 조금 쉬었다 가자고 했다. 나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당신은 깊은 눈으로 깊은 숲을 바라보았

다. 꾀꼬리가 울었다. 박새가 날았다. 당신은 이 길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돌을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은 무

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이제 당신은 없고 나는 이 길을 다시 간다. 이 길에는 시간이 없다.


  당신은 길이 끝나는 곳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앉아 있었다. 때론 뒷짐을 지고 서 있기도 했고 때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미소 짓기도 했다. 나는 저곳이 좋다고 했고 저곳도 좋다고 했다. 당신은 내게 천천히 마시라고 했다. 당신은 길모퉁이에서

문득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과 동행하기도 했고 그 여인이 내 마음에 드느냐고도 했다. 당

신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여인과 나는 당신을 기다리며 숲 속을 배회했다.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이 있던 자리

에 여인과 함께 가보기도 했다. 가서 돌탑 위에 돌 하나를 올리며 웃기도 했다. 당신의 부재는 우리를 떠돌게 했다. 우리는

행복했고 이제 우리는 당신의 숲에서 나오지 못한다. 당신의 부재가 우리를 침묵하게 했다.

 

 

-박사로 가는 길/류 근- 
 
교수가 될 어림도 미래도 없으면서
학교라도 안 가면 술집 귀신이나 될 터인데 싶어
또 비틀비틀 박사 들으러 간다
강의실에 앉으면 비로소 숙취가 좀 헹궈지는 것이
타고 난 박사 체질인가 싶어 싱겁다가도
남 몰래 창 밖 구름과 잎사귀나 훔쳐보고 있는 퇴행을 보면
아, 갈 데 없는 바깥 체질이구나 싶어 곧 안심이 된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느라
정거장이 지나가고 작년의 나무가 더 자라고
담쟁이가 진짜로 담을 넘는 소식에 멈춰 있지 못 하였다
남편 있는 여자와 옛날 애인들의 소식이 간간이 그리웠을 뿐
술집 너머의 연애 같은 것에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었다
박사가 깊어질수록 뼛속의 시가 가벼워져서
나는 자주 강물까지 날아가 내 하얀 발목을 베고 눕고
누워서 어떤 전생을 배신해 버릴까 궁구하였다
돌이켜보면 과거가 깨끗한 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몇 번의 나쁜 전생이 나를 여기까지 엎질러 놓았을 뿐이라는 걸
에필로그처럼 읽는 날은 즐거웠다 뻔한 것은
얼마나 느리고 안락한가 남자가 원해서 거기 털을 밀어주었다는
남쪽 후배가 내미는 술잔은 따뜻하고 나는 사막과
머리 두 개 달린 염소와 주인 잃은 소녀가 통정하는 소설을
박사로 가는 길에 깔아두면 좋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사는 멀고 내 구두엔 편자를 박지 않았으니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열망과 맹목 같은 것도 쉽게 전생이 되고
가슴을 흔드는 구름과 잎사귀는 늘 바깥에 있고
나는 이제 구만 구천 년째 마지막 학기
술집 건너 다시 비틀거리는 내생 저쪽에
박사로 가는 길이 뻔히 보인다

 

 

-神의 가슴길/이성선-

 

 인도로 떠날 때는 속으로 중얼거렸네. 거기서 죽고

싶다고. 달 뜨는 갠지스강을 베고 눕거나 사막의

바람 속 모래 위에 지쳐 쓰러져 까마귀 울음소리

들으며 설산을 바라보고 눈을 감자고

 

  짜이푸르*에서 이른 새벽길을 떠나려고 밝아오는
거리를 나섰을 때 발 앞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졌네.

낡은 천조각 하나에 몸을 가린 채로 한기 속에

웅크리고 자고 있었네

 

  가끔 드러난 얼굴이 땅빛을 너무 닮아서 지나다
모르고 밟을 뻔했네. 올려다보는 눈빛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섬? 숨이 막혔네. 은은히 웃고 있는

눈동자 속의 그러나 아아, 텅 비어 있었네. 얼굴도

몸도 텅 비었네

 

  희미한 안개 속에 묻힌 그들은 벌레 같았네.

이슬젖은 꽃 같았네. 쓰러진 주검 같고 주검처럼

아무것도 아닌 지푸라기보다 못한 無였네

 

  텅 빈 눈과 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려워져서,
이 한없이 깊은 불랙홀, 무 안에 빠질 것 같아서

얼른 지나쳐 자리를 떠났네. 無에 몸 씻으러 여기 온

내가. 神의 가슴길을 찾아온 내가. 아아

 

* 짜이푸르: 아그라 서쪽에 위치한 도시. 구시가지가 모두 분홍색집들로 칠해져 있어

<핑크 시티>라고도 불린다.

 

 

-낙타-도선사 가는 길 20/한승원- 

 

살아가는 일 모두가 비지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 중노동이었다

 

돈황의 모래산 밑에서 내가 중국돈 10원 주고 탄 낙타

고개를 외틀어 나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잘 보아라 내가 네 전생의 모습이다

 

그날 밤 꿈에 나는 낙타가 되어 있었고

전날 내가 탄 그 낙타는 사람이 되어 낙타인 나를 타고 있었다

 

내가 탄 그 낙타

그 모래밭에 그냥 두고 왔는데

내 서재에 낙타 한 마리

부지런히 땀 뻘뻘 흘리며 사람들을 실어나르곤 한다

모래산을 타넘는다

 

그 낙타 고삐 끊고 연꽃바다로 도망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그 바다는 멀고 먼 사막 모래산들 저쪽에 있고

 

꿈에 태우고 모래산 넘었던 그 낙타

이 새끼들아, 다음 생에서 너희들은 다시 나같이 될 것이다 하고

울부짖으며 오늘도

사람들을 싣고 불볕 사막을 건너간다.

 

 

-감물 가는 길/남대희- 

 

  1

  들꽃들이 융단을 깔았다 아지랑이가 익어 화염같이

이글거렸다

 

  옛날부터 있던 키 낮은 다리 옆으로 육중한 콘크리트

교각이 작업반장같이 서 있었다 키 낮은 다리엔 이끼

가 끼어 있고 다리 아래로 세월을 가득 실은 종이배가

흑백사진으로 지나가고, 강물은 교각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나도, 흐르다 흐르다

교각 하나 휘감고 돌고 있는 중이다

 

  2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고, 은사시잎이 손거울을 비추는

개울을 건너면 붉은 속살을 드러낸 황톳길이 뒷걸음질

을 치며 굴참나무 숲으로 몸을 숨겼다 길에는 책보따리를

등에 메고 장수하늘소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낯익은

소년이 검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언제나 그렇게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3

  감물분교는 굴참나무 숲이 끝나는 언덕 위에 올빼미같이

앉아 있었다 밤마다 별들이 담을 넘고 여린 꿈에 이슬을

뿌려주곤 했었다 분교의 양철지붕과 단칸 교실은 흔적이

없고, 터무니없이 작은 공터는 휭했다 명자는 국밥집

아지매가 되었고, 대호는 선장이 되었고, 임수는 목장

주인이 되었고 영수는 이미 둥근 동산이 되었다 나는

사평역만 찾아다니다가 기차는 놓치고 시의 꽁무니만

쫒아다니는 것이다

 

 

-좁은 길/강지혜-

 

거대한 개와 마주했다


가야 할 곳은 저 모퉁이 돌아, 지쳐 쓰러질 때를 돌아, 또 한참


개는 나를 보았고
나는 개를 읽으려 했다


적의는 없었지만 그것이 공포였다


내게 없는 결심을 가졌으므로


개가 발을 앞으로 내딛고
내가 발을 뒤로 옮기자


우리를 가둔 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공을 헛디디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개의 축축한 콧구멍이


내가 가야 할 곳을 향해 느리게 움직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손을 내젓고,


개는 나를 구하려고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서로의 성조를 해독할 수 없고


살점이 뜯기고 피가 무더기로 쏟아지도록
개와 나는


좁은 길에게 물렸다

 

 

-봄으로 가는 염색 길/전정아-   

 

염료와 섞여지는 날, 서성이는 발자국 안에 숨어버린 주소의 문패

채송화 꽃이 문지기처럼 서서, 구부정한 걸음을 멈춰 세우네.

취루 액이 닿은 듯, 눈시울 붉어진 봄비, 부엌에선 밥 푸는 소리가

유행가처럼 달그락거리네. 눈 감은 골목이 꿈속을 거닐 듯

멈춘 걸음을 뒤적이는 기억들.

어제란 다시 돌아가고 싶다가도, 머뭇거리게 되는, 소금 꽃 같은 곳이었네.

 

검은 것들은, 알록달록 태어날 새끼들 입에서, 웃음으로 태어나고

기역자로 꺾인 허리는, 밤마다 신신파스에 기대어, 통증을 밀어내곤 하네.

벼 이삭 하나에도, 공손하게 몸을 굽혔던 이유는,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표 투성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내일이란 이상기후 때문이었네.

 

빗질 따라 오르내리던 향료들, 새치 곳곳 빠짐없이 스며드네.

남은 날들에게 저당 잡힌 늙은 몸뚱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핏기 없는 나뭇가지에 부싯돌을 비비며, 부화를 기다리는 김노인

곧 펼쳐질 풍경은 아기들이 우는 마을

 

삭신 곳곳 삐걱거리던 관절을 일으켜 세우는 봄 숲

허리 편 노인 하나 숨어드네.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조연호-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에서 바늘은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걷고 길은 잡

음들로 무성했다. 시큼하거나 혹은 알싸하거나, 그늘이 나무 아래서 고두밥처럼 부글거리며 익어간다. 그 흔한 시월의 나

무를 따라 걸어도 아픈 말은 흔하지 않았다.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 세상

의 끝 어디쯤에선가 번데기들이 평화로운 진자처럼 흔들렸다. 세상을 연민하며 시계들이 일제히 뻐꾸기 소리를 울렸다.

오랫동안 모아온 흠집 난 레코드와 구겨진 수첩은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걷는다. 이별편지 위에 쓰인 내 이름이, 통합

공과금 영수증 위에 찍힌 내 이름이 서글퍼 보였다.

 

 

<돌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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